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
케네스 클라크 지음, 이연식 옮김 / 소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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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정체성 탐구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과정

- 문명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지음 

이연식 옮김 [소요서가] | (2024)

 




누드의 미술사,그림을 본다는 것의 저자이자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서구 문명을 조망하듯 정리한 문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로써 케네스 클라크의 서양 미술사 3부작이 완성된 듯하다. 특히 이 책 문명의 특징은 TV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유명한 영국의 BBC와 협력하며 직접 대본을 쓰고 엮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가 직접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하듯 서양의 미술작품과 역사를 함께 설명해주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원전 300여년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방대한 시기에 걸쳐 있는 서양의 회화/건축/조각 작품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저자(출판사)는 이 책의 원제목을 문명 Civilization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는 문명의 범주는 매우 제한적이다. 서유럽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유럽 중에서도 문명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상으로 프랑스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책의 시작(아마도 첫 방송분)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파리의 퐁 데 자르라는 점이 상징적이다. 이 지역은 프랑스 지성의 산실인 프랑스학술원과 문화의 산실이자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루브르 궁, 그리고 종교의 산실을 상징하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양 문화의 토대라고 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정수를 한 장소에서 잘 보여준다. 다만 50여 년 전에 제작된 방송치고는 그의 입장을 표명하는 행보는 상당히 대담하다. ‘편견어린 견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는 행보를 (아마도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관점을 선명하고도 당당하게 표명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견해와 지식, 이해정도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옮긴 역자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저자는 문화 예술의 중심을 서유럽(그 중에서도 프랑스)이라 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점은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새롭게 드러나게 된 주변국과 문화의 강력한 비판을 일으킬 소지가 충분하다. 새롭게 알게 된 점은, 이 책(혹은 다큐멘터리 방송)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저술이 바로 미술 비평가이자 작가인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1972)라는 것이다. 대강 이 정도의 구도만 보아도 이 책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자리와 서술 방향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줄곧 붙들고 확인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곧바로 책의 핵심을 묻는 질문일 것이다. 다만 이 질문은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정의내리기 어렵다. 책 전반에 흩어져 있는 문명의 속성을 언급하는 개념들을 모아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직접적으로 얻기 전에, 저자는 문명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밝히며 시작한다.


 

문명의 적은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 공포입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침략에 대한 공포, 역병과 기근에 대한 공포.”(25)


TV다큐멘터리 대본으로 마련된 이 글은 1969년에 작성되었다. 저자가 연설하듯 이 말을 방송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며 말한 이 시기에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원자폭탄에 수소폭탄의 위력을 더한 위기의식을 체감했던 것이다. 특히 1962년 미국 본토의 앞바다에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두고 일어났던 쿠바 미사일 위기, 암울한 전망밖에 남지 않았던 당시의 정국을 보여준다. ·소 양국은 수소폭탄을 쌓아 놓고 힘겨루기를 했던 시기다.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인들이 목격했던 인간성의 실추와 인류 공멸의 위기의식이 최고로 치솟았을 시기였다. 무엇보다 문명이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저자의 이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인간성에 대해 실망스러운 사태를, 세계 문명의 중요한 역할을 자처하는 유럽에서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인류 각성의 필요를 느끼게 해주었을 법하다.


