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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철학으로 <모비딕> 읽기


플라톤, <파이돈>, 전헌상 옮김, 아카넷, 2020

 




플라톤 철학은 서구 정신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2400여 년 전에 태어난 한 철학자의 사상적 유산이 큰 공감을 얻고 종교와도 접목되며 살아남아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정초해 놓았다. 구체적으로 그는 대화 형식의 여러 철학서를 후세에 남겼는데, 그 가운데 후대의 수많은 사상가나 작가가 꾸준히 언급하여 제목도 익숙한 <파이돈>, <변명>, <국가>등 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나는 이 가운데 영혼의 문제를 다룬 <파이돈>에 먼저 주목해 보았다. 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자신의 제자 및 벗과 함께 나눈 철학적 대화를 재구성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앞에 내려진 죽을죄는 그가 당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그리스의 신을 온전하게 믿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범박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에 내몰리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며 발버둥 치지 않을까. 놀랍게도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행보는 믿기 힘든 반전을 보여준다. 제자와 벗들이 감옥에 모여 뇌물을 써서라도 감옥에서 탈출할 것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당당히 죽음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이미지에 골몰한 나머지 죽음을 열망하는사람처럼 말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미치지 않았다. <파이돈>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철학자가 죽음을 열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사실 삶에 대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철학자는 오히려 우리가 삶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영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대화를 통해 일깨워준다.

 

이 논의에 접근하려면 우선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 곧 플라톤의 인간관을 먼저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완전하고 영원한 신과 달리 인간은 불완전한 필멸의 존재다. 물론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기도 했다.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과 신체로 구분되는 영역으로 구성됨을 이야기한다. 서양사상의 전통 가운데 중요한 주제인 심신이원론의 뿌리도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엿보인다. 플라톤의 주요 저작 중 <변명>, <크리톤>, <파이돈>, <소피스트>, <알키비아데스>을 읽어 가면서 주목할 수 있었던 점은 인간의 영혼과 신체의 구분에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체는 가시적이면서 끊임없이 변하여 결국 소멸하는 대상이다. 반면 영혼은 비가시적이며 영원히 존속하여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이다. 감각적인 것의 근원인 신체는 이성(logos)의 근원인 영혼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 철학에서 신체는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틀과 같다. ‘신체는 감옥이라는 표현마저 보인다. 신체의 욕구에만 충실한 삶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 나아가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플라톤 철학은 존재를 구속하는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한 철학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이 주제,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은 서양사상에서 끊임없이 논의되어 온 큰 흐름을 유지하는 주제다. 이런 시각을 한 가지 방법으로 삼고 지혜를 사랑하는 일을 우리의 철학함과 연관지어볼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신체의 구속과 욕망으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일이 지혜를 사랑하고 철학 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지향은 신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으로 보았던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과정, 곧 철학 하는 일과 죽음의 상태를 열망하는 일 모두가 신체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과정과 구조상 유사한 까닭이다. 이제 <파이돈>에서 철학 하는 삶은 죽음을 열망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철학자로서 죽음을 열망하는 태도를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무턱대고 죽음을 열망하는 것과 구분한다. 평범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이건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신체와 더불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시급하다는 함의를 지닌다.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일은 우리가 노예 상태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함이니까.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야말로 서양 사상사의 주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플라톤 철학으로 소설 읽기


플라톤의 <파이돈>을 통해 그의 사상 일부를 접할 때 생각난 소설이 있다. 허먼 멜빌의 낭만주의적이고도 비극적인 소설 <모비딕>이다. 소설 전체가 플라톤 철학의 구현이 아닐까 싶은 요소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이 소설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이유로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플라톤 철학과 소설 읽기가 낯설고도 동시에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쫓으면서 <모비딕>을 펼쳐보니 눈길을 끄는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참고래가 생전에 스토아 철학자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주의자인 향유고래가 말년에는 스피노자를 친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478)

 

멜빌은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은 숙명론자의 입장이면서 이성을 중시하는 금욕주의자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 멜빌은 참고래로부터 이러한 숙명론자이면서 금욕주의자인 면모를 읽어냈던 것일까. 멜빌이 남겨놓은 참고래가 스토아주의자라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참고래 머리의 표정을 보라. 그 놀라운 아랫입술이 우연히 뱃전에 짓눌려 턱을 단단히 감싸버린 것을 보라. 이 머리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강력한 실제적 결의를 말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모비딕>, 작가정신, 468) 아마도 멜빌이 스토아주의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했을 법한 인물이 소설의 1장에 언급되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일명 소카토)일 것 같다. 카토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로, 공화정을 옹호하며 카이사르에 대항했다가 실패하자 칼 위로 몸을 던져 자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멜빌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굳은 결심의 인간 전형으로 스토아주의 철학자였던 카토를 1장부터 언급한 것이다. 그는 참고래의 모습에서 굳게 결심한 듯한 스토아 철학자의 모습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이와 달리 플라톤주의자인 향유고래는 숙명론자의 특징을 지니면서도 물질보다는 관념’, ‘신체보다는 영혼을 중시하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특징을 향유고래로부터 읽어낸 것이 아닐까. 멜빌이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한 이유의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에는 죽음에 대한 명상적 초월에서 유래하는 대초원 같은 평온함이 충만해 있는 듯하다.”(<모비딕>, 작가정신, 468) 특히 향유고래는 죽을 때 태양을 향해 방향을 틀고 죽는다는 표현도 숙명론적이면서 영적인 존재로서의 향유고래를 강조한다.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더라도, 굳은 결심으로 죽음을 대하는 스토아철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서도 초연했던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떠올렸을 법하다. 멜빌이 거대한 서사를 계획하고 준비할 때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작품 속에서도 드러낸 점이 흥미롭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장면을 철학책의 기본 구도로 활용한 <파이돈>을 직접 언급한 대목도 살펴보자.

 

이 자리에서 낸터컷의 선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충고하겠다. 경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포경업에 이마가 좁고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를 채용하는 것은 조심하기 바란다. 그런 젊은이는 시도 때도 없이 명상에 잠기기 일쑤고, 보디치의 <항해술>대신 플라톤의 <파이돈>을 머릿속에 넣고 배를 탄다. 이런 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고래를 죽일 수 있으려면 우선 고래를 보아야 한다.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 플라톤 숭배자는 세계를 열 바퀴나 돌아도 고래기름을 한 통도 보태주지 못할 것이다.”(<모비딕>, 작가정신, 243)

 

영혼을 신체보다 우월한 대상으로 보았던 플라톤 철학 중에서도 특히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파이돈>을 작품에서도 언급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직면하여 탈옥하라고 권유하는 제자 및 벗들의 말에 오히려 기꺼워하며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하며 영혼 불멸에 관한 논증을 제시한다. 이것이 <파이돈>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플라톤 철학, 그중에서도 <파이돈>을 인상 깊게 읽고 글을 써내려갔을 소설가를 상상해 본다. 위의 인용 문장에서 플라톤 숭배자인,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는 화자인 이슈메일 자신을 암시할 수 있지만, 정작움푹 들어간 눈에 대한 평을 들은 바 있는 사람은 작가 허먼 멜빌이다.

 

멜빌이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과 교류를 시작한 시점은 <모비딕>의 원고를 쓰던 1850년 즈음이다. 이때 호손의 <주홍 글자>(1850)가 나왔으므로 멜빌은 집필 직전이나 과정에서 이 책을 접했을 것이다. 특히 15살 연하였던 멜빌이 호손의 칭찬을 받았던 일은 멜빌이 작가로서 자신감을 얻고, 호손을 자신의 멘토로 여겼을 것이다. 멜빌은 기회가 되면 호손을 여러 번 찾아간 듯하다. <사악한 책, 모비딕>을 쓴 너새니얼 필브릭은 호손의 부인 소피아가 집에 찾아온 멜빌의 눈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피아는 멜빌한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작은 눈이라고 했다. “가끔 활기가 수그러들고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 그 눈이 두드러지게 조용한 기색을 띨 때가 있어요. 내면을 향하는 듯한 흐릿한 표정인데 동시에 그 순간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을 매우 깊이 새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기이하고 게으른 시선인데 그 안에 무척 독특한 힘이 있어요. 사람을 꿰뚫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한 눈빛이에요.

