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한국 현대미술
정하윤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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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략적인 한국 현대미술사에 대한 책을 읽었다. 보통 미술사를 소개하는 책들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예술 사조의 변천사, 다른 하나는 작가별 통사. 후자가 미술사를 스케치하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한계는 뚜렷하다. 어느 작가를 선별하더라도 항상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기에.

 

왜 하필 그 작가인가?’ 작은 물음이 아니다. 시대사를 정리하다 보면 아주 소수의 몇 명으로 추려진단다. 내 얘기가 아니라 영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허버트 리드가 한 말이다. 중요한 건 이 작가들이 평론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 의해 선별된 작가들이라는 거.

 

이 기시감. 즉 역사는 그것을 서술하는 주체의 시각이 절대적이라는 거. 역사는 역사가들에 의해 선택된 사건만 역사서에 담긴다는 사실. ‘왜 이 사건은 중요한데 잊혀진거지?’ ‘일상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등과 같은 비판이 제기된다. (그래서 미시사(微時史)라는 분야가 생겨났는지도)

 

하지만 미술사를 작가별로 스케치한다고 할 때 이 비판은 좀처럼 피해갈 수 없다. 왜 그따위로 작가를 선별하여 미술사를 구성했느냐(왜 이 작가는 빠졌냐)는 타박. 특히 한국 미술사, 그것도 현대미술사를 정리하여 개론적으로 보여준다고 선정한 작가라면 이 비판의 십자포화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현대미술이라는 분야가 그 역사가 일천하기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를 선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도 1977년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100인의 리스트가 있고, 2009년에 한국미술평론가 협회에서 발간한 한국 현대미술가 100인의 리스트가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미술가의 범위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얼추 1910~1990년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범위라 생각한다. 그래서 위 두 리스트에서 함께 다루어진 작가라면 충분히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현대미술을 스케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최근에 읽은 <커튼콜 현대미술>(은행나무, 2019)은 현대미술 사학자 정하윤이 집필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스케치이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 30인을 다루었다. 여기 수록된 작가 대부분은 이미 일부 평론가가 출간한 작가론 저작에 포함된 작가들이다. (중복된 작가가 꽤 된다.)

 

하지만 미술사가가 집필한 책이 개인 선호도에 치우치고 객관적 평론이 아닌 인상비평으로 흐른다면 그 책에 대해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커튼콜 현대미술>은 미술사가의 작가론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은 입문서이지만 엄연히 작가론에 해당한다.)

 

정하윤은 한국현대미술의 시대를 4분 한다. 20세기 초, 해방 직후, 1970년대, 1980년대 이후로. 그리고 각 시대에 대응하는 작가들을 7~8인으로 선별하여 대략 6-12페이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다. 대표작인 도판을 제외하면 평론은 대략 A4 1~2장 사이 분량이다.

 

문제는 정하윤이 작가와 그림을 분석하는 태도에 있다. 그림에 대한 추측성 인상비평이 많다. 첫 장부터 나오는데, 고희동의 자화상을 분석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그림에 대한 분석적 비평이 아니라 추측성 서술은(p17)은 비평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이런 추측성 서술과 인상비평은 책 도처에 있다.)

 

더군다나 개인의 선호는 어찌나 그렇게 심하게 반영하는지 모르겠다. 이승택을 다룬 부분을 보면, 정말 미술사가가 작가를 이런 식으로 평해도 되는지 고소를 금치 못한다. “이승택의 작품은 짱이다!,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할 생각을!!, 작품을 보면 넋을 잃을 정도다.”(pp177-178) 읽어 보시라. 저자의 두 페이지를 압축한 글이니.

 

이런 인상비평은 책 전반에 걸쳐 있다. 논증이 필요 없는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동기를 평한 부분을 보자.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는 어떤가요? 아톰과 미키마우스는 각각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이지만, ‘아토마우스는 이동기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형상입니다.” (p.223)

 

이동기 작가의 작품을 팝 아트라 단정하지 말라는 소제목하에 예술=창조라는 말로 아토마우스를 평가하고 있다.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가 이동기 작가가 예술적으로 창작한 작품이란 것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런데 팝 아트라 단정하지 말라. 아토마우스 캐릭터를 보면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캐릭터와 본질적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겠다. 형상이 다를 뿐이지 전형적인 팝 아트다. 저자가 팝 아트라고 단정하지 말라는 논거가 창조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동기가 작품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게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그 자체에 있는 거고 그게 바로 팝 아트의 중심이자 작품 창작 활동의 근거다. 레퍼런스가 아닌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변형이나 합성 또는 패러디가 불가피하다. 그게 창작 활동 본질이기에 저자의 논거는 하나마나 한 소리다.

