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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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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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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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감정의 여행 사진들과 주시성에 대해

 

박상우의 포톨로지

: 베르티옹에서 마레까지 19세기 과학사진사


 

박상우 지음 [문학동네] (2019)

 




세상에 나온 지 70년도 더 된 카메라, 그리고 표면에 코팅 없이 80년 여 년 전에 나온 렌즈 하나를 달랑 들고 이탈리아의 도시를 산책하다 찍은 사진들이다.


 

여행 사진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단지 예쁜 사진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하나의 지배적인 감정에 맞는 사진을 골라보고자 했다각 이미지는 촬영자/감상자의 기억과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감정의 결에 주목한 결과다. 따라서 일반 여행사진에서 부각되는 장소성과 역사성에 관한 정보는 최소화된다. 다만 아직 시퀀싱(순서 배열)은 마음에 들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필름 사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감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모호한 말이다. 필름은 다분히 제약이 많은 매체다. 아쉽고 부족하다 느끼지만, 필름 사진은 나로 하여금 이런 제약과 부족함을 보완하고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작업 과정과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프레임에 들어온 사물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쉽게 지울 수도 있는 디지털 사진과는 매우 다른 매체다.


 

19세기 과학사진사를 전개했던 박상우의 포톨로지에서 저자는 카메라 렌즈와 눈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 19세기 프랑스의 해부학자 루이 페스(Louis Peisse)가 한 말을 인용한다.

 


눈은 사물에서 주시하는 것만 본다. 그리고 눈은 정신에 관념으로 이미 있는 것만 주시한다.”(68)

 


다시 말하면 렌즈에 들어오는 빛이 나르는 모든 정보를 선별 없이 남기는 카메라-렌즈 메커니즘과 달리, 인간은 눈은 주시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그냥 본다와 달리 대상을 우리의 이전 기억/경험과 결부지어 인식 한다는 의미에서 보는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눈이 사물을 주목할 때, 인간은 배경에 대해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반면 특정한 사물에 눈길이 가지 않은 상태라면, 그 사물이 속한 배경 전체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한다고 누군가를 비판할 때, ‘인간의 눈은 원래 그렇게 작동한다고 말해줄 수 있겠다. 그러니 너도 그렇다라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말해주면 된다.

 





















[선별한 사진들 슬라이드 보기]

https://blog.naver.com/close2i/224257675652






@munhakdongne

#박상우의포톨로지 #슬라이드필름 #눈의주시성 #필카사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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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 알렙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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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구호 옮김 [알렙] (2026)

 



