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선집 8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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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는 행위

-모리스 블랑쇼카오스의 글쓰기(2012) 읽고



 


카오스의 글쓰기는 비평가이자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가 남긴 단상 형식의 글 모음집이다. 17세기의 수학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이 남긴 팡세의 형식과도 유사하다. 제목의 카오스재난, 재앙을 의미하는 désastre에 대한 번역어를 옮긴이가 무질서와 같은 국면으로 해석하여 채택한 용어로 이해된다. 옮긴이가 선택한 용어에 대해 나름의 견해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타당하다. 그는 용어 선택을 고심하고 이와 관련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드러난 결과물은 저자뿐 아니라 번역가의 손을 떠난 것이고, 용어의 정합성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나는 카오스를 이따금씩 파국이라는 의미로도 읽었다. 불시에 들이 닥치는 것, 정체가 파악되거나 통제될 수 없기에 완전한 수동성을 지닌 무질서, 손을 쓸 도리가 없는 국면에 가깝다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파국에는 부정적인 암시가 있기에 온전한 대안은 아니다. 한편 카오스는 도래한 기점에서 어김없이 진행되는 상전이 현상의 경계같은 것, 하지만 존재의 비가역적인 변신이자, 환골탈태의 전조이기도 하다. 질료는 그대로이나 동일체는 사라지고 다른 성격의 존재가 되는 상황으로, 그 전후가 결코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카오스는 주체가 자신의 뜻대로 불러오거나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거대한 물결 속에 뒤섞여 흘러갈 수밖에 없는 쓰나미와 같다.


 


죽음과 글쓰기


이 책에서 블랑쇼는 여러 유형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언어의 부정성이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죽음존재가 사라지는 결정적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이 두 유형의 죽음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자에 따르면 언어가 가져오는 죽음이란 구체적 시공간이 추상적 관념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결정적 죽음은 몸이 구체적 공간(세계)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두 유형의 죽음은 모두 일종의 분리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고독을 초래하고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여기에 전자는 후자를 예고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262-263).


작가가 이토록 죽음에 천착하고 이를 글쓰기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블랑쇼의 글쓰기는 그가 통과한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대인과 이들의 메시아사상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데, 그의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실이 글쓰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동시대인으로 나치의 만행을 목격하고, 저널리스트로서 이를 고발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친구로 만나 평생 교제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 역시 유대인이었다. 블랑쇼는 동료가 겪은 고통과 공포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레비나스의 가족을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피신시키고 보호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저자는 불시에 들이닥친 카오스의 공포와 죽음을 말하는 글쓰기와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블랑쇼가 겪은 재난’, ‘카오스의 경험은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라고 썼다. 이 문장의 영역문에 'take care of란 표현이 보인다.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 주체가 제공하는 돌봄과 배려의 의미를 갖지만, ‘책임과 영향관계를 가리키는 의미도 고려해볼 수 있다. 곧 카오스가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들이닥친다는 사실, ‘카오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는 의미로서 말이다. 따라서 배려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카오스가 미치는 무차별적인 오지랖을 일컫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을 포함하여 재난과 반드시 마주하고야 만다. 카오스’, ‘재난혹은 파국은 광야에서 칠흑 같은 밤이 다 가도록 천사와 몸싸움을 벌였던 성서 속의 야곱처럼, 불가항력으로 다가오는 무질서와 혼란의 국면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면 야곱은 천사와 힘겨루기를 했을까. 어쩌면 야곱이 상대가 누군지를 알았더라도 카오스의 국면에서는 상대와 힘겨루기 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카오스’, ’재난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한 젊은이를 떠올렸다. 이 젊은이는 자기 가족을 화장터로 데리고 가야 했고, 목을 매달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구출되었다. 친위대가 총살형을 집행할 때 그는 희생자의 머리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목덜미에 총알이 잘 들어가도록 말이다(147). 이런 일을 겪었던 사람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성적으로 진술하리라 기대하긴 불가능하다. 처음에 극한 공포감이 찾아왔어도, 역치를 넘어버린 자극이 만성화될 때, 모든 것이 무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집단학살을 목격하고 기절했다는 나치의 2인자 하인리히 힘러가 학살의 빈도를 늘리고 가스실을 사용하도록 명령한 것처럼 말이다. 생명이 대상화되고 사물이 되어버린 순간, 아우슈비츠에 있던 젊은이는 공포감 대신 판단 중지가 찾아오고, 기억 상실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젊은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폭력이 남긴 무()의 흔적이다.


블랑쇼에게도 재난혹은 파국의 경험이 갑자기 찾아왔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처럼, 블랑쇼 역시 총살당하기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있다. 그는 자신의 집 앞에서 나치에게 처형당하기 직전, 아군의 폭격과 레지스탕스의 선제공격으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순간을 자서전적인 책 나의 죽음의 순간에 기록해두었다고 한다(12). 극한 경험을 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석방 직후 감옥에서 처음 간질 발작을 겪었던 것처럼, 블랑쇼에게도 불가항력으로 찾아온 경험은 그의 몸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갔던 두 사람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면, 재난 속에서 재난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118)