(너새니얼 필브릭, <사악한 책, 모비딕>, 홍한별 옮김, 교유서가 59)

 

소피아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보면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 플라톤 숭배자는 다름 아닌 허먼 멜빌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멜빌은 거대한 몸집에 지극히 작은 눈을 지닌 향유고래의 모습에서 자신과 동일시하며 플라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읽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죽음에 대한 명상적 초월의 덕목을 향유고래에게서 읽어 낸 대목은 <파이돈>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짐작케 한다.

 

<모비딕>이 플라톤 철학의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다음과 같다. “꿀이 가득 든 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거기서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모비딕>, 작가정신, 478) 이 부분은 포획한 향유고래의 머리 부분에서 경뇌유를 길어내던 인디언 작살잡이 태시테고가 향유고래의 머리에 빠진 직후, 고래의 머리가 바다로 떨어져 가라앉게 된 사건에 나온다. 작살잡이 퀴퀘그가 바다로 뛰어들어 태시테고를 구출한 후 이슈메일이 남기는 대목이다. 이때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은 무엇보다 <파이돈><변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영혼을 돌보는 일이 신체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에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한 사람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대목을 살펴보자. 향유고래를 잡아 죽인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흑인 요리사 플리스 영감을 밤에 불러 고래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스터브는 자신이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뱃전에 묶어 놓은 고래를 뜯어 먹는 상어를 향해 얌전히 있으라는 연설을 시키는 장면이다. 요리사 영감이 마지못해 상어에게 전하는 연설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탐욕스러운 것을 그렇게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타고난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그 못된 천성을 억제하는 게 중요하단 말이다. 여러분은 상어지만, 근성을 억제하면 여러분도 천사가 될 수 있다. 천사라고 해서 모두 다 상어 근성을 잘 억제한 상어보다 훌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비딕>, 작가정신, 419)

 

플라톤 철학을 떠올릴 때 이 부분이 흥미로웠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영혼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파이돈>에서도 영혼의 불멸을 언급하며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존재를 지속한다고 말한다.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고 돌보며 영혼을 정화하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에서도, 그가 인간의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인간 고유의 욕망, 탐욕을 감각적인 것, 신체적인 것으로 보고 이러한 천성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흑인 요리사 플리스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이 덕목은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4가지 덕목(지혜/용기/절제/정의)을 떠올리게 하는데, 플라톤은 신체를 지닌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일정하고, 이를 절제라는 덕목을 통해 훌륭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것이 필멸의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과제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멜빌의 표현에 따르면, ‘천사는 절제의 덕을 훌륭하게 따른 결과인 셈이다. 반대로 절제의 덕과 함께 천사도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다면 언제든 상어와 같은 악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전언이다. 소설 속의 이 장면은, 우리 인간 역시 스스로 영혼을 끊임없이 돌보지 않으면 언제든 천사에서 탐욕스러운 상어가 될 수 있다는 철학을 서사에 녹여내었다.

 

포경선원들은 포경선에 오르기 전에 계약서에 배당과 함께 사인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남태평양에서 문명 세계로 나와 작살잡이가 된 퀴궤그 역시 3-4년 간의 바다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면 받게 될 배당과 노동계약서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모비딕>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작살잡이 퀴퀘그는 자신의 계약서에 사용하는 서명이 없기에 자신의 팔에 새겨진 문신의 문양을 서명으로 사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모비딕>의 판본마다 퀴퀘그의 서명(정확히는 서명이 아니므로 그의 표시)이 다르게 나오는데, 판본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X', '', '' 의 세 가지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멜빌이 의도한 퀴퀘그의 서명이 ''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영어 원서의 묘사에 'a queer round figure'(기이한 둥근 모양/문양)라는 표현 때문이다. 이 표현이 있음에도 몇몇 번역서들은 곡선이 보이지 않는 ‘X'''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부분의 번역을 생략한 번역서도 보인다. 반면 몇몇 판본은 기이한 둥근 모양/문양이라고 번역하고, ''를 퀴퀘그의 표시로 제시한다. 원서의 표현을 참고한다면, 유일하게 이상한 곡선이 들어간 표시로 ''이 사용됐을 것이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플라톤주의자를 자처하는 화자와 만났을 때,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보는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있던 피타고라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주의 원리를 수를 통해 탐구하는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수비학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성격,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종교 지도자의 아우라가 있었던 모양이다. 피타고라스는 무한의 개념을 인지하고 있던 인물이기도 하기에, 무한을 나타내는 기호 역시 '' 역시 이교도적인 요소로서 이교도인 작살잡이 퀴퀘그의 팔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있다. 이 무한대 개념은 <파이돈>의 주된 논증 주제인 영혼 불멸과 관계가 있다.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언젠가 물질 세계에 있는 신체와 만나 환생할 수 있다는 영혼 회귀의 기본 개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은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신성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모비딕>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분명히 이마가 좁고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 ‘플라톤의 <파이돈>을 머릿속에 넣고 배를 탄젊은이는 바로 허먼 멜빌이었던 셈이다.

 

이제 거리를 두어 <모비딕> 전체를 조망해 보자. 소설의 시작은 돈이 궁핍해지고, 영혼이 을씨년스러워 우울감에 빠진 채 갈 곳 없이 배회하는 청년이 권총과 총알 대신 바다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이슈메일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한편 소설의 마지막은 모비딕의 공격을 받고 피쿼드호가 침몰한 후 혼자 살아남은 이슈메일의 독백으로 끝난다. 소설은 이슈메일이 바다로 향하는 대목으로 시작하여, 그가 바다로부터 구출되어 나오는 대목으로 끝난다. 이슈메일은 큰 사고를 겪었으니 이제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육지에서의 삶이 또다시 피폐해지고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이슈메일은 또다시 바다를 생각하고 바다로 나가게 될 운명은 아닐까. 이는 플라톤의 영혼 불멸영원 회귀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육지는 물질적 세속의 세계이며, 바다는 영혼이 신체를 벗어난 죽음의 세계혹은 영혼을 돌보는/혹은 영혼 정화를 위한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을까 싶다. 영혼 불멸영혼 회귀의 개념 역시 이교도적인 성격,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피쿼드호의 흑인 소년 을 생각해 본다. 핍은 포경선에서 사람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때론 탬버린을 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고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망망대해에 빠진 후 정신을 놓게 된다. 문자 그대로 백치가 되어 버려 그의 영혼은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의 신체는 껍데기로만 남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바다라는 공간을, 영혼을 돌보며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본다면, 여기에는 분명 위험 요소도 있다.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 신체를 이탈한 영혼은 정화된 상태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핍은 이러한 사례를 보여준다.

 

피쿼드호가 모비딕의 일격을 받고 침몰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바다를 거대한 수의로 언급한다. 바다는 신체를 지닌 생명의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는 죽음의 공간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다는 철학자가 죽음을 열망하듯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형이상학적 공간일 수 있다. 피쿼드호의 침몰 직후 포경선의 목수가 퀴궤그를 위해 제작한 관을 봉해 마련한 부표가 물 위로 떠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슈메일은 죽음을 상징하는 관-부표를 타고 다시 삶을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그러니 바다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이면서, 신체와 영혼이 합일하거나, 혹은 분리되기도 하는 제3의 무대인지도 모른다. 핍의 사례나 이슈메일이 소설의 시작에서 바다로 들어가고 다시 바다에서 육지로 나오는 일련의 과정은 소설의 기본 구도가 플라톤적이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모비딕>은 방대한 소설이다. 소설 쓰기 작업에 사용되거나 언급된 참고도서 만큼이나 많은 요소가 작품에 기여했다. 여기에는 작품에 영향을 준 요소로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그의 문체, 사회적 악의 문제를 다루는 너새니얼 호손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또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나아가 소설 전체의 기본적인 구도까지, 그리고 영혼과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문제를 고려한다면, <모비딕>은 그 자체로 플라톤 철학의 소설적 구현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에 기대어 <모비딕>을 읽을 때, 우리는 플라톤주의자이슈메일의 영혼 뒤에 가려진 허먼 멜빌의 영혼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모두 그가 남긴 철학의 주석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2000여 년 전에 한 철학자가 남긴 사유의 흔적을 이토록 후대인들 역시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인류가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플라톤 철학은 바로 이 문제를 직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의 사유 속에 머물게 될 듯하다.

