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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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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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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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 FIKA(피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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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그네타기: 상실의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고 삶을 사는 기술

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피카] (2026)

 





사람이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 하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함께 시간을 겪어온 가족 구성원의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부모, 배우자나 자녀, 혹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지켜보는 남은 이들의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죽음을 통한 상실감을 시간이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실감과 슬픔이 내게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다. 이제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라는 기대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슬픔을 기억하는 빈도가 조금은 줄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올라오는 슬픔의 강도는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는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사람마다 슬픔을 느끼는 방식이나 양상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나 큰 나머지 여기에 잠식되어 다시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복귀가 어려울 지경인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아니 사실, 사라진 대상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한, 결코 예전 같을 수는 없는 셈이다.

 


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의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독일의 철학자다.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가 어느 날 식도암 판정을 받고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아내의 마지막 까지 곁을 지키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그네타기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직접적인 삶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기에 어려운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는 상실감과 슬픔에 잠식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삶이라는 그네에 태우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한 글이면서 삶을 마주하는 기술에 가깝다. 배우자를 생각하면서 썼을 한 문장 한 문장이 얼마나 힘겨웠을까도 생각해본다. 하지만 글쓰기란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애도하는 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게는 시간이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식의 모호하고 조금의 도움도 안 되는 훈수를 두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삶의 엄정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부정적 순간을 우리 삶에서 배제할 방법은 없다.’(94)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대신 우리가 그네를 타던 것처럼 삶이라는 흔들림에 몸을 맡겨보라’(121)고 말한다. 내게는 흔들림에 몸을 맡기는 기술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상실의 슬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저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삶을 축제처럼 즐기는 일’(161)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중산층 지식인의 표피적인 수사학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내가 살면서 바라는 바였기도 하다천상병 시인의 글귀처럼, 이 삶을 소풍처럼 살다 가는 삶말이다내가 속으로 생각해오던 표현을 저자가 공감하고 글로써 화답해준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줄곧 언급하는 그네타기 비유처럼, 누구나 삶에서 상승과 하강을 겪게 마련이다. 저자는 이 진실을 단순하고 모호하게 바라보거나 회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백하게 삶의 모습들을 지켜볼 수 있게 해준 것은 그만의 글쓰기 시간이었을 테다.

 


저자는 우리가 삶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으려면 필요한 것이 회복탄력성이라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삶이라는 통로를 지나갈 때 이 회복탄력성, 곧 삶에 대한 유연성을 기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감각의 즐거움을 환기하고 삶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다고 말이다. 이 회복탄력성이야말로 삶에서의 쉼과 수행 사이를 반복하는 삶의 리듬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본다. 상실의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를 여유를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충고가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지는 않을 수는 있을 텐데, 분명한 것은 삶이라는 그네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이 쉼과 수행사이를 오갈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는 배우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읽고 또 읽어본다.


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땅에서 왔어.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갈 테지. 당신은 거기서 나를 언제든, 영원히 찾을 수 있어.”(181)


남편은 아내의 글에 다시 아내를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금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술을 연습할 힘을 얻은 듯하다. 이 책은 저자인 남편이 아내와 다시 만나기 전에 남은 생을 온전히 즐기고 가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이었구나 싶다






[책속으로]

[1] "모든 물방울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돌아온다." - P14

[2] "삶은 그네타기다."(27)

"그네타기는 응용된 변증법과 같다."(25) - P25

[3] "금욕주의는 언제나 ‘올바른 정도만’ 실천하는 것" - P45

[4] "올바른 정도란 ‘충분하다’는 뜻이다." - P47

[5] "중요한 건 삶을 축제처럼 즐기는 일이다." - P161

[6] "나는 더 정확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한한 광대함 속에 아내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 P181

[7] "아내는 죽기 전에 나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땅에서 왔어.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갈 테지. 당신은 거기서 나를 언제든, 영원히 찾을 수 있어."

"나는 이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정말로 아내를 언제든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가 들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인생을 즐기는 작은 기술을 다시 연습할 수 있다. 그네를 타며."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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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믹서’  6월 모임 후기


나쁜 유전자


정우현 지음


5장 범죄 유전자

 



홍대 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이번 달에 진행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에서는 정우현 교수님의 나쁜 유전자5범죄 유전자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 장은 범죄자는 유전자로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과학이 어떻게 답변해 왔으며, 사회가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에 관한 짧은 역사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네요.

