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원제: THE FACT OF A BODY: A MURDER & A MEMOIR)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레즈네비치(Alexandria Marzano-Lesnevich)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이상한 기억상실이 때때로 나를 급습했다. 나는 안에 해결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음을 그래서 알았다.”(325)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 법대를 재학중 인턴자격으로 살인사건과 접하게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남자 아이를 살해한 가해자 리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적인 기억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특정한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경험하는 공백 경험은 아마도 신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이를 완화하려는 신체의 반작용으로 이해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살인 사건과 자신의 비망록이 혼재된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책이다. 실제 사건에 대해 방대한 자료들을 읽고 검토한 후에도, 생생한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현장에서 실제로 나누었을 법한 대화를 상상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아울러 , 그리고 그녀의 글쓰기는 너무나 솔직하기에 오히려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비롯하여, 가족의 치부를 담담하고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저자가 어린 시절 겪었던 성추행의 경험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자신을 공개하고 있다. 책의 서술방식은 개인의 유일무이한 경험과 아픔의 기억에 기반하기에 독창적이면서 유일한 글쓰기이며 그만큼 인상적인 이유다.

 

 

 

책의 구조와 중심사건에 대해

책에서 중심이되는 사건은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는 아동 성추행으로 이미 번이나 실형을 살았던 리키 랭글리가 출소 1 5개월 만에 동네 여섯 아이 제레미를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저자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 겪게된 성추행에 기반한다. 사건이 엄연히 별개의 사건임에도 저자가 되새기며 제공하는 양상의 이면에는 밀접한 관계, 다양한 접점이 존재한다.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의 장면을 번갈아 오가며 별개의 사건을 조금씩 드러낸다. 결국 저자의 의도에 따라 사건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 유사점을 지니고 있음을 독자에게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본적으로 현재와 과거(살인자와 저자의 현재와 과거) 왕복해가며 마치 깨져버린 도자기의 파편들을 줍는 과정처럼 기억의 편린들을 모으는 작업이기도하다.  

 

 

저자가 오랜 시간 써내려가면서 수없이 떠올렸을 기억들은 현대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주는 굵직굵직한 여러 이슈들을 관통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 인권에 대한 주제, 삶의 모순으로 보이는 진실의 문제, 가족이란 무엇이며, 개인의 자존감 문제와 같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보편적인 주제에 폭넓게 맞닿아 있다. 알렉산드리아가 청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살인 사건의 재판과정과 자신의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결국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폭넓은 경험을 아우른다. 저자는 이러한 성찰을 다양한 국면에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역할과 태생적 한계

우선 알렉산드리아가 떠올리는 자신의 어릴 기억과 리키 랭글리 사건이 맞닿는 접점은 아동 성추행 관련이 있다. 살인 피의자 리키 랭글리는 아동 성추행이라는 과거의 흔적 이외에 살인이라는 죄목이 추가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저자의 과거는 자신이 성추행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바로 할아버지라는 사실에서 리키 사건과의 접점이 위치한다. 자각의 순간으로부터 사건은 결코 분리될 없는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한다.

 

 

법이란 지구상에 개체만이 존재하고 살아갈 경우에는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러 인간이 모여 살아갈 각각의 구성에게 각각의 진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개별적인 진실이 구성원 간에 상호인정이 안되고 충돌이 발생할 경우 문제가 된다.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법이란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법은 인간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준거가 되는 장치란 생각을 한다. 다만 법은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한계를 인지하는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를 잠깐만 살펴보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법부의 수장이 정치 권력에 복종할 국민들이 어떤 고난을 겪을 있는지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법집행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법을 알고 이를 활용할줄 아는 이들만을 위한 사회를 조성하는데 악용될 있는 여지를 포함한다. 사법부가 독립적이어야하며, 법이 제시하는 기준과 법관의 양심에 충실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리키 랭글리 사건과 같은 사건이 사회를 휩쓸고 제정된 새로운 법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실효성을 갖는지 반문한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지역사회에 공개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정보가 지역사회에 전달/공지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저자 자신에 대해 성추행을 일삼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혹은 경계의 대상에서 빠져버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임을 지적한다. 나아가 사회가 엄한 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범죄율이 줄지 않을 있다는 점도 간과하면 안된다. 법의 제정이 범죄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음주운전 사건으로 음주운전자에 대한 법률을 엄하게 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움직임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법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제제를 가하는 힘보다는 사건이 일어났을 이를 제재하는 기능이 크다는 점을 인지해야할 같다. 보다 중요한 일은 근본적인 원인을 차단해나가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음주운전자 처벌관련한 법이 엄하게 변경되는 것과 함께 취지에 대한 공감대, 그리고 희생자 가족에 대한 공감대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가 제레미의 사후 제정된 성범죄자 신상공개와 관련한 법률이 시행된 20년이 지나도 성학대율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적하는 대목은 분명 법의 본질과 관련한 중요한 고찰임을 염두해두어야 것같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우리는 기억이란 현상이 뇌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만 보더라도 사람의 삶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뿐만 아니라 전체를 통해 각인되고 저장된다는 점을 수긍할 있게 된다. 실체로서의 몸은 여기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정신현상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몸전체를 통해 기억이 전해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리키의 어머니 베시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리키를 임신하고, 리키는 베시가 받아 먹는 각종 약과 치료용 엑스레이에 숱하게 노출된다. 게다가 베시가 임신 마신 상당한 위스키도 리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리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오스카의 교통사고 현장에 대한 꿈을 리키는 어린시절 계속하여 꾸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살인자 리키는 어쩌면 어머니 베시 뿐만 아니라 가족의 모든 아픔을 몸에 고스란히 간직한 태어난 사람이기에 조금 다른 관점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내가 임을 인식하는 출발이되기에 내가 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반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은 시간을 거듭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가 할아버지로부터 당한 성추행 때문에 몸에 흉터는 성인이되어서도 그녀를 붙들어 매고 있다.  거식증 같은 증세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가한 성추행의 기억은 오히려 저자에게 이를 잊게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완화하려는 몸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인턴으로 루이지애나 로펌에 갔을 , 리키의 이름을 듣고도 곧바로 잊는 장면은 아마도 리키의 사건이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 몸의 망각기작이었을 같다. 리키의 이름은 잊고 싶은 할아버지의 기억과 만나는 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흉터가 남았다. 흉터가 통증을, 칠흙 같은 기억 상실을 뛰어 넘는 증거가 아닐까? 끝나버린 기억 너머의 증거가 아닐까?”(392)

