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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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내가 부러워하는 이는 깊은 독서와 사유를 하고 언제나 걷는 자이다. 스스로를 고된 ‘문장노동자’로서 표현을 하는 장석주 시인이 바로 이 대상에 속한다. 언제나 읽기와 쓰기,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을 하며 걷는 시인이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글을 모았다. 이번에는 시의 ‘은유’에 대해서다. 시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한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29면) 달리말하면 ‘은유’없는 시는 앙꼬없는 찐빵이란 뜻일테다. 그렇다면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 바로 이 한 가지 물음을 붙들고 시의 은유에 대해 한 권의 책으로 생산해 내었다. 이 책은 바로 40년 간 시와 접하고, 시를 써온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은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답일 것이다. 



     시인에게 ‘좋은’ 시는 보석과도 같은 은유들이 가득한 상자인 모양이다. 시인은 ‘은유란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31면)이며,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32면,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나’는 거울에 비친 상이 나인 줄 알지만, 이것이 ‘참-나’는 아닌줄도 안다. 결국 ‘내가 아닌 나’다. 이 모호함과 낭패감이 ‘은유’의 단면인 것이고, 또한 시를 더욱 매력있게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시인의 설명은 알송달송하나 또한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시인의 문장은 그러한 모습에서 또한 ‘시의 은유화’된 양상을 닮은 것도 같다. 내가 학교를 오래 전에 졸업하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은유’와 ‘직유’에 대해 떠올려보게 된 시인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어떤 찰나, 저녁의 거무스름한 물, 생리하는 개들, 처제들의 상상임신같은 것, 이런 모호함들은 시의 자궁이다.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곧 시인이 시에서 사용하는 대상과 시인이 마음 속에 품은 이미지들에는 ‘은유’라는 코드로 맺어지게 되는데, 이 대상과 이미지들 사이에 ‘뻔한’ 관계, 진부한 상식이 깃들어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느 한 순간 ‘그럴수도 있군’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관계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시에서 꽁꽁 얼어있는 우리의 무지와 사유의 나태함이라는 얼음을 깨부수는 도끼와도 같은 수단이 바로 ‘은유’라고 나에게 일러주는 듯하다. 쉽지는 않지만 다시 시인이 던져주는 실마리를 또 쫒아가보자.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시에서 은유는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나온 이미지일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이성의 준거를 기반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달리말하면 나는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학창시절 참고서에 나온 해설서의 양식대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아닐까. “퇴색한 성교당의 언덕 위에선/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168면에서 재인용)라는 김광균 시인의 시 한구절에서 ‘청각의 이미지(시각)화’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을 보면 내 문제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나태함’을 부수고,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190면)을 가져다줄 구원투수로서 ‘시 처방’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40여년 간의 오랜 독서의 경험과 사유가 녹아들어 직조된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집중된 시인의 의식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내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잘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는 않으나, 내가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이렇게 오롯한 집중된 의식 속에서 글쓰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인상은 시인의 글쓰기가 목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이 아닌 배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을 이야기하듯,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시인 내면의 사유에서 길러올린 글쓰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단, <은유의 힘>은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에겐 낯설다. 차라리 퉁명스러운 책이라 하겠다.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잡지에 써온 글들을 모은 책이기에 ‘시를 가까이하고 싶어 집어든’ 나같은 독자에게는 낭패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은유의 힘>은 ‘친절한 시인’의 책은 아니다. 독자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설명하는 시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폭넓은 독서가 없다면 저자의 진행과정과 맥락을 따라가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곧 이 책은 내가 보기에 다른 독서보다도 좀더 독자의 품이 더 필요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은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166면)이라고 전한다.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166면)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핍의 힘으로 인하여 시인들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에도 비로소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176면)라는 시인의 표현이 다소 막연하나마 마음에 들었다. ‘풀잎’이라는 작은 진실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세계를 발견해버린 월트 휘트먼의 이야기는 조그만 놀라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욕망’이라는 대상(시)을 만들어내는 ‘욕망하는 자’인 시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은유’라는 보석상자를 소유한 자들일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보석상자를 틈틈이 열어보고 ‘은유’와 ‘꿈’이라는 보석이 있음에 안도하기도 하는 이들이 아닐까.   





