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고전의 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김만권 옮김 / 책세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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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홍신문화사 판본으로. 너무 오래돼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윤석열 정권 내내 유시민이 토론이나 유튜브에서 한 발언들로부터 얼추 기억을 되살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유론>을 꼭 한 번 더 정독해 보고 싶었다. 집에서 계속 굴러다니던 책세상 문고본(2006년판) 때문이기도 했다. 헌책방에서 1천 원에 팔기에 오래전에 구입한 건데, 스프링 제본을 했기에 책 취급을 안 했더랬다. (근데 갖고 다니면서 읽기는 편하다!)

 

눈에 밟히는 책이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유시민이 자기 인생에서 지대하게 영향을 끼쳤던 책 중 한 권이라고 해서 확인도 해볼 겸. 그런데 잘 읽히지 않는 거다. 출퇴근 이동 중에만 읽어서 그런 거 같아, 도서관 가서도 읽어 봤지만 매한가지. 결론은 번역 때문이었다.

 

<자유론>(책세상, 2006) 번역은 진짜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역자는 서병훈. 이 사람은 번역기 돌린 문장을 양산하지는 않지만 알아먹기 힘들게 문장을 구성하는 습관이 있는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사람의 행동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좌절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보다 더 나쁜 것을 동원하는 것이다.” (p155)

 

전형적인 비문(非文)인데 이걸 처음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3~4번 같은 챕터를 반복해서 읽으면 왜 가독성이 떨어지는지 파악되는 문장. 한길사의 <의미의 논리>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평균적인 독자가 읽기에는 매우 어려운 판본이 됐다. 더 이상 서병훈 역자의 책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다.

 

어쨌건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매우 힘들었는데, 4번 정독하니 책이 말하는 바가 명확했다. 밀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처음 주장이 계속 표현을 달리하며 외연을 확장한다. 주장에 대한 다양한 예시와 논거를 읽는 것도 <자유론>을 재미있게 읽는 한 방편일 듯.

 

머리말에 밀이 이 책을 쓴 이유가 적시되어 있다.

이 책은 시민의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에서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p17)

 

밀이 살던 19세기까지 이 문제는 그다지 논의되지 않았나 보다. 이를 둘러싼 토론도 거의 없었다는 밀의 전언대로, 이 논의는 당시 영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이었다. 물론 17세기에 존 밀턴이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밀은 밀턴의 사상을 수용한다.) 이를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면서 그 한계를 고찰한 학자는 밀이 처음이었다. (물론 영국에서)

 

밀이 <자유론>에서 설파하는 핵심은(책을 쓴 이유) 책의 4장에 소개되어 있다. 4장의 타이틀이 사회가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 밀은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개별성은 항상 사회가 전제되어 있다. 이를 놓치면 이 책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밀은 기본적으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논의를 시작한다. 책에서 밀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더욱이 무너져 내릴 다리(다리 후반부부터)를 건너려고 하는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의 통행의 자유(개별성)보다는 생명이 훨씬 중요하기에 개별성은 충분히 제한되어야 한다고. 이 주장은 맹자의 성선설에 닿아 있다.

 

그만큼 밀도 사람의 본성을 선하게 봤다. 그래서 개인의 생명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개별성은 사회 안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지만, 사회성의 가치가 커지면 개별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밀이 3장에서 개별성이 왜 중요한지 역설하게 된 지점이다.

 

4장의 핵심 주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초반부에 제시되어 있다.

