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터 걸 푸른도서관 35
이은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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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다음에 엄마처럼 안 살거야!"
"그래, 제발 엄마처럼 살지 마라!" 

35년 전, 중학생이던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을 중학생이 된 큰딸에게 들었었다. 처음 설전이 시작됐던 초등 4학년 겨울방학엔 "엄마는 내 맘을 몰라 줘!" 하면서 큰딸이 울었고, 강도가 점점 세졌던 중.고딩 땐 모녀가 같이 울었다. 사춘기와 처음 맞딱뜨린 모녀는 서로 감당이 안됐던 거다. 무엇이든 처음은 힘들다. 둘째는 아들이라 딸과는 다른 형태의 마찰이 있었고, 중2 막내와는 서로 큰소리 날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직까진 없없다. 착한 막내로 길들여진 이유도 있겠지만 이미 둘을 겪은 엄마의 여유도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식을 여럿 키우면 엄마도 철이 드나 보다.^^ 

산뜻한 연두색 표지에 담긴 네 편의 단편을 읽으며,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이나 우리 아이들이 내게 했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화에 피시시 웃었다. 세대는 흘러도 원초적인 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그깟 행복이 뭔데? 있으나마나한 존재감 없는 애로 사는 게 이제 지겨워. 봐, 난 그렇고 그런 평범한 애야. 공부? 잘하고 싶지만 아무리 해도 안 돼. 노래, 춤, 운동, 그림? 다 그저 그래. 특별한 정신세계가 있냐고? 개나 물어가라 그래. 꿈? 열정? 내가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몰라. 고딩이 된다고 달라질 것 없어. 지겨워! 외모라도 가꿔서 시시한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아무도 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말이야.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바비를 위하여, 33쪽)

 
   

다이어트에 올인하고 연예인 빠순이로 목숨 거는 십대들, 특목고를 목표하는 부모의 욕망이 버거운 모범생, 조기유학을 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와 이방인이 되어버린 아이 등, 여중생들의 아프고 슬픈 현실과 심리를 잘 그려냈다. 우리 막내도 이 책을 읽으며 재밌게 공감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빠져 있을 땐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관찰자 입장이 되면 냉정하게 볼 수 있다. 여기 그려진 상황을 간접체험하며 질풍노도의 중학생들이 위로 받고, 자기들의 꿈과 길 찾기에 객관적 시각을 가지면 좋겠다.  

지난 10월, 최규석 만화가(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100도C)를 초청했을 때, "난 책 같은 거 안봐도 다 알아, 이 우매한 것들, 돼지같은 것들아~" 이런 생각하지요? 라는 말로 소위 '중2병' 엄청난 공감을 끌어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웃기는 짓이었는지 알게 됐고, 독서를 많이 하지 못했던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이 책은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나 질풍노도의 청소년, 특히 중2병의 여중생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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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9-12-0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딸보다는 아들 키우면서 마찰이 생겨요.
그래서 아들을 제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살아요.^^

순오기 2009-12-10 11:17   좋아요 0 | URL
하하~~ 아들을 인생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요.ㅋㅋ
하지만 조금 더 크면 아들은 엄마의 '애인'이 된답니다.^^
소나무집님~~ 힘내세요!!

루체오페르 2009-12-09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용어 잘 지은거 같습니다. 중2병...그 시절을 얼마나 잘 겪어내느냐가 참 중요한거 같습니다. 단적인 예지만, 연예인 빠돌이,빠순이로 사는 그들은 이 힘든 시대에 자신들의 미래가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나 해보고 정신차렸으면 합니다.^^;

순오기 2009-12-10 11:18   좋아요 0 | URL
중2병~ 애들은 다 아는 용어더군요.
나는 최규석강연에서 처음 들었는데...멋진 용어지요.^^
그런 시절을 지내보고 인생을 보는 눈이 깊어지면 좋지요.

메르헨 2009-12-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풍노도.......................
저는 요즘 사춘기도 아닌데 울컥울컥 해요.^^

순오기 2009-12-10 11:19   좋아요 0 | URL
질풍노도~~~~
엄마의 사춘기라는 책도 있어요.^^
선물받고 아직도 못 읽고 있지만...