 

저자가 법조계를 떠나 오랜 세월 다시 루이지애나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가 루이지애나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 때문이라 언급했다. 특유한 장소성과 기후 등이 저자에게 주는 모든 느낌과 감정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저자의 언급은 분명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있는 실마리를 자신이 쥐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에 각인된 느낌들은 현재의 저자와 과거의 저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마찬가지로 리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읽고 알렉산드리아는 비로소 리키와 그의 가족을 상상할 있었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414)라고 기록했다. 자신의 몸에 각인된 흉터로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리키를 사람으로서 바라볼 있게 되었던 것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출발점은 바로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사형제도를 둘러싼 여러 장면들

자신도 저자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을 읽으니 나도 그녀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는 착각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가족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나도 사망한 제레미의 어머니인 로렐라이처럼 아들을 살인한 리키를 위해 구명운동을 있을까? 아마 나는 그렇지 못할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독백처럼 나도 변호사가 있는 자질은 부족한 모양이다. 한편 로렐라이는 리키를 용서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자녀를 가진 어머니의 입장에서 리키의 어머니 베시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된 자로서 자녀가 죽는 일을 리키의 부모가 맞이하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실제 사형수의 구명운동을 벌인 노력을 담은 영화 <데드 워킹 Dead Man Walking>에서 수잔 서랜든이 연기했던 인물인 헬렌 프리진 수녀의 마음가짐과도 다르지 않을 것같다.

 

로렐라이는 베시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 리키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447)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의외의 인물이 있는데, 다름아닌 영국인 변호사 클라이브 스태퍼드 스미스이다. 그는 평생 미국의 사형제 폐지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서 공로로 영국 여왕의 훈장도 수여받은 인물이다. 정황상 그는 살해당한 제레미의 어머니와 함께 리키의 구명운동을 위해 헌신하여 살해사건이 일어난 10년만에 형량을 교수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리키의 감소를 위해 변호하는 일을 하게된다.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테두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언제나 그러한 바램에 맞추어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법도 나름의 역할 외에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틈새로 무고한 사람들이 제재를 받거나 나아가 사형과 같은 중한 벌을 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한 부작용을 줄일 있는 균형은 클라이브 변호사와 같은 인물들이 담당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인자를 사람의 인간으로 있는가는 저자가 말한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몸에 각인되는 기억 떠올려보면 우리가 어떤 삶을, 어떤 경험을 과거에 했는지에 따라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달라질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란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동원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지은 죄가 무겁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있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로렐라이가 리키의 구명운동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들이 살해당한 8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 동안 그녀는 리키와 그의 과거, 그리고 리키의 가족에 대한 사실들을 끊임없이 돌이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숙고의 시간 이후 로렐라이는 마침내 리키를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며, 그를 용서는 아니더라도 화해할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과정을 저자도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기억, 할아버지의 추행과 자기 가족과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자신의 과거와 비로소 대면할 있는 준비를 마련해나갔던 것이다.

 

 

 

나가며 자신과 화해하기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보자면 저자 알렉산드리아가 어린 시절 몸에 남겨진 오랜 상처를 발견하고 아픈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과정은 자신이 접했던 살인 사건을 통해 실마리를 찾고 사건이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수도 있다. 저자는 자기 안에 해결이 안된 무언가 인식하고 정체를 파악하는 여정에 오른다. 결국 자신의 내면에 상처받고 꽁꽁 숨어 있던 내면의 아이 찾아내고,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번역자가 사용한 표현인 팩트로서의 (fact of a body) 실재하는 신체, 외부의 자극에 왜곡없이 기억하는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뇌는 과거에 경험했던 내용을 왜곡하여 기억할 있지만, 고통이라는 자극을 몸이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바로 우리의 몸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거짓없는 저장매체로서 기능하며 이것이 엄연한 팩트로서의 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알렉산드리아가 살인사건을 접하고, 로렐라이의 사형수 구명운동을 보면서 느꼈을 혼란스러운 심정을 떠올려본다. 또한 가족의 침묵 속에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삶을 마감하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후유증 결국 저자 자신의 흉터와 함께 남아 무언가 해결이 안된존재로서 여전히 남아있던 것이다. 저자는 결국 자신을 돌아보며 흉터와 아픔의 기억에 주목하였다.

