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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새로운 계급 투쟁>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다재다능한 영화배우이자 영화제작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배우 줄리 델피가 각본을 쓰고, 출연까지 한 영화 <2Days in
Paris>에서 프랑스 여자로 나오는 줄리 델피의 역은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인 남자친구에게 ‘파리에 테러는 없어!(No terrorism
in Paris)’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에서 이 대사가 사용된 맥락은 뉴요커인 남자친구에게 파리는 뉴욕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이제 2015년 11월에 일어난 파리 테러 사건을 보고 줄리 델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번에 읽게 된 슬라보예 지젝의 <새로운 계급 투쟁>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약 6개월 전에 일어난 파리 테러사건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한 때 하루가 멀다하고 폭탄테러가 일어나곤 했던 파키스탄이나 탈레반 점령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사건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충격적이고 폭력적인 현장이었을 테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테러가 일어나리라 생각하기 힘든 프랑스 파리에서, 그것도 대중문화가 소비되는 현장에서 예고없이 벌어졌기에 충격이 더욱 컸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뉴스를 통해 전달되는 파리 테러의 상황을 보며 충격받고 있는 나에게 지젝의 책을 읽은 지금, 내가 얼마나 편중된 기사와 제한된 정보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있다.
언젠가 칼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고통스럽게 읽으면서 특히 기억나는 대목이 있었는데, 주인공 소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집에 폭격을 맞아 소녀의 눈 앞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장면이었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너무나 고통스러움이 느껴졌던 소설이었는데, 다시금 생각해보면 나의 조부모님 세대가 실제로 겪었던 전쟁의 소용돌이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인의 아버님께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의 폭격을 맞아 대가족이 거의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망한 분도 계시고, 북한군에 의해 부모님과 가족을 잃은 교수님도 계셨다. 지금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는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고,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드물게 일어난 파리 테러를 매일 같이 테러가 일상화된 곳과 굳이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폭력이 지금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얼마나 제한된 정보에 접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2015년 11월에 발생했던 파리 테러에 대한 지젝의 견해는 곧, ‘난민과 테러는 모두 기본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이고, 이러한 문제들의 바탕에는 (새로운 양상의)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익숙하지 않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기반한 자본주의’와 맥이 닿는다. 곧 지역을 초월하여 전세계의 경제적 장벽을 철폐하고 무한 경쟁의 플랫폼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를 의도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세계화’, ‘사유화’, ‘현대화’라는 이름에 가려진 ‘획일화’, 좀더 구체적으로 ‘(기업을 위한) 더 적은 세금’, ‘더 적은 규제’, ‘보조금 삭감’ 등의 구호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전세계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는데, 왜 이제와서 지젝은 이 ‘글로벌 자본주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긴한다. 지젝은 ‘지붕 밖 모든 것을 장악한 이 잔혹한 폭력’이라고 묘사한 ‘글로벌 자본주의’는 정치에 그치지 않고 인종, 종교 그리고 섹스에까지 그 폭력성을 전파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여기서 지젝이 의도한 ‘섹스’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자행되는 폭력 및 성차별에 기반한 폭력 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럼 이 시점에서 더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글로벌 자본주의’와 ‘난민과 테러’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하는 점이다. 지젝이 말하는 단서는 ‘콩고’에서 일어난 부족 간 분쟁의 배우에 상징적으로 집약되어있다. 곧, ‘부족 간 분쟁으로 치장된 싸움의 배후에 글로벌 자본주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 군벌 지도자들은 각자 외국기업과 연결되어 있고, 외국기업들은 이를 이용하여 콩고의 천연자원을 앞다퉈 착취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난민의 경우, 이러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달리 바라보면,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이 시스템의 내부에서 보호받는 ‘계급’과 그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의 사람들)’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지젝은 이 전세계적인 새로운 ‘계급 분리’현상을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곧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에 다름 아니다라고까지 진단하고 있다. 다시 난민 문제와 연관지어 보면, 이러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군사개입이 결정적으로 난민을 발생시키고 있는 주요 원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난민과 테러에 까지 그 맥을 추적하여 연결시키고 있다.
