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모비딕》
(102장-135장, 685-884p)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한달 동안
보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이
책을 읽어나가려고 했는데, 새해가 시작된 지
일주일 동안 지인의 부모님 장례식을 두
번 다녀오게 되었다. 몸보다 마음이 울적한 한
주로 새해를 시작했다. 이번 달에는 마감이 정해져 있는
일들이 갑자기 생겨나고, 벌인 일들은 많고
해서《일러스트
모비딕》 읽기를 느긋하고 꾸준히 해나가기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속도를 내어
11일만에 완독하게 되었다. 빨리 읽어서 좋은
것보다는 소설 속의
사건 전개에 따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관조하듯, 혹은 파헤치듯 텍스트를 따라가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점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출판사 작가정신의 《모비딕》 을
한 번 읽은
다음, 이번에 문학동네의 《일러스트
모비딕》 을 처음
읽게 되었다. 오늘
드디어 《일러스트 모비딕》
읽기의 첫 번
째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결말을 쥐고
독서 일기를 마무리하는 만큼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말해둔다. 책을
덮은 지금 모비딕을 쫓는
세 번의 대추격 과정에서는 내가
마치 바로 옆에서 모비딕의 분수공에서 나오는 물보라와 꼬리지느러미로 내리칠 때
넘실거리는 물보라를 같이
맞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제102장에서 제104장에 이르는 부분은 지금까지 고래의 외형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오늘
이야기는 고래의 내부로 들어가 뼈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뼈들이 남아 화석으로 전해지는 고래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겠다.
“오직 급박한 위험의 한복판에서만, 녀석의 성난 꼬리가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만,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 위에서만 완전히 살이 붙은 고래, 살아 숨쉬는 고래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693면)
“고래를 요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695면)
멜빌 자신도 고래에 대해
가능한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 집대성하려는 야심찬 목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고래와 포경업의 역사와 관련된 방대한 사실들을 거대
서사와 함께 집대성하는 작업이다. 물론 멜빌이 고래의 지식에 대해
천착하고자 하지만 그에게 고래는 여전히 신비함이 많고
모르는 것이 많은
신의 피조물이다. 빼대
이야기를 끝낸 이슈미얼은 이어서 고고학적, 화석학적, 대홍수 이전의 원시적 관점에서 고래의 자취를 들여다보려 한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거대하고 자유로운 주제가 지닌 미덕, 모든 것을 확대하는 엄청난 미덕이다! 우리는 그 주제의 크기 만큼이나 확장된다. 웅장한 책을 쓰려면 반드시 웅장한 주제를 택해야 한다. 벼룩에 대한 책을 쓰려고 시도 해본 이들은 많겠으나, 그 주제로는 결코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없다.” (696면)
《모비딕》
을 쓸 당시(1850년)에
허먼 멜빌은 상선, 포경선, 군함을 타고
세계를 여행해본 경험이 있던
31살의
청년 작가였다. 멜빌의 첫
작품인 《타이피》
와 《오무》
가 나름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을 보면
야심 있는 청년
작가의 포부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우리가 주제의 크기 만큼이나 확장’되듯이 멜빌의 독서와 글쓰기도 이와
같았을 것 같다. 말하자면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서사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런 ‘확장하는’ 글쓰기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고래의
진화와 멸종에 관한 멜빌의 확증편향
‘확증편향’(確證偏向)이라는 개념은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소설 전반을 걸쳐
멜빌은 이슈미얼의 입을
통해 어떤 존재나 사물의 현상에 대해
다각도로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
한 쪽 면
만 받아들이고 있다. 이 주제는 공교롭게도 ‘고래의
진화와 멸종’에 대한
내용(제105장)이다. 이 흥미로운 장에서 멜빌은 고래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가를 자문했고, 또 북미
대륙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아메리카들소와 같이 멸종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
본인의 논리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멜빌은 우선
다음과 같이 반문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의 고래가 이전 모든 지질시대의 고래보다 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담의 시대 이후로는 크기가 줄어든 게 아닐까?” (700면)
“사실이 이러하므로 나는 모든 동물 가운데 유독 고래만 크기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701 면)
“리바이어던이 그처럼 광범위한 추격과 그처럼 무자비한 피해를 오랜 기간 동안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바다에서 절멸해버리지 않겠는가 …” (703면)
“하지만 고래 사냥은 그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에게 그처럼 불명예스러운 종말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703면)
