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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 Generation>

하비 피카/ 풀 볼 (글)

에드 피스커 (그림)

김경주 옮김

 

[책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 모음]

 

미국의 현대 역사에 있어서 60년대는 그 언제보다도 역동적이고 사건 사고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사회, 문화 및 예술 등의 사회 모든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분출하고 충돌하던 시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히피문화, 여권운동(성차별 반대), 인종차별반대 운동, 케네디 대통령 암살, 루터 킹 목사 암살,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 및 반전 운동 확산, 68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60년대를 특징짓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의 한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한 문화적 요소로서 '비트 세대'를 반드시 고려해야할 것 같다. '비트 세대'는 대체로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를 관통하는 큰 문화적 흐름의 하나였다.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며, 미국의 작가 들에게 좀더 색다르고 도전적인 시와 산문을 쓰도록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의 문학작품 및 생활에 큰 영향을 주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 비트 세대들은 동성애에 대해 말하고, 징집 반대, 반전주의, 마약복용 허용 등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생활방식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은 미국 현대사를 이루는 중요한 19세기 중반의 비트 세대에 한정해서 조명하고 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통해 보다 생생하게 이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트 세대'들의 대표 인물인 잭 케루악(Jack Kerouac),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urg),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를 중심으로 이들을 둘러싼 미국 문화의 한 단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비트 세대'에 대한 정보를 문학이나 역사를 통해 접하게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진'이라는 분야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57년 스위스 태생의 사진작가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는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찍은 사진들로 만든  <The Americans>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 사진집은 사진사적으로 기존의 근대 사진을 뛰어 넘어 현대 사진으로 넘어가는데 큰 영향을 준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대단한 테크닉이나 위대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의 모호한 연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최강의 부유한 시절을 보내던 미국에서 어떤 점에서 보면 기존의 다큐멘터리적인 사진들이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연작의 형태로 미국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호불호가 매우 강했을 것이다. 후에 잭 케루악이 이 사진집에 주목하고, 널리 이야기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와 잭 케루악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했지만, 이 <비트 제너레이션>에는 그 친분을 알 수 있는 대목이 한 문장 나온다.

"케루악과 긴즈버그는 함께 썼던 시 <풀 마이 데이지>를 로버트 프랭크, 알프레드 레슬리와 함께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케루악의 나레이션은 최고였고, 독립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44면)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는 독립영화 제작도 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바로 케루악과 긴즈버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 줄 밖에 단서를 찾을 수 없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정보였다. 특히 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은 이들의 작업을 찾아보면 케루악과 긴즈버그의 시와 이들의 영화화 작업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57년 9월 미국 일간지 <New York Times>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On the Road>에 대한 서평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1957년에 잭 케루악과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The Americans>의 발간은 이미 비트 세대의 분출이 여러 분야에서 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트 세대'의 중심 인물들의 생활을 보면(마약과 동성애, 심지어 강도와 우발적 살인) 일반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거부감을 야기할만하다. 마약을 한 상태에서 여자 친구의 머리에 유리잔을 올려놓고 윌리엄 텔 놀이를 하다가 여자 친구의 머리에 총을 쏘아 죽인 윌리엄 버로스의 일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비트 세대들에 대한 보다 생생한 묘사를 통해 이들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면모에 더욱 주목하게 되고, 미국 역사의 한 단면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화일지는 모르겠지만 윌리엄 버로스의 유명한 소설 <벌거벗은 점심 Naked Lunch>가 원래는 <벌거벗은 욕망 Naked Lust>였던 것을 앨런 긴즈버그가 잘못 읽었고 이 제목에 대해 잭 케루악이 비난한 사실로 인해 정해진 제목이라는 일화 등은 <비트 제너레이션>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래픽 노블을 읽어나가니 영화 <킬 유어 달링 Kill Your Darling>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 앨런 긴즈버그 및 루시엔 카의 젊은 시절을 배경으로하는 영화였다. '비트 세대'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가지는 데에 이 영화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실제 있었던 사실과 다른 점들은 있을 수 있으니 당대의 배경을 이해하는 정도로만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한다.  

