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멜빌 탄생 202주년: 멜빌의 의식 내면을 들여다보기


 

더위의 한 가운데에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81일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 181981일 생이므로 오늘은 그의 탄생 202주년 되는 날이다. 매년 한번 씩은 모비 딕을 읽어보려 한다. 작년에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일러스트 모비 딕을 읽어보았으므로, 올해는 다시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아셰트 클래식 모비 딕을 읽어볼 계획이다. 오늘은 중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읽고 정리해본다.


몇 년 전에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는 난감하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다. 이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걸까, 짧은 소설임에도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해 보였던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번역자 공진호의 해설을 우연히 펼쳤다가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었다.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프로테우스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이 각종 이데올로기를 표방할 잠재성을 품고 있지만, 어느 한 가지를 주장하며 그것이 전부인 양 취급하면 곤란하다.”(106)


 

번역자의 도움말을 읽는 순간 아차 싶었다. 모비 딕에서도 독자들이 각자 나름의 읽기로 해석하고 발견한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들이 있지 않았던가 싶었다. 멜빌이 글을 쓸 때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음미하듯다루었다는 역자의 설명과 함께 용기를 내어 다시 필경사 바틀비를 읽어보았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내 해석이 옳고 그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이다. 말하자면 벽이 둘러쳐진 거리인데, 지금의 뉴욕은 과거에 유럽에서 이주한 네덜란드 인들이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렀던 곳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원주민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벽이 바로 지금의 맨해튼의 다운타운을 동서로 막았던 장벽이었던 셈이다. 19세기에 인종 문제/백인 우월주의적 시각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허먼 멜빌이 이 소재에 주목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스스로를 초로에 든’ 60세 가량의 변호사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틀비는 화자가 고용한 필경사였다. 문제는 바틀비가 필사 작업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면서 고용주인 화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시작하면서 표면화되었다. 바틀비가 필사한 필사본을 검증하는 작업에 바틀비가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화자가 심부름을 부탁하거나 다른 직원의 의견을 들으며 바틀비를 압박해도 얼굴은 아무 생각 없는 듯 태연했고, 회색 눈은 흐릿하게 가라앉은상태로 모든 지시를 거부하고 있었다. 화자를 비롯한 사무실의 직원들도 당혹감을 느끼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도대체 왜?’냐고 물으면 대답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돌아올 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38) 도저히 합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길이 없는 상황이다.


화자인 변호사는 쓰라린 당혹감으로 바틀비의 거부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바틀비를 피해 본인이 나가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사무실을 이사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전 사무실 건물에 나타나 배회한다는 건물주의 불평을 들으며, 화자는 손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급기야 건물주는 바틀비를 부랑자로 몰아 맨해튼의 유명한 교소도인 툼스구치소로 보낸다. ‘툼스(tombs)'는 구치소의 별칭이었는데 섬뜩하게 무덤을 의미한다. 곧 이 구치소의 이미지는 죽음과 이어지고 있었다.


바틀비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자는 바틀비를 면회하러 구치소로 간다. 다소 속물적이기도 했던 화자는 바틀비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구치소 조리장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좋은 식사를 대접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하지만 바틀비의 대답은 나는 오늘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구치소에서 식사까지 거부한다.


화자가 바틀비를 또 다시 방문했을 때, 그는 굉장한 두께로 둘러친 벽에 갇힌 안마당에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식사를 거부하던 바틀비는 눈을 뜬 체 사망한 상태였고, 면회간 화자가 바틀비의 눈을 감겨주며 성경 구절을 중얼거린다. 화자는 바틀비가 항상 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가 결국 죽어간 구치소 안마당의 잔디밭을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인 듯 했다라고 언급한다.


이 대목과 관련하여 번역가의 지적이 눈에 띈다. 1851년 말, 32살의 청년 작가 멜빌이 너대니얼 호손에게 보낸 편지의 대목을 언급하는 다음 내용이 흥미롭다.

 

저는 불과 몇 년 전에야 발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씨앗과 같습니다. 삼천 년 동안 한 알의 씨앗에 불과했지만, 영국 땅에 심겨 발아하여 푸른 초목으로 성장하고는 죽어 흙으로 돌아간 씨앗 말입니다. 스물다섯 살까지만 해도 저는 땅에 심기기 전의 그런 씨앗처럼 발육하지 못했습니다.”(99)

 

이 대목에서 청년 멜빌의 고뇌를 일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1850년 여름, 집 근처로 이사 온 호손과 급격히 친해진 멜빌은 셰익스피어를 재발견하게 되고 모비 딕 초고를 비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면 개정하기에 이른다. ‘영국 땅에 대한 언급은 셰익스피어 문학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문학적으로 척박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준 전통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편지의 대목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피라미드가 다름 아닌 무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바틀비가 수감되었던 구치소 깊은 곳에 두터운 벽 속에 갇힌 잔디밭을 피라미드의 심장으로 보는 것이 이해가 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바로 구치소의 잔디밭은 죽음의 잠재성과 생명의 잠재성이 혼재한 공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하여 모비 딕의 출간(1851) 이후 평단과 대중 독자의 외면을 받은 이후 2년 반 후에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를 보면 멜빌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작가로서보다 집안의 가장이자 생활인으로서 허먼 멜빌을 들여다보면 필경사 바틀비를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멜빌이 모비 딕을 출간한 해에 그는 이제 결혼 4년차에 장남을 둔 가장이었다. 아직은 혈기 왕성하고 초기 두 편의 소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비 딕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이듬해에 차남이 태어났고, 다시 2년 후에는 첫딸도 태어났다. 생활인으로서 멜빌은 거듭되는 작품의 상업적인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멜빌이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는 돈이 나를 저주하네요!’라는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도 있었다.


