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 아프리카 코이산족 채록 시집
코이코이족 외 지음, 이석호 옮김, W. H. 블리크 채록 / 갈라파고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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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 아프리카 코이산족 채록 시집

코이코이족, 산족 지음 | W.H. 블리크 채록 | 이석호 옮김 | [갈라파고스]

 



부시맨의 구술시 한 편을 이해하는 일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역사는 우리가 좀 더 익숙하게 들어본 바 있는 흑인 노예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등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 16세기 이후 이들 국가들에 의해 수탈을 당한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주저 총균쇠에서 이 부시맨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부시맨의 구술시집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를 알게 되었다. 이 시집은 185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한 독일의 언어학자 W.H. 블리크(Bleek)가 이 부시맨들의 민담과 구술시를 채집하고 채록한 기록(부시먼 민담집 Specimens of Bushman Folklore (1911))에서 옮겨와 만든 시집이다. 시집은 얇고 가볍지만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와 문장들은 결코 가볍게 흘려버리기 힘든 고난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이 시들을 읽고 지나가기 전에 살펴볼만한 배경지식을 먼저 살펴보고 싶었다.


 

제목에 언급한 부시맨’(Bushman)은 유럽인들이 만든 인종차별적이고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부족명으로, 이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바로 북쪽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수렵채집인 및 유목민을 일컫는 용어다.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들은 때로 호텐토트(Hottentot)라는 표현과도 섞어 쓰곤 하는데, 정식 명칭은 코이산(Khoisan)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이름은 이들이 자신의 부족을 부르는 이름인 코이(Khoi)족과 산(San)족의 이름을 합해서 부르는 말이다.


 

우선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총균쇠에서 코이산족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갈무리해본다. 이들의 기원이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이들은 수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에 살던 수렵채집 부족이었던 것 같다. -서 방향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가운데 지역(열대우림) 이남에 주로 살았으며, 이들의 특징은 크게 언어적 특징(흡착음)과 신체적 특징(피부색, 머리카락, 둔부지방축적)으로 다른 아프리카 흑인들과 구별된다. 참고로 다이아몬드의 설명에 의하면 산(San)족은 소규모의 수렵채집인이었고, 보다 큰 규모의 코이(Khoi)족은 유목민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대략 2,000년 전에 코이족은 아프리카 북쪽에서 양과 소를 얻어 목축을 하며 유목민이 되지만, 농사를 짓지는 않았다고 한다.


 

코이산족의 언어적 특징은 흡착음(click)이라고 부르는 부족 특유의 발성음으로, 시집의 설명에 의하면 혀를 입천장에 붙여 내는 소리로, 혀를 끌끌 찰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일반적인 표기법은 흡착음이 있는 단어 앞에 느낌표(!)를 붙여서 ‘!이런 식으로 표기하곤 한다.

코이산족이 다른 아프리카계 흑인과 구별되는 신체적 특징은 피부가 좀 더 황갈색을 띠며, 머리카락이 더욱 촘촘한 고수머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성들은 무엇보다 엉덩이에 지방이 많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둔부지방축적’(steatopygia)라는 해부학적 용어로 알려져 있는데, 이 특징은 나중에 언급할 한 코이산족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에 영향을 주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흔히 코이족과 산족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 <부시맨 The Gods Must Be Crazy>는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산(San)족 인물들의 이야기다. 한편 총균쇠19장 에서는 현재의 아프리카가 왜 흑인 천지가 되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는데, 주요 요지는 아프리카가 원래부터 단일한 흑인만 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있던 대륙이라고 말한다. 코이산족의 규모는 수만 년 전에 비해 규모가 크게 줄었는데, 그 이유는 유럽의 백인이 오기 전에 코이산족들이 이미 농경을 하던 반투(Bantu)족에 의해 대부분 점령되고 축출되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반투족이 아프리카대륙 서쪽 지역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한 시기를 BC3000-AD500년으로 파악했다. 게다가 농사를 짓던 반투족은 이미 말라리아에 적응하여 내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코이산족은 유전적인 저항능력을 갖지 못하여 인구가 더욱 감소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유럽의 백인들은 16세기부터 아프리카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1652)에 남아공의 현 수도인 케이프타운(Cape Town)에 처음 들어왔다고 한다. 이들이 들어온 이후 코이산족들은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백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례처럼 코이산족 남성들을 빠르게 살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고, 여성들은 노예 혹은 첩으로 만들었으며, 유럽에서 들어온 각종 전염병은 이들의 인구 감소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이산족의 시집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들의 시를 읽어보면 수렵채집 혹은 유목을 하는 부족답게 태양, , , 은하수와 같은 천체와 비, 구름, 나무와 같은 자연환경,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양한 동물들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영혼까지 언급하며,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관심사와 예민한 감각, 관찰력을 보여준다. 반면 또 많은 시들에서 백인들이 코이산족에게 가져다준 고통과 수난을 짐작해볼 수 있는 시들도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코이산족에 대한 배경지식은 무엇보다 침입자 유럽 백인들의 맥락과 연결 지어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이 왜 이런 시를 노래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이다. 이 맥락에서 두 가지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백인 작가 J.M. 쿳시의 소설에 묘사된 유목민과 고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의 자연사 에세이에 등장하는 어느 호텐토트(혹은 부시맨)’ 여성에 관한 에피소드다.