(25면)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다.‘

(29면)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31면)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32면)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 그게 바로 은유화다.
-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에서 재인용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166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 - 옥타비오 파스
‘시인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 이들은 열등하고 패배하며 곤경에 빠진 자들을 대신하여 욕망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

(176면)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

(233면)
‘오늘날 가장 철학적인 시들은 오직 무지 속에서 무지를 견디며 피로 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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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2017-08-22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 보니 한번 읽어보고싶다~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중간에 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 이들에겐 친절한 책은 아니라고 하시니 좀 걱정스런 맘도 되네요~ ㅎㅎ

초란공 2017-08-22 07:21   좋아요 0 | URL
아 사실 부끄럽지만 ‘시 안읽던 공대생‘의 관점에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 인읽던 공대생과 40년 간 시를 쓴 시인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일 수도 있겠고요. 아니면 시의 문제라기보다 시인이 말하는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구요. 제겐 사실 다 해당되는 얘기 같습니다. ㅜㅜ
 
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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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좀비 연대기>

로버트 어빈 하워드 지음 | 정진영 엮고 번역 | 책세상

 

 

   <좀비 연대기> 기대이상으로 재미있다. 나는 공포소설, 스릴러 일종의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작품들은 무언가 작가의 작위적인 결과물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자는 좀비가 대세라고 역자 후기에서 귀뜸해주지만, 그동안 나는 좀체로 좀비영화나 좀비가 나오는 소설, 심지어 오락마저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 연대기> 읽어나가면서 좀비소설 역시 문장력과 이야기의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면 다른 장르 소설과 다를바가 없겠다는 점을 느꼈다. 다시말해서 소재보다 중요한 소설로서의 탄탄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이 .

 

   클래식호러라는 문구가 시사하듯, 책에는 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좀비를 소재로 하는 단편들이 실려있다. 사실 각각의 단편들은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죽었으나 살아있는, 피와 살을 지닌 시체 좀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SF소설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환상소설과 같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좀비는 일차적으로 부두교와 관련이 있고 마술사를 통해 비밀스런 주술과 마법을 통해 되살아난 시체다. <좀비 연대기> 나온 소설들만을 통해 정리를 해보자면, 좀비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 열대에 준하는 지역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흑인(크레올과 같은 혼혈인들을 포함하여) 또는 흑인노예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탄생한 개념이라고 있다. 좀비문학 속에서 좀비와 관련된 특징을 떠올리자면 항상 부두교의 마법사가 어떤 의식을 통해 죽은 자들을 되살아나게만든다는 점이다. 마법과 주술을 통해 되살아난 좀비들은 이따금 중얼거리긴 하지만 대개는 말없이, 아무런 자유 의지나 판단능력 없이 마법사의 지시를 따르는 자동인형 또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작품들에서 보이듯 좀비는 농장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좀비가 흑인노예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고려해볼 있다(《노예에게 소금은 금물》,《화나트에서의 마법》,《화이트 좀비》). 여러 소설에서 이러한 구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좀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흔히 활용하던 좀비 사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드라큘라를 언급할 , 이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 십자가, 마늘과 같은 대상이 떠오른 반면, 좀비에게 이런 대상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좀비는 마법사의 주술의 힘으로 낮에도 다니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들에게 치명적인 대상은 바로 소금으로 보인다. 이는 여러 작품을 통해 활용되고 있는데, 좀비가 소금을 먹게되면 정말로 죽는다. 소금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매우 중요하고 귀한 물질이면서도 죽은 유기체의 부패방지에 활용된다는 양면적인 특징을 떠올려보면, 좀비 문학에서 좀비들이 소금을 먹으면 영원히죽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또한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좀비가 결국 되살아난 시체라는 이율배반적인 초자연적 존재이기에 소금이 이들을 죽인다는 발상도 아이러니하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좀비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앞쪽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없다!

(220) 이네즈 월리스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중에서

 

실제로 피와 살을 지닌 시체이기에 좀비들은 특이하게도 총을 맞거나 칼을 맞으면 역시나 피를 흘리는 모습도 공통적이다. 이런 점들은 좀비문학의 클래식 작품들을 수록한 책을 통해 새롭게 살펴본 좀비의 특징들이라고 있다.     

