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독자의 팩트체크와 번역가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다

- 조지 오웰의 평론(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을 중심으로

 



몇 달 전에 어느 블로거분이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주셨다. 내가 딱 1년 전(2020516)에 올린 글에서 잘못된 부분(사실 내가 크게 실수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수정해주신 것이다. 내가 이 댓글을 그동안 발견하지 못해서 몇 달간 방치되었다. 내가 올린 글은 조지 오웰의 평론집 책 대 담배(민음사, 2020)중에서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이란 글을 읽고 적은 글이었는데, 바로 아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반면 작가들은 혹독하게 탄압받고 있다. 일리아 에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책 대 담배, 38)

(내가 올렸던 글: blog.aladin.co.kr/712851116/11720954)


 

여기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조지 오웰이 비판한 사람이 레프 톨스토이로 착각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난 이 대목을 읽고 계속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글을 올릴 때까지도 나의 의혹에 대해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다.

 

내 블로그에 댓글로 친절하게 알려주신 블로거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와 레프 톨스토이는 다른 분이에요.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문단의 창부라고 비난 받은 요인은 스탈린 정권을 찬양해서인데,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입니다.

 

... 이 대목을 읽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과거에 내가 남긴 독후기며 리뷰에서 자신 있게써댄 여러 의견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해와 헛발질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떠올린 의혹들에 대해 확인하고 검토할 생각을 그동안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인해야겠다. 여기에 나는 한술 더 떠서 역시 조지 오웰은 대문호 톨스토이까지 비판하는 것처럼 이 사람 앞에는 비판의 사각지대는 없었다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평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틀린 부분을 알았으니, 이를 바로잡아야겠기에, 다시 기본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온라인 서점의 서재든 개인 블로그이든 아무리 편하게 글을 올리는 공간이라고 해도, 글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불문율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의 의혹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검증하고 검토해볼 것. 그리고 답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검토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 나아가 전혀 자신이 없다면 내 글에 집어넣지 말 것! 나는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일까, 아니면 문학 전공자가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나의 무지와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주신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조지 오웰의 책은 많이 읽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을 언급한 조지 오웰의 평론이 실린 평론집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책으로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제목의 글, 38), 두 번째 책으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 첫 번째 책에 실린 글과 동일한 제목의 글, 341),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문학 예방이란 제목의 글, 239)를 서로 비교해보았다. 과연 이 부분에 대해 번역자는 주석이나 추가 설명을 하고 있을지부터 살펴보았다.

 

조지 오웰의 평론집 세 권에 실린 동일한 글을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점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나는 왜 쓰는가에 이 대목에 관한 충실한 주석이 실려 있었다. 번역자의 주석을 여기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13, 239) Illya Ehrenburg(1891-1967). 러시아 및 소련의 작가이자 언론인. 소련 시절 많은 작품을 썼으며, 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을 선전하기도 했으나 스탈린과 거리를 두는 대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전후에는 검열을 비판하는 소설 해빙기(1954)를 출간했고, 스탈린 치하에 금기시됐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담은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주석14, 239) Alexei Tolstoy(1883-1945). 공상과학소설과 역사소설을 특히 많이 쓴 작가. ‘백작 동지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스탈린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글을 많이 썼기에, 러시아 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소련에서 귀족 칭호를 공공연히 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15)의 번역가 역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세한 주석을 남겨놓아 다른 독자가 나와 같은 오해의 소지를 명백히 없애주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본문에서 문단의 창부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해당 작가의 역할과 책임을 조지 오웰이 비판하고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에렌부르크의 경우 스탈린과 거리를 두었다는 행적 보다는 소련을 선전했던 과거 행적에 주목하여 좀 더 정리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명만으로는 조지 오웰이 왜 에린부르크를 그토록 비판했는지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두 번째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의 경우는 어땠을까?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가 같은 대목에서 예렌부르크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341면 각주) 예렌부르크(Il'ya Grigor'evich Erenburg, 1891-1967). 우크라이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이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의 번역가는 예렌부르크에 대해 간결하게 각주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긴 해도, 맥락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여전히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지점은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한 주석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처럼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로 오해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한 번역자가 이 부분을 잘못 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번역자와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 모두 독자가 레프 톨스토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너무 명백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번역가나 편집자는 독자가 해당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레프 톨스토이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중년이 다 되어 문학을 읽기 시작한 나 같은 어설픈 독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자가 여기에서 과연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판단했을법하다. 다만 이 판본의 아쉬운 점은 예렌부르크에 대한 주석이 기계적인 부연 설명이 아니라, 독자가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추가되었으면 하는 점, 그리고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비교한 책은 민음사의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내가 직접 읽고 블로그에 독후기를 올리며 인용했던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작은 총서 쏜살문고로 나온 판본으로 해당 부분(38)을 비롯하여 주석은 아예 없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리아나를 비롯하여 쏜살문고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평론집(책 대 담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조지 오웰의 글에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그래서 나의 게으름(팩트체크를 하지 않은 것)을 보완해줄만한 장치가 아예 없었다는 것.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제 책 대 담배를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책이 말 그대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는 점이다. 책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여러 번, 언제나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가벼운 판본들에 대해 열**들 출판사처럼 사철제본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여러 번 펼쳐보아도 책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될만한 책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소장한 이 책은 한 번 읽었고, 이제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펼쳐보았는데, 종이들이 떨어져 나올 위기에 있다.

