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진의 뿌리를 찾아서


- 박주석의한국사진사출간기념전시를 다녀와서

 


작년(2021)에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한국사진사를 기념하여 마련된 전시 ()에서 ()으로에 다녀왔다. 전시장에는 한국사진을 개척했던 사진가 22명의 사진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번 사진들은 한국사진사 연구를 처음 개척했던 고 최인진 선생(1941-2016)이 수집한 800여 점의 프린트에 이번에 출간된 한국사진사의 저자 박주석 교수(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 대학원 교수)가 수집한 700여 점의 빈티지 및 오리지널 프린트를 더한 컬렉션에서 선별한 사진 전시다. 오늘 페이퍼는 도서 소개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실제로 보기 힘든 사진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이기에 전시에 다녀온 후기를 겸해서 작성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의 강남에 있는 전시관 <언주라운드>에서 진행중인 전시는 이달 26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후 광주에 있는 <갤러리 혜윰>(03.05-03.25)과 대구의 <아트스페이스 루모스>(04.02-05.01)에서 전시된 다음, 해외 순회전시가 기획되어 있다. 전시장 담당 큐레이터분이 직접 말씀해주신 바에 따르면,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 일부는 미국 순회전시에 포함되어 있어서 당분간(2년 정도)은 국내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사진사에 소개된 사진 중 일부가 전시되어 있지만, 이번에 전시되는 작가들의 빈티지 프린트, 오리지널 프린트는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귀한 사진들이다. 그러므로 사진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방문해보시기를.


 

(전시회()에서 ()으로포스터(왼쪽)와 2021년에 출간된한국사진사표지(오른쪽))


 

책의 저자인 박주석 교수는 연구자로서 사진은 이미 포토그라피()를 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진()의 문제이다.”라고 바라보며, 그러므로 오늘날의 진()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사진을 감상하면서 이 두 글자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내게 ()’의 문제는 기술적인 조건과 형식이 답하는 문제다. 카메라, 렌즈, 기본적인 원리 혹은 시대성 등등을 포함한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의 문제는 ()’의 문제와 모종의 연관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도 보다 비가시적이고 주관적인 조건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사진가의 해석과 관점, 의도와 같은 것들이다. 사진가의 의도는 기술적으로 ()’를 구현하기 위한 선택에 개입한다고 볼 수 있겠다. 각종 특수인화 기법들과 사진가의 의도에 따른 도구의 선택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의도에는 인화지의 유형과 종류, 프린트 방식과 크기 등의 선택 과정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이 ()’의 문제에는 무엇보다 사진가의 철학이 담긴 해석과 의도가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된다.

 


사진을 전공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국내에서 이른바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사진 활동 기록은 1928년 정도부터 라고 한다. ‘조선포토싸롱이라는 공모전 형식의 사진 대회가 생겨난 것이 이 때부터이며, 이 때부터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사진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진가 문치장의 이력처럼 1920년에 조선 총독부 사진과 조수로 일본인들에게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정황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들이 사진술을 습득한 후 20년대 후반부터 보다 활발하고 능숙하게 사진 활동을 전개해나가기 때문이다. 이번 사진 전시에 선보인 사진들도 1929년에 촬영된 정해창의 사진으로 전시회의 포문을 열고 있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사진전람회를 개최한 사진가다. 작가 소개 정보란을 보니 일본 유학 시절 독일어를 공부하고, 서양화를 배웠으며,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화학과 피그먼트 인화법을 연구하며 사진가의 길로 들었다고 한다그림을 공부한 사진가라서 그런지 정해창의 사진에는 전통적인 회화의 특징적인 구도와 양식이 반영된 근대 사진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사진이 회화와 구별되는 지점을 치열하게 고민했을 사진 선구자의 방황과 열정이 느껴진다. 특히 정해창의 사진 몇 점은 사진가 구본창이 재인화 작업을 하여 선보인 작업들이다. 아마도 유리 건판으로 작업했을 정해창의 사진 인화물이 이제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당시에 작업했던 인화물(주로 RC인화지로 작업)이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아서일 것이다.(인화지 관련 정보는 아래 추가 설명 참조)




(정해창, 여인의 초상(1929), 왼쪽/ 인형과 오브제(1934), 오른쪽, 두 사진 모두 구본창 인화)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한국 사진의 역사가 비록 일제 강점기에 태동했지만 세계 사진사의 역사에서 크게 뒤쳐져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태동한 한국 사진의 역사는 1938년 정도 까지는 국내의 사진 동호회(구락부) 활동이 꽤나 활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 이후부터는 국내 사진활동에도 큰 제약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사건을 주도했던 사진가가 동아일보의 사진과정으로 있었던 신낙균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전시회 포스터로 사용된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을 비롯하여 세련미가 느껴지는 자화상 사진 세 점이 선보이고 있다. 전시회 소개자료의 작가 소개 정보를 참조하면, 신낙균은 무엇보다 국내 최초의 사진학자이자 근대 사진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교육자였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1927년에 한국인 최초로 일본 동경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졸업하고, YMCA의 사진과 교수로 처음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신낙균의 자화상(1927), 왼쪽 / 임응식, ‘구직(求職)’(1954), 오른쪽)


 

한국의 사진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일제의 영향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 것은 1942년에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가 전시에 사진 찍는 일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한국사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아마추어를 포함한 사진활동은 한 번 이상의 소강상태를 겪는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 계기가 태평양 전쟁이었겠고, 두 번째는 물론 한국전쟁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40년대 사진 몇 점이 보이지만, 뚜렷한 개성을 지닌 리얼리즘 사진은 한국전쟁 전후에 두드러지는 것 같다. 전시회 소개 자료에는 생활주의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진가 임응식을 언급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구직(求職)>(1954) 사진도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선보이지 않았지만 이 리얼리즘사진의 맥을 있는 사진가로는 사진가 정범태와 최민식으로 맥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사진 전공한 친구는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애(humanity)가 잘 느껴지는 정범태 작가의 사진도 볼 수 있었으면 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선정되지 않았나보다.


 

개인적으로는 사진가 이형록의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는데, 책이나 전시회에서 보면 금방 어떤 사진의 유형인지 알 수 있겠다. 그의 사진은 앞서 언급한 임응식이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삶을 주제로 작업한 임석제리얼리즘사진들과는 조금 다르게 조형성이 강조된 사진들이었다. 내 취향에 가장 가까웠던 이형록의 사진은 아침 시장의 모습을 담은 작품(1955)이다. 어렸을 적에 전통시장 근처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 사진을 봤을 때 털털거리며 연기를 내뿜으며 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이 떠올랐다. 또 비가 오지 않아도 언제나 뜯어낸 무나 배추 잎이 섞여 질퍽한 진흙탕이었던 시장 바닥이 생각났다. 인물의 검은 실루엣이 프레임을 양분하며 쓰레기를 태우기 위해 손잡이 달린 양동이(대개는 불을 떼기 위해 양동이 주변으로 구멍을 뚫는다)를 흔들어 불을 붙이는 듯한 장면이 포착되어 있는 사진이다. 질퍽하고 싸한 재래 시장의 아침에 불을 제대로 붙이려고 흔드는 사내와 화면을 가로지르는 흰 색 연기의 대비가 강렬한 사진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렇게 조형성이 강조된 사진을 좋아하는 것 같다(예전엔 그다지 생각을 안했는데 말이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 중에서 조형성에 주목한 사진가는 이상규, 김행오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이형록 시장의 아침’(1957), 왼쪽/ ‘어촌’(1958), 오른쪽)


 

이형록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그가 앞서 언급한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 임응식1935년에 강릉 우체국 직원으로 부임했을 때 서로 알게 되어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일화다. 한국 사진의 선구자들이 서로 만나 각각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한 명은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을, 다른 한 명은 조형주의 사진을 개척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내가 이형록의 전시회 사진을 보면서 놀랐던 점은 그의 섬세한 조형 감각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아침 시장사진 외에 머리에 물건을 이고, 포대기에 아이를 엎고 배가 엎어진 모래사장을 지나가는 사진(1958)이나 공사 현장의 노동자들을 찍은 사진(1955)이 보여주는 조형 및 균형 감각은 매우 놀라웠다. 내가 보기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조형성과 비견되는 사진들이라 생각한다. 그의 사진이 궁금한 분들은 책이나 이번 전시회 사진들을 참고해보시기 바란다.