여기에 185312월에 모비 딕을 출판했던 출판사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여, 초판 300부마저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이 가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을 멜빌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모비 딕이 출간된 후 2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수록된 단편집이 출간되었고, 이 소설의 뒷 부분에 바틀비의 과거에 관한 소문을 덧붙인 대목을 주목해본다. 바틀비가 워싱턴의 사서(, dead letter) 우편물 담당 부서의 하급 직원이었다는 설정이었다.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사서배달 불능 우편물을 말한다. 주소가 잘못되어 전달할 길이 없거나, 보낸 이와 받는 이 모두 이사를 가거나 사망한 경우 반송도 되지 못하는 우편물을 매년 대량으로 모아서 불에 태운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대의 평론가들은 바틀비의 모델로 워싱턴 어빙, 에드거 앨런 포, 랠프 월도 에머슨등의 동시대 작가를 언급했다고 하지만, 나는 바틀비가 멜빌이 가치관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시기에 겪었던 다양한 체험이 녹아 형성된 캐릭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틀비가 처한 상황은 벌이가 변변치 않은 가장으로서 받는 심리적인 부담감과 자신의 이상과의 불일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반감과 모비 딕과 같이 야심차게 준비한 작업에 대한 사회의 냉대에 대한 좌절감 등이 응결된 멜빌 자신의 내면 풍경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물론 바틀비가 바로 허먼 멜빌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인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그가 우주에서 철저하게 혼자라 느꼈을 법하고, ‘대서양 한복판의 난파선 조각이라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멜빌 자신의 고립감을 표현해낸 듯하다. 23세가 되던 1842년에 그는 포경선을 탔는데, 이 고립된 공간에서 폭압과 격무로 고통을 받다가 마르키즈 제도에서 탈주한 경험을 떠올렸을 법하다. 포경선을 탈출한 멜빌은 골짜기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을 타고 섬에서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직무수행을 거부한 죄로 짧게 구금된 적이 있었다. 나는 특히 이 점에 주목해본다. 이 당시의 경험을 모아 보면 바틀비가 바로 멜빌이 아니었나 싶다. 불합리하고 모순된 공간에서 합리적이고자 선택한 행동으로 그는 수감된 당시의 경험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필경사 바틀비의 한 대목과도 상통한다.

 

뭐라고!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그가 부랑자요 방랑자라고? 그가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 때문에 너는 그를 부랑자로 치부하려는 거로군.”(74)

 

결국 바틀비는 해석에 따라 이기적인 자본주의’, ‘억압적인 법률과 질서’,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변호사 화자의 지시를 거부하기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바틀비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54)

 

결국 바틀비는 사회가 강요하는 합리주의적 규범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하고, 이 선택을 고집스럽게 긍정했을 뿐이다. 물론 그 결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무덤교도소에 갇히게 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따라서 나는 필경사 바틀비가 무엇보다도 허먼 멜빌의 내면 풍경을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보고 싶다. 구치소의 벽에 갇혀 있던 바틀비는 멜빌 내면에 있는 자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당시에 멜빌이 처했던 상황까지도 고려해서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번역자가 제공한 것이므로 이번에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정리하게 된 사항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결국 작가가 처한 상황과 경험들을 이해하고 상상함으로써 작품에 보다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사항]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단어에 주목해본다. 바로 부랑자라는 단어다. 멜빌은 28세이던 1847년에 첫 소설 타이피의 속편으로 오무: 남양 모험기 Omoo: A Narrative of Adventure in the South Seas를 발표하는데, 이 오무(omoo)라는 표현이 바로 타히티어로 부랑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OMO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와의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homo를 가리킨다는 역자의 설명 때문이었다.

 

눈구멍은 보석이 빠진 반지 같았으며

사람 얼굴에서 OMO를 읽는 자는

거기서 손쉽게 M자를 알아볼 것이다.”

(신곡 연옥,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여기서 번역자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중세의 속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사람 얼굴이 이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좌우의 O는 두 눈, ‘M은 코와 눈썹 언저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세에 사람을 가리키던 이 말이, 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들어온 이들이 타히티에 전파한 단어가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타히티를 방문한 유럽인들이 오모 omo라는 단어를 쓰는 광경을 타이히 원주민들이 보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배를 타고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와서 거들먹거리던 유럽인들이 타이티 원주민의 눈에는 부랑자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자면 중세에 omo라는 단어는 조물주가 빚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근대에 들어와 타히티에서는 omoo라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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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3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비딕 파이팅이요!!! 작가정신 :-)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문장 참 좋은 것 같아요.
남들을 따라 갈 수 없지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음을 느끼는 것도 또 좋은 것 같아요.

