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영국군과 12만 명의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밀려 개인 무기와 모든 차량 등 장비를 뒤에 남겨둔 채 됭케르크에서 철군했다. '다이너모 Dynamo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됭케르크 해안에서의 영국군 철수는 9일 동안 계속되어, 33만 8,000명을 무사히 철수시켰다. 그 철수 작전에서 온갖 종류의 선박 887척을 모아 들인 영국 해군과, 나흘 동안 29대의 비행기를 잃으면서 적의 비행기 179대를 격추시킨 영국공군의 업적은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병력을 무사히 구출해냄으로써 안도감을 느낀 영국은 기습 반격을 가했지만, 영국군은 이미 철저하게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나 많은 장비를 프랑스에 버려두고 탈출했기 때문에, 1940년 여름에는 잉글랜드 군 1개사단만이 제대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_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 p847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3개월만에 치르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통령 취임 이후 한 달도 안되는 시점에 치뤄지는 선거라 불리한 지형에 포진한 야당에게는 쉽지 않은 선거였다. 아직 개표가 되지 않은 시점에 실제 결과도 여당 국민의 힘 압승이 예상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선거가 불안정한 신임 대통령에게 경고가 되주길 바랐지만, 주권자의 뜻은 힘을 모아 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다만, 역대 2번째로 낮은 50.9% 투표율로 실망감을 표현했다는 점도 분명 의미있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결과는 아쉽게 나타났지만, 이기기 쉽지 않은 선거라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인지 지난 대선때보다는 편한 마음이 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철수하는 덩케르크 작전을 지켜보는 영국민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많은 이들이 살아 돌아왔지만, 전쟁의 패배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패배한 전쟁에서의 작은 승리'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위스턴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1965)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러한 감동적인 철수작전의 한계와 작은 승리의 의미가 명확하게 지적된다.  짙은 안개 속에서 거의 눈에 띄이지 않은 영국공군의 활약은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Edward Nolan, 1970 ~ )의 영화 <덩케르크 Dunkirk>에서 시각적으로 부활한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하늘에서는 독일군과 전투 중인 영국공군들이 있다. <덩케르크>의 세 개의 공간 - 육지, 바다, 하늘 -  중 적을 공격하는 무대는 하늘밖에 없다. 이들은 작은 선박들이 군인을 싣고 돌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 중, 바다로 추락한 '콜린스'(잭 로던)는 피터에게 구조 당하고, '파리어'(톰 하디)는 연료가 떨어져 덩케르크 해변에서 포로가 된다. 영화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배와 끝없이 펼쳐진 해안가에 따로 모인 몇몇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 고립감을 강조한다. 공중에서의 영상은 특히 인상적이다. 카메라는 공군들을 클로즈업 하거나, 공군들의 시점과 유사한 각도로 전투기 안에서 보이는 바다, 해변, 공중의 풍경을 시원하고 속도감있게 담아내 현장감을 느끼도록 했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인터스텔라>에 이어 <덩케르크>를 반드시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놀란의 작품으로 인식시켰다. _ 서곡숙, 이현경 외, <미국 영화감독 1> , p146 


보이지 않은 곳에서 이뤄진 헌신이 가져온 작은 승리. 이 작은 승리는 바로 이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1940년 7월 ~ 10월)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戰況)이 바뀌는 변곡점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에서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냈을까. 또는 만들어냈다면 발견할 수 있을까...


 선거 결과와는 무관하게 다른 한 편으로 가능성도 발견한다. 시/도지사 투표와 다른 교육감 선거결과를 보면서, 유권자들이 맹목적으로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약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바꿀 인물을 선택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개개인은 다를 수 있겠지만, 집단지성의 힘으로 발현되는 투표 결과를 보면서 유권자의 선택을 단순한 '욕망', '이기심', '이념' 등으로 재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정치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광주의 투표을 33.6%가 말해주듯, 이제는 '잡은 물고기'로 지지층을 생각하는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인과 정당은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이것이 한동안 이어질 어두운 시대의 개인적인 희망이 될 듯 싶다...