 

 

   좀비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준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소설인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작품들이었다.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문장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주기에 독자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었다. 1845 흑인 노예들의 폭동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은 카난》에서 주인공 백인(커크 버크너) 사악한흑인 좀비들을 죽이는 구도는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다. 한편 전지적 작가 시점에 준하는 1인칭 시점의 친절한 설명과 진행은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커크 버크너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카난이라는 삼각주 지역으로 끌려가는장면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는 최면에 빠진 사람과는 달랐다. 완전히 깨어 있었고, 정신도 말짱했다. 노호하는 검은 강물이 쇄도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멍한 상태에서도 정신은 말짱했고 생각은 명료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지옥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통렬하게 깨닫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감. 내가 고문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가고 있었다. 이성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릴 것만 같은 주술을 깨려고 기를 쓰면서도 계속 가고 있었다.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97)

 

   부분은 마치 과거 꿈의 일부를 써놓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거대한 물줄기 속에 몸을 맡긴 어딘가로 가는 . 나는 너무나 자주 꾸던 유형의 꿈이었다. 분명 어딘가의 종착지는 죽음 관계할지도 모른다. 다르게 보면 이러한 무기력한 나의 꿈과 주인공 커크 버크너가 경험하는 충동의 모습은 어쩌면 비판적인 사유없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무기력한 존재로서 따라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병치되어 다가온다.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나의 통제력을 능가하는 어떤 힘이 나를 고션으로, 너머로 이끌고 있었다.”(97)

 

 

 

 

 

   책에 수록된 작품들 여타 작품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은 단연 런던의 《천 번의 죽음》이라고 있다. 작품은 부두교나 흑인과 관련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좀비 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SF소설에 더욱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죽은 유기체의 소생방법을 찾아내는 인물 등장하는 것으로보면 마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도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천 번의 죽음》에서도 생명을 주는 아버지와 실험대상이 되는 아들과의 대립구도가 보인다. 아버지는 실험대상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것을 가져갈 권리 또한 나한테 있지 않겠냐?”(127)  이어서 아버지는 수없이 죽을 운명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이란 원래 위험으로 가득 있으니까.”(127)  아버지의 말은 살아있는 존재 말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인생 끌어오는 것은 작가인 런던이 설정해둔 신랄한 유머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작품에서 아버지는 창조자인 신의 위치에 놓여있다. 아들을 죽이고는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생물학,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생물체를 복제하거나 이들을 변형하는 것에 대한 원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영생이나 인간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라는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면 것이다.

 

     한편《천 번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구도에서 흔히 빠지지 않는 친부살해 모티브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개념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나트에서의 마법》에서 나트섬의 마법사 바카른과 아들 보칼 울돌라와의 대립구도에서도 중심 사건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생명을 주는 존재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의 구도는 또다시 <프랑켄슈타인> 떠올리게 해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인데, 특히나 갈등을 유발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사회적 역할에 제약을 가하거나 구속하는 측면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주는)아버지와 대립하는 아들의 갈등 구도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보면 농장주와 여기에서 착취당하는 노예 또는 좀비와의 갈등구도에 적용해볼 있을 것이다. 가넷 웨스턴 허터의 작품《노예에게 소금은 금물》에서 150살로 추정되는 크레올 노파가 이야기해주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본다. 농장의 노예들은 농장주가 없는 동안 농장주의 명령을 거스르며 주인의 샴페인과 소금을 약탈하고 건물을 파괴한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친부살해모티브의 확장이라고 있을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책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을 통해 깨닫게 것은 분명 좀비라는 대상은 (흑인 혼혈인들을 포함하여)흑인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고 있다는 점이다. 좀비 문학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라는 지리적 특징은 모두 흑인 노예들이 이동했던 지리와 일치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있는 좀비의 이미지와 다르게 좀비 문화는 사실 흑인노예제도라는 극도로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의 어두운 원체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폐쇄적이고 미신적인 이들 집단 내에서 주술을 통해 자신들이 간직한 원한이나 저주를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공간을 부두교라는 미신적 행위가 제공하고 있다. 자연현상과 유사하게 사회적 스트레스 억압 속에서 쌓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어디에서든 터져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비를 단순히 인간이 지닌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억압받아온 흑인들의 인간적 욕망이 어두운 컬트 문화로 표출된 존재 바로 좀비라고 보아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호러 작품을 수록한 <좀비 연대기> 나의 편견을 보기좋게 깨도록 해준 흥미로운 시도였다.    