 

J.M.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작가의 출신과 살아온 생애는 남아프리가 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소설의 화자는 백인 치안판사로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제국의 요새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국으로부터 군대가 파견되는데, 군대를 이끄는 졸 대령은 야만인을 정복하고 몰아내어 야만인들의 위협으로부터 문명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한다. 작가의 경험과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목민은 무엇보다 유목민인 코이(Khoi)족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졸 대령의 군대에 의해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볼과 손이 철사에 꿰인 상태로 끌려와 가혹한 대우를 받고, 쿠타를 당하며 죽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말발굽 소리보다

더 일찍

말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발사된 총알보다

더 일찍

화약 냄새를 맡게 된단다

백인 장교가 나타나리라고

우리의 피가 피워 올린 연기는

예언을 했단다

우리 피는 그걸 안단다

바로 그날이

전쟁이 시작되는 날임을

 

(...)

 

우리는 그곳에 그렇게 남았단다

온갖 피를 탕진한 채로

그 후에도 그곳에 그렇게 남아

우리 자신의 시체를 거두었단다

우리의 피는

소진되고

탕진되었고

예언의 실현을 지켜보았단다

땅이 부상자들로 넘쳐나고

죽은 우리 편 시체가 사방을 뒤엎었단다


- 시 '연기를 피우는 피',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64-65p 중에서

 


이 시에서는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졸 대령이 이끄는 군대가 요새 밖을 나가 처음 유목민들과 조우하고 전투를 치르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코이산족 생존자들의 몸에 각인되어 기억으로 남아있는 고난의 역사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세 사내는

밧줄 하나에 묶인 채로

마차에 누워

치안판사에게 끌려갔다오

마차가 달리는 동안

이튿날의 폭염 속을

달리는 동안

여인들 또한

넘어지고, 나뒹굴며

마차 옆구리에 붙어 달렸다오

더 빨리

점점 더 빨리

마차는 속도를 높였고

뒤를 따르던 여인들은

온갖 용을 다 썼지만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오

 

백인 치안판사에게 끌려온 나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오

밤늦도록 취조는 이어졌다오

한밤중이 되고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그의 부하들이

우리 식구들을 감옥에 쳐 넣고는

모두의 발을 다시

밧줄 하나로 묶었다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워

보두의 발이 한 밧줄에

묶인 채로 누워

백인 하나가 발 주변에 설치한

나무 가시에 발을 찔리며

고통을 견뎌야 했다오

(...)

- ‘그렇게 우리가 왔다오’, 87-88p중에서

 


이 시는 마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을 유목민/코이산족의 관점에서 노래한 시처럼 읽었다. 백인 군대가 유목민과의 전투를 마치고 생존자들을 밧줄로 묶어 요새로 복귀하는 과정과 여전히 밧줄에 묶인 채 요새에서 하룻밤을 나는 유목민들의 모습을 이들의 관점에서 다시 쓴 것만 같다. 시집에는 코이산족의 화자가 자연을 관조하고 노래하는 시도 실려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은 고난을 겪은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는 시다.


 

이 시집을 이해해보기 위한 또 다른 맥락은 고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의 자연사 에세이 플라밍고의 미소에 등장한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제목의 에세이는 세례명이 사르키 바트만이라는 한 호텐토트 여성의 비극에 관한 글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코이산족이 부시맨혹은 호텐토트라고 불리곤 했다고 언급하는데, 굴드는 이를 좀 더 엄밀하게 구분한다. 곧 부시맨족과 호텐토트족은 가까운 친척 관계로, 전통적인 부시맨은 수렵채집 부족을 가리키므로 산(San)족과 보다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호텐토트족은 소를 키우는 유목민이므로 앞서 언급한 코이(Khoi)족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사르키 바트만은 아마도 코이족 출신의 여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케이프타운 근처에 거주하는 네덜란드 농부의 하인이었다.


 

굴드가 기록하는 이 비극은 바트만의 주인의 형제였던 헨드릭 세자르라는 사람이 유럽에 그녀를 소개해보고자 그녀에게 영국행을 제안한 상황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말이다. 백인 집안의 하인으로 일했던 바트만은 기억력이 좋았고, 네덜란드어를 잘했으며, 영어를 약간 구사할 수 있었고,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영국행을 제안한 남자는 앞서 언급했던 호텐토트족 여성의 신체적 특징(‘둔부지방축적이라 불린 특징)을 전시하여 돈을 벌 궁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텐토트족 여인 바트만은 백인의 말에 동의하고 1810년 영국 런던에 도착한다. 백인 주인은 그녀를 전시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동물처럼 우리 안에서 명령을 하며 우리 안을 움직이고 들락거리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유럽 백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던 둔부 지방축적으로 풍성한 둔부가 성적 대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트만이 18개월 머물렀던 파리에서 기록된 그녀의 모습은 무엇보다 지적인 인간이 아닌 백인들의 동물적인 호기심에 기대었다는 점이다. 바트만은 5년간 런던과 파리 등 유럽을 떠돌며 사람들(백인 남녀)의 성적인 대상으로, ‘호텐토트의 비너스로 전시되며 지내다가 1815년 말에 파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프랑스의 해부학자 조르주 귀비에가 그녀의 생식기를 절제하여 유리병에 보관해두었다는 점이다. 스티븐 J. 굴드는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같은 유치원에 다녔던 친구 칼 세이건과 파리 인류학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로 시작한다. 그는 해부학 표본 보관실에서 이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벨이 붙은 유리병을 발견하고 이 에세이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호텐토트족 여성 바트만의 비극뿐만이 아니라, 유럽 백인 사회가 아프리카 원주민 여성을 바라본 시선이다. 그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된 백인우월주의적 시선과 인종차별적 관행을 이 에세이에서 고발했다.


 

여기까지는 줄곧 비극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는데, 이는 코이산족이 겪은 수난의 사례와 문학작품에 묘사된 이들의 역사 중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굴드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의) 초기 과학자들은 코이산족을 하등한 영장류에 가까운 존재로 보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이산족이 이제는 현대 사회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연을 착취하지 않고 이해하는 균형 잡힌 접근법을 가진 사람들로서 이들은 현대 생태 운동가들에게 모범이 된다고 언급한다.