 우리는 그 구출 작전(다이내모 작전)을 승리의 상징으로 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철군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구출 작전의 이면에는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승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공군이 거둔 승리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우리 용사들은 귀환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공군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우리 공군의 엄호 공격망을 벗어난 적군의 폭격기만 보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공군의 공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바깥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항하여 이 영국 섬을 상공에서 방어해야 할 경우 우리가 누리는 유일한 혜택이란, 바로 실질적이고 확실한 안심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_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上>, p412


 설혹 유럽 대부분의 지역과 오랜 전통의 주요 국가들이 게슈타포의 손아귀에 이미 들어갔거나 들어가게 되어 나치 지배의 끔찍한 상황에 빠져들더라도, 우리는 결코 힘없이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나아갑니다. _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上>,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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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6-02 08: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번 선거를 보며 덩케르크 작전을 떠올리시다니.. 호랑이님 남다르십니다👍 덩케르크 영화 보고 싶어지네요~

겨울호랑이 2022-06-02 08:33   좋아요 3 | URL
독서괭님 감사합니다. 출근하면서 결과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경기도에서는 역전했네요. 그나마 작은 위안을 받은 아침입니다. <덩케르크>는 육지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이이라는 시간-공간의 교차 상황에서 영상과 음향이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로 기억합니다. 다만, 지나친 ‘영국 만세‘ 요소는 있습니다만... 어두운 현실에서 한 줄기 빛을 보여줄 영화라 생각됩니다. 독서괭님, 좋은 하루 되세요! ^^:)

레삭매냐 2022-06-02 09: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선 끝나고 치른 지선에서
야당이 승리한 적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
선거는 어렵겠구나 싶었습니다.

민심의 향방이란 정말 가늠할
수가 없네요.

앞으로 2년 동안 어떻게 진행
될 지 우려가 되네요.

겨울호랑이 2022-06-02 09:25   좋아요 4 | URL
아무래도 선거 역시 대중심리의 영역이라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잘못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찍었다는 평가보다는 부족하지만, 일단 기회를 줘보자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들이 가진 권력이 크기에 걱정이 됩니다만, 대통령과 새정부에 대한 걱정과 우려보다는 크게, 기대감보다는 작은 어디에선가 그의 업적이 만들어지길 바라봅니다... 사실 더 큰 걱정은 5년으로 끝나지 않을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건 더 나중의 걱정거리겠지요.... 레삭매냐님 좋은 하루 되세요! ^^:)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듣고 흘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의 이 한탄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57/206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침묵 沈默>에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길이 진리의 길이라면, 이 길을 따르는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최소한 두 인물이 떠올랐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의인 욥과 <신약성경>의 의인 예수. 


 <구약성경>에서 자신에게 닥친 이유없는 불행에 대해 욥은 계속적으로 탄원을 하며, 이러한 불행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던진다. 이에 대해 <욥기>에서는 다행히도(?) 응답받는다. 그가 의롭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의로움이 드러나기 위해 의인에게 시련이 닥쳤기 때문임을 교부(敎父)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 349~407)는 저서에서 밝힌다.


 

 그러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욥 40 : 6 - 8)


 그분은 당신의 개입이 '너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의롭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거나, 당신께서 승인하신 개입을 함으로써 욥의 시련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내가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네가 의롭게 되도록'이라고 하지 않고, 그가 실제로도 그랬고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네가 의롭게 보이도록"이라고 하셨습니다. _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욥기 주해> 中


 <구약성경>에서 욥은 응답을 받지만,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아니, 그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다.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다윗-솔로몬의 영광이 재림한다는 대중의 열망에 부합하지 못하고, 실망감이 미움으로, 미움이 증오로 바뀌며 제자들에게마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예수.