이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다시 접근을 시도한다. “문명이란 활력과 의지와 창조력 이상의 무엇입니다. (...)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영속에 대한 감각입니다.”(40) 이 표현에서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큰 정체성 요소 하나가 등장한다. 문명이 영속에 대한 감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굳건함견고함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혹은 변화 없는 상태의 지속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의미일까? 그런데 조금 다른 문명의 요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과정이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것”(158)이라는 점이다. 이건 영속이 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다만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그려지지 않아 좀 더 단서를 찾아보면, ‘문명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북유럽적 특징으로, 분별과 예의범절에 대한 조야하며 동물적인 적의’(218)를 꼽고 있다. 동물적인 적의북유럽적인 특징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는 여러 독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분명한 건,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특징적 요소에 영속’, ‘질서’, ‘분별’, ‘예의범절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명이란, 인류 집단이 어떤 체계 속에서 분별과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의 영속이라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저자가 다른 존재 혹은 그들이 남긴 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를 혐오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문명화된 삶의 특질로서 제시하는 요건은, “모든 종류의 인간과 그들이 놓인 온갖 상황에 연민을 품으며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관대하다는 것”(274)이다. 곧 타 존재에 대한 연민관대함으로 정리 해볼 수 있겠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정체성의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영속에 기여하는 것, 혹은 이러한 지향에 기여하는 제반 활동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 이를 조금 달리 표현하면, 문명의 요건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신뢰에 기반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속성이든, 질서나 안정감이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 텍스트는 1969년에 정리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이 20세기까지 인간이 반복적으로 겪은 끔찍한 살상 기록과 파괴, 폐허를 직시하고 목격한 저자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했을 것 같다. 대량 파괴와 인류 공멸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상황 속에서 실추된 인간 정신을 다시 긍정할 필요가 있었을 테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의 회복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또 새로운 세대로부터 새 희망의 불씨를 찾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 케네스 클라크가 생각하는 문명의 윤곽을 정리해보니, 그의 견해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하게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문명개념은 남성적’, ‘굳건하고 조화로운’, ‘안정된 질서’, ‘합리적 이성과 같은 어휘를 곧바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이성의 지속적인 발달과 함양을 믿고 있는 듯하다.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저자는 서유럽이 이러한 이상을 이어받았습니다.”(24)라고 말하며, 이를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범한 창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저자의 주장은 꽤나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논의의 범주를 서유럽의 역사에 한정하고 있음에도, ‘전체 인류의 역사를 무턱대고 언급하는 방식에는 논리의 비약도 보인다.

이 책이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사례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역자 역시 이 책이 비판의 여지가 여러 군데 보이긴 해도, “비판적인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그 비판이 겨냥하는 쪽을 알아야 한다.”(473)고 언급한다. 견해가 다양하고 대립하는 공동체에서 건설적인 논의와 대화가 지속되려면, 우선 대화의 출발선에 함께 서야 한다. 논의의 전제에 대해, 기본 개념의 범주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기반이 마련되어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사고의 경직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같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상상 부분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면서도 종종 내 의견과 틀어지는 지점이 발생하곤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다른 목소리라고 해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태도만 있다면 언제나 좋은 토론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저자의 이 자신감 속에 바로 문명의 토대가 되어온 인간의 기본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을 덮으니 표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여러 점들 사이를 지그재그 형태의 선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내게는 이 표지 그림이, 인류사적으로 여러 변곡점 사이를 왕복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의 부단한 행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에 나타나는 반복의 요소(‘역사는 되풀이 된다’)에 정확히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 없기에 발생하는 차이가 더해져 발생하는, 일종의 리듬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더 간단히 말하자면, 이 그림은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리듬을 상징하는 그림처럼 읽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 케네스 클라크는 이 책에서 혼란과 위기에 처한 인간의 윤리성과 신뢰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여기에 또다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질서를 다시금 부여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soyoseoga

#소요서가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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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
이희철 지음 / 리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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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균형 잡힌 역사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 중간세계사, 비잔티움과 오스만 제국

 


이희철 지음 [리수] (2024)

 