 

 (현일영 손목시계’, 왼쪽/ 박필호 무제(손 위의 시계)’(1937), 오른쪽)


 

전시회 안내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번에 공개된 사진 중 사진가 현일영의 사진들이 또 다른 사진들과 맥이 다른 것 같아 흥미롭게 주목해본다. 자료에는 작가주의 사진가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현일영의 사진에는 간결한 오브제를 주시하며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가져오는 사진들인 것으로 보인다. 손에 찬 손목시계,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달력, 타고 남은 담뱃재가 쌓인 재떨이, 부식되는 사과와 같은 대상들을 응시한 사진들이다. 앞서 언급한 이형록의 사진들처럼 외부세계를 향해 관찰하며 조형성을 가미하는 시선과는 분명히 다르다. 현일영의 사진들은 사진가의 시선이 사물을 응시하지만 결국은 반사되어 사진가의 내부로, 그리고 이어서 관람자인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사진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선은 분명히 내부를 향하고 있었다. 사진가가 관찰하고 응시하는 대상에서 결국은 나의 기억과 감성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사진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사진적인 사진이라고 말하곤 하는 그런 사진들이다. 현일영의 사진과 맥을 같이 하는 사진으로는 손바닥 위의 회중시계를 찍은 사진가 박필호의 사진을 꼽을 수 있겠다. 현일영손목시계사진과 비슷한 형태의 오브제를 찍었다는 점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자 기호로서 오브제를 이용하는 점,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형록의 사진들과는 분명히 다른 맥락을 이루지만 현일영의 사진들은 오히려 더 현대적인 감각을 일깨워 준다. 사물에 사진가의 내면을 비추고 있기에 오히려 한편의 짧은 시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이형록의 사진들은 외부 세계를 응시하면서 기록하기에 소설 속의 이야기(서사) 한 장면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문치장 설빔 차림의 아이들’(1937), 왼쪽, 전시장 입구의 안내문, 오른쪽)

 


현일영의 사진 옆에 이어지는 사진 중에 또 나의 눈길을 끌었던 사진은 1933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이었다. 동아일보의 사진기자였던 문치장이 프레임의 한쪽 끝에 보이는 복엽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날았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 중에는 서울 상공에서 찍은 항공사진이 있다. 사진의 한쪽 프레임으로 보이는 복엽기의 날개 사이로 동아일보 사옥이 촬영되었다. 전시장에는 대형 카메라를 조작하는 사진가의 자화상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미 30년대에 다양한 시각을 검토하고 실험하고자 했던 시도들, 그리고 기술적 조건들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었다위에 제시한 사진은 항공사진이 아닌 그의 설빔 입은 아이들’(1937) 사진이다.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나라의 유적 앞에 나있는 거리 한 가운데에서, 설빔을 입은 모습을 찍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사진가가 느꼈을 법한 감정을 조금은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은 그렇게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배운 것이 있다면, 전시 소개 자료에 나온 사진 비평가 박평종의 도움글이다. 그는 빈티지 프린트로 보는 한국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글에서 빈티지 프린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번 전시의 의미를 짚어준다. 우리가 흔히 빈티지 감성’, ‘빈티지 효과라는 상투어에서 많이 보듯이 낡고 오래된 무언가를 연상하게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진에서 빈티지 프린트라고 하면 필름 원본(혹은 유리 건판)이 사라진 유일무이한 인화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매번 인화할 때마다 같은 작품은 존재하지 않지만, 더 이상 인화물을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을 의미한다. 따라서 박평종이 언급한 것처럼 빈티지 프린트는 희소성이 높고 컬렉터들이 주목하고 있기에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더하여 비평가는 빈치지의 비교 불가능한 가치와 의미를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빈티지 프린트가 생산되었던 당대의 정확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는 것. 바로 빈티지 프린트가 갖는 역사적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는 시대와 관계 맺고 있던 작가의 개입, 이를 테면 사진가가 네거티브 원판을 어떻게 해석했는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작가의 해석이라면 보다 구체적으로 앞서 언급한 인화지들의 종류, 작품의 크기(혹은 카메라 판형), 프린트 방식과 기법 등에 관해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선택을 포함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사진의 역사에서 빈티지 프린트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에는 네거티브 원본만 있으면 되기에 인화물에 대한 관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또 보관성이 좋은 FB인화지보다 보다 일찍 변색이 되곤 하는 RC인화지에 작업을 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의의는 한국사진사의 출간 기념 전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박평종의 말을 빌리면, 고 최인진 선생과 박주석 교수가 그동안 수집, 정리, 보존해온 빈티지 사진들을 통해 한국사진의 역사를 복원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중 일부는 꾸준히 작업하고 사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글을 써온 사진가 구본창, 주명덕이 다시 작업한 인화물(정해창, 현일영의 사진들)이 있어, 빈티지 사진과 한국 사진사 정리와 보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말에 이르는 초기 한국 사진의 선구자들의 활동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피식민지의 땅에서 태어나 당당히 일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체계적으로 사진을 배우고 다양한 생각과 시도를 구현해보고자 했다. 이들은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지식인들이었다. 아울러 지금의 시선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형식들이 이들의 손에서 시도되었고 실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단지 편리해진 디지털 카메라로 이들 선구자들이 고민하고 시도했던 작업들을 반복해보는 정도에 불과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장비에 접근성이 높아진 지금과 달리 100년 전의 한국 사진은 진지한 지식인들이 접근할 수 있었던 예술분야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나는 서양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함을 배운다. 그런 다음에야 후학들은 선구자들이 고민과 실험을 통해 내놓은 결과를 기반으로 더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 읽은 불문학자이자 문학 비평가 황현산의 글 한 대목이 여기에 어울릴 듯하다.


 

아직도 나는 그 섬의 이런저런 해안 자락을, 이 마을 저 마을의 고샅들을, 동내에 함께 살던 어른들의 이름과 성품까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 삶의 모든 표준이 여전히 그 섬에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섬으로 세상을 잰다.


(밤이 선생이다중에 실린 글 고향의 잣대(2001), 난다, 2013, 292)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을 신안군에 속한 작은 섬에서 보냈던 황현산은 어린 시절 몸에 각인된 세계가 이후의 세계에 대한 잣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말마따나 지난 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포스트모던의 담론이 기존의 잣대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럼에도우리에게는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나름의 잣대는 필요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는 이 글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국제 외교나 통상에서 그때그때마다 현행의 잣대에만 매달리다 보면 우리 같은 처지의 국가들은 늘 한 걸음 뒤지게 마련이다. 그 잣대의 향방을 예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파악하고 그 고향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구미 제국을 공부할 때, 그 고대와 중세를 더듬어 그 잔뿌리까지 남김없이 캐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겠다.”(294)

 


따라서 우리 사진의 역사에서도 캐내야 하는 대상은 서구의 역사와 문물만이 아니다. ‘내 안의 타자인 우리 선구자들의 기억과 이들이 남긴 자료들을 정리하고 보존하며 그들의 작업을 면밀히 파악하는 일이 곧 잔뿌리가지 캐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사진사을 또 하나의 토대삼아 한국 사진의 작은 역사를 우리 것으로 이어가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덧붙임] 인화지에 대한 추가 설명

1920-30년대 당시의 인화물은 섬유 재질로 된 화이버 베이스(FB) 인화지보다는 감광성 수지를 입힌 RC(Rasin-Coated) 인화지에 주로 인화했기 때문일 텐데, RC인화지가 작업에 좀 더 편리하고 가격이 저렴한 반면, 계조나 암부 묘사 등의 표현력에 있어서 FB인화지보다 떨어지고 보관성이 떨어진다. 반면 FB 인화지는 작업이 좀 더 까다롭고 가격이 높은 편이지만, 표현력이 좋고 무엇보다 보관만 잘 하면 100년 이상은 거뜬히 갈 수 있는 보관성이 좋은 인화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2-23 14: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설빔 차림의 아이들 사진을 초란공님 설명 읽으면서 보니 달라 보이네요 ㅠㅠ 신낙균의 자화상은 지금 시대에 봐도 카리스마있고 멋집니다. 시장의 아침도 좋고. 초란공님 설명과 함께 사진보니 전시회에 온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초란공 2022-02-23 18:37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쵤영년도를 보면서 저런 시도는 가능했을까 싶더라구요. 자화상은 세련된 것 같아요. 근데 이게 20년대 사진이라니 놀랍구요.