 예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오해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짧은 생애 동안 민중도, 적대자도, 그리고 제자들마저도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예수에게 걸려고 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중大衆의 기대 속에서 고독했다. 서민들은 그에게서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대중은 로마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유다를 '하느님 나라'로 회복시킬 지상적인 메시아로 그를 내세우려 했다. 이러한 기대와 흥분은 한때 갈릴래아의 봄이라는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지만, 예수에게 지상적인 메시아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예수로부터 떠나갔다. 예수의 비극적인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내가 쓴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7


  대사제 안나스는 예수의 죽음을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의 전승과 같이 말하지만, 예수 자신은 <루카 복음>의 내용으로 자신의 죽음을 말한다. 같은 공관 복음에서도 엇갈리는 최후의 순간에 대한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반된 역사적 기록들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까. 앞의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기록이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최후의 질문이라면, 이어지는 <루카 복음> 기록은 예수가 겟세마니에서 이미 응답을 받았음을 함축하기에 이들 증언 사이의 차이는 크다. 슈사쿠는 아마 이 점을 <사해 부근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서로 다른 전승 속에 바오로에 의해 세워진 교리는 불완전하다는 점을.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완강한 그 침묵은 나(대사제 안나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 침묵은 처음부터 나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운 말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p174)...  "그대는... 마지막에 저 비탄의 시편 구절을 외치게 될 거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네." "아닙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겨드립니다.' 라고. 이 모든 걸 곧 알게 될 것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175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성경>의 의인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응답받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함께 침묵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이 욥의 경우에서처럼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 자신은 의로운가. 알지 못한다면 스승 예수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에 예수의 길(道)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선택을 한다. 


 라삐들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는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율법을 날마다 엄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도, 율법을 날마다 외워야 한다는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느님은 외로우시므로 당신을 사랑하고 찬미해 주기를 기다리신다고 했다. 하느님은 보호자가 필요 없는 훌륭한 학자나 제사장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선인善人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어머니처럼 울면서 외롭게 걷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 했다(p253)... 라삐은 황당무계한 꿈같은 예수의 이야기가 머지 않아 본색이 드러나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예수는 오직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사랑이 이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종교 지도자인 라삐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예수에 대한 환멸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255


 로드리고의 선택은 <침묵>에서 생각이 오래 머무르는 지점이다. 그 어떤 선택도 독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예수의 침묵에 고민하지만, 독자들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선택의 의미를 찾는다. 왜 그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개인적으로 로드리고 선택은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 예수' 또는 '역사적 예수'에 근거했으리라 여겨진다. 바오로(Paulus, ACE 5 ~ 64(?))에 의해 규정된 그리스도가 아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예수의 모습을 로드리고는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까. 불완전함을 걷어낸 믿음의 근원의 차원에서. 이와 같은 길은  슈사쿠의 다른 저서 <사해 부근에서> <예수의 생애>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본질적 일은 자기 주위에 한 무리의 제자를 만들고 이들에게 무한한 애착심을 불어넣고, 또 이들의 한복판에 자신의 교리의 새싹을 심어 놓은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한 것이야말로 예수의 가장 큰 업적이요, 또 동시대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다. 예수는 교리를 세우지 않았고, 신조를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교도라 불리는 까닭이었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396


 바오로는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인간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자신의 독선이며, 그것이 상대를 상처 입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152)... 바오로의 그리스도론論이 전개된다. 율법은 인간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율과 율법을 지키지만, 돌을 던진 수면에 물결이 일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죄에 휘말린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행위의 비애, 그리고 원죄의 고통이 있다.. 그런 인간을 원죄에서 해방시키는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은 자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속죄물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53


 생명을 살리는 것과 믿음을 저버리는 양 갈래 길은 로드리고에게 '예수'와 '그리스도' 중 어느 길을 택하는가와 마찬가지의 질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로드리고의 고민이 생각보다 가볍게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끝이 아니다. 선택을 위해 이번에는 로드리고 개인의 문제로 내려와야 한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다. 한 사람의 일생과 순간의 다툼.