책을 펼치지 않은 이들도 중간세계사가 역사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간이라는 의미를 묻는다면 곧바로 답하지 못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저자는 이 표현이 역사학자 타밈 안사리가 제안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안사리는 이슬람 세계에 대해 저술한 현대의 명저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의 저자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이슬람 세계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안사리가 제안한 중간세계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중간세계사의 저자 이희철 역시 동양과 서양으로 알려진, 이분법적인 세계 구도를 탈피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조망하는 지점, 그가 역사가로서 발을 딛고 서 있는 지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의 기준점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우리는 서구 유럽, 백인 학자들의 정체성으로 바라보고 조망해온 역사에 이미 익숙하기에 중간세계라는 표현이 낯선 것이다. 중간 세계사는 우리가 그동안 동·서양이라는 이분법으로부터,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던 중세 유럽의 관점을 벗어나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인 셈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암흑의 시대라는 표현이 신 중심의 세계관 때문이라 지적한다. 기독교 국가였던 서로마제국이 5세기에 멸망하고 기독교 세계가 중세동안 위축되어버린 정황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마제국이 지구 위의 모든 세계사의 중심이거나, 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근 1000년 간, 동로마제국은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기독교과 결합된 전통을 지니고 이를 유지했다. 이후 15세기에 이르러 투르크족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서로마제국의 바깥에는 보다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간세계사는 기존의 서구 중심적인 세계사를 보다 균형 있게 바라보고자 한 저자의 의지가 드러나는 역사서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는 우선 나부터 중간세계사의 대상이 된 바깥의 대상들에 대한 무지부터 인정해야 했다. ‘잃어버린 시대라고도 여겨지기도 했던 중세 시대에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간과했던 중간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최근에 보다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이 책의 부제에도 나와 있듯이, 서술의 큰 흐름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에 동로마제국이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존재를 이어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에 이슬람 세력이 팽창을 거듭하다 비잔티움을 무너뜨리고 이슬람국가인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지는 15세기까지를 주요 논의 대상으로 다룬다.


중간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만큼이나 궁금한 것들도 많았다. 생소한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다사다난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저자가 끊임없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다만 정보가 많다보니 중간에 길을 여러 번 잃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작은 수확도 있었다. 화려하고도 정교한 예술과 학문을 마련했던 비잔틴 세계에 대한 감을 조금 얻었다는 것, 그리고 중세 르네상스를 예비하고 있었던 이슬람의 황금시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한때 학문의 발전과 정보가 쌓이고 전수될 수 있었던 것도, 책 수집이나 배움을 매우 중시했던 초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들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는 점이 흥미를 더했다. 특히 책 수집광이었다는 칼리프 알 만수르나 알 라시드가 책 수집을 위해 여행 다녔을 법한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고전 도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다녔다는 지도자를 둔 이슬람의 황금시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중세의 어느 중간 지대에서 지식에 대한 열망과 책 수집에 대한 열정으로 여행 다닌 이들의 이야기도 언젠가 듣고 싶어졌다. 이들은 단순히 호전적인 성전(지하드)만을 외치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간세계사는 나의 무지와 편견을 흔들어주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나의 앎을 다시 의심하고 점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출장차 이스탄불과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이 세계에 대해 더 무지했음은 물론이다. 다만 내게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 있는데, 공항에서 본 장면들이었다. 많은 무슬림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와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이들의 짐은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매끈한 여행 가방이 아니라 박스에 비닐을 덮어 포장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것이었다. 당시에 튀르키예의 동부가 IS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소식이 있었기에 공항에서 만나는 무슬림들의 짐마다 혹시 화물 폭탄은 아닐까하는, 나의 편견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편견은 공항 내에서 중무장한 채 돌아다니던 군인들 때문에 아마도 확증편향된 것일 테다. 이것은 내 편견의 결과일 테지만, 그 당시에는 나의 편견을 검토하고 점검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 방문 시에도 잠시 가자지구를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방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측에서 서로 기관총으로 응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처음 눈으로 보게 되었던 셈이다. 공교롭지만 이 때의 두 방문지는 5세기 후반에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이 양분된 이후의 동로마제국의 영역에 속한 지역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의 모습은 바로 어제의 씨앗이 싹을 틔운 결과임을 몸소 체험한 기억이다.