 

 

 

 

인상적인 문장

어디서나 밤은 상상을 공포로 물들이는 모호함과 환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서는 밤이 유난히 강력하고 불길한 효과를 만들어낸다.”(161)

라프카디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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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 여행 중독자가 기록한 모든 순간의 여행
추스잉 지음, 김락준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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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추스잉 지음 | 김락준 옮김 | 책세상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나오는 방문지나 맛집 찾아 다니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한다면 말이다. 이런 여행을 할거면 여행 가이드를 따라다니고, 준비된 차로 이동하며 편하게다니는 것이 낫다.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따라서 타인의 추천지를 따라다니고 여행책에 나온 곳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저자 추스잉이 자주 언급하고 있는 나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여행 경험이 되려면 보다 나의 호기심과 관심사가 반영된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나는 방법을 모른다. 다만 나는 나의 관심사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여행지에서 순간 순간 나의 반응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영혼을 단련시키는 최고의 수단이다.”(44)

     저자의 발언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도 한다. 여행을 영혼의 단련이라는 거창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보는 시각보다는 여행의 과정을 통해, 그리고 이러한 체험이 나와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내게 각인되고 형성되는 자아의 성장을 발견하게 된다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행이 수단이라기보다는 과정으로서, 그리고 결과로서 나에게 주는 영향을 평가해볼 있다라고 보는 관점이 나에겐 편하게 다가온다.

     저자 추스잉의 자세한 여행 경력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전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음을 간접적으로로 확인할 있다. 여러 행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NGO단체에서 봉사하는 뿐만 아니라 잠시 친구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너는 저자는 세계를 종횡무진한다. 저자가 풍부한 여행경험을 통해 발견한 매혹적인 세계 다름의 세계였다.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문화는 저자에게 문화상대주의적인 시각을 일찍부터 일깨워주었다. ‘ 상식이 틀렸을 수도 있음 인식한다는 것은 여행을 통해 얻을 있는 매우 인생의 자양분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상대방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인정해줄 있는마음가짐으로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좀더 나아가 차이를 발견하는 경험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만들어갈 있다는 말이다.

     한가지 나의 여행 경험을 떠올리자면 내가 처음 해외 여행(물론 여행이 반드시 해외여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떠났을 , 역시 나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피부로 느낀 기억이 있다. 심지어 두려움이 들정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이국적이라함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대상에 대한 무지 반영한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에서 일정기간 정착하고 나의 삶을 이어나가기 시작하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후의 시간은 나와 다른 차이점 발견하는 시간이 아니라 놀랍게도 나와 공유하는 동질성내지는 보편성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인간의 사회에서 언어와 문화, 역사가 다르다고는 해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인간이기에 공유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저자 추스잉의 여행 경험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인간의 조건 대한 보편성을 깨닫는 경험은 여행이 아니면 얻을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행을 통한 문화의 상대성을 발견하는 저자의 경험에서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이집트의 자리앉기 상식에 관한 지적이다. 이집트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비어 있던 자리에 앉기보다는 누군가 앉았다가 방금 일어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툰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집트에서 한낮 기온이 섭씨 45도를 넘지만 사람의 체온은 그보다 낮은 36.5 수준이기에 방금 일어난 자리의 온도가 낮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운 곳에서 보다 시원한 장소나 자리에 앉으려한다는 우리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이집트라는 특수하고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다르게 전개됨을 관찰하게 된다.  다른 지역과 문화환경에서 각기 다른 현지인들이 찾아낸 생활의 지혜는 현지인들만의 것이다. 현지의 지혜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유효할 있다는 점과 현지에서는 내게 익숙한 지혜보다 현지의 지혜를 따르라는 가지 교훈을 여행을 통해서 배울 있다.

 

 

탐색하는 여행 그리고 여행 DNA

     저자가 자신의 풍부한 여행 경험을 통해 크게 할애하고 있는 부분은 여행을 통한 자신의 탐색이다.

여행 DNA 키우려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141)

     나는 여행 DNA 키우려면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저자의 말의 방점은 뒷부분이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에게 먼저 묻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상당한 여행 내공(여행 DNA) 바탕으로 물음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한 것이다.