같은하늘 2009-12-1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남자아이들의 심리를 다룬 이런 종류의 책은 없을까요?
요즘 아이들은 뭐든 빨라서 중학생까지 가지 않아도 문제가 심각할것 같아
걱정하는 1人...

순오기 2009-12-10 11:21   좋아요 0 | URL
흠~ 아들의 심리를 다룬 책이라~~~
고학년이 볼 책으론 창비의 '준비됐지' 여름에 봤는데 괜찮았어요.
'자위'를 소재로 했는데 이해하기에 좋았아요.^^

비로그인 2009-12-1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처럼 안 살거야'는 모든 딸들의 레파토리인것 같아요.. ㅎㅎ

순오기 2009-12-11 01:15   좋아요 0 | URL
다들 그러면서 결국 엄마처럼 산다는 게 또 숙명일지도...^^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소 알로이시오 지음, 박우택 옮김 / 책으로여는세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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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끝나고 말할 수없이 참혹한 한국, 그 춥고 배고픈 나라의 아이들 얼굴에서 사라진 웃음과 희망을 되찾아 준 파란 눈의 미국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자서전이다.  

1930년 미국 위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1957년 12월 8일 한국에 오셔서 부산교구 소속의 신부로 30여년을 봉직했다. 스물 일곱의 잘 생긴 신부님이 평생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살다가 1989년 루 게릭병을 얻어 3년을 투병하다 1992년 3월 16일 필리핀 소녀의 집에서 영면하셨다. 지극히 청빈한 삶으로 간소한 식사와 검소함이 몸에 배었고, 신자들이 살던 참혹한 천막집에서 5년이나 사셨다니 놀랍다. 혹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것들이 쌓여 몹쓸 병을 얻어 돌아가신 듯하여 안타까움이 더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고 싶어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일반인보다 좋은 환경에서 부유하게 사는 수도회 신부는 엉터리라고 생각해 선교신부를 꿈꾸었고, 그에 더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구신부가 되고 싶었다. 14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제 서품을 받고 가난한 나라 한국으로 왔다. 루벵의 원장님은 건강을 생각해 좀 더 따뜻한 태국을 권면했지만, 신학교에서 만난 한국인 신부와 평신도에게 한국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당시 한국은 이보다 더 굶주리고 가난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신부님은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쁘고 쾌활하고 뽐내지 않으며 때 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한국의 보물이라 생각했다. 

 

신부님은 기후와 음식의 적응이 어려웠는지 점점 건강이 나빠져 급성간염으로 쓰러졌다. 10개월 동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일본에서 3개월 요양도 했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가난한 한국을 위해 모금활동을 했고, 나중에 합류한 최재선 주교님과 6개월간 미국 전역을 돌며 모금했다. 함께 모금활동을 하며 문화의 차이와 언어 문제로 황당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역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돈을 축내지 않으려는 최주교님의 일화는 눈물겨웠다. 

"소 신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리고 있는데 내가 어찌 이 귀한 돈을 식당에서 쓸 수 있겠습니까? 그냥 냉장고에 있는 빵과 우유로 때웁시다."(114쪽) 

