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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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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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히말라야 >

(Becoming a Mountain: Himalyan Journeys in Search of the Sacred and the Sublime)

스티븐 얼터(Stephen Alter) 지음 | 허형은 옮김 | 책세상

 

 

 

(걷기의 철학)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육체적, 심리적 상처를 입은 저자 스티븐 얼터는 어느 문득 산행을 결심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았고 산사나이들에 대해 알지만 저자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 작가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사냥을 접고 대신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예순에 가까운 그가 집의 침입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서서히 회복한 산을 오르며 치유하는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스티븐 얼터의 기나긴 히말라야 등산기가 나에게 특별히 닿은 이유는 자신도 마음의 감기 불리는 우울증 경험해 적이 있어서이다. 자신이 산을 주로 오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살기위해서걸었더랬다. 집안에 박혀서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지 않기 위해 나역시 밖으로 뛰쳐나가 걷고 걸었던 것이다. 저자가 산행에 동행한 라투와 죽음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스러운 살아남는 과정이다라고 대목을 읽을 역시 스티븐 얼터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 시간이고 걸었다고 하는 시인 랭보가 나는 머릿속에 자리 잡은 유령들을 쫓아내기 위해 하염없이 걸어 다녀야만 했다.”(231)라고 말한 부분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내가 혼자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던 나의 걷기 경험은 이미 시인 랭보가 같은 이유로 무한히 걸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행을 했나라는 말이 나올법하게 저자는 힘겨운 산행을 결심하고 강행한다. 그는 그토록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스물 살때 걷기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50 중반이 되어 기나긴 산행을 기획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럴 이해가 되는 표현이다.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경험을 ,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말한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오래 살아온 스티븐에게 걷기란 도시인들의 걷기와는 다른 생활의 중심일 같다. 스티븐 얼터는 걷기를 물활론자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자연에는 존재하는 신성(神聖), 정의하기 힘든 존재의 발자취를 인정하는 의식”(223)이라고 썼다. 무엇보다 스티븐 얼터에게 히말라야 산행은 자유의지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부딫쳐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신성을 인지하는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티븐은 산행 과정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히말라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줄 아니라 걷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속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 철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도로와 닦인 길을 버리고 미답의 황무지를 찾아다니라라고 말한 소로의 생각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외친 니체의 철학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명상 행위로서의 걷기를 말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걷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 증진뿐만 아니라 명상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가우타마 붓다는 방랑하라. 물질적 부를 모두 버리고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줄 길을 찾아 나서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자체가 되기 전에는 길을 여행할 없다.”(218)라는 가우타마 붓다의 말은 과연 무슨뜻일까. 말은 저자의 기나긴 산행을 따라가며 줄곧 나에 숙제를 던져 준말이었다.  

 

       

 

(만다라의 철학)

산행을 하며 걷기의 철학을 상당히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수도승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는 만다라에 얽힌 이야기도 새롭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불교 수도승들이 며칠 또는 주에 걸쳐 완성하는 모래 만다라라는 완성된 직후,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없애버린다고 한다. 황당한 행위 또한 만다라의 과정에 속하는 행위로서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러한 행위를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더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정신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한 만다라를 짧은 경배 의식이 끝나면 바로 손으로 쓸어 없애버리는데, 이는 환영에 불과한 물질세계에 대한 은유이다.”(318)

 

 

 

(자연에 대한 신성함과 숭고함)

세속을 훌쩍 떠난 장소인 해발 5000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자연은 모습을 시시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히말라야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모두 신성과 얽혀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여러 인도의 신화 이야기에는 변신 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형신화는 히말라야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산을 타넘는 구름의 모습, 짙은 구름에 의해 가려진 산의 봉우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누군들 자연의 모습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있을까. 스티븐은 숭고함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감정적 현기증이다.”(356)라고 표현해두었다. 이런 감정을 저자는 책의 부제에도 밝혀 두었다. 신성함과 숭고함을 찾아나선 히말라야 산행이란 표현에서도 있듯이 산행을 통해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이 주는 경외감과 숭고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등반에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