 

멜빌이 포경선을 타게 될 선원들에게 설교하던 매플 목사의 입으로 필멸의 인간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영원히 산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모비딕>, 작가정신, 106) 삶과 죽음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인류의 영원한 과제다.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이 바로 플라톤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책 한 권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앞서 우리의 영혼과 삶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남겨놓았다. 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새롭게 만나게 된 화두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언젠가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우리가 나누게 될 마지막 이야기는 무엇이 될까. 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새롭게 만나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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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에 관한 단상:

 <목로주점>과 <제르미날> 들여다보기


 

에밀 졸라, <제르미날>,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4)





 몇 년 전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다 읽고 곧바로 팔았던 기억이 있다. 작가가 묘사해 놓았던 도시 빈민가 노동자들의 삶을 따라가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던 까닭이다. 끝없이 추락하는 삶을 들여다보니 내 저질 체력에 남아 있던 에너지 마져 고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이건 작가의 사실적이고 집요한 관찰과 글쓰기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독자로서는 꽤나 힘든 독서 경험이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제르미날>을 만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몸이 조금 경직 되었던 것 같다.


오늘 들여다보는 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은 문학비평가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에서 언급된 '스타일'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모방'이라는 의미의 '미메시스'에는 현실에 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우리가 '현실 Reality'을 이야기 할 때, 이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의문이다. 거칠게 이해한 바대로 표현하자면, '미메시스'란 개념은 현실의 사진적 재생산이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는 주체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에 더 가깝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재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재하는 '현실'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정리해보면, 어느 작품의 '스타일'을 말할 때, 그 작품이 주는 시선과 감각, 현실의 묘사는 모두 작가라는 존재를 매개하여 재구성된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에밀 졸라의 '스타일'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특히 <미메시스>는 유대인이었던 저자가 나치를 피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서 했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까지를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거대한 문학의 흐름을 스타일의 변화 과정이라는 틀 위에서 논의한다. 특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서양의 두 기둥에 기반하는 '스타일'을 규정한다. 계급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스타일이 점차 민중이 목소리를 얻고 일상성이 작품에서 보다 진지하게 다루게 지면서 변화된 스타일을 조망하는 인상을 준다. 
























이 중에서 에밀 졸라는 사실주의의 맥을 잇는 자연주의의 실천자로서 언급된다. 1840년에 출생했으므로, 그의 생애는 현재의 파리 모습을 정비했다고 할 수 있는 파리 지사 오스망의 시대(파리 정비 기간은 1850-60년대)와 겹치고, 또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2공화국 및 제2제정 시기와 겹친다. 한편 1859년에 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가져온 유럽 지성계의 사건은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 에밀 졸라에게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기운 속에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적 시선이 무르익었을 테다. 사실주의에서 나아간 자연주의는 무엇보다 당시의 과학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고 이해된다. 현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찰과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이 실증주의적인 시선은 청년 에밀 졸라의 세계관의 틀을 주조했을 것이다. 


그가 58세이던 1889년에 당시 공화국이었던 프랑스 대통령앞으로 편지를 보냈던 사건, 곧 유대인 프랑스 장교 드레퓌스의 무죄를 탄원하는 편지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일간지에 보냈던 일이 있었다.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던 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에밀 졸라가 기꺼이 들어갔던 일은 작가가 평생 추구한 실증주의적 시선을 통한 진실의 힘을 본인이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당파가 아니라도 진실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도 숭배와 혐오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아마도 그의 용기와 진실의 승리를 믿는 무리가 있는가하면, 그의 존재 자체를 외면하고 싶었던 무리도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인물이었기에, 그가 3년 후 가스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이 사건이 정적에 의한 죽음이라는 음모가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미메시스>의 저자  에리이 아우어바흐가 소개했던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들여다보자. 에밀 졸라는 당시에 교류하던 공쿠르 형제의 문학적 지향(일반 평민, 노동자들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에 대해 크게 공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생각에 고무되어 소위 '루공-마카르 총서'를 기획하기에 이른다. 20권에 달하는 이 총서 연작은 '혈연적 인연을 맺게 된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기획이다.  <제르미날>의 역자는 해설에서 루공-마카르 총서를 "제2제정기 한 가문의 자연사와 사회사"를 다루었다고 정리했다. 이 작업은 아마도 우리의 대하소설 <토지><혼불>, <태백산맥>과 같은 문학적 성취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문학적 시도를 우리도 앞으로 더 기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대가 이미 변했기 때문이다.


<제르미날>의 시간적 배경은 에티엔 랑티에라는 20살의 기계공이 해고된 후 추운 늦겨울에 일자리를 찾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때는 에티엔이 1866년 3월 파리 북부 가상의 도시 몽수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끝은 1년 후인 1867년 4월이다. 소설은 이 13개월 간의 이야기다. 가상의 도시 몽수는 프랑스어로 '돈으로 만들어진 산'이란 의미를 지니는 탄광 지대다. 이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을 캐는 광부로 살아간다. 참고로 1860-1870년대의 프랑스는 전반적인 산업이 위기를 겪었고, 특히 탄광의 파업과 충돌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50-60년대의 파리 시가 정비를 비롯하여 운하나 거대 토목 사업 뿐만 아니라 1860년대에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하던 멕시코 전쟁의 여파 등을 고려하면 거대한 자본이 평민들의 삶을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놓고 소설과 만난다면 <제르미날><목로주점>에서 읽을 수 있는 빈민가와 가난한 노동자들의 '체념과 절망'을 조금은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수로부터 뽑아낸 자원과 노동력 등을 소수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만 쓰인다면 다수의 삶은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2024년 현재의 대한민국 처럼 말이다. 



건조하게 요약한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스포일러 있음). 


주요 인물인 에티엔 랑티에는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사생아(1846년 출생)다. 어릴 때 기계공 견습생이 되기 위해 프랑스 북동부 벨기에와의 접경 지역인 릴로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르미날>에서 그는 철도 작업장에서 책임자의 뺨을 때리고 해고되어 일주일동안 추위와 배고픔 속에 일자리를 찾아 여러 지역을 전전하던 중, 파리 북부의 가상 도시 몽수의 탄광 지역에 도착한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결원이 생겨 르 보뢰 탄광의 탄차 운반부로 일하게 되는데, 같은 작업반 동료 마외의 집에서 10명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들의 집안은 5대째 광부로 일해온 가문이다. 마외네는 아내 라 마외드(39세), 아버지 본모르 영감, 그리고 21살 장남 자샤리부터 이제 막 3개월 된 막내 에스텔까지 7남매가 북적이는 광부의 집이었다. 


 당시 산업의 위기와 탄광의 경영난으로 엔보 사장은 노동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노동계약을 광부들에게 제시한다. 이에 광부들은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이들은 당장 더 굶어야 하는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터에서는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갱 내부의 부실한 안전 시설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은 참아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족을 모두 굶기는 상황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점차 탄광 일에 적응해가는 에티엔은 이러한 동료들의 현실과 탄광회사의 횡포에 분노한다. 에티엔은 파리의 마르크스주의자 플뤼샤르와의 서신 교환과 꾸준한 독서로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혁명에 대한 꿈을 꾸면서 지도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게 된다. 급기야는 파업의 주동자가 되어 파업의 선봉에 선다.  