법으로 부여받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주거나 그들의 이익과 상관있는 문제에 대해 사려 깊은 고려를 하지 않는 경우, 사회가 직접 법을 동원하지는 않더라도 여론의 힘을 빌려 그런 행동에 대해 정당하게 처벌할 수 있을 것이다.” (p142)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개별성)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거. 그런데 이는 머리말에서 이미 밀이 제시한 주장이고, 2장에서도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장을 나누고 여러 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핵심 주장은 매우 일관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p30)

 

이 주장은 4장의 핵심 주장으로 인용한 문장과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이는 2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 내용과도 상통한다. 42쪽에 언급 되어있는 내용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밀이 여느 공리주의자하고도 다른 차별적 지점을 담보한 주장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p42)

 

2장의 모든 내용은 이 주장의 논거이자 예시이다. 존 밀턴의 사상의 자유를 발전시켜 밀의 자유론을 정립한 기념비적인 주장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곡해할 여지가 많은지 밀은 이를 방어할 논거와 예시를 풍부하게 들고 있는데 그게 2장의 내용이다.

 

물론 2장은 4장의 전제이다. 생각과 토론의 자유가 없으면 개별성은 담보하지 못한다. 2장 역시 3장 개별성을 위한 전제다.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을 관통하는 주장은 2장의 저 위대한 주장이고, 이는 장을 달리하면서 변주된다.

 

나는 어느 사회든지 다른 사회를 강제로 문명화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악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들 눈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이유로, 당사자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제도를 폐기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p170)

 

밀은 계속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개별성과 그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 한계 중 특히 인간의 자유와 발전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해악들이 발생하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단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개입 활동은 집단적이고 권력 집중을 발생하게 하여 폐해가 발생하게 된다.

 

밀은 이 폐해를 최대한 적게 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저해하는 해악들을 어떤 방법으로 없애야 효율적인지 검토한다. 이게 5장의 내용이자 이 책의 목적이다. 밀은 그가 참여했던 정치적 경험을 토대로 정부의 역할을 제시한다. 이 또한 정치인들이 다루기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진단한다.

 

나는 안전한 실천 원리 실현 가능한 이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모든 제도를 검증하는 기준이 다음과 같은 명제 속에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효율성을 지키면서 최대한 권력을 분산하라, 그러나 정보는 가능한 중앙으로 집중시킨 뒤 그곳에서 분산시켜라.” (p207)

 

요컨대 밀은 개인의 개별성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성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사회성이 강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밀은 정부가 개별성과 사회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요체란 제도는 분산시키고(지방자치) 정보는 중앙집중화하는 것.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는 아주 혁신적인 정책인 듯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책은 아니다. 밀 자체가 초엘리트 교육을 받은 학자 집에서 자란 사람이라 엘리트주의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미성년자나 미개사회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 라거나 사회적 약자는 결혼을 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그렇다는 결론. 아울러 공리주의자(효율을 중시한다)라서 공리주의의 근본적 한계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론>은 지금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레거시 미디어와 가자짜 뉴스가 판치는 작금의 시대에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언론 개혁이 심대하게 요청되는 시기에 밀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생각은 경청할 만하다 하겠다. ()

 


내가 읽은 판본은 2006년에 발간한 책세상 문고 고전의 세계 시리즈다. 이 시리즈가 절판되고 새로운 시리즈로 옷을 갈아입었고, 일부 역자가 바뀌어서 새롭게 나오고 있다. 책세상본으로 지금 구매할 수 있는 책은 김만권 역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책으로 리뷰를 올리지만 읽은 책은 구판이기에 여기 덧붙여 놓는다. 김만권 번역도 가독성이 떨어지기는 매한가지라 개인적으로는 현대지성판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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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7-25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만 이런 류의 책은 읽으면 머리는 이해하고 눈은 책을 따라가지만 마음에서 깊은 분석에 따른 심도있는 공부는 어렵더라구요. 민음사판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세계문학전집 아홉번째라서 붙잡고 있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는 이유입니다

yamoo 2025-07-25 14:40   좋아요 1 | URL
음...민음사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사르트르 저작이기에 읽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자유론>은 현대지성사에서 나온 걸로 읽으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공감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예시도 풍부합니다. 철학서라기 보다는 사회사상쪽이라 그리 어렵지 않아요. 유시민 작가가 최고라고 치는 책이니 읽독해보셔도 될 듯합니다!^^