인용해놓은 논리를 따라가보면 멜빌
자신은 고래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시 정리하면, 멸종 위기에 처한
미국 들소와 달리
고래는 일단 포획의 수가
적다는 점을 한
가지 근거로 든다. 또 과거에는 소수의 파트너가 모여
다녔던 반면, 이제는 향유고래가 거대한 행렬을 이루어 다니면서도 서로
떨어져 눈에 잘
안 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해안에서 고래를 보지
못하면 다른 외딴
해안에서 구경거리가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생각보다 허술해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결론(고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은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론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멜빌의 확증편향 해석이라고 한
것은 ‘고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문제 제기
단계에 이미 정해
놓고, 다양한 사례와 근거를 이
결론에 적합하게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 현상의 양면을 보려고 노력했던 멜빌을 생각해보면, 이 사례에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진실을 놓고도 계속
회피하는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그도 위대한 작가이기 이전에 인간이기에 이런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멜빌의 확증편향 사례는 소설에서 이
부분이 아마도 거의
유일하거나 이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물 사이에
맺어진 운명 같은 연결고리
소설에서 에이해브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인물이 페달라(파르시)일
듯하다. 페달라는 소설의 전개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슈미얼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페달라를 통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에이해브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로서 역할을 하고, 어쩌면 조용하고도 굳건히 악의
하수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에이해브는 전제군주처럼 보였고, 파르시는 그저 그의 노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둘은 하나의 멍에에 메인 듯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재자가 하나는 깡마른 그림자이고 다른 하나는 견고한 늑재인 그들을 나란히 몰고 있는 듯했다. 이 파르시가 어떤 존재이건 간에, 옹골진 에이해브는 순전히 늑재와 용골로만 이루어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 (821면)
소설 중에서 고래해체 작업을 묘사한 장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바다 위에
죽은 고래를 떠있도록 묶어
두고, 이를
해체하던 장면에서 고래
위에 퀴퀘그가 올라가 작업을 하고, 모선 위에선 작업자가 바다에 빠져도 곧바로 건져
올릴 수 있도록 서로
밧줄을 묶고 작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밧줄은 ‘원숭이 밧줄’이라고 불리는데 퀴퀘그에 묶인
밧줄의 다른 쪽
끝에는 바로 이슈미얼의 몸이
묶여있다. 이들
에이해브와 파르시(페달라)의 관계도 보이지 않는
원숭이 밧줄로 연결된 공동운명체였다.
페달라가 에이해브에게 말해주는 예언에서 자신이 선장의 ‘수로 안내인’으로 선장보다 먼저
가게 되며, 에이해브가 죽게되면 자신이 선장
앞에 나타나 안내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겠지만, 이교도-기독교인(미국인)의
조합으로서 퀴궤그와 이슈미얼이 ‘원숭이 밧줄’로 연결되어 있었다면, 페달라와 에이해브 역시
공동운명으로 묶여있는 관계로 이해해볼 수
있다.
대립하는
인물과 인물들의 고뇌
이 소제목은 양심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스타벅과 피쿼드호를 위험에 몰아넣는 에이해브 선장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스타벅은 에이해브 선장에게 끊임없이 흰
고래에 대한 복수를 위해
추적하는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반복하며 설득한다. 복수에 대한
생각으로 눈이 먼
에이해브 선장은 스타벅의 제안에는 안중이 없다. 일본해 근방에서 강력한 폭풍으로 돛이
찢겨나가는 등 소동을 맞은
선원들은 상황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이를 보고하러 내려간 스타벅은 선장실에서 지난
번 선장과 대립할 때
선장이 자신에게 겨누었던 머스킷 총을
발견한다. 선장의 머스킷 총을
들고 혼자 생각하던 스타벅은 잠이
들어 있는 선장
앞에서 갈등한다.
“그래도 이 미친 영감이 배에 탄 선원 모두를 자신과 함께 파멸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꼴을 가만히 참고 지켜봐야 하나?” (784면)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께서는 대체 어디 계신 건가요?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786면)
이 대목은 운명의 선택
앞에 고민하는 《햄릿》 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멜빌이 이
소설을 쓸 때
셰익스피어를 발견하고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문장에 셰익스피어가 썼던
표현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영국
문호가 사용했던 유명한 구절을 활용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멜빌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로 이 문장을 떠올렸을법하다.