 

또 사족인 줄 알지만 오웰의 동일한 평론 제목에 대한 번역에도 할 말이 있다. 2010년에 처음 출간되어 2011년에 5쇄를 찍은 나는 왜 쓰는가의 해당 평론의 제목은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이다. 물론 모든 번역 작업은 번역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므로, 여기에 정답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겠다. 다만 이 제목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이 표현을 보고 어떤 내용일지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2013년에 출간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2020년에 출간된 책 대 담배에 실린 해당 글의 제목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으로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문학 예방보다는 글의 내용이나 성격을 추측하기 친절하게 풀어 번역이 된 것 같다. 다만 영어 제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을 번역하여 이렇게 동일한 표현이 나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정리해보자. 조지 오웰이 자신의 평론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 비판했던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레프 톨스토이와 다른 사람이며, 생존했던 시대마저 달랐던 인물이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스탈린 시대의 사람이었고,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이었다. 독자마다 얇고 가벼운 판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주석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취향에 가깝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아무리 가벼운 독후기를 쓰더라도 일말의 의혹이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과정인데도,나는 이를 소홀히 했다. 이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임의 필요성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처럼 글의 맥락에 맞는 번역가의 주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지 오웰의 평론집에 한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를 우선 권하겠다.

 

 


라틴어 서적의 한글 표기에 관해

 

여기서 조지 오웰의 같은 평론을 언급한 김에 한 가지 더 추가해보겠다. 해당 평론(‘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의 앞부분에서 조지 오웰은 존 밀턴의 책 아레오파지티카을 언급하는데, 이 책제목 대한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제목 Areopagitica는 나의 짧은 언어 지식으로 판단해도 분명히 라틴어 제목이다. 그리고 라틴어에서 g는 모두 //소리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으로 고전 라틴어 발음만 찾아보았다고 인정해야 겠다) 그런데 밀턴(1608-1674)의 시대에는 중세 라틴어를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시기에 g소리가 어떻게 바뀌거나 확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중세 라틴어에서 g소리가 // 소리뿐만 아니라 // 소리로도 확장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부실한 고전라틴어 발음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해본다면, ‘Areopagitica아레오파티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내 견해를 지지해줄만한 증거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박상익 교수가 연구하고 옮긴 아레오파기티카(인간사랑, 2016)였다. 박상익 교수(역사학)는 밀턴 연구로 학위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고, 언론자유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전면재번역하여 개정판을 낸 분이다. 내가 중세라틴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긴 하지만, 밀턴 전공자가 아레오파티카로 발음을 옮긴 것이 한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참고해볼만한 증거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이다(데카르트가 이 문장을 썼을 161911월 즈음). 여기서 이 문장은 코기토 에르고 숨으로 읽힌다. 따라서 g'에 대응하는 소리는 모두 //소리임이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시대 역시 분명히 중세 라틴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용했을 것이므로 Areopagitica의 발음표기는 아무래도 아레오파티카로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내 견해다.