 성직자로서 일생을 한 길만 걸어온 한 사람의 신념과 찰나와도 같은 배교의 순간. 어쩌면 평생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박해시기만 참고 버틸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영육(靈肉)간에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순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그는 남은 삶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 것이리라. 예수와 그리스도의 선택과 이어지는 영원과 찰나의 선택. 영원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의)의 선택. 이것이 <침묵>에서 로드리고가 처한 절망적 상황이 아니었을까.


 바오로와 제자 그룹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는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었다. 그러나 신격화한 예수를 어떤 형태로 믿는가 하는 점에서는 견해를 달리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는 머지않아 재림할 그리스도, 곧 머지않아 세상 종말에 재림하여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구해 줄 그리스도였다. 이에 반해, 바오로의 그리스도는 율법이라는 자력自力 구원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선사하는 존재로, 하느님의 자신과 인간과의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한 희생 제물인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개의 그리스도관觀은 서로 얽히고설켜 그리스도교 안에서 뿌리를 내려간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90


 한 인간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어떤 선택을 했든 로드리고 신부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비록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내용일지라도...  <침묵>을 읽은 후 로드리고의 선택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로드리고의 선택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는 왕'으로 권위를 부여 받은 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슈사쿠의 다른 저서들과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의 저서 <예수의 생애>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블로크의 <기적을 행하는 왕>에서 드러나듯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기적을 통해 부여받은 권위를 걷어냈을 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야 비로소 로드리고 선택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침묵>은 독립적으로 읽기보다 <사해부근에서>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사람마다 같은 해석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침묵>의 의미를 정리하는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본의 아니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귀신을 쫓는 사람이 되었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위대한 신적 생애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기적은 행했다기보다는 여론이 요구한 기적들을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적은 보통 군중이 만들어낸 것이지, 그것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소행은 아니다. 예수는 군중이 자신을 위하여 지어낸 기이한 일을 행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역사와 민중 심리의 법칙이 이처럼 큰 저촉을 입은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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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5-29 13: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태<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수의 생애>와 동일한 내용,다른 제목인 줄 알았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여러 책들이 이렇듯 연결되는걸 보면
평생에 걸쳐 신앙에 관한 고민이 작가에게 있었나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9 17:42   좋아요 1 | URL
미미님 말씀처럼 슈사쿠에게 신앙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문제는 인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로 보입니다. 그만큼의 깊이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구요 ^^:)
 

전형적 보스는 지극히 냉정한 사람이다. 그는 사회적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상류사회‘에서 이 ‘프로페셔널 professional ‘ 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는 오로지 권력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재원으로서의 권력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p182)... 그는 ‘프로페셔널‘ 정치꾼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경멸당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연방의 중요 관직을 얻을 수도 없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좋은 점이다. _ 최장집,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p183

간밤에 내린 비로 맑은 5월 아침. 매일 아침 이뤄지는 행차에 서둘러 출근하는 것도 익숙해지는 아침. 횡단보도 앞에서 선거 현수막을 보았다. 10년 넘게 ‘새정치‘가 무엇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은 채, 그는 인수위에서 우리 동네로 왔다.

덕분에 내일 아침 일찍 그에게 ‘-1‘을 안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자신은 소명의식이 1도 없지만 다른 이에게 정치의식을 불어넣어 준다는 점에서는 ‘보스‘기질이 있는 듯도 하다. 권력이 아닌 주가부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새 보스‘일지도 모르겠다... 아, 새정치가 무엇일지 조금 알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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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26 1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오락가락할 때부터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결국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결국 자신이 타령을 해대던
새정치가 그렇게 공존불가
를 외치던 곳에 투항하는 것
으로 귀결되었네요.

