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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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양은 순오기를 잘 안다. 나도 웬디양을 그만큼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작년 6월 내 생일엔 최규석만화 '대한민국 원주민'을 선물해서, 모레 최규석작가 초청강연회를 갖는 인연까지 만들어 준 일등공신이다. 올해는 '순오기님이 좋아할 거 같아서'라며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을 보내줬다. 그런데, '내가 훔친 여름'이라는 제목만 보곤 내용도 모르면서 도둑이 제발 저린 일이라도 있는지, 손에 잡기까지 장장 4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어제 드디어 이 책을 읽었다. 오후부터 밤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책만 읽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역시 웬디양은 나를 잘 안다. 아니 나의 취향을 정확히 아는 것 같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책은 추리소설도 아니면서 정말 추리소설을 읽듯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손에서 내려 놓을 수 없었다. 내가 훔친 여름과 60년대식, 두 편 다 작품의 결말을 보기 전까지 손에서 내려 놓지 못하도록 김승옥의 필력은 대단했다. 김훈이 '바다의 기별'에 쓴 것처럼, 김훈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김승옥이 등장했을 때 '졌다'라고 했다는 말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내가 훔친 여름'은 서울대 문리대를 다니다 주임교수의 심부름 돈 2만원을 제맘대로 쓰고 고향으로 도망쳐 온 이창수와 서울법대 뱃지를 달고 온 중학교 친구 장영일, 두 청년의 무작정 여행에 동참하며 한여름의 해프닝에 몰입됐다. 기차에서 만난 이화여대 뺏지를 단 강봉순과 왜호박 같이 생겼다는 여자와 다시 여수에서 만나는 인연은 사건의 밀도를 높인다. 가짜 서울대생이 유행이었던 60년대 풍경을 희화적으로 그렸지만, 머리 좋은 녀석들이 벌이는 촌극은 젊은 날의 치기로 흘려버리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년원에 갔다왔다는 영일은 예서제서 주워들은 것으로 법대생 노릇을 하면서도 당당하다, 강동우 일가가 추구하는 것도 손가락질 하기엔 우리도 떳떳하지 못하다. 젊은날의 회고록 같은 내가 훔친 여름, 아니 그들이 훔친 여름은 무엇이었을까? 놀라워라!
난, 네가 훔친 여름을 알고 있다.^^ 흠, 나는 지난 여름 무엇을 훔쳤을까?

'60년대식'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작정한 김도인의 이야기다. 도인은 시대가 답답하여 견딜 수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기가 죽으려 한다며, 신문사에 유서를 보낸다. 하지만 신문사는 유서를 싣지 않았고 도인은 자기의 죽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게 억울해 죽음을 하루 늦춘다. 짐을 정리하면서 친구나 고향집으로 보내기도 난감한 애물단지가 된 책을 물려줄 아들이 있었으면, 간절히 소원하는 대목은 공감이 되었다.^^ 수첩을 정리하다 8년 전 하숙집 딸 애경과 각별한 사이였지만 도망쳐 온 죄를 용서받고자 찾아나선다. 애경과 엮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여곡절 많은 인생의 단면을 경험한다. 결혼상담소를 통한 맞선으로 만난 애경의 정체를 알면서도 사랑하게 된 화학기사, 그는 사람들이 정작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은 배고픈 고향이었고 참담한 과거였다.  하지만 그보다 세상을 살아갈 열정을 잃어버린 것이 진짜 문제였음을 깨닫는다. 중동 특수 이전의 베트남 특수와, 책을 처분하려던 헌책방의 이야기들은 시대상을 가늠하기에 좋았다. 