영국 로더럼에서 발생한 사건을 언급한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의 상황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하나는 국제결혼의 증가로 인한 다문화 가족의 꾸준한 증가, 그리고 남한에 정착하게된 탈북민들의 현실이 두 번째이다. <결혼원정기>라는 영화가 나올만큼 대한민국 노총각들의 결혼 상황의 일부를 한동안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제는 젊은 남녀 세대의 성별을 불문하고 백인이 배우자인 국제결혼이 주변에서 부쩍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과거보다는 국제결혼의 양상이 매우 다양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배우자가 아시아 인과 백인의 크게 두 가지 경향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어떤 이유인지 납득하기 어렵지만, 배우자가 아시아인인 다문화가족의 아이들이 백인이 배우자인 다문화가족의 아이들보다 더 분명하게 놀림을 받거나 차별적인 시선을 더 많이 느끼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경향이 세월이 좀더 지나고 더욱 굳어져서, 영국 로더럼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지젝이 언급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틀이 형성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한편 탈북민들이 부대껴야하는 현실은 다문화 가족이 안고있는 어려움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민족임에도 너무나 ‘자본주의화’되어 있는 남한에서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탈북민이 정착하도록 정부와 기업에서 지원하던 사업도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하며, 아이들의 학교 자퇴율 혹은 중도 탈락률이 매우 높다는 기사를 언젠가 본적이 있다. 다문화 가족의 서로 다른 유형화 양상을 통해, 그리고 탈북민들의 남한 정착과정에서 겪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영국 로더럼에서 ‘자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낄 청소년 집단이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한가지 더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니시다 료스케의 저서 <무업 사회>을 읽으며 알게된 일종의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는 ‘경제적 난민’ 또한 ‘세계화’된 지구촌에서 주목해야할 새로운 계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이후, 외국 기업, 특히 세계 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영향력을 앞장서서 실천하는 기업들이 전세계에 침투하여 만들어내는 ‘경제 난민’은 일본이나 우리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도 ‘세계적으로 획일화, 패턴화’를 충실히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도의 환경 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책 <물전쟁>에서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지원을 업고 인도에 들어온 서양의 다국적 기업이 새우 양식 및 물산업으로 전통적인 지역사회가 파괴되고 지역 주민들이 ‘난민화’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력 아래 ‘세계화’된 문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미FTA체결 이후, 농업투자 보조금 삭감 및 선진국 농산물의 수입으로 인하여 많은 농민들이 타격을 입었다. <물전쟁>에서 난민화된 인도인들처럼, 우리의 농어민들도 ‘농어업의 글로벌화’로 인하여 많은 농부들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더욱 어려울 것이다. 농어민의 ‘난민화’도 문제이지만, 한 나라의 식량 확보와 관련한 문제를 외국의 기업에 의존한다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은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새로운 양상이 기존 사회의 유행을 대체해버리면,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새로운 계급’이 존재할 것이고, 이러한 현실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지젝이 의도하는 것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받는 새로운 계급이 맞아야할 투쟁이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지젝이 ‘무엇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야한다’라고 언급하고 뒤이어 ‘제 3세계 국가들의 식량위기가 곧 농업의 글로벌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라고 덧붙이는 대목을 보면, 결국 반다나 시바가 <물전쟁>,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에서 지적한 바대로 인도의 농어민 뿐 아니라 인도 국민이 안고있는 식량위기 문제는 곧 지젝의 주장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세계의 식량위기를 야기한 것은 우리 서구사회다!” 빌 클린턴이 식량 문제에 관해 언급했다는 이 한마디는 지젝이 의도한 핵심을 잘 지적하고 있다.
다시 정리해보면, 이 책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로 표현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급효과가 어디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떠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를 피부에 닿는 예를 통해 통찰하고 거시적 안목에서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다. 당장의 경제 활동에 미치는 파급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대지에 어떠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넘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평범한 우리로서는 하나의 줄기를 잡아내기 힘들다. 더불어 다시금 느끼게 되는 점은 우리가 이제는 정신적, 심리적으로 잇닿아있다는 점을 넘어서서 네트워크라는 무형의 존재에 의해 물리적으로 구속되어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하나의 정보로서 존재하고 이 정보가 곧 각자의 정체성으로 되어버린 듯하다.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존재증명을 하게된다. 사람이란 존재가 지구라는 게임판에서 하나의 상품가치를 갖게된 존재로 느껴진다. 그리고 지젝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시장성을 갖지 않고 도태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 ‘글로벌자본주의’의 영향력 아래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있는 것이 아닐까?”(62면) 현재 나와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서가 관심을 갖는 공통적인 문제점들 이외에 지젝이 지적하는 ‘난민’의 문제, ‘테러’의 문제는 사실 별개의 사건과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젝은 이렇게 개별적인 현상들을 놓고 그 이면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여 낱개의 현상들을 하나의 줄기로 묶어 낸다.
저자는 이 ‘새로운 계급 투쟁’을 다시 철저하게 바라보고 이를 수행할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과 함께, ‘세계적인 연대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물론 지젝이라고 해도 이 거대한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법을 내놓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젝 자신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117면)라고 이 책의 방점을 찍고 있다. 다소 무성의한 결말로 보일 수 있겠으나, 비교적 간결하게 지젝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놓은 이 책은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하는 의도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생각거리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짧은 나의 지식과 제한된 정보로 판단하자면, 지젝이 난민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서 진보좌파와 대중영합주의자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좀더 시원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나의 이해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양측을 비판하고 제시하는 의견이 과연 새로운 것인지 혹은 진보 좌파의 견해와 분명히 차별이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이데거 철학의 ‘과거와의 대결’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며 단순히 변증법적인 구조를 따르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에는 지젝이 비판하고 있는 진보 좌파의 견해와 대동소이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지젝의 철학에 대해 좀더 알게 되면서, 그리고 저자의 주장을 좀더 생각해보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10면) "글로벌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 철저한 계급 분리를 선포했다. 이로써 내부 영역에서 보호받는 계급과 그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의 사람들)으로 분리되었다."
(24면) "서구 생활방식을 뒤흔들고 있는 진짜 위협은 이민자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64면)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은 참사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다."
(107면) "난민은 글로벌 경제의 대가다."
(76면) "우리의 실질적 과제는 오히려 ‘우리’와 ‘저들’ 노동자 계급 사이에 가교를 구축하여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93면)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보편성을 남에게서 나를 보는 인간적 보편성이다. 즉 정치적-종교적 기호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가 하나이며, 우리 모두 동일한 두려움과 열정을 공유하는 존재임을 ‘아는’것이다."
(100면) "난민이 우리와 다를바 없이 조바심을 내고 폭력적이고 요구하는 것이 많은 인간인데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래서 우리는 난민과 인도적 동정을 한데 묶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109면) "이런 혼란기에는 국가주권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적 협력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인에게 평등한 이주의 자유’라는 애매한 용어가 아닌 정교하게 계획되고 잘 조직된 변화과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유럽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난민의 인간적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난민 이동 발생의 조건을 제거할 철저한 경제 변혁이다. 난민의 주 원인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 지정학적 게임이다."
(117면)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 이런 전체적 시야 없이 파리 테러 희생자들과의 비장한 연대감은 윤리의 가면을 쓴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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