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 여덟 가지 테마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앙투안 콩파뇽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원제: Un Ete Avec Proust)

앙투안 콩파뇽/줄리아 크리스테바 6(8)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이제, 때가 듯하다.

10 어느 무미건조한 실험실 구석에서 프루스트의 문장, ‘ 세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읽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때거나, 20 어느 지하 벙커에서 군복무하며, ‘우리는 사랑하자마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친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었을 때였다면, 프루스트의 텍스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감히 말할 있을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을 있을 같다. 아니 최소한 시도는 해볼 있을 같다. ‘처음 30페이지가 마지노선이라는 옮긴이의 귀뜸처럼, 어릴 향이 고약한 한약을 먹기 위해 코를 막고 약을 들이마시듯, 프루스트의 흔적을 따라가볼 수는 있겠다는 말이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 앞으로 잃게 시간보다 많아졌음을 절감하게 중년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나보다. 과감한(?) 결심을 하게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분명히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발견했고, 읽었기 때문이다.

 

가을의 문턱에서 접하게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들(전문가 이기 전에 프루스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이들) 각자 나름의 주제 8개를 통해 써내려간 각자의 독후 기록이다. 특히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의 사상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했던(<인생의 >(원제: 몽테뉴와 함께한 여름)에서) 앙투안 콩파뇽의 프루스트읽기로 시작하고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있었다.

 

시몬느 보부아르가 평생 읽고 읽고 싶은 으로 꼽았다고 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막상 읽기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문장에800단어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악명높은 책도 결국은 인간이 생각해낼 있는 거의 모든 사유의 영역과 접촉한 흔적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니겠는가. 결국 화자에게 불현듯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기억의 부분들은 결국 독자의 추억을 통해 등가물을 찾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달리말하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특히 길지 않았던 작가의 생애 말년을 바쳐 완성해갔던 작품이므로 작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또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우려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는 작품의 내용이나 이론적인 논의에 치우칠 있는 전문가들의 프루스트 읽기는 보다 작가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와 몽테뉴 줄기차게 자기의 내면을 향하는 시선

 

책에 등장하는 8명의 프루스트 전문가 명인 라파엘 앙토벤 프루스트와 철학자들이라는 키워드로 써내려간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으면서(, 소설을 통해 자신을 읽으면서), 책이 나를 삼키도록 내버려두면서, 항복의 대가로 자비심을 구하며 포식동물 앞에 몸을 바치듯 눈을 감고 독서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255)

 

나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쓰기 전에 책을 소설로 것인지 아니면 철학에세이로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스스로에게 나는 소설가인가?’라고 수첩에 적어놓았다는 대목에서부터 <에세> 작가 미셸 몽테뉴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어보지는 못했으므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에서 접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프루스트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세계(살롱과 같은 사교계 ) 대한 명민한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극도로 까다로운, 예민한 탐색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알게된다. 몽테뉴의 <에세> 떠올릴 , 프루스트의 나는 소설가인가?라는 물음에 대응하는 몽테뉴의 독백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çai-je?)라는 질문이다.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 마치 질문에 대한 수렴하는 방향으로 자신에 대한 회의적 성찰을 책을 통해 줄기차게 보여주었다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거대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회의하는 모습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있을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결국 당사자의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들로서 서로 공유하는 무언가를 갖고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라파엘 앙토벤이 언급한 대목처럼 극히 제한적이나마 역시 선배 철학자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배경이다 

 

 