초란공 2021-08-04 00:01   좋아요 1 | URL
<모비 딕>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이 책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반갑기도 하구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책에서 찾고 이야기하는
‘눈밝은 독자들‘이 있어서 더 즐겁지요~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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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William Trevor: Felica's Journey)

윌리엄 트레버(William Trevor) 지음 |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 회복하기


 

여행은 익숙함과의 결별로 시작하며, 여행의 본질은 경계 넘기에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길 위에선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과 낯선 환경의 긴장감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펠리시아의 여정의 작가 윌리엄 트레버가 1950년대에 아일랜드의 경기침체로 교사직을 잃고 영국으로 이주했던 것처럼, 소설 속 인물 펠리시아도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경계를 넘어 자신의 여정을 시작한다.

 

소설에는 아일랜드인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산업자본주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다. 펠리시아는 자본이 구축해놓은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가족을 돌보는 일처럼 가부장적인 규범이 여성에게 기대하고 강요해온 일까지 맡도록 요구받았다. 여기에 아일랜드와 긴장 관계에 있던 영국군에 입대한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도 외면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의 안전망 밖으로 내몰린 펠리시아는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다.

 

영국에 도착한 펠리시아가 처음 도움을 청한 사람이 힐디치다. 구내식당 매니저로 일하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그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소설이 나오기 전인 1980년대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광우병 파동이 발생했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펠리시아가 다니던 육가공 공장이 폐업한 것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광우병 파동과 함께 드러난 것이다. 힐디치가 이런 상황에서도 스테이크를 즐겨 먹는 설정은 그가 모순적이고 뒤틀린 내면을 지닌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그 앞에 가족과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부실한 사회복지제도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체 길을 잃은 펠리시아가 나타난다. 힐디치는 그녀와 새로운 우정을 꿈꾸며,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힐디치가 멀리서 펠리시아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는 장면은 그가 과거에 송장 담당 직원이었다는 설정과 편집증적 증세가 교차하며 소설의 긴장감을 더한다.

 

사실 힐디치는 어린 시절에 배신을 당하고 입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상처 받은 내면의 아이는 스스로 치유하며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그가 여성들과 정상적으로 교제하지 못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과의 우정을 영원히 지속하길 열망했음에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힐디치를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힐디치의 집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펠리시아는 트럭을 타고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내 예상을 벗어나 밑바닥 인생을 선택한다. 노숙자가 된 펠리시아는 큰 맥락에서 시장주의와 사회의 규범이 만들어낸 디아스포라다. 다만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자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노숙 생활을 선택하여 비로소 자유와 독립을 얻었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혁명가의 이름에 걸맞게 펠리시아는 살인마의 위협으로부터, 삶을 구속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며, 펠리시아는 조니를 찾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새로운 생을 얻었고, 사회가 강요하는 헛된 희망과 의미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 소설이 선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내겐 선과 악의 문제보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마지막에 펠리시아가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321) 하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명확하지 않은 양극단 사이의 연속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펠리시아는 과거 자신을 어리석었다고 생각했지만, 한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여정을 지나왔다. 펠리시아는 부조리함 속에 기울어져 있던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그녀의 강력한 회복력과 함께 보여주었다. 펠리시아의 여정은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녀는 계속 멀미를 한다. 화장실에서 어떤 여자가 말한다."(9)

"만일 자신이 다시 시작한다면 복지제도나 그곳 컴퓨터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살 거라고. 일단 서류를 작성하면 영원히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152)

"그의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뭔가를 원할 때면 잘못된 걸 얻기가 쉽다고, 그리고 때로 어머니 역시 그러곤 했다고." (227)

"우정이 끝나면 힐디치 씨는 늘 이런 식으로 고통을 겪는다. (...) 그 후로는 자신이 겪은 기억의 소멸을 자비의 선물로, 심지어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241)

"어렸을 때 번창하던 주조공장도 지나가는데, 한 시절의 번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제 아무 쓸모 없어진 마당과 삭막한 건물 외관의 검은 벽돌과 돌들뿐이다." (269)

"그는 매번 우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300)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312)

"그녀는 이제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앞을 내다볼 뿐 지난 일을 곱씹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314)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으며,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에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 그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돌아다닌다. (...)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 깃든다." (320)

"그녀는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 한다."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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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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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Bäume)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지음 | 안인희 옮김 | [창비]

 



당신은 이 삶의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자연에 대해 쓴 산문과 시를 엮은 책이다. 자연에 대한 명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주 대상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나무들이다. 손주를 둔 할아버지 헤세가 말년에 쓴 글들이 많은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실린 글에는 고향과 그리움에 대한 기억이 자주 소환된다. 이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상이 바로 나무다.