항공사에서 허용한 무게를 초과해 물게 될 24달러를 아끼기 위해 겨울 외투를 두 개나 껴입고 주머니마다 무게가 나갈 물건들을 채워 마치 우주인처럼 뒤뚱거리며 비행기에 오른 최주교님, 오늘날 종교인들에게 이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요양과 모금활동을 끝내고 1961년 12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1962년 6월, 부산 송도 성당의 본당신부로 정식 발령을 받고,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미국에서 만난 그레이샨 마이어씨의 도움으로 우편모금을 알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손수건에 수를 놓아 우편 모금 편지에 선물로 넣어 보낼 손수건 사업을 시작했다. 수를 잘 놓는 부녀자들이 천을 가져다 수를 놓아 오면 수고비를 지불했는데, 당시 공장 노동자들 월급 3천원보다 더 많은 오천원을 벌 수 있었다. 손수건 사업은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한 좋은 일거리였다. 구호사업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손수건 사업은 여자들이 수를 놓아 돈을 벌기도 했지만, 우편 모금 봉투에 손으로 주소를 쓰는 일로 2~3백명의 야간학교 여학생이나 졸업생들도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손수건 사업으로 모금한 돈은 처음엔 구호기관에 현금 지원을 했지만, 구호금을 최대한 알차고 쓸모있게 사용하기 위해 직접 구호사업을 하게 되었다. 마리아 수녀회를 조직해 훈련받은 수녀들의 책임하에 고아들을 거두어 가정을 만들고 보육원을 세웠다. 1970년 10월 25일, 부산에 무료로 운영될 구호병원을 개원해 매일 15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했다. 1982년엔 서울에 '도티기념병원'이란 무료 병원을 서울 소년의 집 안에 세웠다. 이보다 앞서 거리의 아이들을 잡아다 비참하게 수용한 희망원에서 아이들을 인수해 소년의 집과 소녀의 집을 설립했다. 이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초.중.고등학교를 세워 직업교육을 시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키워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악기 연주를 배워 소년의 현악합주단 발표회도 매년 열었고, 운동을 좋아한 아이들을 위해 축구선수단도 만들었다. 골키퍼 김병지 선수가 부산 소년의 집 고등학교 축구부 출신이란다. 사회에 나가 직장을 얻은 졸업생들은 수입의 10%를 기부해 소년의 집 운영비를 충당했고, 아이들에게도 기쁨과 희망이 되게 했다. 



신부님이 4년 9개월이나 거처했던 천막집은 악취와 추위, 연탄개스의 위험과 재래식 변소의 불편함 등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원해 감당하셨고, 온갖 사업계획서를 들고 후원금을 얻으러 왔던 사람들은 신부님의 이런 생활을 보곤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세계 기업에 버금 갈 사업 규모와 후원금을 관리하면서도 출장길엔 항상 이코노미클래스만 탔고, 한번도 아버지를 한국에 모셔다 사업성과를 자랑하지 않았다. 낮은 곳으로 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주님처럼 섬겼던 신부님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현존이라 할만한 분이셨다. 필리핀과 멕시코까지 구호사업을 펼쳤고, 마리아수녀회는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브라질과 과테말라까지 구호사업을 확장 관리하고 있다. 이 땅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신부님은 이제 천국에서 편히 안식하리라 위로를 삼는다.  

"여기 있는 형제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7절~ 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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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2-0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읽은 단순한 기쁨의 저자 피에르 신부님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셨는데 재산 포기 각서를 쓰시고 맨 몸으로 수도사가 되어 헌신적인 삶을 사셨더라고요. 보통 길이 아닌데 그같은 길을 거침 없이 가는 분들이 이렇게 있어요. 단지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정말 날개 없는 천사가 아닐까 싶어요. 소록도에서 헌신하신 수녀님들도 같이 떠오르네요.

순오기 2009-12-09 10:00   좋아요 0 | URL
단순한 기쁨은 한비야, 공지영 두 분이 추천하던데 언제 봐야지요.
이런 분들이 계셔서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겠죠.^^

메르헨 2009-12-0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올려주신 성격구절처럼...모든 일을 주께 하듯...한다면 세상이 이렇지는
않을텐데...하면서도 주변에 좋은 분들을 보면 참 괜찮은 삶이다 싶습니다.^^

순오기 2009-12-09 10:00   좋아요 0 | URL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그분께 하는 것이란 것~ 알면서도 잘 실천되지 않는 항목이에요.ㅜㅜ

같은하늘 2009-12-0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볼때마다 정말 존경스러워요.
정말로 날개 없는 천사라는 말이 딱이예요.