소속되느냐, 소속되지 않느냐

작가 줄리아 크리스테바 읽은 프루스트는 상상의 세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현대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줄리아는 프루스트의 가족배경을 언급한다. 프루스트는 파리 코뮌 민중 봉기가 한창일 유대인 어머니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했고, 것이 프루스트의 인간적인 , 다시말해 주변부적 인물이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프루스트가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 나아가 흔히 드레피스 사건으로 알려진 알프레드 드레피스가 연루된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을 넘어 그를 옹호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프루스트의 배경을 고려해보면 다시 몽테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15세기 에스파냐의 국토재정복 운동을 통해 쫒겨난 유대인들이 유럽에 퍼지게 되는 과정에서 몽테뉴의 어머니 가족은 프랑스게 정착하게 것이다. 결국 몽테뉴의 어머니가 유대인, 아버지가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이었다는 구성마저 프루스트와 동일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리하여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몽테뉴가 유대교 회당에가서 유대교 신자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배척하지 않게 점도 결국은 (어머니와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유산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어떤 확고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소속과 비소속의 어느 경계에 있었다는 , 그리고 이것이 결국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스스로의 회의적인 시선을 사람 모두가 갖게된 배경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나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의 삶을 조금 알게되고, 조금 구체적으로 그와 소설에 대해 상상할 있게 것이다.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밝은 >, 그리고 예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우리 주변을 둘러싼 망자들에게 바치는 기념비다. 소설은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며 그들을 추모한다. 무의지적 기억은 상실과 소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47, 앙투안 콩파뇽 글에서 인용)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등장하는 첫번째 작가 앙투안 콩파뇽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읽다가 대목을 만났을 , 나의 무의지적 기억 연결해준 사람은 바로 롤랑 바르트였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 <밝은 >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어머니의 사진 한장을 바라보며 사진에 관한 에세이를 써내려가는 것이다. ‘등장인물이란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소설에 대해 써내려간 이브 타디에 글에서 그는 프루스트의 소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장대한 편지라고 말한다.”(71)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추억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했다. 어린 화자에게 무한한 사랑 의미했던 할머니의 죽음을 추모하며, 자신에게 결핍된 존재인 할머니를 소환해낸다. 이렇게 본다면 프루스트의 소설이 바르트에게 분명히 영향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있다. 나는 바르트의 저서  <밝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마주로서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우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운명적으로 결핍하게 수밖에 없는 대상은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결핍되어가는 우리 삶의 모습들, 우리가 사랑했으며, 사랑하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환기가 바로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책이 공유하는 인식으로 있을 같다. 

 

 

 

‘<밝은 > 연결되는 하나의 고리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써내려간 아드리앵 괴츠 글에서 나는 바르트와 연결되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음악과 회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다는 프루스트가 유럽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미술관을 일정에 포함시키지 않을리가 없다. 프루스트가 헤이그의 미술관에서 베르메르가 1600년대 중반에 그린 델프트 풍경 보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진품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이용하여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나도 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바르트의 <밝은 > 나오는 부분을 바로 떠올렸다. 바로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며 (자신이) ‘황제를 보았던 눈을 보고 있다라고 중얼거리며 책의 서두를 시작하는 대목이다. 프루스트가델프트 풍경 보며 놀라워하고, 아름다움에 만족감을 표시하는 모습을 나는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보면서 상상해보게되며, 사실이 바르트가 나폴레옹의 동생 사진을 보며 느꼈을 경이감과 같은 감정들을 떠올려주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소할지 모르지만 프루스트와 바르트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상상은 아닐 같다.

 

 

 

마지막 연결고리 동성애 코드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읽어나가며 프루스트와 바르트의 하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자면, 바로 성정체성과 관련한 점이다. 넉넉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프루스트에게 프루스트의 운전사로 일했던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이자 작가였던 뤼시앵 도데, 그리고 프루스트가 음악에 대한 애호를 더해주었던 작곡가 레날도 안과의 친밀한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에 흔치 않던 동성애적 코드 노출시켜 놓았던 프루스트와는 달리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동성애적 코드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작가 아니 에르노의 어느 소설에서 우리 둘은 사드보다 외설스럽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한 페이지를 발견했을 바르트는 이미 나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사실 보다 엄밀하게는 프루스트의 경우 양성애적코드가 적절하겠으나, 바르트와의 연결고리를 고려할 동성애 코드 한정시켰을 뿐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것은 책의 전반을 통해 여러 프루스트 전문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실제인물들을 찾아 열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프루스트가 영화배우로서 잠시 연인이기도 했던 루이자 모르낭과의 사랑과 추억을 통해 소설 인물인 알베르틴을 탄생시킨 것처럼,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소설이긴 하지만, 프루스트의 삶이 온전히 바쳐지고 반영된 하나의 세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동성애 관련된 무언가를 공공연하게 발설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프루스트는 자신의 전체를 걸고 소설에 투영하느라 분투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정리하며

주말 아침 라디오를 듣고 있다. 가수가 누구인지는 듣지 못했으나, 제목이 You Belong to Me라고 하였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다시 들어보는데 여러 가수들의 노래 나는 Carla Bruni 버전이 프루스트를 생각하기에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래를 들으며, 똑같이 어머니를 애도했던 바르트를 떠올려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무의지적 기억 나를 가족의 이야기로 연결시켜 준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아문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극복되지 않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지금 현재 내게 속해있고, 내가 속해있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보게되는 순간이다. Carla Bruni 곡을 들으며 마무리를 하려는데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지하철에서 읽다가 그냥 먹먹해진 아래 문장을 다시 만났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 사랑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 문장 재인용(87)