오늘날 튀르키예와 중동문제, 그리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씨앗이 되는 역사를, 바로 중간세계사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다. 내가 몇 년 전에 이 책을 먼저 만나 두 지역을 방문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중세 기독교 세계와 동방정교회의 중심이었던 이 지역을 보다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교회가 바로 비잔티움 세계의 최대 성전이었음을 알고 보았을 테고, 교회 주위에 서있는 네 개의 첨탑이 동방정교의 예배당에서 이슬람의 모스크로 전환된 이후 추가되었다는 것도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암흑시대로 여겨졌던 중세에도, 비잔티움 세계에서처럼 사람들이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기도 하며 부단하게 살아갔음을 상상해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시 돌아와 묻게 되는 주제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이란, 그리고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발명해 낸믿음 체계, 곧 종교라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종교가 지니게 된 세세한 내용, 교리의 차이 등등을 별개로 하더라도 이 종교라는 주제야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단서인 셈이다. 인간의 종교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또는 종의 특수성을 잘 대표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역사서를 읽을 때면 책에 실린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빠져 자주 허우적거리고 길을 잃곤 한다. 하지만 드물긴 해도 이제는 흔적으로 남은 존재들의 사람을 쫓아 이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일은 단지 이전 세대로부터 교훈만을 얻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나와 다르지 않지만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욕망과 좌절, 고난과 성취를 따라가며 나 역시 거대한 시간의 한 부분에 속해 있다는 연결된 감각,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발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엄밀한 학문 연구자가 아니라 역사서의 평범한 독자로서, 나는 이처럼 내가 겪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상상과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틀림없이 또 다시 역사책을 들쳐보게 될 것이다. 중간세계사는 내게 오랜만에 이런 감각을 다시 일깨워준 역사서다.

 

 




 

.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수정 또는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이 있다. 주석이 미주에 있지 않고, 해당 페이지에 바로 제시되어 읽는 흐름을 많이 고려한 점이 마음에 든다. 다만 이 주석이 페이지의 안쪽(책등에 가까운 쪽)에 있다보니 독자로서는 책을 반듯하게 펼쳐지는 형식이 아닌 이상 읽기가 불편하다는 점이다. 특히 눈이 나빠지고 있는 독자로서는 보다 작은 글씨를 페이지의 안쪽을 살피며 읽기는 불편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개선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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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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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는 애도하기, 그리고 인간이길 다짐하는 일


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책읽는고양이] (2023) 




인간은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낸 종이지만 동시에 취약하고 어두운 존재이기도 하다. 올해 100주기를 맞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이하 간토학살)은 인간이 지닌 어두운 면을 일깨워주는 역사다. 백년 동안의 증언을 읽으며 그 시각, 그 공간에 내가 있었다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간토학살을 목격한 유학생들이 느꼈을, 아찔한 감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1550이라는 일본어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아라카와 강변의 땅속 어디엔가 묻혀 흙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간토학살은 국가의 비호아래 자행된 국가 폭력이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나라시노 기병 연대의 한 병사가 증언했던 것처럼, 이 사건은 조선인 사냥에 다름 아니었다. ‘불령선인에 대한 단속과 조선인 보호라는 명목은 오히려 조선인 학살을 허가 하는 국가 공인 살인 면허였던 셈이다. 여기에 더하여 같은 일본인임에도 사회주의자나 노동조합원을 탄압하고 학살한 행위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자국의 장애인과 불순분자들을 잡아들여 수용소로 보냈던 나치독일의 만행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가 20년 넘게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간토학살을 경험한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증언이나 시 또는 소설 등을 통해 사건을 기억해온 노력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다. 여기에 간토학살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희생자들을 추모해온 후손들의 노력도 담겨 있다. 내겐 이 책이 저자가 마음을 다해 치르는 애도 의식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만 한다는 말을 뻔한 물음에 구태의연한 답변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간토학살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야카와 야스히코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추도비를 세우고, 50년 동안 매년 추도식을 하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간토학살과 희생자를 기억해온 일본인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왜 이토록 집요하게 기억하려 했을까? 이제 간토학살 이후 한 세기가 지났다. 여전히 변함없는 일본 지배층과 한일 양국 정부의 태도를 보며 깨닫게 된 것 한 가지는, 우리의 냉소와 망각이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는 비극을 조장하고, 심지어 동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전망이다.