 

여기까지가 코이산족의 시에 담긴 정황을 이해해보고자 수집한 자료들을 갈무리한 것이다.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는 코이산족이 겪은 수난의 경험과 기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상상하며 공감한 뒤에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물론 다른 시에서는 모든 사물에 깃든 생명과 영혼을 노래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시들도 보인다. 100여 년 전에 채록된 이 시를 통해 백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시선과 고난의 역사,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성의 모습을 시 한 줄 한 줄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읽기 경험이었다.


스티븐 J. 굴드 플라밍고의 미소에 수록된 삽화. 1812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풍자화로, '전시'되고 있는 호텐토트의 비너스를 바라보는 영국인들 비판하는 그림. 

   

그렇게 우리는 말발굽 소리보다
더 일찍
말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발사된 총알보다
더 일찍
화약 냄새를 맡게 된단다
백인 장교가 나타나리라고
우리의 피가 피워 올린 연기는
예언을 했단다
우리 피는 그걸 안단다
바로 그날이
전쟁이 시작되는 날임을

- 시 ‘연기를 피우는 피‘,
-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64p)

우리는 그곳에 그렇게 남았단다
온갖 피를 탕진한 채로
그 후에도 그곳에 그렇게 남아
우리 자신의 시체를 거두었단다
우리의 피는
소진되고
탕진되었고
예언의 실현을 지켜보았단다
땅이 부상자들로 넘쳐나고
죽은 우리 편 시체가 사방을 뒤엎었단다

- 시 ‘연기를 피우는 피‘,
-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65p)

그렇게 세 사내는
밧줄 하나에 묶인 채로
마차에 누워
치안판사에게 끌려갔다오
마차가 달리는 동안
이튿날의 폭염 속을
달리는 동안
여인들 또한
넘어지고, 나뒹굴며
마차 옆구리에 붙어 달렸다오
더 빨리
점점 더 빨리
마차는 속도를 높였고
뒤를 따르던 여인들은
온갖 용을 다 썼지만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오

- 시 ‘그렇게 우리가 왔다오’ (87p)

백인 치안판사에게 끌려온 나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오
밤늦도록 취조는 이어졌다오
한밤중이 되고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그의 부하들이
우리 식구들을 감옥에 쳐 넣고는
모두의 발을 다시
밧줄 하나로 묶었다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워
보두의 발이 한 밧줄에
묶인 채로 누워
백인 하나가 발 주변에 설치한
나무 가시에 발을 찔리며
고통을 견뎌야 했다오

- 시 ‘그렇게 우리가 왔다오’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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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9-07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나마 바트만의 시신은 2002년에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인종동물원이야기도 생각나고. 시가 처절하고 슬퍼요 ㅠ

초란공 2021-09-07 09:05   좋아요 1 | URL
거의 두 세기가 지나서 귀향한 셈이네요 ㅜㅜ 모든 시가 슬프지는 않지만 유독 이미지가 남아있는 시들이 있네요.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페크pek0501 2021-09-07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제목이 참 좋네요.

여러 작가를 언급하며 쓰신 글을 읽으니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글은 자기가 아는 만큼 쓴다.‘
멋지십니당^^

초란공 2021-09-07 12:17   좋아요 3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경우는 ‘쓰고 나서 알게 되었다‘가 더 맞을 듯 합니다~ ^^;;

초딩 2021-09-07 1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입니다요 ㅎㅎㅎ
부시맨 한글로는 안 와닿았는데
Bush man 이라고 하니 덤블 사람 이니 비하했군요
영국인들이 타민족을 제대로 대한적이 있는지 참 애휴

초란공 2021-09-07 23:09   좋아요 3 | URL
저도 그동안 사회에서 당연하게 쓰이는 표현들에 당연하지 않은 사연이 잇다는 걸 생각해본 기회가 되었네요.. 시 한편 읽어보면서요~

그레이스 2021-09-08 0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호텐토트의 비너스 전시에 대한 기록 읽었었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의 무지와 잔인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도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
에스키모가 겪었던 일들도 생각나네요.

초란공 2021-09-08 08:25   좋아요 3 | URL
최근에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어보니까 사람이 대상에 대해 ‘무지‘해서 잔인해질 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에스키모나 이누이트 등의 경우도 한 편으로는 환경 오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영문도 모르고 말이지요.

scott 2021-10-0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축하!!
별들은 10월에도 수근~수근~ㅎ
주말 행복하게 보내세요. ^ㅅ^

mini74 2021-10-08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고 글도 좋고. 당선도 좋고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10-08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엔 시, 별,,,,
축하합니다 ~^^
 
미루고 짜증 내도 괜찮아 - D. H. 로런스와 씨름한 날들
제프 다이어 지음, 이한이 옮김 / 주영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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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

: Out of Sheer Rage

제프 다이어(Geoff Dyer) 지음 | 이한이 옮김 | [주영사]

 



끊임없이 방랑하고 방황하며 로런스에 다가가는 작가의 고백

 


몇 년 전에 우연히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고 나서 단번에 제프 다이어(Geoff Dyer)라는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 이 에세이에 나오는 한 장면인 고대 유적지의 한 복판에서 폐허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에 매료되었더랬다. 그리고 묘사가 무척이나 사진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제프 다이어는 지속의 순간들에서처럼 본격적으로 사진에 대해 글을 썼던 작가였다. 이후 지속의 순간들를 비롯하여 제프 다이어의 책을 더 찾아보았고, 재즈에 관한 글을 파격적인 형식으로 써내려간 그러나 아름다운과 같은 책도 만났다. 다만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와 같은 소설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아직 부족해서이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영국 문학의 르네상스인’, ‘국가적인 보물이라고 불리는 이 작가의 지적이고 자유분방한 에세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다이어의 책이 나오길 계속 기다린다.