 

내게 과거는 땅속에서만 있는 아니었다. 과거는 몸에 있었다.”(383)  

 

저자의 할아버지 역시 어렸을 성추행 피해자였다는 , 결국 할아버지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 였음을 알게된 , 할아버지를 좀더 이해하게 되었던 같다. 알렉산드리아가 리키의 가족과 리키에게 들었을 감정의 동요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움직임은 할아버지와 자신에게로 확장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 앞에서 젊고 앞날이 창창했을 커플의 모습부터 나이 모습, 그리고 지금은 땅속에 묻힌 모습을 상상하며 강한 놀라움의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여러 시간의 중첩을 통해 자신을 관통해 나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사건이 시간과 공간의 이질적인 요소들의 중첩 속에서 순간 강하게 알렉산드리아를 관통해 나갔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 특히 외상이 아닌 모든 이들의 내상은 결국 개별자의 기억과 벌이는 싸움에 다름아닐지도 모른다. 몸에 각인된 기억의 상처는 두뇌에 기억되는 왜곡될 있는 상처와 달리 살아있는 평생 몸의 주인과 함께할 것이다. 저자는 20 가까이 이어지는 살인사건 재판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기억과 조우했다. 과정에서 자신의 내밀하고 아픈 기억을 밖으로 꺼내 놓고 대면했다. 책은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비망록이자 저자가 살아가는 생에 가장 중요한 국면을 다룬 저자의 분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픔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마주대하고 손을 내밀어 과거와 화해하는 일만 해도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다독거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수 있게 힘을 주는 일이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저자의 짧은 독백 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자기를 자기로 만든 경험을 지니고 다닌다.”(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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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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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 장선정 옮김 | [비채]

 

 

 

하나의 가족

오늘 만난 <좀도둑 가족>이라는 장편소설은 어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개봉된 고레아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의 원작 소설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일상적이지는 않다. 가족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는 서양과 달리 일본 영화인데도 구성원들은 서로를 아빠, 엄마, 할머니 등으로 부르지 않고 서로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도 본명이 아닌 각자가 선택한 이름으로.

 

린이 린이 아닌 것처럼 노부요는 노부요가 아니며, 오사무도 오사무가 아니다. 아키를 포함해 집에 사는 가족은 하나같이 이름을 갖고 있었다.(129)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족으로 보이던 한지붕 식구들의 관계가 일반적이진 않다는 것을 바로 있다. 이들은 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니었다. 이들은 본래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들이 헤쳐모여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무심한 , 서로 예의차리지 않고도 할말 다하는 이들은 여느 가족 못지않게 가슴 속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람다움 모습들은 무엇보다도 각자 선택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의 존재감은 선택한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서로가 남남인 이들은 각자 나름의 추억 혹은 의미를 갖던 존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각자가 선택한 이름을 서로 불러주는 행위는 팔을 활짝 펴고 상대방을 환대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건 간에 현재 있는 그대로, 상대방의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좀도둑 가족 피로 엮인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영영잃어버린 인물들이 모여 선택한 하나의 가족이야기라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이라는 집단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애증의 관계 같은 . 멀리 있으면 그리운 존재이면서도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말못할 상처를 주기도하는 가까우면서도 집단이 가족이다. 영화든 책이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줄곧 가족이란 주제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할머니 하쓰에의 말처럼 서로가 선택한 관계가 (가족보다) 끈끈한 아닐까. 인생의 숱한 희노애락을 겪었을법한 할머니 하쓰에는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지 않아?”(185)라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직구를 날린다.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있는 존재가 가족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있는 반면 가족이니까어려움을 이겨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느 쪽이 옳다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정답은 없으니까. 다만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분명 가족이라는 집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이다.

 

 

 

현대 가족이 처한 사회에 관한 보고서

<좀도둑 가족> 21세기 어느 날을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기도하다. 이따금 들어오는 공사장 일을 전전하며 지내오는 오사무. 결국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쳐 하기 싫은 일마저 끊긴 상황에 닥치고,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사회의 투명인간 같은 혹은 잊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은 쇼타와 함께하는 쇼핑’, 동네 마트에서 물건을 슬쩍해오는 일이다.

 

한편 동네의 영세한 세탁소에서 고참이긴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부요의 독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쪽일까. 앞은 내리막길일까. 그저 운이 없는 것뿐일까.(144)  벗어나기 힘든 가난 앞에서 자신의 운이 없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분명 많은 이들이 공감할 있을 터이다.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던 절대적 가난의 모습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어느 신문의 칼럼을 보니 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서울의 집값은 300 이상이 올랐지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대략 15 올랐다는 내용을 기억이 난다. 결국 경제적 도움을 있는 가족, 부모님이 없는 구성원들은 평범한 직장을 다녀서는 평생동안 결코 자기 집을 자신의 힘으로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미국의 실천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월마트의 사례로 이야기해준 있다. 그는 책에서 10 년전(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당시 월마트 CEO 월마트 정규직 최저 임금의 ‘170만배수준을 받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현대 자본주의의 빈부 격차는 이정도까지 벌어져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최저임금 인상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며 이를 반대하고, 모든 경제 신문과 상당수의 기업인들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난한다. 언제나 서양의 선진국의 사례를 들먹이며 비판적인 주장을 하던 이들도 최저임금에 대해서는 선진국 사례를 참고하는 이들은 드물다. 아울러 사회가 안고있는 보다 근본적인 경제구조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회의 기초 체질을 개선하는 일에 문제의식을 갖고 일을하는  시도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서 풍요로운 도시에 사는 빈민 가족은 운이 없는것이 맞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노부요의 말대로 앞으로도 가난에 허덕일 이라는 점이다.     