 

이러한 저자의 논조는 책 초반 김관호를 논한 부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저자는 작품 창조를 뭔가 처음 고안한(예컨대 절대주의 창시자 말레비치) 것뿐만 아니라 그걸 수용한 작품도 아류가 아닌 창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창작이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레퍼런스가 아닌 창작물이 되기 위해서는 원작을 변형한 나만의 방식이 있어야 한다. 그게 선배 작가 AB를 믹스한다 든지, 아니면 내게 영향을 미친 작가 그림을 내식으로 변형하는 게 창작 활동의 근본이다. 내식으로 변형이 없으면 그건 레퍼런스일 뿐이다.

 

하지만 이건 그 계열의 일부 작품일 뿐이다. 진정한 회화의 창작물(=창조)은 독창성에 있고, 이건 그 사조를 연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달려있다. 절대주의에서 말레비치, 팝 아트에서 앤디 워홀 정도가 아니면 미술에서 창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창작 활동창조를 혼동하는 듯.

 

그런데 서세옥은 논한 부분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저자는 확실히 작품의 창조가 뭔지 알고 있다.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라는 개념만 존재하던 1959년에, 몇 개의 점을 찍어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p113)

 

이 대목을 보면 작품의 창조가 뭔지 대번 알 수 있다. 전통과 규칙을 넘어선 실험 정신에 입각한 이전에 없던 형상의 창작.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창조의 본질일 거다. 그래서 서세옥을 본질에 집중한 화가라고 저자가 평한 거. 이런 것이 창작 활동으로서의 창조물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ab를 조합하여 그 장점만을 형상화한 작품이 창조가 아님은 당연하다. 한 사조라는 계열에 포섭되는 따라지 작품이다. 물론 작가의 창작품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동기의 아토마우스가 창조물이라는 건 저자의 서세옥 논의를 따를 때 결코 창조라 할 수 없을 거다. 저자는 이런 이율배반적 논의를 반성적 사유 없이 작품 분석에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책의 4부에 민중미술에 대한 소개도 나온다. 저자는 오윤과 신학철을 선정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미술은 엘리트 미술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고 말하면서(이 부분이 저자가 민중미술을 보는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 오윤과 신학철의 말을 언급하고 있다.

 

오윤은 추상미술은 엘리트 미술이라고 비판합니다. (중략)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미술이 중요하고, 단색화와 같은 추상미술은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pp198-199) “신학철은 민중이 주가 되는 미술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할 수 있다.”(p204)

 

저자는 민중미술을 통해 엘리트 미술을 극복할 수 있고 민중이 주가 되는 미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민중이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따라 이 미술 분야는 사장될 수도 있고 재평가가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민중의 범주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도외시한 채 엘리트 미술의 대안으로 민중미술의 의의를 얘기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민중가요와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분야다. 당시 민주화 물결에서 미술도 예외가 될 수 없기에 시대상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미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대학교 주변의 가투가 없어진 걸 보면 민중미술도 한 시기의 유행이었던 거다. 물론 민중가요는 노동쟁의 때 종종 들리지만, 민중미술을 하고있는 작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시대가 변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80년대 민중은 독재에 눌려 지내던 국민을 부르던 일종의 구호였다. 시대가 만들어낸 대중의 다른 표현이다. 이걸 2020년대로 끌어와 엘리트 미술을 극복할 미술 분야로 상정한 것 자체가 무리수. 예나 지금이나 미술은 엘리트 미술이고 대중과 유리되어 온 게 미술사였다.

 

단순히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난해한 현대미술보다 중요하다는 식으로 민중미술을 접근하면 민중미술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시대성을 희석시키게 된다. 또한 민중미술을 우리의 주체성 있는 미술로 자리매김하기에는 그 연속성의 한계가 뚜렷하다.

 

민중미술을 다루려면 시대의 한계와 그 특수성을 감안하여 민중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시도해야 그나마 이 분야가 나아갈 방향을 확보할 수 있는데, 저자는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자는 우리 미술의 주체성 확보를 위해 민중미술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식인데, 너무 소박한 인식인 듯하다.

 

객관성이 부족한 30인의 인상비평을 보니, 저자가 시대성을 대표한다고 본 작가가 결국에는 저자의 관심 작가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 이건 어쩔 수 없는 작가론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는 건 앞에서도 밝혔지만, 정작 박생광, 박고석, 권진규, 권옥연, 변종하, 이숙자, 이왈종 등이 빠져 있어 작가의 선택에 있어 아쉬움이 많다.