이번 여름에 만난 다이어의 책은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 제프 다이어는 영국 소설가 D.H. 로런스에 관한 연구서를 쓰기로 마음먹지만 도대체 언제 시작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이어의 글쓰기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에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에 끌렸던 이유는, 로런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언젠가 읽다가 멈추었던 무지개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대단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제대로 로런스를 읽어본 적은 없는데,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을 때 로런스가 쓴 미국 고전문학 강의라는 책에 수록한 모비 딕 서평을 읽어본 것이 다였다. 로런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가 강하게 배어 있는 모비 딕비평을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면서도 그가 모비 딕과 멜빌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고 주목했는지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프 다이어는 로런스가 미국 고전문학 강의에 쓴 비평문에서 상상력 있는 문장을 썼다고 극찬하기도 한다.


코로나 유행만 아니었다면 여름 휴가지에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을 들고 갔어도 무척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이유는 다이어가 로런스 연구서를 쓰는 과정이 독자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무척 재미있고 때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무척이나 산만하고 한 곳에 진득하니 머물러 있질 못한다. 끊임없이 연구서를 쓰기 위한 완벽한 장소를 찾아다니지만, 지금 살고 있고 단지 거쳐 가는아파트를 나갈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하는 지독한 결정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인이 자신의 별장에 다이어를 초대하지만, 풍경이 너무나 완벽해서 글쓰기에 좋지 않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결국은 멍 때리다가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애인과 차를 타고 다니다가 차 사고를 내기도 하면서 결국은 회복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 책은 장의 구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마치 다이어의 산만한 머릿속 상태를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연구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또 끊임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글을 쓰는 대신 다른 일로 그 시간을 채우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는데 선수다. 휴가지에서 혹은 집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제프 다이어가 어떻게 시간을 낭비하고 소일하는지를 마치 옆에서 보는 듯 재미가 있다. 여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소 수다스럽다고 느껴지는 작가의 변명과 엉뚱한 생각들이 쉬지 않고 지면으로 침투한다. 이것이 영국식 유머인지는 모르겠지만, 빌 브라이슨이나 마이클 부스가 보여주는 식의 유머도 보이긴 한다. 무엇보다 읽는 데 크게 부담이 없어서 좋다.


또 다이어의 독특한 로런스 연구서 쓰기 프로젝트에 관한 기록이 참신하게 다가오는 것은 다이어가 로런스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태리 이글턴 같은 문학 비평가들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한다. 이들의 문학 이론을 쓰레기라고 말할 정도로 다이어는 문학에서 이론을 앞세우는 행태에 거부감을 갖는 듯하다. 대신 그는 로런스의 서간문을 무척이나 좋아하기에 여기에서 상당한 문장을 인용한다. 따라서 다이어는 작품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로런스 연구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로런스라는 인물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기반으로 사람에게 점차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로런스 역시 끊임없이 살 곳을 옮겨 다녔다는 점, 가구는 살 곳에 맞춰 매번 새롭게 고치거나 만들어 썼다는 점도 언급한다. 다이어는 로런스의 생가와 이탈리아에서 잠시 살았던 집 등을 방문하면서 로런스라는 인물에 조금씩 다가간다. 어떤 면에서는 다이어가 심지어 로런스를 점차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인상마저 준다. 아니면 다이어과 로런스에는 공통점이 많았거나. “나는 어디서든 이방인이고, 오직 모든 곳이 내집이다.”라고 했던 로런스처럼 말이다. 특히 다이어나 로런스 모두 노동자 가족의 자녀로 다이어는 아마도 귀족 출신의 작가들보다 더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이어와 로런스 모두 노동자 집안 배경에서 나온데다, 끊임없이 글쓰기를 미루고, 살 곳을 찾아 부단히 옮겨 다닌 것을 보면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극심한 결정 장애가 있는데다 부단히글쓰기를 미루면서도 로런스 연구서를 쓰기주변을 방황하듯 맴도는 모습에다 불쑥 밀고 들어오는 생각들을 새로운 기대와 함께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로런스라는 인물에 좀 더 가까이 가게 되어 그를 보다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이게 다이어의 글쓰기가 지닌 장점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다이어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렇게 산만한 와중에도 그가 어쩌다 던지는 한 마디에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타오르미나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내 인생이었다.” (84)


 

인생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음료를 찾는 것이다.”(98)


 

코로나로 여행 가기 힘들어졌지만 로런스 연구를 위해 끊임없이 방랑하고 방황하며 좌충우돌하는 제프 다이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아쉬움을 대신해본다.



"타오르미나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내 인생이었다." (84)

"인생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음료를 찾는 것이다." (98)

"글쓰기란 그런 장면에 흠뻑 잠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는 일이다." (125)

"나는 어디서든 이방인이고, 오직 ‘모든 곳이 내집‘이다." (129)
- D.H. 로런스의 말

"읽을 만한 로런스의 편지가 더 있기를 바라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로런스 연구서를 쓰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완벽한 핑계가 되어서였다." (144)

"이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이 책의 진짜 주제, 내가 쓰는걸 회피하고 있는 그 주제는, 바로 절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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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멜빌 탄생 202주년: 멜빌의 의식 내면을 들여다보기


 

더위의 한 가운데에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81일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 181981일 생이므로 오늘은 그의 탄생 202주년 되는 날이다. 매년 한번 씩은 모비 딕을 읽어보려 한다. 작년에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일러스트 모비 딕을 읽어보았으므로, 올해는 다시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아셰트 클래식 모비 딕을 읽어볼 계획이다. 오늘은 중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읽고 정리해본다.