프레이야 2022-02-23 14: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반짝! 초란공 님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전시 기간과 공간이 세 가지군요.
그 중 한 곳은 가볼 수 있기를 기약해 봅니다.
아무래도 대구가 될 것 같습니다. 국내 첫 공개 빈티지 오리지널 프린트도 궁금하고요.
황현산 선생의 인용문도 의미 있습니다.

초란공 2022-02-23 18:46   좋아요 3 | URL
네~ 기회되면 꼭 가보세요.~ 저는 전시장 사진을 찍는다는걸 깜빡했는데 다른 전시장 모습도 궁금하네요~

얄라알라 2022-02-23 2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초란공님, 지난 Lucy 리뷰에서도 마지막 단락에서, 소설속 사진집 작가를 콕 집어 추정해내시는 걸 보고, 사진에 애정이 깊으시구나 했는데
전시회 다녀오셔서 이렇게 기억하시고 쓰실 수 있다니
다시 한 번 감탄하고 갑니다

최승희님의 춤을 컷컷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타임머신 탈 수 있다면 최승희의 무대를 보고 싶어요^^

초란공 2022-02-24 22:46   좋아요 2 | URL
사진에 관심있는 분이 많이 계신 것 같아 기억을 짜내서 후기를 남겨봤습니다. ^^;; 그리고 공개된 사진은 많지 않지만 정말 귀한 사진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인것 같아서요. 한 70년 전의 모습이라는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어요. 정말 영상으로 무대를 보면 어땠을까 싶네요.
 
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시 Lucy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

 



피식민지 출신 소녀가 자신에게 다가가는 과정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보고 대개 감탄하곤 한다. 혹은 풍경 속의 현장에 직접 가보고 싶다거나 그 장소의 이력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것 은 아니었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 루시 Lucy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도시에서 사는 백인 중산층 부부와 이들의 아이를 돌보는 흑인 소녀가 기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는 길이었다. 창밖에 갈아엎은 밭이 펼쳐진 풍경을 보고 백인 여성은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풍경이라고 말한다. 반면 흑인 소녀는 저 일을 내가 안 해도 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소설 전반부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처럼 동일한 풍경, 혹은 이를 담은 사진을 보고 사람마다 크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풍경을 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지녔기 때문이다.


소설 루시 Lucy는 저자 킨케이드의 자전적 이야기다. 저자는 서인도 제도의 영국 식민지였던 앤티가섬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17살 때 학업을 중단하고 미국 뉴욕 주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 입주 보모(오페어)로 일을 시작했다. 화자는 저자의 분신이었다. 화자의 생년월일이 저자와 동일하게 설정되기도 했다. 킨케이드가 대학에서 잠시 사진을 공부했던 것처럼 화자 루시도 사진을 찍는 것으로 나온다. 이 소설은 길지 않은장편소설이지만 꽤나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가 뒤섞여 있다. 식민주의, 여성으로서의 삶과 페미니즘, 가부장제도, 인종주의와 같이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틀과 맥락이 밀도 있게 담겨 있다. 인종주의적인 측면은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않지만, 인종 문제는 소설 속 인물의 배경이 되는 전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사실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식민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과 고통


앞서 언급한 흑인 소녀의 이름은 루시 조지핀 포터다. 루시는 자신의 이름을 무척 싫어했다. 식민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앤티가섬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68년 즈음에도 여전히 영국에 속해 있었다. 1981년에서야 독립했던 이 섬은 공식적으로 무려 349년 동안 식민지였다. 루시의 성 포터는 예외 없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던 조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식민지 현실에서 노예들이 주인의 성을 따랐던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시의 할머니는 사라져버린 원주민의 후손이었다. 3대에 걸친 여성의 피 속에 식민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흘렀다. 실제로 킨케이드는 루시 Lucy의 전편 격인 자전적 소설 애니 Annie John를 출간한 해에 딸을 낳았는데, 딸의 이름 역시 애니로 지은 바 있다. 현실의 삶에서도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식민주의의 역사가 세대를 건너 이어지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과 실제 작가의 삶이 맺는 관계는 마치 거울에 비친 대칭 이미지처럼 여겨진다. 작가는 피식민지 여성의 목소리를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잊지 않기를 무엇보다 바랐던 것 같다.


식민지 모국에서 살아가는 피식민지 여성의 삶은 내게 익숙한 삶을 너머 훨씬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오랜 시간 피지배자로 살았던 환경에서 개개인이 그 영향력을 떨쳐내기란 역부족이다. 루시와 엄마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줄곧 나는 엄마와 닮지 않았고,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해도 이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루시는 언젠가부터 엄마가 겪던 두통을 마찬가지로 앓는다. 백인 주인 머라이어의 손을 보고도 엄마를 떠올리는 루시는 자신이 곧 엄마임을 깨닫는다. 멀리 도망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네 엄마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내 피가 네 속에 흐르고 있고, 넌 아홉 달 동안 내 뱃속에 있었으니까.”(74)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애증의 관계다. 엄마가 자신과 다르게 세 남동생을 대했을 때, 엄마에 대한 증오가 두드러졌다. 점령국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간 피식민지 여성이 가부장제도를 내면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루시의 가슴에 칼이 꽂히는 순간이었다.


난 사회적 지위도 없고,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도 없었다. 내겐 기억이 있고,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었다.”(108) 소설 전반에서 루시가 줄곧 보여주었던 정서가 아닐까한다. 루시에게는 엄마처럼 미운 사람이 없었고, 또 엄마처럼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딸 사이의 애증관계다. 루시는 언제나 자신을 친절하게 돌봐주는 백인 여성 머라이어의 모습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머라이어의 손이 엄마와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도 엄마가 보낸 편지는 읽지도 않고 치워버렸다. 하지만 갑자기 아빠가 돈 한 푼 남겨 놓지 않고 세상을 뜬 다음 큰 빚까지 남겨둔 것을 알게 되자, 루시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엄마한테 보냈다. 아들이 할 법한 행동과는 사뭇 다른 엄마-딸 사이의 모습이다.


피식민지인에게 가해진 억압과 왜곡된 가부장제 질서의 모순 때문이었을까. 루시의 대인관계, 특히 남녀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육체적 관계에는 탐닉했다. 일반적인 관계에서 기대되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란 없었다. 자신이 가진 돈을 전부 준 다음 엄마와 손절했던 루시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고 싶어 했다. 이게 자신이 늘 원했던 삶이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에 루시는 자유를 얻었지만 사랑이 빠진 대인관계에서 행복감과 희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삐걱거리는 그녀의 대인관계는 식민주의와 가부장제가 남긴 상처의 결과였다. 루시에게는 곁에서 자신의 상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도 상처를 돌볼 기회도 놓쳤다. 사랑 없는 공허한 관계에 탐닉했던 것은 더 이상의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기만의 키스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루시만 고통 받았던 건 아니었다.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의 부모, 머라이어와 루이스의 결혼 생활 역시 파탄을 향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애정 표현을 과시했다. 루시는 루이스의 행동이 그저 임을 곧바로 알아챘다. 게다가 루이스는 가족이 별장에 머물 때, 텃밭을 망친다는 이유로 토끼를 쏘아 죽였다. 이 모습은 피식민지인들에게 가했던 식민지 모국의 행적을 떠올리게 한다. 백인 가족이 토끼를 위해 치러주는 장례 의식을 보면서 루시는 이것이 이들의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라고 여겼다. 이처럼 소설은 백인 중산층 가정의 기만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화자의 눈으로 고발하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폐허라는 사실”(72)을 깨닫게 되었다.