 

이런 가난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여 구성된 헤쳐모여가족의 유일한 구원은 할머니 하쓰에의 사망한 남편의 이름으로 나오는 연금이다. 매달 11만엔 남짓한 돈을 부정수급하는 일은 가족들에게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수입원이다. 그마저도 하쓰에는 파칭코로 상당부분을 탕진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사무는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친 이후로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정기적으로 마트에서 쇼핑 하거나 차의 유리를 깨서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노부요는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에서 고액 고참 근로자라서 해고 통보를 받는다. 회사에서는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를 대신 고용했기 때문이다. 부분도 사회구조의 주도권을 얻지 못한 계층이 어떻게 사회에서 점점 난민화되어가는 지에 대한 가지 사례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한편 집에서 교과서 읽기를 좋아하는 쇼타는 등교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집에서 공부할 없는 아이들이나 학교에 가는 이라고 오사무로부터 들은 말을 주문처럼 되뇌인다. 가정폭력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주리는 선택된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쇼타와 주리는 전통적인 가족의 테두리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겪을 있는 일들의 단면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소설은 등장 인물들이 겪는 일상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10여년 고민했다고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에서 현대인이 안고있는 사회의 주요 문제점들을 담아낸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사는 곳에 온기를 더하는 일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책을 읽지 않거나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는데, 어쩔수 없었다. 보다 자세한 줄거리는 여기서 생략하겠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선택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 오사무가 사는 집을 방문한 쇼타가 하루밤을 오사무와 같이 보내고 다음 버스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아빠와 아들의 모습같다. 오사무는 쇼타를 태우고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다 문득 버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오사무는 순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핵가족이 되다못해 원자화된 오늘날 가족의 모습에서 피로 연결된가족의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부모님 세대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와는 분명 다르다. 대가족이 모두 모여 살면서 나이 많은 형제가 어린 동생들을 부모대신 돌봐주는 풍경은 이제 이상 보기 힘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개개인 각자가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만 하는현실에서 그나마 서로를 받아들이고 버팀목이 되어줄 있는 것은 서로가 선택한 가족 있는 새로운 역할이 아닐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부담이되거나 상처를 주는 일이 있다면, 이보다는 오히려 좀도둑 가족처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서 대안이 수도 있겠다.

 

이러한 상황을 좀더 확장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가족보다는 동호회 같은 모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런 모임에 의지를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소설에 나오는 가족처럼 이들은 온라인에서 각자가 선택한 서로의 닉네임을 불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비슷한 관심사와 주제를 가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구성원들이다. 오프라인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위로와 격려를 나눈다. 어쩌면 오래동안 지속되는 동호회 모임은 이미 하나의 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매맞는 가정에서 방치된 여자 아이 주리를 자신의 딸처럼 받아들이고 아끼는 노부요는 자신이 주리를 낳지는 않았지만 주리의 엄마였다 형사에게 항변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목은 자녀를 소유물처럼 여기고 인격으로서 대우하지 않는 많은 부모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노부요가 하던 대사는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현대의 가족을 되돌아보게 한다. 해체되는 가족들에게 돌을 던지고 비판의 눈초리를 던지는 일을 잠시 접어두고, 저자는 내막을 들여다 보려고 흔적에 나는 무엇보다 인상을 받았다. 서로가 선택한 가족의 내부에서 상투적인 시선을 과감히 걷어버리고, 이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시선에서 무엇보다 저자의 온기를 느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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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철학자의 유쾌한 만남 감성과 이성
고명수.강응섭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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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철학자의 유쾌한 만남

고명수/강응섭 지음 | 세창출판사

 

 

결국, 우리의 사명은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시인과 철학자가 텍스트를 통해 2 시간 동안 소통한 흔적이 여기 있다. <시인과 철학자의 유쾌한 만남> 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철학자같은 시인과, 시인같은 철학자가 서로의 글을 꼭꼭 씹어 읽으면서 사색하고 화답한 기록이다. 시인이면서 시를 통한 치료효과에 주목하여 이러한 신념을 사람들과 나누는 고명수 교수와 라캉을 전공한 시쓰는 철학자 강응섭 교수가 시를 매개로 조우한 것이다.

우선 내가 파악한 책의 흐름은 저자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풀어 놓는다는 점이다. 시의 본질은 무엇이며, 무엇을 노래하는가. 그리고 시에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시인이 이야기를 풀면, 철학자는 시의 특징과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심리철학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며 화답한다.