몇 년 전에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는 난감하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다. 이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걸까, 짧은 소설임에도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해 보였던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번역자 공진호의 해설을 우연히 펼쳤다가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었다.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프로테우스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이 각종 이데올로기를 표방할 잠재성을 품고 있지만, 어느 한 가지를 주장하며 그것이 전부인 양 취급하면 곤란하다.”(106)


 

번역자의 도움말을 읽는 순간 아차 싶었다. 모비 딕에서도 독자들이 각자 나름의 읽기로 해석하고 발견한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들이 있지 않았던가 싶었다. 멜빌이 글을 쓸 때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음미하듯다루었다는 역자의 설명과 함께 용기를 내어 다시 필경사 바틀비를 읽어보았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내 해석이 옳고 그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이다. 말하자면 벽이 둘러쳐진 거리인데, 지금의 뉴욕은 과거에 유럽에서 이주한 네덜란드 인들이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렀던 곳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원주민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벽이 바로 지금의 맨해튼의 다운타운을 동서로 막았던 장벽이었던 셈이다. 19세기에 인종 문제/백인 우월주의적 시각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허먼 멜빌이 이 소재에 주목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스스로를 초로에 든’ 60세 가량의 변호사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틀비는 화자가 고용한 필경사였다. 문제는 바틀비가 필사 작업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면서 고용주인 화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시작하면서 표면화되었다. 바틀비가 필사한 필사본을 검증하는 작업에 바틀비가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화자가 심부름을 부탁하거나 다른 직원의 의견을 들으며 바틀비를 압박해도 얼굴은 아무 생각 없는 듯 태연했고, 회색 눈은 흐릿하게 가라앉은상태로 모든 지시를 거부하고 있었다. 화자를 비롯한 사무실의 직원들도 당혹감을 느끼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도대체 왜?’냐고 물으면 대답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돌아올 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38) 도저히 합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길이 없는 상황이다.


화자인 변호사는 쓰라린 당혹감으로 바틀비의 거부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바틀비를 피해 본인이 나가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사무실을 이사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전 사무실 건물에 나타나 배회한다는 건물주의 불평을 들으며, 화자는 손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급기야 건물주는 바틀비를 부랑자로 몰아 맨해튼의 유명한 교소도인 툼스구치소로 보낸다. ‘툼스(tombs)'는 구치소의 별칭이었는데 섬뜩하게 무덤을 의미한다. 곧 이 구치소의 이미지는 죽음과 이어지고 있었다.


바틀비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자는 바틀비를 면회하러 구치소로 간다. 다소 속물적이기도 했던 화자는 바틀비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구치소 조리장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좋은 식사를 대접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하지만 바틀비의 대답은 나는 오늘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구치소에서 식사까지 거부한다.


화자가 바틀비를 또 다시 방문했을 때, 그는 굉장한 두께로 둘러친 벽에 갇힌 안마당에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식사를 거부하던 바틀비는 눈을 뜬 체 사망한 상태였고, 면회간 화자가 바틀비의 눈을 감겨주며 성경 구절을 중얼거린다. 화자는 바틀비가 항상 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가 결국 죽어간 구치소 안마당의 잔디밭을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인 듯 했다라고 언급한다.


이 대목과 관련하여 번역가의 지적이 눈에 띈다. 1851년 말, 32살의 청년 작가 멜빌이 너대니얼 호손에게 보낸 편지의 대목을 언급하는 다음 내용이 흥미롭다.

 

저는 불과 몇 년 전에야 발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씨앗과 같습니다. 삼천 년 동안 한 알의 씨앗에 불과했지만, 영국 땅에 심겨 발아하여 푸른 초목으로 성장하고는 죽어 흙으로 돌아간 씨앗 말입니다. 스물다섯 살까지만 해도 저는 땅에 심기기 전의 그런 씨앗처럼 발육하지 못했습니다.”(99)

 

이 대목에서 청년 멜빌의 고뇌를 일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1850년 여름, 집 근처로 이사 온 호손과 급격히 친해진 멜빌은 셰익스피어를 재발견하게 되고 모비 딕 초고를 비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면 개정하기에 이른다. ‘영국 땅에 대한 언급은 셰익스피어 문학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문학적으로 척박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준 전통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편지의 대목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피라미드가 다름 아닌 무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바틀비가 수감되었던 구치소 깊은 곳에 두터운 벽 속에 갇힌 잔디밭을 피라미드의 심장으로 보는 것이 이해가 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바로 구치소의 잔디밭은 죽음의 잠재성과 생명의 잠재성이 혼재한 공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하여 모비 딕의 출간(1851) 이후 평단과 대중 독자의 외면을 받은 이후 2년 반 후에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를 보면 멜빌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작가로서보다 집안의 가장이자 생활인으로서 허먼 멜빌을 들여다보면 필경사 바틀비를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멜빌이 모비 딕을 출간한 해에 그는 이제 결혼 4년차에 장남을 둔 가장이었다. 아직은 혈기 왕성하고 초기 두 편의 소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비 딕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이듬해에 차남이 태어났고, 다시 2년 후에는 첫딸도 태어났다. 생활인으로서 멜빌은 거듭되는 작품의 상업적인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멜빌이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는 돈이 나를 저주하네요!’라는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도 있었다.