순오기 2009-12-09 10:01   좋아요 0 | URL
사람은 누구나 종교적 심성을 갖고 있어요. 내게 맞는 종교가 어떤 건지 아직 안 닿았을 뿐이지요.^^
우리도 누군가에겐 날개없는 천사가 될 수 있을까요?

blanca 2009-12-0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이네요...저는 임신중에 세례를 받았어요. 함세웅 신부님께요. 그 분도 너무 존경스러워서....설교를 듣다 펑펑 운 적도 있어요. 종교의 타락에 대하여 말이 많지만 그 속에서도 정말 꽃처럼 피어나는 종교인들이 있어 세상은 살 만한가 합니다. 아이들과 손잡고 찍은 사진 뭉클합니다.

순오기 2009-12-10 11:25   좋아요 0 | URL
함세웅신부님~ 존함은 익히 들었지요. 존경할만한 성직자와 종교인도 많이 있는데 우리가 잘 모르기도 하고, 안좋은 것들만 드러나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결혼전에 친구 언니한테 꽃꽂이 배우면서 성당 행사에 여러번 참여해 성당도 제겐 친숙하지요~ 시부모님과 남편은 카톨릭 신자이기도 하고요. 성당에선 설교라고 안하고 '강론'이라고 하던데...^^

blanca 2009-12-10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하십니다. 냉담중인 나이론 신자랍니다.--;

순오기 2009-12-11 00:05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냉담중이라는 말도 제가 알아 먹거든요.^^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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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3일, 고등학교 독서회의 토론도서였다. 진중권의 사통오달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들 감탄하며 읽었다고, 내게 좋은 책을 추천해줘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 그날, 김훈작가를 만나러 바로 올라가느라 이 책을 들고 상경했다가, 가방이 무거워서 큰딸에게 주고 내려왔다. 책이 없으니 리뷰 쓰기가 막막하던 차에, 뽀게러블님이 선물로 보내줘서 리뷰대회 마감날 끄적인다는 얘기다. ^^ 

엊그제 광주방송에서 '산에만 가십니까?'라는 현수막을 내걸은 현대미술관의 안타까운 소식이 나왔다. 예향에서 산다고 자부하는 시민들이 건강을 위해 무등산에만 오를 뿐, 길목에 네 개나 되는 미술관에는 인적이 끊어졌다고...... 하긴 나도 미술관에 가본 게 언제인지 가물거린다. 아이들 어릴때는 방학숙제를 핑계로 다녔고, 백화점 셔틀버스가 다닐 때는 백화점 갤러리에서 눈이라도 호사했는데, 그도 옛날 얘기가 되었다. 특별히 미술에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일상에서 미술품을 접하거나 감상할 기회는 많지 않다. 빛고을에 사는 덕분에 2년마다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에 가는 것도 다행이지만.^^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 표지를 보면서 내가 알아 본 그림은 고야의 개와 티치아노 베첼리의 신중함의 알레고리,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우석의 제거 뿐. 그것도 화가 이름까지 정확히 기억한 것은 고야 뿐이다. 

그래도 미술 관련 책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아이들 성장단계에 따라 열심히 사들인 편이지만, 내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인지 항상 자신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덕에 이젠 그런 염려는 안 하기로 했다.  

스투디움(studium),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방법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개별적' 효과인 푼크툼(punctum) 미술감상법을 알았기 때문이다.ㅋㅋ  

내게 최초로 각인된 화가는 루벤스였다. '플랜더스의 개'의 네로가 꼭 보고 싶어했던 그림이 루벤스였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루벤스의 그림이 궁금했었다. 라헐 판 코헤이 소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모티브가 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단편집 '살리에르 웃다'에 실린 강미 작가의 '모래에 묻히는 개'라는 제목으로 등장한 고야의 '개' 등, 내가 기억하는 그림은 대부분 문학으로 만난 그림들이다. 문학과 예술은 인간의 정서를 다루기에 서로 영감을 주고 받는 것 같다. 