두 달에 가까운 파업으로 한계에 도달한 광부와 가족들은 숲에서 집회를 열었던 에티엔의 연설에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며 광기로 돌변한다. 분노에 찬 무리들은 주변 탄광 지역을 돌아다니며 시설을 파괴하는 등 급기야는 에티엔의 통제를 벗어나버린다. 회사 측이 파업 광부를 대신할 벨기에 광부들을 데려 옴으로써 대치 상태가 더욱 격화되던 중 탄광을 지키던 군인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마외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광부들과 가족들이 사망한다. 이후 파업은 광부와 가족에게는 실패로 돌아가고, 에티엔은 동료들로부터 지탄과 혐오를 받는 처지에 이른다. 


한편 급진적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을 신봉하던 에티엔의 동료 기계공 수바린의 시설 파괴 행위가 은밀히 자행된다. 같은 날 르 보뢰 탄광에 복귀한 300여 명의 광부 대부분은 수바린의 갱도 파괴로 무너져 내리게 되는데, 대부분의 광부들은 갱을 간신히 탈출하지만, 에티엔과 카트린을 비롯한 10여 명은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버려 지하에 갇히게 된다. 기계실과 보일러 실, 굴뚝마저 땅으로 사라져버리는 등 이들은 같은 길로 빠져나올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결국 르 보뢰 탄광은 모든 시설이 땅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이웃 운하의 물이 차 호수처럼 되어버린다. 그러나 지상의 동료들이 참여한 보름에 가까운 구조작업 끝에 에티엔 혼자 생존하여 구조된다. 이후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그는 떠나는 날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희망을 품은 채 기차역으로 향한다. 

   



에밀 졸라의 시선과 스타일의 연관성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2권 370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제르미날>의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의 제목 ‘제르미날(Germinal)’은 ‘파종의 달’, ‘싹트는germer 달’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를 염두에 두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 보면 작가가 사람들에게 거는 일말의 희망 한 조각을 읽어낼 수 있다. 역사학자마다 규정은 다르지만, 미술 사조에서 볼 때 프랑스의 1870년대를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의 ‘벨 에포크’라 부른다면, 이 시절에 일터가 아니라 거리로 나온 광부들의 투쟁 속에서 졸라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여 주고자 했을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최초의 민중 소설로 여겨지는 <목로주점>은 작가가 37세였던 1877년에 출간하여 작가를 ‘부자’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작가의 현실과 달리 이 소설은 파리의 빈민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묘사했다. 남부 출신의 여인 제르베즈 랑티에는 파리에 상경하여 빈민가에서 세탁부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열심히 일하여 한 때 사람들로부터 신망도 얻었던 그녀는 저축도 하며 언젠가는 자신만의 가게를 갖고 넉넉하게 살 수 있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빈민가의 환경과 사람들은 그녀를 온전히 놔두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최후는 알코올 중독과 굶주림으로 쓸쓸하게 사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소설을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제르베즈를 비롯한 빈민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과 나태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몰락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에 맞서지 않은 무기력한 노동자들처럼 보인다. 작가의 시선은 빈민가의 현실을 핍진성있게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소설에서는 현실 묘사만 보일 뿐, 사회적 문제 제기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반면 8년 후인 1885년(45세)에 발표한 <제르미날>에서는 노동자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사뭇 달라진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목로주점>의 주요 인물인 제르베즈 랑티에의 사생아 에티엔 랑티에가 광부로 일하며 탄광 회사에 맞서 파업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가 실패하는 과정이 서사의 큰 흐름을 구성한다. 여기에서는 계급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탄광 회사와 노동자의 대립과 충돌이 냉정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 파업이 있기 까지 이곳의 광부들은 <목로주점>의 빈민가 노동자들과는 달리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광부들은 더 나은 삶을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탄광회사의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처우에 분노한 데다, 혈기왕성한 20세의 에티엔이 광부들의 지도자급으로 부상하여 이들의 선두에 서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은 <목로주점>의 ‘알코올 중독과 나태함’으로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빈민가의 노동자들과는 결이 다르다. 탄광의 광부들은 굶주리지 않을 권리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었다.  


<목로주점> 이후 8년 간 그의 시선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그에게 금전적으로나 직업적으로 큰 성공을 가져다 준 이 소설에 대한 일부 평단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듯하다. 알코올 중독에 무기력한 노동자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제르미날>을 쓰기까지 8년 간 현실에 대한 그의 의식이 단선적으로 진화해왔다고 보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문제 제기를 반영하는 소설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마침 그가 20대 중반이었던 1866-67년 즈음(그리고 <제르미날>의 시간적 배경이 된 시기) 목격했던 프랑스 탄광의 파업과 무력 충돌 사건들이 그의 시선을 파리가 아니라 탄광 지역으로도 돌리게 했을 법하다. <제르미날>을 읽는 독자는 탄광 주변과 갱 내부의 현장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다는 것을 감지할 것이다. 작가는 탄광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의 동작과 주요 장치의 명칭마저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번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에밀 졸라는 이 소설을 쓰기위한 자료 수집 차 방문한 르나르 탄광에서 폐쇄공포증이 심한데도 지하 675미터 깊이의 탄광으로 들어가 실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의 미묘한 변화는 불가피하게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역자도 언급하지만, <제르미날>에서 보이는 에밀 졸라의 시선이 ‘이원론(흑백논리)적 시각’을 탈피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 ‘혁명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작가가 아무리 노동자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발견하고 있다고 해도, 이들의 선한 모습만 묘사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도정에서 각 존재는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이를 테면, 상점주인 메그라가 음식 외상을 하러 온 여인들을 외상을 빌미로 탐욕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메그라는 파업 기간 중 건물에서 떨어져 죽지만, 폭도가 된 광부의 부인들에 의해 신체가 훼손되는 사후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또 에티엔이 하숙을 하는 동료 마외의 집 둘째 아들(11살)인 장랭은 탄광을 지키던 소년 병사 쥘을 뚜렷한 이유 없이 칼로 죽인다. 또 그의 할아버지 본모르 영감은 어떤가.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이긴 하지만 탄광 자본가의 딸 세실의 목을 졸라 죽인다. 심지어 주요 인물인 에티엔은 매몰된 탄광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의 연적인 샤발을 돌로 찍어 죽인다. 이 정도라면 문자 그대로 막장이 따로 없다. 이웃집에 대한 뒷담화로 치고받는 싸움 정도는 매일의 일과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탄광 회사 사장과 같은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 중에서도 엔보 사장처럼 편협한 인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동정적인 드뇔랭 사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이들의 세계도 엔보 부인과 조카 폴 네그렐의 불륜처럼 각 계급 사회의 풍경은 광부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두 세계는 인류가 속한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면모에 주목하고 지켜봄으로써 작가는 대상들과의 거리를 성공적으로 확보하는듯 보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러한 시선은 계급을 떠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연민’을 지닌 작가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작가의 시선은 글의 스타일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민중’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느 한 진영을 미화하기만 하거나 비판하기만 하는 시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은 비평가 에리이 아우어바흐가 말한 스타일의 혼합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적인 삶, 일반인의 언어가 유입되고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여 얽히는 과정을 이 작품은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민중은 그들의 언어를 얻게 됨으로써, 그리고 다양한 계급의 언어가 뒤얽혀 상호작용하는 장으로서 소설은 스타일의 혼합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타일과 관련한 이러한 특징은 <목로주점>보다 <제르미날>에서 한발 짝 더 나아간 것으로 평가해볼 수 있겠다. 


곧 소설이 지니고 있는 스타일의 혼합적 특성은 부르주아가 아닌 노동자들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들은 단순히 미궁에 갇힌 괴물 미노타우루스의 먹이가 되는‘고깃덩이’로 남는 것이 아니며, 이들이 개미집을 만들고 있는 땅속 곤충들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스타일의 혼합적 특징은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데 기여한다. 다시 말해 에밀 졸라가 보여주는 스타일의 혼합적 특징은 보이지 않던 광부들이 인간의 얼굴을 지닌 존재로, 가시 영역 속으로 등장하게 한다. 