정치의 희화화에 지대한 공
을 세운 것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6 11:21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매번 출마-철회를 반복하면서 <황금어장>에서 보여줬던 좋은 이미지 다 까먹으면서 정치판에서 사라져 가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예전의 선한 이미지 대신 탐욕에 눈 먼 주식 브로커로밖에 보일질 않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네에서 철수에게 새생명을 줄 수는 없겠지요... 제 손가락을 위해서라도 그래야겠습니다...

Conan 2022-05-30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분당에서 출마했군요...
아침 일찍 그에게 ‘-1‘을 안겨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신선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5-30 08:07   좋아요 1 | URL
^^: Conan님 감사합니다. 최종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습니다만... 기본 소양이 부족한 이의 행동에는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토록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노 장공( 魯 莊公, BCE 706 ~ BCE 662) 10년.


 노장공이 출병하면서 조귀와 더불어 같은 전차를 타고 나가 장작(長勺)에서 제나라 군사와 싸웠다. 노장공이 진격의 북을 울리려고 할 때 조귀가 만류했다.

 "아직 불가합니다."  

 이때 제나라 군사가 세 번이나 북을 울렸다. 그때서야 조귀가 말했다.

 "이제 북을 쳐도 좋을 것입니다."

 과연 노나라 군사가 이때 북소리에 맞추어 진군하자 제나라 군사가 패했다... 노장공이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뒤 조귀에게 노나라가 승리한 이유를 묻자 조귀가 대답했다.

 "대저 용병이란 한마디로 병사들의 전의(戰意)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북을 치면 병사들의 투지가 치솟습니다. 교전이 이뤄지지 않아 두 번째 북을 치게 되면 투지가 떨어집니다. 그래도 교전이 이뤄지지 않아 세 번째 북을 치게 되면 투지가 완전히 소진되고 맙니다. 적병의 전의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북을 한 번 쳐서 병사들의 투지를 드높였기 때문에 적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_ 좌구명, <춘추좌전> 中


 좌구명(左丘明, BC556~BC451)의 <춘추좌전 春秋左傳>에는 강국 제(齊)나라 군대를 약국 노나라 군대가 장작(長勺)에서 격파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예상을 깨고 노나라가 제나라를 이긴 비결은 군대의 사기(士氣)에 있었다. 군대의 기운을 돋우는데 사용하는 북. 이 북소리도 자주 듣다보면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일고작기(一鼓作氣)'의 교훈. 하물며, 용기를 북돋우는 북소리도 아닌 이야기가 적전(敵前)에서 계속 나온다면 승패는 결정된 것이 아닐까. 또한, 대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치르는 선거. 저들은 제나라보다 약하지 않고, 우리는 노나라보다 강하지 않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조귀의 교훈을 생각하며 결과를 우려하는 이는 과연 나 혼자만일까... 해당 일화는 풍몽룡(馮夢龍, CE 1574 ~ CE 1646)의 <동주열국지 東周列國志>에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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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26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서 작고하신 고우영 선생
의 열국지를 읽었는데, 돌이켜
보니 전범으로 삼은 게 풍몽룡
작가의 <동주열국지>가 아닌
가 싶습니다.

겨호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이렇게 적전분열하는 상태에
서 반타작의 승리조차 요원해
보입니다.

조변석개하는 민심의 풍향은
정말 알 수가 없네요.

겨울호랑이 2022-05-26 11:28   좋아요 1 | URL
고우영 화백께서는 참 다양한 고전을 정감있게 풀어주셨지요... 저도 만화 <십팔사략> <삼국지>를 재밌있게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참 쉽지 않습니다만, 돌이켜보면 언제든 쉬운 때가 있었습니까... 여론 흐름이 좋지 않을 때는 물론, 여유있게 앞서 있다고 생각할 때도 누군가의 작은 실수를 침소봉대하는 언론들 때문에 사전 선거 당일에도 불안하던 것이 일상이었던 듯 합니다. 이럴 때는 그저 현혹되지 않고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정답이라 여겨집니다. 아무리 지금 시끄러워도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이기기 쉽지 않겠지만, 쉽게 내주지도 않으렵니다. ^^:)
 