시란 명명 행위입니다. 사물의 이름을 불러 주는 행위이지요.”(81)

 

편이 눈에 보이는 이면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 언어 이면에 있는 언어 이전의 것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니, 편의 시는 인간의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언어활동처럼 짜인 무의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26)

 

 

 

시라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체계로 사물/대상에 의미를 재부여(다르게 바라보기)하여 이를 다시 구성하는 행위이며,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정리해보고 이해할 있을 같다. 특히 철학자가 언급한 바대로 시란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 조셉 코수스의 의자그림과 같이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 시의 본질적인 기능을 거울 이라는 사물에 비추어 이해해볼 수도  있을 같다. ‘거울 자기 자신을 비추어주어 자기를 바라볼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함의한다. 반면, ‘ 시라는 틀을 통해 외부 혹은 내부를 들여다보는 , 시인이 언급한 말로 마음의 물꼬를 틔우는 관계한다고 해석해볼 있겠다. 특히 시인은 시가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치료의 기능에 보다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철학자는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내담자’, 피분석가와의 상담을 통해 내담자가 이미 가지고 있지만 과거에 잃어버렸던 의미 다시 되찾게 해주는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사람 모두가 시의 본질적인 기능, ‘거울 역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숙고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편 책에서 주목하는 다른 흐름은 시인 대한 것이다. 책의 저자인 시인과 철학자는 모두 시인 역할, 보다 폭넓게 예술가 역할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가파른 삶의 벼랑 위에서도 기꺼이 목숨을 지켜 싹을 틔워 내는 존재가 시인을 비롯한 모든 예술가가 아닐는지요?”(33 

 

 

경제의 불안, 정치의 혼란, 부조리한 삶의 모든 것들을 조용히 감싸 안아 주는 말고는 제가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같습니다.”(64)

 

 

(라캉) 말을 들으면, 오래전부터 선각자들은 채워진 마음을 비우고자 했고, 예술가들은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간격을 보고서는 괴로워하고 아픔을 승화하는 에술적 삶을 살았고”(125)

 

이와같이 시인, 보다 폭넓게 예술가는 예민한 촉수로 사회의 부조리에 주목하고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여다보며 포옹하는 존재라고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회에 유용해보이지 않은 일들 시인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과 철학자는 모두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묻고 이를 찾아가는 수행자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시인과 철학자 사람이 2 주고 받은 대화의 과정은 시를 매개로 시작되었으나 사람의 작업은 결국 불완전하고 삐걱거리는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점, 어느 곳에서인가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되찾는 일을 시를 읽고,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를 쓰고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는 일을 하는 시인과 정신분석학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 되찾는 일을 도와주는 철학자의 유쾌한 만남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어쩌면 시인의 마음으로 각자의 삶에서 잃어버렸던 균형 되찾아갈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한다. 다시 정리하면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선 각자가 자기 자신을 면밀이 들여다보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 내면의 결핍을 찾아내어 우리의 삶과 관계 등을 온전히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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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용서의 나라

(원제: South of Forgiveness)

토르디스 엘바/ 스트레인져 지음 | 권가비 옮김 | [책세상]

 

과거를 대면하고 치유의 길로 이어주는 마법’ – 피해자와 가해자가 용서와 자유에 이르는 여정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시절

기억에서 기어 나오며 나는 잃어버린 세월의 황량함에 몸을 떨었다. (…) 사랑의 나라로 처음 뛰어내렸는데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았다는 . 피처럼 붉은 대문자들이 나의 추락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해 넣었다.”(146)

 

성폭력 피해자이자 <용서의 나라> 저자인 30대의 토르디스 엘바가 열여덟 생일날 아침에 시를 다시 들여다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은 폭력은 십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들의 세포 하나 하나에 선명히 각인되어 끊임없이 피해자들을 따라다닌다. 

 

<용서의 나라> 저자는 때의 연인이자, 성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면하는 일은 피해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있는 일이기에, 특히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보살핌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람을 대면하게 해줄 있게 해준 매개체는 책의 제목에도 드러나듯, ‘용서라는 화두로 가능했다. 책은 흔히 합의라는 이름의 경제적 보상으로 폭력사건의 가해자가 면죄부를 받고 새사람으로 변신할 있는 대한민국 사회를 떠올려볼 , 진정한 용서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며 우리가 눈여겨볼만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이자 성폭력 피해자인 토르디스 엘바는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난 여성이며, 다른 저자이자 성폭력 가해자인 스트레인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남성이다. 사람은 각각 10 후반이자 20 초반이었던 16 사람 사이에 있었던 성폭력 사건의 기억을 다시 소환하고 이와 직접 대면하기위한 준비를 한다.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장소로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을 선택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케이프 타운은 소수의 백인 남성이 주도했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폭풍을 겪은 곳이면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반평생을 감옥에서 갇힌 풀려나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곳이기에, 케이프타운에서 이루어진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화해와 용서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매우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했을지 모르지만 성적으로나 삶의 경험으로나 아직 미숙하던 10 후반, 20 초의 저자들은 사건직후, 가해자 피해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정 반응을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할 있다. 토르디스는 자신이 겪은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었던 연인에게서 당한 일이었음을 믿지 않으려 했다. 한편 톰의 경우, 토드디스와 절교하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게 되어 아이슬란드를 떠나며 상황을 회피하였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덮으려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톰에게는 회피기작으로 인해 어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토르디스가 톰에게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톰의 가해 사실을 전달할 때까지는 말이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성폭력은 우리 주변, 특히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많이 자행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여러 성폭력 관련 사건을 살펴봐도 그렇다. 무작위로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토르디스가 책의 초반에 말문을 열며 언급하는 대목도 정확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강간사건은 우리가 피하라고 교육받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강간 사건은 대부분 가정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믿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친척, 배우자, 친구 등에 의해서 일어난다.”(33)

특히 톰의 경우 성폭력 가해자가 되리라고 짐작해볼만한 단서를 찾기힘들다. 우리가 성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다라고 믿는한 그렇다. 그러나 톰은 사랑이 넘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충만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교육도 충분히 받았고, 부모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았다. 여성을 혐오할만한 부정적인 경험을 적도 없어보이며, 오히려 성장과정에서 톰에게 긍정적인 여성상도 많았다. 경우를 보면 누군든 성폭력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준다. 아울러 성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할 있음을 사례는 다시금 분명히 보여준다.