 

 

(불만스러운 점들)

책의 편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트 제너레이션>에 대해 독자로서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텍스트가 너무 작아 읽기에 눈이 아팠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모두 시력이 좋은 사람들만을 가정한 것인지... 나는 책을 읽으며 상당히 불편했다. 일반 만화보다 글이 많은 그래픽 노블의 특성과 독자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이렇게 책을 만들었을까. 나아가 책의 막바지에 이른 184페이지 부터는 잠깐이지만 글자 크기가 더욱 작아져있다. 이렇게 편집할 요량이면 왜 판형을 더욱 키워서 글자를 크게하고 가독성을 높이는데 좀더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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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 읽기 사이언스 믹서’ 5월 후기

나쁜 유전자

: 세계사를 뒤바꾼 문제적 유전자 바로 읽기




 

올해 네 번째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날은 맑았지만 아침부터 햇볕이 강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부쩍 여름이 온 것만 같네요. 이번 달에는 나쁜 유전자의 제4열등한 유전자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4장은 많이 들어보셨을 우생학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분야의 짧은 역사에 비해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견주어보면 실로 믿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한 백수 청년이 독일 군인으로 입대했습니다. 그는 그림을 좀 그릴 줄 알았고 특히 웅변에 재주가 있었죠. 또 어느 날은 무장청년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수감되기도 했죠. 그는 비록 실패했지만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 덕분에 얻은 유명세와 그의 유대인 혐오에 힘입어 정권을 잡게 됩니다. 이어서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대인 제거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했죠. 짐작하시겠지만 이 청년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이번 읽기에서는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와 말살 정책이 무엇보다 우생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2차 대전 당시에 유대인만 희생당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뉘른베르크법에 의해 일탈자로 규정되었던 혼혈아, 장애인, 동성애자, 정신질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집시들도 모두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분류되어 희생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치의 우생학은 좋은 혈통을 낳는데 부적격인 판정을 받은 여성 수십만 명에게 불임수술을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신체 기형 혹은 백치 판정을 받은 어린이의 운명은 훨씬 가혹했습니다. 이들 어린이들은 약 20만 명 정도가 안락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더 섬뜩한 사실은 나치가 사회에서 제거 대상이 된 이들에 대한 대량 말살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고안된 것이 바로 가스실과 독가스 치클론 B라는 점이죠.

 


이처럼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는데 핵심적인 이론이었던 독일의 우생학은 이미 20여년 동안 미국 사회의 지도층 사이에서 널리 인정과 지지를 받던 이론이기도 했습니다.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씨리얼의 왕 켈로그의 이름도 보이고,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학문적 일대기가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던 스탠퍼드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나 하버드대 총장 애벗 로렌스 로웰도 우생학의 핵심 지지자였습니다.


 

우생학을 지지했던 인물 중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이는, 당대에 존경받던 대통령 플랭클린 루즈벨트, 진보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 흑인 인권운동가 듀 보이스를 비롯하여 소설가 H.G. 웰스나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 작가이자 사상가 조지 버나드 쇼 등도 있었네요. 실로 수많은 지도층 인사가 우생학을 지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산아 제한을 원하던 영국의 여성단체도 우생학에 관심을 보이며 단종법을 지지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정황이 보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생학을 다시 보게 합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2500여년 전의 플라톤 철학(<국가>)에도 이미 우생학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우생학의 기본 논리가 우리의 건강 추구 욕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자손을 낳고자하는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지점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논리가 사회 혹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나 공감의 여지없이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될 때 발생하지요. 특히 사회의 관리 주체에 의해 단점으로 규정된 특징을 지닌 구성원들을 사회에서 격리/제거하려는 위생학적인 욕망이 과도할 때 심각한 재앙을 낳게 되는 것 같네요.


 

이에 더하여 유럽의 식민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던 우생학의 역사로부터 인류가 큰 희생을 치르고 배운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생학의 전통에서 이제 자유로운 걸까요? 과학기술의 발전은 빠르게 발전해 왔지만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도 심심치 않게 드러납니다. 이미 현실에서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도록 유전자를 교정한 아이가 태어났고, 형제의 유전자 치료에 골수를 공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구세주 동생과 같은 존재가 태어난 바 있습니다. 고통 받는 생명을 돌보고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들의 복지를 위해 또 다른 생명이 이용되는 관계 나아가 희생되는 구도는 분명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생학의 흔적과 논리는 여전히 우리의 현살 한 가운데에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우리는 대화에서 농담이나 우스개로 우월한 유전자’, ‘열등한 유전자라는 표현은 망설임 없이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세계에서 어느 유전자가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 유전학/생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우리가 일일이 예측하지 못하는 것만큼 한때의 유리한 유전자가 다른 장소, 혹은 다른 시기의 환경에서는 치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저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 우월하거나 열등한 구성원이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유전자는 우월함이나 열등함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그저 다양함의 원천이라고 말이죠. 우리 모두는 그저 다양한존재이기에, 모든 존재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획일화하는 조건에 저항하고 다양함을 지켜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우생학의 역사를 중심으로 우리 주변에 잔존해 있는 우생학의 잔재를 발견하고, 다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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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연희 과학책 읽기 