앞에서 언급한 두 작가의 사례처럼 글쓰기는 일상이 전복되어버린 자들,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이 무엇보다 의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 보인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는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는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 프라두에게 재난은 비밀경찰 멩지스와 함께 예기치 않은 상태로 도래했다. 죽어가던 멩지스를 살려낸 후 그를 찾아온 경고는 이웃 사람들이 뱉었던 침, 사람들의 경멸어린 언어와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유대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내쳐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도 열어주었다.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던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발 디딜 수 있는 고향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광기와 글쓰기


블랑쇼는 카오스를 이야기할 때 광기에 대해 언급한다. 다만 광기가 곧 카오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번역자가 재난이란 표현 대신 카오스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 역시 이것이 규정하기 힘든 무질서의 상태처럼 파악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도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해 있는 것’(23)이며 재난(désastreuse)의 필연성에서 비롯된 전락(轉落)의 신호’(24). 하지만 카오스는 그 자체로 긍정과 부정의 판단과는 무관한 듯하다. 그는 카오스가 다만 재난을 가져오는 불행한 것만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173)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경고처럼 작용한다. 다만 바깥에서 나아갈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뿐. 이 때 추방당한 자의 글쓰기는 광기에 대항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행위로 보인다.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89)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204)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199)


블랑쇼에게 작가는 단지 깨어있는 자가 아니라, 낮에도 수면이 불가능한자다. 그들은 광기가 수반하는 고통 속에 깨어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 듯하다. 카프카의 글쓰기가 광기에 맞서는 광기의 제스처였던 것처럼, 인간의 광기에 대응한 균형유지(글쓰기)는 인간이 지불해야하는 대가였다. 이것이 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내 안의 광기와 마주하고 이에 맞섬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광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103)


글 쓰는 행위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의 광기를 다듬은 결과로 이해된다. 예술가들의 작업은 주로 사회 혹은 규범으로 정해지는 경계 밖에서 이루어진다. 경계 내에서 인간의 광기는 으레 규제되고 억압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일정 부분 다듬어 지고 경계 내로 받아들여진 인간의 광기로 볼 수 있겠다. 사진론을 이야기했던 롤랑 바르트가 광기를 다루는 예술로서의 사진을 이렇게 이야기한바 있다.


사회는 사진을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할 위험이 있는 광기를 완화시키고, 사진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방법은 사진을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밝은 방, 동문선, 2006, 143)


앙리 마티스는 사진이 기록에 적합한 매체라고 규정하며 예술이 될 가능성을 부정했던 반면, 바르트는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였다. ‘완화되고 다듬어진 광기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사진이 예술임을 인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광기에 맞서는 예술 행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글쓰기 -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기


나의 읽기와 쓰기의 시작은 내가 속한 사회에 내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 나름의 열심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열심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안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허둥댔으나, 그럴수록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부유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읽기와 쓰기는 나의 쓸모없음을 되새기는 나와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행위였다.


옮긴이 해제에서 번역자는 세르주 르클레르의 말을 빌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하기에 대해 언급한다. 르클레르에 따르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해 나간다는 것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혹은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269). 이때 살해를 위한 무기가 바로 언어.


경계 밖에서 부유하던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했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게 닥친 파국앞에서 나를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나를 숨기려고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를 인정하고 긍정할 수 없었다. 타인을 원망할 수 없었고, 내 삶이 자명하게 실패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카오스의 글쓰기나의 쓸모없음, 그리고 실패한 삶에 방치되어 있는 나를 그대로 긍정할 수는 없었는지 묻는 것 같았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나의 타자와 어쩔 도리 없이 힘겨루기를 하고 기진해버린 야곱이었을 뿐이다.


르클레르의 언급을 참고하면, ‘재난의 경고가 찾아왔을 때 나는 내 안의 아이를 살해하지 못한 셈이다. 이 아이는 생명의 움직임이기에 결코 죽을 수 없음에도 나는 이 아이를 살해했어야 했다. 아이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지만 그를 살해하지 못한 것, 나아가 살해된 아이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데서 나의 위기가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제는 나에게 강력한 무기인 언어가 주어졌음을 안다. 블랑쇼에게 글쓰기는 인간을 통해 드러난 홀로코스트라는 광기에 맞서고, 고통 속에서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던 언어의 죽음과 사람들의 결정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101)


도스토옙스키나 블랑쇼,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 프라두는 자신의 예상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경계 밖으로 내쳐진 자들, 완전한 수동성으로 삶에서 분리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카오스의 국면에서 이들의 글쓰기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아이를 살해하기이면서 동시에 살해된 아이를 위한 애도하기였다. 블랑쇼가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와 가스실, 홀로코스트를 빈번히 글로써 호명하는 이유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고, 이것과 분리되기 위해서 죽음을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라는 블랑쇼의 말에는 작가가 겪었던 고통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블랑쇼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192)라며, 동시에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우라고(239) 제안한다. 나 역시 글쓰기를 통해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할 수 있기 바란다. 이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살해된 아이를 애도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임박한 카오스앞에서 나를 긍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

[2]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 (118)

[3]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4]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 (89)

[5]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 (204)

[6]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은 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 (199)

[7]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 (103)

[8]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 (101)

[9]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192)

[10]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울 것."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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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30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건강은 많이 나아 지셨나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 대신 SNS이미지 놀이 할것 같습니다 ㅎㅎ

설연 휴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초란공 2022-01-30 11:06   좋아요 1 | URL
네~ 이제 통증은 없고 찐한 별자리 같은 수포자국이 남아있네요 ㅜㅜ Scott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이 책은 애초에 이해가 불가능(?)한 책이었다.