스티븐은 결국 산행 과정에서 불길해보이는 꿈이 예언한 , 산이 도와주지 못해 산행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로 이렇게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언급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남은 절반의 여정인 돌아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독인다. 스티븐의 산행을 따라가며 그의 산행은 산이 거기에 있기에정복하려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있었다. 저자의 산행을 통해 그는 좀더 산이 주는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같다. 저자 스스로에게 전하는 자신의 위안 대목에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번 원정에 쏟아부은 모든 육체적, 물질적 자원과 희망, 기대들 하등 무익한 모험에 낭비된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옳은 결정들을 내렸음을, 그리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음을 앎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 , 패배를 받아들이되 우리 정신과 육체가 감당해야할 한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다.”(417)  

 

   책을 덮으며 문득 스티븐의 히말라야 산행은 자체가 만다라수행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를 손에 쥐고 정성껏 모양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오르는 산행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리고 오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 때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다라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순간임을 알게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전문 등반가들도 언제나 번의 시도로 산에 오른 사람은 없음을 스티븐이 만난 최고의 등반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오히려 그들은 전문 등반가가 되어갈 수록 산을 이해하고, 앞에 더욱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친애하는 히말라야 > 저자의 히말라야 정상 정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저자의 실패한 산행 기록을 따라가며 저자가 바라본 자연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너그러운 모습을 모두 있었던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지고 다른 저자의 산행기의 저자(브루스 채트윈) 책에 남긴 말도 오래 인상에 남는다. 저자의 동행 짐꾼들이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있게하루 동안 쉬어가야한다고 넉살좋게 주장하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산행 밤새 쉬지 않고 폭풍우를 겪은 아침, 해발 3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있다는 브라만카말 수만송이를 발견했을 꽃밭의 절경 모습과 저자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저자 스티븐 얼터 스스로의 치유과정이기도한 자신의 히말라야 산행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저자의 산행을 취재하는 기자와 같은 심정으로 읽어나갔던 여정이었다. 여운을 좀더 남겨두기 위해 다소 교훈적인 느낌은 나지만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기로 한다.

 

이런 운명론적 해석은 제쳐두고 우리는 계단식 논밭이나 , 돌와 댐을 얼마나 만이 건설하든 산은 항상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히말라야를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대신 연민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실체를 없는 신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산에 접근해야 한다. 고지를 정복하고 식만화하는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영토를 따먹기 하듯 차지하며 고산지대의 너그러운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우리는 산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존재이자 인간에 비해 무한히 영속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8면)
"우선, 내가 불굴의 존재라는 생각을 감히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의 도전을 넘어 나는 오히려 육신을 더 강하게 만들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69면)
"정상까지 오르는 데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발을 붙잡는 건 마음 속 공포였다."

(80면)
"산과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타인이 쓴 책을 전부 덮어버리고 오직 바위와 얼음에 새겨진, 혹은 저 위쪽 숲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새겨져 있는 말들만 읽는 것이다."

(135면)
"라투는 죽는 건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통스러운 건 살아남는 과정이다."

(159면)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산에 오른다."

-저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262면)
"챙겨온 책 중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노랫길>을 읽는데, 동행한 짐꾼들이 몇 구간을 강행하다 ‘우리 영혼이 따라잡을 수 있게‘ 하루 쉬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356면) 숭고함에 대하여
"에드먼드 버크나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인간이 자연의 가장 극적인 경이로움을 접하면서 경험하는 양면적인 반응을 ‘숭고함의 심미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산의 절경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에서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목격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조는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자아낸다. 한마디로 숭고함이란 우리를 불안하면서 동시에 감동에 젖은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정신적 현기증이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발밑으로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보다 더 불안하고 더 향정신적인 은유의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원시적인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존재를 찾아 자꾸만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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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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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궤적

- 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다산책방] (2025)

 





김주혜 작가의 밤새들의 도시를 읽은 지 몇 달이 지나 가물가물하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은 나탈리아다. 그녀는 러시아의 수석 발레리나가 된 인물이다. 이야기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 시절과 그의 탄생 이후 발레에 우연히 입문하게 된 사연과 성장기가 가족사와 더불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나아간다.