사이언스 믹서 1월 모임 후기


나쁜 유전자》 

1- '피부색 유전자' 함께 읽기


 

작년 하반기에 잠시 쉬어 갔던 책방연희 과학책 읽기 모임이 사이언스 믹서 Science Mixer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1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전, 추위를 물리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참여하신 분들이 풀어 놓은 공통점 한 가지는 현재 각자의 독서 활동을 좀 더 폭넓게 확장해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던 것 같고요. 또 과학 지식의 확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그 자체로만 고립되어 존재하는 분과가 아니라는 것, 나와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사이언스 믹서를 시작할 때 시도해보기로 했던 읽기 방식이 참여자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진 않았거든요. 오히려 느리게 읽기의 방식이 늘어지고 권태로운 독서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컸습니다. 최근 책읽기는 점점 더 인기를 잃어가는 반면, AI에 한 관심과 필요성은 점점 더 우리를 압박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1년에 1권 읽기'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예측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올 한해 느릿느릿 읽어나갈 책은, 공지한 바대로 정우현 교수님의 <나쁜 유전자>였는데요, 1월 첫 모임에서는 이 책을 진행자가 선택하게 된 배경과 기대하는 바를 언급하고 함께 1피부색 유전자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인간의 피부색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구별짓기의 표지이자 낙인찍기의 근거가 되어 왔는데요, 저자는 인간의 피부색이 수많은 유전자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멜라닌 색소의 많고 적음, 그리고 색소의 배합 정도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고 알려줍니다. 나아가 피부색은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선택을 거쳐 적응한 유전형질이라고 말이죠. 나아가 내가 속한 인종적 집단타집단에서 보이는 차이(변이)보다도 내가 속한 집단 내부에서 보이는 차이(변이)가 생물학적으로 더 크다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종이라고 말할 때, 이 개념은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 ‘인종은 단지 인간 문화의 산물일뿐이라는 것을 현대 과학이 말하고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차이차별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여겨졌다는 것이지요.

 


생물학적인 사실들을 정리하고 나서도, 우리는 우리가 겪은 인종적 차별이나 우리 안의 편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간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도 다시금 깨닫습니다. 아울러 과학적 발견을 통한 지식이 하나의 강력한 필터로 작용했을 때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도 다시금 확인해보았습니다.


 

첫 모임이었고, 한번에 한 챕터 읽기라는, 엉뚱한 읽기 모임에 호기심을 보이고 와주신 분들, 조금 어색한 분위기에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주셔서 모임 분위기가 한결 가벼웠던 것 같네요.


1부에서 시간을 많이 써서 참고 도서를 소개하고 의견을 나누는 2부에서는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네요. 하지만 1장 피부색 유전자와 관련한 참고도서로 <웃음이 닮았다>, <낙인찍힌 몸>, <주인 노예 남편 아내>, <블랙 라이크 미>와 같은 책이 언급되었습니다. 다음 읽기 모임에서는 각자 읽어 오신 참고도서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듣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3월 사이언스 믹서에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쁜유전자 #정우현작가 #이른비출판사 #사이언스믹서 #책방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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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이산하 시집 [창비]

'지옥의 묵시록'을 읽다가 남기는 잡문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 나온 시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시집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국어와 문학을 제일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어쩌다' 나이가 들어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나 역시 궁금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다만 책을 읽다보면 가끔 책에서 소개되는 시집이나 시인에 대해 알게되고, 궁금해지긴 했다. 아마도 아직 남아있는 '중년의 호기심',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모든 결과는 무언가의 우연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가. 그렇게 더듬더듬 시도를 해보게 된듯하다.


학창 시절에 무언가를 좋아하고 몰입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 그 무언가에 손을 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나이가 들 수록 이전에 형성된 관성으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아닌가. 학창 시절에 음악을 좋아하고 그 세계를 탐험해보지 않은 이가 나이들어서 클래식이나 재즈를 듣기란 매우 어렵다.


내가 시에 그것도 뒤늦은 나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 수록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젊은 시절의 치기가 빠져서일까, 아니면 나의 '별볼일 없음'을 이제서야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무의식 속에 쌓아둔 나의 결핍감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호기심이란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댄 오랜 아쉬움인지도.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단지 호기심에서. 아직 시를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나마 내게 아직 이런 호기심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따름이다. 그렇게 시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시 '지옥의 묵시록'부터 '턱' 걸려버렸다. 머뭇머뭇 문지방 밖에서 주저하면서 방안을 쳐다보는 소심한 강아지처럼 나는 시의 눈치를 살핀다.