하지만 블랑쇼라는 사람과 그의 글을 처음 접하고 받은 인상을 

남기는 정도로 시작해볼까 한다.

훗날 오늘 쓴 글이 엉터리(?)였음을 확실히 알게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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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글을 남기는 것,

텍스트 '바깥'의 모호함이 바로 '카오스', '재난'이다.


그 가운데 언어를 붙드는 행위, 텍스트와 씨름하기.

이 텍스트와 나와의 상호작용이 곧 '내 안의 어린 아이',

'결코 죽지 않는 생명력'을 끊임없이 살해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건 재난에 대한 부단한 긍정, 깨어있기다.


그러므로 언어를 붙드는 자, 작가는 고통 속에서 결코 잠들 수 없는자,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204)다.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의 참모습.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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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8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2-01-28 10:06   좋아요 3 | URL
저는 아무래도 이 책 때문에 대상포진이 온 것 같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던데요.... ㅜㅜ 그러니 지난 두 주간 피로에 쩔어 있는데 누우면 따가워서 잠이 잘 안오고 ㅋㅋ ㅜㅜ 작가는 아니지만 불면의 고통이 이 책 때문인듯 합니다 ㅋㅋ

stella.K 2022-01-28 10:10   좋아요 3 | URL
앗, 그렇군요. 이제부턴 재밌고 즐거운 책을 읽으십시오. 다시 건강해지실 겁니다.😄

초란공 2022-01-28 10:15   좋아요 3 | URL
네. 그래야겠어요^^
그런데 이 책은 덮고 나면 묘하게 다시 생각나는 매력이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신기하지요. ㅋ
stella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stella.K 2022-01-28 10:26   좋아요 2 | URL
ㅎㅎ 그런 지뢰가 있었네요. 앞으로 초란공님 말씀은 끝까지 잘 듣고 24시간 숙성 시간을 거친 다음 말씀 드려야겠군요.🤣
네, 초란공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

얄라알라 2022-01-28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어를 붙들다˝ 뭔 말이 이렇게 멋진가? 감탄하다가 댓글을 읽다보니 초란공님, 최근 대상포진을 앓으셨나봅니다. 후유증도 생길 수 있는 힘든 병이라고 들었는데 쾌유하셔서 컨디션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초란공 2022-01-29 07:59   좋아요 1 | URL
네 ㅜㅜ 이제 다 나아갑니다. 그나마 통증은 약한 상황이라 다행입니다^^;; 주말에는 <환각> 정리해야겠어요. ㅋ
 
리스본행 야간열차
빌 어거스트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외 출연 / 에이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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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2014)

우리는 이따금 자신과 작별하는 여행이 필요하다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의 철학자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이름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존엄성, 자유와 예속 등의 문제를 다룬 철학교양서로 국내에도 알려진 그는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자기 존중의 문제를 다루었다. 소설은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생각과 동선을 따라간다. 57세인 그는 교사이자 고전문헌학자다. 제자였던 부인과 5 만에 이혼한 , 17년간 과거의 침묵 속에 은둔하며 살았던 남자다. 심한 근시인데다 불면증에 시달린다. 머리카락이 가닥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언제나 낡은 재킷과 자라목 스웨터를 걸치고, 무릎이 튀어나온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다니는 남자. 하지만 그는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확고부동한 그의 일상을 뒤흔든 것은 한 여자의 자살기도 사건이었다. 비 오는 날 출근하던 길에 다리 위에서 마주한 우연한 사건으로 그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겨났다. 좀처럼 실수하지 않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는 붉은 가죽 외투를 입은 여자가 남긴 포르투게스라는 발음의 여운을 기억하며 헌책방에서 한권을 집어 들었다. 아마데우 이나시오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의사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책방 주인이 읽어주는 문장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28)

 


이 문장을 시작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 포르투갈어를 독학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어 CD 들으며 고전어에서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 느꼈다. 그는 작은 일탈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했다. 유럽 지도를 꺼내 리스본으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망설임 없이 직장을 떠나면서 사직서를 겸한 편지를 교장에게 보냈다. 편지에는 자신이 떠나는 구체적인 이유를 대신하여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대목을 인용했다.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44)


 

여기에 인용한 문장은 소설 전반의 주제와 비교할 때 모호하게 다가온다.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면서 동시에 건너 불구경하듯 거리를 두고 이들을 비난하는 모양새다. 표현에 주목한 이유는 그레고리우스가 감행한 일탈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대목 천병희 교수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보다 드러난다.


 

영혼이여, 너는 학대하고 있구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구나. 그러면 너는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짧고, 인생도 거의 끝나간다. 하거늘 너는 아직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들의 영혼에서 행복을 찾는구나!(명상록 천병희 옮김, , 2005, 34p)


 

문장은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감과 사회적 역할에 매몰되어 짧은 인생동안 끌려 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설에 제시된 역자의 번역보다는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 소설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 아우렐리우스의 인용문은 타인과 사회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실마리를, 그리고 예속 상태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의 미망을 깨달으라는 외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레고리우스가 불시의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불가피하고 절박한 이유일 있다.