 

사실 이 발음표기 문제는 먼저 언급한 인명을 착각한 상황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지식이 빈약한 이공계 전공자가 이 문제로 한 번 고민해봤다면, 이 평론을 번역한 어문학 전공자, 교수님은 당연히 이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특히 언제나 글을 쓰고 글을 다듬고 하는 인문계 전공자들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이런 부분을 검토하고, 라틴어 발음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시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도 초란공님 쓰신 글 보고 실수한 기분에 놀라서 나는 왜 쓰는가 찾아보니 같은 책의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그 톨스토이가 맞네요ㅋㅋㅋ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왜 선전선동가 질을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고 그래…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쓰신 글에서 인용구만 바꾸시면 조지오웰이 성역도 없고 톨스토이 깐 것도 맞아요 ㅋㅋㅋㅋ

초란공 2021-05-19 09:05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이렇게 부끄러운 소행을 꼼꼼히 읽어주시다니 ...^^;;
 
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아무튼 시리즈 26
이지수 지음 / 제철소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이지수 지음 [제철소]

 


짤막한 독후기 - ‘아무튼, 하루키

 


아무튼시리즈는 특정 소재에 대한 애정을 지닌 저자가 해당 주제에 대해 글로 쓰는 프로젝트다. 연필 혹은 떡볶기 같은 일상의 소재들도 대상이 된다. 다만 이런 주제로 책 한 권을 써 내는 일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덕후가 된다는 것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무튼, 하루키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무겁고 버거운 주제의 책을 읽고 난 후 집어든 책이었다.


하루키와 관련하여 한 권의 분량으로 에세이를 써낸 저자는 하루키 덕후다. 학창시절에 하루키를 읽었고, 원서로도 읽고 싶어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 물류회사, 책과 관련한 직업을 거쳐 번역가로 일한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표현 그대로, 하루키의 작품들은 저자의 삶(공부와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셈이다.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그의 문장이 입에 맴도는 정도라면 진정한 하루키 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책으로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할 테다.


저자는 불타던 학창 시절의 연애담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놓았다. 나는 슈뢰딩거의 파스타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과 전공자의 비애다.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되었건만.. 이런 부분에서 웃다니...(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만 웃는다.) 내가 처음 하루키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일 텐데, 아마 상실의 시대였을 것이다. 책 전반을 흐르는 묘한 정서가 꽤 오래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하루키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읽은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성실하고 노력하는 작가다.


아무튼, 하루키에서 저자가 반려묘와 사별한 부분을 읽을 때, 한 달 전 세상을 뜬 우리 집 반려견도 생각났다. 한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집에 온 녀석은 17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했다. 나이가 들어서 대소변을 잘 가리던 녀석이 집 안 아무데나 누기 시작하고, 걷다가도 주저앉기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녀석의 소변을 밟을까 조심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우리 가족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다가온다. 식구들이 집을 나가거나 올 때면 항상 현관에서 맞아주던 반려견이었다.


번역가로서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다져진 직업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매일 번역의 세계와 반려묘의 세계, 그리고 하루키의 세계를 넘나들며 분주하지만 순간순간 정성껏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밋밋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론 바둥거리면서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이 먼저인 사람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었다.