1967년과 68년에 발표된 두 작품은 당시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고민하며 어떻게 청춘을 보냈는지 알게 한다. 80년 집권한 군부세력의 광주 만행을 보며 집필의욕을 상실하고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먼지의 방'을 15회로 중단했다는 그분의 성품도 짐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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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0-20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던가 그제던가, 이 책이 중고샵에 있었는데 건졌어야 했는데 놓쳤군요! 순오기님의 리뷰를 그 전에 보았으면 옳커니~하고 잡았을 거예요.^^

순오기 2009-10-21 01:39   좋아요 0 | URL
다시 기회가 오면 확 잡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꿈꾸는섬 2009-10-2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작가는 글쓰는 사람들의 본이에요. 글쓰기 연습으로 김승옥님 글을 열심히 옮겨 쓴다고 들었어요. 이 작품은 안 읽어보았지만 순오기님 리뷰대로 참 좋았을 것 같아요.

순오기 2009-10-21 01:40   좋아요 0 | URL
그런다고 하네요. 해설을 쓰신 분은 무진기행을 100번 읽었다고 하네요.

라로 2009-10-21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 한번 멋지다요!!!ㅎㅎ
전 김승옥님의 글을 무진기행만 읽었는데 이렇게 좋다고 하실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기필코!!ㅎㅎㅎ

순오기 2009-10-21 01:41   좋아요 0 | URL
흐흐~ 제목 멋지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 읽고나서 리뷰를 쓰기 전에 제목부터 떠올랐어요.ㅋㅋ

같은하늘 2009-10-21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순오기님 페이퍼에 떠다니던 바로 그책...
드디어 읽으셨군요.^^ 그리고 저도 찜하고 갑니다.

순오기 2009-10-21 11:57   좋아요 0 | URL
헤헤~ 오랫동안 둥둥 떠다녔죠.^^

몽당연필 2009-12-04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리뷰를 읽으면 이 책을 안 읽을 수 없겠는걸요. ^^
장바구니로 직행합니다. ㅋㅋ

순오기 2009-12-04 07:11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굉장히 반한 작품이라 침을 튀겼나요?ㅋㅋ
2010년 독서회 토론도서로 찜해뒀어요.^^

몽당연필 2010-09-05 13:36   좋아요 0 | URL
도서관 자원봉사 회원들과 독서모임을 꾸리려고 합니다.
순오기님에게서 많은 비법을 전수받고 싶어요. ^^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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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혜윤씨가 내로라 하는 독서가들을 만나 그들과 자신이 경험한 책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덕분에 진정한 독서가들이 만난 훌륭한 책을 알아가는 것도 즐거웠다. 대부분 내가 못 읽은 책들이라 기죽기도 했지만,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며 찾아 읽는 것 또한 독서의 맛이 아니겠는가 위로하며 오늘도 독서중!^^ 책 순서에 관계없이 내 맘대로 골라 읽었다.

진중권은 어려서 읽은 마크 트웨인의 짓궃은 유머 감각을 배우게 되어 지금도 짓궃은 장난을 잘 친다고 한다.^^ 베를린 자유대학 시절, 개가식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펼쳐보면 다른 책의 인용으로 이뤄진 게 책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독창성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자기 식으로 배치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고. 정말 그렇다, 내가 읽은 책도 소설이나 에세이 등 장르를 막론하고 다른 책을 인용하지 않은 걸 못 본거 같다. 진중권은 발터 벤야민의 ’베를린의 어린 시절’과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등을 꼽았다.

공지영은 살기 위해 책을 읽었다는 말에 그녀의 삶을 아는 독자라면 공감할 듯. 안셀름 그륀 신부의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한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깨어나십시오’도 그녀가 꼽는 책이다. 공지영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딸 위녕이 읽으면 좋은 책을 줄줄이 소개했기 때문에, 이미 다 아는 듯이 생각됐다.

’엄마를 부탁해’로 나를 울렸던 신경숙, 그녀는 외딴방에서 자신의 삶을 풀어낸 것처럼 공장에서 일하며 산업체 야간학교를 다녔다. 어릴때 책을 읽으면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지 않아서 더욱 책 속에 빠졌고, 고등학교에서 만난 국어선생님이 소설 써 보라는 말씀에 고무되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공장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했다니 놀랍다.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에 매료되었고, 자신을 낮추고 싶을 땐 ’스콧 니어링 평전’을 읽는다고 한다.