 

지금까지 책에 대한 불만만 얘기한 거 같아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책이다. 한국 미술 초보자에게 작가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림을 보고 대하는 감상 포인트는 유용하니까. 더군다나 대표작 74점의 도판은 확실한 장점이지 않을까. 여튼 한국 현대미술 입문자에겐 좋은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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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03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미술에 거의 문외한인 저는 읽을만한 것 같습니다. 들어 본 이름이 3분의 1이고 첨 듣는 이름이 나머지인데 가격도 싸네요. 미술책 거의 싼게 없는데.

yamoo 2024-12-04 14:4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이 책, 단점도 뚜렸한 책이지만, 최대 장점은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서 무척 쉽게 서술되어 있다는 거에요. 문외한이라도 30명의 작품과 설명을 보면 왜 중요한 작가인지 감을 잡을 수 있어요. 입문자들에게 최고의 입문서랄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입문자들 10이면 10이 하는 말..^^

나머지 1/3도 차차 알아가면 됩니다..ㅎㅎ

맞아요,. 이 책이 현대미술 책 칙고는 무척 싼 편이죠. 컬러 인쇄임에도 불구하고..ㅎㅎ 그래도 종이질이 일반적이라 도판의 선명함은 많이 떨어집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1 세계문학의 숲 21
헤르만 브로흐 지음, 김주연.신혜양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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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서양철학 원전 텍스트를 읽다가 보면 흐름을 놓쳐 텍스트를 다시 읽는 우를 범하곤 한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해당 부분을 돌아가 다시 읽고 한다. 그 이유는 번역이 이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 속에 담긴 개념의 비유 또는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헌데 소설 문학에도 이와 비슷한 난해한 작품들이 있다.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의 책들은 지루하고 난해한 문학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다른 작품을 읽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수고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나 베르그손의 텍스트를 읽는 것과 견줄 수는 없다. 집중해서 철학 텍스트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난해성은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니까. 조이스, 무질, 푸르스트의 대표작들은 단지 분량이 많고 서사가 지루하다는 걸 제외하면 딱히 읽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바로 헤르만 브로흐다. 이 사람의 책은 문학임에도 철학 원전 텍스트를 읽는 느낌이 강하다. 올 초 <몽유병자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76페이지까지만 읽고 잠정 보류 상태에 빠졌다. 읽으면서 흐름을 놓치기 일수였고, 도대체 서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안보였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 무엇인지 여실히 깨닫긴 했지만, <율리시스>보다 더 읽기 힘들었다. 조이스의 책들도 100페이지를 넘기지는 못했지만 지루해서 그렇지 맥락을 놓쳐 이해가 안 되어 포기하지는 않았다. 프르스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마찬가지.

 

10월에 의미 있는 독서를 해 보자고 다시 시도한 책이 브로흐였다. <몽유병자들>에 데여서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을 펼쳤다. 지난한 과정이 읽는 내내 지속되었다. 어렵게 1부를 지났는데, 이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2페이지 단위로 끊어 3번씩 읽었다.

 

진짜 더디게 읽고 있지만 이 행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브로흐만의 철학적 망상(내식으로 표현하면 그렇다는 거)’을 읽는 치명적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브로흐는 산문을 운문으로 참 잘도 표현하는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심오한 철학적 망상이다.

 

여기서 나는 망상을 내식으로 조금 그 정의를 비틀어 봤다. 네이버 사전에 나와 있는 망상과 비교해 보시라.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바로 떠올린 게 바로 망상에 닿아 있었기에.


망상(妄想, delusion) : 있지도 않은 것을 마치 사실인 양 믿거나, 논리에 맞지 않은, 논리를 초월한 생각을 하는 것. 근거가 없는 주관적 신념.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를 확장하여 현실의 모순을 구현하는 믿음.

 

니체와는 다른 철학적 아포리즘이 시적 산문으로 표출된다. 논증이 필요 없는 비유와 상징이 현재의 시공간과 교차하면서 펼쳐진다. 망상이지만 결코 소설의 개연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시공간의 상황은 단순하지만 그 찰나에 개입하는 소리에 망상의 미학이 시작된다. 시작과 끝은 항상 현재 시공간에 매인 주체로 계속 환기된다.