카스피 2025-07-25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유론 고전이란 솔직히 읽어볼 염두를 못냈는데 야무님 글을 읽어보니 한번 쯤 읽어봐야 될 명작이란 생각이 듭니다^^

yamoo 2025-07-25 14:41   좋아요 0 | URL
자유론이 고전이긴 하지요. 사상사 쪽 고전 치고는 읽기 수월합니다. 군주론보단 약간 정치한 면이 없지 않지만 현대지성사 본으로 읽으면 읽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사료됩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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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주 오랜만에 멋진 SF소설 한 편을 읽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SF 소설 중 최고는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이었는데, 여기에 스타니스와프 렘의 <우주 순양함 무적호>(민음사, 2022)를 동일선상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장르 소설에서 보기 드물게 인간 존재론에 대한 심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어서다.

 

이 작품이 출간된 때는 1964년도다. 60년대에 이러한 구상을 하고 이러한 외계 생명체를 설정할 수 있다는 자체가 경이롭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2025년 동시대의 작가가 발표했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련된 이야기다. 특히 행성 레기스3의 자연환경과 일체화가 된 외계 생명체는 기상천외했다. 에일리언과 같은 우주 괴물이나 UFO를 타고 오는 외계인도 아닌 자연 그 자체와 비슷한 무생물 기계가 진화한 결과물이라니.

 

소설 초반 순양함 무적호가 레기스3 행성에 온 이유가 적시되어 있다. 이곳 행성에 와서 연락이 두절된 콘도르호의 비밀을 밝히고자 온 것. 순양함 무적호는 아주 많은 전문가와 엔지니어들이 탑승한 거대 우주선(신기술의 집합체)이다. 이 우주선이 레기스3 행성을 탐사하면서 한 두 명씩 사라지거나 죽는 전반부 이야기는 어떤 행성에서 우주 괴물이 나오는 영화(에일리언)와 비슷하다.

 

우주선에 탑승했던 승무원이 하나씩 괴물에 당하여 없어지는 이야기와 흡사하다는 거. 그래서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다. 탐사를 나가면 여지없이 승무원들과 엔지니어들이 실종되거나 백치가 되어서 구조된다.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다가 점차 콘도르호를 부숴뜨리고 승무원들을 죽이게끔 하는 실체가 드러난다.

 

헌데 그 끔찍한 사고의 원흉이 에일리언과 같은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구름 모양의 알갱이들이다. 더 정확히는 구름과 암석에 기생하는 아주 작은 기계들. 소설에서는 처음에 파리를 언급할 정도로 작고 검은 둥근 기계로 묘사된다. 비정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기계 소립자. 1차원적이지만 이들은 파괴되지 않고 영원히 움직이는 자연의 일부이다.

 

이 소설의 백미는 저자 렘이 설정한 이 외계 '무생물체'에 있다. 렘은 레기스3 행성의 지배자를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구름 기계)로 설정했다. 레기스3 행성은 바다도 있고 바다에 많은 생명체가 살며 산소도 지구보다 많다. (물론 메탄이 다량 섞여 있긴 하지만) 소설에서는 바다 생명체가 육지로 올라와 번성하지 못하는 이유가 구름 기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괴상한 외계 무생물체를 무적호 승무원들은 어떻게 하면 없애버릴까를 궁리한다. 검은 구름에 휩싸이면 사람들의 지적인 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백치가 되기 때문. 왜 그런지 모르지만 백치가 될 뿐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무적호 엔지니어들과 전문가들은 이를 어떻게 퇴치할지 모색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 소설의 주인공 로한은 이 구름 기계를 생명체가 아닌 자연으로 생각한다. 없애버릴 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저자 렘은 로한을 대신해서 자연과 인간의 대비를 통해 우주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를 진지하게 되묻고 있다. 자연재해로 인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게 되면 이를 어떻게 없애버릴지 궁리하는 게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우스운 생각인지 이야기로 되묻기 때문.