 


사진 - 분노와 절망, 거짓을 걷어내는 의식


대인 관계는 언제나 삐걱거리고, 매사에 불만과 분노를 드러내던 루시도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박물관 가기와 책읽기였다. 머라이어는 박물관에서 본 어떤 사진을 좋아했던 루시에게 사진집 한 권을 선물했다. 사진집을 보면서 루시는 지인들을 떠올렸는데, 특히 한 소년에 대해 말했다. ‘두 팔에 커다란 병 두 개를 안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반바지를 입은 아이 모습’(93)을 담은 사진이었다. 틈나는 대로 사진집을 보던 루시는 자신도 사진기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킨케이드가 사진학과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던 이력이 있었던 것처럼, 루시도 사진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여 들여다보곤 했다. 여러 면에서 루시는 작가의 분신이었다.


소설 속의 화자가 사진을 찍고 결과를 들여다보는 과정은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사진 활동은 앞서 언급했던 식민주의적 질서에 영향을 받은 인간들의 모습을 비추어 주었다. 다시 말해 허위와 허영, 기만적인 삶에 얽힌 대인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를 관찰할 기회를 준 것이다. 또 그녀가 회피하고 가슴 깊이 묻어 둔 상처들을 돌아보게 했다. 사진 찍는 이유를 알지는 못해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좋아 그녀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루시는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 익명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자유로움과 더불어 행복감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기다린 건 공허함뿐이었다. 반면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흔들림 없이 응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통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더라도 말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애도하는 과정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타인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사진의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머라이어의 집에서 나와 독립한 루시는 이제 자신만의 방에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사진기는 렌즈 앞에 있는 대상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 결과물은 사진가와 피사체를 기록하며 이들의 현존을 증명했다. 반면 루시는 사진 자체가 모든 진실을 말해주지도 않음을 간파했다. 자신이 인화한 사진을 보면서, “어떤 실재를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97)라고 묻기 때문이다. 루시의 궁금증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사진을 보는 감상자의 경험이나 기억에 따라 사진의 진실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실과 사진에 보이는 진실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할 수 있음을 직관했던 것. 그녀는 바로 이 점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사진은 이를 읽고 말하는 자에 따라서 언제든 우리를 기만할 수도, 혹은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점을 이해한 루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로로 사진을 활용한다. 촬영자와 감상자가 동일하기에 오히려 현실에 덧씌워진 기만과 허영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었고, 거짓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지나가버리는 현실과 달리 사진 속의 현실은 자신의 기억,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며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루시의 사진 활동은 상처를 숨긴 채, 사람들 앞에서 삐뚤어지고 모순된 행동을 보였던 자신과 마주하게 해주었고, 자신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었다.


루시의 사진 활동이 소설에서 중요하다고 여긴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글쓰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머라이어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샀던 가죽 장정 공책을 루시에게 선물한다. 침대에 누워 있던 루시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공책에 쓴 다음 이 문장을 썼다.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130) 이어서 루시는 수치스러움이 몰려와 오열한다. 사랑과 신뢰가 깃든 대인관계에 실패했던 것은 또 다시 상처입기 싫었기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시가 사진을 찍고 이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식민주의의 영향과 여성의 굴레 속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또 자신을 가리고 있던 기만적이고 두터운 장막을 걷어내게 해주었다. 이 과정은 자신과 만나는 글쓰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루시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가능성과 사랑이 깃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덧붙임]


루시는 머라이어가 선물해준 사진집 한 권을 보고 사진기를 사겠다고 결심했다. 이 사진집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으로 생각된다. “한 소년의 사진이 특히 그랬다. 두 팔에 커다란 병 두 개를 안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반바지를 입은 아이였다.”(93)라는 대목을 근거로 한다면 말이다. 이 사진은 브레송이 1952년에 파리에서 찍은 흑백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의 배경인 1968년과도 시간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c) Henri Cartier-Bresson, Paris, 1952



[1] "한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매맞는 여자아이가 있고, 다른 한 곳에는 눈에 보이는 남자에게 목이 베이는 여자 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인데 어째서 내 인생에는 선택지가 고작 그 둘뿐이지?" (22)

[2]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문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었다." (29)
- 활짝 핀 수선화가 무리지어 넘실대는 수풀을 보고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은 비통함과 원한만을 느끼는 모습.

[3] "내가 머라이어를 사랑했던 때는, 그녀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을 때다. 내가 머라이어를 사랑하지 않았던 때는, 그녀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을 때다." (49)

"머라이어를 보면 볼수록 내가 사랑하는 엄마의 면모가 점점 더 많이 떠올랐다. 손이 엄마 손과 똑 닮았다." (50)


[4] "꽤 어렸을 때였는데도 난 잘사는(그러니까 분명 행복한) 사람들은 다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 뚜렷한 네 계절로 나뉘는 지역에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이었다.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 (70)

[5] "그리고 틀림없이 난 여자였다. (...) 엄마처럼 되기 싫다는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되뇌며 살았던지 그러다가 사정의 전말을 놓치고 말았다. 난 엄마처럼 되지 않았다. - 난 그냥 엄마였다." (74)


[6] "남자의 생애는 언제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참이었으니까." (78)

"요즘 깨닫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을 하든 정확한 방식을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찻잔을 쥐는 법이나 포크로 찍은 음식을 옷 앞자락에 흘리지 않고 입으로 가져가는 법을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 대부분의 불행에 책임이 있고, 미칠 일도 빈털터리로 생을 마감할 일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80)

[7] "어떤 실재를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 아직 그 대답은 알 수 없었다." (97)

[8] "자유를 향해 가는 길에서 누구든 재물을 얻고 누구는 죽음을 얻지." (103)
- 폴이 차를 몰면서 대양을 건넜던 위대한 탐험가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하자 로드킬당한 동물을 보면서 루시가 대꾸한 말.

[9] "난 내가 그 섬에 존재하게 된 기원이, 내 조상의 역사가 사악한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9)
-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을 시킨 역사를 가리킨다.

[10] "포터라는 성은 틀림없이 우리 조상이 노예였을 때 그 주인이었던 영국인의 성일 것이다." (120)
- 실제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어머니 이름도 로더릭 포터다.

[11] "악마 이름을 붙인거야. 루시는 루시퍼를 줄인거지. 하여튼 내 뱃속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얼마나 성가셨던지." (121)
- 자신의 이름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되어 오히려 실패자라는 기분에서 벗어나 의기양양한 기분을 느끼는 루시.

[12]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130)
- 루시가 선물로 받은 공책에 썼던 첫 문장.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2-17 22: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물을 렌즈 안에 담는 시선은 글을 쓰는 것으로 이어지겠죠?!
여성은 항상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안게 되네요.

초란공 2022-02-17 22:27   좋아요 4 | URL
킨케이드 여사가 바로 그 증거이겠죠? 얇은 소설인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만큼 생각거리가 많은 소설 같아요. 저도 계속 배우고 있고요.

mini74 2022-02-17 22: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루시의 사진들이 궁금하네요. 무엇을 담았을지. 사진과 글쓰기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 같아요 ~ 초란공님 글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 2022-02-17 23:01   좋아요 3 | URL
저도 새롭게 알아가고 있네요~ 글쓰기와 사진... mini74님이 좋아하시는 그림도 그렇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scott 2022-02-17 2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리뷰 읽으니 루시에 급 관심이!
마지막 사진 속 주인공 꼬마!