노년의 헤세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에게 나무는 우선 그 자체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자연의 무구함을 내세우는 존재’(36)였다. 인상적인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는 존재’(10)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무 안에는 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나무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이자 존재의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10)인 셈이다. 헤세에게 나무는 존재의 비밀이 발현된 증거이자 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하지만 자연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바뀌듯, 나무도 자신의 모습을 달리한다. 나무는 불변의 영원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존재다. 저자가 이 깨달음은 환기하게 된 계기는, 나무가 몇 개월 동안 꼭 붙들고 있던 잎들을 바람 잔잔한 어느 날 한 순간에 떨구는 모습을 본 사건이었다. 게다가 비바람에 늙은 고목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헤세는 나무가 주는 아름다움과 죽음, 괘락과 무상함까지도 성찰한다. 이 책은 헤세가 자연, 특히 나무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과 삶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써내려간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가 나무로부터 배운 삶의 진실은 노년에 이른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숲에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를 내면, 헤세는 늘 방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방랑자에게 모든 길은 집으로 데려가는 길, 모든 발걸음은 탄생이고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11)였음을 가르쳐 주기도 했을 테다. 떠남과 돌아옴이 삶의 순리인 것처럼, 나무도 자연의 질서를 묵묵히 따른다. 나무 역시 상실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저자는 발견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생명체의 죽음은 개별적이었다. 헤세는 쓰러진 늙은 나무를 애도하고, 상실에 대해 작별 인사를 한다. 젊은 시절의 세상이 친구로 가득했었다면, 안개 속을 걸어가듯 만년의 그는 홀로 걸어가는 자신을 자각했을 듯싶다.


만년의 헤세가 자신의 글에서 한 가지 바람을 얘기한 부분이 인상 깊다. “한번만이라도 다시 젊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구속받지 않은 채 뻔뻔하게 호기심에 차서 세상으로 떠나고, 배가 고파 길가에서 버찌로 식사를 하고, (...) 한번 더 숲의 새, 도마뱀, 풍뎅이와 조화롭게 어울려 지내는 방랑의 시간을 갖고 싶다!”(83)고 언급한 대목이었다. 그에게 방랑은 떠돌이들과 도제들의 여행방식이었다. 방랑자는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다. 길 위에서 즐거움을 맛보되,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다. 떠나온 장소, 집 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 그리고 불안마저 함께 하면서도 말이다. 방랑자는 길 위의 모든 것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순간의 즐거움을 맛보면서도 이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헤세에게 방랑의 묘미는 낯설음을 동반한 달콤함이 깃든 맛이었을 테다. 노년의 헤세는 이 방랑의 기쁨을 추억하고, 길 위에서 숲의 향기와 꽃을 누리는 경험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 한다. 언제나 방랑자로 남고 싶었을 테다.


이와 달리 헤세는 여행자의 면모를 이야기한다. 여행자란, 방문했던 장소를 해마다 다시 찾고 아름다운 광경과 작별하면서도 언젠가 또 다시 오리라고 다짐하는 수집광적 면모를 지닌 자들이었다. 향기에 취해 보리수꽃을 따는 여인들처럼 말이다. 저자의 설명이 와 닿지 않는다면, 전시회나 미술관 풍경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설치되어 있는 모든 작품을 카메라에 담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헤세의 관점에서 이들은 미술 애호가라기보다는 이미지 수집가다. 헤세가 보기에 수집광적인 여행자는 방랑자처럼 진지하게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작별할 줄 아는이들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유한성과 상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여행자들은 잃어버린 것 혹은 잃게 될 것에 대한 조바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방랑자들처럼 가장 섬세한 것을 얻지도 못하게 된다.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여행자일까 아니면 방랑자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헤세가 이야기하는 여러 특징들을 고려하면 나는 영락없이 여행자였다. 순간순간 느끼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붙들고자 했다. 이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착실한 여행자처럼 언젠가 다시 그 즐거움을 느끼겠노라 생각했다. 나는 조용한 방랑의 감각을 지니지 못한 여행자였던 모양이다. ‘다시 젊어진다면, 방랑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던 헤세는 노년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이내 젊은 시절의 방랑자보다 이제는 고독하고 어두우며 고요한 길’(84)을 걸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에게 이 장면은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고 나이듦을 받아들이는 헤세의 모습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이 책은 헤세가 노년에 이르러 나무와 꽃을 바라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아름다움과 죽음을 성찰함으로써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방랑자 헤세는 신의 선물을 맛보고 즐거움을 만끽했던 추억을 되살리면서도 언젠가는 작별하게 될 자신의 삶도 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한 방랑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예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걸어갈 고독한 길을 준비하는 글로도 읽힌다. 이처럼 상실에 대한 작별인사를 준비하는 그는 여지없이 조용한 방랑의 감각을 지녔던 방랑자였다. 그럼 당신은 인생이란 길의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1] "한 그루 나무는 말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있어 불꽃이, 생각이 감추어져 있지. (...) 인상적인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나의 직분이다." (10)

