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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 지음, 백수린 옮김 / 목요일 / 2020년 10월
평점 :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Joanna Concejo) 지음 | 백수린 옮김 | [목요일]
‘여름의 끝(La fin de l'été)을 추억하는 애도의 기록’
아내를 따라 그림책을 보다보니 그림책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닫게 된다. 최근에 ‘어른을 위한 동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란 문구를 종종 접했지만, 여전히 내가 스스로 찾아 읽고 느끼고 판단하지는 못했다. 그림책은 대체로 텍스트가 적어서 금방 읽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온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아동용 그램책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림책의 독자에는 제한이 없다. 이번에 읽은 그림책은 《까치밥나무 열매가 읽을 때》라는 제목의 책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의 책이었다.
요안나 콘세이요.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1971년 폴란드에서 출생한 일러스트레이터로, 현재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그림책 관련 행사 및 도서전으로도 유명한 볼로냐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2004)로 선정되었고,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2018)한 이력이 보인다. 이제는 그림책과 관련하여 볼로냐를 비롯한 해외 무대에서 점점 더 많은 국내 작가들의 소식을 접하기에 이 상의 위상에 대해 대강은 알고 있다. 짧게 소개된 작가의 이력만으로도 콘세이요의 다른 작업들이 궁금해진다.
처음 책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책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편견을 최대한 줄이고, 겉에 표현된 이미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겉표지를 펼치면 소녀로 보이는 인물 그림이 나온다. 어딘가에 걸터앉아 손에는 열쇠로 보이는 물건 하나를 쥐고 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그림 속 들판에 숨어 있던 새들이 놀라 달아나듯 새들이 날아오르는 장면이 보인다.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듯, 들판은 풍요로운 느낌 보다는 황량한 겨울 들판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에 보이는 것은 정면을 응시하는 것 같은 소녀의 모습이다. 가는 펜과 색연필로 그린 스케치들이 계속 이어지며 화면을 구성한다.
그림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누군가의 빛바랜 사진 앨범을 넘기면서 구경하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작가의 작업들은 언젠가 그녀가 응시하고, 감각하여 각인된 기억들을 소환하여 이미지로 정착해둔 스냅 사진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정면을 응시하는 듯 하는 소녀의 스케치는 오래 전 부모님이 들고 있던 필름 카메라 렌즈를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책을 읽으면 곧 등장하는 ‘푸른 앙리’는 작가의 아버지로 보인다. 소녀의 모습은 앙리가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바라본 어린 시절의 작가일 듯하다. 책에 그려진 그림들은 접착용 테잎으로 붙여둔 사진처럼 구성되어 있다.
커튼 달린 창틀, 컵을 잡고 있는 손, 얼굴 표정을 그리지 않은 소녀의 두상들... 이런 단편적인 그림들은 모두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보인다.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명징하며 지극히 사진적이기도 하다. 또 고요하고 아름답다. 그래서였을까, 콘세이요의 스케치는 책을 펼칠 때마다 새로움을 준다. 작가의 소소한 스케치들이 새로운 기억을 소환한다.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책을 더 읽으면 작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일흔 살 즈음으로 보인다. 아마도 지난 늦여름일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 작업은 이제 중년이 된 딸(작가)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담아 낸 것이리라. 아마도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전형적인 아버지였을 것 같다. 서로가 소통이 많지 않던 부녀 관계. 이제는 프랑스에 정착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시골집에 와서 아버지가 살던 공간과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림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추억이 묻어나고, 죽음이라는 절대 법칙에 대한 자각이 느껴진다고 하면 나만의 착각일까. 지난 글에서 처음 읽었던 그림책처럼 공교롭게도 이번 책을 관통하는 주제도 ‘죽음’이다.