  지금 한국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한국 개신교를 '미움과 배타성을 설파하는 종교' '분노의 종교'라 여깁니다. 또 '너무 상업적이다' '욕망을 제어하기는커녕 부추긴다' '욕망을 성찰하지 않는 종교다'라는 목소리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면 수동적이게 된다'는 거예요. 아까 말씀하신 나쁜 성직주의를 관용하는 것은 사실 수동적인 신앙인과 관계가 있잖아요. 이 세 가지가 한국 개신교의 현재 문제인 것 같아요. 증오의 종교, 수용의 종교, 욕망의 종교라는 것말이에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56/196


 권력 3부작의 마지막. 김진호의 <권력과 교회>에서는 한국 개신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다룬다. 우리나라 종교인구의 약 20%를 차지하지만, 엘리트 집단의 개신교비율은 40%를 훌쩍 넘는 수준으로, 한국사회에서 개신교회가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이다. 이러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가 가지는 문제를 <권력과 교회>의 저자는 증오, 수용, 욕망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서북청년단 가운데는 교육받은 사람이 많았어요.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있었기에 테러를 해도 처벌받지 않았고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북한을 해방해야 한다는 정치적, 종교적 사명감까지 갖고 있었죠... 서북지역 내에서의 기독교는 융통성도 있고 다채로웠지만, 남한에 내려온 이들의 특정한 경험에 의해 재구성된 서북주의 신앙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극우 반공주의적이며 분노가 중심이 되는 행동주의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죠.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15/196


 미움이라는 마음작용이 적대적 테러 행위로 이어지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한데, 남한의 경찰기구나 미군정 정보기관이 그 장치를 마련해준 거죠. 이렇게 해서 테러 행위에 참여하게 되면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일은 훨씬 수월해지고요. 그런 점에서 이는 '수행적 적대'라고 할 수 있어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13/196


 한국 개신교회가 증오의 종교가 된 것은 서북청년단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서북지역에서 탄압받고 남하한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가졌으며, 이들 중 일부는 제주로 들어가 제주양민을 학살하는 4.3사건을 일으켰고, 일부는 18연대(백골부대) 창설의 주역이 되는 등 해방 후 한국사회 여러 곳에 영향력을 미치는데, 이들의 공통분모는 '철저한 반공(反共)주의'에 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남한으로 쫒겨내려온 이들에게 떠나온 고향땅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 것이다.


 그분들이 믿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구약 중심으로 보는 권위주의적 성서 해석이 아닐까요. 구약에서 권력과 건물숭상주의에 관한 부분만 부분절취(切取)해온 거죠. 성경에서 다윗 정권을 만드는 배경에 선지자 나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목사들이 중세 이전의 세계관에 머물러 나단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거에요(p150)... '정복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바시(kabash)'는 착취하고 파괴하라는 뜻이 아니라 풍요롭게 되도록 돌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를 오독해 4대강 사업을 벌이는 등 폭력적이고 그릇된 복의 개념이 이 사회를 지배해왔어요. 이런 복을 받으려면 '우리 교회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말해요. 밖에는 적뿐이니까.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63/196


  '증오'로 시작된 남한의 개신교회에게 외부는 '정복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고, 지금의 어려움과 시련은 창대한 나중을 위한 미약한 시작이었다. 자연히 이웃사랑의 <신약>보다 계약의 <구약>이 강조되었으며, 구약시대의 판관(判官)들인 기드온이나 삼손처럼 목사들은 성도를 이끌고 외부와의 전쟁에 나서면서 개신교회는 위계의 종교 그리고 이러한 질서 수용의 종교가 되버렸다.