 

삶의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는 도시 이야기


이제 소설의 장면은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리스본과 베른을 오간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만 해도 기차로 2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 의사가 남긴 책을 지치지 않고 번역하며 저자의 생각을 탐험했다. 동시에 의사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남자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라서 소설은 리스본과 베른이라는 도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레고리우스의 집과 직장이 있는 베른은 알프스 산맥에 인접한 스위스 내륙의 도시다. 그에게 익숙함과 확실성, 안정감을 주는 도시다. 자신이 가르치는 고전어처럼 느리고 완만하며, 확고한 이성의 통제를 받는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조망되던 (127) 누리던 도시였다. 언제든 고전어 및 고전문학에서 학생들의 인정을 받으며 만족스러운 삶을 있었던 장소였다.

 


반면 리스본은 그레고리우스가 익숙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도달한 도시다. 그에겐 삶에서 예기치 않게 마주하는 낯설음과 불확실성, 불안감이 느껴지는 미지의 세계다. 과거에 도시를 강타했던 대지진과 흑사병처럼 말이다. 중세 시대까지 이 도시는 광대한 대서양을 마주한 세상의 , 인식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곳이기도 했. 한편 다리에서 만난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처럼 빠르고 경쾌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감정과 호기심에 이끌리는 삶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응한다.


 

여행이란 불확실성으로 떠나는 모험이다. 그레고리우스처럼 마디의 단어에 이끌리거나, 리스본의 의사가 남긴 글에 매혹되어 감행하는 한순간의 일탈이기도 하다. 2000 전의 아우렐리우스가 보았던 것처럼, 소설은 현실의 질곡에 매여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춘다. 프라두의 부모가 그랬고, 그 역시 이런 환경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기차여행에 대한 열망을 지녔지만, 출발지에서 멀어질수록 강한 향수병을 느꼈던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확고하고 익숙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나 두려움으로 길을 잃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독자는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험해보지 못한 채 익숙함과 관성에 머물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있다. 사람들은 도덕과 의무감에 매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삶을 살아가곤 한다.



죽음이 잉태한 판타지, , 상상력의


그렇다면 우리가 예속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염두에 두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문제로도 읽힌다.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부유하지 않는 일이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이는 자신의 생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단단히 발을 내딛는 이기도 하다. 때론 현실의 벽이 두껍고 높기만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 떠나고자 하는 열망과 향수병 사이의 어딘가에 머무는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던 갈망을 평생 품고 살았지만, 제대로 시도해보지 않았던 약사 조르지 오켈리처럼 말이다. 삶에서 자유를 찾은 이들은 일탈을 꾀하여 소외되고 부유하는 자신의 상황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불가피한 일탈을 감행했다. 책방에서 구한 책의 저자가 살았던 도시로 떠났던 것이다. 그가 리스본과 여러 도시에서 프라두의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 찾기였다. 폐교가 된 프라두의 학교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오래 전에 꿈꾸었 도시 이스파한 기억해냈다. 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무수한 가능성이 놓여 있었음을 깨달았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모여 도달한 결과였다. 프라두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과감한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상상력임을 깨달았고, 상상력이 발휘할 있게 해주는 힘을 ()에서 찾았다.

 


삶의 관성을 뒤흔드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판타지의 세계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할 있게 한다. 인생은 번뿐이고 모든 가능성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실패했을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있는 힘도 키워준다. 시적 상상력은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모두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과 함께, 두 사람 긴밀히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 프라두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267)라고 썼다. 인간이 평생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실체란 살아 있을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공포가 아닐까. 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패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실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시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말한다.

 


여행 중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주 현기증을 느꼈다. 프라두는 자신의 글에서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 현기증은 그레고리우스를 찾아온 경고였다. 그에게 현재를 일깨우고, 시적 상상력이 필요할 때임을 알려주는 장치로서 말이다. 베른으로 돌아와 검진을 한 그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자, 친구 독시아데스는 나에게 처방전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두려움을 느낀 친구를 존엄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답변이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레고리우스는 인생은 우리가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던 프라두의 말도 떠올렸다. 확고하다고 믿었던 삶에는 언제든 불확실한 삶이 찾아올 수 있다.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불확실성에 머물 수 있는 여지와 힘을 마련해주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이제 소설은 당신이 자신의 이스파한을 간직하고 있는지 묻는다. 때론 스스로와 작별하여 일탈을 감행해도 좋다는 메시지와 함께.




[1]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시작됐다." (10)
- 소설의 첫 문장

[2]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 프라두의 글

[3]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리두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6)

[4]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93)
- 프라두의 묘비명

[5] "내 마음의 강물이 방향을 바꿀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177)

[6]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220)

[7]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67)

[8]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292)

[9]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357)
- 프라두의 편지글

[10]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 (448)

[11]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462)
- 프라두가 늘 했다는 말

[12] "존엄하게 죽는 것이란 그게 종말임을 인정하는 거야. 불멸에 관한 온갖 유치함을 극복하는 것이지." (481)
- 주앙 에사가 전하는 프라두의 말

[13] "말은 시(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529)
- 실업가 실우베이라에게 그레고리우스가 하는 말

[14] "그때 읽은 신문에서 유일하게 아직 기억하는 단어. 신기루, 환영,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 (537)

[15] "시적 진지함보다 더 진지한 진지함도 있을까? (...) 이것이 프라두와 그를 묶어주는 고리, 아마 가장 강한 연결 고리였다." (544)

[16]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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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3 00: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초란공님. 영화도 분위기 있었고 ~ 초란공님 리뷰 읽으니 아 맞아 하며 감동이 ㅎㅎ 잘 읽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초란공 2022-01-13 00:53   좋아요 4 | URL
아 이렇게 반가울수가요! ㅋ 오래전에 영화로 먼저 봤을 땐 이게 뭔 영화여...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보니 좀 이해가 왔어요. 굿밤되시길요!