지난달 강원도 영월의 세계 최대 텅스텐 광산이 재개장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1980년대 중국의 저가 텅스텐 공급으로 경쟁력을 잃으면서 상동광산은 1994년에 문을 닫았는데, 30여 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소식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이 있었다. 현재 광산의 소유권은 캐나다의 광산기업 알몬티 인더스트리스가 지분 100%를 쥐고 있다고 한다. 광산이 문을 닫은 시기, 그 빈자리에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추정 경제적 가치 약 60조 원에 이를 자원의 광업권을 온전히 외국 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우루과이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1940~2015)의 역작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을 느릿느릿 읽는 동안 강원에 있는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를 종종 떠올렸다.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가 지난 500년 동안 겪은 식민주의적 수탈의 역사를 담아 1971년에 출간되었다. 갈레아노는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청소년기에 자동차 수리공, 외상 수금원, 간판화가, 경리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노동의 현장을 직접 겪었던 언론인이자 작가였다. 이런 삶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그는 방대한 역사 자료와 날카로운 문장으로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 책에서 해부해 놓았다. 이 책이 지닌 폭발력은 군부독재 시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등 여러 나라에서 금서로 지정될 만큼 컸다고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이 지닌 주제의 무거움을 조금 덜어준 것은 표지와 본문의 삽화였다. 게다가 앞뒤 표지 안쪽에도 그림이 있는 책은 드문데,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의도되었던 이런 작은 마음과 상상력을 만나는 일은 그 반가움이 배가 되곤 한다. 표지 안쪽에 있는 삽화는 아마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를 떠난 모습()인듯하다. 표지 뒤쪽의 삽화는 두 개의 십자가와 갈라진 땅 밖으로 올라온 한쪽 팔이 그려져 있는데, 원주민의 무덤처럼 보이는 장면은 유럽에서 온정복자가 라틴 아메리카에 출현한 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눈에는 배를 타고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이 모두 죽음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출간 5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견지한 논지는 간결하지만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의 관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낙후성저개발이 자연적 후진성이 아니라, 무려 500년에 걸친 체계적 수탈의 결과라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잘 모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저자의 입장은 지극히 명료하고 비판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삽화가의 경력을 지닌 언론인다운 위트가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정복자들이 규정해 온 표현)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에서 선택된 언어가 낯설었지만 이내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16세기 스페인·포르투갈의 라틴 아메리카 정복 이후 영국, 미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주의적 수탈의 연속성을 추적하며, 풍요로웠던 땅이 어떻게 빈곤과 죽음의 땅이 되었는지 집요하고 치밀하게 서술해 나간다. 금과 은, 사탕수수, 면화, 카카오, 고무, 석유에 이르기까지, 자원이 풍부할수록 그 땅의 원주민들이 더 가난해진 역설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한 가지를 꼽아본다면,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과 멕시코 금·은광 채굴 과정과 그 결과를 들 수 있다. 16~17세기 포토시 광산에서만 백만 명의 원주민이 미타(mita)’라는 강제노역 제도에 의해 동원되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제도를 두고 죽음으로 향하는 초대장이라 불렀다. 광산 내부의 수은 증기와 상존하는 붕괴 위험, 혹한 및 굶주림 같은 가혹한 작업 환경 속에서 원주민들은 소모품처럼 소비되거나 죽어 나왔다. 그들은 언어를 가졌으나 정복자들의 언어와 편견에 의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상화되었다. 정복자들의 억압과 요구에 그들은 가축처럼 무거운 짐을 나르며 쓰러져 가기도 했다. 인류의 폭력성이 현대로 오면서 감소했다고 주장하는 서구의 학자들이 있지만, 나는 이런 역사 앞에서 과연 인류가 더 나은 윤리·도덕성을 지니게 되고 성숙해 왔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스페인으로 유출된 라틴 아메리카 은의 총량은 당시 유럽 전체가 보유했던 양의 세 배가 넘었다고 추산된다. 이 은이 유럽의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자본으로 전환되는 동안, 포토시 원주민의 인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격감했다. 저자는 이 현실을 다름 아닌 학살이라 불렀다. 영화 <미션>에서 볼 수 있듯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식민지 수탈 과정에는 교회도 유럽 정복자들의 착취 구조를 신의 섭리로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빠져나간 은과 금 등의 자원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제적 몰락을 앞당겼다는 점이다. 이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라틴 아메리카의 은과 금 등을 비롯한 막대한 자원을 유럽에 유입시킨 장본인들이었지만, 건실한 제조업에 재투자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자원의 이동통로 역할만 했을 뿐이다. 실제적인 부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국으로 넘어갔다는 저자의 지적은 현재 유럽의 지형도를 다시 보게 해주었다. 오늘날 번성한 유럽의 존재는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덕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테다.

 


갈레아노의 표현에 따르면, ‘자원은 그 땅에 있되 이윤은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형태는 각각 달라도 구조는 닮아있다. 500년 전 포토시의 은이 스페인 왕실의 금고를 잠시나마 채웠듯, 강원도의 텅스텐 역시 그 수익의 핵심이 어디로 귀속되는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일이다. 우리의 경우 구한말 시기에 이미 전국 각지에 있는 광산을 소유했던 것은 외국의 자본이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금과 은, 구리, , 석탄 등을 소유했던 국가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이었다고 한다. 내가 상동광산에 관한 기사에 주목한 이유는 국내 광산을 소유한 외국 기업과 자본의 존재보다는 자원에 대한 서구 문명의 집착과 욕망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실감,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구조가 계속되리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분노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가 겪었던 현실에 대한 저자의 구조적 인식이다. 수탈은 폭력을 수반하곤 하지만 이것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폭력을 수행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자본과 시장의 논리,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출간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 땅에서 나오는 자원이 이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위해서도 충분히 쓰이고 있는지 자문해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과 그 위에 살고 있는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강원도의 텅스텐 광산이 열렸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주가를 검색하기에 앞서, 이 책을 읽은 우리는 갈레아노처럼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땅의 혈맥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또 내일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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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믹서 - 4월 후기


나쁜 유전자


3- ‘사나운 유전자함께 읽기

 