 소설에서 탄광/수갱은 괴물의 창자로 비유된다. 매일 700명의 광부들이 내려가는 지하 세계는 바로 괴물 미노타우루스의 거대한 창자다. 광부들은 이 괴물의‘하루 치 식량’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이 괴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존재다. 에밀 졸라가 바라보는 인간은 다윈의 진화론으로 모든 존재의 최상위 자리에서 ‘전락’한 인간이다. 다른 생명체들과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선은 광부들의 삶과 이들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소설의 지배적인 장면을 구성하도록 한다. 스타일의 혼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득력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스타일은 그의 시선과 결을 같이 한다. 또 이 스타일은 작가가 여태껏 보아왔던 부르주아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민중’이라는 세계를 발견하고 이를 이해하려는 집요한 시도의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의 스타일은, 잘 보이지 않던 대상들(광부들)에 빛을 비추어 보이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자본가의 가축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존재들의 두상을 비로소 인간의 얼굴로 보이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결말에 대해 주목해본다. 내게는 소설의 결말이 조금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광부들에게는 '실패'로 끝난 파업을 사실상 이끌었던 에티엔은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과 돌팔매질을 받지만, 남편 마외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고, 아들 자샤리는 매몰된 여동생 카트린의 구조 작업 중 가스 폭발로 타 죽었으며, 결국 구조되지 못하고 굶어 죽은 딸 카트린, 파업 기간 중에 역시 굶어 죽은 딸 알지르를 떠나보낸 어머니로서 라 마외드의 원한이 너무나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라 마외드는 떠나는 에티엔과 악수하며 “이건 절대 자네 잘못이 아니야. 이건 우리 모두의 잘못인 거야.”(360)라며 에티엔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상황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행동은 성인의 수준이 아닌가. 땅에 묻은 씨앗이 싹을 틔워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처럼 작가가 ‘인간이 자라나기를’ 아무리 기대했다고 해도, 파업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의 원한은 상당히 축소가 되어 있거나 작가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진다. 여기에 주목하는 일이 소설의 전개에 불필요하다고 여겼을까. 피해자 유가족들이 에티엔에게 내비치는 원망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최소화되어 있다. 내게는 이 지점이 의문스럽고 성급한 결말로 여겨진다. 나아가 파업의 실패에 대한 부채의식이나 보름에 가까운 매몰 현장에서 생존한 자의 트라우마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내가 의아했던 것은 에티엔이 커다란 저항 없이 마을을 떠나는데다 그 주위로 조성되는 밝은 풍경 묘사와 희망에 대한 전망 때문이다. 내게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임에도 결말의 분위기는 옥에 티로 남을 것 같다. 특히 파종의 달인 4월,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제2권, 369면)는 장면으로 떠나는 장면이 내게는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고 병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결말이 갑작스럽고 생경하여 낯선 분위기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결말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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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야만을 발견하는 과정

- 모비 딕의 여러 번역본 비교와 감상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모비 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주목을 받는 소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은 고전이라고 여겨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작품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영감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의 미국을 형성한 소설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도 붙어 있는 이 소설은 작품의 길이 때문에, 심지어 영문학과에서도 수업 교재로 채택하지 않는다고 한다.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닌 이상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이야기꺼리가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성인이 되어 처음 읽어 본 모비 딕은 단순한 고래사냥이야기가 아니었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고래사냥은 사실 마지막 삼일 간의 모비 딕추적 대결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나머지 132장에 걸친 이야기는 주인공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기까지의 과정과 일상적인 선원의 업무, 그리고 고래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고래 해체 등에 관한 정보로 가득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번역한 작품까지 이제는 작품에 대한 번역서가 최소한 세 권 이상이 되고 있다.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책의 번역 작업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 그리고 모비 딕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번역서가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무척 반갑다. 번역서 모비 딕의 풍년인 시대다. 독자로서는 어떤 번역서를 읽을까 고민이 되긴 하지만, 실력 있는 번역가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더 크다.


 

그동안 타 출판사의 모비 딕몇 종을 흥미롭게 읽었다. 최종적으로 내가 소장하는 도서는 모두 일러스트가 포함되어 있는 버전이다.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아셰트클래식시리즈의 모비 딕은 일러스트가 책 내용에 충실하면서도 추가적으로 배의 구조와 고래사냥과 관련한 지식, 고래 해체작업과 고래에 따른 분수공과 분수모습의 차이 등을 설명해주는 삽화가 백과사전처럼 가득하다. 여기에 수록된 그림들은 수채화 만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의 매력을 뽐내고 있기도 하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소설 구석구석의 장면을 궁금해하고 상상해볼만한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결과물이다. 게다가 김석희 번역가가 아닌가! 믿고 읽을 수 있는 버전이다.


 

한편 문학동네에서 나온 일러스트 모비 딕은 목판화가 록웰 켄트의 그림이 들어간 버전이다. 록웰 켄트의 그림은 매우 강렬하여 인상적이다. 한 장으로 승부를 걸어 독자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신문 삽화 같은 그림들이 화가의 해석을 통해 재탄생했다. 여기에 젊고 패기 있는 황유원 번역가의 세심한 번역과 꼼꼼한 주석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정신과 문학동네 버전은 각각 두 번씩은 읽었는데, 이번에 내가 선택하여 읽게 된 현대지성의 모비 딕도 목판화가 레이먼드 비숍의 그림들이 수록되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내가 믿고 읽는이종인 번역가가 참여하여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번역가가 작업에 참여했는지도 관심사항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레이먼드 비숍의 목판화는 록웰 켄트의 그림처럼 강렬한 삽화의 느낌을 주지만, 조금 다른 점은 비숍의 그림이 좀 더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긴 하지만 이렇게 미묘한 느낌의 차이가 어디서 온 것일까. 우선 그림에 사용된 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록웰 켄트의 그림에는 굵고 곧게 뻗은 선이 많은 편이며, 인물의 자세가 직선적이고 정적이다. 반면 레이먼드 비숍의 그림에는 곧게 뻗은 선이라도 가늘고 단선적이지만 방향성이 강하게 느껴지며, 선이 긴 경우는 곡선을 많이 활용한다. 여기에 등장인물의 동작은 정적인 자세가 아니라 움직이는 어느 순간을 포착한 듯한 장면이 많다. 여기에 극적인 명암대비를 잘 활용한다는 점도 켄트의 그림보다 더 역동적이고 입체감을 더 주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다양한 개성을 가진 모비 딕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독자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수록된 그림의 여러 특징을 고려해볼 때, 현대지성 번역본은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번역서다.


 

우선 내가 현대지성 번역본이 마음에 든 점은 번역가의 역할에 있다. 특히 번역가가 직접 작성한 해제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많이 제공되는 작가에 대한 배경이나 작품 배경에 대한 설명 외에, 소설을 읽으며 궁금해 하던 사항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 특히 모비 딕은 나타니엘 호손과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번역가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상세한 도움 설명을 해준다. 뿐만 아니라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곧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성경)와의 연관성도 놓치지 않고 주목한다. 이 점은 본문을 읽어 가다보면 어렵지 않게 서구의 두 가지 문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1장부터 등장하는 기독교 비판적인 시각은 육지와 바다를 넘나드는 경계인의 시각으로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가능성을 마련해 놓는다. 개인적으로는 흰 고래 모비 딕의 상징성이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궁금했더랬는데, 번역자는 이 점에도 주목하고 이 부분 역시 상세히 다룬다. 정리하면 이 책의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인 번역가의 해제에서 번역가는 독자가 이 소설을 단순히 고래잡이를 소재로 한 해양소설로 이해하는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도록 가이드를 제시해준다.