누군가가 특정 대상에 대한 덕후라면, 그 대상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잡다한 지식 이전에, 그에겐 대상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 먼저일 것이다. 대상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 모두를 속속들이 알고, ‘그럼에도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판단기준에 그 대상이 중심이라는 것. 만약 덕후의 조건이 이런 것이라면, 저자야말로 하루키덕후인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 돌베개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돌베개]

 


그림책 작가의 작업 노트와 철학: '인간은 치유하며 성장 한다'

 


최근에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생겨 아내와 함께 읽게 된 책이다. 권윤덕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자세한 정보 없이 손에 든 책이었지만 인상 깊게 읽었다. 저자는 1995년 아이와의 일상을 소재로 그려낸 만희네 집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25년 이상 그림책 작업에 전념해온 작가다. 특히 작업 전반을 보다 편리한 디지털 작업이 아니라 수묵화나 불화와 같은 전통적인 도구와 방법을 계속 활용하며, 각 작업마다 표현 기법을 새롭게 탐구하면서 제한적인 조건들을 극복해왔다.


 

나의 작은 화판에는 1995년에 출간한 첫 책부터 2016년에 펴낸 나무 도장까지 20여년의 작업을 대상으로, 작가의 삶과 작업에 대한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특히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를 눈높이에서 지켜보면서, 아이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일상에서부터 거대한 역사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를 표현해내기 위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시도하고 연마하는 모습도 책에 녹아있다. 물론 그 과정 자체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어린 아들과 1년 간 헤어져 중국에서 수묵화를 배우거나, 노동 현장을 취재하다가 냉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행 과정에서 부딪히는 양상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사람들과의 연결됨을 고민하며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까지는 만만치 않게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림은 내가 익히고 느낀 만큼 그릴 수 있고, 내가 애쓴 만큼 표현할 수 있다. 내 능력과 노력을 넘어 기대하면 곧 허영이고 헛붓질이다.”(183)


 

저자는 50페이지 전후의 그림책 한 권을 만들어 내려면 관련 자료를 공부하고나 취재하고, 이를 소화하여 그림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내는 데 최소 2-3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작업에 맞는 새로운 그림 기법(표현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또 여러 권의 더미북을 제작하며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대화하며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와 편견을 깨는 기회였고, 새롭게 배우는 점이 많았다. 이건 작업의 어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독자가 어떻게 읽을까,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도 고민하는 과정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넘어야할 단계였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예기치 못하게 13년이라는 긴 호흡을 필요로 했던 꽃할머니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한중일 세 나라의 그림책 작가들이 평화의 연대를 위한 공동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저자는 한국 그림책 작가로 참여했고, 이 작업에서는 위안부할머니들에 주목했다. 이 주제는 수많은 분들이 국가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으며 인권이 유린된 역사이기에, 그만큼 많은 고민을 요구하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게 하면 개인의 일과 역사적 맥락을 연결할 수 있을까 계속 질문”(203)하며, ‘폭력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폭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하며 작업의 방향과 나아감을 결정했다. 10년이 넘는 지난한 작업의 경험은 저자에게 ‘50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경험이었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능, 혹은 천재성이란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능은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글쓰기든 창작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창작에 대한 열정이 고갈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예술가의 재능은 단지 작품의 시장성만을 기준으로 판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일이다. 예술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여기에 공감하는 자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을 자신의 삶 속에 녹여 각자에게 익숙한 매체를 통해 이를 구체적인 대상으로 재현해내는 이들이다. 사회의 규범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이 외면하기 쉽거나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삶의 진실들을 캐어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대중은 그 속에서 보편적인 경험과 진실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작업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가 아이들과 책읽기 수업을 할 때,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 좋아 이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마음이 아픈 어린이 뒤에는 상처로 가득한 부모가 있었고, 그 가족 뒤에는 개인의 힘으로 뛰어넘기 어려운 사회구조가 막아서고 있었다.”(250) 고통과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타인, 특히 자녀에게 이러한 고통을 전가하는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이런 문제가 개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그 역시 작업을 하면서 본인의 아픈 과거를 새롭게 마주한다. 더불어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인과 개인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이를 형성해나가기도 한다. 이 점은 넉넉하지 않은 부모의 노동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 방치되다시피 하는 아이들, 그리고 이 상황에 죄의식을 항상 갖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모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눈다. 이 때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데, 서로가 이어지는 모습이 푸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림책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 늦게나마 그림책이 지니고 있는 힘을 새롭게 배워가는 중이다