 


어느 분야든 정상의 자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 타인의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물, 나아가 자신의 완성을 열망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한편 이 여정은 다른 경쟁자와의 대결이면서 결국엔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 이른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 내뿜는 에너지와 사뭇 다른 이번 작품은 예술 분야, 특히 발레에서 한 재능 있는 발레리나가 정상에 오르는 과정과 내리막길의 서사를 담고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일은 치열한 자기 탐구의 시간을 요한다. 이 여정을 통과하는 이는 결국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신이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이를테면 자기 인정의 과정이 통과의례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예술의 완성이라는 목표가 삶과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나탈리아 주변의 모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은 각자 자신의 여정에서 예술적 지향점을 향한 열망이 가득한 존재들이다.

 


문제는 이 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나탈리아를 비롯한 동료 발레리나들은 모두 정상혹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치 구름에 가린 에베레스트처럼 가까이 다가가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이 각자 나름의 지향점을 열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정답은 없다. 구도자와도 같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는 기대와 욕구가 있을 텐데,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가끔 예술 활동이란 것이, 죽게 마련인 인간 존재들이 수행하는 일종의 구원 행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이는 정상급 예술가의 예술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삶의 구원을 향한 일상의 행위 역시 예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독립 영웅들에 모티브를 얻은 작품었다. 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작가의 한국적 소재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반갑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이 책에 활용된 이야기들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독립 영웅들의 이야기가 겹쳐 있어 어떤 부분은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외국인들에게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정서를 좀 더 내밀하게 소개하는 소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작업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소개된 밤새들의 도시가 좋았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 작가 자신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붙들고 탐구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보다 많은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소재로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성을 담고 있다. 또한 영화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가 특히 좋았다. 아마도 작가의 예술, 특히 발레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져서일 수도 있겠다.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소설의 흐름을 구분하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하나는 톨스토이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의 소설은 작가의 친절하고 치밀한 묘사와 설명이 풍부하다. 묘사가 디테일한 작품이 많다. 이중 가끔은 톨스토이처럼 글에 담긴 정보나 흐름의 방식이 TMI라고 느껴지는 대목도 종종 만나게 된다. 반면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소설의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분위기로 성취해내는 작품들이다. 이른바 체호프 스타일이다. 대체로 큰 사건이나 변곡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대화와 대화 사이, 장면의 분위기를 통해 인물의 심리가, 고뇌가 보이는 듯한 소설이 그것이다. 이 스타일의 대표 작가라면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들이다.

 


이 두 가지 소설 스타일 중에서 김주혜 작가의 스타일은 톨스토이 스타일과 체호프 스타일 사이의 어디인가로 느끼는데, 내겐 톨스토이 스타일에 좀 더 가까운 것처럼 느낀다. 대신 작가의 문장은 TMI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반면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가 압권이라 여겨질 때가 있다. 이런 특징이 전작 보다는 밤새들의 도시에서 만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책읽기를 늦게 시작한 나에게 작가의 작품은 첫 작품부터 지켜보며 함께 나이드는 기분이라 남다른 느낌을 받는다. 세월이 지나 세계적인 대작가로 인정받게 되면 좋겠다. 그때는 나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세월과 함께 다 읽어가고 있지 않을까.

 


소설의 자세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밤새들의 도시의 책장을 덮은 후의 감흥은 아직 남아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맑은 하늘을 마구 가로지르는 비행운들처럼 걸려 있는 소설이다.






"용기를 가지시오. 신이 결정하였다면 우리의 갈 길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니."
- 나탈리아의 생부 니콜라이가 재인용한 단테의 문장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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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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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찾으려 하는 우리의 관습에 장렬한 똥침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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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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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상상력이 비추어 준 인간의 초상

-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2012)

 