시는 울음을 이야기한다. 벤야민과 니체의 울음을 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어느 공원에서 아침 산책 중이던 니체는 어느 마부가 모질게 때리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니체의 연보에는 그가 우는 동안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시의 마지막 문장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10)에서 머뭇거려진다.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은 또 무엇일까. 금새 이해가 되진 않는다. 이 부분이 무척 궁금했다. 사람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할까. 이런 궁리를 하는동안 반나절이 지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을 떠올렸다. '닭똥같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온 몸으로 우는 아이들의 울음을 말이다. 매일 같이 품에 안고 다니는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는, 세상이 무너진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을 때 보여주는 아이들의 울음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표면과 심연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우는 그런 울음이란.


나는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이 문장이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가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을 울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오늘은 시 한 편 읽었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10)
- 시 ‘지옥의 묵시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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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0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년의 시읽기! 저말입니까 하고 들어왔어요. 표면이 심연인듯? 초란공님 설명들으니 가슴에 와닿네요. 세상이 무너지는. 무너진듯 느껴도 아닌척 무슨무슨척하는게 어른인거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 ~

초란공 2022-01-10 11:23   좋아요 2 | URL
전 아직 어른이 아닌가 봅니다 ㅜㅜ ‘척‘을 못해요... ^^;;

2022-01-10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0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2-01-11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행복한책읽기님 덕분에 이산하 시인의 시를 조금 맛보게 되었는데 초란공님께서도 좋은 에세이 올려주셔서 감사드려요. ‘닭똥 같은 눈물‘과 ‘표면이 심연인 눈물‘ 아! 깊은 읽기와 느리게 생각하기 과정이 느껴집니다

초란공 2022-01-11 19:34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 알게된 시인인데 젊은 시절에 정말 고생많으셨더군요 ㅜㅜ

2022-01-11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1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죄와 벌을 읽으며 옆길로 새어 헤매기

 



이번 글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다가 옆길로 새고 헤맨 기록을 모아본다. 지나친 상상이라고 비난하실지 모르겠다.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는 읽다보면 어느 새 딴 생각을 하곤 한다. 아니면 집중력이 약하여 쉽게 옆길로 새기 때문에 독서를 빨리 못하는 것일까. 오늘 쓴 글을 보니 작품의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어느 한 부분에서 마주한 상황과 관련하여, 다른 작가의 작품을 떠올려보고 나름대로 상상력을 가미해본 작업이다. 죄와 벌을 읽으면서 함께 읽기의 제안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은 이후 추가 독서를 위한 독서지도 만들기 혹은 독서 계획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략 6가지 장면에서 출발하여 옆길로 새고 헤매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 결과다. 상상력을 가미하긴 했지만 각자 나름의 무모한근거도 곁들인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글은 작품의 이해에 하등 도움은 안 될 것이다. 다만 한 분이라도 재미있었다면 충분하다.

 




[1] 로쟈는 (lice, )'를 왜 그토록 혐오했을까?

 

어릴 때 어머니가 내 머리 속에 있던 하얀 벌레를 잡아 죽이셨던 기억이 난다. 손으로 누를 때마다 빨갛게 터지던 녀석들. 바로 머릿니다. 머리에 가루약을 넣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죄와 벌에서 로쟈는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다. “난 단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소냐. 무익하고 혐오스럽고 해악을 끼치는 이 말이야.”(문학동네, 2, 226) 아무리 전당포의 고리대금업자라고 해도 힘없는 노파를 라고 규정하고, 혐오발언을 일삼으면서 생명을 빼앗은 일은 경악스럽다. 게다가 로쟈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한다. 자본의 힘으로 법을 다루는 이들과 공모하여 죄를 면하거나, 초범에 반성문 열심히 쓰면 풀어주는, 망가져버린 우리나라 법정에서나 먹힐만한 이유 아닌가. 문장만을 따로 떼어 보자면 로쟈의 변명처럼 심각한 인간혐오표현이 따로 없다. 다시 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는 에 대해 혐오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던 것인지 모른다. 도대체 이 작은 녀석들이 어떻게 내 몸에 들어와 기생할 수 있었을까.