 

죽은 사람에게서 레이저 총을 가져온 자신이 돌연 우습게 느껴졌다. 더욱이 무생물체만 생존할 수 있는 완전한 죽음의 계곡에서 스스로가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여태껏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의식을 치렀다. 그는 방금 일어난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공포가 아닌 경이로 받아들이면서 얼떨떨해했다. 과학자들 중 누구도 자신과 공감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한은 실종자들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서, 더불어 이 행성을 지금 상태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함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것이 모든 장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그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p316)

 

자연이 지배하는 행성에서 인간의 문명은 보잘것없고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작가 렘은 로한을 대신해서 만물 영장설(은하계 중심설)’을 비판하고 있다. 무생물체만 생존할 수 있는 우주에서 인간 존재는 극히 미미하고 우스운 존재들인데 그들이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하려고 노력한다. 렘은 모든 장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로한을 통해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비슷하거나 이해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라는뜻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 아닌 일, 즉 인간과 관계없는 사안에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우주의 빈 공간은 차지해도무방하지만, 수백만 년 동안 이미 생존의 균형을 이루어 실재하는 대상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방사력과 물질력을 제외하고 누구한테도,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이 행성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존재는, 동물이나 사람이라고 불리는 단백질 복합체와 비교해서 월등하지도, 그렇다고 열등하지도 않다.” (p253)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자연(우주) 앞에서는 한갓 우스운 사물일 뿐이다. 자연을 착취하고 정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면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음(‘콘도르호처럼)을 소설은 이야기로 잘 보여준다. 그렇게 구성이 치밀한 작품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구조 속에 인간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주제를 다시금 환기해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일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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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6-18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yamoo 2025-06-20 09:51   좋아요 0 | URL
저도 뽈님 추천으로 보게 된 작품입니다. 재미와 작품성을 모두 잡은 명작이라 칭할만합니다. 다만 구성이 치밀하지 않은 게 좀 흠입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개정4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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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인 물음으로 시작해 보자. 다음 그림은 미술작품인가?

 


이 물음에 의아함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걸 문제시한다고? 당연히 예술품이지. 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그림인데!' 맞다. 위 그림은 서구방이 그린 고려시대(1323년 작)의 불화인 양류관음도. 지금 이게 미술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고려시대의 걸출한 불화(佛畫), 고려시대 불화는 대부분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정도로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미술품이다.

 

헌데 이 작품은 원래 미술이 아니었다. 불교적 이상 세계를 염원하면서 그린 종교화(宗敎畵).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금 보고 감상하는 회화작품이 아니란 것. 종교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그림이다. 이는 11세기 인도에서 제작된 나타라자 조각상이나 림브르 형제의 <베리 공작의 귀중한 성무일과>와 같은 목적을 갖고 제작된 종교적 성물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근대가 되자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는 미술품이 되었다. 위 양류관음도 역시 미술이 되었다. 우리가 현재 일상에서 쓰는 미술이라는 개념은 근대 세계가 만들어낸 일종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미술이 아니었던 많은 종교적 성물들은 현재 미술의 세계로 포섭되었고 대부분 그 나라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국가유산급 미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현실문화, 2013)에 소개된 핵심 내용을 요약한 것인데, 이 책에는 미술이 아닌 것과 미술인 것을 나누고, 언제부터 미술이 태동되었고, 현대 미술은 어쩌다가 미술이 아닌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책의 핵심은 후반부(현대 미술)에 가 있지만 초반부 사진과 함께 소개된 이것은 미술이 아니었다는 명제와 도판은 독자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이 책은 존 버거의 <보는 방법>과 더불어 미술을 보고 이해하게 해 주는 가장 유명한 회화 분야 입문서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작은 책임에도 약 300여 개의 사진과 도판이 수록된 책이지만 가격이 착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계도 뚜렷한데, 도판이 모두 흑백이라 정확한 감상을 방해할 정도로 퀄러티가 떨어진다. 가격에 비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아쉬운 감이 많이 든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다시피 책의 전반부는 미술인 것과 미술이 아닌 것(이전에는 미술이 아니었다가 근대에 들어 미술이 된 것들)을 구분하는데 할애하고 있고, 후반부는 아카데미, 박물관, 미술사 등 근대미술의 태동과 더불어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사진 등 현대 미술 분야를 스케치하듯 서술하고 있다.