위대한 여행은 온몸과 마음을 동원해 탐색하는 여행이다.”(160)

탐색하는 여행은 위대한 여행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여행은 자신의 열정을 한껏 표출하는 여행이다.”(165)    

평범한 사람도 내면의 열정을 따르면 위대한 여행을 있고, 세상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자기 안에 가득 채울 있다. 이때 자아를 탐구한 사람은 여행이 끝나는 동시에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사람이 된다.”(171)    

     다소 모호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자신을 탐색하는여행의 중요성에는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열정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이 여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아 탐색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다. 나에 대해 아직 무지하기 때문이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있다는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는 결국 가장 근원적인 존재() 대한 물음인 동시에 추스잉이 언급하는 여행 DNA라는 것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추스잉은 여행DNA’ 키우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자가 새긴 말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여행 DNA 잠재되어 있다라고 보는 편이 어울린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잠재되어 있는 여행DNA 발견하고 발현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탐색했던 몽테뉴 또한 고통스러운 지병인 결석을 앓았음에도 말안장에 올라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음을 상기하면 자아탐색과 여행의 관계를 연결해볼 있을 것이다. ‘만약 죽음을 생각할 위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택하겠다.’ 취지의 기록을 남긴  몽테뉴를 회의하는 정신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추스잉이 언급하는 여행 DNA’ 키우는 일은 회의하는 정신을 위한 것이기도 것이다. 자신을 회의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낯설게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말하면 자신을 일정한 거리를 의식적으로 두고 바라보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한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무궁무진한 사람은 여행DNA 풍부한 사람이라는 견해에 크게 공감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여행의 기술 정보를 찾거나 맛집을 찾고, 물건을 싸게 있는 기술이 아니다. 해외의 명소를 방문하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풍부한 여행의 경험을 있음도 알려준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호기심하나로 새로움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일상을 회복할 있다는 관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들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하는 깊은 시골에서도 여행DNA 성숙한 사람은 자연의 경이와 새로움으로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반면 여행DNA 발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아무리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이 상존하는 외국의 대도시에서 지낸다고 하더라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할 것이다. 아마도 여행DNA 성숙한 고수 중의 고수를 떠올리라면 < 여행하는 > 그자비에 메스트로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메스트르는 자신의 방에 놓여 있는 사물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여기에서 새로운 사유를 펼친다. 자신의 일상에서 호기심이라는 여행DNA 얼마나 역할을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책이라고 있다.

 

천천히 경험하는 여행을 위하여

     이제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된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또한 추스잉과 팀이 되어 후지산 기슭에서 손을 호호불며 마마차리 그랑프리에 참여한 것같다. 나도 언젠가 참여할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가져본다. 추스잉이 언급했듯이 위의 여정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승리보다 몇만 매력적이다. 달리말하면 여행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여행DNA 더욱 성숙을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탐색하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같은 끊임없는 탐색이 나를 좀더 성숙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으로 되는데 영향을 주게된다. 그리고 과정에서 여행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맛집과 명소를 찍고 돌아와서 페이스북에 올리는 여행을 벗어나서 자신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자신의 열정이 표출된 느린 여행 나도 해보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타인의 욕망이 투사된 타인의 , 타인의 여행을 하는 길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찾아나서는 여행을 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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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wland (Mass Market Paperback)
Alfred A. Knopf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The Lowland>