그렇다. 프루스트든, 바르트든, 몽테뉴든 먼저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 내게 가르쳐주는 바는 바로 프루스트가 소설 속에 숨겨두었다. 바로 사랑하는 이다. ‘사랑하기 언제나 희망하고, ‘사랑했음 언제나 간직해두는 . 프루스트가 일종의 경계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분명히 그에게 강하게 소속되어있음은 분명하다. 반대로 프루스트 자신의 존재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확고부동히 소속되어 있었음 상기하는 . 이것이 찰나처럼 지나가는 인생에서 우리가 부인할 없는 진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프루스트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나에게 바로 삶에서 사랑하기 환기해볼 소중한 기회를 셈이다.

.

 

 

 

 

 

 

 

 

 

(44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 상실과 그 상실의 자각에 관한 책이다."

(87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 사랑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의 그늘에>에서 재인용

(131면)
"우리는 사랑하자마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스완의 집쪽으로>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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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칼럼 매캔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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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원제: Let the Great World Spin)

칼럼 매캔(Column McCann) 지음 | 박찬원 옮김 | [>

 

 

     책을 많이 읽었음을 드러내보이는 사람보다 권의 소설, 짧은 소설 편에서도 묵직한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견주어 꺼낼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젊은 시절에는 속독가들의 능력이 부러웠고,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다독가가 부러웠었더랬다. 하긴 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기에 일말의 부러움도 나에게는 사치였을 것이다. 30대가 훌쩍 넘어 어릴 읽던 <영웅문> 같은 무협지 이후 다시 소설이란 것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나에게 문학이란 무용한 ’,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이었고, ‘쓸모 없음의 쓸모 알기에는 안에서 쌓여야할 시간이, 그리고 삶의 고단함이, 밥벌이의 지겨움 좀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최인호 작가가 중학교 단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다. 중학생이 부부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심리를 이해하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단편으로 써놓은 글이었다. 나는 불굴의 노력, 후천적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최인호 작가와 같은 이런 분들을 보면 타고난무언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는 믿는다. 꾸준한 노력으로(예컨대 1만시간 이상의 꾸준한 노력으로)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탁월함 경지라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믿는다. 그리고 타고난탁월함이 없는 나에게 자신의 결핍을 계속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나와 같은 이들이 불굴의 의지와 꾸준한 노력으로 이를 있는 경지는 타고난 탁월함 경지에 점근적으로만 다가갈 이들은 결국 만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타고나지 않음 비관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칼럼 매캔의 소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바로 이런 타고남+탁월함 차원에서 사는 사람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오늘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리뷰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부끄럽지만 권의 책을 읽고 페이지라도 인상을, 책에 대한 기억들을 남겨두고자 끄적거리던 것들을 모은 메모에서 출발하였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작가 칼럼 매캔은 아일랜드 출신(1965 ) 작가로 1990년대 뉴욕에 정착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이방인으로서 낯선 사회에 정착하게된 작가가 신대륙에서 바라본 삶의 양상들이 소설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개척기에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하여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뉴욕 통해 작가는 미국사회가 안고있는 사회의 문제들과 미국의 트라우마를 직간접적으로 예리하게 들추어낸다. 1974 쌍둥이 빌딩으로 알려진 세계무역센터에 줄을 걸고 사이를 걸었다는 프랑스인 필리프 프티에 관한 사건이 각색되어있긴 하지만 소설에서 하나의 중심 축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은 2001 테러 인하여 무너진 110층의 세계무역센터 위를 우아하게 걸었던 프랑스인의 사건과, 아래 구질구질하고 피폐한 또는 부유하지만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과 과연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소설을 읽어가면서 내내 떠올렸던 궁금증이었다. 

 

 