우생순의 감독 임순례는 고2때 꼴등에서 두번째인 자기 성적을 보고 놀라서 학교를 그만두고, 2년간 빈둥거리며 오직 책만 읽었다고 한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나서 고졸 자격 검정고시를 보고 프랑스 영화와 문학에 빠져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따르다 보니 영화감독이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알았다’ 한마디로 모든 걸 감당해준 오빠가 있었기에 유학을 떠난 것도 부럽다. 공선옥의 소설을 좋아해 그녀 가까이 곡성으로 이사가 살기도 했고,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과 ’동행’을 좋아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온 이진경, 우리 아들이 가고 싶은 학교와 학과라 관심이 갔다. 그는 어려선 읽을 책이 없었고 중2때 친구 집에 가서 읽었다고 한다. 그는 카프카를 좋아했고, 감옥에서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를 통해 푸코를 알았단다. 우리 아들과 다르게 수학을 좋아하고 잘했다는데, 수능 보기 한 달 전 팔을 베고 잠들어 글씨를 쓸 수가 없어 시험을 망쳐 경제학과를 못가고 사회학과를 갔단다. 헐~ 대체 공부를 얼마나 잘했으면 망쳤는데도 서울대를 간 거야? 수학책을 혼자 풀어보고 대학에서도 수학 강의를 듣고 ’수학의 몽상’이라는 책을 썼단다. 그가 썼다는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궁금하다. 

역사소설을 주로 쓰는 김탁환은 결핵에 걸린 열세 살에 ’절대로 뛰면 안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축구선수의 꿈을 접고 책읽는 소년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백일장에 나가 일등을 하면서 글 잘쓰는 아이가 되었지만 중학교때는 독서보다 시쓰기에 주력했다. 장정일의 시를 열심히 읽었고 비평가가 되고 싶었단다. 현실이 지리멸렬해 역사소설을 쓴다는 그도, 미친듯이 책을 읽는 사람이기에 글쟁이가 되었다는 걸 확인한 독서였다.

정이현이 어려서 읽었다는 에이브 전집 88권은 우리집에도 있는 책이다. 우리 삼남매도 에이브와 더불어 자랐다.^^ 정이현은 존 치버의 ’다리 위의 천사’를 좋아하고, 은희경은 소설을 쓸때마다 책을 사는 거로 시작하는데 쿤데라의 ’느림’을 읽으며 자신 안에 있는 이야기를 소설로 묶어낼 단서를 찾았다고 한다. 변영주감독은 어려서부터 성애를 표현한 책들을 읽었고, 나쏘메 소세키와 박완서 소설을 읽으며 현대사와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문소리는 초등학교때 부산에서 야반도주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와서도 공부 못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공부해 1등을 유지했단다. 선생님이 되려고 사범대에 갔으나 연극에 끌려 배우가 되었고,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좋아한다고. 신생 러시아의 운명에 따라 박노자의 인생도 달라졌는데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인 여자와 결혼한 귀화 한국인으로 동양고전을 한자로 읽은 게 행복하단다. 장자를 제일 좋아했고 지금도 읽고 싶은 책이란다. 

독서가들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을 얘기하는 것보다 정혜윤의 책 이야기가 비중이 많아서 좀 헷갈리기도 했지만, 누구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미친듯이 책을 읽으면 길이 보인다는 걸 발견했다. 

*정혜윤의 첫번째 책인 '침대와 책'도 봐야겠다 생각했는데, 세번째 책 '런던을 속삭여 줄게'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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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0-15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책이군요. 좋아하는 작가나 감독들의 독서 이야기, 흥미로워요.ㅎㅎ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철학의 전반을 제대로 정리한 책이 아닐까 싶어요. 똑똑한만큼 책도 쉽게 잘 쓰시죠.^^

순오기 2009-10-16 09:32   좋아요 0 | URL
작년에 이 책 사서 부산에서 이금이작가 만났을 때 선물하고 여직 못 봐서 중학교도서실에서 빌려왔는데 다시 살까 생각중이에요.^^
철학고 굴뚝청소부~ 아이들과 같이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세상엔 정말 똑똑한 사람도 많아요.^^

qualia 2009-10-1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순오기 님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정말 엄청난 열정이십니다. 부럽습니다.