 

도판 위주로 체계성이 없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의 최고 장점은 명확한 그 메시지에 있다. 미술인 것과 미술이 아닌 것의 구분. 그리고 그것이 시대성의 산물이라는 것. 책 초반부에 소개된 미술이 아니었던 많은 것이 근대에 들어 미술로 포섭되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예술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 많은 작품이 왜 미술로 포섭되었는지 그 본질을 이해하면, 후반부 현대 미술이 왜 그렇게 난해하게 됐는지 이해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마르셀 뒤샹의 <자전거 바퀴>를 생각해 보자.(<>은 너무도 유명해서 생략) “뒤샹은 우리가 문장을 만들기 위해 단어 두 개멋진 그림이군(nice picture)’를 합친 것처럼 의자와 자전거 바퀴를 결합시킨 것이다.” 자전거 바퀴와 의자는 기성품이다. 이들의 조합은 미술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뒤샹은 무엇인가를 창작하는 것은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런 멋진 작품이 탄생한 것. 이는 모든 재현의 형태가 문화적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p218-219)

 

근대와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부분이다. 뒤샹 이전에는 이런 오브제는 결코 미술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현재에는 엄청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이 대답은 책 초반부에 미술이 아니었던 것들이 근대에 들어와 미술로 포섭되는 과정과 일맥상통하다.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현재 미술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점과 비슷하다. 시대정신이 현대의 미술을 만드는 것이다. 이게 이 책의 핵심이다.

 

미술이 근대의 발명품이었던 것처럼 현대 미술은 시대정신의 발명품이다. 그래서 에이드리언 파이퍼의 설치미술(p291), 퍼블릭 애너미의 랩음악(p286), 신디 셔면의 <무제영화 스틸>(p281), 왬의 <접근금지> 비디오(p274), 안토니 문타다스의 <기자회견장>(p250) 등의 작품이 핫한 현대 미술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난해한 현대 미술은 모두 미술이 아닌 것 같지만 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 언어가 미술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

 

도판이 많고 스케치하듯 대상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라 밀도가 떨어지는 듯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현대 미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이것은 왜 미술이 아니고, 이것은 왜 미술인지구분할 수 있다는 거. 거창한 듯하지만 매우 실용적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할 정도이다. 책이 유명한 이유가 다 있는 거라는 걸 실감한다.



* 덧

내가 읽은 판본은 2013년 판(분홍색 표지)으로 22년판과는 쪽수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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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5-17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탱화는 당연히 미술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어보니 당시에는 글을 모르는 민중들을 위해 종교적인 내용을 쉽게 풀이한 도상화가 맞단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대로 미술이나 예술은 시대에 따라서 그 정의가 변화되는 것 같은데 임란당시 국사발 간장종지등으로 조선에서 쓰였던 백자 그릇이 현재는 일본에서 국보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잘 알수 있지요^^

yamoo 2025-05-17 09:52   좋아요 0 | URL
이 책은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미술‘이란 건 근대의 발명품이고, 현대 미술은 현대의 시대정신이 발명한 거라는 거.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언제 미술로 포섭됐는지 그 지점을 이해하면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것이고, 이 책은 이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책인듯합니다. ^^

페크pek0501 2025-05-1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그 시대의) 반영은 미술에서도 다르지 않네요.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말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 떠오르네요. 그 시대의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저는 짚게 되네요.^^

yamoo 2025-05-20 10:26   좋아요 1 | URL
미술에서 평면 회화 건 입체 건 간에 시대를 작품에 담는 게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걸 공모전에 내면서 알게 됐습니다. 화풍이나 재료의 중요성은 그 다음이더라구요. 형상이 별로인 작품도 시대성을 잘 담으면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조형 미술의 세계인듯합니다..ㅎㅎ
 