새파랑 2022-01-13 08: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제2의 인생과도 같은 여행이 재미있고, 결말도 너무 좋더라구요~!!

초란공 2022-01-13 12:36   좋아요 3 | URL
네. 속도감이 나진 않았지만 정교하게 구성된 철학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까 제가 책 정보를 연동한 것이 아니라 영화 정보를 연동해놨네요. 그런데 수정이 안됩니다. ㅜㅜ

scott 2022-01-20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스본행 야간열차!
가 아닌
리스본의 노랑색 트램! ㅎㅎ

작년에 대 유행 했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다
이 책이 주는 삶의 교훈과 철학이 깊은 것 같습니다 ^ㅅ^

초란공 2022-01-20 08:34   좋아요 1 | URL
네~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영화에는 정작 중요한 글들이 거의 다 빠져있더라고요.
 


어떤 그림

: Over to You!

존 버거(John Berger) & 이브 버거(Yves Berger) 지음 | 신해경 옮김 | [열화당]

 



그림과 화가의 생애를 매개로 부자 간 이어지는 속 깊은 편지

 



작년에 어떤 그림을 급하게 읽고 새해 다시 천천히 읽고 있다. 편지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속 깊은 대화라니! 그림과 화가를 매개로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고 사진과 미술에 대한 평론을 썼던 존 버거와 화가인 아들 이브 버거. 이들 각자의 추상적인 언어가 이렇게 장황한 설명 없이도 소통되는 관계일 수 있다니 놀랍고 또 부럽다. 연인이나 여성들만의 세계처럼 느껴졌던 이런 공감 충만한 대화, 이심전심의 소통이 부자 사이에서도 가능했었던 거구나... 신선했고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읽은 대목 중 인상적인 부분.

아들 이브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이 인용문에서 '그림'이란 단어를 ''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자신의 그림()'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계속 작업을 방해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 드물다고 느끼듯, 자신의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게 '다음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에 이끌리고, 마법에 유혹당하는 일이 하루를 충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올해는 그렇게 차근차근 천천히, 그리고 꾸역꾸역 체하지 않게 읽고 쓰고 싶다.

 

 

아직 내가 존과 아들 이브의 글을 많이 접해보진 못했지만, 두 사람은 자신이 써내려가는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 단어를 쓰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두 사람의 문장은 가뿐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나를 오래 머무르게 붙든다.


 

나는 유치원 이후로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존 버거의 스케치가 마음에 들어 나도 뭔가 그려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작년 말에 볼펜으로 뭔가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복잡한 꽃이나 음영 표현은 아직 못하지만 내가 아끼는 물건의 윤곽만을 처음 그려보기 시작했다. 내 시계, 그리고 카메라와 같은 사물들. 아래는 펜으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클래식 필름 카메라를 그려보았다. 오랜 시간 그리다보면 존과 이브의 대화에서 그들이 대화를 나눈 각자의 고민거리와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c) 초란공, 내 카메라, 2021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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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2-01-03 0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존 버거 책 손에 들고 있었네요. 라이카 카메라 넘 잘 그리셨는데요?^^ 글자와 숫자까지 세심하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초란공님 스케치 그리신거 올려주시리라~ 생각하겠습니다^^

초란공 2022-01-03 11:40   좋아요 2 | URL
존 버거 옹이 새해부터 귀가 근질근질 하실듯 합니다^^ 반갑네요~ 쓰던 카메라를 다 꺼내서 그려볼까 하고 있습니다. ^^;; 주말 오후가 그림 하나 그리는데 훌쩍 가버리더라구요. ^^;;

mini74 2022-01-03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그림 넘 좋은데요.~ 느낌있어요 *^^* 존 버거 궁금해지네요 ~

초란공 2022-01-03 22:19   좋아요 2 | URL
학창시절에 그림그리던 친구들을 보고 따분하겠단 생각을 했는데, 그려보니까 나름 재미가 있네요. 노안이라 힘들긴 하지만요^^;; 존 버거의 책은 그림이 참 맘에 드네요~
 
죄와 벌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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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 이문영 옮김

[문학동네] | (2020)

 



한 순간도 혼자일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를 발견하다’ - [2]

 



앞선 글에서는 죄와 벌의 주요인물인 로쟈가 살인을 저지른 동기를 정리를 해보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와 주인공이 머문 공간의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이번 글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에 좀 더 주목해보았다.


 

피상적이나마 소설 전반에 대한 인상을 정리해본다면, 이 작품은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의 내부에 깊이 각인된 부조리한 사회의 환영을 언어로 풀어낸 소설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표현이 진부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비자연적인 죽음인 인간의 자살, 살인 행위의 경우, 이 표현이 더 이상 진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 각자는 그가 속한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역사는 고스란히 그의 몸 안에,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 기억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역사 속에서 공동체(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한 하나의 문화적 기호혹은 상징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하나의 일탈 행동으로 보이는 범죄 행위 혹은 자살과 살인은 내게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였다면 이러한 문제는 적어도 매우 단순한 형태를 보여주었을 것 같다.