 

최근에 읽은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도로시 크로퍼드 지음, 김영사, 2021, 이하 미생물)을 읽으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을 때 등장인물들이 살았을 법한 환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보인다. 미생물에 따르면 밀집되고 위생이 불량한 열악한 환경에서는 이질,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등 대변-구강 경로로 전파되는 병원체가 퍼지기 쉽다. 이 중에서 발진티푸스를 선택해본다. 이 질병은 리케차라는 미생물에 의해 발병한다. 이 녀석은 DNA염기분석 결과 오래전부터 쥐의 몸에 기생해온 발진열 리케차에서 진화된 것으로 추정’(238)된다. 무엇보다 인간이 수렵채집생활(이동생활)에서 농경생활(정착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집에 함께 머물던 쥐들을 통해 인간과 접촉이 증가했을 것이다. 그 결과 발진티푸스 리체차라는 병원체는 몸니(body lice)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발진티푸스에 얽힌 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로쟈가 되고 싶어 했던 나폴레옹, 그가 일으킨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미생물에서 저자는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을 위해 감행한 181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정복을 위해 50만 명이 넘는 병사를 거느리고 모스크바로 출정했다. 이 과정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고 낙오했는데,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병력이 1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아가 최종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생환했던 병력은 불과 35천 명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제대로 된 전투를 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던 것은 무엇보다 발진티푸스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듬해인 1813년에 나폴레옹은 또다시 50만 명을 징집하여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데, 결국 발진티푸스 리케차라는 병원체가 유럽을 정복하고자 했던 나폴레옹의 열망을 꺼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만다.


 

미생물에 따르면, 1880년대 중반에 발진티푸스는 개인과 사회 위생의 향상으로 서유럽에서는 보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수천 명이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도 발진티푸스가 대규모로 유행하여 약 300만 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죄와 벌이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했던 해는 1866년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쓰던 이 시기에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괴롭히던 질병이었다. 여기에서 바로 몸니가 이 병원체(리케차)를 매개하던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가난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모든 이들의 몸에 예외 없이 기생했을 는 그저 혐오와 박멸의 대상이었을 것이 분명해진다. 오죽하면 사상가, 정치가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회주의가 이를 박멸하지 못한다면 이가 사회주의를 박멸할 것이다.”(같은 책 재인용, 243)라고 와의 전쟁을 선포할까. ‘를 보기 힘들어진 요즈음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에서 를 그토록 혐오하며 썼던 이유를 역사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2] 로쟈의 꿈과 니체와의 관계


 

죄와 벌의 전반부에서 로쟈가 범행을 저지르기 하루 전에 거리를 방황하고 술을 마신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에 삼일 째 거의 먹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술을 퍼마신 로쟈는 돌아오던 길에 숲에서 다리가 풀리고 기절하듯 잠을 자버린다. 이 때 로쟈는 무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린 로쟈는 아버지와 묘지로 가는 길에 술집 옆에서 벌어진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비쩍 마른 암말에 매어둔 짐마차에 여러 명이 탄 채, 말주인은 채찍과 몽둥이로 말을 죽도록 때린다. 결국 주인은 쇠 지렛대로 말의 등을 내려치면서 숨통을 끊어놓는데, 꿈속의 어린 로쟈는 비명을 지르며 피투성이가 된 말의 얼굴을 끌어나고 입을 맞추고, 눈과 주둥이에도 입을 맞추며 흐느껴 운다.


 

아마 많은 분들이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부분은 니체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에피소드를 연상케 한다. 니체의 연보를 보다가 발견한 사례인데, 니체가 45세이던 18891월에 있었던 사건과 관련이 있다. 니체가 머물던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그는 채찍에 맞는 말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싸 안다가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때 니체의 친구 오버베크가 바젤로 데려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니체는 죄와 벌에서 이 장면을 읽고 영향을 받은 바가 있을까?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니체에게 아주 큰 영향을 준 소설가임에는 분명하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다.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행운 중 하나다.이 정도라면 니체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인간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를 보여준 도스토옙스키를 정밀하게 읽고 그 영향이 고스란히 몸에 각인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간질환자라는 공통점 혹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예민한 감수성 같은 것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의학적인 소견은 아니지만, 간질 발작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후 두드러지는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도 간질로 고생했다. 그는 28세였던 1849년에 한 비밀모임에서 급진적인 비평가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짜인 각본에 의한 가짜 처형식이었지만 총구 앞에 섰다가 감형된 이후, 그는 이듬해에 수감된 감옥에서 처음 간질 발작을 경험했다. 니체도 말이 무자비하게 채찍을 맞는 현장에서 말에 대한 연민과 고통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간질 발작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죄와 벌에서 로쟈의 꿈과 니체가 20대 초반에 이 소설을 읽고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심리학적 주제가 될 수 있겠다. 분명한 사실은 니체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3] 알베르 카뮈의 전락(轉落)죄와 벌의 연관성


 