 

오오, 신들조차도 신성시하지 않음을 아는 신과 인간이 똑같이 품는 지각에서, 피안과 차안 사이에 팽팽히 쳐진, 불온한, 으스스하게 투명한 마령 같은 양자의 제휴에서 생겨나는 웃음, 그 제휴의 어렴풋한 마령의 영역에서 신과 인간은 만남을 이룩한다.” (p180)

 

부드러우면서도 오만하고, 마음을 녹일 듯하면서도 강압적이고, 밤의 광휘를 띠고 있으면서도 깊이 숨어 있는,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말과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영혼, 언어와 인간성의 통일그것은 마치 모든 지상의 나이를 모르는 과거의 청춘이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듯했고, 그러면서도 이미 영원히 종말을 모르는 고향으로부터의 인사였다.” (p283-284)

 

이게 알프레드 자리(또는 욘 포세)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결코 망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망상은 미학적으로 전개되면서 철학적으로 심화된다. 개연성이 없는 헛소리의 망상 같지만 다음 페이지에 그 망상이 헛된 이유가 적시되면서 의식의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문장들이 모여 아포리즘을 만들고 바로 다음 순간 전혀 다른 관념이 끼어들어 사고의 흐름을 방해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주체의 상태(감정)를 말하는 바로 귀결된다. 귀결되는 순간 다시 의식은 다른 사고를 향해 달려간다. 이러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대구와 비유 그리고 상징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따라가다가 2-3번 읽고 음미하다 보면 경탄하게 된다. 이러한 문장들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브로흐의 관념, 이러한 작품을 쓸 수 있는 브로흐의 박학다식과 사색의 깊이에 빠져 같은 페이지를 반복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한 번에 읽어 알 수 없는 의식의 흐름과 관념의 흐름을 플롯 구조에 무지막지 흩어 놓아 반복해서 읽고 줄을 치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난해하여 앞의 부분을 잊어버리는 이 지난한 과정, 이 과정을 이겨내고 획득하는 문학적 과실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읽기를 지속할 수밖에.

 

사실 브로흐는 철학을 전공했다. 심지어 비엔나 학파에까지 가입되어 있었다니 실로 놀라웠다. 하지만 브로흐는 말할 수 없는 그 형이상학에 대한 끌림을 버릴 수 없어 문학으로 전향했고, 그 결과 우리는 철학적 망상을 집대성한 이 놀라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문학적 경험을 일깨워 준 브로흐에 경의를 표하며, 우리말 읽듯이 읽을 수 있게, 이 난해한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해 주신 역자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

 

 

 

[]

1. 정말 술술 읽히는 번역본. 하지만 초집중하지 않으면 읽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희한할 정도로 난해한 문학 작품.

2. 책 좀 읽는 다는 사람들과 함께 오래 전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모인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어려운 책은 자기 독서 인생사에서 처음이라고 했는데, 읽은 느낌상 이 책을 같이 읽으면 동일한 원성을 듣게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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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25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야무님 리뷰 읽은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

Falstaff 2024-10-26 06:10   좋아요 2 | URL
난도가 좀 있지만 이 책은 읽을 만합니다. 몽유병자 생각하고 포기하지 마셔요!

yamoo 2024-10-27 17:04   좋아요 2 | URL
스탤라님, 뽈님의 댓글처럼 저도 조심스럽게 1권만이라도 권해 봅니다. 아님 2부만 읽어보심이..^^;

Falstaff 2024-10-26 0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어려운 책들 ㅎㅎㅎ
몽유병자. 읽다가 때려 치웠습니다.
율리시스. 다 읽었습니다. 책 사놓고 17년인가 27년 만이었습니다. 금속활자본이더군요. ㅋㅋㅋ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 읽었습니다. 글자만 읽었다는 뜻입니다.
특성없는 남자. 안병률 북인더갭 사장의 번역으로 2부까지 읽었습니다. 지금 3부 완역했지만 절대 3부 안 읽을 겁니다.
이 네 작품 연속해서 읽으면 모르긴 해도 정신건강학과에 적지 않은 나날 동안 입원해야 할 거 같은데요.

yamoo 2024-10-27 17:08   좋아요 1 | URL
아마도 이 리스트를 거의 모두 읽어낸 분은 제가 알기론 뽈님밖에 없습니다. 암요! 율리시스 읽고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분들 많이 봤습니다.ㅎㅎ 근데 몽유병자들을 무조건 읽어야 갰어요! 뽈님이 포기한 유일한 작품이네요..ㅎㅎ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 -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친절한 미술이야기
안휘경.제시카 체라시 지음, 조경실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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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이 분야는 정말 난해하다. 현대철학보다 더 난해하다. 그 이유는 예술품과 그 이론이 전혀 납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그들만의 세계'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절대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수께끼 같은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가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하기 때문. 형상이 없어진 현대미술은 뭘 그렸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형상과 작가의 생각을 전혀 매치할 수가 없게 된다. 물감을 정신없이 뿌려놓고 '캘리포이나 드림'이라니, 이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안내서가 필요하다. 현대미술이 왜 그렇게 어렵고 저들만의 세계가 된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걸 알려주는 입문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왜 그러한 미술이 나왔고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엇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걸 안다고 해서 현대미술의 전 범위를 잘 즐길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최소한 '빌어먹을 현대미술'이라는 욕은 하지 않게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정도이다. 감상의 시작점이랄까.