 

한 가지 예로 로쟈의 절친 라주미힌이 새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집들이 행사를 여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라주미힌은 집에 초대된 사람들이 논쟁했던 주제가 범죄는 사회구조의 비정상성에 대한 항의”(1, 396)라는 주장이었다고 로쟈에게 말한다. 특히 라주미힌의 친척 형이자 예심판사인 포르피리는 로쟈와 라주미힌에게 범죄에서 환경은 많은 걸 의미해.”(1, 398)라고 말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또한 새로운 사상에 열중해있던 청년 레베쟈트니코프가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고, 인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2, 150)라고 말하는 대목은 어떤가. 이런 주장들에서 환경의 지배를 받는, ‘문화적 기호로서의 인간을 생각해보게 된다.


 

앞에서 로쟈의 살인 동기로 공리주의 같은 주제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극빈 속에서 갈 곳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청년이 삶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로쟈에게 자신의 살인 행위는 사회에 대한 복수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을 압박하고 옥죄는 사회 환경 속에서 로쟈는 오랫동안 모멸감, 소외감, 좌절감, 서글픔 등이 쌓이고 억눌러진 응축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피할 곳 없이 궁지에 몰린 인간은 자살하거나,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억누르며 현실을 받아들이곤 한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로쟈의 범행 역시 한 개인을 통해 사회의 문제가 표면 위로 드러나는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세상에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로도 말이다


살인 행위 뿐만 아니라 자살 행위 역시 개인이 세상에 남기는 사회적 메시지다. 한마디로 억울하고 외롭다’라는 소리 없는 외침인지도 모른다. 로쟈는 타인을 죽임으로써 사회적 자살과 다름없는 자기 파괴적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하지만 역사상 많은 위인들이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역사를 자신에게 맞추는 데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나. 이것이 로쟈의 논리였다. 바로 승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결말이 로쟈에게 아름다움’, 하나의 미학적 성취가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로쟈의 범죄는 개인과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미친 작용에 대한 개인의 반작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비록 그의 행위가 완결된 상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이었긴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고독한 로쟈의 모습이었다. 그는 살인을 감행하기 전, 어느 교외 지역을 방황하는데, 정원에 핀 꽃들을 멍한 듯 오래도록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지독히 외로운 인간을 보았다. 신을 믿지 않던 그가 자신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은 어떤가. 또 로쟈가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며 폭풍 같은 대화를 나눈 뒤, 그녀에게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에서도 외롭게 부유하는 인간을 발견했다. 로쟈는 소냐와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좁은 방으로 돌아온다. 그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못 같은 걸 박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이야말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공기가 없었음을 절실히 깨닫는 장면이었다. 전직 하급 공무원이자 극빈으로 인한 좌절감, 우울감으로 무기력하게 술에 절어 살았던 마르멜라도프. 그가 술집에서 한 말이 있다. ‘사람이란 어디든 갈 데가 필요한 법이라고 말이다. 로쟈의 방황과 고독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는 곳, 그가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쟈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독한 존재로 로쟈를 바라보니 다른 몇몇 인물들에게도 눈길이 갔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었지만, 진정으로 갈 곳이 없어 건초운반선에서 닷새 밤을 보냈던 마르멜라도프. 그는 또 거리에 나와 딸에게서 받은 돈으로 술을 마셔버린다. 그의 절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취직이 되지 않았지만 집에 있기 부끄러워 낮에는 집 밖으로 나돌던 기억. 나 역시 갈 곳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의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어떤가. 그녀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자녀였기에 교양을 갖추었지만 귀족 계급이라는 자존심과 허영심이 가득했던 인물이다. 비참하게 사망한 남편의 추도식을 분수에 넘치도록 화려하게 준비한다. 어쩌면 이 부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경제적 제약이나 사회 규범, 관습 또는 가족이나 공동체 내에서 각자에게 주어지고 기대되는 역할과 체면에 우리는 ‘1아르신의 공간과 같은 상황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카테리나가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 그녀는 로쟈에게 꿈은 사라졌어요! 모두가 우리를 버렸어요!”(2, 246)라고 말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망마저 사라질 때,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역시 로쟈의 동생 두냐에 대한 마음이 거절당하자 자신이 자살할 장소를 정처 없이 비를 맞으며 찾아 헤맨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인물들이 모두 무척이나 외로운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읽기를 죄와 벌로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는 소설 전반에서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를 향한 작가의 끈질긴 시선을 느끼게 된 기회였다. 소설은 특히 가난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의 시작부터 극빈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혐오하고 모욕하던 마르멜라도프가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본다. 로쟈는 범행 전날 술에 취해 숲 속에서 잠을 자다가 끔찍한 꿈을 꾼다. 꿈에서 비쩍 마른 암말은 주인의 잔혹한 채찍질에 죽어갔다. 무엇보다 이런 장면들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연민을 발견한다.