Jhumpa Lahiri 지음 | Vintage Books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소설이다. 굳이 익숙하지도 않은 영문 소설을 손에 넣은 것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공계 출신으로 줄곧 기술서 같은 책만 읽어오던 나에게 영문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언젠가는 읽어보겠지하는 생각만 하던 차에 읽게 나의 번째 시도였다. 어휘도 문제였지만,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읽을 있을까하는 마음과 호기심이 발동했더랬다. 읽고 나서 줌파 라히리의 문장들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보자면, 우선 그녀의 문장은 상당히 (정성이 깃들어) 계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장이 매우 간결하고 리듬감이 느껴진다는 의미에서다. 모든 문장이 그러하진 않겠지만, 소설읽기의 초보자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녀의 글쓰기 실력이 상당하기 때문아닐까. 문장이 길어져 여러 이미지(심상) 혼재되어 나타나는 장면에서 더욱 라히리의 문장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는 같다. 간결한 문장의 나열로 독자가 순간적인 이미지들을 문장을 따라가며 떠올릴 있다는 . 인상적이었다. 모르겠다. 이런 글쓰기 방식이 이미 너무도 흔한 테크닉인지는영문학 문장을 직접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에 아마도 나의 인상은 아직 성숙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강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인 작가로서 1967 생이므로 현재50세가 되었다. 그녀는 인도 북동부 벵갈지역의 후손이며 런던에서 태어난 2 미국으로 가족이 이민온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69 즈음이 것이다. 2015 7월부터 미국 프린스턴 대학 Creative Writing학부 교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같은 학부에 있는 노벨 문학상 수장자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교수와도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며, 프린스턴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던 코넬 웨스트 교수(Cornel Ronald West: 철학자, 활동가, 교수) 영향도 받지 않았을까 라히리의 문장을 읽으면서 이들을 떠올렸다. 특히 외국 열강(특히 영국) 벵갈지역의 수탈역사를 언급하며 가난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 장면은 코넬 웨스트 교수가 역설하던 세계의 가난에 대한 대담의 모습을 닮아있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지나친 비약은 아닐 같다. 

   소설에 대해 줄거리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인도 벵갈지역의 가족이 70여년 겪게되는 인생사를 담은 장편소설로서 소설 배경은 제국주의가 마무리되던 시기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른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와 지역이, 그리고 가족 개인이 겪는 인생의 모순이 그려져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영국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던 20세기 초반의 영국 특히 벵갈지역의 상황이었다. 벵갈은 인도 동북부의 지역으로서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자락 기슭에 있다고 있을텐데, 국경을 통해 네팔, 중국과 접해있다. 라히리의 묘사를 통해 나는 40 인도 대학생들에게도 종류의 공산주의 지지운동을 알게되었다.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 학생 동맹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공산당의 노선을 지지하는 마오이스트(모택동 지지자)들의 동맹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충돌, 그리고 외국세력의 권력과 질서유지를 위해 복무하던 공무원(경찰 )들에 대한 폭력적인 테러 행위 등의 배경이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이 휘말리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 확인하게 인도의 역사는 1940 국가의 벵갈지역 쌀수탈로 인하여 수많은 벵갈지역 주민들이 흉년이 아님에도 굶어죽은 일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은 인도계 미국인 교수  마두스리 무커지(Madhusree Mukerjee) 교수가 저술한 <Churchill's Secret War: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 India During World War II>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읽어보지 않았으나 영국의 수상 처칠이 일본군의 벵갈지역 침입을 우려하여 벵갈지역의 쌀수탈을 지시한 상황, 그리고 불과 1-2 만에300 (추정치) 가까운 벵갈 지역 주민들이 굶어죽게한 주요 원인이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소개를 기억이 난다. 소설에서는 물론 우리가 위인전에서 많이 보았던 처칠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훌륭한 정치인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보다 신중하게 다양한 점을 고려해야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소설로 돌아간다. 책을 힘겹게 읽으면서 줄곧 소설의 제목 The Lowland(저지대) 대해 의미를 되돌아보았다. 줌파 라히리가 묘사하는 저지대는 역사적인 성소가 아니라 소설 주인공 가족이 사는 벵갈 지역 주변의 습지대를 가리킨다. 말그대로 저지대는 우기(몬순) 비가 오면 물이 있던 웅덩이가 전체의 거대한 웅덩이가 되고 습지를 이루어 풍성한 생명을 품는 땅이다. 비가 습지를 뒤덮는 풍성하고 두텁게 덮히는 히야신스 이불은 버려진 땅처럼 보이는 저지대의 축복이다. 또한 저지대는 소설 주인공 수바쉬(Subhash) 우다얀(Udayan) 형제의 놀이터이다. 서로 다른 기질의 형제가 끈끈한 가족의 연결고리로 하나가 되기도 하는 저지대는 소설에 묘사되듯, 개의 웅덩이가 비가오면 하나로 연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곳은 우다얀의 죽음을 목격하는 장소이자, 형제의 가족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저지대는 개발의 논리에 밀려 새로운 상업타운이 들어서고, 비가오면 웅덩이가 슾지가 되어 생명이 풍성한 땅을 없는 잊혀진 땅이 되어간다. 과거에 곳에서 있었던 형제 가족이 저지대에서 만들었던 추억,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저지대의 변화와 함께 묻혀지고 잊혀지는 운명을 맞는 장소이다. 부분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볼 너무나 닮은 점이 많고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바로 굴절된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 묻혀진 역사와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주제넘은 짐작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특징으로 눈에 보이는 하나는 소설 인물들의 내면과 생각들을 드러내는 부분이 눈에 띈다. 장마다 주인공 화자가 다르며, 각자의 내면을 저자는 이들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하듯 드러낸다. 각자가 다른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과 내면을 해당 주인공에 밀착하여 바라보고 있기도하면서 어느 순간 저자는 이들과 거리를 두기도 한다. 화자의 전환과 거리 설정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우 정성들여 계산되어있다는 인상을 받으며, 또한 줌파 라히리의 글쓰기 방식이자 실력이 아닐까. 라히리의 문장은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어도 수월하게 읽혀질 것이다. 다만 작가의 섬세한 문장을 직접 영어로 읽게 부분은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소설에서 주요 인물로 나오는 형제 수바쉬와 우다얀 모두와 결혼하게 되는 여인 가우리(Gauri) 매우 중요한 존재인 같다. 어떤 면에서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캐릭터 같기도 하면서 내면을 기술하는 점은 서로가 닮아 있는 점도 느껴진다. 우리가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약속 그리고 관습을 벗어나게 되는 인물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잣대를 들이댈 있겠는가. 가우리가 역사의 희생자로서 또는 어떤 점에서는 무언가의 가해자로서 선악이나 무엇이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년의 가우리가 런던 출장 중에 갑자기 고향 벵갈 지역에 가서 자살충동을 느끼며 난간에 기대었을 드러나는 내면의 독백이 안나 카레니나가 열차에 뛰어 들기 위해 역으로 가는 도중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생각의 혼재 양상이 너무도 닮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부분은 소설의 말미에 우다얀이 총살당하기 직전 소설 화자가 우다얀이 되어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부분에도 해당된다.  