아마도 걸리버 여행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소인국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도배된 어린이용 도서 이후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는, 나를 포함하여 매우 드물 것 같다.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1장과 2장은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을 만나 거주민들과 교류하며 여러 가지 대비를 보여준다. 특히 걸리버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가 처한 위상에 따라 다른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는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 4(소인국거인국-라퓨타-휴이넘 왕국)에 순서대로 도달하는데, 그가 이곳에서 겪는 167개월의 여정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처음 방문하는 소인국에서 그가 처음 상대하는 작은 인간은 중년의 고위 관리다. 걸리버는 이방인임에도 이곳에서 자신이 지닌 신체적 우월함을 적극 활용한다. 불이 난 궁전 위에서 거대한 폭포수 같은 소변을 누어 화재를 진압하는가 하면, 이웃하는 섬과의 전쟁에 개입하여 상대국의 전함을 한 손에 끌고 옴으로서 전쟁을 종식하는 일에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위치에서 왕국을 보호하는 선한 신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의 지위는 거인국에서 정반대로 뒤바뀐다. 돌봄을 받고 보호받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우월감을 느끼는 거인들 앞에서 작고 무기력해 보이는 존재가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이며 주목을 받고, 급기야는 많은 거인들 앞에서 전시되기도 한다. 마치 아프리카의 코이산족(문명 세계에서 부시맨이라는 경멸적인 별칭으로도 불리는) 몇 명이 유럽인들 앞에서 거의 나체 상태로 전시되었던 역사적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1700년대에 유럽의 남성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을 내세워서 그를 상대화해보고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도는 상당히 신선한 실험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그는 거인국에서 주인집 딸의 돌봄을 받고, 나중에는 여왕에게 기쁨을 주며 돌봄을 받는 피보호자의 신분으로 지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거인국 브롭딩낵에서 언제나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는 여성으로 전형화되어 있다.


 

한걸음 나아가 인상적인 장면은 걸리버가 보여주는 남성성의 부재다. 예를 들어 짓궂은 거인 여자 하인이 자신의 가슴 위에 걸리버를 올려놓고 희롱한다던가, 걸리버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 있는 행위는, 그의 존재 자체를 투명인간처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자 하인을 보는 걸리버가 불쾌감을 강하게 느끼는 장면을 보고 혹자는 걸리버의 창조자조너선 스위프트가 성불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 모양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의 행위 몇 가지로 작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는 다소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 견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표피적인 특징이라는 결론에 가깝다.


 

오히려 그가 밝힌 바는 없지만, 동성애적 성향 같은 퀴어한 성향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말이 지배하는 휴이넘 왕국에서 인간을 닮은 야만적인 야후들중 한 암컷 야후가 강에서 목욕하는 걸리버를 덮치려고 했을 때, 지극히 혐오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나,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에 돌아왔을 때 동료 인간을 혐오하고 심지어 아내를 야만적이고 냄새나며 더러운 존재로 경원시하는 장면을 보면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나 행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걸리버의 몇 가지 모습만으로 저자를 성불구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좀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에서 더 들여다볼 때 걸리버가 보여주는 행동은, 성적불쾌감을 주는 대상이 남성이나 여성의 구분이 없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불쾌감을 주는 주체가 남성만도 아니며, 이는 특정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우월적인 지위 아래 이루어지는 역학 관계라는 것, 나아가 인권에 관한 문제라 파악할 수도 있겠다. 이쯤 되면 소인국의 세계는 남성적인 규범과 질서의 수호자로서 걸리버를, 거인국에서는 제한적이나마 여성적 규범과 미덕이 두드러지는 세계의 수혜자로서 걸리버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작가 스위프트는 걸리버가 처하게 되는 환경의 스케일을 달리함으로써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셈이다. 이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상대화하는 실험을 해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걸리버가 확연히 다른 왕국 네 곳을 여행하고 다시 복귀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한 기회로든 자연의 거대한 힘에 의해서든, 걸리버는 새로운 왕국에 갈 때마다 그곳의 언어를 빠르게 배우며 소통에 성공하고야 만다. 18세기임에도 보기 드문 현지 적응 능력이다. 이 점이 너무나 매끄럽다고 느껴지긴 한다. 또한 그의 자세는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딜 때 나는 문명화된 유럽 국가에서 왔다는 자의식을 놓지는 않는 듯하다. 소인국에서는 소인들과 그 왕국에 대한 우월감으로 활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거인국에서는 보살핌을 받으며 다소 무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이성으로 이룩된 문명국에서 왔음을 끝없이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열심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내가 여기서 주목한 지점은, 걸리버가 어느 왕국을 가더라도 그 지역의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름의 악습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악습의 종류는 다르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가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인간 혐오자가 되어 돌아온 듯하다. 인간 존재 자체를 악에 물들기 쉬운존재로 규정하며 꽤나 냉소적인 인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이런 관점과 태도를 유지하는 한, 그가 n번의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결국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이 의문이었다. 소설에 소개된 네 군데의 왕국은 어쩌면 인간의 다른 모습을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일 수 있기에, 그가 수많은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가 어김없이 인간의 부정적인 면모와 악습을 더 많이 발견할 것만 같다. 따라서 걸리버가 수많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워온다 한들, 개인의 내면이 자기 종족인 인간에 대한 혐오와 멸시, 냉소로 채워진 인물이 무엇을 새로 배우거나 건설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문제는 걸리버 자신이 발을 딛고 선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인간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거두고 작은 희망을 되찾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테다. 또 어떤 사회의 규범이 그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과 충돌할 경우, 그 규범의 존재 가치를 재평가하고 수정해 나가거나 새로운 규범까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걸리버가 동료 인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잘 이해하고 포용하여 인간애를 되찾을 수 있다면 소설의 마지막에서 말하듯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에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375)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악덕이 가득해 보이는 세계에 살면서도 이따금 희망이 닿는 지점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책속으로]