반세기 후에 브레송 미망인과 만났습니다. ^ㅅ^

초란공 2022-02-19 18:00   좋아요 2 | URL
브레송 미망인과 만난 이야기가 더 솔깃하고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인연이 이어진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새파랑 2022-02-18 07: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피식민지인에다가 여성이라는 것까지 저자는 힘들게 살았을거 같아요. 자전적 소설이어서 그런지 더 생생할거 같은 이야기인거 같아요~!!

초란공 2022-02-19 18:02   좋아요 4 | URL
본문 중간에 힘들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얇은 책인데 묵직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소설인 듯합니다.

얄라알라 2022-02-19 18: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토끼를 쏘아 죽이고 장례식을 치르는 백인 가족에게서 허위의식을 느끼다니,
얇은 책이라 하셨는데 행간이 넓은 책이겠어요.

˝포터˝ 이름이 식민지적 잔재라면 Porter겠구나 했습니다. 좋은 소설, 특히 루시처럼 자서전적 소설은 좁은 시야를 넓혀주는 데 정말 유용한 것 같아요.

루시가 가부장적 남아선호(?)를 한 어머니에게 분노하면서도 돈을 몽땅 보낼 수 있던 마음이 뭔지, 왜 공책을 적다가 오열했는데 직접 읽고 느껴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란공 2022-02-19 18:06   좋아요 3 | URL
리뷰쓰느라 다시 들여다보는데 그 기분이 좀 더 느껴졌달까요. 모녀 간의 이런 애증관계는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는 곳 어디에나 공통적일 수 있겠다 싶어요.

2022-02-19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9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9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77주기, 우리에겐 부끄러움이 남아 있나

-안소영의 장편소설시인/동주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오늘이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라고 한다. 시인은 차가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216일 눈을 감았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안소영 작가의 시인/동주를 들춰보다가 식민지의 땅에서 스물여덟 해를 살다간 시인의 발자취를 다시 발견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가 태어난 곳(중국 길림성 용정)과 눈을 감은 곳(일본의 형무소)이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를 떠올리면 무심한 이런 사실에도 안타까움이 더한다.

 


시인/동주를 읽게 된 것은 저자의 다른 역사소설 책만 보는 바보(2005)를 읽고부터였다. 책을 너무나 사랑하여 간서치라는 별명을 스스로 짓고 또 그렇게 불리었던 이덕무. 그의 삶 또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하고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사람과 자연을 부단히 사랑하고 긍정했던 그는 현실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서자출신으로 오랫동안 관직을 얻을 기회도 없었다. 추운 겨울날 구멍 뚫린 창과 문으로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소장하던 논어로 이불을 삼고, 한서로 바람을 막았다 했다. 후대 사람이 이덕무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 일화는 일견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냈던 본인과 가족들에게는 그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고된 시련이었을 테다. 안소영 작가는 이렇듯 바람 부는 날 심지를 꼭 붙들고 있는 촛불처럼, 엄혹한 세계에서 삶을 견디어 내던 인물들에 눈길이 가고 손길이 더 갔던 모양이다. 시인/동주중에서 시인이 습작기에 썼던 초 한 대라는 시가 소개되어 있어 다시 눈으로 읽어 보았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초 한 대(1934)에서 재인용함, 79)

 


시인 곁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총명한데다, 신춘문예 당선까지 했던 동갑내기 친구 송몽규가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시는 송몽규가 임시 정부 군관 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난 후, 윤동주가 썼던 시라고 한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친구의 앞날을 예감했을까. 자신의 열일곱 번 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이 시에는 혼자 남은 시인의 감상이 담겨 있는 듯하다. 국사 시간에 들은 기억으로 1930년대면 일제의 수탈정책이 더욱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습작시를 썼던 소년 윤동주도 현실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쳐내야할 세력이 바로 눈앞에서 모든 이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10년에 출생해서 1937년에 요절한 시인 이상 역시 나라가 사라져버린 땅에서 태어나 살았던 인물이다. 책 속의 여러 정보와 상황은 시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상상만으로 그의 삶을 파악했다고 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서 중 흔히 이야기 되는 것이 염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나라는 사라져버렸고, 친구 몽규는 보장된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독립군이 되는 길을 떠났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피지배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혜택을 받았던 지식인으로서 자신은 어떤 길을 가야할까를 자문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았을 그는 내게 거울 앞의 시인으로 보였다. 참회록(1942)이란 제목의 시에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앞에 선 화자가 등장한다. 밤마다 녹슨 거울을 닦아보아도 부끄러운 나의 모습만 비친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까. 막막하고 외로운데다, 답답한 현실이 시야를 가린다. 또 일본 유학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쉽게 씌어진 시. 일본식 육첩방 집에 앉아 있던 비오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져도 되는지 자문하며 또 부끄러움을 느꼈을 시인을 상상해본다.


 

(...)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시인/동주에 인용된 시 쉽게 씌어진 시(1942)에서 재인용함, 229)


사전에서 부끄러움과 관련한 단어를 무심코 찾아보니 여러 연관어가 나온다. 자괴감, 자괴지심, 수치심, 망신, 모욕, 수줍음, ‘볼 낯이 없다’, ‘떳떳하지 못하다등등. 윤동주 시인이 간직했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보다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있을까 궁금했다. 우선 나는 시인의 시대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그토록 싫어하고 멀리하던 시/문학을 성인이 되어 찾아 읽게 된 경위가 새삼 궁금해진다. 물론 무엇보다 책을 읽는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시를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을 조금씩 접하면서 점점 시적 상상력이란 표현을 점점 많이 접하고 있다. 내게 문학적 상상력, 시적 상상력은 우선 공감을 통해 타인의 삶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문학 고유의 자리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이것이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 앎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성경 속의 표현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러한 내용들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전제하기 때문에, 문학은 분명 역사 시대의 산물이다. 인간 한 명 한 명은 타인들과 이루는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축적된 기억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 문학을 생산한 사람은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미래의 인간과 조우한다. 내가 작품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윤동주 시인의 심정을 복원할 수는 없어도, 시에 드러난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설과 시를 생산하는 방식은 구체적인 과정에서 많이 다를지 모르지만,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상당부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문학과 다른 분야와의 뚜렷한 차이점일 것이다.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정서와 시적 상상력을 떠올리다가 문학비평가 황현산의 산문 한 편이 생각났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칼럼 한 편이다. 2009년에 있었던 용산 철거 현장의 참사를 보고 남긴 글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였다. 그는 시위자 다섯 명과 경찰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이 철거를 지시한 사람들이나 이 문제의 해법을 지닌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음에 놀라고 이를 이야기한다. 이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문제의 진원지로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멀어지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황현산이 이 칼럼에서 재인용한 시인 진은영의 용산 멜랑콜리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3, 진은영의 시 용산 멜랑콜리아를 재인용함.)


 

황현산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정작 비극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현대인들에게 닥친 실존적인 위기가 바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의 소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일본식 이름을 써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청년 시인의 마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상정해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의 슬픔과 상처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간다면, 인간을 고립과 소외로 몰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될 것이다. 인간 소외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린 결과라 하겠다. 타인의 슬픔과 상처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 말이다. ‘부끄러움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지닌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될 테다. 문학 연구자는 아니지만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적 상상력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 능력이야말로 시적 상상력의 가장 큰 효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에게 시적 상상력은 인간이란 종의 생존에 결정적인 징후가 된다.