     우선 책의 시간적인 배경은 70년대를 주축으로 하여 후반에 이르러 소위 ‘9.11테러이후의 삶이 대비되어 나온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마도 ‘9.11테러 미국인에게, 작가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업을 염두해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분명 ‘9.11테러 존재는 작가에게, 나아가 미국인들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를 남겨준 사건일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1997 ‘IMF외환위기 가져다준 트라우마와 사회의 질적 변화와도 같이 ‘9.11테러 미국인들에게 실로 거대한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의 미국은 무엇보다도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회의와 방향 상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던 시기로 있을 것이다.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에서는 거대한모순의 세계에서 상처입은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베트남 전쟁에 아들을 내보낸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백인 사회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나아가 이에 대해 양심적인 백인들이 느끼고 항상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회피하곤하는 백인들의 죄책감(white guiltiness)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기나긴 소설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 중반을 넘어서이다. 다양한 등장 인물에 매번 시점이 바뀌어 화자가 동일하지 않은 점은 다소 혼란스럽다. 하지만 저자가 등장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보다 따뜻하기에 소설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공감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미국사회에 만연하는 모순과 편견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독자가 들여다볼 있도록 안내하는데, 미국사회가 겪는 트라우마 통해 직간접적으로 상처받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쓰고 있다. 등장 인물들은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결국 미국인들의 실체적인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무기력하게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부대껴 나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있는 미국의 트라우마는 구체적으로 이런한 것이다. 세계의 도시 뉴욕에서도 부유한 동네로 알려진 맨하탄의 파크 애비뉴 대비되는 우범지역인 브롱크스지역을 통해 오래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주고있다. 나아가 미국의 세계지배 야욕의 일환으로 벌어진 베트남전에는 파크 애비뉴든 브롱크스에 살든 이들 가족의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다른 오래된 트라우마는 인종차별이다. 미국의 구치소에 백인 죄수보다 흑인죄수가 많다는 짤막한 문장을 통해 작가는 미국의 오래고 구조적인 인종차별의 흔적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인종의 우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방인인 신대륙에서 이방인 인종이 어떻게 다른 인종을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체시키는지에 관한 오래고 고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베트남전과 70년대 반전분위기가 지배한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전쟁이 남긴 개별적인 존재들의 영원한 상처들이 보여진다. 그리고 ‘9.11테러이후 농담마져도 조사대상이 경직된 미국사회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테러가 미국역사에 영원히 남긴 트라우마이다. 아울러 2005 미국 남부 미시시피지역이나 뉴올리언즈 지역 등을 중심으로 희생을 초래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모습이 후반에 잠시 나오면서 미국이라는 배의 결함, 국가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의혹을 저자는 분명히 인식하고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2017 지금(8-9), 미국 텍사스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 하비 남긴 흔적들과 희생자들로 기사가 넘쳐나는 시점에서 소설은 거대하고 모순된 세계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 외환위기 세월호사건 통해 사회안전망이란 허구였다는 사실과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 그리고 이러한 모순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짤막하게 그러나 계속 반복해서 언급되는 이라크전의 희생자 소식에 관한 언급은 어떤가. 작가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2001 이후 질적으로 변화해버린 사회의 분위기를 공항보안검색 에피소드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농담이 사라진 사회’, ‘가벼움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의 어께에 걸쳐진 삶의 무거움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 신대륙 정착한 저자의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이기에 보다 피부에 와닿도록 인식하는 문제들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세계를 바꿀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자신이 속한 사회를 민감하게 주시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가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소설의 제목에 드러나는 거대한 지구’, ‘거대한 땅덩어리 여기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사회의 모순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어떠한 행동으로도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거나 바꾸기 힘든 것이라면, 우리가 이러한 거대한 모순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땅덩어리의 작은 점으로서 무엇을 있을까? 모순의 땅에서 어쩔수 없이 살아가야하는 우리라면, 하늘에서 우아하게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칼럼 매캔이 1974 수백미터 상공에서 세계무역센터 사이를 하나에 의지해 건넜던 필리프 프티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은 것도 결국은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에서 쓸모 없음의 쓸모 얼마나 쓸모있는지 주목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차라리 부조리한 지상의 삶에서 한번쯤 꿈꿔볼만한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동경이자 인생에 대한 하나의 은유 아니었을까. 땅에 발을 떼어본 적없이 땅만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 저자는 하늘을 보고 때로는 아찔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꾸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씩은 하늘을 보며 살라고말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했던 위험한 삶을 살아라’, ‘자신을 가볍게 하라’, ‘춤을 추어라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은 자신에게 맞닿는 삶의 유희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자신을 가볍게 하고 춤을 추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 삶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기에 (세대를 뛰어넘어)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트라우마가 남긴 상처를 치유할 있는 힘에 대한 실마리가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소설이라는 것을 읽으며 작가가 하는 말이나 옮긴이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것이 마치 나의 정신적 미성숙을 드러내주는 것같은 오랜 콤플렉스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그동안 매우 얕은삶을 살아온 것만 같은 결핍을 언제나 느꼈다. 바로 혼자 인생에서 뒤쳐져 있다는 조바심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나이가 좀더 들고서야, 그리고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야 비로소 행간에 숨은 삶의 고단함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같다. 그리고 칼럼 매캔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나에게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나만의 콤플렉스를 더이상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주는 번째 책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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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책
앤 후드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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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인생 최고의 >

(원제: The Book that Matters Most)

후드 지음 | 권가비 옮김 | 책세상

 

 

 

     출근 이른 샤워를 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적이 있다.