벚꽃이 떨어지는 4월 둘째 주에 세 번째 사이언스 믹서모임을 가졌습니다. 꽃구경의 유혹을 잠시 뒤로 하고 오전부터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분들이 더 계셔서 안도(?)와 반가운 마음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정우현 교수님의 저서 나쁜 유전자(2025)를 읽고 있는데요, 그 중 제3사나운 유전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3장의 흐름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동물의 폭력성과 관계된 유전자가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았던 유전학의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의 답을 찾는 탐색의 출발점으로 저자는 스탈린 시대를 선택합니다. 때는 스탈린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생겨난 수많은 문제 중에서 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Holodomor)이 발생한 시기입니다. 스탈린의 소련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인 우크라이나의 농촌에 집단농장을 강요했습니다. 예상한대로 이 정책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저항했던 이들은 무자비하게 억압과 숙청을 겪었고 농부들은 곡물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농민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종자까지 독재자는 모두 수탈해갔던 것이죠. 그 결과 정확한 숫자가 집계되지 않지만 2-300만 명 정도가 굶어 죽었다도 추정됩니다. 독재자답게 스탈린은 서방 세계에 이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언론을 봉쇄하고 억압하기도 했더군요. 이 때 식량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줄 구원 투수로 트로핌 리센코라는 유사 과학자가 등판하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의 비호 아래 등판했던 리센코라는 인물이 끼친 영향은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식 진화론을 부정했던 소련의 독재 체제는 이를 지지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을 숙청했고, 소련의 유전학과 농업은 수십 년간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숙청당한 과학자의 피붙이 가운데 젊은 유전학자 드리트리 벨랴예프가 있었고요. 그는 해외에서 인기 있던 은여우의 품종개량 연구원이었습니다. 그가 독재 당국 몰래 한 연구가 바로 은여우 길들이기였습니다.


 

곧 벨랴예프는 동물의 가축화과정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기본적인 방법은 순한 은여우 개체를 골라서 순한 개체끼리 세대를 이어 교배를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실험을 반복하여 50년 정도가 지나자 거의 모든 은여우가 개처럼 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 형성되어 갖추게 되는 한 생물종의 진화적 특성을, 인간의 손으로, 그것도 극히 짧은 기간에 얻어낼 수 있었음을 입증한 결과였습니다. 이 실험은 인류가 아마도 몇 만 년 동안 형성된 개의 순한 특성을 한 인간의 생애주기 이내(70년에 가까운 실험)에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연구였던 것이죠.


 

무엇보다 이렇게 가축화된 동물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커다란 눈, 축 늘어진 귀, 동그랗게 말린 꼬리, 몸집에 비해 큰 머리, 짧아진 주둥이와 다리, 귀여운 반점 등”(125)의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유형성숙적 특징이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체가 아닌 어린 개체에게서 보이는 특징이 성체가 되어서도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특징을 지닌 동물들은 공통적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 결과는 이미 가축화된 말(horse)과 가축화에 실패한 얼룩말, 현존하는 150종의 사슴 가운데 유일하게 순록만 가축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운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은여우의 가축화실험처럼 동물의 가축화에는 여전히 알아야할 것이 많은 수수께끼라는 점에 더하여, 얼룩말과 대부분의 사슴도 이렇게 품종 개량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던져 주네요.


 

이 상황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본다면 길들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메타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질문은 누가 누구를 길들이는가?’가 되겠지요. 과학자들은 우리가 가축화한동물 역시 이 과정에 개입하고 참여한 인간을 길들인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공진화의 관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죠. 특히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는 순수하게 유전적인 진화만 일어난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개체를 둘러싼 환경이나, 집단 내에 형성되거나 이와 영향을 주고받는 환경/배경이 함께 진화 과정에 참여한다는 인식이 중요한 거지요. 또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자들은 일명 사나운 유전자혹은 폭력성을 드러내는 유전자가 있는지 줄곧 찾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알아낸 사실보다 알아내야할 사실이 더 많긴 하지만, 과학 연구는 결국 어떤 행동이나 성질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134)을 확인시켜 주었죠. 더 많이 알아낼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보이게 마련이라는 교훈은 유전학에서 빠질 수 없을 듯합니다.


 

다윈의 진화 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동물 종의 진화에 대한 개념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따라가면 결국 인간의 진화에 도달합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가축화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진화와 가축화개념에 대응하는 설명을 찾도록 하는데요, 그 답으로 제시된 가설 하나가 자기가축화입니다. 이는 진화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이 제안한 가설입니다. 그는 하나의 종인 인류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진화해왔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관점은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악하다(‘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고 보았던 사상가 토머스 홉스의 맥락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인간은 침팬지와 더불어 선천적으로 폭력적인 종이지만 자기가축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길들여 야만성과 공격성을 효과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종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으니까요.


 

이 개념을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랭엄 교수의 제자인 브라이언 헤어입니다. 그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1)에서 인간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자기가축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인간에게 협력하게 하는 능력, 다정해지는 특성을 갖게 해주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인간은 자기가축화 과정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고 설명하는 것이죠. 하지만 과연 인간의 본성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는가, 라는 주장에는 아직 반론의 여지가 많은 듯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은 가장 포악하고 잔인했기에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종이라고 말하니까요.