 

또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가 사망한 후 로쟈는 늦은 시각에 소냐의 집을 찾는다. 소냐와 대화하던 로쟈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2, 75) 이 말은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도스토엡스키의 연민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처럼 읽힌다. 나아가 역자가 도스토옙스키의 오랜 친구 스트라호프가 했다는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작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선하지만, 모든 이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불쌍한 사람이다.”(2, 439) 도스토옙스키의 전기까지 저술했다는 스트라호프의 말에 그 역시 고독한 친구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로쟈와 마르멜라도프, 카테리나,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인물들에서 비로소 고독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소설에서 로쟈 만큼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힘들지 않게 소냐를 지목할 것이다. 그녀는 극빈 상태인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자신의 몸을 내놓았지만, ‘갈 곳 없는로쟈에게는 안식처이자 공기가 되어주는 인물이다. 또한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인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스러움과 속됨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로쟈가 범행을 저지르고 막다른 골목에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소냐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쟈가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러 찾아간 대상도 소냐였고, 그에게 자수하여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한 사람도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로쟈의 형량을 낮추어주고 아직 남아있는 삶을 생각해보라고, 그래서 자수를 권하던 예심판사 포르피리도 소냐의 가치를 뒷받침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로쟈의 동생 두냐에게 고백한 마음을 거절당하자 자살하기에 이른다. 로쟈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로쟈와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두냐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소냐와 같은 대상은 아니었다. 결국 그의 자살은 막다른 생의 골목에서 소냐와 같은 존재, 사람이 숨 쉴 공기가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냐가 소설에서 맡은 역할은 그녀가 로쟈에게 단순히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범행 후 찾아온 로쟈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주었다. 예수의 구원으로 죽은 지 나흘 만에 되살아난, 나자로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날 역시 로쟈가 범행 후 나흘 째 되던 날이었다. 소냐는 이처럼 인간의 부활이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로쟈에게 부여하는 인물이다. 8년형이 선고된 시베리아 유형지에 따라가서 로쟈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형사상의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이것으로 끝나는 존재일뿐일까?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상상한다.


 

로쟈는 동생의 약혼자 루진이 소냐에게 거짓 누명을 씌웠던 사건을 두고, 소냐에게 루진이 살아남아 계속 혐오스러운 짓을 하느냐, 아니면 계모인 카테리나가 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그녀는 누가 살고 누가 살면 안 되고 하는 일에 누가 절 재판관으로 세운단 말이에요?”(2, 213)라고 대답한다. 나는 소냐의 답변이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 소설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작가는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죄에 대한 벌주기가 다가 아님을, 고통 받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법정이 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인식. 도스토옙스키는 나에게 타인에 대한 연민과 관대함을 가지라고 말한다.


이제 소냐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행동들은 법률이 해결하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인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바로 기독교적인 가치, 타인에 대한 사랑의 힘이다. 로쟈의 유형 생활이 계속 되면서 소냐가 다른 죄수들과 이들의 가족들에게도 보여주는 보편적인 인간애는 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범죄 행위는 인정하되, 자신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쟈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와 동생 두냐, 그리고 소냐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흔들림 없는 애정과 믿음에 불안해하고 심지어 불행하게 느끼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냐는 로쟈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소냐 역시 자신을 쌀쌀맞게 대했던 로쟈가 어느 날 울면서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은 순간, 그가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자신을 연민하고 스스로를 인정할 때에 비로소 타인을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렇게 소냐의 사랑은 불행 속에 있던 사람을 점차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범죄와 처벌을 통한 문제해결의 한계를 보았을 것 같다. 특히 미리 계획된 사형 선고 직전에 살아남은 강렬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절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연민을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로쟈가 자수를 하러 경찰서로 가던 중 센나야 광장에서 했던 생각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그는 한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2, 396) 이 대목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소냐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인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인간은 어머니와 탯줄이 끊어진 순간 스스로의 운명과 싸워야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개개의 인간은 본래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공기 속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로쟈가 인류의 모든 고통을 향해 절을 했던 것처럼, 인간의 고통에 연민을 느꼈을 도스토옙스키를 상상한다. 이번 독서는 타인의 고통을 향한 작가의 일관되고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가난하고 모욕당하던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이들에게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던 작가의 모습을. 소냐를 통해 보여준 사랑의 가치는 자수하기 전에 비를 흠뻑 맞고 어머니를 찾은 로쟈를 무조건 적으로 품어준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다. 갈 곳 없는 이들, 돌아온 탕자가 숨 쉴 곳을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고독한 존재가 삶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든, 어떤 경우라도 또 다른 삶의 문을 두드릴 자격이 있다고



[1] "극빈은, 선생, 극빈은 죄입니다. 가난 속에서는 타고난 고귀한 감정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지만, 극빈 속에서는 누구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사람들은 극빈 상태에 이른 사람을 지팡이로 내쫓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빗자루로 아예 쓰렁내버려요, 모욕을 더 심하게 느끼라고요. 옳은 일이에요, 왜냐면 극빈 속에서는 자기가 먼저 자기를 모욕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거지요!" (제1권, 24)
- 술집에서 마르멜라도프가 로쟈에게 하는 말

[2] "선생, 누구든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는 곳이 단 한 군데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1권, 27)
"선생, 더는 갈 데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느냐고요?" (제1권, 30)

[3]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마시는 거예요, 술을 마시며 거기서 연민과 감정을 찾곤 하지요. 즐거움이 아니라 오로지 슬픔을 말입니다. ... 순전히 고통받고 싶어 마신다고요!" (제1권, 28)

[4] "이따금 그는 녹음이 우거진 별장 앞에 멈춰 서서 울타리를 쳐다보고, 발코니와 테라스로 나온 잘 차려입은 여인들과 정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특히 꽃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다른 것보다 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제1권, 86)

[5]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 이렇게 말했던가 생각했던가 했지. 만일 절벽 높은 곳, 두 발로 간신히 설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서, 더구나 사방이 낭떠러지와 대양, 영원한 어둠, 영원한 고독, 영원한 폭풍으로 둘러싸인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한 대도, 1아르신의 공간에 서서 평생을, 천년을, 영원을 살도록 내버려진대도, 그렇게 사는 게 지금 죽는 것보다 낫다고!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말이지!" (제1권, 246)
- 1아르신의 공간이란 관과 같은 좁은 공간임을 말한다.