소시민으로서 나의 인생을 언젠가 돌이켜볼 , 유산(legacy)라고 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유산은 어떠해야할까?’ 물론 여기서 내가 생각했던 유산은 단순한 재산의 개념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 반영된 유무형의, 인생을 통해 형성된 무엇을 말한다. 후드의 < 인생 최고의 > 읽으면서 뜽금없이 이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소설에 나오는 북클럽에서 멤버들 각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을 읽기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게 가장 중요한 책은 무엇이라고 말할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인 에이바는 아들과 딸을 가진 중년 주부이다. 아들은 모범적으로 문제없이 지내지만, 딸은 마약과 섹스로 삶을 소진하는 중이다. 한편 에이바는 치매증상으로 요양원에서 나날이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 사랑하던 동생을 바로 앞에서 잃었던 기억을 평생의 아픔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아가 에이바는 외도를 남편으로부터 이혼통보를 받아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고통스럽지만 누구에게든 인생에서 언제든 일어날 있다. 삶의 여정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휘청거리는 에이바에게 가장 친한 친구 케이트는 북클럽에 들어올 있도록 문을 열어준다. 북클럽에 참여를 하고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멤버들 역시 각자 나름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북클럽은 매달 번씩 도서관의 장소에서 10명의 멤머가 모인다. 각자가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선정한 권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임에서는 달에 해당하는 책에 대한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고, 각자가 책에대해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거나 특정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나간다. 대화에 참여하는 멤버들이 책에서 느낀점들을 언급하는 부분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 문장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듯이, 멤머들 각자는 나름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책을 통해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멤버들은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그리고 모임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깨달음을 공유하게 된다. 아마도 책을 읽는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치유의 힘을 전해준다면 바로 나만 불행한 것이 아님 깨닫는 일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북클럽에서는 다양한 연령, 다양한 직업의 멤버들이 소탈하게 모여 같은 책을 읽고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과 견주어보기도 한다. 결과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고, 삶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해준다. 나아가 타인의 얼굴을 바라봐주고, 환대해주는 방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북클럽 멤버들은 서로를 돌보고 위로하거나 격려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는 힘을 얻게된다. 북클럽을 둘러싼 이야기는 각자가 지나고 있는 여정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책은 인생의 고통과 상처로부터 회복되어가는 관한 이야기라고 수도 있겠다.

 

 

     때문에 제가 달라졌습니다.”(120)

북클럽의 멤버 루크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책으로 정하고 이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혹은 어떤 책을 읽으며 독자가 크게 공명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 감히 말할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에 최고의 영미 소설 하나라는 <위대한 개츠비> 아직도 읽어보지 않았냐며 수업 학생들을 무시하던 영어 선생님의 말에 오기가 나서 읽어보았던 나는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다. 사실 일말의 내용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검은글자들을 단순히 따라가며 스캔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소설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도 몰랐을 뿐더러 나의 인생은 모든 면에서 미숙하던 때였으므로, 나는 책과 공명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일 있는데 반해,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개개인의 인생에서 최고의 단순히 오랜 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고전이거나 베스트셀러 아니라 독자가 가장 크게 공명하고 반응한 책이라 있다. 내가 평생 권의 책이라도 내가 진정으로 공명하여 읽고 읽게되고, 힘들 나를 일으켜주며,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줄 책을 만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책을 덮으며]

     우리는 평생 타인과 관계를 맺고, 부대끼는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실수도 하고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도 하고 서로 익숙해지는 습관의 시간을 살기도 한다. 배우자나 부모님, 자녀가 사망했거나 부재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과거 함께했던 순간을 함께했던 시간 속의 습관으로부터 소환해 내곤 한다. 북클럽은 단절된 인간관계, 가족해체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 하나의 가족'으로서 '동아리'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각자 나름의 독서 경험과, 과거의 체험, 그리고 기억들을 통해 책과 반응하게 된다. 책에서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젊은이들의 소설이라는 말을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인 홀든 콜필드가 맨하탄의 밤거리를 방황하던 모습이 내가 어려움을 겪을 인상에 남아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겪던 처지를 나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또한 격려를 받았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책을 인생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 치유와 회복, 그리고 인연과 관계의 자각이라는, 책이 우리 인생에 주는 선물에 관한 이야기라 부르겠다.

