그 세대의 유대인들에게(카프카와 모리츠 골트슈타인은 벤야민보다 겨우 열 살 연상이었다), 가능했던 반역 형태가 시온주의와 공산주의였다. 그들의 아버지들이 종종 공산주의 반역보다 시온주의 반역을 더신랄하게 비난했다는 것은 참작할 만하다. 양쪽 모두 가상에서 현실로의, 허위와 자기기만에서 정직한실존으로의 탈출로였다. 하지만 되돌이켜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벤야민이 처음에는 미온적으로시온주의를 시도하고 그다음에는 마찬가지로 미온적으로 공산주의를 시도했을 당시에, 두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들은 최고조의 적대감으로 서로 마주하고있었다. 공산주의자는 시온주의자를 유대인 파시스트라고 헐뜯고, 시온주의자는 젊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를 "붉은 동화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 P100
벤야민은 여러 해 동안 자신에게 두 경로 모두 일어놓고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을 고집하고 있었고, 마르크스주의에경도된 친구들, 특히 그들 중 유대인 친구들의 의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둘 중 어느 쪽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측면도그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으며, 두 경우 모두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존 상황의 비판이라는 "부정적" 요소, 부르주아적 가상과 허위로부터의 출구, 문학적이거나 학문적인 기득권층 바깥에 있는 위치였다.이처럼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 그것이 결국그를 어떤 고립과 외로움으로 이끌고 갈지 십중팔구생각해보지 않은 채 - 채택했을 때 그는 꽤 젊었다. - P101
문인들은 비록 쓰이고 인쇄된 말의 세계 안에서 살았고, 특히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직업적으로 생계를 위해 글을 쓰거나 읽어야 했던 것이 아니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권위자, 전문가, 공무원으로서 국가에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위락과 배움을 위해 사회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식층과는 달리, 문인들은 언제나 국가와 사회 양쪽 모두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 P87
벤야민이 동시대 저자들 가운데서 프루스트 다음으로 카프카와 가장 가까운 개인적 친연성을 느꼈다.고 말할 때, 숄렘은 확실히 옳다. 그리고 "[카프카의]생산물에 대한 이해는, 다른 것도 있겠지만, 카프카가 실패자였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어"라고 썼을 때,벤야민은 틀림없이 자신의 작업의 "폐허 내지는 재앙의 현장"을 생각했다. - P63
텍스트 자체를 주시할 경우, 나는 두 가지에 눈길이 갔다. 하나는 아렌트가 벤야민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확인하고 있는 은유적 내지는 시적인 사고이며,다른 하나는 아렌트가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는 벤야민의 위치다.이 "위치"라는 단어는 발터 벤야민」에서 적지 않은 빈도로 등장한다. 벤야민의 운명과 긴밀하게 얽힌 그 위치는 처음에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에는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 난다. 처음에 그것은현실 감각이라고는 없는 벤야민에게 주어지지 않은어떤 현실적 위치처럼 보이다가 나중에는 누구보다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벤야민에게 주어진 비현실적인 위치로 확인된다. 처음에 벤야민은 안전한 곳을 찾아 파리를 떠나 "전투 없는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심각하게 위험했던 바로 그 몇 안 되는 장소"(39쪽)로 향했지만, 나중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시대의 가장 노출된 위치로 나아갔으며 고립이라는 충분한 대가를 치른 소수의 사람들" (108쪽)중 한 명으로 판명 난다. - P11
18세기 이후 러시아 문학의 흐름을 잘 설명해 놓았다. 까람진의 낭만주의 문학으로부터 푸시킨, 레르몬또프, 고골그리고 리얼리즘. 오블로모프, 투르게네프(니힐리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순서를 따라가며 읽는것도 좋을듯이 기회에 정리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