안휘경&제시카 체라시의 공저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행성B,  2017)은 현대미술 입문서 중 가장 친절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을 보고 '이게 도대체 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면 좋을 그런 책이다.


"순수미술이란 정교하게 갈고 닦은 선과 형태를 다루는 솜씨와 기술, 대가의 기교가 합쳐져 이루어지며 우리가 감탄하고 존경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지배적이다. 현대미술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몹시 언짢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장인의 솜씨가 빠져 있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중략) 사실 '이계 예술이야?' 하고 묻기 보다는 '뭔가가 예술로 변신하는 순간은 언제부터지?'라고 묻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훨씬 흥미로워 진다."(43쪽)


책을 읽고 나면 현대미술의 범위가 어디까지이고 왜 이러한 작품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게 된다. A부터 Z까지 나열된 물음에 대한 대답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감을 잡게 된다.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46-47쪽)이나 티노 세갈의 <이것은 너무나 현대적이다>(32쪽), 또는 모나 하툼의 <이물질>(130쪽)에 대해서 '그래 만초니 정도는 봐 줄 수 있는데, 세갈의 작품은 아닌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면 아주 큰 소득이 아닐까.


본문 226페이지 정도의 책을 통해 현대미술의 범위를 생각해 보고 현대미술의 역할을 상기해 볼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현대미술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작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런지 알 수 있다니, 가성비가 갑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고 '어렵다', '당혹스럽다', '잘 모르겠다'고 반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친절한 안내서다. 작가들이 던지는 화두에 대한 답을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다만 현대미술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더니즘 회화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아 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이만하면 충분히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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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9-21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 일간지를 보고 <더 기묘한 미술관>을 노트에 기록해 두었는데 이 책도 기록해 놓겠습니다. 저도 예전에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책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좋은 정보 얻어 갑니다.

yamoo 2024-09-24 14:27   좋아요 1 | URL
현대미술에 대한 안내서는 몇 종이 출간되어 있어요. 절판된 책까지 포함하면 10여종 됩니다. 현대 미술을 회화로 한정한 책도 있고 화가별 또는 시대순으오 나열한 책도 있습니다. 대체로 시대별 사조별 화가별로 묶은 책이 대부분이에요. 어떤 책은 모더니즘을 현대미술ㅇ.ㅣ 메인으로 놓고 그 전후 사조를 고찰한 책도 았습니다만....읽어본 바로는 이 책이 가장 평이하고 현대미술 전 분야 그러니까 설치나 퍼포먼스 개념미술까지 폭넓게 다뤄 현대미술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고연 예술의 범주는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돕는 책이라 입문자들에게 아주 좋습니다. 그다먼 모더니즘 회화나 추상화에 대한 내용이 좀 부실하여 그건 좀 아쉽습니다만...입문자애게 가장 적합한내용을 담고 있어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패크님도 일독하셨으면 합니다!

그레이스 2024-09-21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어 야무님 글을 보니 반갑네요~
저자 안휘경님은 안휘준교수님하고 관계있는 분은 아니신지?
갑자기 드는 생각입니다!

yamoo 2024-09-24 14:29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그림에세이 쓰고 새로운 작품 구상하느라 알라딘에 뜸했습니다~~ㅎㅎ

안휘경하고 안휘준의 관계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네요. 사실 두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지라..^^;;

감은빛 2024-09-22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대미술은 참 어렵다고 저도 느낍니다. 친한 사람이 쓰레기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이고, 지난 몇 년간 의리로 그의 전시회를 몇 차례 다녀왔는데, 저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저 쓰레기로 이런 작품을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다! 이런 판에 박힌 인삿말 외에는 다른 말은 하지 못 했어요.

yamoo 2024-09-24 14:33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올만입니다!
현대미술은 참 난해하죠. 왜 이상한? 작품만을 만드는지....평면은 왜 자꾸 산으로 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죠. 모두 모더니즘 때문이에요. 모더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현대미술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어요. 요 책은 그 안내서랄 수 있어요. 감은빛님도 일독하시고 나면 다른 말을 하실 수 있을듯해요..^^
 
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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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순간들의 무수한 지속이다. 지속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순간을 산다. 그 순간들은 우리의 몸에 각인되어 기억으로 체화되고 현재의 순간을 만나 과거의 기억들은 새롭게 현재에 개입한다.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게 삶의 속성이다.

 

이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감정이라는 부산물을 만난다. 그 감정은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억(추억)이 순간적으로 응축되어 이미지화된 실체가 감정이라는 점. 이는 삶의 단면 속에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은 이 감정을 이야기로 담는 예술 영역이다. 잘된 작품은 삶의 페이소스가 플롯 속에 오롯이 담겨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목적이고 예술이 지향하는 바라 할 것이다.