그니까 미술 작가가 뭐냐면 - 그림 그리기부터 전시, 작품 판매까지 미술계에서 아트 작가로 살아가는 법
이계진 지음 / 더디퍼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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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니까 미술작가가 뭐냐면>(더디퍼런스, 2024)이란 책을 읽었다. 나도 초보 작가 나부랭이이기 때문에 미술작가에 대한 안내서는 눈에 띄는 즉시 구입하여 읽는다.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인 이계진은 30대 초반의 신진 작가이다. 이 책 역시 미술작가의 저작이기에 누구나 미술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탕발림으로 시작한다. 왜 그런지 몰라도 작가들(특히 미술!)은 누구나 미술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미술작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는 책인데, 이거 괜히 사서 읽었다. 서점에서 넉넉잡고 3시간이면 초보 작가에게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책이다. 그냥 블로그에서 A4 4장 정도로 깔끔하게 초보 작가에게 필요한 정보를 안내하면 됐지, 이런 책은 왜 냈다 싶다. 다 읽고 돈이 정말 아까웠다.

 

책 겉표지 안내대로 이 책은 그림 그리기부터 전시, 작품 판매까지 안내되어 있긴 한데, 매우 피상적이다. 미술계에서 아트(art) 작가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는 책치고는 밀도가 많이 떨어진다. 단체전이나 개인전 한 번 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면 건질 게 별로 없는 안내서다. 정말 이제 막 전시를 한번 해 볼까하는 사람이 보면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7장까지 구성되어 있는데, 1-2장까지는 미술의 기초, 즉 자기가 미대 입시 준비했던 이력에 대한 내용(미술 기초는 중요하다!)이고, 3-4장은 그리는 방법과 그림 감상하는 방법에 대한 기본 안내이다. 미술작가가 되기 위한 기초 안내 정보. 이런 내용은 유튜브만 봐도 얼추 알 수 있다. 미술 기본기에 대한 정보와 그림 감상법에 대한 정보는 이 책의 내용보다 좋은 유튜브 영상이 널렸다.

 

이런 류의 책, 그러니까 신진 작가가 예비 미술작가에게 자기의 경험을 알려주는 내용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정보가 이 책에는 빠져있다. 즉 초보 작가가 어떻게 창작하고(주제와 대상을 어떻게 선정하고), 공모전이나 레지던시에 어떻게 하면 선발되는지 그 생생한 경험담이 빠져있다는 말씀. 물론 전시계획서를 어떻게 쓰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에는 대관 전시와 공모 전시 그리고 개인전을 열기 위한 과정을 알려주긴 하지만 공모 작가 선정 방법이나 레지던시 선정 방법의 노하우 정보가 통째로 빠져있다.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없다는 사실. 개인전을 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데, 비용을 보조해 주는 협회에 어떻게 준비해야 선정되는지가 빠져있다는 말. 그냥 어디서 지원금 준다더라는 정보가 전부다.

 

물론 저자는 무료로 개인전을 할 수 있는 공모전이나 개인전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해 주는 미술 단체에 선정된 이력이 꽤 된다. 그렇다면 어디 어디서 이런 공모전이 있고 이런 보조금을 주는 단체가 있는데, 여기에 선정되려면 이러이러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방법론을 왜 빠뜨렸을까?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렇게도 새새하게 나열하면서 왜 가장 중요한 선정 노하우는 왜 쓰지 않았을까? (정말 괘씸한 부분이다)

 

핵심 노하우가 없는 안내서는 읽으나 마나 한 책이다. 한마디로 돈을 벌 수 있는 자게서에서 자기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핵심만 쏙 빼고 나머지 부가적인 것들만 열거해서 자신의 출판이력만 추가하는 꼴과 다를 게 없는 책이다. 창작의 길을 걷는 예비 작가들에게 건네는 실질적이고 유용한 이야기라고? 이런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로 리뷰를 남긴다.

