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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서구 철학계에 동양의 학자가 회자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양철학사를 꽤뚫고 있어야 하며, 서구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그 개념을 갖고 텍스트의 맹점을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20세기 이후 서양에 알려진 동양의 학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전무하지는 않다. 두 사람이 있다. 심리철학을 연구하는 재미 철학자 김재권과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바로 그들이다.
철학자 김재권은 아예 서양철학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제창한 ‘수반이론’은 심리철학계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언급될 정도이다. 김재권은 한국인이지만 서양철학의 중심으로 파고들어갔고 거기에 한 획을 그엇다고 평가받는 ‘서양철학자’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 고진은 어떤가? 그는 문학 평론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이 서양철학으로 향하면서 현실의 문제 해결을 서구의 사색 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행한 일련의 비평과 평론이 서구에 알려지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양의 철학을 바라보는 그를 서구 학계가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안가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단 대가라고 통용되기 위해서는 선배 대가의 비판을 넘어 대가들의 사상을 자기 언어로 자유자재로 풀 수 있어야 된다. 칸트에 대해서 쇼펜하워가 그랬고, 헤겔에 대해서 맑스가 그랬으며, 스피노자에 대해서 들뢰즈가 그랬다.
모두 선배 대가들의 철학을 자기 철학으로 체화하여 다시 독창적으로 전개 시킨 사람들이다. 여기에 가라타니 고진을 올려 놓을 수 있다.
<윤리 21, 사회평론>을 읽으면 가라타니가 왜 대가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칸트에 대해서 쇼펜하워가 그랬던 것처럼 가라타니는 칸트의 윤리학을 통해 그 자신의 문제의식을 해결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21세기에 가라타니가 화두로 들고 나온 것이 ‘윤리’라는 사실이다. 헌데, 그 윤리가 한 물 간 것으로 평가되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대 윤리학의 지배적인 위치는 공리주의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윤리학계의 다수설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21세기에 칸트의 윤리를 들고 나온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특수한 상황이 초래한 저자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자가 칸트의 윤리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수년 전부터 나는 전쟁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 때 나는 칸트의 『비판』이 지금도 가장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논의의 출발점은 책임이다. 어떻게 전쟁 책임을 지울 것이냐의 고민이 일본의 상황과 맞물려 자유와 책임의 문제로 심화된다. 논의는 간단하다. 자유 없이는 책임도 없다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인 논의의 차원으로 넘어가기 앞서 가라타니는 현실문제의 윤리적 양상을 짚는다. 고베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면서 아이의 잘못을 왜 부모가 책임을 지고 자살하느냐를 반문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가 사과하며 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가라타니는 그것이 잘못됐으며 비윤리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부모가 아이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순간, 그 아이의 자유는 없고 따라서 그 아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논리 전개는 그대로 천황의 전쟁책임론으로 이어진다. 태평양 전쟁은 천황이 일으킨 전쟁이다. 천황이 모든 명령을 했고 그 밑의 군사들은 그 명령을 이행한 것 뿐이다. 따라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천황인데, 천황이 책임에서 제외되니 ‘일억총참회’라는 어정쩡한 주장이 나오게 된다.
가라타니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일본에서는 개개인이 과거를 알고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은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최고 책임자의 책임을 물은 뒤에야 비로소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책임 및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51)
일본에서는 왜 이러한 현상이 빈발하는가? 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을 혼동하여, 철저히 원인을 밝혀내는 것을 철저히 책임을 묻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라타니는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원인은 철저하게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 문제와는 구별해야 한다.”(p40)
왜냐하면 “어떤 사건에 관해 원인을 아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실천(윤리)의 문제”(p53)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인을 묻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반면, 책임을 묻는 것은 항상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영역과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타니는 책임질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가라타니는 자유의 형이상학적 탐구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제3 이율배반으로부터 시작한다.
◆ 정명제-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것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이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인과성이 아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 반대명제- 무릇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생겨난다.
정명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반대명제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 두 이율배반적 명제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시도한다. 두 명제를 인식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스피노자-마르크스 계열의 구조론적 인식하에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우리의 행동을 보면 모두 원인이 있다. 개개인이 자유의지로 결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pp55-56)
"예컨대 아이가 다마고치나 포켓 몬스터를 갖고 싶어할 때, 자신의 자발성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남들이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타자의 욕망 혹은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지 자유(=자기원인)은 아닌 것이다." (p96)
한편, 가라타니는 인간에게 자발적인 자유가 있다는 것을 칸트의 정언명법으로부터 도출한다. 하지만 이 의무가 공동체의 의무(=도덕)로 봐버리면 다시 스피노자적 결정론으로 빠지기 때문에 가라타니는 이 의무를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윤리’라고 명명한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즉 그것은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명령이다.” (p71)
가라타니는 이렇게 인식의 영역은 결정론, 윤리의 영역은 자유로 대응시킨 후, 이 양자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식대상이며 동시에 하나의 윤리적 판단 대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요컨대, 칸트의 의무, 그러니까 정언명법을 저자는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에야 두 명제가 양립하게 되고, 칸트가 의도했던 게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과 윤리를 키에르케고르의 구분법을 차용해 양자의 개념이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자유와 책임 문제를 검토한 후(전쟁의 세기에 대한 마침표) 가라타니는 마지막으로 ‘존재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건드린다. 바로 ‘죽은 타자’와 ‘태어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의무이다. 가라타니는 말한다.
“뭔가 새로운 지점에 도달할 때 우리는 과거를 다시 본다. 그것은 죽은 자와의 관계 변화라고 말해도 좋다. 그 경우 죽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죽은 자가 처음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억압하고 있던 ‘타자’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p180)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조금도 완료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과거의 ‘타자’와 우리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p182)
이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도덕법칙을 견지하는 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과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미래도 역시 현재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논지이다.
“우리는 합의를 필요로 한다. 덧붙여 말하면 오히려 위기를 체험하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살아 있는 어른의 ‘행복’만을 생각해서는, 또 그들 사이의 ‘합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윤리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그 계산서를 돌린다면, 그들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p190)
‘전쟁과 혁명의 세기에 마침표를 찍고, 21세기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는 윤리 테제’라는 부제가 어울리는 <윤리21>이다. 우리 시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책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