 

트레버의 마지막 단편집인 <마지막 이야기들>(문학동네, 2023)을 읽었다. 마지막 책까지 그의 작품들은 문학이 추구하는 카타르시스를 완벽히 선사한다. 단 한 작품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한결같다. 읽고 또 읽게 되며 행간을 음미하게 된다. 그런 후에 오는 아련한 마음의 황량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특이하게도 그 황량함과 쓸쓸함이 전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 현재를 살고 있다는 삶의 생생함이 단편이 끝난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 아닐지.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고독과 비애를 담은 단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근본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게 한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사고를 만나게 되거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게 상처이든 사랑이든 상실이든 우리는 그에 반응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게 된다. 어느 시점에서 점점 잊혀지지만 그 감정과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트레버의 작품들을 읽으면 그 부정적인 감정과 아픔이 아련하게 되살아나 마음이 황량해 지지만 이를 통해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삶에서 위안이라는 것을 나는 작가의 단편집을 통해 그 단어의 의미를 처음 확인하는 경험을 했다.

 

여기 실린 10편의 단편들은 모두 주옥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 <겨울의 목가>, <여자들> 등이 특히 인상적이다. 삶의 페이소스를 함축적이고 절제된 글에 담아내어 깊고 강렬한 울림을 만들어 내는 단편들이다. 마지막 몇 문장을 통해 단편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일꾼들이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선다. 붉은 타일이 깔린 바닥에서 그들의 장홧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메리 벨라는 불안감을, 그리고 어쩌면 연민을 감지한다. 그녀는 그것들을 웃어넘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그에게는 그 사랑이 그녀 의 그림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했던 방들과 장소 에 있음을 일꾼들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임을, 길고 느린 죽음이나 평범해진 사랑은 없을 것임을 일꾼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겨울의 목가, p.206)



겨울의 목가마지막 부분이다. 이 몇 줄을 통해 작가는 메리 벨라(여주)의 감정을 아주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읽는 독자들은 벨라의 생각을 읽으며 아주 깊은 사랑의 상실감에 공명한다. 그리고 앞의 이야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첫 문단을 작가가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지 깨닫고, 여주 메리 벨라의 기대감이 어떻게 상실로 이어지는 지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마지막을 첫 5문장을 통해 결말의 복선을 아주 멋지게 깔아놓는다. 이것을 처음 읽어서는 절대 알아챌 수 없다. 마지막 문장을 봐야만 안다.

 

그래서 큰 여운의 감정을 안고 다시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트레버의 단편들은 거의 모두 이러한 구조를 갖고 있다. 별 것 아닌 사건이 마지막 몇 문장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전제와 사건들은 마지막을 위한 절묘한 암시와 복선이다. 2-3번 읽으면 작가의 역량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이 돌아왔다볼품없는 사춘기에 이르러 더 거칠고, 키도 더 크고, 더 험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물건들을 돌려주러 온 게 아니었고, 곧장 걸어들어와서 피아노 앞에 앉아 그녀를 위해 연주했다. 그 음악의 미스터리는 그가 연주를 마치고 그녀의 인정을 기다리며 지은 미소 속에 있었다. 그리고 미스 나이팅게일은 그를 바라보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 깨달았다. 그 미스터리 자체가 경이였다. 그녀는 거기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이 사랑과, 혹은 천재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는 데만 너무 골몰했으니까. 균형이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p.17)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마지막 부분이다. 사실 트레버의 마지막 단편집에서 내가 제일 감명 깊게 읽은 단편이다. 작가는 불완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 자체를 노처녀와 소년 그리고 피아노를 매개로 삶의 미스터리가 하나의 경이임을 깨닫게 한다.

 

9페이지 분량이지만 작가가 두 인물을 통해, 특히 미스 나이팅게일을 통해 말 해주는이해할 수 없는 삶 자체에 대한 페이소스는 고통과 슬픔을 넘어선다. 그리고 삶을 관조하게 한다. 그러하기에 작가가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담담한 서사는 우아하고 매혹적이다.