[2] "나무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건축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인간에 맞서 자연의 무구함을 내세운다." (36)

[3] "글을 쓰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다시 한번만 더 그렇게 바보처럼 즐겁고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다." (43)
- 헤세가 습작으로 시를 쓰곤 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4] "손주들아, 뻐꾸기 소리를 잘 들어라, 녀석은 아는 것이 많으니 녀석에게서 배워라! 뻐꾸기에게서 즐거움으로 떨리는 대담한 봄의 비상을 배워라! 구애하는 따스한 유혹의 외침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방랑의 생활을..." (66)

[5] "보리수꽃의 향기처럼 그것(기쁨)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79)

[6] "방랑자는 모든 즐거움 중에 최고의 것, 가장 섬세한 것을 얻는다. 즐거움을 맛보는 것 말고도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79)

[7] "함박꽃도 난쟁이나무도 낙관론자도 비관론자도 옳다. 다만 나는 낙관론이 조금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낙관론의 성급한 만족감과 배부른 웃음에서 저 1914년을, 이른바 건강하다던 그때의 낙관론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 비관론자들의 일부는 조롱당하고 또 일부는 총살당했다." (104)

[8] "아름다움과 죽음, 쾌락과 무상함이 서로를 얼마나 요구하고 제약하는지 경이롭구나! (...) 자연적인 생명의 모든 움직임은 그렇듯 무상하고 아름답다." (145)

[9] "신이 인도인이나 중국인들에게서는 그리스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풍성함이지요. 신적인 것이 드러나는 이런 모든 현상방식들을 요약하려고 하면 떡갈나무나 밤나무가 아니라 ‘나무’라는 말이 가장 좋습니다." (164)
- 1955년, 헤세가 독자의 편지에 답한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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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1-06-25 00:04   좋아요 1 | URL
헛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초딩 2021-06-24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랑자 부분을 보니, 헤새의 ‘크눌프‘가 생각납니다. 그 크눌프는 헤세였겠지요? 그 책을 읽을 때는 방랑자를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어떤 얽매이지 않지만, 자신은 돌보지 않고 누군가를 위하는 크눌프만을 그렸었어요.

갑자기
방랑자는
Wander: walk or move in a leisurely, casual, or aimless way.

Roamer: someone who likes to move around and travel, especially without a clear idea of what they want to do

Vagabond: a person who wanders from place to place without a home or job.

중에 어떤 말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독일어도 궁금해졌고요.

aimless, without home 이런 부분들이 공통이긴하지만.
저는 방랑자와 여행자의 질문에서 배회자를 생각했고 그건 roamer에 또 가깝기도 한 것 같습니다.

:-) 좋은 저녁 되세요.

초란공 2021-06-25 00:08   좋아요 2 | URL
쿠눌프가 뭐지요라고 물으려다가... 검색해보니 헤세의 작품이었군요. 학창시절에 책을 멀리해서 그런지 유명작가라도 요새 새로운 작품을 알게되면 신기하기만 합니다~
헤세의 에세이에 나온 방랑자는 아마도 쓰신 의미중에 wander에 가까울 듯 싶은데요?
 
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지음, 양영란 옮김 / 동문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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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종과 나비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지음 | 양영란 옮김 | [동문선]

 



내부로부터 갇힌 자가 바라본 자신의 몸과 세계, 그리고 존재증명

 


사랑스러운 가족과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가항력의 사건으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당사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왼쪽 눈꺼풀을 깜빡이는 일과 왼쪽 부분의 입으로 반쪽짜리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뿐이라면 말이다. 이 불가항력의 사건은 실제로 한 남자에게 발생한 일이었다.


 

장 도미티크 보비는 1995128일 당시까지 세계적인 패션잡지 <Elle>의 편집장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을 줄 알고, 문학과 스포츠카를 사랑했으며, 사회에도 영향력을 가졌던 남자였다. 사건 당일 그는 BMW신차의 시운전을 하며 비틀스의 노래 내 삶 속의 어느 하루 A day in the life'를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보비가 정상인으로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진 그를 살펴본 의사는 뇌일혈이란 진단을 내렸다. 3주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전신 마비 상태로 깨어났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번개를 맞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일명 -인 신드롬 locked-in syndrome'으로 불린 이 증상으로, 의식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전신이 마비된 몸속에 영원히 유폐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전신마비 상태로 15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더 살았던 보비는 대략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자신이 글자들의 빌보드 차트라고 유머스럽게 부른 글자배열판과 왼쪽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행위만으로 사람들과 소통했다. 오늘 만난 잠수종과 나비는 이렇게 태어났다. 이 책은 한 순간에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에서 멀어진 한 인간이, 고집스럽게 자신을 찾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희망과 비통의 기록이다.