순오기 2009-10-16 09:33   좋아요 0 | URL
흐흐~ 존경씩이나요? 21일까지 빛고을독서마라톤 참여하느라 열심을 내고 있어요.^^

같은하늘 2009-10-1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바쁘신 분들이 책은 더욱 많이 읽으시는것 같아요.^^
이 책을 보니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이 생각나는군요.

순오기 2009-10-16 09:34   좋아요 0 | URL
이 책 5일에 걸쳐 한두 명씩 읽었어요.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우리도 꼽아보면 있겠죠~ ^^

마노아 2009-10-16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자세한 소개 고마워요. 책 제목에 이런 의미가 있었군요. 임순례 감독이 제일 인상적이에요.

순오기 2009-10-16 10:19   좋아요 0 | URL
5일에 걸쳐 읽어서 마라톤에 500자씩 남기다 보니 꼼꼼하게 적게 됐어요.^^

2009-10-17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10-18 02:49   좋아요 0 | URL
^^감사

노이에자이트 2009-10-17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순례씨는 개고기 식용반대운동 등 생명사랑운동, 채식운동에 열심이던데 그녀가 이런 운동할 때 자양분이 된 책을 알았으면 더 좋겠어요.

순오기 2009-10-18 02:55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 임순례씨가 '우생순' 만들기 직전까지 유기견을 챙겨주고 돌봐주는 개들의 어머니 생활을 하다가 주민들의 항의도 받았다고 나오더군요.
어떻게 인간은 개의 친구가 되었는가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면서 수의사 해리엇의 책과 제일구달의 책들, 희망의 이유, 내가 사랑한 침팬지, 데이빗 로로우의 월든, 스톳 니어링 부부의 책을 다 읽었는데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읽고 채식을 하게 되었다고 126쪽에 나옵니다. 답이 되었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10-18 10:16   좋아요 0 | URL
오...답이 되었습니다.우리모두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착한 사람이 됩시다!

순오기 2009-10-19 10:12   좋아요 0 | URL
예~
'아멘'이라고 할뻔했어요.^^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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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 앤 패디먼은, 살아가면서 쌓인 책에 대한 추억을 18편의 에세이로 풀어 놓았다. 진정한 애독자라면 책에 얽힌 이야기가 많아서 풀어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쓴 책리뷰와 이런 저런 추억을 풀어내면 회갑기념으로 낼만하지 않을까? 아마도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도 없고 팔리지는 않을테니까, 자비출판을 해야겠지만.^^

앤 패디먼 부부는 결혼한지 5년 만에 각자 소장했던 책을 드디어 결혼시킨다. 그러니까 서재의 결혼으로 같은 책을 두 권씩 둘 필요가 없으니 누구의 책을 소장하고 하나는 방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는 책을 정리하면서 책에 얽힌 추억과 사연을 되짚어 보기도 한다. 수많은 책들이 등장하는데 내가 읽은 책이거나 아는 책이면 눈이 반짝였고, 내게 듣보잡인 책은 뭔 말인지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단 얘기다.^^ 책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적었던 헌사들과 같은 취향의 책을 발견할 때의 기쁨도 나온다.  

우리 부부는 결혼 전 가지고 있던 책을 나중에 옥탑방으로 올렸더니 아주 누렇게 변해서 10년 전 폐기 처분하니 아이들 피자 한 판 값이 나왔다. 책도 사람과 더불어 숨쉬는 공간에 두어야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두면 못쓰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이 소장했던 '창작과 비평'은 가끔 옥탑방에 올라가 소파에 뒹굴거리며 골라 읽는 재미가 좋았는데 아깝다.ㅜㅜ 지금은 거실 천정까지 채운 책장에 포위당해 살지만, 마을도서관을 자처하며 이웃에게 책 빌려주는 또 하나의 기쁨을 맛보며 산다.  