간토학살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작품 총구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체온을 가진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165)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간토학살은 소수 집단을 대상화하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가능했다. 인간을 사물화 하는 행위는 행위 주체의 인간성도 파괴하고야 만다.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비국민이라는 문제의식과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남긴 유산에서도 발견한다. 그가 설립한 자유법조단이 여전히 인권 변호사들의 모임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저자는 간토학살에 관한 증언과 기억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무엇보다 양국의 화해를 추구한다.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일은 혐오나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억하기야말로 화해를 위한 첫 걸음인 까닭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숨을 걸고 간토학살의 진상을 조사하고 조선인들을 변호한 후세 다쓰지나 오야마 레이지 목사의 부단한 사죄 운동에 주목한다. 남아 있는 자들에게 기억하기,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애도할 시공간을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 간 화해 전망이 암울하기만한 지금,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애도를 양국의 시민들이 함께 이어가길 희망한다.



간토학살은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축소·은폐되고 왜곡되어 왔다.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저항했다. 이들의 모든 노력이 비록 희미해 보이더라도, 나는 여기에서 작은 희망의 빛 조각들을 발견한다. 물론 과거를 기억하는 일만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와 고통을 다 벌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기억함으로써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애도해야 한다.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위한 애도는 우리가 같은 인간임을 애써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 책은 일본 시민들이 꾸준히 이어온 화해의 요청을 보여준다. 한국 독자로서 나 역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답하고 싶다. 한국과 일본에서 빛을 내는 작은 조각들이 모여 과거와 우리 안의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그리하여 상처를 치유하고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될 가능성을 조금 더 줄일 수 있도록 말이다




[책 속으로]


[1] "발음 하나를 듣고 사람의 목숨을 따진다는 것은 희극적 비극이요, 광기의 오락이었다."(70)

[2] "서사시적 정신이란, 어떤 현실적인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아울러 어떤 어둠도 밝혀내는 광원을, 현실과 서로 관련지어, 그것과 격투하면서, 시인 자신을 주체로서 창조하여, 장치하는 정신이다."(72)
- 간토학살을 다룬 시인 쓰보이 시게지의 평론 「두 가지 조선 서사시에 대하여」중에서

[3] "(조선인 ‘보호’ 수용 방침과) ‘후테이센징(불령선인)’에 대한 ‘단속과 보호’라는 이중적인 지시는 사실 학살령과 다름없었다."(89)

[4] "어른들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간에게 진정한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상상도 못할 텐데, 그 공포는 인간의 정기를 빼앗는다."(97)
-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가 13세 때 발생한 간토대지진 당시 자신에게 죽창을 쥐어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한 생각

[5] "비극의 역사를 삭제한다면, 그 비극의 결과를 모르는 이들에 의해 비슷한 집단적 폭력이 다시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104)

[6] "불순한 무정부주의자들이 대지진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기에 살해했습니다."(137)
-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를 살해한 용의자 아마카스 마사히코 헌병 대위의 재판 증언

[7] "그래도 이놈은 조선 사람인걸요. (...)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조선 사람도 같은 인간이야. (...) 남자의 체온이 류타의 손에 따뜻하게 느껴졌다. (...) 역시 부모도 형제도 있겠지. 세이다로오가 말한 ‘같은 인간이다’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류타의 가슴에 와닿았다."(164)
-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총구》의 문장 재인용

[8] "어떤 말로 추모하더라도 조선 동포 6000명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184)
-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1923년 12월 간토학살 조사 후 결과 보고로 쓴 문장

"일본인으로서 전 조선 형제에게 사죄합니다."(185)
- 후세 다쓰지가 1926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낸 사과문

[9] "일본이 어느 정도 사죄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은 큰 범죄를 한국에 범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한국인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196)
- 오에 겐자부로가 2015년에 한 말