여기에 185312월에 모비 딕을 출판했던 출판사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여, 초판 300부마저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이 가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을 멜빌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모비 딕이 출간된 후 2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수록된 단편집이 출간되었고, 이 소설의 뒷 부분에 바틀비의 과거에 관한 소문을 덧붙인 대목을 주목해본다. 바틀비가 워싱턴의 사서(, dead letter) 우편물 담당 부서의 하급 직원이었다는 설정이었다.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사서배달 불능 우편물을 말한다. 주소가 잘못되어 전달할 길이 없거나, 보낸 이와 받는 이 모두 이사를 가거나 사망한 경우 반송도 되지 못하는 우편물을 매년 대량으로 모아서 불에 태운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대의 평론가들은 바틀비의 모델로 워싱턴 어빙, 에드거 앨런 포, 랠프 월도 에머슨등의 동시대 작가를 언급했다고 하지만, 나는 바틀비가 멜빌이 가치관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시기에 겪었던 다양한 체험이 녹아 형성된 캐릭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틀비가 처한 상황은 벌이가 변변치 않은 가장으로서 받는 심리적인 부담감과 자신의 이상과의 불일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반감과 모비 딕과 같이 야심차게 준비한 작업에 대한 사회의 냉대에 대한 좌절감 등이 응결된 멜빌 자신의 내면 풍경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물론 바틀비가 바로 허먼 멜빌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인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그가 우주에서 철저하게 혼자라 느꼈을 법하고, ‘대서양 한복판의 난파선 조각이라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멜빌 자신의 고립감을 표현해낸 듯하다. 23세가 되던 1842년에 그는 포경선을 탔는데, 이 고립된 공간에서 폭압과 격무로 고통을 받다가 마르키즈 제도에서 탈주한 경험을 떠올렸을 법하다. 포경선을 탈출한 멜빌은 골짜기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을 타고 섬에서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직무수행을 거부한 죄로 짧게 구금된 적이 있었다. 나는 특히 이 점에 주목해본다. 이 당시의 경험을 모아 보면 바틀비가 바로 멜빌이 아니었나 싶다. 불합리하고 모순된 공간에서 합리적이고자 선택한 행동으로 그는 수감된 당시의 경험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필경사 바틀비의 한 대목과도 상통한다.

 

뭐라고!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그가 부랑자요 방랑자라고? 그가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 때문에 너는 그를 부랑자로 치부하려는 거로군.”(74)

 

결국 바틀비는 해석에 따라 이기적인 자본주의’, ‘억압적인 법률과 질서’,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변호사 화자의 지시를 거부하기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바틀비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54)

 

결국 바틀비는 사회가 강요하는 합리주의적 규범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하고, 이 선택을 고집스럽게 긍정했을 뿐이다. 물론 그 결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무덤교도소에 갇히게 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따라서 나는 필경사 바틀비가 무엇보다도 허먼 멜빌의 내면 풍경을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보고 싶다. 구치소의 벽에 갇혀 있던 바틀비는 멜빌 내면에 있는 자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당시에 멜빌이 처했던 상황까지도 고려해서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번역자가 제공한 것이므로 이번에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정리하게 된 사항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결국 작가가 처한 상황과 경험들을 이해하고 상상함으로써 작품에 보다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사항]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단어에 주목해본다. 바로 부랑자라는 단어다. 멜빌은 28세이던 1847년에 첫 소설 타이피의 속편으로 오무: 남양 모험기 Omoo: A Narrative of Adventure in the South Seas를 발표하는데, 이 오무(omoo)라는 표현이 바로 타히티어로 부랑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OMO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와의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homo를 가리킨다는 역자의 설명 때문이었다.

 

눈구멍은 보석이 빠진 반지 같았으며

사람 얼굴에서 OMO를 읽는 자는

거기서 손쉽게 M자를 알아볼 것이다.”

(신곡 연옥,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여기서 번역자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중세의 속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사람 얼굴이 이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좌우의 O는 두 눈, ‘M은 코와 눈썹 언저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세에 사람을 가리키던 이 말이, 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들어온 이들이 타히티에 전파한 단어가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타히티를 방문한 유럽인들이 오모 omo라는 단어를 쓰는 광경을 타이히 원주민들이 보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배를 타고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와서 거들먹거리던 유럽인들이 타이티 원주민의 눈에는 부랑자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자면 중세에 omo라는 단어는 조물주가 빚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근대에 들어와 타히티에서는 omoo라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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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3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비딕 파이팅이요!!! 작가정신 :-)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문장 참 좋은 것 같아요.
남들을 따라 갈 수 없지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음을 느끼는 것도 또 좋은 것 같아요.

초란공 2021-08-04 00:01   좋아요 1 | URL
<모비 딕>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이 책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반갑기도 하구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책에서 찾고 이야기하는
‘눈밝은 독자들‘이 있어서 더 즐겁지요~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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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William Trevor: Felica's Journey)

윌리엄 트레버(William Trevor) 지음 |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 회복하기


 

여행은 익숙함과의 결별로 시작하며, 여행의 본질은 경계 넘기에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길 위에선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과 낯선 환경의 긴장감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펠리시아의 여정의 작가 윌리엄 트레버가 1950년대에 아일랜드의 경기침체로 교사직을 잃고 영국으로 이주했던 것처럼, 소설 속 인물 펠리시아도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경계를 넘어 자신의 여정을 시작한다.

 

소설에는 아일랜드인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산업자본주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다. 펠리시아는 자본이 구축해놓은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가족을 돌보는 일처럼 가부장적인 규범이 여성에게 기대하고 강요해온 일까지 맡도록 요구받았다. 여기에 아일랜드와 긴장 관계에 있던 영국군에 입대한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도 외면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의 안전망 밖으로 내몰린 펠리시아는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다.