‘일요일의 역사가’라는 별명이 있는 프랑스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예술사적 관점으로 ‘죽음’을 이야기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들이 삶에 집착한 간접적인 증거로서 ‘정물화’를 언급한다. 특히 중세인들은 ‘죽음’이라는 소멸 현상을 정물화를 통해 삶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북부 유럽어권에서 정물화를 ‘still life'라고 표현하고, 더구나 라틴어 권에서는 ’nature morte’, 곧 ‘죽은 자연’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게다가 모든 문학 작품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등장한다. 그림책이라고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림책이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은 그림책이 다루는 주제를 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책에서도 삶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삐삐롱 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언급했던 것처럼, 적절하고 타당한 방식으로 전달한다면, 아이들도 ‘죽음’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인식하고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그림책을 ‘읽어내는 일’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메시지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놀이와 같단 생각을 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그림책 읽기란, 그림을 통해 작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을 들여다보고, 저자의 기억과 상상을 더듬어 따라가는 일이다.
내 시선은 다시 앙리가 살던 집의 찬장에 머문다. 안개처럼 반투명해보이는 유리문이 있는 찬장 아래에 피클을 담는 병이 보인다. 이 병에는 앙리가 숲에서 가져와 넣어 둔 까치밥나무 잎이 들어 있다. 까치밥나무 열매는 여름에 익는다고 한다. 아마도 앙리는 이걸 병에 넣어 둔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매일같이 산책하던 오솔길을 나섰을 것이다. 주머니에는 매일 확인하는 우편함 열쇠를 넣은 채로 말이다. 우편함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앙리는 입김이 날 정도로 쌀쌀해진 어느 날 익숙한 오솔길을 나섰을 것이다. 집 앞에는 ‘돌아올게요’라는 메모를 남긴 채로. 하지만 이 산책이 앙리가 세상에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을 것 같다. 그렇게 앙리는 푸른 안개가 낀 어느 날 산책길에서 벤치에 앉아 ‘깃털처럼 가벼워졌을’ 것 같단 생각을 해본다.
이런 자세한 정황은 책을 보고 내가 상상해본 내용이다. 책에 표현된 시선을 따라가면서 작가의 추억을 들여다 볼 뿐이다. 저자는 앨범을 보고 외부를 관찰하는 것 같지만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묻혀 있던 작가의 기억, 곧 내면의 풍경이다. 딸은 아마도 무뚝뚝한 아버지와 다정하게 대화해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가물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림 작업을 하면서, 먼저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듯하다. 작가는 부모님의 결혼사진과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았을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지 않았을까. 새롭게 다가오는 자각이다. 작가의 시선은 이제 지난 여름 아버지가 담아 두었을 까치밥나무 잎에 머문다. 꽃무늬 벽지가 있는 한 쪽 벽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옷이 그대로 걸려 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했던 시절, 웃음소리와 눈물이 그대로 배어있을 것만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앙리는 여름이 끝날 무렵, 푸른 안개가 낀 어느 날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런 까닭에 까치밥나무 열매는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물이면서, 소멸하는 자연을 대변하는 사물이 된다. 앙리가 즐겨 산책하던 풍경은 이제 작가의 추억 속, 여름의 끝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배경을 상상해보다 책의 표지를 보니, 푸른색으로 그려진 앙리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진다. 책의 겉표지를 넘길 때 보았던 소녀(아마도 어린 작가의 모습)의 손에 든 열쇠는 아마도 아버지의 우편함 열쇠가 아니었을까. 우편함 열쇠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여는 열쇠일 수도 있겠다. 혹은 소통이 별로 없던 딸의 편지가 와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림책을 이렇게 읽어도 되나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의 상상을 제한해주는 텍스트가 거의 없는 그림책을 읽는 일은 보다 더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림책은 언어를 떠나 공통의 정서에 호소할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림책을 ‘읽어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에 나는 그림책 읽기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그림책에는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고 다르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림책은 그만큼 풍부한 ‘자유도’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특이점’처럼 느껴진다. 묻혀 있던 무수한 기억들이 공존하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상상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는 전환점으로서 말이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지난 여름의 끝’을 추억하던 작가가 아버지에게 전하는 한마디가 담겨있다. 빨간 까치밥나무 열매가 읽을 때 즈음, 아마도 푸른 안개와 함께 풍경 속으로 사라졌을 법한 작가의 아버지에게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는 인생에 여전히 미숙했고(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특히 ‘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던’ 모든 아버지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자 애도의 메시지다.
같은 책을 읽고 쓴 옆지기의 리뷰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https://blog.aladin.co.kr/734094286/12424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