 

 

 

 

 

 

(120)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위대한 개츠비> 소개하며 루크가 하는

때문에 제가 달라졌습니다.

 

(164)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장 재인용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325) 존이 인용한 <브루클린엔 나무가 자란다> 구절

보든 마치 그걸 처음 보듯, 아니면 마지막으로 보듯 하렴. 그러면 이승의 삶이 찬란한 빛으로 가득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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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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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내가 부러워하는 이는 깊은 독서와 사유를 하고 언제나 걷는 자이다. 스스로를 고된 ‘문장노동자’로서 표현을 하는 장석주 시인이 바로 이 대상에 속한다. 언제나 읽기와 쓰기,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을 하며 걷는 시인이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글을 모았다. 이번에는 시의 ‘은유’에 대해서다. 시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한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29면) 달리말하면 ‘은유’없는 시는 앙꼬없는 찐빵이란 뜻일테다. 그렇다면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 바로 이 한 가지 물음을 붙들고 시의 은유에 대해 한 권의 책으로 생산해 내었다. 이 책은 바로 40년 간 시와 접하고, 시를 써온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은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답일 것이다. 



     시인에게 ‘좋은’ 시는 보석과도 같은 은유들이 가득한 상자인 모양이다. 시인은 ‘은유란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31면)이며,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32면,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나’는 거울에 비친 상이 나인 줄 알지만, 이것이 ‘참-나’는 아닌줄도 안다. 결국 ‘내가 아닌 나’다. 이 모호함과 낭패감이 ‘은유’의 단면인 것이고, 또한 시를 더욱 매력있게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시인의 설명은 알송달송하나 또한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시인의 문장은 그러한 모습에서 또한 ‘시의 은유화’된 양상을 닮은 것도 같다. 내가 학교를 오래 전에 졸업하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은유’와 ‘직유’에 대해 떠올려보게 된 시인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어떤 찰나, 저녁의 거무스름한 물, 생리하는 개들, 처제들의 상상임신같은 것, 이런 모호함들은 시의 자궁이다.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곧 시인이 시에서 사용하는 대상과 시인이 마음 속에 품은 이미지들에는 ‘은유’라는 코드로 맺어지게 되는데, 이 대상과 이미지들 사이에 ‘뻔한’ 관계, 진부한 상식이 깃들어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느 한 순간 ‘그럴수도 있군’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관계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시에서 꽁꽁 얼어있는 우리의 무지와 사유의 나태함이라는 얼음을 깨부수는 도끼와도 같은 수단이 바로 ‘은유’라고 나에게 일러주는 듯하다. 쉽지는 않지만 다시 시인이 던져주는 실마리를 또 쫒아가보자.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시에서 은유는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나온 이미지일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이성의 준거를 기반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달리말하면 나는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학창시절 참고서에 나온 해설서의 양식대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아닐까. “퇴색한 성교당의 언덕 위에선/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168면에서 재인용)라는 김광균 시인의 시 한구절에서 ‘청각의 이미지(시각)화’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을 보면 내 문제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나태함’을 부수고,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190면)을 가져다줄 구원투수로서 ‘시 처방’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40여년 간의 오랜 독서의 경험과 사유가 녹아들어 직조된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집중된 시인의 의식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내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잘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는 않으나, 내가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이렇게 오롯한 집중된 의식 속에서 글쓰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인상은 시인의 글쓰기가 목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이 아닌 배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을 이야기하듯,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시인 내면의 사유에서 길러올린 글쓰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단, <은유의 힘>은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에겐 낯설다. 차라리 퉁명스러운 책이라 하겠다.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잡지에 써온 글들을 모은 책이기에 ‘시를 가까이하고 싶어 집어든’ 나같은 독자에게는 낭패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은유의 힘>은 ‘친절한 시인’의 책은 아니다. 독자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설명하는 시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폭넓은 독서가 없다면 저자의 진행과정과 맥락을 따라가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곧 이 책은 내가 보기에 다른 독서보다도 좀더 독자의 품이 더 필요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은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166면)이라고 전한다.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166면)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핍의 힘으로 인하여 시인들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에도 비로소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176면)라는 시인의 표현이 다소 막연하나마 마음에 들었다. ‘풀잎’이라는 작은 진실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세계를 발견해버린 월트 휘트먼의 이야기는 조그만 놀라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욕망’이라는 대상(시)을 만들어내는 ‘욕망하는 자’인 시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은유’라는 보석상자를 소유한 자들일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보석상자를 틈틈이 열어보고 ‘은유’와 ‘꿈’이라는 보석이 있음에 안도하기도 하는 이들이 아닐까.   