 

영국에 도착한 펠리시아가 처음 도움을 청한 사람이 힐디치다. 구내식당 매니저로 일하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그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소설이 나오기 전인 1980년대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광우병 파동이 발생했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펠리시아가 다니던 육가공 공장이 폐업한 것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광우병 파동과 함께 드러난 것이다. 힐디치가 이런 상황에서도 스테이크를 즐겨 먹는 설정은 그가 모순적이고 뒤틀린 내면을 지닌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그 앞에 가족과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부실한 사회복지제도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체 길을 잃은 펠리시아가 나타난다. 힐디치는 그녀와 새로운 우정을 꿈꾸며,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힐디치가 멀리서 펠리시아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는 장면은 그가 과거에 송장 담당 직원이었다는 설정과 편집증적 증세가 교차하며 소설의 긴장감을 더한다.

 

사실 힐디치는 어린 시절에 배신을 당하고 입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상처 받은 내면의 아이는 스스로 치유하며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그가 여성들과 정상적으로 교제하지 못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과의 우정을 영원히 지속하길 열망했음에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힐디치를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힐디치의 집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펠리시아는 트럭을 타고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내 예상을 벗어나 밑바닥 인생을 선택한다. 노숙자가 된 펠리시아는 큰 맥락에서 시장주의와 사회의 규범이 만들어낸 디아스포라다. 다만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자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노숙 생활을 선택하여 비로소 자유와 독립을 얻었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혁명가의 이름에 걸맞게 펠리시아는 살인마의 위협으로부터, 삶을 구속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며, 펠리시아는 조니를 찾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새로운 생을 얻었고, 사회가 강요하는 헛된 희망과 의미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 소설이 선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내겐 선과 악의 문제보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마지막에 펠리시아가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321) 하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명확하지 않은 양극단 사이의 연속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펠리시아는 과거 자신을 어리석었다고 생각했지만, 한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여정을 지나왔다. 펠리시아는 부조리함 속에 기울어져 있던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그녀의 강력한 회복력과 함께 보여주었다. 펠리시아의 여정은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녀는 계속 멀미를 한다. 화장실에서 어떤 여자가 말한다."(9)

"만일 자신이 다시 시작한다면 복지제도나 그곳 컴퓨터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살 거라고. 일단 서류를 작성하면 영원히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152)

"그의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뭔가를 원할 때면 잘못된 걸 얻기가 쉽다고, 그리고 때로 어머니 역시 그러곤 했다고." (227)

"우정이 끝나면 힐디치 씨는 늘 이런 식으로 고통을 겪는다. (...) 그 후로는 자신이 겪은 기억의 소멸을 자비의 선물로, 심지어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241)

"어렸을 때 번창하던 주조공장도 지나가는데, 한 시절의 번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제 아무 쓸모 없어진 마당과 삭막한 건물 외관의 검은 벽돌과 돌들뿐이다." (269)

"그는 매번 우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300)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312)

"그녀는 이제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앞을 내다볼 뿐 지난 일을 곱씹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314)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으며,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에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 그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돌아다닌다. (...)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 깃든다." (320)

"그녀는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 한다."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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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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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Bäume)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지음 | 안인희 옮김 | [창비]

 



당신은 이 삶의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자연에 대해 쓴 산문과 시를 엮은 책이다. 자연에 대한 명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주 대상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나무들이다. 손주를 둔 할아버지 헤세가 말년에 쓴 글들이 많은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실린 글에는 고향과 그리움에 대한 기억이 자주 소환된다. 이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상이 바로 나무다.


노년의 헤세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에게 나무는 우선 그 자체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자연의 무구함을 내세우는 존재’(36)였다. 인상적인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는 존재’(10)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무 안에는 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나무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이자 존재의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10)인 셈이다. 헤세에게 나무는 존재의 비밀이 발현된 증거이자 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하지만 자연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바뀌듯, 나무도 자신의 모습을 달리한다. 나무는 불변의 영원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존재다. 저자가 이 깨달음은 환기하게 된 계기는, 나무가 몇 개월 동안 꼭 붙들고 있던 잎들을 바람 잔잔한 어느 날 한 순간에 떨구는 모습을 본 사건이었다. 게다가 비바람에 늙은 고목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헤세는 나무가 주는 아름다움과 죽음, 괘락과 무상함까지도 성찰한다. 이 책은 헤세가 자연, 특히 나무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과 삶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써내려간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가 나무로부터 배운 삶의 진실은 노년에 이른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숲에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를 내면, 헤세는 늘 방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방랑자에게 모든 길은 집으로 데려가는 길, 모든 발걸음은 탄생이고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11)였음을 가르쳐 주기도 했을 테다. 떠남과 돌아옴이 삶의 순리인 것처럼, 나무도 자연의 질서를 묵묵히 따른다. 나무 역시 상실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저자는 발견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생명체의 죽음은 개별적이었다. 헤세는 쓰러진 늙은 나무를 애도하고, 상실에 대해 작별 인사를 한다. 젊은 시절의 세상이 친구로 가득했었다면, 안개 속을 걸어가듯 만년의 그는 홀로 걸어가는 자신을 자각했을 듯싶다.


만년의 헤세가 자신의 글에서 한 가지 바람을 얘기한 부분이 인상 깊다. “한번만이라도 다시 젊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구속받지 않은 채 뻔뻔하게 호기심에 차서 세상으로 떠나고, 배가 고파 길가에서 버찌로 식사를 하고, (...) 한번 더 숲의 새, 도마뱀, 풍뎅이와 조화롭게 어울려 지내는 방랑의 시간을 갖고 싶다!”(83)고 언급한 대목이었다. 그에게 방랑은 떠돌이들과 도제들의 여행방식이었다. 방랑자는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다. 길 위에서 즐거움을 맛보되,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다. 떠나온 장소, 집 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 그리고 불안마저 함께 하면서도 말이다. 방랑자는 길 위의 모든 것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순간의 즐거움을 맛보면서도 이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헤세에게 방랑의 묘미는 낯설음을 동반한 달콤함이 깃든 맛이었을 테다. 노년의 헤세는 이 방랑의 기쁨을 추억하고, 길 위에서 숲의 향기와 꽃을 누리는 경험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 한다. 언제나 방랑자로 남고 싶었을 테다.