"어린이는 나름 나름의 기질과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다. 각자 그것을 밑천 삼아 사회 안에서 서로 보완하고 어울어지면서 저마다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간다. 사회의 기존 가치나 질서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화해해 가면서, 새롭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 P96

"사실 그런 주제를 끌어가는 힘의 원천은 나의 간절함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내게 있었다." - P156

"처음에 그림책을 구상할 때는 소박한 발상에서 출발한다. 취재와 스케치를 거듭하면서 종종 그 발상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려면 거듭해서 질문하고 좀 더 깊이 탐색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 P187

"그림책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P217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나, 사랑받으면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P248

"‘저 사람만 없애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과 타자를 폭력적으로 구분 짓기 시작한다. (...) 그리고 없애야 할 적이 만들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잔인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291

"가해자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일은 부단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자기가 놓인 구조를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이제껏 당연시되어 온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깃들어 있다."

- 심아정,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 61-62면에서 재인용 - P326

"법은 긑이 없고, 법은 한 곳에 집착되어 있지 않으니, 이미 집착된 법과 기술을 깨트려 나가야 한다." 전통으로 이어져 온 법을 익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그 법을 깨트리는 단계에 이르러야 새로운 그림,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 중국 화가 자유푸(1942- )의 화집 서문의 글귀에서 재인용함. - P6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5-07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희네집 우리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봤던 책이네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같이 그림책을 보는게 너무 좋았었는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까 일부러 찾아서 읽어지지는 않는게 좀 아쉬워요. 좋은 그림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그림책을 만드는 분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고싶네요.

초란공 2021-05-07 08:38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자녀분들도 각별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아요~
 

창작과비평

(2021년 봄 191호)

: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


한영인(문학평론가) [창비]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를 읽고



요즈음 편리한 기계 장치를 이용하면서도, 인간의 삶, 혹은 당장 나의 삶에 주는 변화에 대해 고민을 하곤 합니다. 기계가 인간의 작업 영역을 대체하기 시작한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현대기술사회에서 인간과 기계가 공유하는 작업 영역이 앞으로 어떻게 이동해갈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어 갈지 많이 궁금합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앞으로 노동의 모습은 정말로 많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노동이 새롭게 지니게 될 의미와 인간의 위치 혹은 인간과 기술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이번 <창작과비평>의 문학평론에서는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를 우선 읽어봤습니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은 세 편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보다 현실적인 노동의 문제를 다룹니다. 아직 문학평론이라는 글의 형식이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필자가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은 물론이고 생명 보전과도 밀접하기에 인간 존재와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고자 하는 작가일수록 이 과제를 피해가기 어렵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작가뿐만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의 문제이기도 하겠지요.


한영인 평론가는 세 편의 소설에 담긴 노동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소설가 장강명의 공장 밖에서와 김혜진의 9번의 일은 소설 속 주인공이 속하고 노동을 수행하던 집단에서 퇴직할 위기에 몰린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반면, 김세희의 프리랜서의 자부심은 앞의 소설들 속의 주인공이 이후에 선택할 만한 노동의 모습(프리랜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한영인 평론가의 분석은 작품들에서 다루어지는 인물의 묘사가 단편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혹은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에서의 변화가 설득력 있게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는 아쉬움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평론가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다양한 페르소나를 탐구해야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평론 중에서 필자가 김세희 작가의 소설 한 대목에 대해 언급한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민용이 한 말 마침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대해 덧붙인 필자의 한마디. ‘독립한 개인만이 타인과의 대등한 결합에 두려움 없이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인상 깊네요. 소설이란 이야기를 통해 각자 나름의 답을 발견하는 공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먼 멜빌이 자신의 소설에서 과수원의 도둑들이라고 언급했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노동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정도로 인간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불안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지는 요즈음입니다.