 

윌리엄 트레버에 따르면 단편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영원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들 단편을 읽으면 삶의 진실이 폭발하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다. 압축된 서사가 주는 경이감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단편이 주는 삶의 매혹과 서사의 절제미를 맛보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사료된다.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단편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체험하고 싶은 분들에게 강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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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25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달에 현대문학 것 윌리엄 트레버, 샀어요. 거기에는 님이 인상적으로 읽으셨다는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 <겨울의 목가>, <여자들> 등이 없네요. 아쉽게도...ㅋ
보람 있는 독서 하셨네요. 좋은 소설 읽고 나면 기분이 참 좋지요.^^

yamoo 2023-11-27 09:07   좋아요 0 | URL
현대문학 세계단편선 시리즈는 정말 탐납니다. 모두 사는 건 공간 상 문제가 있어 관심 있는 작가만 사자는 결심으로 한 두 권 사서 모으고 있는데, 선별된 작품들이 모두 괜찮아 보입니다!ㅎㅎ

네, 현대문학판 트레버 단편집에는 없어요~~ 문학동네판으로 보셔야 할 듯해요..^^

새파랑 2023-11-25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레버의 함축적이고 절제된 글들은 처음에 빠지긴 쉽지 않지만 한번 빠져들면 너무 좋은거 같아요. 비교하면 안되지만 다른 단편들을 읽다보면 트레버 생각이 납니다 ㅋㅋ

yamoo 2023-11-27 09:10   좋아요 1 | URL
첨엔 읽다가 무슨 소린지 몰라 다시 읽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런 작품들이 있어요. 하지만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 트베버를 읽는 시간이 매우 귀중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다른 단편들을 읽다보면 트레버 생각이 나는 건 막을 수 없어요..ㅎㅎ
트레버와 다른 지점에서 고골의 단편은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모파상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얼른 읽어보려구요~

겨울호랑이 2023-11-25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그 부정적인 감정과 아픔이 아련하게 되살아나 마음이 황량해 지지만 이를 통해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말은 과거의 부정적으로 상처가 되어 자신에게 박혔던 감정들이 이제는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실감한다는 뜻일까요... yamoo님 말을 통해 문학을 통한 자신의 발견과 성장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

yamoo 2023-11-27 09:12   좋아요 1 | URL
네..비슷합니다. 관조하게 된다는 것이 좀더 정확할 듯해요.

좋은 문학 작품은 자신을 마주하게 하고,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 같아 계속 찾아 읽게 됩니다만...발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ㅎㅎ

자목련 2023-11-27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단편집 참 좋았어요. 야무 님의 리뷰로 한 번 더 좋음을 확인합니다!

yamoo 2023-11-27 16:54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은 이 책을 7월에 읽으셨네요. 역시 별5개....
좋은 작품은 다독가들이 먼저 알아보는 가 봅니다.
헌데, 이런 소설을 만나기 참 어렵더라구요. 10권 읽으면 1권 발견할까말까...
다행히 알라딘 마을에는 소설 다독하는 분들이 많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ㅎㅎ 그래도 제가 발굴한 작품들도 있긴한데...지금은 절판이라..^^;;
 
[세트] 바람의 그림자 1~2 - 전2권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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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성이 자자했던 <바람의 그림자>(문학과 지성사, 2005)를 드디어 읽었다이 책을 구입 한 게 2018년 정도였을 거다하도 여기저기 재밌다는 찬사가 들려 구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헌데 2023년 11월에야 완독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재밌다고 구입해 놓고 아직까지 읽지 못했던 책이 <바람의 그림자이외에도 여러 권이니 말해서 뭐하랴어쨌거나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를 너무도 재미없게 읽어서 차기작은 무조건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맞다. <바람의 그림자>는 정말 줄거리의 흡입력이 대단했다내가 가진 판본은 오래 전에 구입한 거라 1,2권으로 분권된 <문학과 지성사>판이다출퇴근 시에만 읽어 좀 오래 걸렸지만 출퇴근의 거리를 잊게 만들어준 아주 고마운 책이다.

 

헌데 내가 이 재미난 책에 별 한 개를 뺀 것은(정확히는 별3개 반번역가 정동섭의 번역이 별로였기 때문딱 읽을 수준으로 번역했는데군데군데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번역한 문장들 때문에 여러 번 페이지를 되돌려 읽어야 했다.

 

판본이 이제는 문학동네로 넘어간 듯 보여문지판 <바람의 그림자번역 투덜거림은 그냥 접는게 상책이지 않을까 한다문동판을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출판사를 갈아탄 만큼 이전 번역의 단점을 잘 커버했거니 하며 넘어간다.

 

사실 번역이 짜증난 건 사실인데이거와 거의 비등하게 좋지 않았던 게 플롯의 문제였다개연성이 너무 없었다페르민의 출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작가가 페르민의 과거 행적을 뭉겐 상태에서 보여주는 페르민의 행보는 거의 신급이다거의 모르는 게 없을 정도.

 

또한 푸메로의 보조형사 팔라시오스가 뜬금없이 다니엘을 동정하며 그를 돕는다자기는 다니엘의 친구라고이 뜬금포는 도대체 뭔지급기야 팔라시오스는 자기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기까지 한다작품을 읽으면 팔라시오스가 다니엘을 왜 돕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그 흔한 암시와 복선도 없다!