이와 달리 헤세는 여행자의 면모를 이야기한다. 여행자란, 방문했던 장소를 해마다 다시 찾고 아름다운 광경과 작별하면서도 언젠가 또 다시 오리라고 다짐하는 수집광적 면모를 지닌 자들이었다. 향기에 취해 보리수꽃을 따는 여인들처럼 말이다. 저자의 설명이 와 닿지 않는다면, 전시회나 미술관 풍경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설치되어 있는 모든 작품을 카메라에 담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헤세의 관점에서 이들은 미술 애호가라기보다는 이미지 수집가다. 헤세가 보기에 수집광적인 여행자는 방랑자처럼 진지하게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작별할 줄 아는이들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유한성과 상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여행자들은 잃어버린 것 혹은 잃게 될 것에 대한 조바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고, 방랑자들처럼 가장 섬세한 것을 얻지도 못하게 된다.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여행자일까 아니면 방랑자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헤세가 이야기하는 여러 특징들을 고려하면 나는 영락없이 여행자였다. 순간순간 느끼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붙들고자 했다. 이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착실한 여행자처럼 언젠가 다시 그 즐거움을 느끼겠노라 생각했다. 나는 조용한 방랑의 감각을 지니지 못한 여행자였던 모양이다. ‘다시 젊어진다면, 방랑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던 헤세는 노년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이내 젊은 시절의 방랑자보다 이제는 고독하고 어두우며 고요한 길’(84)을 걸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에게 이 장면은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고 나이듦을 받아들이는 헤세의 모습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이 책은 헤세가 노년에 이르러 나무와 꽃을 바라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아름다움과 죽음을 성찰함으로써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방랑자 헤세는 신의 선물을 맛보고 즐거움을 만끽했던 추억을 되살리면서도 언젠가는 작별하게 될 자신의 삶도 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한 방랑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예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걸어갈 고독한 길을 준비하는 글로도 읽힌다. 이처럼 상실에 대한 작별인사를 준비하는 그는 여지없이 조용한 방랑의 감각을 지녔던 방랑자였다. 그럼 당신은 인생이란 길의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1] "한 그루 나무는 말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있어 불꽃이, 생각이 감추어져 있지. (...) 인상적인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나의 직분이다." (10)

[2] "나무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건축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인간에 맞서 자연의 무구함을 내세운다." (36)

[3] "글을 쓰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다시 한번만 더 그렇게 바보처럼 즐겁고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다." (43)
- 헤세가 습작으로 시를 쓰곤 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4] "손주들아, 뻐꾸기 소리를 잘 들어라, 녀석은 아는 것이 많으니 녀석에게서 배워라! 뻐꾸기에게서 즐거움으로 떨리는 대담한 봄의 비상을 배워라! 구애하는 따스한 유혹의 외침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방랑의 생활을..." (66)

[5] "보리수꽃의 향기처럼 그것(기쁨)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79)

[6] "방랑자는 모든 즐거움 중에 최고의 것, 가장 섬세한 것을 얻는다. 즐거움을 맛보는 것 말고도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79)

[7] "함박꽃도 난쟁이나무도 낙관론자도 비관론자도 옳다. 다만 나는 낙관론이 조금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낙관론의 성급한 만족감과 배부른 웃음에서 저 1914년을, 이른바 건강하다던 그때의 낙관론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 비관론자들의 일부는 조롱당하고 또 일부는 총살당했다." (104)

[8] "아름다움과 죽음, 쾌락과 무상함이 서로를 얼마나 요구하고 제약하는지 경이롭구나! (...) 자연적인 생명의 모든 움직임은 그렇듯 무상하고 아름답다." (145)

[9] "신이 인도인이나 중국인들에게서는 그리스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풍성함이지요. 신적인 것이 드러나는 이런 모든 현상방식들을 요약하려고 하면 떡갈나무나 밤나무가 아니라 ‘나무’라는 말이 가장 좋습니다." (164)
- 1955년, 헤세가 독자의 편지에 답한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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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란공 2021-06-25 00:04   좋아요 1 | URL
헛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초딩 2021-06-24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랑자 부분을 보니, 헤새의 ‘크눌프‘가 생각납니다. 그 크눌프는 헤세였겠지요? 그 책을 읽을 때는 방랑자를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어떤 얽매이지 않지만, 자신은 돌보지 않고 누군가를 위하는 크눌프만을 그렸었어요.

갑자기
방랑자는
Wander: walk or move in a leisurely, casual, or aimless way.

Roamer: someone who likes to move around and travel, especially without a clear idea of what they want to do

Vagabond: a person who wanders from place to place without a home or job.

중에 어떤 말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독일어도 궁금해졌고요.

aimless, without home 이런 부분들이 공통이긴하지만.
저는 방랑자와 여행자의 질문에서 배회자를 생각했고 그건 roamer에 또 가깝기도 한 것 같습니다.

:-) 좋은 저녁 되세요.

초란공 2021-06-25 00:08   좋아요 2 | URL
쿠눌프가 뭐지요라고 물으려다가... 검색해보니 헤세의 작품이었군요. 학창시절에 책을 멀리해서 그런지 유명작가라도 요새 새로운 작품을 알게되면 신기하기만 합니다~
헤세의 에세이에 나온 방랑자는 아마도 쓰신 의미중에 wander에 가까울 듯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