 


이번 장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이란 스스로의 호기심만큼이나 세계에 대한 무지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함으로써 불완전함에도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해온 셈이죠. 나쁜 유전자에서 되풀이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은 나쁜 유전자라는 관념이 실체 없는 것임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관념에 대해 지배층과 언론에 의해 왜곡된 시선을 관철해온 결과의 부작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0세기의 역사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나쁜 유전자는 그 자체로 모호하고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인간이란 이름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순덩어리 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벽에 붙어 있는 수배자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명단에 공개된 인물들의 사진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머그샷이 없다보니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살인자부터 눈빛이 무서워 보이는 사기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인물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도 유럽에서는 두개골에 범죄의 본성을 지닌 부위가 있다는 믿음이 공기처럼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가 오랜 시간 집필한 루공-마카르 총서의 대표작인 <목로주점>이나 <제르미날>과 같은 작품만 보더라도 인간의 빈곤 문제가 알코올 중독과 폭력성과 더불어 되물림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범죄자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결정론적인 믿음이 너무나 확고한 나머지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영국에서 다윈의 사촌형인 프랜시스 골턴의 우생학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우생학이 꽃핀 곳은 미국이었죠. 우생학은 보다 많은 지배층의 지지를 받으며 법제화되고 이른바 열등한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개선한다, 혹은 대를 잇지 못하도록 불임시술을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곧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미묘하게 굴절된 시선을 통해 현실에서 실천되며 특정 인구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탄탄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제정한 인종법과 같은 구체적인 탄압의 장치가 마련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세계의 역사는 독일에서 채택되어 인류사에서 참혹한 재앙을 낳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의 선조격인 이 견해는 단순히 이웃을 견제하고 고발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죠. 이른바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믿음이 수치화, 혹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구실과 얽혔을 때 인류 공동체에 어떤 재앙을 야기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빈 서판과 같다는 견해도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적절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어떤 행동이든 원하는 대로 빚어낼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죠. ‘내게 건강한 아기 12명만 데려다 달라. 나는 이들을 변호사, 의사, 심지어 범죄자로 길러낼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존 왓슨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절한 환경(조건)과 교육이라면 새로운 인류도 창조할 정도의 자신감이 아닌가요. 특히 행동주의 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들 수 있는 사례는, ‘파블로프의 개실험이나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의 빈도를 늘리는 실험이었던 스키너 박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940-50년대에 특히 유행했던 전기 충격 요법은 이른바 정신질환자에게 많이 시도되었던 방법입니다. 이 시술은 특히 인간의 기계적측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정인이 가진 정신 질환은 뇌를 (전기 충격을 통해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듯) 백지화한 후 새롭게 교육을 하여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셈이죠.


 

여기서 주목해보는 것은 현실에 개입하고 나아가 통제하려는 인간의 충동입니다. 이런 관점은 <신기관>등을 저술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른바 자연을 조작하고 변형하여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말입니다. 나아가 이런 관점은 자연의 조건을 실험실 안으로 가져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관점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나치 독일 내과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생체(인체) 실험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인간이 야기한 이런 재앙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을 실험용으로 보고 인간이 개입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만들어낸 결과와 그리 동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시선이 사전에 저지되었더라면 40만 명이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물학/유전자에 의한 영향력을 이야기할 때 유전자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읽은 5장에서는 유전자가 환경과 맺는 상호작용이 훨씬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서술합니다. 이른바 유전 vs. 환경논쟁에서 유전자는 환경의 영향 없이 논의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특정 형질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도 환경과 조건에 따라 그 형질이 발현될 수 있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절대 다수의 유전자는 다면발형성’, 곧 하나의 유전자가 다양한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멀티 플레이 유전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나오는, 하나의 유전자가 그대로 하나의 또렷한 형질 발현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죠. 여기에 우리는 아직도 어느 특정 형질에 어떤 유전자가 관여하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 같네요. 따라서 특정 형질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가 장차 유해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정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이 유전자가 관여하는 다른 형질 발현 과정에 교란을 일으킬지 모르기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유전보다 환경에 더 방점을 두는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핑커가 지닌 견해의 기반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의 주요 논지인 인간의 폭력성이 점차 감소해왔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핑커는 환경적 측면, 그러니까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진전, 교육의 역할 등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매우 빈약/취약해 보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인류의 역사 무대에서 대량 학살을 비롯한 인간의 범죄나 폭력성이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번이라도 대량 학살이 발생한다면 이 주장은 폐기될 수밖에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사용한 방식이 설득력이 매우 약해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정우현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비판합니다.