 

의사들이 자신의 증상을 -인 신드롬이라 불렀을 때, 저자는 자유로운 의식을 상징하는 나비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흐느적거리는몸을 심해 다이버들이 사용하는 잠수종(diving bell)에 비유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잠수종 속에 들어가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물 밖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43년 동안 온전한 신체로 살다가 어느 날부터 이 무거운육체 속에 갇힌 영혼으로 지내야만 했을 저자의 삶을 상상해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 혹은 육체라고 불리는 대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의 의식 혹은 마음이라 불리는 개념도 떠올려본다. 나는 흔히 나의 몸과 마음/정신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의 육체가 갑자기 제 기능을 멈추는 사태를 겪었다면, 나는 무엇인가? 내 코에 앉은 파리 한 마리도 쫓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을 곁에서 만지고, 끌어안을 수도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침을 삼킬 수조차 없어서,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은 그저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 것일까?


 

이 책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기록이다. 특히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자는 오랜 시간 비장애인의 영역에 있다가, 그 경계를 넘어 장애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운명의 장난이라도 이런 비통한 사태가 있을까. 한순간에 뒤바뀐 한 사람의 시선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장애를 안고 살았던 짧은 시기에 저자가 남겼던 체험의 기록은 내부로부터 감금된 자가 자신의 몸과 주변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해 소통하고자 했던 한 사람의 존재증명이었다.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서 저자의 의식이 마주한 것은 심연과도 같은 깊고 광막한 절망감이었다. 그는 불구가 된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말한다. “날개 꺾인 새, 목소리를 잃은 앵무새. 불길한 전조의 새로 자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우리들이 병원의 풍경을 망치고 있음을 나도 잘 안다”(53)라고 잠수종 속의 의식은 표현했다.


 

병원에서 어느 날 유리에 비친 자신의 끔직한몰골을 보고 저자는 미친 듯이 웃어댄다. 그러나 육체라는 굴레에 갇힌 상태에서, 그가 그렇게 웃어댔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고개를 젖히고,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는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라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44)라고 고백한다.


 

저자가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또 배워야 했던 것은 일종의 체념을 배우는 일이었다. 자신의 몰골을 거울에서 발견했을 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요일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기에 그는 더욱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던 시절, 아마도 저자는 신랄한 유머감각을 보유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거대한 불운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완전히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물리치료사의 안마를 받는 날, 자신을 국제 사이클 대회를 앞둔 자전거 경주계의 다크호스로 상상한다. ‘물리치료사가 고된 전지훈련으로 파열된 자신의 근육을 불어주고 있는 중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다만 이 유머 감각은 점차 새로운 체념으로 바뀌어 간다.


 

극적인 삶의 격변 사태를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에 누리던 일상은 이제 이례적이고 소중한 순간이 된다. 아버지의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 딸의 축하를 받은 그는 이 강요된 기념일이 얼마나 소중해지는 순간인지를 일러준다. 자신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전에, 이런 말들을 가족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을 듯싶다. 다만 팔을 들어 아이들을 안아줄 수 없다는 좌절감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가 짊어지게 될 삶의 무게를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하게 되었다. “일요일은 지루한 사막과 다름없다”(146)라고 언급했을 때, 그는 이미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극한 고립감과 두려움에 체념하고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했던 것이다.


 

잠수종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16)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188)

 


저자 장 도미니크 보비는 갇힌 의식이 되어 짧은 병원 생활을 했다. 오로지 눈꺼풀만을 움직여서 한 인간의 몸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의 비통한 기록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선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가 잠수종으로 표현한 육체의 욕구와 바람, 몸에 새겨진 기억의 편린을 이야기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리는 유일무이한 사태 앞에서 저자는 자신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던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에게 지금 내가 꺼낼 수 있는 건 숙연함과 경외의 감정이다



"발뒤꿈치가 아프다. 머리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하고, 온몸은 잠수종 속에 갇힌 듯 갑갑하게 조여온다." (13)

"지금 현재로서는 끊임없이 입 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27)

"목욕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 낡은 조끼를 입을 때면 여러 가지 추억이 고통스럽게 내 기억을 되살린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을 계속되는 삶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고집스럽게 나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32)

"그렇게라도 해야 내 운명을 바꿔 놓은 그날의 사고 이후, 줄곧 내가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44)
-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고 미친듯이 웃어댔다는 저자의 고백

"다만 감각적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맛과 냄새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기억이야말로 감각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56)

"물리치료사의 안마를 받는 동안이면, 나는 어느 새 다음날에 벌어질 프랑스 일주 국제 사이클 대회를 앞둔 자전거 경주계의 다크호스가 된다. 물리치료사는 고된 전지훈련으로 파열된 내 근육을 풀어주고 있는 중이다." (168)
- 저자에게 남은 일말의 체념섞인 유머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 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188)
- 베르크 플라쥬, 1996년 7-8월에 남긴 저자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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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7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론 물리학에서는 이 모든 세상이 시물레이션이라는 이론이 아주 지지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곳은 어느새 과거가 되는 걸 보면 끄덕끄덕하게도 되고요.
나의 기억 속에 도대체 나는 있었던지. 어차피 기억도 선택적이라고 하는 마당에요.
격지 않으면 뭐라고 말 할 수 없지만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책 같습니다 :-)