다시 선장
앞에서 총을 들고
있는 스타벅에게 돌아가자. 두 페이지에 걸쳐서 고민하던 스타벅은 총을
놓고 선장실을 뒤로
하고 갑판으로 나온다. 아마도 이
장면은 ‘총을 들었으면 격발해야 한다’는 소설의 불문율을 따르지 않고
독자의 뒷통수를 친
몇 안되는 소설의 장면일 것이다. 그러면 소설이 큰
사건 없이 끝나가는 길목에 발생한 극적인 사건이었텐데.
하지만 멜빌은 보다
더 극적인 결말을 예비해두기로 했던
모양이다.
한편 선장
에이해브는 뱃전 너머로 몸을
구부린 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떠올린다. 에이해브는 옆에
있던 스타벅에게 자신이 40년 전
18세
때 처음 고래에 작살을 던지기 시작하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이
때 에이해브는 58세 정도였다. 육지에서 보낸
3년을
제외하고 지난 37년의 바다생활을 회상하는 에이해브의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중압감이 가득히 담겨있다. 밥벌이로서 지탱해온 삶의
지난함, 지겨움도 느낄
수 있다. 역시
“저와 함께 갑시다”라며 에이해브를 설득하는 스타벅의 말을
듣고 선장은 잠시
고뇌한다.
“에이해브는 과연 에이해브인가? 이 팔을 들어올리는 것은 나인가, 신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구인가?” (833면)
하지만 결국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처음
발견하게 되고, 최후의 추격을 시작한다. 이 때
에이해브의 곁에서 ‘죽음의 수로
안내인’을
예언한 페달라의 모습이 스쳐간다.
“페달라의 푹 꺼진 눈에는 창백한 죽음의 빛이 깜빡거렸고, 입가에는 끔찍한 경련이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837면)
잠깐의 내적갈등을 겪었던 에이해브는 이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는 숙명론자가 된다.
“이봐, 에이해브는 영원히 에이해브야, 이 연극에서 이번 막 전체는 바꿀 수 없도록 이미 내용이 정해져 있어. (…) 난 운명의 여신을 모시는 부관이야.” (860면)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추격하던 셋째
날, 추격
보트에 오르기 직전
스타벅과 굳은 악수를 나누기도 한다. 소설의 후반에서 모비딕 추격을 전후하여 인물의 대립
갈등과 고뇌가 어지럽게 얽히고 있다.
《모비딕》
을 덮으며 떠올랐던 생각은 이
이야기가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였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이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혹은
한 공동체에 스타벅과 같이
집단의 운명을 예견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더 많다면 보다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각자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법이니까.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도 특별한 사건
없이 고래뼈나 화석에 대한
이야기가 곁들여지고, 고래의 크기
변화나 멸종에 대한
의문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보면서 결말에 대해
더욱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밥먹는 것도
잊고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원고를 써나갔을 멜빌을 상상해본다. 모비딕을 추적해서 작살을 꽂아버리고 말겠다는 에이해브와처럼 멜빌에게서도 작가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느낄
수 있다. 허먼
멜빌은 《모비딕》호의 에이해브이기도 했다. 에이해브는 마치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광기어린 사람으로만 비춰질 지
모르지만, 에이해브 선장
자신의 인간적인 고뇌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는
스토리만 뽑아놓은 버전에서 볼
수 없는 소설읽기의 묘미이다. 이번에 내
손에 묵직하게 존재감을 발휘했던 《일러스트
모비딕》은 완역본에 록웰
켄트의 유명한 그림이 곁들어져 있다. 켄트가 그렸던 그림
중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그림들은 대부분 암울하면서도 광기어린 표정과 눈빛을 담고
있는 에이해브의 모습들이었다.
그가 지녔을 법한
눈빛의 절반은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의 눈빛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집
바다 건너편에 있는
여인을 생각하며 여인의 집에서 빛나던 초록색 불빛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던 장면에서 상상해볼 수
있는 눈빛과 닮지
않았을까. 변화와 파국을 암시하는 듯한
두 주인공의 눈빛에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이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로 한
달 동안 예상했던 문학동네 《일러스트
모비딕》읽기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빨리 읽은
만큼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놓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이부분은 다른
출판사의 《모비딕》읽기를 통해
계속 진행하며 생각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