 

폭력을 주로 전쟁과 살인에 의한 사망자 수로 다소 편협하게 제한해 정의함으로써 통계적 착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거 특정 시대의 폭력을 지나치게 과장했고, 반대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현대의 수많은 참상은 애써 축소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테러, 내전, 국가폭력 등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이 결국 범죄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인신매매, 성범죄, 사이버 폭력, 언어폭력, 환경 파괴 등 수치화하기 어려운, 그러나 대량의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큰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아마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도 문제다. 그의 책은 마치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를 입증할 만한 통계자료만 선별해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235-236)


 


제가 놀랐던 점은 많은 매체나 독자들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호평 일색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에서 납득이 가지 않거나 불만스러웠던 점들을 이처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비판한 글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던 것이죠. 단지 내 생각과 맞아서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학자가 자신의 책에 적용한 논리가 일개 독자도 납득시킬 수 없는, 문제적인 논리임을 그동안 아무도 지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독후기를 남긴 사람들은 왜 이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듯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핑커의 책에 담겨 있는 그의 역사관/인간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에 실었기 때문이죠. 정리해보자면, 핑커의 역사관도 유전 보다는 환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상황에 있지만, 자신의 주장에 도움이 되는 통계자료만을 취사선택함과 동시에, 중요한 사례의 누락을 학자적인 양심에서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비판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지난 세기에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너진 상황에서, 핑커의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아무튼 핑커의 책과 관련한 사항은 이렇습니다.

 


이번 모임에 읽은 범죄 유전자를 정리해보면, 유전자는 단독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유전자가 환경, 곧 특정 상황과 맥락 아래에 놓여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환경의 영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맥락, 바로 그 유전자가 놓인 맥락 혹은 환경이 어떤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은 언제든 새로운 발견과 사실에 의해 기존의 것이 수정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가능성을 지닌 유연한 존재로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번 장인 범죄 유전자를 읽으면서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번 여름인 7-8월에는 과학책 읽기 모임이 방학에 들어갑니다. 9월 모임에서는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주 이야기 거리가 풍성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나쁜 유전자의 참고문헌에 나오는 책 한권 씩 골라서 읽어 오시면 더 좋겠네요. 9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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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
양혜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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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노는 마당이 필요하다


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

 

양혜원 지음 [책읽는고양이] (2026)

 




가족이란 어휘처럼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을까. 박완서 연구자, 여성학 연구자, 번역가,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활동을 해온 양혜원 작가의 글을 읽으며 처음 든 생각이었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한 편씩 읽으며 작가의 출발점이자 글쓰기의 모태가 된 가족에 대한 글과 시선에 주목한다.

 


전쟁이나 시대의 불운과 같은 불가항력이 불시에 가져다주는 불행과 고통 다음으로 깊은 고통과 시련을 던져주는 것이 가족은 아닐까. 그만큼 제도로서의 가족은 인생사에서 개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원천이기도 하다. ‘노력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인내하고 양보해라와 같은 말은 집안 어른들의 덕담이나 결혼식 주례사에서 늘 듣는 말이 아니던가. 이러한 덕목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삶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했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이전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현실에서의 삶은 늘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한 가족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저자는 이 불완전한 가족 신화의 이면을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자장 속에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후배 작가/독자로서 박완서 작가의 노는 마당을 다시 방문하고 그의 글을 읽어온 기록이다.


 

애초에 가족이란 제도는 왜 생겼을까, 의문이 들다가도 고라니와 같은 다른 동물들을 떠올려본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일어서서 걸어 다니고 곧이어 뛰어다닐 수 있는 고라니 새끼들과 달리, 너무나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는 인간은 보살핌을 제공하는 안식처가 오랜 기간 필요했다. 굳이 억지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이 걸리는 육아를 책임지는 최소한의 공동체로서 가족은 어쨌거나 필요할 수밖에. 하지만 가족의 구별짓기를 위한 필요는 어쩌면 더 큰 공동체의 출현, 그리고 이 작은 공동체의 연합을 연결하기 위한 행정적 필요가 어느 시기에는발명되어야 했을 법하다. 제로도로서의 가족이 탄생한 시기가 있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제도가 지닌 문제점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 이전의 본질적인 기능을 일부러 무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지금껏 외로움이란 감정에 강한 편이라고 스스로 평가를 내리곤 했지만,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고독한 존재구나 싶다. 심지어 어떤 날은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심각한 외로움이 불쑥 찾아올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이라는 글자에 담긴 의미만큼이나 서로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울타리로서의 가족이 온전히 기능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가보다.