알베르 카뮈는 생의 말년이던 1956(당시 43)전락(轉落)(이정림 옮김, 범우사)이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카뮈가 정치 활동에서 은퇴한 후 언론계로 복귀한 시기에 쓴 장편소설이다. 파리에서 유명한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소설의 화자는 어느 날 밤 파리의 센 강에 있는 다리를 건널 때, 물속으로 투신한 여자의 소리를 듣고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친다. 양심의 가책이 내는 소리였을까. 그는 이후에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이후 네덜란드로 와서 사는 이 남자는 자신을 고해 판사라고 말하면서 소설 내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독백을 이어간다. 상황 자체가 그야말로 부조리한 경우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익명성 속에서 살면서 접할 법한 상황은 아닐까. 이 작품이 오로지 독백으로만 채워지기에 카뮈의 다른 책보다는 수월하게 나아가진 않지만, 꽤나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부조리한 연극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


 

나는 이 장면을 죄와 벌에서 다시 떠올렸다. 로쟈는 동생 두냐의 약혼자 루진과 충돌한 장면이 나온다. 이후 라주미힌이 로쟈의 돈으로 사다준 옷을 입고 술집에 들르는데, 이곳에서 로쟈는 경찰서 서기관 자메토프를 만나 내가 살인자라면 어쩔거냐고 협박하기도 한다. 범행 후 예민해져 있던 로쟈가 루진과 충돌하고, 술을 마신 다음 어느 다리를 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로쟈는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든 여자를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이 장면에서는 목격자가 많은데다 순경이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어 여자를 구한다. 나는 카뮈가 이 장면을 읽고 부조리한 상황을 설정해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전락(轉落)을 번역한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카뮈는 이 소설에서 부조리와 모순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만약 죄와 벌에서 나온 장면에서, 목격한 사람이 한 밤중에 나 혼자였다면, 나는(혹은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카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다소 무리한 상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찾아낸 무모한근거는 카뮈가 일종의 도스토옙스키 전문가(혹은 덕후?)’였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카뮈는 젊은 시절 알제 방송국 극단의 희곡 배우로 활동했고, 희곡 <아스튀리의 반란>을 비롯한 여러 희곡을 썼던 극작가이기도 했다. 아마추어 연극단체를 조직하기도 했고, 극단을 운영하며 배우 및 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959(46) 2월에는 앙트완느 극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각색하고 공연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이 연극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공연한 연극에서도 이반 역으로 무대에서 열연했다. 이 두 소설을 수도 없이 읽었을 카뮈가 죄와 벌을 읽지 않았을까? 그는 이미 생활이 극단 및 연극과 분리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죄와 벌의 운하 위 다리 장면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설정해보지 않았을까. 옆길로 새어 해본 상상이다.


 

여기에 카뮈가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꿰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근거가 한 가지 더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락(轉落)은 화자 혼자 등장하는 모노드라마 같은 소설이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장광설로만 채워진다. 이러한 형식은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도스토옙스키 고백록, 제윤 편역, 을유문화사, 이 책에 실린 소설)로 시작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견주어볼 수 있다. 이 중편 소설에서 화자인 는 소설 내내 전락(轉落)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독백을 이어간다. 카뮈는전락(轉落)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사용한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카뮈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열심히 탐구하면서, 그로부터 발견하고 알아낸 것들 준거로 삼아(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아주 잘 훔치고 베껴서) 자신의 창작으로 활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카뮈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도스토옙스키 덕후였으니까.



 

[4] 프란츠 카프카 변신과의 관계


 

죄와 벌을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카프카를 떠올렸던 것은 이 소설에 계속 등장하는 때문이 아니었다. 죄와 벌에 거미가 한 번 언급된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 로쟈가 소냐를 찾아가서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며 나누는 대화 중에 등장한다.


 

방금 당신에게 대학 다닐 돈이 없었다고 말했지. 하지만 알아? 난 다닐 수 있었는지도 몰라. 필요한 돈은 어머니가 보내주셨을 테고, 신발이나 옷, 빵을 살 돈은 내가 직접 벌 수도 있었어. 분명 그랬어! 과외 자리도 들어왔었어. 은화 반 루블씩을 제안했지. 라주미힌은 일을 하잖아! 근데 난 악에 받쳐서 하려 하지 않았어. 정말 악에 받쳤지! (좋은 단어야!) 그때 난 거미처럼 방구석에 몸을 숨겼어. 당신도 개집 같은 내 방에 와서 봤잖아... 소냐, 낮은 천장과 비좁은 방이 마음과 생각을 억압한다는 걸 알거야!”(2, 227)

 


카프카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로쟈가 범행 후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천장이 낮고 좁은 자신의 방속에 거미처럼 몸을 숨겼던장면에서 카프카는 책을 멈추고 새로운 상상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이를 테면 자신의 방 속에 해충으로 변신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읽었기에 20년이 지나도 기억이 남아 있다. 나는 변신을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에서 추가 직무 훈련을 받느라 몇 개월 더 머물던 때였다. 당시 저녁 시간 2시간 정도는 훈련생이 무언가를 읽을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책을 읽지 않던 시절이어서 내가 문고에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얇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공지영의 고등어같은 책을 진중문고에서 찾아볼 수 없었는데, 카프카의 이 소설은 어떻게 부대 내에 배치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소설 역시 부조리한 현실 혹은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무자비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말이다.