아울러 노동자 투쟁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중립적인 시선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선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일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사회에서 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의 아래층을 꾸준히 마주하고 바라보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역할이니까요.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고통, 아픔을 제일 먼저 감지하고, 이를 들여다보고 각자의 작업에서 재현해내는 작업이 이들의 역할이 아닐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창작과비평>을 읽는 계기가 아니었으면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문학평론을 읽으니 소설 속에서도 이렇게 사회와 인물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평론에 소개된 소설에서 작가들이 바라본 노동에 관한 진실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가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444)

 

 

인간-되기는 동사다: 대체 불가능한 인간관계의 형이상학

 


*탁월하게 생각하도록 된 이런 두뇌도 장래에는 한 사상가가 만들어낼 게다.” 거의 200년 전, 독일의 한 문인은 이 문장을 후대에 남겼다. 그는 훗날 인공지능 기술과 생명을 합성하는 단계에 이른 현대의 과학기술을 상상이나 했을까.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처음 발표한 클라라와 태양을 읽으며, 문득 괴테가 쓴 이 문장을 떠올렸다. 이시구로는 인공지능로봇을 화자로 설정하고, 이 로봇의 생각들을 상상하며, 과학기술과 공존하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인공지능로봇 AF(Artificial Friend)인 클라라는 아이들을 돌보는 로봇이다. 클라라가 다른 AF와 다른 점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마침내 그녀는 조시라는 소녀에게 선택받고 인간과 함께 지내며 인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배워나간다. 조시는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해 태어났지만 건강이 좋지 못하다. 조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불안해한다. 이에 클라라는 조시를 돌보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만일의 경우 조시가 될 것을 부탁받는다. 클라라가 마주하는 혼란스러움은 이런 국면에서 비롯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붙들었던 물음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였다. AF와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할까? AF와 인간 모두 어떤 대상에 대해 의혹을 품고 회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구성원들과 반목하고 충돌하며 관습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실천하는 의지에 기초하여 행위를 끌어내는 특성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내게 상황을 제시하고 질문을 던질 뿐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되기의 과정이 결코 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시가 사망할 것에 대비해 새로운 조시를 제작하는 카팔디는 유물론자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고유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클라라는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사랑을 느끼면서 자신이 조시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녀에게 조시가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욕구와 충동, 감정 등을 동일하게 갖추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시의 가족이나 그녀를 아는 모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기억을 복원해야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클라라의 말에 따르면, ‘아주 특별한 무언가는 조시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442)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인간-되기는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함께 변화해가는, 비가역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고유하고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그 자체로 고유하고 특별하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기에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다. 이 특별함은 비교불가능하다.

 

클라라가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면서 혼란스러워 했던 인간의 특징이 바로 인간관계의 복잡성이다. 유전자 편집을 거쳐 태어난 아이들의 모임에서 조시가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한 클라라는 인간의 다양한 페르소나에 혼란스러워 했다. 규칙적인 징후를 찾던 클라라에게 인간의 복잡한 페르소나는 일관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이렇듯 클라라와 태양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무미건조해지는 세계에서 인간-AF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클라라가 헛간에서 해에게 간절히 기도하던 대목이었다. 헛간에 해의 무늬가 머물 면, 클라라에게 이곳은 해의 관대함이 드러나는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해의 무늬가 서서히 헛간에서 물러나며 다른 모습으로 반사하고 희미해져가는 장면이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와 교차하며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 순간이 바로 클라라가 인간의 사랑을 이해하고 이를 구현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클라라와 태양인간-되기라는 물음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해 묻는 한 편의 철학 우화다.

 

 

 

*이 문장은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파우스트 [도서출판 길](2019)에서 인용함.  

**ver1.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6-04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라라 리뷰중 단연 초란공님 리뷰!
반짝 반짝 빛났는데
제 예감 적중 함요 ㅎㅎ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초란공 2021-06-05 10:31   좋아요 2 | URL
scott님의 과찬에 항상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1-06-04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1-06-05 10:29   좋아요 2 | URL
감솨합니다~ 2관왕 그레이스님~^^

초딩 2021-06-04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참 .. 정말 이정도 되면 이건 이제 읽어야할 판이네요 ^^ ㅎㅎㅎ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초란공 2021-06-05 10:38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초딩님도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즐건 주말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