번역가의 선정 외에 책의 구성에 있어 다른 번역서와 달리 눈에 띄는 점은, 번역가의 주석이 각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많은 번역서의 역주가 책의 마지막에 정리되곤 한다. 하지만 모비 딕처럼 두꺼운 서적의 경우, 독자가 주석을 읽지 않고 건너뛰며 읽는다면 큰 상관은 없다. 반면 나는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다. 이왕 천천히 즐기면서 읽는다면 주석까지 꼼꼼히 읽곤 하는데, 역자의 주석 수백 개가 책 뒤에 있을 때, 매번 두꺼운 책장을 넘기면서 주석을 확인하기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분명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문제일 수 있겠지만, 주석이 제공된다면 나는 각주로 정리되어 있어 해당 내용을 같은 페이지 내에서 해결하며 읽기를 선호한다. 현대지성의 번역서는 천천히 읽는 독자의 독서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현대지성 번역서가 아쉬운 점은, 작품의 무게감과 물성을 고려할 때 하드커버로 나오면 좋겠다는 점이다. 책이 무겁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지성 시리즈의 공통점으로 종이가 얇아서 반대쪽 그림이나 글이 비친다는 점이 아쉽다. 소설에서 선원들이 고래 해체작업을 할 때, ‘고래 지방을 성경처럼 얇게 썬다고 표현하는데, 뒷면이 비칠 정도로 얇은 지면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흰 고래 모비 딕의 의미


 

서 번역가의 해제에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세한 설명이 있음을 이야기 했다. 우선 향유고래의 거대한 흰 색이 주는 인상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일반적인 향유고래가 흰 색이 아니라면, 정상성에서 벗어난 흰 색 고래가 무엇보다 대자연의 존재가 지닌 성스러움불길함을 동시에 표상할 것이다. 또 흰 색은 검은 색과 더불어 모든 색을 덮고 무화할 수도 있는 극단의 색으로도 볼 수 있다. 검은 색과 함께 흰 색은 그 색을 지닌 존재 자체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대상을 알지 못한다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여기에 이슈메일이 설명해주고 있듯이 고래의 얼굴 없는특성에 이르면 거대한 흰 색 생명체에 대한 공포감 배가 된다.


 

한편 이 소설이 탄생한 이후 모비 딕이 표상할 수 있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은 인간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특질 무언가에 대응될 수 있기에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여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 아닐까싶다. 일단 소설 작가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오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에게 주어지기 마련이다. 다만 여기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살펴볼 수 있는 단서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연대기-역사적인 관점인데, 이 소설이 1851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미국 전역과 서구 유럽을 들썩이게 했던 사건 하나가 바로 1849년의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이다. 소설에서도 잠시 언급되는바, ‘골드 러시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 직후였던 것이다. 이 때는 많은 사람들이 벼락부자의 꿈을 안고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던 시기다. 그러니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모비 딕으로 대표되는 황금만능주의의 표상일 수도 있고, 고래를 쫓는 에이해브는 금을 찾아 달려드는 광기어릴 정도의 욕망에 굶주린 사람들로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물신주의에 물든 정도가 지나쳐 인간성을 상실하고 메말라가는 사람들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내게 모비 딕이 상징할 수 있는 대상은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바 있는 허구적인 존재일 수도 있겠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허상을 만들어 내고 이를 믿게 만드는 존재다. 특히 모비 딕을 서구 백인 문명이 만들어 낸 모든 불합리한 기준과 규범으로 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모디 딕에게 복수하겠다고, 자신의 다리 한 쪽을 앗아간 고래에게 응징을 다짐하는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는 편집증에 붙들린 인간 사회에 대응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에이해브의 편집증은 특히 서구 기독교의 일신교적인 독단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때 작품을 관통하는 또 다른 맥과 이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에이해브의 일신교적인 광기가 서구 사회에만 존재할 리 없다. 어쩌면 우리의 근현대사를 뒤흔든 이데올로기 역시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모비 딕과 이를 집요하게 쫓는 에이해브의 광기는 보다 보편적인 표상을 얻을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인간이 이루는 집단 내에서 부조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면, 사상적인 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이 만들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모순은 문명의 야만성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한다. 멜빌이 모비 딕 1장에서부터 언급하는 노예제도가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겠다. 인간의 문명은 계급을 구분하고, 노예를 만들어 사회를 통제해왔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1장에서 이슈메일이 세상에서 노예가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40)라고, 세네카가 한 말을 굳이 재인용하면서 외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고전은 인간 사회에서 부조리한 모순이 암묵적으로는 상식이 되고 합리성이 되어 버렸음을 간파하고 독자가 상기하게 해준다.


 

고전은 시대를 거쳐도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하며 문화와 지역을 떠나 인간 사회의 공통적인 특질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고전의 생명력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모비 딕은 인간의 문명이 부조리함을 만들어 내고, 이 부조리함을 유지하도록 문명을 통제하고 만들어왔음을 새삼 일깨워 준다. 이러한 진실을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모비 딕의 카발라적인 순환구조다. 육지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자 한 이슈메일은 오랜 모험과 항해 끝에 홀로 생존하여 다른 포경선에 의해 구출된다. 다시 육지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이 순환 구조는 더 나아가면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는 플라톤의 영혼회귀와도 연결지을 수 있다. 이는 이 소설에서 서양 사상의 지혜와 원류를 재확인하는 발견을 독자에게 주기도 한다. 소설은 이슈메일의 구출과 회상에서 끝나지만 언젠가 이슈메일은 또다시 바다로 나갈 것 같지 않은가. 소설에 언급된 것과 같은 이유로 말이다. 그러므로 멜빌의 모비 딕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문명의 야만성이 역사는 되풀이 되듯어떤 형태로든 되풀이 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소름 돋는 우화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이자 우리를 매어 놓는 속박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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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1-18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민되는군요. 저도 두꺼워 가지고 각주는 맨뒤에
나와있는 책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장 맨밑에 나와 있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책 만드는 사람들은 읽는 사람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기 좋은 것이 제일인가 봅니다.

근데 초란공님 모비 딕 마니아시군요!^^

초란공 2022-11-19 08:49   좋아요 2 | URL
저 생각해보니까 집에서 사용하는 머그컵, 티셔츠, 책베개, 에코백도 다 모비딕이내요 마니아보다는 굿즈 중독인가요 허헛 ㅋㅋ ^^;;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잊지 않기 위하여'




"바람이 분다! ...... 살아봐야겠다!

광활한 대기가 내 책을 펼쳤다가 덮고

파도가 바위에서 솟구치며 산산이 부서진다!

날아가라, 나의 현혹된 페이지들이여!

부수어라, 파도여! 흥겨운 물살로 부수어라

돛배들이 모이를 쪼고 있던 저 평온한 지붕을!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에서



정신 없이 새로운 달이 시작했다가, 어영부영 지내다보니 벌써 8월의 한가운데에 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광복절이 되니 언젠가 읽어보려고 생각만했던 책들이 생각나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정리해보려고 한다. 


몇 달 전에 우연히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한 <바람이 분다>(The Wind Rises)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보았던 것인데, 어린 시절에 '비행기'만 나오면 뭐든지 좋아했던 터라 미야자키의 <붉은 돼지 Porco Rosso>를 좋아했었다. <바람이 분다> 역시 비행기가 나오는 영화였지만 전작 <붉은 돼지 Porco Rosso>만큼 마음 편히 볼 수 없었던 것은 이 애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공군의 주력 전투기 '제로센'의 제작을 담당했던 인물 호리코시 지로의 생애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들처럼 전쟁의 실상과는 거리를 둔 채 전쟁을 '낭만화'하는 분위기가 짙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 헐리우드 영화처럼 '전쟁'과 '사랑'을 결합하며 결과적으로는 전쟁 자체로부터 거리를 두어 애니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전쟁에 대한 생각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우리로서는 결코 마음편히 보고 끝나게 되지 않는다. 내가 비행기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말이다. 학창 시절에 내가 비행기를 좋아했던 것은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헬리콥터 및 비행체 설계도를 비롯해서, 라이트 형제와 같이 하늘로 오르려고 했던 이카루스의 자손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바람이 분다>는 주인공이 한 소녀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객차 앞으로 나와 풍경을 보던 주인공은 앞 객차의 뒤로 나와 풍경을 바라보던 소녀의 모자가 날아가자 잡아주는 것으로 두 사람이 만난다. 주인공이 모자를 건네주자, 소녀가 말하는 대목이 바로 위에 인용한 폴 발레리의 싯구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러자 주인공은 폴 발레리의 싯구라는 것을 깨닫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알아본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낭만적이다. 