 

가장 짜증을 유발하는 플롯은 베아와 다니엘의 연인 맺기둘이 연인이 되는 과정이 너무 작위적이다작가는 두 번의 관계로 임신까지 만드는데이는 카락스와 페넬로페의 연인관계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짠 구성이다너무 어설퍼서 작가의 한계를 여실히 느꼈던 부분이다.

 

사실 플롯의 문제는 도처에 있다이 작품은 액자형식의 소설로과거 이야기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인물들 간의 관계가 미스터리의 주축이라는 거확실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그럼에도 중간을 넘어 얘가 혹시 걔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면 여지없이 맞아 떨어졌다.

 

급기야 2권을 넘어 읽으면서도 혹시 얘와 걔가 배다른 형제아니아닐 거야그러면 삼류막장 소설인데그래도 전 유럽과 우리나라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문학작품인데 설마라는 우려도 현실이 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말 이 사실을 확인한 순간 맥이 빠지며 이 작품의 문학성에 심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그래도 작가는 서사의 재미 포인트를 정확히 구사할 줄 알았다실망하고 의구심이 들 때면 어김없이 긴장감을 유발하는 사건과 떡밥으로 이를 무마시켰으니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작품은 장점과 단점이 아주 뚜렷하다그래도 단점이 아주 도드라지지는 않는다엄청난 줄거리의 흡입력으로 인해 단점은 어느 정도는 상쇄가 된다이 기묘함이는 작가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듯하다태생 상 한계가 아닐까.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아동 및 청소년 문학가로 출발하여 명성을 얻었다본작 <바람의 그림자>는 그가 처음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선 보인 데뷔작이다그래서 복선을 깔고 떡밥을 회수하는 능력이 노벨상 레벨의 작가와 비교하여 많이 딸리는 느낌. (그래도 포세 보다는 낫다!)

 

사폰은 종종 인물의 심리를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곤 하는데이게 작위적이며 좀 유치한 감이 없지 않다. “밖은 눈이 심하게 내리며 … 눈은 문관심한 듯 겁 많은 내 눈물을 가져가버렸고 나는 천천히 눈가루의 새벽 속으로 멀어져 갔다.” (341)

 

그 타원형의 큰 홀은 대형 유리창 너머에서 무너지듯 내리는 눈발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의해 상처 난 그늘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352인용된 부분에서 보듯이 작가는 인물이 상심할 만한 사건을 겪은 후 혼자 있는 시간에 심리적 상황을 기후 상황을 빗대어 자주 표현하고 있다.

 

하도 자주 등장하여 후반부에는 좀 질리는 감이 없지 않다인물의 성격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습작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이러한 인물의 심리는 좀더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학성을 담보하는 것인데작가는 이러한 면이 많이 떨어진다.

 

그리고 352쪽의 문장은 참으로 거시기 하다번역 문장 불평을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다물론 이 작품이 장르 소설의 범주에 속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으면 되는데읽다가 보면 짜증을 유발하는 부분이 주기적으로 튀어나온다.(장르 출판사가 아닌 문지다!)

 

그럼에도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와 사건의 구성은 아주 매력적이다이는 흡입력 있는 서사의 구조 속에서 큰 빛을 발하여(미스터리 스릴러물의 가장 큰 매력책장을 부지런히 넘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물론 짜증스러움과 함께특이하다재미와 짜증의 두 쌍두마차가


[덧]

1. 내가 읽은 건 문지판. 문학과 지성사판 합본 이미지가 없기에 문동판 합본 이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2. 읽은 사람들은 이미 다 읽은 책인데, 책을 지금에서야 읽어 뒷북아닌 뒷북이 됐다. 그래도 이 책에 대한 상찬이 수두룩해서 이런 리뷰도 있어야 구색이 맞추어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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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11-20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떡밥을 회수하는 능력이 노벨상 레벨의 작가와 비쿄하여 많이 딸리는 느낌. ㅎㅎㅎ
저는 장르소설에 아직 은혜를 못 받은지라 내가 싫으면 말지 하는 쪽인데 분석을 잘 하시네요. 이책 바깥에 내놔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되네요. ㅋ

yamoo 2023-11-20 18:22   좋아요 1 | URL
청소년 문학의 향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와 암시가 거의 없는 작품이랄 수 있겠습니다.

한번 읽고 바깥에 내놓아도 무방한 책..저는 그리 판단됩니다. 이 책을 읽고 바로 밀란쿤데라의 작품을 읽으면 제가 말하고 있는 지점을 바로 알 수 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