   소설은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임에도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저자의 가족이 경험했을 법한 인도 현대사의 굴곡과 잔해는 나의 가족이 경험했을 대한민국 현대사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더욱 강한 인상과 느낌을 남기고 있다. 인도 벵갈지역의 저지대는 이제 개발되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휩쓸려 사라지고 없다. 잊혀진 . 망각된 기억과 사람들이다. 비가 오면 생명을 풍성하게 품고 히아신스가 두텁게 덮이는 웅덩이는 이제 사라져버렸다. 줌파 라히리는 역사책을 써서 우리에게 잊지말것을, 그리고 우리를 계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 근현대사의 줄기 속에서 인도 가족이 겪는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역사와 이러한 희생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켜주고 있다. <The Lowland> 강렬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소설 이야기도 작가의 문장도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대상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은 직후의 느낌은 인간으로서의 인생이 덧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하고 심심한 인상이 우리 인생에서 보면, 너무나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강렬한 진실이 아니겠는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것이 소중한 것임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빨간펜으로 필사해놓은 문장이 있다.

Of the three women in Subhash’s life – his mother, Gauri, Bela – there remained only one. His mother’s mind was now a wilderness. There was no shape to it any longer, no clearing. It had been overtaken, overgrown. She’d been converted permanently by Udayan’s death.”(258)

**우다얀이 저지대에서 총에 맞아 죽는 순간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다.

For a fraction of a second he heard the explosion tearing through his lungs. A sound like gushing water o r torrent of wind. A sound that belonged to the fixed forces torrent of the world, that then took him out of the world. The silence was pure now. Nothing interfered.”(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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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울 것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글을 쓰는 작가의 결과물을 읽을 저자의 살아온 궤적이 궁금해진다. 물론 책이나 출판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나온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작가의 삶에 대해 좀더 다가가 이해한 후에 다시 읽어보면 분명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물며 에세이는 작가가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어 공개하는 글쓰기다.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는 부담감이 있을 있고, 독자는 작가의 신변잡기적인 정보와 주관적인 생각들을 엿볼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우연히 임경선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없이 최근에 출간한 에세이집 <자유로울 > 접하게 되었다. 내가 작가를 몰랐던 것은 에세이나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체를 보면 혼자 작가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같다란 상상의 나래를 펴며 작가에 대해 다가갈 있다.