전투기 제작자, 엔지니어 였던 호리코시 지로를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20만 명 이상을 사망하게 만든 원자 폭탄 제조 및 개발을 지위한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들이 한 작업의 의미를 깨닫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긴 했다. 물론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에 이 일의 의미를 파악하고 행동에 옮겼으면 더 나았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폴 발레리의 문장을 알게 되었고, 이어서 일본 비행기 엔지니어 호리코시 지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에 출간된 <폴 발레리의 문장들>을 보고 다시 이 애니메이션과 발레리가 50여 년 간 남겼던 아포리즘을 엮은 책이 나온 것이다. 발레리의 작품이 특히 어렵다고 알고 있는데, 특히 이런 작품들을 대중적으로 잘 포장하여 문화상품으로 만드는 일을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언젠가 읽을 책들을 정리하려다가 갑작스럽게 '광복절'을 맞아 특별히 아직 읽지 않은 책 중에서 조만간 읽어보려고 생각했던 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주제의 연장선에서 떠오르는 또 다른 책은 <들어라 와다쓰키의 소리를>이란 책이다. 이 책은 일본전몰학생기념회에서 엮은 책으로, 인간어뢰, 카미카제(자살 특공대)의 일원이었던 일본 청년들(여기에는 분명히 재일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쓴 일기 겸 소감을 쓴 기록을 모은 것이다. 소감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의 유서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 책은 22세의 육군특별공격대원으로 오키나와에서 미국 기동부대로 돌진해서 전사한 청년이 '출격 전야'에 남긴 소감문으로 시작한다. 현실에 대한 애착과 고뇌 속에서도 조국 일본을 위해 '특별공격대원'으로 뽑힌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영광스러워하는 대목, 죽음에 대한 예감을 비장하게 기록해놓았다. 전투기를 몰고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돌아올 기름과 낙하산이 없었던 이들은 바다 위로 떨어져 끝을 맺느니 진주만에 정박해있던 전함과 공항 시설에 마지막까지 피해를 입히고자 했다. 이 책은 '제로센'을 설계하고 제작하여 일본을 구하고자 했던 호리코시 지로와 이 비행기에 올라 삶을 함께 마감하고자 했을 일본 청년들의 심리를 함께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사료가 될 것이다. 



 



또 이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읽어보려고 사두었지만 계속 읽지 못하고 있는 책 한 권을 더 가져와본다. 소설가 정혜주가 쓴 <날개옷을 찾아서>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의 삶을 바탕으로 쓴 '평전 소설'이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공공의 적'이 된 검찰 만큼이나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버렸다. 이어서 계속 터져나오는 '성추행/성폭행' 사건으로 이 집단은 정신을 못차리는 모양새다. 문제는 의식이 있고 뜻있는 군인들이 많이 있어도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있는 일부 고위직 군인들의 도덕불감증과 관행이 이러한 사건을 계속 양산해내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싶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추락한 위상을 떠올려보면 권기옥 비행사의 삶이 더욱 두드러진다.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권기옥 여사의 일대기에 요약된 활동만 봐도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하고 과감한 일을 해낼 수 있었나 싶을 정도다. 송죽결사대, 3.1운동, 평양도경 폭파, 임시정부 독립군항공대 조국진공작전 등등...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의 대화는 소설형식을 빌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기본적인 뼈대는 권기옥 여사의 행적을 기반으로 했다. 책에 있는 띠지에는 조종사라는 직무에 어울리지 않은 '안경'을 쓰고, 다부지게 입을 다물고있는 권기옥 여사의 사진이 담겨 있다. 


<날개옷을 찾아서>의 뒷부분에 실린 사진 자료 중에는 권기옥 여사가 1924년 7월 첫 단독비행에 성공한 후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사진과 편지가 실려 있다. 권기옥 여사의 단호하면서도 짧은 편지는 다음과 같다. 


"20여 년 구속받던 아픈 마음과 

쓰린 가슴 상제주께 호소하고

공중여왕 면류관을 빼앗으려 가나이다.


길이 사랑하여 주심 바라

삼가 이 꼴을 눈앞에 올리나이다.


사랑하시는 기옥 올림

4257년 7월 5일 운남에서"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독립운동가 중에서 독립 운동에 참여하고, 머나먼 중국땅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살림을 도맡으셨던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과 일대기를 담아온다. 정정화 여사는 몇 년 전에 우연히 보게 된 한 연극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연극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아 검색해보니 '달의 목소리'였던 것 같다. 무대 위에서 일인 연극을 했던 분은(검색해보니) 원영애 배우가 아니었나 싶다. 나레이션과 정정화 여사의 목소리를 번갈아가며 정말로 대단한 연기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감동적이었던 연극이었다. 


정정화 여사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했고, 망명 27년 간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아 뒷바라지 하신 분이다. 국내에 자금을 전달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발각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던 분이었다. 연극을 통해서나마 정정화 여사의 삶을 접하고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연극을 보고 나는 바로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를 구매하여 읽었지만 다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읽으면서 내내 원영애 배우의 연기가 계속 떠올랐다. 


정정화 여사의 삶과 행적을 잊지 않고자 여기에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프로젝트'로 나온 <정정화: 정화>을 추가해본다. 참고로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장강일기>가 처음 나왔을 때의 제목은 <녹두꽃>이었다. 




 




군복무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아직도 기억나는 책은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가 있다.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에 징집된 후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7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쉬저우에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리 이상의 거리를 도보로 찾아갔던 분이다. 일본군과 만날 위험 속에 낮에 숨어 있다가 밤에 이동하기도 하고, 일념 하나로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모습, 그리고 이후 전개되는 안타까운 한국사의 장면들이 담겨 있다. 특히 이 책은 근현대사를 처음 알기 시작했던 나의 학창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언젠간 나도 장준하 선생이 걸었던 길을 따라 가보고 싶단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오늘은 광복절을 기념해서 그동안 읽어두려고 생각했던 책들을 몇 권 모아보았다. 나는 아직 한국근현대사를 잘 알지 못하다. 나에게 항상 아쉬움과 결핍감으로 느껴지는 이 분야는 앞으로도 계속 스스로에게 주는 숙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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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17 0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제 하고 싶네요 :-)

아 시를 좀 여유 있게 읽고 싶은데 ㅜㅜ 전 안되요
근데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는 좋네요.
:-)

초란공 2021-08-17 21:55   좋아요 0 | URL
저는 시 읽기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 시 관련 리뷰만 기웃거리게 되네요~^^
 


 '()과 ()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부유했던 한 인간의 고백록' 






D.H. 로렌스의 에세이 귀향을 읽는다. 제프 다이어의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를 읽고 로렌스라는 인물에 좀 더 관심이 갔다. 다이어의 설명에 따르면 로렌스 자신도 뭔가를 결정하는데 애를 먹곤 하고, 오랫동안 폐렴과 같은 증상으로 상당히 성마른 성격을 가진 예민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로렌스의 소설만으로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여전히 제한적이고 파악하기에 쉽지 않다고 느꼈다.

 


귀향은 영문학 전공인 번역가가 그의 에세이 중에서 자전적 요소가 강한 글을 뽑아서 번역한 에세이 모음집이다. 로렌스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궁금하지만 부담스럽게 시작하고 싶지 않은데다, 로렌스가 어께에 힘 빼고 쓴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말하자면 로렌스가 '문학적 기교나 표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밝히는' 수필집인 셈이기에 지금 로렌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관심사와 잘 맞는 다고 생각한다.