[1] "적어도 덕성을 지닌 사람이 잘 몰라서 실수를 하게 될 경우에도, 악덕한 기질이 가지고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적당히 처리하거나 변호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의 행위처럼 사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9, 제1부 릴리퍼트 기행) - P69

[2] "이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친절한 독자들은 용서를 해주기 바란다. (...) 매사를 깊이 사고하려는 현명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사고와 상상력을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여행을 비롯한 여러 여행기를 세상에 내보내는 이유다."(116,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16

[3] "왕은 로열 서브린 호의 돛만큼 커다란, 하얀색의 왕홀을 가지고 뒤에 기립해 있는 대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인간의 위대함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같이 작은 벌레도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다니 말이다."(132,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32

[4] "그대의 이야기와 내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167, 거인국 국왕이 걸리버에게 한 말) - P167

[5]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영국의 독자들은 그의 인품에 대해 낮게 평가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큰 사람들의 이러한 결함이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물질문명이 이룩한 것처럼 정치를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171,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1

[6] "많은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거인)도 인류 전체가 겪고 있는 똑같은 악습으로 인해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귀족은 권력을 위해, 시민들은 자유를 위해, 왕은 절대적인 지배력을 위해 서로 다투어 왔다."(174,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4

[7] "그들을 서로 비교해보니, 로마의 원로원은 영웅과 반신반인의 모임처럼 보였으며, 오늘날의 국회는 봇짐장수, 소매치기, 강도, 깡패들의 집단처럼 보였다."(24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49

[8]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나는 가끔씩 생각하고는 했다. 스트럴드블럭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영원한 생명과 죽음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가 가장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은 불사신들이다."(266-267,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6

[9] "죽지 않는 생명을 얻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최대의 적으로 여기면서 하루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하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도망을 치게 마련이다."(26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9

[10] "혈연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싸우고 싶은 욕망은 커지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는 궁핍하고, 부유한 나라는 교만하다. 교만과 궁핍이 부딪히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군인은 가장 명예스러운 직책으로 간주된다. 군인이란 그를 결코 공격한 적이 없는, 그와 같은 종족을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고용된 야후이기 때문이다."(315,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5

[11] "나는 돈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예나 다름없다."(318,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8

[12] "나는 주인을 따라서 모든 허위나 기만에 대해 완전한 혐오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했다."(329) - P329

[13] "정부와 법률 체계는 막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이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331,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31

[14] "호수나 샘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나는 한 마리의 야후에 불과한 자신에 대해 증오와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자신의 모습보다는 차라리 야후들의 모습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353,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53

[15] "훌륭한 이성을 지니며 살고 있는 휴이넘은 자신들의 좋은 덕성에 대해 교만스러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튼튼한 다리와 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다리나 팔이 잘린다면 슬픈 일이지만,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다리와 팔이 건강하다고 해서 교만한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이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도덕함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날 생각조차 하지 않기를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경고한다."(375, 마지막 문장)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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