(25면)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다.‘

(29면)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31면)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32면)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 그게 바로 은유화다.
-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에서 재인용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166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 - 옥타비오 파스
‘시인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 이들은 열등하고 패배하며 곤경에 빠진 자들을 대신하여 욕망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

(176면)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

(233면)
‘오늘날 가장 철학적인 시들은 오직 무지 속에서 무지를 견디며 피로 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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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2017-08-22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 보니 한번 읽어보고싶다~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중간에 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 이들에겐 친절한 책은 아니라고 하시니 좀 걱정스런 맘도 되네요~ ㅎㅎ

초란공 2017-08-22 07:21   좋아요 0 | URL
아 사실 부끄럽지만 ‘시 안읽던 공대생‘의 관점에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 인읽던 공대생과 40년 간 시를 쓴 시인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일 수도 있겠고요. 아니면 시의 문제라기보다 시인이 말하는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구요. 제겐 사실 다 해당되는 얘기 같습니다. ㅜㅜ
 
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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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좀비 연대기>

로버트 어빈 하워드 지음 | 정진영 엮고 번역 | 책세상

 

 

   <좀비 연대기> 기대이상으로 재미있다. 나는 공포소설, 스릴러 일종의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작품들은 무언가 작가의 작위적인 결과물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자는 좀비가 대세라고 역자 후기에서 귀뜸해주지만, 그동안 나는 좀체로 좀비영화나 좀비가 나오는 소설, 심지어 오락마저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 연대기> 읽어나가면서 좀비소설 역시 문장력과 이야기의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면 다른 장르 소설과 다를바가 없겠다는 점을 느꼈다. 다시말해서 소재보다 중요한 소설로서의 탄탄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이 .

 

   클래식호러라는 문구가 시사하듯, 책에는 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좀비를 소재로 하는 단편들이 실려있다. 사실 각각의 단편들은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죽었으나 살아있는, 피와 살을 지닌 시체 좀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SF소설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환상소설과 같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좀비는 일차적으로 부두교와 관련이 있고 마술사를 통해 비밀스런 주술과 마법을 통해 되살아난 시체다. <좀비 연대기> 나온 소설들만을 통해 정리를 해보자면, 좀비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 열대에 준하는 지역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흑인(크레올과 같은 혼혈인들을 포함하여) 또는 흑인노예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탄생한 개념이라고 있다. 좀비문학 속에서 좀비와 관련된 특징을 떠올리자면 항상 부두교의 마법사가 어떤 의식을 통해 죽은 자들을 되살아나게만든다는 점이다. 마법과 주술을 통해 되살아난 좀비들은 이따금 중얼거리긴 하지만 대개는 말없이, 아무런 자유 의지나 판단능력 없이 마법사의 지시를 따르는 자동인형 또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작품들에서 보이듯 좀비는 농장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좀비가 흑인노예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고려해볼 있다(《노예에게 소금은 금물》,《화나트에서의 마법》,《화이트 좀비》). 여러 소설에서 이러한 구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좀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흔히 활용하던 좀비 사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드라큘라를 언급할 , 이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 십자가, 마늘과 같은 대상이 떠오른 반면, 좀비에게 이런 대상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좀비는 마법사의 주술의 힘으로 낮에도 다니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들에게 치명적인 대상은 바로 소금으로 보인다. 이는 여러 작품을 통해 활용되고 있는데, 좀비가 소금을 먹게되면 정말로 죽는다. 소금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매우 중요하고 귀한 물질이면서도 죽은 유기체의 부패방지에 활용된다는 양면적인 특징을 떠올려보면, 좀비 문학에서 좀비들이 소금을 먹으면 영원히죽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또한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좀비가 결국 되살아난 시체라는 이율배반적인 초자연적 존재이기에 소금이 이들을 죽인다는 발상도 아이러니하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좀비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앞쪽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없다!

(220) 이네즈 월리스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중에서

 

실제로 피와 살을 지닌 시체이기에 좀비들은 특이하게도 총을 맞거나 칼을 맞으면 역시나 피를 흘리는 모습도 공통적이다. 이런 점들은 좀비문학의 클래식 작품들을 수록한 책을 통해 새롭게 살펴본 좀비의 특징들이라고 있다.     