앤 패디먼은 책을 좋아하던 부모의 영향으로 책을 좋아했고, 그래서 작가가 되었으며 자녀도 책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웃에서 아이가 책을 안 읽는다고 한숨 쉬는 사람을 보면, 그 부모가 책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에 절대 공감했다. 내가 주장하는 것도 '책읽는 부모가 책읽는 아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부모님과 오빠, 가족 모두가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보아도 오자나 탈자는 물론이고 어법에 안 맞는 것을 고쳐주는 '병' 있다는 얘기에 쓰러졌다. 우리집도 내가 활자화된 것이나 방송을 보면서 꼭 잘못된 걸 잡아내서 우리 애들한테 원망도 들었다. "엄마 때문에 우리도 오자나 잘못 말하는 게 자꾸 걸리잖아!" 하면서 투덜대기도 한다.ㅋㅋ  

아버지의 서가에 꽃혀 있던 '파니 힐'이라는 책을 통해 섹스에 대해 알았고, 아버지도 그 책을 여러번 본 듯했다는 말에 웃었다. 나도 책을 읽으며 성적 묘사가 리얼한 부분은 되돌아가 읽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좀 심한 성적 표현이 나와도 우리 애들이 보는 걸 모른척 놔둔다. 문학적으로 승화된 성적 표현을 보는 게 그래도 최고 나을 거 같으니까.^^  책에 얽힌 갖가지 추억과 에피소드에 공감하고 독서의 중요성을 편안하게 얘기해서 읽기가 편하다. '책에 대한 책 이야기'에서도 책을 소장하기 위한 관심과 노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찰스 램, 로알드 달, 셰익스피어, 베아트리스 포터 등 내가 아는 작가들이 인용돼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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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청소년문학 15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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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총리 임명 동의안을 처리하며 어떤 인간이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을 인용하더라. 스스로 생각해도 더러운 정치인들이 감히 끌어다 쓸 말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들이 모인 곳이 정치판이라 이미 그곳을 기웃거리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작가와 독자들이 사는 세상은, 하루 세끼 밥 먹고 사는 게 힘들어 정말 죽고 싶을만큼 암울한 곳이다. 청소년들도 참담한 현실에서 비켜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여기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은 공선옥 작가가 따뜻한 시선으로 잡아 올린 청소년의 눈물겨운 현실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태어난 가정의 조건들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그들도 고달프다.  

한때 멋진 미래를 설계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빛나는 삶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현실은 꽃같은 청춘을 흘려보내고, 처음부터 착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살아가기가 버겁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기더라.(101쪽)
술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취하려고 마신다는 것을. 술에 취하면 겁이 없어진다. 말하자면 어른들은 세상 사는 게 겁나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104쪽)
 
   

두 곳의 알바 경험으로도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그런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가려면 순수성은 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여기 등장한 나, 연주와 민수, 승애와 건용이로 내세워진 청소년들은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다. "나는 죽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면서... 

신산한 삶을 그려냈던 '명랑한 밤길'을 볼때도 편치 않았지만,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한 '명랑한 밤길' 같아서 "가슴에서 버저가 울린다.'고 하면 굳이 가슴이 아프다고 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리하다.(83쪽)"는 민수처럼 내 가슴에서도 찌잉 찌잉 버저가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따뜻한 마무리에 청소년소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어른들은 청소년 시기의 감성들을 야금야금 빼먹으며 늙어가는 것만 같다."는 작가의 말에 동감하는 어른들과, 바로 지금 나중에 빼먹고 살 감성들을 비축할 청소년 들이 보면 좋을 책이다. 공선옥 작가를 알아가는 청소년을 위한 입문서 같은 책으로 '역시 공선옥이다' 추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공선옥 작가는 '명랑한 밤길'과 '나는 죽지 않겠다'로 2009년 만해문학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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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9-30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가끔 청소년소설을 보는데 작가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순오기 2009-09-30 04:39   좋아요 0 | URL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내 청소년기에 못 읽었던 결핍을 보상해주는 것 같아서 좋아요.^^

세실 2009-10-0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도 읽어봐야 겠군요. 감사합니다^*^

순오기 2009-10-01 09:59   좋아요 0 | URL
보림이가 읽어도 좋을 듯...
 