[6] "알고 있니, 두냐, 너희 둘을 보고 있자니 넌 완전히 그 애 판박이더구나, 얼굴보다 성격이 말이다. 너희 둘 다 우울증 환자 같고, 둘 다 무뚝뚝하고 흥분 잘하고, 둘 다 오만하지만 둘 다 너그럽기도 하고 말이다." (제1권, 372)
- 로쟈의 대칭이 되는 동생 두냐. 로쟈와 소냐의 관계는 스비드리가일로프-두냐와 대비된다.

[7] "범죄는 사회구조의 비정상성에 대한 항의라는 거지." (제1권, 396)
- 로쟈의 친구 라주미힌이 논쟁했다는 논의의 주제.
"범죄에서 ‘환경’은 많은 걸 의미해." (제1권, 398)
- 포르피리가 로쟈와 라주미힌에게 한 말.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고, 인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2권, 154)
- 레베쟈트니코프가 로쟈에게 하는 말.

[8]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 (제2권, 75)
-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는 로쟈.

[9] "그녀가 물에 뛰어들 수 없었다면, 벌써 그렇게 충분히 오래 그런 처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떻게 미치지도 않았을까? (...) 대체 무엇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는가?" (제2권, 77)
- 소냐에 대한 로쟈의 의문.

[10] "누가 살고 누가 살면 안 되고 하는 일에 누가 절 재판관으로 세운단 말이에요?" (제2권, 213)
- 혐오스러운 루진이 죽어야 할지, 아니면 가난 속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계모 카테리나가 죽는 것이 정당한지를 묻는 로쟈의 질문에 소냐가 한 말.

[11] "그럼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소냐?" (제2권, 218)
"날 버리지마. 소냐, 버리지 않을 거지? (...) 하지만 왜 날 안아주지? 내가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너도 괴로워해보, 난 홀가분해질 테니!’하며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서? 그런데도 이렇게 비열한 사람을 당신은 사랑할 수 있나?" (제2권, 222)

[12] "이 사람은 이미 이 모든 걸 스스로 알고 있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사람 없이 살 수 있다는 걸까!" (제2권, 232)
"라스콜니코프(로쟈)는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가 방 한가운데 섰다. (...) 마당에서 뭔가 두드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못 같은 것을 두들겨 받는 모양이다. (...) 한 번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이 이토록 지독하게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2권, 238)
- 혼자 남은 로쟈, 고독한 인간의 모습.

[13] "뭐, 친구, 상관없어. 좋은 곳인걸. 누군가 자네에게 묻거든 그렇게 대답하게, 미국으로 떠났다고 말일세." (제2권, 375)
-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자살 직전 소방서 앞에 있던 보초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

[14] "그는 고백하기 위해 그녀를, 소냐를 맨 처음으로 찾았다. 그에게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녀에게서 사람을 찾았다." (제2권, 390)

[15] "그는 센나야 광장으로 들어갔다. 사라들과 이리저리 부딪쳐 불쾌했지만, 몹시 불쾌했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는 곳으로만 걸어갔다. 혼자 남을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걸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제2권, 396)

[16] "그가 사랑한다는 것, 그가 그녀를 한없이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것을 이해했고,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 그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창백하고 초췌했다. 하지만 이 병들고 창백한 얼굴에는 새로워진 미래,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여명이 이미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위한 무한한 생명의 원천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2권,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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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02 20: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도선생님의 사형 판결과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이 많이 반영된거 같아요. 그리고 도선생님 책을 보면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더 공감이 많이 갑니다 ^^

초란공님의 글은 논문으로 쓰셔도 될거 같아요 😅

초란공 2022-01-02 21:10   좋아요 5 | URL
페크님의 글쓰기 공부로 올해는 글 다이어트를 해야겠습니다^^;; 읽으실 때 많이 불편하실 것 같아요^^

새파랑 2022-01-02 21:20   좋아요 3 | URL
저는 전혀 안불편하고 너무 좋은데요~!! 다시 죄와벌을 꺼내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

페크pek0501 2022-01-02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길게 써 보는 게 소원입니다. 글쓰기에도 꽤가 나나 봐요. 블로그 초창기엔 제법 긴 글을 쓰곤 했는데 이젠 간단하게 써서 올릴 생각을 하게 되어요. 올리는 횟수만 따져서 그런가 봐요. ㅋㅋ

mini74 2022-02-10 1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2-02-10 21:08   좋아요 2 | URL
mini74님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ㅋㅋ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2-10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완전 축하드려요. 이 좋은 작품으로 당선되시니 부럽습니다~!!

초란공 2022-02-10 21:0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인데 너무 우려먹은 느낌도 들고.. 좋은 작품의 후광효과인가요. ㅋㅋㅋ 부끄럽습니다.ㅋ

그레이스 2022-02-10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2-02-10 21:09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scott 2022-02-10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도끼옹이 죄와 벌로
이관왕의 기쁨을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