 

윤동주 시인의 77주기를 맞아 소설 시인/동주을 펼쳐 인용된 시인의 시들을 모처럼 따라 읽어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시의 정서를 떠올리다가 문학 비평가 황현산의 글까지 다시 찾아보았다. 몇 년 전에 이 책들을 읽을 때는 문학/시적 상상력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이제는 왜 시인이 용산 참사를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처럼 둔한 사람에게 황현산 선생은 친절하게 그 이유도 일러주었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32)

 


이것이 바로 시적 상상력의 본질이 아닌가. 그리고 고통 받았던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하지 못했던 이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의 기반이 아닐까. 이 칼럼이 발표된 지 13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은 조금 나아졌을까 궁금하다. 아니면 적어도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을 느꼈던 80년 전보다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물론 눈에 보이는 것들’(살림살이)은 나아진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이렇게 적고 보니 이제 시를 읽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와 지향을 보여주는지 조금 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시를 읽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부끄러움의 연대를 이루어내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처럼 시를 쓰지 못해도 말이다



또 시를 읽는 행위는 이 부끄러움의 연대를 기반으로 집단 혹은 공동체의 기억을 형성하는 일일 것이다. 공동체의 기쁨과 긍지뿐만 아니라, 집단의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덮어버리고 잊어버릴 때, 인간은 서로를 고립시키고, 서로를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만날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인간과 기계는 구분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 읽기란 개개인이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저항행위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여전히 부끄러움이 남아있는지 묻는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2-02-1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줄 알았으면 어제 영화 <동주>라도 볼 걸 그랬습니다.
왜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하루 지나 여기서 보다니.
부끄럽네요.ㅠ

초란공 2022-02-17 21:21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영화 제목이 생각이 안났어요. ㅜㅜ
아마 70주기 80주기에는 행사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 저기서 작은 행사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조용히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재의 나들목에서 저항하기, 새로운 가능성을 긍정하기


- 보후밀 흐라발의너무 시끄러운 고독(2016)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 하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다. 모국어로 쓰였지만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판매 금지된 이 작품은 작가가 66(1980)가 되었을 때 비로소 타국의 언어로 공식 출간되었다. 소설의 화자인 는 한탸라는 인물이다.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생쥐들과 함께 삼십오 년 간 책과 폐지를 압축했다. 은퇴를 5년 앞두고 있는 그는 은퇴 후 모은 돈으로 압축기를 사들이고자 했다. 기계를 외삼촌 집의 정원에 두고 매일 폐지 한 꾸러미씩 만드는 삶을 꿈꾸었다.


소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공산화된 체코에서 지식인들이 겪었던 수난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압축기 속의 책과 폐지처럼 억압 받았고,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소설 속의 철학교수, 중앙난방 제어실의 근무자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 청소부, 성당 관리자등이 그런 예다. 지식인들은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체제가 강요하는 상식과 충돌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소설에는 하구수에 사는 회색 쥐와 검은 시궁쥐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하수구는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은유였다. 이곳에서 두 종류의 쥐들은 전쟁을 벌였고, 결국 검은 시궁쥐가 패배했다. 시궁쥐는 추방당한 지식인들이었다. 나치가 대학을 폐쇄되기 전까지 흐라발은 법학을 공부했던 지식인이었다. 그 역시 이런 시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다른 지식인들처럼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폐지 작업공은 그 중 하나였다. 소설에는 시대를 관통했던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탸는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누르며 책과 폐지를 정육면체 꾸러미로 만들었다. 기계가 작동하는 사이 그는 단지에 받아 놓은 맥주를 마셨고, 버려진 책들을 펼쳐 읽곤 했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10) 이것이 그의 책읽기 방식이었다. 작업 중 발견한 희귀 도서는 집에 가져가 쌓아두기도 했다. 이렇게 하기를 삼십오 년, 그는 마침내 현자가 되었다. 비록 목욕이라면 질색인데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진동해도 가방에 든 책만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직업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머리는 보물 같은 문장과 사유가 가득한 알리바바의 동굴이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작업 중에도 그의 상상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서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고독이 너무나 시끄러웠던 이유다.


한탸는 독신으로 지냈지만 젊은 시절엔 그에게도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비록 똥에 얽힌 사건으로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프라하 교외에 사는 옛 연인 만차를 보러 갔을 때, 한탸는 잿빛 머리가 된 그녀의 새 집을 보았다. 만차는 사랑과 온전한 의지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정신적인 열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는 남자까지 곁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 러브 스토리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또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쥐들이 책을 올려둔 천개를 갉아대는 소리에 잠들지 못했던 한탸는 젊은 시절 그의 삶에 갑자기 나타났던 집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탸의 퇴근길에 따라와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집시 여자의 이름도 몰랐지만 그녀는 저녁 장작용 널빤지를 구해와 매일 불을 지피고, 스튜와 소시지로 저녁을 차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예고 없이 사라졌다. 게슈타포에 붙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는 이처럼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인간 존재의 나들목 - 폐지 압축기


사랑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낭패를 겪을 때마다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되뇌었다. 이 말은 소설 전체에서 되풀이되어 발견된다. 무심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의 운명을 응시하는 화자의 만트라였다. 마치 냉혹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다. 한탸가 다루는 압축기에는 두 가지 색의 버튼이 있었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44) 한탸가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이 표현은 언제든 삶의 관성에 매인 인간의 모습을 직관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에겐 세상만사가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69)이었다. 현실은 한탸의 삶에 결코 다정한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압축기의 왕복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기 이루어지는(37) 세상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통째 들이키며 일하던 화자는 사람의 환영을 보았다. 성경도덕경의 주인공 예수와 노자였다. 압축기의 전진/후진 버튼에 대응하듯 예수와 노자는 각각 미래로의 전진/낙관의 소용돌이근원으로의 후퇴/출구 없는 원을 표상한다. 예수는 탄생(나옴), 노자는 죽음(들어감)에 대응하기도 한다. 폐지가 작업장에 도착하여 압축기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죽음(노자)이었고, 꾸러미가 되어 나오는 것은 부활(예수)인 셈이었다. 유명 화가의 복제화와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페이지가 펼쳐진 책이 포개져 압축되면, 폐지 꾸러미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책이 파괴되며 만들어진 꾸러미는 이제 새로운 예술작품이 되었다. 압축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였다.


물성을 지닌 책과 폐지를 맨손으로 꾸리는 작업은 한탸가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문장이 자신의 뇌와 혈관에 스며들게 하고, 자신의 상상력과 의지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또 폐지 더미 속에서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으로 조기 출근과 2시간의 추가 근무를 삼십오 년째 마다하지 않았다. 압축기의 버튼을 번갈아 작동시키며 폐지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그의 삶 자체였다. 연인과의 사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압축기와 함께하는 작업은 그에게 유일하고 온전한 러브 스토리였다. 그러므로 압축기는 그의 삶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삶의 구심점이었고, 세상만사를 통찰하게 해주는 사유의 토대였다. 세상만사의 원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왕복운동 하는 기계를 통해 이해되었다. 기계 속의 책처럼 존재를 억압하더라도 한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꾸러미처럼, 모든 존재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채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압축기는 모든 존재가 거쳐 가는 나들목이었다.