 

변신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전영애 옮김, 민음사)

 


지금 다시 이 부분을 보면 그레고르 잠자가 변한 해충은 죄와 벌에 등장하는 거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 실직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어느 사회든 위기가 찾아온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상황이 한 가족에게 닥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말이다. 카프카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었지만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도 일했던 경험이 있다. 그가 내일을 담보로 수익을 얻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간파하지 못 할리 없다. 특히 폐결핵을 비롯한 질병으로 여러 번 병가를 내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였다. 그러므로 카프카는 보험도 없이 위태롭게 살아가야 했을 수많은 가족들이 겪을 수 있는 현대인의 조건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설정해놓았던 것이다. 가족에게 돈을 벌어다주지 못하는 가장, 혹은 구성원은 가족에게 부담을 지우는 존재, 나아가 저거라는 사물로 지칭된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혐오를 고스란히 받게 될 상황을 떠올려보는 일은 그에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서로에게 지옥이 될 수밖에. 이 소설이 지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전염병으로 일상이 통제받는 상황에서 문을 닫는 많은 상점 주인들은 누구나가 우리 시대의 그레고르 잠자. 카뮈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처럼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을 그려낸 작가는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도스토옙스키를 탐독했다는 기록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로쟈가 전당포 노파를 무익하고 혐오스럽고 해악을 끼치는 이라고 대상화했던 장면에서 카프카는 작품의 모티프를 얻었을 법하지 않은가.



 

[5] 톨스토이 부활과의 유사성 및 함께 읽기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사람인 톨스토이(7살 연하임) 역시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톨스토이가 53세이던 1881년에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했을 때 톨스토이가 크게 슬퍼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탐독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죄와 벌에서 로쟈는 유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나는데 이때 소냐가 로쟈를 따라간다. 소냐는 그의 곁에서 인간이 새로워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마련해준다. 반면 부활에서는 카튜사 마슬로바라는 여인이 죄를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이동하는 과정에 귀족인 네흘류도프가 동행한다. 그는 귀족의 신분으로 젊은 시절 카튜사를 범했는데, 이 일로 그녀는 억울하게 쫓겨나 매춘부가 되었던 것이다. 죄와 벌에서 소냐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다만 이렇게 표면적인 유사성 말고도 두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부활은 톨스토이 사상의 진수가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에는 인간 특히 민중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닮아 있다. 다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한 인간의 부활 과정이 가능성으로만 암시가 되면서 소설이 끝나는 반면, 톨스토이의 작품은 바로 이 부분을 작가가 깊이 있게 탐구해나갔다.


 

나아가 집필에 10년이 걸린 부활에서 톨스토이가 참고한 실제 사건은 토스토옙스키가 작품에 활용했던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 기반한다. 역자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전신인 코니의 이야기불쌍한 로잘리야 오니와 그녀의 유혹자 이야기라 불리는 사건에서 소재를 취했다. 대신 톨스토이는 젊은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한 인간(네흘류도프)과 엄혹한 현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던 취약한 여인(카튜사) 두 사람이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새로워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두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작품을 함께 읽기를 제안해보는 것이다. 비슷해 보이는 설정과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며 각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 내게는 흥미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삶의 모습은 크게 달랐다. 한 사람은 도박과 간질로 힘든 삶을 살았다. 다른 한 사람은 부유했지만 작품의 저작권과 재산분배로 말년에 부인과 자녀 사이에 분쟁을 겪었다.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처럼 불행의 이유도 가지가지였던 셈이다. 그래도 두 작품을 비교해보니 두 작가가 사람에 대해 던지는 연민의 시선과 인간애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6]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과 도스토옙스키


 

