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취미로 그리나요?"
처음 나가는 모임이나 기존 모임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 나는 꼭 내 본업을 말하지 않고 작가라고 소개한다. 뭐, 예전부터 숱하게 듣던 물음, “혹시 예술하세요?”라는 물음에 대해 미리 대비해서 그냥 작가라고 소개한다.
그러면 8할 정도의 사람들은 전업 작가시냐고 묻는다. 그래서 본업은 따로 있는 직장인이라고 하면, 뒤따라오는 물음, “그러면 그림은 취미로 그리세요?”

(아비투스, 캔버스에 콜라주, 10F, 2025)
요새 내 소개를 작가라고 하면 숱하게 묻는 물음이다. 뭔가 내 직업을 소개했을 때 이렇게 구체적으로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전에 뭘 한다고 하면 그러냐고 후속질문 따위는 없었는데 말이다.
뭐, 다 이해한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정말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취미 미술학원 다니면서 눈으로 봤으니까. 정말 많았다. 취미로 그림을 사람들이. 그리고 다 잘 그렸다. 미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처럼 잘 그렸으니까. 개중에는 정말 미대 나온 전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전업 작가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중에는 화력이 10년을 훌쩍 넘는 사람들이 쌔고 쌨다. 그렇다고 해서 취미미술 화력 10년이 넘은 사람들을 보고 전문 작가라고 하지 않는다. 그 취미 경력자도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인식하고 있으니까.
아마추어 작가와 프로작가의 차이. 이건 정말 내가 아마추어 작가에 머물기 싫어서 많이도 생각해 봤던 주제다. 하지원이나 구혜선의 그림을 보고 그렇게도 논란이 많았던 것이 이 주제와 닿아있어서다.
내 그림이 하지원이나 구혜선의 작품 취급(평론가들 공히 레퍼런스만 있다는 거)을 받는 것이 싫었다. 그럴려면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게 프로와 아마추어 작가를 구별하는 시금석이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류다.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논문 쓰기가 비슷하다. 레퍼런스(참조)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색깔이 그림에 드러나야 하는 게 일차적인 조건. 그리고 다음이 주제와 대상을 선택해서 형상을 그리는 능력. 이게 되면 이게 되면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갖게 된다.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갖고 작품을 발표하는 게 소위 전업 작가(또는 프로 작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그림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잘 그린 그림들은 넘쳐나지만 좋은 그림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잘 그린 그림과 좋은 그림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이 차이를 ‘시대성’ 두고 있다. 즉 그림이 당대의 시대성을 담을 수 있느냐다. 그림을 무척 잘 그리는 작가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린다. 추상화든 구상화든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에 담는 작가들이 무척 많다.
형상은 다 좋다. 스킬도 좋고 정말 잘 그리는 작가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뚜렷한 주제 구현 없이 자기 감정을 주로 드러내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많다. 시대성 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주를 이룬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화폭에 담는 능력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시대성 보다는 자기 감정을 캔버스에 소모하는 것은 자기 얘기를 주야장천 하는 소설 작품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감정을 시대성에 어떻게 승화시키느냐가 중요한데, 이를 해내는 작가들이 드물다. 그래서 좋은 그림을 찾기가 어려운 것.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도 그렇다. 형상만 멋진 작가들이 넘쳐난다. 이걸 왜 그렸냐고 물으면 순간의 내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하는 작가들이 무척 많다. 프로 작가는 자신의 조형 언어로 주제를 구현하는 예술가다.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적 주제를 글로 표현하듯이, 화가는 자신의 주제를 조형 언어로 표현하는 거다.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은 나같은 사람조차 이해하는데, 미술대학을 나온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감정만을 표현하는 작가들을 프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형상과 기법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자신의 생각을 주제에 맞게 형상을 창조하고 시대성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프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건 미술대학을 나왔냐,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느냐 하고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건 예술 활동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프로 작가다. 이건 전업(專業)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끝)
덧
하지원이나 구혜선의 그림을 나는 폄하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조형언어로 주제를 구현하여 시대성을 담는 창작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설명으로부터 충분히 인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