이 책의 백미는 역시 제목으로 쓰인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다.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인 '바벨탑의 건설, 이카루스의 추락, 소경의 인도'는 명화집에서 만났지만, 교수대 위의 까치나 네덜란드 속담은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MB정권의 속내를 알아서 맞춰주는 양반들 때문인지, 중앙대 강의를 도중하차한 진중권 교수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그림과 해석이 유쾌하게 읽혔다. 그저 '가십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는 결국 교수대에 달릴 것'이라고 경고한 그림이다. '교수대 아래서 춤을 춘다, 교수대에 똥을 눈다, 즐겁게 교수대로 간다'는 네덜란드 속담이 그림에 담겼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함부로 남의 험담을 퍼뜨리고 다니지 말라, 권력의 무서움을 모르고 경솔한 언행을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스투디움의 그림읽기였는지 진중권은 과연 그럴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푼크툼으로의 그림읽기로 안내한다. 즉, 그림 속의 교수대는 스페인의 지배를 의미하고, 그 아래서 춤을 추거나 거기에 똥을 누는 것은 스페인의 권력에 보내는 네덜란드 민중의 조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교수대 아래서 춤을 추거나 교수대에 똥을 눈다는 속담은 완전히 의미가 달라져, 더 이상 권력의 무서움을 무르는 철없음이 아니라 죽음과 권력을 조롱하는 민중의 용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오호~ 나는 이 해석이 맘에 들었다.^^ 교수대 위의 까치 부분 그림을 친절하게 떼어서 보여주는 편집도 맘에 든다. 





조반니 프란체스코 카로토의 '그림을 든 빨간 머리 소년'과 요하네스 굼프의 '자화상'. 해석의 바벨탑에서 보여주는 조르조네의 '폭풍우'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고야가 별장의 벽에 그려 넣었다는 '검은 회화'에 얽힌 이야기와 해석도 흥미로웠다. 고야의 그림을 잘아는 아들이 그려넣었다는 걸 알지만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세 번이나 읽었지만 틈날 때마다 하나씩 다시 보기 하는 맛도 좋은 푼크툼으로의 그림읽기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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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 월간미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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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 책따세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우리 아이들도 읽으면 좋겠는데, 별 관심이 없는지 아직 안 봤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보다 작은 크기와 부피에 글밥도 적어 누구라도 읽기 쉽다. 우리 남편도 한국의 미 특강은 절반쯤 보다 말더니 이 책은 금세 다 읽었다. 그만큼 일반인이 우리 그림에 접근하기 쉬운 해설서라 보면 되겠다. 사진으로 한국의 미 특강과 책 크기나 두께가 비교 되려나~ ^^ 



2000년 4월 1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 21편과, 2003년 5월부터 북새통에 연재했던 글 6편을 더한 27편을 원고지 7매 분량으로 조선시대 우리 그림의 매력과 의미, 숨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풀어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먼저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만난 그림이지만, 같은 그림을 다시 보며 우리 그림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더 깊어졌음을 느낀다. 같은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어머니독서회 12월 토론도서로 선정했다. 부담없이 가볍게 이 책을 읽고, 우리 그림에 관심과 애정이 생긴다면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으면 더 좋겠다. ^^ 

먼저 그림을 보여주고 설명에 따라 부분을 떼어 보여 주는 편집이라 이해가 쉽고, 그림 뿐 아니라 화제까지 곁들여 조곤조곤 설명하시는 오주석 선생님까지 좋아진다.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을 김홍도의 '씨름'과 '송하맹호도'. 신윤복의 '월하정인도'와 '미인도'. 김정희의 '세한도'와 정선의 '금강전도'가 반가웠다. 책에 나오는 화가와 그림에 대한 설명은 아래 부분에 짧은 설명도 추가했다.





오주석 선생님의 우리 그림에 대한 진한 애정도 느낄 수 있지만, 글도 참 재미있게 잘 쓰셨다. 그림을 보고 설명을 읽으면, 마치 곁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홍도 그림을 모티브로 한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여러 편 읽어서, 그 스승 강세황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분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조금은 풀렸다.^^ 

   
 

강세황의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시나브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자화상>에서는 평복 두루마기에 오사모만 덜렁 썼으니, 이건 신사복에 운동모자를 쓴 것과 정반대지만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정조 때 예술계를 주름잡은 시서화 삼절 강세황, 저 유명한 김홍도의 스승이라는 분이 왜 이런 장난을 치셨을까? (53쪽)