 

 

   좀비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준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소설인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작품들이었다.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문장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주기에 독자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었다. 1845 흑인 노예들의 폭동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은 카난》에서 주인공 백인(커크 버크너) 사악한흑인 좀비들을 죽이는 구도는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다. 한편 전지적 작가 시점에 준하는 1인칭 시점의 친절한 설명과 진행은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커크 버크너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카난이라는 삼각주 지역으로 끌려가는장면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는 최면에 빠진 사람과는 달랐다. 완전히 깨어 있었고, 정신도 말짱했다. 노호하는 검은 강물이 쇄도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멍한 상태에서도 정신은 말짱했고 생각은 명료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지옥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통렬하게 깨닫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감. 내가 고문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가고 있었다. 이성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릴 것만 같은 주술을 깨려고 기를 쓰면서도 계속 가고 있었다.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97)

 

   부분은 마치 과거 꿈의 일부를 써놓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거대한 물줄기 속에 몸을 맡긴 어딘가로 가는 . 나는 너무나 자주 꾸던 유형의 꿈이었다. 분명 어딘가의 종착지는 죽음 관계할지도 모른다. 다르게 보면 이러한 무기력한 나의 꿈과 주인공 커크 버크너가 경험하는 충동의 모습은 어쩌면 비판적인 사유없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무기력한 존재로서 따라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병치되어 다가온다.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나의 통제력을 능가하는 어떤 힘이 나를 고션으로, 너머로 이끌고 있었다.”(97)

 

 

 

 

 

   책에 수록된 작품들 여타 작품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은 단연 런던의 《천 번의 죽음》이라고 있다. 작품은 부두교나 흑인과 관련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좀비 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SF소설에 더욱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죽은 유기체의 소생방법을 찾아내는 인물 등장하는 것으로보면 마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도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천 번의 죽음》에서도 생명을 주는 아버지와 실험대상이 되는 아들과의 대립구도가 보인다. 아버지는 실험대상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것을 가져갈 권리 또한 나한테 있지 않겠냐?”(127)  이어서 아버지는 수없이 죽을 운명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이란 원래 위험으로 가득 있으니까.”(127)  아버지의 말은 살아있는 존재 말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인생 끌어오는 것은 작가인 런던이 설정해둔 신랄한 유머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작품에서 아버지는 창조자인 신의 위치에 놓여있다. 아들을 죽이고는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생물학,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생물체를 복제하거나 이들을 변형하는 것에 대한 원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영생이나 인간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라는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면 것이다.

 

     한편《천 번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구도에서 흔히 빠지지 않는 친부살해 모티브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개념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나트에서의 마법》에서 나트섬의 마법사 바카른과 아들 보칼 울돌라와의 대립구도에서도 중심 사건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생명을 주는 존재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의 구도는 또다시 <프랑켄슈타인> 떠올리게 해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인데, 특히나 갈등을 유발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사회적 역할에 제약을 가하거나 구속하는 측면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주는)아버지와 대립하는 아들의 갈등 구도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보면 농장주와 여기에서 착취당하는 노예 또는 좀비와의 갈등구도에 적용해볼 있을 것이다. 가넷 웨스턴 허터의 작품《노예에게 소금은 금물》에서 150살로 추정되는 크레올 노파가 이야기해주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본다. 농장의 노예들은 농장주가 없는 동안 농장주의 명령을 거스르며 주인의 샴페인과 소금을 약탈하고 건물을 파괴한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친부살해모티브의 확장이라고 있을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책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을 통해 깨닫게 것은 분명 좀비라는 대상은 (흑인 혼혈인들을 포함하여)흑인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고 있다는 점이다. 좀비 문학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라는 지리적 특징은 모두 흑인 노예들이 이동했던 지리와 일치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있는 좀비의 이미지와 다르게 좀비 문화는 사실 흑인노예제도라는 극도로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의 어두운 원체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폐쇄적이고 미신적인 이들 집단 내에서 주술을 통해 자신들이 간직한 원한이나 저주를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공간을 부두교라는 미신적 행위가 제공하고 있다. 자연현상과 유사하게 사회적 스트레스 억압 속에서 쌓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어디에서든 터져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비를 단순히 인간이 지닌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억압받아온 흑인들의 인간적 욕망이 어두운 컬트 문화로 표출된 존재 바로 좀비라고 보아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호러 작품을 수록한 <좀비 연대기> 나의 편견을 보기좋게 깨도록 해준 흥미로운 시도였다.    

 

 

 

 

인상적인 문장

어디서나 밤은 상상을 공포로 물들이는 모호함과 환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서는 밤이 유난히 강력하고 불길한 효과를 만들어낸다.”(161)

라프카디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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