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블로크의 유언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제게 설명해 주세요”라는 친숙하고도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마르크 블로크의 미완성 대작 <역사를 위한 변명>.
나는 이 책을 2007년 존 루이스 게디스의 <역사의 풍경>을 구입하면서 읽었더랬다. 토론회 주제 도서였는데, 책 띠지에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는 최고의 역사학 입문서!’라는 광고 카피.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오래 전에 읽었고, 게디스의 책은 토론 주제 도서이니 당연히 읽을 것이었기에, 블로크의 책만 읽으면 되었다. 그러면, ‘광고 문구’대로 주관주의 역사학자 중요 3인방의 주저들은 모두 읽게 되는 셈이다.
언제 사 두었는지조차 몰랐던 블로크의 책을 꺼내서, 게디스의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었더랬다. 번역본이 2권 있었는데, 내가 본 책은 1994년 한길사 판 이다. [다른 한 권은 한길사 숲길 시리즈 중 3번째 권(2001년 판)이다.]
그리고는 잊고 지냈다.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한데 몇 주일 전 <역사와 문화>(문학과 지성, 1983)를 읽다가 ‘마르크 블로크의 유언’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이 유언이 원 저서에 있는지 두 권의 <역사를 위한 변명>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두 판본의 역자는 서로 달랐다. 94년판 역자는 정남기 님 이고, 01년 판 역자는 고봉만 님 이다. 두 분 번역 모두 읽을 만 했고, 수록 내용도 비슷했다. 단지 94년 판에 조르주 뒤비의 ‘책 머리에’가 추가된 것 이외에는 뚜렷한 차이점을 찾지 못했다. (현재 한길 그레이트북스 판본은 01년판의 재판)
하지만 역시나 <역사와 문화>에 수록되어 있는 블로크의 ‘유언’은 없다. 이 책에만 수록되어 있는 듯하다. 이광주 씨가 편집한 <역사와 문화>는 ‘현대에 있어서의 역사인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편집된 이 책의 필자들을 보면, 유명한 역사철학자들이 즐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칼 뢰비트, 마르크 블로크, 베르너 콘체, 요한 호이징가, 베르너 케기, 스튜어트 휴즈 등 석학들의 ‘역사적 인식’을 만나 볼 수 있는 책이다.
논문식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저서 중 일부를 발췌하여 편역한 것도 있고, 소논문을 번역한 것도 있다. 한데, 여기서 마르크 블로크의 유언을 만나 본 것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 ‘서론’을 번역한 부분의 부록으로 추가된 내용이다.
원래는 <역사를 위한 변명>에 수록되어야 마땅한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빠진 듯하다. 짧은 글이기에 여기 옮겨 놓는다. <역사와 문화>가 아직 절판되지 않고 알라딘에 재고가 있는 듯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일독하시면 좋을 것 같다. 300페이지가 넘는데 6천원도 안한다.^^
마르크 블로크의 유언
프랑스에서든 혹은 외국에서든 나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의 사랑하는 아내나 혹은 그렇지 못할 경우 나의 자식들에게 그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매장해 줄 것을 부탁한다. 나는 장례식이 다만 하나의 시민다운 것이기를 바란다. 나의 가족들은 내가 다른 어떠한 종류의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때가 왔을 때 나는 친구 한 사람이 시체 안치소나 묘소 옆에서 다음의 말을 읽어 주었으면 한다.
나는 나의 육체 위에서 나의 아버지를 비롯한 나의 많은 조상들이 묻힐 때 읊어졌던 그 운율의 유태교 기도문을 읽으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나의 한평생을 통하여 나는 언어와 사상에서 완벽한 성실성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허위와 타협은, 어떤 구실이 붙든 간에,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부패의 표징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 점에 있어서 나보다 더욱 훌륭하 사람을 따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나는 다음의 간단한 말보다 더 좋은 묘비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 “DILEXIT VERITATEM(나는 진리를 사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하는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이 순간에 언제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해 왔던 신앙에 대한 어떤 정통교설의 그러한 종교양식을 행하도록 부탁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누구나 이러한 개인적 성실성에 대한 진술을, 겁쟁이의 부정과는 가장 관계가 적은 것이라고 잘못 해석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필요하다면, 죽음에 직면한 이 자리에서, 내가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기꺼이 확언하고자 한다. 나는 이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 가장 경악할 야만주의에 휩쓸린 한 세계에 있어서, 가장 높고 고결한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교가 그 뒤를 잇고 확대시킨 히브리 예언자들의 관대한 전통은, 생활과 시낭과 전쟁을 가장 훌륭하게 정당화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인종을 기초로 한 생활과 정신의 모든 그럴 듯한 공동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신앙의 도그마에 대한 한 사람의 국외자로서 나는 생애를 통해, 나 스스로가 무엇보다도 아주 단순하게 한 사람의 프랑스인임을 느꼈다. 이미 오랜 가문의 전통은 나를 나의 조국에 견고하게 결합시켰다. 나는 조국의 정신적 유산과 역사 속에서 자양을 발견했다. 실로 나는 안락함과 자유를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지닌 그 어떤 다른 나라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조국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나의 모든 정력을 그것에 바쳤다. 나는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감저들을 방해한다고 전혀 생각지 않았다. 비록 나는 양차대전에 참가하였으나 프랑스를 위하여 죽는 것이 나의 운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나의 온 성실성을 다 바쳐 선언할 수 있거니와, 나는 이제 내가 살아왔던 것과 같이, 한 사람의 프랑스인으로서 생애를 마친다.
이 말들이 읽혀지고 나면, 그 친구가, 원문을 입수할 수 있다면, 내가 참전 공로로 받은 표창장들을 읽어주기 바란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내용 파악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확고한 의지의 진정성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 드는 유언장이다. 유태인이지만 태생을 부정하지 않고 조국 프랑스인으로 죽을 수 있다는 자부심은 베르그손의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참으로 애석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더 살았다면 대작을 여럿 썼을 석학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