 

 

1. 이 책이 궁금하면 서점에서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되겠다. 2장의 마지막 절과 3, 4장만 읽으면 왕초보 작가가 궁금해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절대 구입하지 마시라!

2.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정보'는 아트허브나 네오룩에 올라온 정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이제 막 시작하는 작가로, 경력 10년 도 안된 신진작가가 이런 책을 쓴다는 자체가 놀랍다. 신진작가로서 자기보다 더 초보인 작가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 이런 책을 썼다고 한다면, 위에서 내가 언급한 대로 자신이 선정되어 뭔가 지원을 받은 이력이 있다면 어떻게 선정되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이 적시되어야 자기가 말한 바있는 책 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텐데, 왜 정작 그 중요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쏙 빼놨는지 의문이다. 대외비인가? 그렇다면 이런 책은 왜 썼을까? 자기 경력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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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18 0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술작가라고 하셔서 미술에 대한 감상이나 평론글을 쓰는 ㄴ방법을 알려주는 책인줄 알았더니 화가가 되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네요.미대 출신이야 굳이 읽어 볼 필요가 없겠지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책인것 같은데 야무님 글을 보니 좀 허술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yamoo 2025-04-18 10:12   좋아요 0 | URL
미술작가는 어떤 일을 하는가...에대한 책인데...그냥 개인전과 단체전 등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매우 피상적이고 개인전을 하면 돈이 많이 들기에 지원금을 타서 개인전을 해야 작가 이력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근데, 가장 중요한 그 지원금을 타는 공모에 선정작가가 되는 방법이 아예 빠져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에요. 자기는 선정작가가 된 이력이 찬란한데 그걸 알려주지 않아서 좀 빡쳤다는...ㅎㅎ

은지 2025-04-18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굳었네요 감사합니다

yamoo 2025-04-21 10:5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글 쓴 보람을 느낍니다!^^
 
타임 셸터 -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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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작인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타임 셸터>를 읽었다. 처음 읽는 불가리아 소설. 불가리아 국민작가라는데, 이런 작가가 있었는지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번역되어 나오는 세계문학 전집에 불가리아 작가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으니까. 다소 의외인 건 문학동네에서 자기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펴낸 게 아니라는 거. 왜 그런지 좀처럼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름도 모르는 작가의 신간을 사서 읽는 건 모험에 가까운데, 일단 알라딘 문학 리뷰의 대가이신 뽈 님이 본 소설에 무려 별을 5개 줬기에 어느 정도 믿음은 있었다. 근데 사실 처음 신선함은 좋았지만, 20여 페이지를 지나 70쪽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 작품을 계속 읽어야할지 아니면 던질지 기로에 섰었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치매 치료로 이어지기에, 언젠가 읽었던 메디컬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신선했는데, 갑자기 알츠하미머 치료에 대한 이야기라니, 흥미도가 급격히 떨어진 게 사실. 그래서 70쪽에서 고민에 빠졌던 거. 가독성은 좋아서 속는 셈 치고 계속 읽기로 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의 분신과 같은 가우스틴은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가는 알츠하이며 환자들을 위해 옛 시대를 완벽히 재현한 클리닉을 고안한다. 영원한 과거의 노스텔지어의 공간인 타임 셸터를 구축하려는 그의 욕망은 점차 세계로 확대되고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70쪽을 넘자마자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지면서 탄력이 붙었다. 그러다가 3본보기로 선택된 나라에 이르러서 약간 루즈해 졌다. 3장을 읽어내는 데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4장을 빠르게 지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작가의 필력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타고도 남을 만했다. 플롯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대가의 아우라가 느껴졌다랄까.

