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비인정여행, 화가의 눈에 비친 그림같은 풍경들.






인간이 지닌 것 중에서 눈만큼 살아 있는 것은 없다. 쓸쓸하게 기댄 아(亞) 자 난간 아래서 나비 두 마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날아오른다. 그 순간 내 방의 미닫이가 열렸다. 미닫이 소리에 여자는돌연 나비에게서 나에게 눈길을 옮겼다. 시선은 독화살처럼 공기를뚫고 사정없이 내 미간에 꽂힌다. 화들짝 놀라는 사이에 하녀가 또 미닫이를 닫았다. 그 뒤로는 지극히 한가한 봄이다.
- P64

과자 접시를 들여다보니 근사한 양갱이담겨 있다. 나는 모든 과자 중에서 양갱을 가장 좋아한다. 별로 먹고싶지는 않지만 그 표면이 매끈하고 치밀한 데다 반투명하게 빛을 받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파란 빛을 띠게 이겨서 훌륭하게 다듬은 것은 옥과 납석의 잡종 같아 아무리 봐도 기분이상쾌하다. 그뿐 아니라 청자 접시에 담긴 파란 양갱은 청자 안에서 지금 바로 생겨난 것처럼 반들반들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다. 서양 과자 중에서 이토록 쾌감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크림의 빛깔은 약간 부드럽기는 해도 다소 답답하다. 젤리는 언뜻 보석처럼 보이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어 양갱만큼의 무게감이 없다. 백설탕과 우유로 오층탑을 세우는 짓은 언어도단이다. - P66

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자마자여인이 다시 지나간다. 이쪽에 엿보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자신을위해 얼마나 애달아하고 있는지 털끝만치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지나간다. 성가시게도, 딱하게도 처음부터 나 같은 사람은 거리끼지않는 모습으로 지나간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하고 생각하는 동안, 더이상 참지 못한 구름층이 지탱할 수 없는 빗줄기를 소리 없이 떨어뜨려 여인의 모습을 쓸쓸하게 막아버린다.
- P98

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백명이나 되는 인간을 같은 상자에 집어넣고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인정사정없다. 집어넣어진 인간은 모두 같은 정도의 속력으로 동일한정거장에 멈추고 그리하여 똑같이 증기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한 사람 앞에 몇 평의 지면을 주고 그 지면 안에서는 눕든 일어서는 멋대로 하라는 것이현재의 문명이다. 동시에 이 몇 평의 주위에 철책을 치고 그 밖으로는한 발짝도 나가서는 안 된다고 위협하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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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4 2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계속되는 소세키 읽기네요, 곧 전작 완독 하시겠어요. 응원~!!

그레이스 2021-09-14 22:3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scott 2021-09-15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그레이스님 오늘 집에 가면 당장 책장 뒤집어서
소세키옹 전집 맨 앞으로 옮겨 꼽을 겁니다 ㅎㅎㅎ

가을엔 소세키옹!

그레이스 2021-09-15 17:39   좋아요 1 | URL
예~
함께 공유해주시면 좋죠^^
 

낙화
유치환


뉘가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더뇨

이렇게 쟁 쟁 쟁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며 내리는 낙화

아 길이었다
손 하나 마주 잡지 못한 채
어쩌지 못한 젊음의 안타까운 입김 같은
퍼얼펄 내리는 하아얀 속을
오직 말없이 나란히 걷기만 걷기만 하던
아아 진홍 장미였던가

그리고 너는 가고
무수한 종소리 울림하는 육체 없는 낙화 속을
나만 남아 가노니

뉘가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더뇨


유치환의 <낙화>와 <그 후>의 첫페이지가 닮았다.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음의 소리인지, 동백이 떨어지는 소리가 심장소리인지...!






베갯머리를 보니 겹꽃잎동백 한 송이가 다다미 위에 떨어져 있다.
다이스케는 지난밤에 이 동백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의 귀에는 그 소리가 천장에서 고무공이 떨어지는 소리만큼 크게올렸다. 물론 밤이 깊어 주변이 고요한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듯 오른손을 심장에 얹고 늑골 끝에서 정상적으로 뛰는 맥박 소리를 확인하면서 잠이 들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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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09 17: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노트지만) 1등~!! 아침부터 멋진 시를 읽으셨네요 이 책하고 너무 잘 어울리네요 ㅜㅜ 저 이책 아주 좋더라구요 😄

그레이스 2021-09-09 17:59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읽으셨군요
저도 빨리 읽어야겠네요
책 놓고 놀고 있었는데...
다시...!

서니데이 2021-09-09 2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치환 시인은 깃발이 먼저 생각나는데, 제목이 낙화라서 조지훈이나 다른 시인의 시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그레이스님 좋은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1-09-09 21:18   좋아요 2 | URL
조지훈님 낙화도 좋아요 😀

scott 2021-09-10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그후]겹꽃잎동백 한 송이가 유치환 시인의 [낙화]로 이어지다니
깊어가는 가을 그레이스님의 소세키 옹 완독 응원 합니다!!