 

나아가 저자인 정우현 교수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결론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특별한 형질을 가졌다고 해서 어떤 환경에서든 보편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질 리는 없기 때문”(139)이라 언급하지요.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조건에서 언제나 살아남을 수 있는 형질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적자’(the fittest)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자연선택이 일어날 때, 그 변화에 맞추어 생존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140)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적자란 결국 그 종 혹은 개체가 결과적으로 살아남고 나서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자의 판별은 오로지 사후적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한편 저자는 자기가축화 가설의 원인이 다소 단편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음도 지적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단순히 폭력성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환경과 문화, 교육 등의 복합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기가축화 가설의 다정함이 지니는 이중성에도 주목합니다. 인간이 자기가축화 기작을 통해 다정함을 키웠다면, 그만큼 타인에 대한 배타성과 잔혹성도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죠. 내가 몸담고 있는 내집단과 그 경계 밖의 외집단을 대하는 태도의 온도는, 이타적인 존재일수록 극명하게 나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똘똘 뭉치는 집단일수록 외집단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죠. 하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브라이언 헤어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타적인 집단의 외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자기가축화의 부산물이라고 말합니다. 폭력성이 줄곧 감소해왔다는 입장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 설명하지만 썩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의 점차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해졌다면 이는 집단 생존의 관점에서 오히려 불리해졌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화의 법칙이 다양함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인데, 집단이 다정함이라는 특징을 얻게 됨으로써 오히려 다양성이 줄고 보다 획일적으로 변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며 3장을 마무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명료하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가축화 가설에서와 같이 인간의 폭력성이 감소하고 다정함이 더해졌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이 모든 걸 다 잠재적으로 지닌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가 처한 환경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여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성향을 지닌 존재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란 상황 및 맥락 의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앞에서 이타성과 배타성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동전을 던졌을 때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그 사람의 본성도 달라질 수 있다는 시각으로 이해해보는 겁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여전히 인간이 드러내는 폭력성을 단순히 자기가축화과정의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러한 이해가 좀 두루뭉술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본성이 (체질적으로) ‘좀 더 다정해 졌다는 무리한 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렇다면 저자가 제3장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견해와 견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핑커는 자신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4)에서 인류가 현재에 이르도록 폭력성이 감소해왔음을 다양한 통계 자료와 수치로 논증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원동력으로 인간이 성취한 환경적 요인을 꼽습니다. 교육과 발단된 문화와 같은 요인이 이를 가능케 했다는 입장을 취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수치와 통계 자료를 끌어오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 입장이라,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 업적과는 별개로,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는 설득력이 약해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에서 저자인 정우현 교수가 핑커의 견해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폭력성과 친화성은 환경적 요인이나 문화적 발달, 교육 방식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지 않은가”(141)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점에서는 핑커의 입장과 비슷한 결을 갖고 계신 듯하긴 합니다. 하지만 저자도 핑커의 논거 제시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자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 토머스 홉스와 장-자크 루소를 소환해보면, 핑커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으로 (과거에는) 폭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의 입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반면 인류의 폭력성이 감소해온 요인으로 교육과 문화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루소의 입장(계몽주의적?)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정우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인류가 폭력성이 감소하고 협력성/이타성이 증가하여 얻게 된 이익만으로 이 특징을 인류 성공의 보편적인 요인으로 지목하기에 핑커의 견해는 너무나 단편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인간이 보이는 협력성/이타성에 상존하는 이중성의 문제가 여전히 남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편이라고 여기는 내집단에 비해 외집단에는 여전히 강한 배타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이란 존재는 이처럼 복잡다단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전자만 보더라도 폭력성을 발현하는 단 하나의 유전자가 존재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사나운 유전가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여기에는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애초에 인간에게 혹은 그 이전의 동물에게 폭력성은 왜 생겨났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방이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로 가득한 초원에서 살아가는 얼룩말을 극도로 예민하고 성질이 고약한(?)’는 특징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겠죠. 얼룩말에게 폭력성은 어쩌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와일드카드가 아니었을까요. 사자나 호랑이, 고릴라처럼 강하지 못했던 인간이 성공적인하나의 종으로 남게 된 건,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처럼 인간이 협력적으로 큰 집단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인간이 폭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어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그 종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제3장에서 저자는 앞의 1, 2장과 달리 보다 강한 어조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표현이 틀렸음을 분명히 하며 마무리합니다. 특히 우리가 폭력성이라고 부르는 생물체의 특징이 단지 진화 과정에서 사라져야할 특성이 아니라 종의 보존에 필요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물론 인간의 경우에 폭력성은 보다 다양한 맥락이 존재하므로 좀 더 주의를 기울여 판단해야 겠지요. 나아가 한 존재가 폭력성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유전자만의 특징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존재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이유, 맥락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봅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폭력성에는 유전자와 환경이 복잡하게 얽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배후에 있었음을 한번쯤은 의심해보라 말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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