초란공 2021-06-07 20:36   좋아요 2 | URL
정말로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사는 곳이 진짜인가? 이런생각이요. 그래서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 배우가 손자한테 중요한 팁을 알려주는 거겠지요. 화장실에서 쉬할 때 꼭 볼을 꼬집어보라고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1-06-07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을 잠수종으로 의식을 나비로 비유했네요. 나들이 길에 나선 정신.... 아름답지만 안타까움이 전해집니다.
책 도서관에 있어서 빌려오려구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21-06-08 14:35   좋아요 1 | URL
써놓고 보니 장애와 몸에 관한 문제를 막연하게만 본 듯 싶네요. 그래이스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

그레이스 2021-06-08 14:36   좋아요 1 | URL
빌려왔어요;;
 



글쓰는 독자의 팩트체크와 번역가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다

- 조지 오웰의 평론(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을 중심으로

 



몇 달 전에 어느 블로거분이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주셨다. 내가 딱 1년 전(2020516)에 올린 글에서 잘못된 부분(사실 내가 크게 실수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수정해주신 것이다. 내가 이 댓글을 그동안 발견하지 못해서 몇 달간 방치되었다. 내가 올린 글은 조지 오웰의 평론집 책 대 담배(민음사, 2020)중에서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이란 글을 읽고 적은 글이었는데, 바로 아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반면 작가들은 혹독하게 탄압받고 있다. 일리아 에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책 대 담배, 38)

(내가 올렸던 글: blog.aladin.co.kr/712851116/11720954)


 

여기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조지 오웰이 비판한 사람이 레프 톨스토이로 착각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난 이 대목을 읽고 계속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글을 올릴 때까지도 나의 의혹에 대해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다.

 

내 블로그에 댓글로 친절하게 알려주신 블로거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와 레프 톨스토이는 다른 분이에요.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문단의 창부라고 비난 받은 요인은 스탈린 정권을 찬양해서인데,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입니다.

 

... 이 대목을 읽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과거에 내가 남긴 독후기며 리뷰에서 자신 있게써댄 여러 의견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해와 헛발질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떠올린 의혹들에 대해 확인하고 검토할 생각을 그동안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인해야겠다. 여기에 나는 한술 더 떠서 역시 조지 오웰은 대문호 톨스토이까지 비판하는 것처럼 이 사람 앞에는 비판의 사각지대는 없었다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평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틀린 부분을 알았으니, 이를 바로잡아야겠기에, 다시 기본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온라인 서점의 서재든 개인 블로그이든 아무리 편하게 글을 올리는 공간이라고 해도, 글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불문율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의 의혹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검증하고 검토해볼 것. 그리고 답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검토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 나아가 전혀 자신이 없다면 내 글에 집어넣지 말 것! 나는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일까, 아니면 문학 전공자가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나의 무지와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주신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조지 오웰의 책은 많이 읽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을 언급한 조지 오웰의 평론이 실린 평론집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책으로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제목의 글, 38), 두 번째 책으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 첫 번째 책에 실린 글과 동일한 제목의 글, 341),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문학 예방이란 제목의 글, 239)를 서로 비교해보았다. 과연 이 부분에 대해 번역자는 주석이나 추가 설명을 하고 있을지부터 살펴보았다.

 

조지 오웰의 평론집 세 권에 실린 동일한 글을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점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나는 왜 쓰는가에 이 대목에 관한 충실한 주석이 실려 있었다. 번역자의 주석을 여기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13, 239) Illya Ehrenburg(1891-1967). 러시아 및 소련의 작가이자 언론인. 소련 시절 많은 작품을 썼으며, 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을 선전하기도 했으나 스탈린과 거리를 두는 대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전후에는 검열을 비판하는 소설 해빙기(1954)를 출간했고, 스탈린 치하에 금기시됐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담은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주석14, 239) Alexei Tolstoy(1883-1945). 공상과학소설과 역사소설을 특히 많이 쓴 작가. ‘백작 동지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스탈린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글을 많이 썼기에, 러시아 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소련에서 귀족 칭호를 공공연히 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15)의 번역가 역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세한 주석을 남겨놓아 다른 독자가 나와 같은 오해의 소지를 명백히 없애주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본문에서 문단의 창부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해당 작가의 역할과 책임을 조지 오웰이 비판하고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에렌부르크의 경우 스탈린과 거리를 두었다는 행적 보다는 소련을 선전했던 과거 행적에 주목하여 좀 더 정리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명만으로는 조지 오웰이 왜 에린부르크를 그토록 비판했는지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두 번째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의 경우는 어땠을까?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가 같은 대목에서 예렌부르크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341면 각주) 예렌부르크(Il'ya Grigor'evich Erenburg, 1891-1967). 우크라이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이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의 번역가는 예렌부르크에 대해 간결하게 각주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긴 해도, 맥락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여전히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지점은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한 주석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처럼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로 오해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한 번역자가 이 부분을 잘못 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번역자와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 모두 독자가 레프 톨스토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너무 명백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번역가나 편집자는 독자가 해당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레프 톨스토이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중년이 다 되어 문학을 읽기 시작한 나 같은 어설픈 독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자가 여기에서 과연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판단했을법하다. 다만 이 판본의 아쉬운 점은 예렌부르크에 대한 주석이 기계적인 부연 설명이 아니라, 독자가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추가되었으면 하는 점, 그리고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비교한 책은 민음사의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내가 직접 읽고 블로그에 독후기를 올리며 인용했던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작은 총서 쏜살문고로 나온 판본으로 해당 부분(38)을 비롯하여 주석은 아예 없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리아나를 비롯하여 쏜살문고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평론집(책 대 담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조지 오웰의 글에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그래서 나의 게으름(팩트체크를 하지 않은 것)을 보완해줄만한 장치가 아예 없었다는 것.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제 책 대 담배를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책이 말 그대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는 점이다. 책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여러 번, 언제나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가벼운 판본들에 대해 열**들 출판사처럼 사철제본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여러 번 펼쳐보아도 책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될만한 책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소장한 이 책은 한 번 읽었고, 이제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펼쳐보았는데, 종이들이 떨어져 나올 위기에 있다.