 


다이어의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는 저자가 주로 로렌스의 '서간집'을 기반으로 로렌스의 면모를 들여다본다. 다이어가 언급한 사항과 귀향의 연보에서 내가 다르다고 느낀 사항은 '서간집'을 출간한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귀향의 연보에는 로렌스의 '서간집' 출간이 1962년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에서 다이어는 로렌스가 자비로 7권짜리 책을 출간한 것으로 언급해 놓았다. 이 부분은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처음 접한 로렌스의 소설은 무지개. 앞부분 일부만 읽었을 뿐이지만, 귀향에서 로렌스는 1915년에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무지개가 발매 금지되는 사건을 겪었다. 이 때의 충격과 환멸이 컸던 모양인지 자신의 에세이에 마치 제 3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신이 "그러고는 언론과 출판, 그리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저 부르주아 세계로부터 외떨어졌다는 느낌이 더욱 강해 졌다."(41)라고 건조하게 설명하고 있다.


 

읽고 쓰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 장학금을 받고 영국에서 가장 좋은 통학제 학교(노팅엄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로렌스는 이곳에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부르주아 친구들을 만났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영국의 모습을 처음 접하고 그 실체를 체험했던 것인데,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지개의 발매 금지 사건) 이후로 그는 영국의 부르주아 독자를 상대로 '성공'해 보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걷어치우고 외따로 지냈다."(41)


 

로렌스는 스스로를 마치 제3자에 대해 진술하듯, 자신을 ''라고 지칭하면서 에세이를 쓰고 있는데, 애초에 계습사회에 놓여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 같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틀비의 선언처럼 말이다. 로렌스는 이 지독한 계급사회에서 뭔가를 해보려는 생각은 아예 걷어치우고, '나는 내 방식대로 살기를 택하겠다'고 선언하는 대목처럼 느껴졌다.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이 담벼락에서 바둥거리지 않겠다'고 외치는 듯했다.


 

 

"나는 가난한 집 자식이다. 난 분명 지금처럼 얼마 되지 않는 수입과 매우 미심쩍은 명성의 작가가 되기 전에 환경의 무서운 손아귀에 붙잡혀 발버둥 치며 우연의 괴롭힘을 겪는 것이 마땅했으리라.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다. 일은 모두 그냥 저절로 일어나서, 난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낼 일도 없었다.

   그건 유감스러운 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난 틀림없는 전도가 불확실한 노동계급의 가난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지금 난 어떻게 되었나?

(...)

나는 노동계급으로 태어나 그 속에서 자랐다." (43-44)

 

 


솔직하지만 좌절감도 묻어나는 자기 인식의 고백이다. 로렌스가 문필 수입만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 초등학교 교사 수입보다 적을 때도 있었지만 스스로를 한 번도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한 번도 굶은 적도 없고 말이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아주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48) 결국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는 존재는 자기 자신뿐일 테다.


 

하지만 그는 전업 작가였고, 내면의 어디선가는 '상승'의 욕구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세상과 잘 지내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라고 평가한다. 세속적 의미에서, 인간적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성공'적이지는 못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가두었을까. 내게는 이 또한 일종의 편집증을 동반하는 우울증세로 보였다. 그는 세상과의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듯싶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단절감이 점점 깊어지는 눈빛을 통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현실의 벽과 상승의 욕구 혹은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가 내면에서 충돌한 것이, 어쩌면 어느 문제 하나를 결정하고 끝맺으려고 해도 언제나 내게는 '분열증적'이고 성마른 성격으로 드러나게 된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로렌스가 처음 '문예지'에 실린 자신의 시와 단편소설을 사람들이 읽어보고 이야기해줄 때 로렌스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조차 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감정을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떤 마음인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단서는 로렌스의 다음 고백에 있지 않을까 싶다. "노동계급 출신으로서 나는 중산계급과 함께 있으면 그들이 나의 살아 있는 생의 맥박을 단절시켜 버리는 걸 몸으로 느낀다."(49)


 

로렌스는 45년의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그는 전 세계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부유했다. 아이 셋과 대학교수인 남편을 포기한 뒤 로렌스를 선택했던 여인 프리다와 결혼하고서 말이다. 17살 때 심하게 앓았던 '폐렴' 증상으로 그는 일정 부분의 폐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이따금씩 폐렴 증세로 고통을 받았던 로렌스. 이 책 귀향에 소개된 유년시절부터 사망에 이르기 전까지 사진을 보면서 몸은 점점 말라가고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지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연령대의 사진에 나온 남자가 바로 로렌스임을 알고, 그가 삶의 이른 시기에 사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독자는 사진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로렌스의 작품을 읽는다면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을 먼저 읽기 시작할 것 같다. 자신의 에세이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 책의 첫 부분이 모두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45년의 삶을 살았던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사망하기 4년 전인 41살 때(1926)부터다. 이 해에 로렌스는 여동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 프리다와 심하게 다투었고, 화가인 도러시 브렛과 정사를 가졌다고 한다. 아마 로렌스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로렌스를 흠모하던 귀족 출신의 화가 브렛과의 만남에서 받은 영향이 컸을 것 같다.


 

로렌스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관심이 간다. 아들과 연인을 읽은 다음에 아마도 로렌스의 그림이 들어간 화집 Painting of D. H. Lawrence를 구경해보고 싶다. 말년의 그가 바라본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 있을까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로렌스가의 책이 꾸준히 번역되어 나오는 것 같지만 여전히 속도는 느린 것 같다. Painting of D. H. Lawrence책도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다.


 

지금 로렌스의 연보를 보니 1919년에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고 나와 있다. 아마도 이 독감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에 대유행을 시작했던 스페인 독감이 아니었나 싶다. 이 독감을 앓던 시기에 로렌스는 영국에 있을 때로 보인다. 병약했던 그는 이 당시의 독감으로 폐에 더욱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가을에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아내 프리다와 재회하여 카프리 섬에 정착했다.

 


'스페인 독감'하면 언젠가 알게 되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에곤 실레의 삶을 떠올린다. 에곤 실레와 그의 아내가 바로 스페인 독감으로 191810월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실레의 아내가 3일 먼저 사망했는데, 아내는 임신 6개월이었다고 한다. 에곤 실레, 스페인 독감, 실레의 솔직하고 적나라한 그림들, 로렌스의 사람과 외설 시비에 휘말렸던 그의 작품 등등을 떠올리면 귀향의 역자가 사용했던 표현 '()과 생()의 공존'이라는 표현만큼 잘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싶다. 여기에는 언제나 '죽음'이라는 녀석이 이 둘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20대 후반에 아들과 연인을 출간한 직후 즈음 찍은 청년 로렌스의 모습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에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 콧수염의 사내다. 30세 즈음,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에 구레나룻을 기른 로렌스의 모습은 보다 조심스럽고 예민해 보이며, 20대 당시 보다 눈빛이 깊어지고 신중해져 보인다. 잔혹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던 것일까. 그의 모습은 언제든 폭발할 듯 예민한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29년의 모습은 훨씬 수척해 보인다. 눈빛은 훨씬 부드러워졌지만, 다소 초점을 잃은 모습으로 보인다. 줄곧 폐렴과 폐결핵 등으로 '()'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점차 죽음을 직감했으리라.


 

그는 짧은 생에 동안 끊임없이 무언가에 연결되고 안착한 것이 아니라, 단절되고 부유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노동계급에도 중산계급에도 자신이 잘 맞지 않으며 이로부터 배제 혹은 단절되어 있다는 근본적인 감각이 그에게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 전업 작가로서, 또 다른 의미에서 부유하는 삶의 한 가운데 있었다. 로렌스에게는 이러한 단절감과 부유하는 삶이 태생적인 조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지녔던 ''(그리고 '')에의 열정만큼이나 컸던 단절감과 부유하던 삶을 다시 떠올려보니, 그는 지독히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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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8-13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부터 읽어봐야겠네요. 로렌스의 문장들도, 그의 삶도 인상적이예요!!

초란공 2021-08-14 00:22   좋아요 1 | URL
네^^ <미•짜•괜>은 음...뭐랄까요... 산만한듯 수다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웃기는 책이랄까요 ㅋㅋ 표지나 만듦새는 개인적으로 좀 아쉽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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