 

제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하는 가족을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인간은 지극히 문화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모든 인공적인양식(문화)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중독되는 존재다. 문화는 결코 혼자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말 그대로 인간은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온 존재가 아닌가. 박완서 작가의 작품 중에서처럼 볼품없이 늙어버린 남편의 모습에 극한 혐오감을 느끼는 부인처럼, 선택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공간을 점유하는 현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은 쳐다보기도 싫어진 구성원을 돌보아야한다는 의무에 얽매여 지옥이 되기도 하니까. 가족이란 제도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은 한편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모기 물린 자국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앙상한 남편의 정강이에도 손을 뻗어 쓰다듬어 보기도 하는 존재다. 저자는 모순적인 가족에 대해 쓴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따라가면서, 가부장의 사회적 의무에 얽매인 인간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도 읽어낸다.


 

인간은 사회의 규범과 제도의 지배 아래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각각의 인간이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고, 이 역할을 잘 해내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 속 어느 남편처럼 부부의 정도 사라진지 오래된 터에 가족을 위한 역할에 얽매인 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치게 되는 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 속 인물에 대한 묘사 이긴 하지만, 작가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본인이 겪은 일들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여성들이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 삶이 몇 배나 더 고달파지던 시대에 남편들 역시 가부장의 의무에 얽혀 평생을 살아갔던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의 삶이 이게 다인가, 싶기도 하다. 결혼은 일이기에, 현실이기에 더욱더 상대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순서가 뒤바뀐(?) 듯한 표현에 더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한편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 속의 한 남편은 부인의 혐오가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도 가부장의 의무에 집착한다. 아무리 공감력이 떨어지는 남자라 해도 혐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감지하지 못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이시대의 많은 남편은 이러한 사회적 역할에서만이 스스로의 쓸모와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반문해본다. 저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은 학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28)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 되기도 사회적 의무와 가정에서의 역할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야할 일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남편과 부인 되기의 공간과 시간이 각자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남편들도 가족의 외부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 문제가 많은 제도로서의 가족에 최소한 숨 쉴 틈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이 책에서 감지할 수 있는 박완서 작가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가족이라는 제도의 모순을 또렷하게 감각해내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세심하게 견지하는 모습 같은 것이다. 또한 의연하고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에 가깝다. 어쩌면 박완서 작가에게 가족의 문제는, ‘철저한 개별성을 지닌 현상으로 보았던 죽음의 문제처럼, 지극히 개별적인 사정으로 이해되었을 법하다. 그렇기에 글쓰기라는 절차를 통해 결국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관점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에피소드가 <저물녁의 황홀>에 등장하는 화초 할머니이야기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 어느 날 침투한 불청객이었다. 반면 화초 할머니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가 해낸 역할 뺨치는 연기로 가장의 임종을 지킴과 동시에 유산도 받고 이 가족으로부터 유유히 떠나는 인물이다. 그 과정의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져 보였던 것이다. 화초 할머니는 불완전하고 모순적 제도인 가족의 맹점 한 군데를 파고든다. 그녀의 역할은 모순적인 제도에 대한 통쾌한 업신여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저자의 인물 해석에도 공감이 갔다. 자녀나 본처가 생의 마지막까지 가장에게 주지 못한 역할을 화초 할머니가 연기를 하면서도 해냈다는 점 말이다.


 

더 나아가 화자의 친할머니와 화초 할머니 사이의 관계를 여성 사이의 연대와 인류애로 읽어낸 시선 역시 인상 깊다. 이런 마음은 어쩌면 우리 세대 이후에 더 발견하기 힘든 덕목으로 남을 것 같다. 누구는 화초 할머니 캐릭터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한 그녀의 연기를 비난할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비루한 연기나마, 결과적으로는 한 인간(할아버지)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던 화초 할머니야말로 유산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아무리 눈속임 연기라고 해도, 연기란 그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과 진정성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한 인간의 마음과 처지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마음을 나도 배우고 싶다.


 

저자는 박완서 연구자이면서 후배 작가로서 박완서 작가의 유산을 되짚어보고 다시 읽기를 했다.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는 저자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방향을 들려준다. 특히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저자는 글이 서툴더라도 AI를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진실하게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요즘 이 AI 시대에 진실함이 없다면 글쓰기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차였다. 저자의 글쓰기 이야기를 듣게 되니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발견하고 글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AI는 이 과정을 초보 작가로부터 빼앗아가기 쉬운 까닭이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가 평생 피와 땀으로 쓴 글을 정성껏 읽으며 발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 책의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박완서 작가를 다시 읽어내며 놀았던 저자의 또 다른 마당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작은 목소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가족과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보다큰 이야기를 남겨준 박완서 작가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다. 나 역시 서툴더라도 나의 목소리를 찾아내기까지 계속 읽고 쓸 수 있길 바란다. 저자처럼까지는 아니고, ‘이라도 흘릴 수 있는 나의노는 마당에서 말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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