 

물론 에세이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펼치는 장이기에 저자의 생각에 공감을 하게되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성실히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고 나는 우연히 저자를 새롭게 알게되어 저자의 삶의 일면을 엿보게된 무심한 독자일 뿐이다. 저자의 글쓰기와 문체는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진다. 소재의 평범성이 오히려 에세이란 장르를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해주기도 한다. 현학적이거나 화려한 문장을 써서 에세이를 썼다면 오히려 끝까지 읽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평범하고 진솔하게 써내려가는 저자의 문장들은 내가 상상하기에 저자의 삶을 많이 닮았을 것이라 느껴진다. 책에 사인을 받거나 유명세를 이후 연락을 해오는 오래전 친구들에 대한 에피소드에서도 저자의 생각들은 자신이 쓰는 문장들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쓰며 삶에 대한 성찰을 쉬운 언어로 이야기하는 저자는 여성이기 이전에 자신의 일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릴 부모님을 따라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 그리고 직장에서 일반 회사원으로서 10 넘게 살아온 경험때문이었을까, 저자는 사회나 집단이 강요할 있는 제약 속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특히나 결혼 , 결혼 번에 걸친 암치료 과정을 거치며 과정에서도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글쓰기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많은 독자들이 저자의 꾸밈없는 문장들을 따라가며 공감하게 되는지 알게된다.

 

산고의 고통과도 같은 글스기 과정을 매번 거치면서도 쓰고 나면 온몸으로 때를 그리워하는 저자도 재능 대한 고민의 흔적을 내비친다. ‘재능 대한 평가와 견해는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다. 재능은 어느 누구의 선천적, 후천적 개인사의 총체라고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동안 우리는 너무나 선천적인 영향에 방점을 찍고 그대로 수용한 나머지 후천적인 영향을 간과해온 것이 아닌가 한다. 장석주 시인은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에서 졸렬한 글이라도 있는 용기 재능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전업작가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뭔가 특별한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좋아하던 것을 꾸준히 하며 행복해하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저자가 인용한 <파이 이야기> 구절(“당장 있는 일에 집중해서 생존은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는 공감대가 된다.

아마도 여성 독자들은 작가의 생각들이 속속 이해가 잘되고 공감이 될지 모른다. 다만 저자와 비슷한 나이또래인 중년 남자로서 나는 예술가의 이야기하며 영화를 언급한 대목에서 상당히 공감을 하게 되었다. < 블루Born to Be Blue>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그것인데, 영화 모두 에단 호크가 나오고 예술가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였다. 저자는 영화를 이렇게 보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예술가의 삶을 바라보는 (나와는 다른)관점에 대해 알게되기도 하였다. 온전히 저자의 견해에 공감을 하게 되지 않아도, 수긍할 있는 것은 저자가 독자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느낌은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삶에 대한 성찰을 따라가보며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이란 느낌이 주는 막연한 기대와 긍정의 기운을 이어받아 더욱 성장할 있기를 기원해본다. 내가 살아온 해를 되돌아볼 , 작가가 적어둔 구절이 떠오를 같다.

 

우리의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고 지금 내야 해야 하는 일을 찾아내 최선을 다해 하기로 한다. 어차피 시간에 걸친 승부다.” (48)

 

지금 현재, 앞에 놓인 삶에 주목하고 집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 나이들어가면서 피부로 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다. 좋아하는 일이나 희망하는 삶의 모습에 가깝지 않더라도 지금 내가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최선을 다하면서 하던 일이 새로운 기회에 요긴하게 쓰이는 경험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보면 사람의 경험치라는 , 연륜이라는 것은 전혀 무시할 없는 개개인의 지혜로 이어진다고 있다. 앞에 남아있는 시간의 무게 내가 누린 20대의 시간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저자의 삶에서 나온 솔직한 성찰은 힘을 지니고 성장하고 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있다. 앞으로 5 , 10 경험치가 달라져있을 시점에서 저자의 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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