 

기억 재현 클리닉을 국가로 확대하고 각 국가가 국민투표를 통해 자국의 시대를 택한다는 방식은 기상천외했다. 유럽의 역사와 국제정세를 알지 못하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 구조다. 책 후반부에 작가의 유럽 지도 삽화가 있는데, 각 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회귀 연도를 국민투표로 채택해 나타낸 지도. 매우 신선했다. 각 나라가 지향하는 과거의 향수가 있었고, 이는 각 나라의 국제정세와 역사에 해박하지 않으면 설정할 수 없는 내러티브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회귀 국민투표가 실시된다면 언제가 될까 생각해 보았다. 1988? 1994? 2002?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기억의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히 베르그손의 저작을 읽었던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기억은 수직의 원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에 수록된 기억의 원뿔 모형]


베르그손의 주저 <물질과 기억>에 보면, 어떤 특정한 기억은 수직의 원뿔 구조 속에서 아래 위를 오르내리며 현재에 개입한다고 한다. 원뿔의 밑층에 잠재해 있는 기억은 현재에 촉발된 상황으로 인해 현재로 즉시 소환되어 현재의 이미지를 구축한다고. 게오르기는 이 기억의 층을 건물 구조로 구체화시켜 보여준다. 클리닉에서 60년대는 2층이고 40년대는 지하다. 각 층은 닫혀진 게 아니라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이고, 장치들(잡지나 음반)은 과거가 현재에 개입할 수 있도록 중요한 트리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영원한 과거의 노스텔지어 공간인 타임 셸터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늙어감이 아닐까. 아무리 과거를 재현하여 없어지는 기억을 붙잡는다고 해도 인생은 결국 고립되어 죽어간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끔찍한 고립이 찾아오고 있어, 분명해.”(p307) 그래서 이 한 문장의 울림은 컸다.


 “나는 결말을 좋아한 적이 없다. 결말이 기억나는 책이나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 (중략) 나는 오로지 시작만을 기억한다. (중략) 내가 지금 얼굴을 바짝 갖다댄 채 바라보고 있는 장미를 기억한다. 나는 장미 덤불과 키가 똑같다. 어느 전쟁에서 접은 외투를 입고 참호 속에 앉아 짧고 매운 담배를 피우는 나를 기억한다. 나는 52번가의 허름한 술집에서 불확실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앉아 있다.”(p448)

 

그렇다. “나는 이 기억 말고 다른 인생이 없다.” 각자의 고립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지만 저 먼 과거의 존재는 현재의 사람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두려움.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이를 담담하게 전한다. 그렇기에 더욱 비애감이 크다.

 

인생(과 시간)이란 얼마나 도둑 같은가, ? 얼마나 강도 같은가.. 평화로운 카라반을 매복 공격하는 악랄한 노상강도보다 더 악랄하다. 그런 노상강도들은 돈 가방과 숨겨둔 황금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유순하여 실랑이 없이 재물을 내놓으면 다른 것-목숨, 기억, 심장, 생기-은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나 시간이라는 이 강도는 어느덧 다가와 모든 것-기억, 심장, 청력, 생기-을 앗아간다. 심지어 고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손에 넣는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그 와중에 당신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가슴을 축 늘어지게 하고, 엉덩이엔 뼈만 남게 하고, 허리를 굽게 하고, 머리칼을 성긴 백발로 변하게 하고, 귀에서 털이 자라게 하고, 온몸에 점을 뿌려놓고, 손과 얼굴에 검버섯을 돋게 하고, 앞뒤 안 맞는 말을 지껄이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고, 모든 말을 빼앗아 아둔하고 망령 든 사람이 되게 한다. 그 개자식은-인생, 시간, 노년 다 똑같다, 똑 같은 쓰레기, 똑 같은 깡패다. 그 개자식은 처음에는 적어도 공손해지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솜씨 좋은 소매치기처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도둑질하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작은 것들을 훔쳐간다-단추 한 개, 양말 한 짝, 가슴 왼쪽 윗부분의 미세하게 찌릿한 통증, 몇 밀리미터쯤 두꺼워진 안경, 앨범 속 사진 세 장, 얼굴들,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pp169-170)



이 소설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의 불가리아 버전처럼 생각된다. 사람의 나이듦을 막을 수 없고, 시간이라는 존재에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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