글을 마치면서 죄와 벌에서 눈여겨본 대목 하나를 골라본다. 로쟈가 시베리아 감옥에서 앓아누워 있을 때 꾸었던 꿈에 대한 대목이다. 다소 길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라 빠르게 지나쳤을 수 있는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그는 사순절이 끝날 무렵부터 부활절 내내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이미 회복되고 한 후 그는 아직 고열로 헛소리를 하며 누워 있을 때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병중에 그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무서운 전염병이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유럽으로 퍼져 전 세계가 희생될 운명에 처한 꿈을 꾸었다. 선택받은 아주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새로운 선모충, 사람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미생물이 출현했다. 그런데 이 생물체는 지능과 의지가 부여된 영적인 존재였다. 그걸 몸에 받아들인 사람들은 바로 귀신이 들린 듯 미쳐버렸다. 하지만 전염된 사람들은 결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대단히 똑똑하고 진리를 흔들림 없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판단, 학문적 결론, 도덕적 신념과 믿음을 그 누구보다 더 확고부동하게 여긴 것이다. 마을 전체, 도시 전체와 사람들이 전염되어 미쳐버렸다. 모두들 불안에 떨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들 진리가 오로지 자기에게만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했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울고 손을 쥐어뜯었다. 누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어떤 걸 악으로, 어떤 걸 선으로 여겨야 할지 합의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무분별한 적의 속에 서로 죽여 댔다. 서로를 향해 온전한 군대로 뭉쳤지만, 이미 출정한 군대가 갑자기 자기 편을 죽이기 시작했고, 대열이 무너지면서 군인들은 서로에게 덤벼들어 찌르고 베고 물어뜯고 잡아먹었다. 도시에서는 온종일 경보를 울려댔다. (...) 각자 자신의 생각, 자신의 처방만을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일상적인 생업마저 내팽개쳐졌다. 농사도 짓지 않았다. 어디선가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몰려들어 뭐든 함께하는 데 동의하고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금세 방금 결심한 것과 완전히 다른 짓을 벌여서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하더니 주먹다짐과 칼부림이 일어났다. 전염병은 기세를 떨치며 멀리, 더 멀리 퍼져갔다. 전 세계에서 단지 몇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순결하고 선택된 사람들로, 새로운 인류를 낳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땅을 새롭게 정화하도록 예정된 사람들이었지만, 누구도 어디서도 그런 사람들을 보지 못했고, 누구도 그들의 말과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2, 429)

 


우선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무서운 전염병이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는 대목에 눈길이 멈추었다. 표면적으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깊숙한 곳에서 유럽으로 온 전염병에 흑사병이라고 불리는 페스트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이 질병은 유라시아 초원의 설취류에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로부터 날아와 덮치는 무소불위의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이 느껴진다. 인용한 부분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언급된다. 이 부분에서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한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을 떠올려본다. 이 소설 역시 전염병으로 인류가 모두 죽고 한 사람만 남는 이야기가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셸리가 남편과 한 명을 제외한 아이들을 모두 어려서 잃었던, 개인적인 아픔이 반영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셸리가 29세였던 1826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때는 도스토옙스키가 5살일 때다. 의사인 아버지를 두었던 도스토옙스키가 전염병과 선모충에 대한 지식에 무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만 이 부분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전염병이 추상적인 대상을 빗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렸을 때 셀리의 소설을 읽었을까. 알 수 없지만 상상해볼 뿐이다. 시기적으로 그가 이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신과 혐오만 남게 될 때,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도스토옙스키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성찰능력을 잃어버린 인류가 개별적인 존재로 분열되고 소외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우리에게 불신과 혐오만 남게 되면 인류는 이렇게 극한 상황으로, 나아가 멸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공상과학 소설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스토옙스키는 마지막으로 로쟈와 소냐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와 사랑의 감정을 암시하게 된다. 이제 죄와 벌을 읽으면서 옆길로 새고 헤매는 읽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다음에는 악령을 읽어보려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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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07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이건 뭐 재미로 읽을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전 오래 전 <죄와벌>을 나름 인상 깊게 읽은 정도지 이렇게 저렇게
상상하고 연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단순히 도 선생님이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건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몰랐는데 이제 좀 그림이 그려지네요.
참말로 고맙슴다. 수고하셨습니데이~^^

근데 이를 달고 사셨다니 대충 70년대 유년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군요.ㅋ

초란공 2022-01-07 22:03   좋아요 1 | URL
당분간 <죄와벌>은 잊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
명탐정 코난같으세요. ㅋㅋ 연대측정을 ^^;;

mini74 2022-02-10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초란공님 도선생님으로 2관왕 !!!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2-02-10 21:11   좋아요 1 | URL
지난 달에 도선생님을 너무 들들볶아대었군요. ㅋㅋ 자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2-10 18: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2관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2-10 21:12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2-10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2-10 21:12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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