[10] "일본국 안에 들어오지 못한 오키나와인과 재일조선인은 차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실제 오키나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많은 조선인이 미국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학살당했다."(205)

[11] "쉽게 한국에 사과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정치가처럼 혀로 사과한다고 하지 말고, 그 시간이 있으면 한국을 공부하세요. 한국을 공부하는 것이 사과하는 태도입니다."(223)
- 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한국 문화 기행을 함께 한 와세다 대학생들에게 한 말

[12]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은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민족 차별을 없애고, 인권을 존중하며, 선린우호와 평화의 큰 길을 개척하는 주춧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228)
- 일조협회를 세운 미야카와 야스히코의 말

[13] "우리들 일본인은, (...) 우선 국모를 죽이고, 토지를 빼앗고, 아름다움을 빼앗았고, 이름을 빼앗고, 언어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고,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나아가 여성을 일본군의 위안부로서 징용해,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강요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투옥해,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 사실을 많은 일본인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며, 저희 일본인은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247)
- ‘사죄 운동’을 했던 오야마 레이지 목사의 말

[14] "사회와 화해를 통해 우리는 더 자유를 느끼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국가와 국가 사이만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남편과 아내, 사장과 노동자가 끊임없이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해해야 합니다."(257)

[15] "사회의 삼각형 제일 위에 천황이 있고 가장 아래는 천민이 위치하는 등 수직적 관계가 견고히 형성되어 있다. 이 종속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 거주자는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262)
- 일본의 종사회(다테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말

[16]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라고 했다. 백년을 제대로 기억하려면, 호주 총리나 독일 총리처럼 가해자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사과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법적 시스템도 정비해야 한다."(277)

[17] "한일 사이의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기회다.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 강제 징용,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은 인류의 문제다.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피해 의식이나 자학적 태도가 아니다. 구원의 방법은 이미 과거에 있으며, 진정한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다."(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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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책읽는고양이] (2023)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간토대지진이 발생했다. 이어지는 나날들은 지옥이었다. 내가 이 때 일본에 있었다면, 그래서 ‘15엔 50전’을 의미하는 일본어 ‘쥬우고센 고주센’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면, 나는 죽창에 찔려 죽거나 일본도에 베어 죽었을 것이다.

 

 

 

시인이자 비교문학 연구자, 문학평론가인 김응교 교수가 20년 넘게 모은 자료와 발표한 글을 모아 써낸 <백년 동안의 증언>은 일본의 군부가 퍼뜨린 유언비어와 학살로 얼룩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이하 간토학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은 명백한 국가폭력이다.

 

 

 

이 책은 주로 일본의 시민들에 어떻게 이 사건을 조사하고 기억해왔는지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13살이던 소년에게 조선인을 죽이라고 건넨 죽창을 들고 인간에 대해 회의했던 구로자외 아키라의 증언, 조선인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자경단 딘원이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학살 현장을 보고 이와 손절하고 이들을 비판하고 풍자했던 정황, 간토대학살을 기록하는 시를 썼던 시인이자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이야기, 비국민으로서 일본 정부를 비판했던 오에 겐자부로 등등의 사례가 나온다. 또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목숨을 걸고 간토학살을 조사하고 조선인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이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고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책은 무엇보다 한일 양국의 화해를 바라는 책이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알아야하고 기억해야만하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한다. 올해 100주기를 맞은 간토학살에 관한 도서 한 권을 해가 바뀌기 전에 읽어보고자 했다.