오이대왕 사계절 1318 문고 7
크리스티네 뇌스트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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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와 절판된 구본으로 읽었는데 신판 표지가 훨씬 낫다. 사계절 1318문고로 독일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외국소설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지?' 하는 감탄을 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상상의 스케일은 크지 않지만 우리 지하실에 누군가 살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만든다. 제목을 보곤 '오이대왕'이 철권통치라도 하는가 생각했는데... ^^

책 첫머리에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에 엄청 공감했다. 사실은 누나가 글을 쓰기로 했는데, 분홍색 종이와 타자기에 넣을 녹색 리본을 사왔을 뿐, 글을 어떻게 쓸지 구상하느라 한 줄도 못 써다는 이야기. 우리가 흔히 하는 경험이지만, 너무 잘 하려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글쓰는 일은 정말이지 잘 쓰려는 의욕만 앞섰다가 흐지부지 되니까.^^ 

결국 짜임새 있는 글 구성을 하지 못한 누나를 제쳐두고, 열네 살 중학교 1학년인 볼프강이 작문의 원칙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썼다는데 술술 읽히고 재미있다. 자기 집에 일어났던 일을 소개하는 체험글이라 쉽게 썼을거 같긴 하다.^^ 뇌졸중으로 입은 삐둘어졌지만 지혜로운 말씀은 많이 한다는 일흔 한 살의 할아버지, 마흔 살 동갑인 엄마 아빠, 고등학교 1학년 누나 마르티나, 막내둥이 닉키까지 여섯 식구가 엮어내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이야기다. 

부활절 날 아침에 '쿵'소리와 함께 부엌에 등장한 오이대왕, 밀가루로 반죽한 것처럼 물컹거리는 초록색 오이 모양에 왕관을 쓰고 스스로 '짐'이라 부르는 '트레페리덴 왕조의 구미-오리 2세 대왕'이다. 지하실에 살았는데 구미-오리들의 반란으로 쫒겨났다면서 정치적 망명을 선언했다. 흰 장갑 낀 손에 입맞추고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라는 무례한 망명객에 다들 눈살을 찌푸리는데 아버지 호겔만씨와 막내 닉키만 환영한다. 아버지는 신문사에 특종을 제보해 한 밑천 건지려는 심사였지만 사진에 찍히지 않는 오이대왕을 증명할 길이 없다.  

좌충우돌, 오이대왕과 호겔만씨 가족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교활하고 야비한 오이대왕은 아버지 호겔만씨에게 보험회사 사장자리에 앉혀주겠다고 뻥을 치지만... 불리해지자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손수 음식을 가져다 먹기까지 한다.^^ 

   
 

"호겔만 씨 어디있어?" 오이대왕이 화를 벌컥 내며 물었다. "호겔만씨 없다." 누나가 소리쳤다. "짐 배고프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 오이 대왕이 허기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손으로 부엌 쪽을 가리켰다. "싹이 난 감자들은 싱크대 밑에 있어" 구미-오리대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짐, 직접 안한다! 짐, 안 가져온다!" "그럼, 굶는 수밖에는 없지 뭐." 내가 말했다. 하지만 오이대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기분 나쁜 얼굴로 우리 곁을 지나가 부엌에서 감자 자루를 통째로 끌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148쪽

 
   

무엇이나 맘대로 하는 오이대왕과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저항, 서로 도와가며 즐겁게 사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을만한 청소년 소설이다. 곳곳에 웃을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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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 2009-09-0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거 옛날책으로 집에 있는데~ 어렸을 때 읽었어ㅋㅋ 위에 만년샤쓰랑.

순오기 2009-09-07 14:01   좋아요 0 | URL
니가 읽은 건 메르헨시리즈였어. 6학년때 독후활동으로 그림도 그렸고, 만년샤쓰는 너 중학교 입학때 맞교환했던 웅진시리즈였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