 

토르디스는 남자가 여자를 범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사회구조에서 찾을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구조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 부분은 책의 후반에 사람이 남아공의 강간위기센터를 방문했을 , 곳의 담당자였던 시릴라가 남아공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시말하면 남아공은 소수 백인(남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영향과 상처를 아직 치료중이라는 것인데, 시릴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가부장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지적하였다. 여성 인권이 극히 취약하면서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폭력 발생률을 보이는 남아공-케이프타운의 현실을 고려해본다면, 본질적으로 현상(아파르트헤이트와 높은 성폭력 발생률) 서로 모종의 연관을 갖는다는 점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시릴라의 말대로라면 강간은 힘과 지배 문제이기에, 성폭력 문제는 결국 개개인의 가해자에 대한 교화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배울 있다.

 

 

 

 

수인(囚人)으로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

있고난 직후 토르디스와 톰에게 일어난 반응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현실에 대한 부정 혹은 현실 회피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피해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이런 폭력을 당할 있는가? 그리고 가해자는 아마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은연중에 내리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 겪은 일의 후폭풍은 사람 모두가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토르디스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우울증, 스스로 강간을 자초했다는 자괴감 뿐만 아니라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등으로 장기간 고통을 받았다. 가해자입장이었던 톰도 이후 쉽지 않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수치심, 그리고 끊임없이 몸에 새겨져 스스로를 갉아먹는 죄책감의 감정과 떳떳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두려움 속에서 살게되어 스스로를 수인(囚人)으로 만들어 버렸다. 피해자를 무의식중에 회피하고 살아가더라도, 묻혀있던 죄책감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어 가해자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할지 모른다. 결국 심리적,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원할하기 힘들게 됨은 미루어 짐작할 있다.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을 위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있겠는가. 토르디스가 과거를 마주대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은 입장임에도, 톰이 동안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를 짐작하는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토르디스는 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혐오하며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쳐내다 보면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거꾸로 보살핌 받기가 힘들어진다.”(223)

 

결국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피하고,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톰처럼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원활한 대인관계를 맺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가짐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결국 수치심을 너머 가해자였던 이들에게도 평생의 짐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결과가 된다는 점을 토르디스는 이미 스스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깨닫고 있었다.

 

 

 

 

피해자가 다른 가해자가 되는 프레임 -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무자비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사진을 수백 보고 나니 사람에게 딱지를 붙인다는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이 이상 사람이 아닐 백인혹은 흑인 되고, ‘박해자혹은 피해자 되는 것이다.”(115)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을 고발하는 박물관에 들른 사람은 케이프타운에서 벌어진 인간의 다른 폭력의 역사를 접한다. 여기에 피해자 새로운 가해자 수도 있는 구조를 보여준다. 바로 딱지표 붙인다는 , 달리 이야기하면 누군가의 행동으로 상대방 자체에 공고한 낙인 찍어버리는 행위의 위험성을 다시금 생각할 있다. 젊은 시절 때의 실수 혹은 잘못으로 평생을 도덕적 비난의 대상을 들어야한다면, 과연 언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준비할 있을까. 토르디스는 과거의 가해자에 대해 영구적인 딱지표 붙이는 대신 이런 역사적/관습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용서라는 것이 필요함을 오랜 숙고와 과거의 자신과 대면을 통해 확신하게 된다. 성경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에 어떤 행동을 하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놀라운 가르침을 전해준다. 평범한 우리들이 타인에 대해 비난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종종 우리의 허물과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망각하곤 한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마녀사냥 결국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분노와 두려움이 억눌린 감정이 내부로 향하면 토르디스와 톰과 같이 죄책감과 자책, 심지어는 자해로 이어질 있을 것이며, 감정들이 외부로 향하게 되면 결국 타인에 대한 비난과 딱지표 붙이기와 같은 행위를 초래하게 것이다. 결국 피해자마저도 가해자가 있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용서의 나라>에서는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랜 시간의 대화와 고통스러운 상처 되돌아보기 과정을 통해 각자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보살피고 있다. 일종의 의식과 같은 만남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풀어내고 궁극적인 용서와 화해 여정으로 있었다. 놀랍게도 토르디스는 불완전한 인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여유의 경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16년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너를 강간범이라고, 적어도 나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 그렇지만 말이 너를 말하는 아니야. (…)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하고 나쁜 일도 . 요지는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딱지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177)

 