추방당한 이방인,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다


행복한 삶은 영원하지 않았다. 부브니에 거대한 압축기가 들어선 후 견고하게 보였던 한탸의 삶도 그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압축기를 보러간 그는 폐지가 지닌 종이의 감촉, 감각적인 매력에 무감한 채 장갑을 끼고 일하는 작업자들에 모욕감을 느꼈다. 문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새 책 더미가 그대로 폐기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맥주 대신 우유와 코카콜라를 들이키는 젊은 일꾼들에 용기마저 잃었다. 휴가 및 여가 계획을 이야기하는 젊은 작업자들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작업량을 채우느라 한 번도 휴가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99)라는 독백에는 평생 일해 온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듯한 좌절과 체념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거대한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 만에 한탸는 새로운 시련과 마주했다. 사회주의 노동당원 청년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기계부품처럼 다른 작업자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제 평생 일했던 직장을 떠나 백지를 처리하는 인쇄소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새로 온 일꾼들은 한탸의 압축기로 불과 한 시간에 다섯 꾸러미를 만들어냈다. 청년들을 칭찬하는 소장을 뒤로 하고 한탸는 피로감과 굴욕감에 몸이 마비되었다. 새로운 상황과 기계는 그를 배신했고 오랫동안 누렸던 그의 작은 기쁨을 짓밟았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산업 현장에 획일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는 스스로 쓸모 있는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시도했지만 이내 좌절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106)는 말에는 깊은 좌절감과 극도의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한 순간 삶이 뒤바뀐 한탸에게도 변화에 필요한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 비인간적인작업 방식을 거부했다. 작업장을 나와 여러 술집을 전전한 그는 맥주와 럼주를 번갈아 마신 뒤 다시 같은 카페로 돌아왔다.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고단한 시시포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모습은 예수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미래로의 전진’, ‘낙관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로부터 떠올린 근원으로의 후퇴’, ‘출구 없는 원주변에서 맴도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한탸는 평생 동안 동고동락 했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압축기 속에서 녹색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는 책과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러브 스토리에 온전한 종지부를 찍고자 했던 것일까.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131) 압축기에 들어간 한타가 절대 고독 속에서 스스로에게 외치듯 떠올린 이 말이 내게 못 박히듯 들어왔다. 평생 몸담아온 장소와 시간의 역사가 부정당한 존재가 저항하며 홀로 내뱉은 선언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소멸되어버리고 비인간적으로 변해버린 작업 조건, 나아가 생산성 향상만을 추구하는 획일적인 시스템의 모순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를 거부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은 허먼 멜빌이 창조했던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합리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노동 소외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필경사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지시한 일에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지 사흘만에 작업 거부를 통해 수동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흐라발의 소설 속 인물, 한탸 역시 새 압축기를 보고 온 뒤 사흘만에 작업장 밖에서 방황하다가 작업장으로 돌아와 삶을 마감한다. 바틀비와 한탸가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 자체를 거부하고 이에 맞서 죽음을 택했던 상황은 사망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의 행보와 대척점을 이룬다. 나아가 한탸와 바틀비의 비타협적인 거부 행위는 단지 행위만을 부정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대되었던 순응적인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무화한 것이다. 두 인물의 저항은 수동적이나마 자본가들 혹은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게임 규칙 자체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탸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여 백지를 처리하는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압축기로 들어가며 삶의 근원으로 후퇴하기로 한 선택, 감옥에서 식사를 거부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바틀비의 선택과 접점을 이룬다. 두 인물 모두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의 행위는 상식이 폭력으로 작용하며 존재를 소외시키고 추방하는 현실 자체를 전복하는 새로운 차원의 긍정행위다. 한탸가 간파했다는 그리스도의 냉혹한 말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37)는 바로 이 지점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두 소설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을 담은 소설이기도 하다. 흐라발과 멜빌의 소설은 정치 및 경제 여건의 변화로 추방되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 바틀비와 한탸는 세상의 게임을 만든 설계자·기득권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패배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의 규칙과 상식을 거부했고, 인간적인 삶의 본질을 관통하며 흐르는 존재의 가치를 지켰다. 한탸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끝까지 사랑했다. 모든 사람들이 한탸가 간 길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비인간적이더라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매일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1]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9)

[2]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

[3]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12)

[4]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18)

[5]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37)

[6]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바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44)

[7]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46)
-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문구를 풀어서 되뇌는 화자의 만트라.


[8]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52)

[9]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93)

[10]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106)

[11]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129)

[12]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131)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2-02-09 17: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처음 나왔을 때 한 번 읽고,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두 번 읽은 책이네요 ^^

확실히 고집스럽게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모습은 바틀
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네요.

mini74 2022-03-08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 리뷰 당선 감축드리옵니다 ㅎㅎ *^^*

초란공 2022-03-09 11:20   좋아요 0 | URL
mini74님 감사해요. 리뷰 2관왕에 동영상까지^^ 저는 mini74님만 보고 따라갑니다^^

새파랑 2022-03-08 1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려요~!! 연속 당선이신거 같아요 ^^

초란공 2022-03-09 11:21   좋아요 3 | URL
연속 2관왕 하기는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09 11:22   좋아요 3 | URL
이하라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도 조심하시길요.

얄라알라 2022-03-10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3관왕 가즈아~~ 구호를^^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3-10 22:39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감사합니다. 3관왕 이전에 저는 가랑이 찢어집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7-11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의 리뷰를 읽고 책을 읽는 게 더 나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
 
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선집 8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는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는 행위

-모리스 블랑쇼카오스의 글쓰기(2012) 읽고



 


카오스의 글쓰기는 비평가이자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가 남긴 단상 형식의 글 모음집이다. 17세기의 수학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이 남긴 팡세의 형식과도 유사하다. 제목의 카오스재난, 재앙을 의미하는 désastre에 대한 번역어를 옮긴이가 무질서와 같은 국면으로 해석하여 채택한 용어로 이해된다. 옮긴이가 선택한 용어에 대해 나름의 견해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타당하다. 그는 용어 선택을 고심하고 이와 관련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드러난 결과물은 저자뿐 아니라 번역가의 손을 떠난 것이고, 용어의 정합성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나는 카오스를 이따금씩 파국이라는 의미로도 읽었다. 불시에 들이 닥치는 것, 정체가 파악되거나 통제될 수 없기에 완전한 수동성을 지닌 무질서, 손을 쓸 도리가 없는 국면에 가깝다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파국에는 부정적인 암시가 있기에 온전한 대안은 아니다. 한편 카오스는 도래한 기점에서 어김없이 진행되는 상전이 현상의 경계같은 것, 하지만 존재의 비가역적인 변신이자, 환골탈태의 전조이기도 하다. 질료는 그대로이나 동일체는 사라지고 다른 성격의 존재가 되는 상황으로, 그 전후가 결코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카오스는 주체가 자신의 뜻대로 불러오거나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거대한 물결 속에 뒤섞여 흘러갈 수밖에 없는 쓰나미와 같다.


 


죽음과 글쓰기


이 책에서 블랑쇼는 여러 유형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언어의 부정성이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죽음존재가 사라지는 결정적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이 두 유형의 죽음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자에 따르면 언어가 가져오는 죽음이란 구체적 시공간이 추상적 관념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결정적 죽음은 몸이 구체적 공간(세계)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두 유형의 죽음은 모두 일종의 분리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고독을 초래하고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한다. 여기에 전자는 후자를 예고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262-263).


작가가 이토록 죽음에 천착하고 이를 글쓰기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블랑쇼의 글쓰기는 그가 통과한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대인과 이들의 메시아사상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는데, 그의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실이 글쓰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동시대인으로 나치의 만행을 목격하고, 저널리스트로서 이를 고발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친구로 만나 평생 교제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 역시 유대인이었다. 블랑쇼는 동료가 겪은 고통과 공포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레비나스의 가족을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피신시키고 보호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저자는 불시에 들이닥친 카오스의 공포와 죽음을 말하는 글쓰기와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블랑쇼가 겪은 재난’, ‘카오스의 경험은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라고 썼다. 이 문장의 영역문에 'take care of란 표현이 보인다. 이 표현은 일차적으로 주체가 제공하는 돌봄과 배려의 의미를 갖지만, ‘책임과 영향관계를 가리키는 의미도 고려해볼 수 있다. 곧 카오스가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들이닥친다는 사실, ‘카오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는 의미로서 말이다. 따라서 배려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카오스가 미치는 무차별적인 오지랖을 일컫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을 포함하여 재난과 반드시 마주하고야 만다. 카오스’, ‘재난혹은 파국은 광야에서 칠흑 같은 밤이 다 가도록 천사와 몸싸움을 벌였던 성서 속의 야곱처럼, 불가항력으로 다가오는 무질서와 혼란의 국면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면 야곱은 천사와 힘겨루기를 했을까. 어쩌면 야곱이 상대가 누군지를 알았더라도 카오스의 국면에서는 상대와 힘겨루기 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카오스’, ’재난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한 젊은이를 떠올렸다. 이 젊은이는 자기 가족을 화장터로 데리고 가야 했고, 목을 매달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구출되었다. 친위대가 총살형을 집행할 때 그는 희생자의 머리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목덜미에 총알이 잘 들어가도록 말이다(147). 이런 일을 겪었던 사람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성적으로 진술하리라 기대하긴 불가능하다. 처음에 극한 공포감이 찾아왔어도, 역치를 넘어버린 자극이 만성화될 때, 모든 것이 무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집단학살을 목격하고 기절했다는 나치의 2인자 하인리히 힘러가 학살의 빈도를 늘리고 가스실을 사용하도록 명령한 것처럼 말이다. 생명이 대상화되고 사물이 되어버린 순간, 아우슈비츠에 있던 젊은이는 공포감 대신 판단 중지가 찾아오고, 기억 상실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젊은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폭력이 남긴 무()의 흔적이다.