그레이스 2021-09-11 00: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모두 풍성한 독서로 가을을 타시길...!

희선 2021-09-10 0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후에 나온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가 나오는 부분을 보시고 유치환 시 <낙화>를 떠올리시다니... 유치환 시인은 이름은 알아도 시는 많이 모르는군요 저도 <깃발>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행복>이란 시도 있지요 그 후에는 다른 꽃도 나옵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1-09-11 00:46   좋아요 0 | URL
소리에 주목했습니다.
사무치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가을인가봐요

han22598 2021-09-10 0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왜 전 술잔이 소리없이 쏟아져내리는 것만 보이나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1-09-11 01:14   좋아요 0 | URL
^^
다들 낙화에 취하셨군요

페크pek0501 2021-09-11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뽑아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이달의 당선작, 진심 축하드립니다. ^*^

그레이스 2021-09-11 11: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내 눈앞에는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해서 거의 집정정부 시대에 끝나는 당시 유행했던 의상들을 보여 주는 일련의 판화들이 있다. 생각 없는 사람들 진정한 진지함 없이 진지한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러울 이 의상들은, 예술적이며역사적인 이중적인 성격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의상들은 종종 매우 아름답고 재치 있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모든면에서 내게 중요한 것,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의상에서 내가다시 찾아서 기쁜 것은 그 시대의 윤리와 미학이다. - P9

즉 예술의 이원성은 인간의이원성의 숙명적인 결과이다. 원한다면 영원히 존속하는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 가변적인 요소를 그 육체라고 생각해 보라. 그래서 오만하고 짓궂고 혐오감을 주기까지 하는 스탕달이 그의 오만함은 가끔 명상에 유리한 자극을 주기도 하였는데 "아름다움은 단지 행복의 약속일 뿐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진리에 가장 접근했었다. 분명 이 정의는 목표를 뛰어넘고 있다. 왜냐하면정의는 미를 행복의 무한하고 가변적인 이상에 너무 종속시키고, 너무 교묘하게 미로부터 미의 귀족적 성격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오류와 확실히 단절하였다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 P13

나는 여러분에게 그를 순수 예술가로 부르기를 원하지 않고, 그 역시 사실 스스로 귀족주의적 절제가 섞인 겸손함으로 이 명칭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나는 기꺼이 그를 댄디(dandy)라고 부를 것이고, 그렇게 부르는 데는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댄디라는 말은 인간 성격의 본질과 세계의 모든 정신 구조에 대한 섬세한 이해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댄디 본질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댄디는 무관심을 동경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보고 느끼는 이 만족할 수 없는 정열에 지배되는 G씨는 댄디즘과분명하게 구분된다. - P26

댄디는 모든 일에 흥미가 없고, 또는 정치적인 이유나 귀족적인 이유로 흥미가 없는 척한다. G씨는 흥미 잃은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는 냉소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실할 수 있는, 그 어려운 섬세한 정신의소유자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이다 예술의 대가이다. 만일 조형 예술의 상태로 집약된, 보이고 만져지는 사물들에 대한 그의 과도한 사랑이, 형이상학자의 보이지 않는 왕국을 이루는 사물들에 대하여 어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철학자란 명칭 그는철학자란 명칭 이상의 자격이 있다—을 부여할 것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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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9-07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옮기면서 독서하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
 

도입부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사, 가족관계, 종교, 관습, 심지어 전통댄스 등 알고 가야할게 많다. 그래서 좋기도 하다.
조금 속도가 더디지만, 문장이 간결하고 전달력이 있어서 잘 읽힌다. 영국식 유머와 하위의식에 흐르는 시니컬한 말투가 시선을 다음 문장으로 끌고 간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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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05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미 문학을 알기 위해 팔요한 큰 부분 같습니다. 근데 전통 댄스까지 ㅎㅎㅎ
하위의식의 시니컬한 말투 궁금합니다 ㅎㅎ
 

배롱나무
옆집에서 담장을 넘어 늘어진 그림을 이해하는 풍경
담양에는 배롱나무가 만발이다.
월요일 다녀온
‘명옥헌 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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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8-30 0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걸으면서 보니 배롱나무 나뭇가지가 옆으로 퍼진 것도 있고 곧은 것도 있더군요 그래도 같은 나무 맞겠지요 우연히 다른 분 서재에서 시와 명옥헌 이야기를 봤습니다 바로 밑에 주소예요

https://blog.aladin.co.kr/sani031/12900722

배롱나무뿐 아니라 연꽃도 예쁘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08-30 05:20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여기 장소가 유명한가봐요
막내가 죽녹원 가고 싶다고해서 담양 갔다가 소쇄원과 여기 들렸어요.

저는 연꽃보다 수련을 더 좋아해서 ...
배롱 나무 수형에 더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21-08-31 23:41   좋아요 1 | URL
연꽃과 수련 구별 못했던 것 같습니다(거의 연꽃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다행하게도 그레이스 님 사진속 꽃은 연꽃이었네요 수련은 밤에 꽃이 접히는가 봅니다 모네가 수련 그린 게 생각나네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