 인간은 누구나 실수 혹은 잘못을 저지를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 그리고 상대방의 인간 분리해낼 있는 이런 분별력과 심리적 여유는 오랜 시간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토르디스는 용서 여정을 위해 과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필요한 과정인지를 숙고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용서의 핵심은 짐을 덜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야. 짐이 원래 사람의 몫이라하더라도 말이야. 돌을 소유한 사람이 바뀐다 해도 악순환이 계속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70)

 

토르디스와 톰이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과거의 상처를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는 과정은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나로서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만큼, 사람에게는 민감하고 쉽지 않은 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에서 이런 성폭력이 근절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일방적 용서 완전한 해결책은 결코 아님을 또한 일깨워 준다. 결국 토르디스의 깨달음과 확신은 성폭력을 극복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자라야 하고, 잘못된 생각을 다듬어내야 하고, 노력을 합쳐야 한다.”(352) 결론에 도달한다. 함께 노력해야한다는 이다. 그것도 가해자, 피해자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사회의 구조를 새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만들어나갈 있도록 말이다.

 

 

 

 

나가며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기

토르디스에게 있어 용서 길은 험난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자존감 상실 등의 심신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어내야했다. 또한 자책과 죄책감, 그리고 사회 생활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스스로 옭아매던 과정을 겪었다. 사람은 각자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케이프타운에서 과거를 대면하고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사람 모두 진정한 자유 얻었다. 사람이 만나 노력한 대화와 화해, 용서의 과정은 매우 낯선 과정이다. 낯선 , 낯선 방식으로 서로가 진심으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는 노력은 사람에게 용기와 주변 가족의 도움 지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상기하지만 과정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함께 노력하고 참여한 결과라고도 있다.

 

책을 덮으니 바로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토르디스가 톰으로부터 받아 반평생을 속에 넣고 다니던 돌하나를 톰의 손바닥에 쥐어주는 장면이다.

 

그가 침을 삼켰다. 그와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 돌을 쥐어주었다. 그가 짧게 숨을 들이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손이 그의 주먹 손을 감쌌다. 그가 남은 손으로 위를 덮어 우리의 힘들었던 과거를 감싸 쥐었다.”(343)

 

16년의 세월동안 사람이 고통의 시간과 이메일로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케이프타운에서 직접만나 이르게 여정의 마지막에서 사람은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 있기 이전의 톰이 토르디스에게 쥐어주던 돌은 성폭행 사건 이후 토르디스에게는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무게감있게 자리를 잡았다.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마음의 짐을 몸에 새기듯 16년을 짊어지던 토르디스는 다시 돌을 톰의 손에 되돌려주며 진심어린 용서를 하고 스스로 짊어지던 마음의 짊도 내려놓았다. 이어서 톰은 돌을 거꾸로 나무 불리었던 바오밥나무 옹이에 남겨둠으로써 톰이 지니고 다니던 죄책감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주 상징적이지만, 낯선 의식은 사람에게 무엇보다 의미를 갖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상처는 남지만, 사람의 기이한 만남과 용서의 여정은 진정한 용서 어떤 모습일 있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책의 여러 군데에서 사람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토르디스가 제안한 지혜는 결국 케이프 타운에서 사람의 모토가 된다.

 

 소리내어 말하고, 웃어 넘기고, 그리고 그냥 다시 살아가는 거라니까.”(224)

 

감정적으로 서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은 모토를 다시금 기억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있다.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우리 내면에 숨겨져있는 상처와 불완전한 감정들을 대면하고 이를 인정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용서로의 여정 시작된다. 이후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웃어 넘김으로써 자신들에게 짊어지워진 죄책감 혹은 두려움을 벗고 스스로를 가볍게 하게 된다. ‘그냥 다시 살아가기 시작함으로써 이들은 비로소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평범한삶을 살아갈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평범한 삶의 위대함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유사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지하고 도움을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을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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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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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로쟈) 지음 | [책세상]

 

 

 

언제나 느끼지만 문학은 우리에게 가지를 제시해주는 같다. 하나는 우리 삶의 전형으로서 사례(또는 에피소드, 인생의 국면) 제시한는 것이다. 작가가 설정하여 글로 표현한 사례로부터 독자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편성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사례에 공감을 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여기에 하나의 전형/사례를 보여주었으니 삶은 어떠한가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저주는 같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에게 인생의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은 삶의 철학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일테다.

 

 

<문학 속의 철학> 저자인 로쟈 이현우가 강연을 엮은 책이면서, 철학자였던 박이문 선생이 저술한 동일한 제목의 <문학 속의 철학> 다시금 떠올리며 문학과 철학의 조우를 조명하며 문학을 다시 읽는 시도로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책에 언급되어있는 저자의 폭넓은 이해와 지식이 좀더 나에게 와닿는 글은 분명 내가 이전에 읽었던 책이다. 저자가 강연한 문학작품 내가 읽은 책이 별로 없어서 저자의 지적 세례에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언젠가 읽어보았던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떠올리며 최소한 작품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작품에 국한하여 저자의 강연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우선 <캉디드>

저자에 따르면 볼테르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하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직접 겨냥하여 완성한 철학적 콩트가 소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주인공 캉디드 스승인 팡글로스가 바로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인물로 나온다. 오늘날에 견주어보면 신자유주의적인 질서에서 강요하는 무한긍정의 대변인이 팡글로스인 셈이다. 세계가 그냥 존재할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믿는 팡글로스는 라이프니츠가 빙의된 인물로도 읽혀진다. 또한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의 질서는 신의 예정조화에 있다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인물이 팡글로스이다. 하지만 세계는 그리 녹녹치 않았다. 캉디드를 비롯하여, 캉디드가 사모하던 여인 퀴네공드, 팡글로스가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잔혹사는 저자가 언급하듯 세계에 악의 존재를 인정하게끔 만드는 장치일 있다.