블랑쇼에게도 재난혹은 파국의 경험이 갑자기 찾아왔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처럼, 블랑쇼 역시 총살당하기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있다. 그는 자신의 집 앞에서 나치에게 처형당하기 직전, 아군의 폭격과 레지스탕스의 선제공격으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순간을 자서전적인 책 나의 죽음의 순간에 기록해두었다고 한다(12). 극한 경험을 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석방 직후 감옥에서 처음 간질 발작을 겪었던 것처럼, 블랑쇼에게도 불가항력으로 찾아온 경험은 그의 몸 어딘가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갔던 두 사람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면, 재난 속에서 재난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118)


앞에서 언급한 두 작가의 사례처럼 글쓰기는 일상이 전복되어버린 자들,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이 무엇보다 의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 보인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는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는 외관상 음울해 보이는 경고(memento)가 눈 덮인 수도원의 뜰에 우리를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고, 우리에게 현재를 일깨워준다.”(448)라고 썼다. 프라두에게 재난은 비밀경찰 멩지스와 함께 예기치 않은 상태로 도래했다. 죽어가던 멩지스를 살려낸 후 그를 찾아온 경고는 이웃 사람들이 뱉었던 침, 사람들의 경멸어린 언어와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유대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내쳐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고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도 열어주었다.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던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발 디딜 수 있는 고향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광기와 글쓰기


블랑쇼는 카오스를 이야기할 때 광기에 대해 언급한다. 다만 광기가 곧 카오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번역자가 재난이란 표현 대신 카오스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 역시 이것이 규정하기 힘든 무질서의 상태처럼 파악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도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해 있는 것’(23)이며 재난(désastreuse)의 필연성에서 비롯된 전락(轉落)의 신호’(24). 하지만 카오스는 그 자체로 긍정과 부정의 판단과는 무관한 듯하다. 그는 카오스가 다만 재난을 가져오는 불행한 것만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173)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경고처럼 작용한다. 다만 바깥에서 나아갈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뿐. 이 때 추방당한 자의 글쓰기는 광기에 대항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행위로 보인다.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89)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204)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199)


블랑쇼에게 작가는 단지 깨어있는 자가 아니라, 낮에도 수면이 불가능한자다. 그들은 광기가 수반하는 고통 속에 깨어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 듯하다. 카프카의 글쓰기가 광기에 맞서는 광기의 제스처였던 것처럼, 인간의 광기에 대응한 균형유지(글쓰기)는 인간이 지불해야하는 대가였다. 이것이 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내 안의 광기와 마주하고 이에 맞섬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광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103)


글 쓰는 행위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의 광기를 다듬은 결과로 이해된다. 예술가들의 작업은 주로 사회 혹은 규범으로 정해지는 경계 밖에서 이루어진다. 경계 내에서 인간의 광기는 으레 규제되고 억압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일정 부분 다듬어 지고 경계 내로 받아들여진 인간의 광기로 볼 수 있겠다. 사진론을 이야기했던 롤랑 바르트가 광기를 다루는 예술로서의 사진을 이렇게 이야기한바 있다.


사회는 사진을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할 위험이 있는 광기를 완화시키고, 사진을 조용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방법은 사진을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밝은 방, 동문선, 2006, 143)


앙리 마티스는 사진이 기록에 적합한 매체라고 규정하며 예술이 될 가능성을 부정했던 반면, 바르트는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였다. ‘완화되고 다듬어진 광기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사진이 예술임을 인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광기에 맞서는 예술 행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글쓰기 -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하기


나의 읽기와 쓰기의 시작은 내가 속한 사회에 내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 나름의 열심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열심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안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허둥댔으나, 그럴수록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부유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읽기와 쓰기는 나의 쓸모없음을 되새기는 나와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행위였다.


옮긴이 해제에서 번역자는 세르주 르클레르의 말을 빌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하기에 대해 언급한다. 르클레르에 따르면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해 나간다는 것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혹은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269). 이때 살해를 위한 무기가 바로 언어.


경계 밖에서 부유하던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했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게 닥친 파국앞에서 나를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나를 숨기려고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를 인정하고 긍정할 수 없었다. 타인을 원망할 수 없었고, 내 삶이 자명하게 실패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카오스의 글쓰기나의 쓸모없음, 그리고 실패한 삶에 방치되어 있는 나를 그대로 긍정할 수는 없었는지 묻는 것 같았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나의 타자와 어쩔 도리 없이 힘겨루기를 하고 기진해버린 야곱이었을 뿐이다.


르클레르의 언급을 참고하면, ‘재난의 경고가 찾아왔을 때 나는 내 안의 아이를 살해하지 못한 셈이다. 이 아이는 생명의 움직임이기에 결코 죽을 수 없음에도 나는 이 아이를 살해했어야 했다. 아이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지만 그를 살해하지 못한 것, 나아가 살해된 아이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데서 나의 위기가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제는 나에게 강력한 무기인 언어가 주어졌음을 안다. 블랑쇼에게 글쓰기는 인간을 통해 드러난 홀로코스트라는 광기에 맞서고, 고통 속에서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던 언어의 죽음과 사람들의 결정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101)


도스토옙스키나 블랑쇼,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 프라두는 자신의 예상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경계 밖으로 내쳐진 자들, 완전한 수동성으로 삶에서 분리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카오스의 국면에서 이들의 글쓰기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아이를 살해하기이면서 동시에 살해된 아이를 위한 애도하기였다. 블랑쇼가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 수용소와 가스실, 홀로코스트를 빈번히 글로써 호명하는 이유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고, 이것과 분리되기 위해서 죽음을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라는 블랑쇼의 말에는 작가가 겪었던 고통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블랑쇼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192)라며, 동시에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우라고(239) 제안한다. 나 역시 글쓰기를 통해 고통 속에서 깨어있기를 긍정할 수 있기 바란다. 이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살해된 아이를 애도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임박한 카오스앞에서 나를 긍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카오스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The disaster takes care of everything)."(25)

[2]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 (118)

[3] "카오스: 광기가 되어 버린 사유가 아니며, 아마 자체의 광기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유도 아닐 것이다." (25)

[4]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 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 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 (89)

[5] "작가, 한낮에 불면증에 걸린 자." (204)

[6] "셸링: "영혼은 인간 안의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다. (...) 인간 정신이 어떤 비-존재자인 영혼과, 즉 지성이 없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본질(영혼·신과 분리된 인간 정신)은 광기이다. 지성은 규제된 광기이다. 자신들 안에 어떠한 광기도 없는 인간들은 불모의 공허한 지성의 인간들이다..."(쿠르틴 옮김)" (199)

[7] "예술 위에 있지 않은 글쓰기는 우리가 예술을 애호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며, 그 자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지운다." (103)

[8] "애도 작업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다만 깨어 있다." (101)

[9]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192)

[10] "고통과 함께 사유하기를 배울 것." (23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01-30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건강은 많이 나아 지셨나요?
염세주의자들은 글을 쓰지 않는 대신 SNS이미지 놀이 할것 같습니다 ㅎㅎ

설연 휴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초란공 2022-01-30 11:06   좋아요 1 | URL
네~ 이제 통증은 없고 찐한 별자리 같은 수포자국이 남아있네요 ㅜㅜ Scott님도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