 

 

 

 

 

 

[책 속으로]

[1] “서사시적 정신이란, 어떤 현실적인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아울러 어떤 어둠도 밝혀내는 광원을, 현실과 서로 관련지어, 그것과 격투하면서, 시인 자신을 주체로서 창조하여, 장치하는 정신이다.”(72)

- 간토학살을 다룬 시인 쓰보이 시게지의 평론 중에서

 

 

 

[2] “어른들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단에게 진정한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상상도 못할 텐데, 그 공포는 인간의 정기를 빼앗는다.”(97)

-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가 13세 때 발생한 간토대지진 당시 자신에게 조선인이 보이면 죽이라고 죽창을 쥐어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한 생각

 

 

 

[3] “일본이 어느 정도 사죄한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은 큰 범죄를 한국에 범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한국인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196)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2015년에 한 말

 

 

 

[4]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라고 했다. 백년을 제대로 기억하려면, 호주 총리나 독일 총리처럼 가해자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사과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법적 시스템도 정비해야 한다.”(277)

 

 

 

[5]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피해 의식이나 자학적 태도가 아니다. 구원의 방법은 이미 과거에 있으며, 진정한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다.”(279)




[1] "서사시적 정신이란, 어떤 현실적인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아울러 어떤 어둠도 밝혀내는 광원을, 현실과 서로 관련지어, 그것과 격투하면서, 시인 자신을 주체로서 창조하여, 장치하는 정신이다."(72)

- 간토학살을 다룬 시인 쓰보이 시게지의 평론 중에서

[2] "어른들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단에게 진정한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상상도 못할 텐데, 그 공포는 인간의 정기를 빼앗는다."(97)

-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가 13세 때 발생한 간토대지진 당시 자신에게 조선인이 보이면 죽이라고 죽창을 쥐어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한 생각

[3] "일본이 어느 정도 사죄한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은 큰 범죄를 한국에 범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한국인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196)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2015년에 한 말

[4]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라고 했다. 백년을 제대로 기억하려면, 호주 총리나 독일 총리처럼 가해자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사과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법적 시스템도 정비해야 한다."(277)

[5]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피해 의식이나 자학적 태도가 아니다. 구원의 방법은 이미 과거에 있으며, 진정한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다."(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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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을유문화사] (2023)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는데, 표지와 디자인부터 남다르다. 다섯 개로 구분된 장(chapter)의 제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런 문구, 혹은 문장을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은가 짐작해본다.



첫 번째 이야기는 청소년 자살을 이야기한다. 정확히는 자살한 이들보다는 당사자를 상실한, 사건 후 남은 자들에게 몰아닥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애도의 문제 등을 이야기한다.


현대 사회는 ‘죽음’이 기피되어버린 사회다. 죽음의 ‘뒤처리’까지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아니라 외주화되어 하나의 사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살’이라면, 단순한 기피가 아니라 ‘금기어’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자들은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억압받는다. 애도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애도의 언어는 이들에게 관대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환경이 황폐해져가고, 나의 삶이 망가져감을 알 때,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을 안고 두 번째 장을 펼친다.


























[책 속의 문장들]

“인간의 삶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전성기에는 샐러드의 나날들이 있고, 삶의 끝에는 캐서롤의 나날들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떠나면서 뒤에 남겨 둔 이들에게는 캐서롤 이후의 영원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22)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싶은 것은, 자살에 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다시 유행하고 있는 이런 태도가, 이런 두려움의 부재가, 너무도 새로워서 금방 칠한 페인트 냄새가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62)


"조앤 디디온은 말한다. ‘애도는 사실 하나의 장소다. 우리 중 누구도 거게 도착할 때까지는 알지 못하는 장소.’"(73)


“멜라니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울증은 질병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하나의 언어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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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삶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전성기에는 샐러드의 나날들이 있고, 삶의 끝에는 캐서롤의 나날들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떠나면서 뒤에 남겨 둔 이들에게는 캐서롤 이후의 영원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22)

[2]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싶은 것은, 자살에 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다시 유행하고 있는 이런 태도가, 이런 두려움의 부재가, 너무도 새로워서 금방 칠한 페인트 냄새가 날 지경이라는 것이다."(62)

[3] "조앤 디디온은 말한다. ‘애도는 사실 하나의 장소다. 우리 중 누구도 거게 도착할 때까지는 알지 못하는 장소.’"(73)

[4] "멜라니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울증은 질병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하나의 언어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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