 

 

우리도 최근에 경주나 포항에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놀란 상태이지만, 가까운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원전사고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저자는 1755 1101일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을 사례로 언급한다. 불과 5 동안의 지진에 3 명정도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은 종교인/비종교인, 어른/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희생당했다. 재앙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사람들은 과연 신은 어디에 있었던가를 묻지 않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예로 중세 시대가 끝나갈 무렵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을 떠올려 있다. 혹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정도가 사망한 역사적인 사건은 절대신이 지배하던 중세를 끝내고 인본주의로 돌아간 새로운 시대를 앞당겼다고 보기도 것이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생존자들은 신에대한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적인 유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충격이자 모순이었을 것이다. 과연 악이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없게된다. 반면 저자가 예를 배화교는 선한 신과 악한 , 종류의 신을 상정하기에 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므로 이런 거대한 모순을 피해갈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볼테르와 루소 vs. 리차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

 저자는 볼테르가 루소와 여러 면에서 앙숙이었음을 언급한다. 루소가 과격한 혁명을 주장하고, 사람의 본성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 입장을 지지했다면, 볼테르는 온건한 개혁파의 입장이고, 성선설을 비판한다. 물론 성악설 또한 거부하고,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은 백지와 같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관점은 한편 루소가 <고백> 통해 우리 안의 내적자아의 발견 주목하고 있다면, 볼테르는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상대성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며 타자의 차이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고 저자는 정리해준다. 달리말하면 루소의 시선은 보다 내부로 향하고 있고, 볼테르의 시선은 외부를 향하고 있다라고도 정리해볼 있지 않을까. 

 

 

볼테르와 루소의 대결구도를 저자는 확장하여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로 연결시킨다. 매개가된 계기가 볼테르의 인간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볼테르는 인간이 애초에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을 반대하면서도, 루소가 말하듯 성선설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은 백지상태와 같이 태어나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아 악하게도 선하게도 행동할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선과 악을 결정할 있는 인자가 문화적 인자이자 전달자인 meme이라고 보며, 저자는 개념을 통해 도킨스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화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갖는 도킨스와 굴드의 대결구도를 볼테르와 루소의 구도에 비교하고 있는 점이었다. 도킨스는 진화가 오랜 시간을 두코 천천히,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연속적 진화설 대변한다면, 굴드는 진화란 계단식으로 어떤 계기가 마련되어 단속적으로 진행된다는 진화의 단속 평형설 대변하는 입장이다. 구도는 볼테르가 온건한 개혁을 주장한 입장을 떠올려볼 도킨스에 비견되며, 루소의 과격한 혁명에 대한 지지는 굴드의 단속 평형설과 연관시키고 있다. 단순히 문학에서 어떤 교훈/주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주목하던 문학읽기 습관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해준 기회라할 있겠다.

 

 

 

나가며 상대주의적 태도의 발견

<캉디드>에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여행과정은 모두 생략되어 있지만, 소설 속의 배경은 전세계에 걸쳐있다. 소설 속에서 저자 이현우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볼테르가 제시하는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여행을 통해 보고 배울 있는 점일텐데, 공교롭게도 <캉디드>에서 주인공들이 전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관련하여 <캉디드>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의 백미는 캉디드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에서 나체 여인을 따라가며 여인의 엉덩이를 깨무는 원숭이를 총으로 쏘아죽이는 장면이다. 결국 여인과 원숭이는 연인들로 밝혀지는데, 하인 카캄보가 캉디드를 나무라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러한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앞서 <수상록> 집필했던 몽테뉴의 태도와도 다르지 않다. 식인종들을 만나 이들과 대화하고,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수장들을 찾아가 종교에 대해 대화하는 일과 같은 태도, 문화적 밈은 소수 지식인들의 밈으로 전해져 내려온 듯하다.

 

 

저자의 <캉디드> 강의를 읽고나니 주인공 캉디드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겪은 고생과 잔혹사는 결국 누구나 우리 삶에서 어느 정도 걸쳐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은 <캉디드>  담을 있는 진실성을 새롭게 발견할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의 근원 어디에 있는지를 자문했을 , 유일신의 전통이 아닌 배화교적인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면 어떻게 재판을 바라보았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가 성장할 영향을 주는 종교적 관념, 인생관은 평생에 걸쳐 삶을 제한하기도 것이다. 물론 <캉디드> 무엇보다 우리 삶의 모든 면이 신이 예정해놓은 최선의 상태가 아니라 악이 공존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라고 있다. 여기에서 소설이 끝나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을 텅빈 공간과 같은 느낌만을 받을 같은데, 볼테르는 가지 파문을 일으키는 말을 남기면서 소설을 끝낸다. 스승 팡글로스가 라이프니츠적인 예정조화설로 그동안 일행이 겪은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 캉디드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122, <캉디드>에서 재인용)

 

내게 말은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책임을 일깨워주는 말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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