 

또 사족인 줄 알지만 오웰의 동일한 평론 제목에 대한 번역에도 할 말이 있다. 2010년에 처음 출간되어 2011년에 5쇄를 찍은 나는 왜 쓰는가의 해당 평론의 제목은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이다. 물론 모든 번역 작업은 번역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므로, 여기에 정답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겠다. 다만 이 제목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이 표현을 보고 어떤 내용일지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2013년에 출간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2020년에 출간된 책 대 담배에 실린 해당 글의 제목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으로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문학 예방보다는 글의 내용이나 성격을 추측하기 친절하게 풀어 번역이 된 것 같다. 다만 영어 제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을 번역하여 이렇게 동일한 표현이 나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정리해보자. 조지 오웰이 자신의 평론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 비판했던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레프 톨스토이와 다른 사람이며, 생존했던 시대마저 달랐던 인물이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스탈린 시대의 사람이었고,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이었다. 독자마다 얇고 가벼운 판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주석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취향에 가깝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아무리 가벼운 독후기를 쓰더라도 일말의 의혹이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과정인데도,나는 이를 소홀히 했다. 이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임의 필요성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처럼 글의 맥락에 맞는 번역가의 주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지 오웰의 평론집에 한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를 우선 권하겠다.

 

 


라틴어 서적의 한글 표기에 관해

 

여기서 조지 오웰의 같은 평론을 언급한 김에 한 가지 더 추가해보겠다. 해당 평론(‘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의 앞부분에서 조지 오웰은 존 밀턴의 책 아레오파지티카을 언급하는데, 이 책제목 대한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제목 Areopagitica는 나의 짧은 언어 지식으로 판단해도 분명히 라틴어 제목이다. 그리고 라틴어에서 g는 모두 //소리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으로 고전 라틴어 발음만 찾아보았다고 인정해야 겠다) 그런데 밀턴(1608-1674)의 시대에는 중세 라틴어를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시기에 g소리가 어떻게 바뀌거나 확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중세 라틴어에서 g소리가 // 소리뿐만 아니라 // 소리로도 확장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부실한 고전라틴어 발음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해본다면, ‘Areopagitica아레오파티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내 견해를 지지해줄만한 증거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박상익 교수가 연구하고 옮긴 아레오파기티카(인간사랑, 2016)였다. 박상익 교수(역사학)는 밀턴 연구로 학위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고, 언론자유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전면재번역하여 개정판을 낸 분이다. 내가 중세라틴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긴 하지만, 밀턴 전공자가 아레오파티카로 발음을 옮긴 것이 한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참고해볼만한 증거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이다(데카르트가 이 문장을 썼을 161911월 즈음). 여기서 이 문장은 코기토 에르고 숨으로 읽힌다. 따라서 g'에 대응하는 소리는 모두 //소리임이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시대 역시 분명히 중세 라틴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용했을 것이므로 Areopagitica의 발음표기는 아무래도 아레오파티카로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내 견해다.

 

사실 이 발음표기 문제는 먼저 언급한 인명을 착각한 상황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지식이 빈약한 이공계 전공자가 이 문제로 한 번 고민해봤다면, 이 평론을 번역한 어문학 전공자, 교수님은 당연히 이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특히 언제나 글을 쓰고 글을 다듬고 하는 인문계 전공자들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이런 부분을 검토하고, 라틴어 발음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시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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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도 초란공님 쓰신 글 보고 실수한 기분에 놀라서 나는 왜 쓰는가 찾아보니 같은 책의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그 톨스토이가 맞네요ㅋㅋㅋ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왜 선전선동가 질을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고 그래…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쓰신 글에서 인용구만 바꾸시면 조지오웰이 성역도 없고 톨스토이 깐 것도 맞아요 ㅋㅋㅋㅋ

초란공 2021-05-19 09:05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이렇게 부끄러운 소행을 꼼꼼히 읽어주시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