알고 보니 글에도 장난꽃이 가득 피었다. 강세황, 이부은 3남 6년 남매 중에서도 부친이 64세에 얻는 막내로서 갖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였다.(54쪽)

 
   



이 책에서는 제한된 원고라 많은 이야기를 펼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짧고 간결해도 독자를 매료시킨다. 더 많은 이야기나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의 미 특강>을 보면 좋다. 강세황에 대한 이야기도 한국의 미 특강에서는 영.정조 두 임금이 벼슬하지 않은 강세황의 근황을 물을만큼 대단한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 거론한 작품 외에도 김득신의 야묘도추도, 김수철의 하경산수도, 이정의 풍죽도, 김홍도의 황묘농접도, 장승업의 호취도, 강희안의 고사간수도 등, 우리 그림을 잘 모르는 문외한도 애정이 생겨날 만큼 재미있게 설명했다. 우리 것인데도 우리가 잘 모르는 게 어디 그림뿐이겠는가 마는, 그래도 이 책으로 조선시대 우리 그림에 대한 문맹은 살짝 벗어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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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수탉 분투기 마음이 자라는 나무 16
창신강 지음, 전수정 옮김, 션위엔위엔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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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백의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란 그림책도 있고,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도 있지만 그 이후에 나온 최고의 닭 이야기다. 2008년 겨울 책따세 추천도서와 2008년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내 독서 경험으로 볼 때 책따세 추천도서는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중국 작가 협회 우수 아동 문학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창신강의 풍자 소설로 양질의 고기가 되기 보다는 제대로 된 수탉이 되겠다는 꿈을 품은 수평아리의 활약이 그려진다. 닭들의 세계로 인간들을 풍자해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제대로 잡았다.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이 병아리를 부화시키고 싶은 소망과 모성애를 그렸다면, 열혈수탉 분투기는 정말 수탉다운 수탉은 어떤 것이지 제대로 보여준다. 잘난 체하며 최고인 척 뽐내던 하얀깃털이 정작 수탉으로서의 본성을 보여줘야 할 때, 꼬리를 내리고 숨어버리는 비겁한 모습과 대조된다. 중국인 부부의 말을 알아 듣는 우리의 주인공 열혈수탉 토종닭은 인간의 속내를 알아버린 영리한 수탉이다. 가축을 함부로 대하며 자신들의 이익만 취하려는 비인간적인 근성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아버지 수탉은 이웃집의 수탉과 한판 승부를 벌여 절대 굴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자란 토종닭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무한 신뢰한다. 바로 아버지 같은 수탉이 되는 게 최고의 꿈이다. 아버지 수탉은 항상 지켜보고 세심히 관찰하면서, 정말 착하고 특별한 수탉이라고 격려하며 용기를 준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말은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좋은 수탉이 되는 것은 어렵지만, 양질의 고기닭이 되는 것은 아주 쉽단다. 하루종일 먹고 자기만 하면 되거든. 뭔가 배울 필요 없이 체중이 이 킬로만 되면 주인 밥상에 오르는 요리가 되기에 충분하지. 네가 세상에 나온 사명을 다한 거란 말이다. 얼머나 쉬우냐!  
   



살찐 고기닭 대신 '훌륭한' 수탉이 되고 싶은 수평아리는 수많은 시련을 딛고 마침내 당당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이기적인 중국인 부부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쓸모있는 수탉으로 인정해 최고의 대접을 한다. 자존심을 지켜가며 수탉의 본성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암탉들을 거느린 우두머리로 가족과 더불어 진정한 자유를 찾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고난을 견디고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건 동물이나 인간 세상이 다르지 않다. 청소년들이 읽으면 가슴에 울림을 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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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1-28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제목이 마음에 들어요.ㅎㅎㅎ

순오기 2009-11-28 13:52   좋아요 0 | URL
흐흐흐~ 읽어보면 딱 그 제목과 어울리거든요.^^

잎싹 2009-11-29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찜해둔 책을 주로 읽고 계시네요.ㅎㅎ

순오기 2009-11-29 20:23   좋아요 0 | URL
흐흐~ 전에 읽었는데 리뷰대회 도서라 다시 올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