 보스적 목회자는 영적 리더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 같아요. 보스와 성도의 관계는 시간일 갈수록 더욱 종속화되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증오가 쌓여요. 또 이런 보스적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들을 양산해야 하죠. 신도들을 단독자로서의 자유인이 아니라, 적들과 싸워야 하는 '분노의 전사'로 만들어내기 위해 교회 밖으로 적을 계속 만들어내요. 교회 안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도록, 분노를 교회 밖으로 향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반공, 반동성애 프로파간다가 이루어지고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50/196


 교회 공동체의 배타성은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이 있어요. 저는 그들끼리 나누는 문화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배타성을 우려합니다. 그 배타성은 전형적인 '부드러운 야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외부에서도 노골적인 배타성으로 보이지 않고 집단 구성원들도 스스로 배타적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상 배타성이 작동하는 문화가 있죠. 그 구성원들은 모임에 소속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편견을 은연중 갖게 되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91/196


 수용의 종교로서 개신교회는 외부적으로는 배타성을, 내부적으로는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같은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형제애'는 주중에는 사회에서 연계되어 하나의 계층구조를 형성하고 네트워크로 작용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교회에서 맺어진 이러한 연결망이 하느님의 축복이며, 이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과 이어진다.


 굉장히 많은 집회에 참여하면서 '미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팅은 대개 끼리끼리 이루어져요. 특정 지역에 속한 사람들, 자산 상태도 양호하고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그들끼리 사적 모임을 만들죠. 문화도 비슷하고 교류할 때 비용 분담도 용이하고, 이질적인 사람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없고요. 이렇게 계층화 현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 교회가 되어버렸고, 이것이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인 듯합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83/196


 어느 교회에 속함으로써 갖게 되는 연줄망을 특혜가 아니라 신앙의 열매라고 보는 거예요. 신앙이 주는 '복'이라고 믿는 거죠. 그것이 오랜 기간 수많은 모임을 통해 몸에 각인돼버려요. 이런 신앙은 특권에 안주하고 시스템의 부조리함에 무감각하게 하죠. 그러면서 개개인은 도덕적으로 엄격한 삶을 살곤 해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68/196


 <권력과 교회>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구조안에서 영육(靈肉)간의 건강, well-being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지적한다. 이러한 욕망에 편승하여 개신교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참혹함 대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승에서도 영적으로, 물질적으로도 풍족함을 추구하는 종교로 점차 벗어나며 오늘날 개신교의 모습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천주교로 개종한다고도 하니 씁쓸한 웃음과 함께 이러한 문제가 개신교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북주의자들이 '파괴적 증오의 정치'를 통해 부상했다면, 조용기로 표상되는 부흥사들은 '생산적 증오의 전략'을 구사했다고 할 수 있어요. 적에 대한 증오를 성공에 대한 욕구의 자양분으로 전환한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생산적 증오의 전략에서 유용한 도구가 혼합주의였어요.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종교심을 활용하고 그것을 기독교적 종교성으로 덮어버리는 거죠.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25/196


 교회를 만들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이끌었던 나운몽과는 달리 조용기는 자기 부흥운동의 센터를 구축했고, 그곳을 거점 삼아 팽창을 거듭함으로써 권력화된 종교성을 발전시켰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결합한 혼합주의적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운몽이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영혼의 구원에, 몸의 구원(건강)과 물질의 구원(풍요)을 결합한 '1+2'의 복음, 그것이 조용기의 저 유명한 '3박자 구원론'이에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동시에 결합한 기복적 신앙 양식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은 1970~80년대 한국 개신교 신앙의 한 전형으로 발전했어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24/196


 정확히 말하면 '분노와 복의 목회'라고 할 수 있어요. 바깥으로는 적을 만들어 분노하게 하고, 안으로는 복이라는 개념을 왜곡해 신자들이 목사의 종이 되게 하는 구조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50/196


 <권력과 교회>에서는 이처럼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점을 증오, 수용, 욕망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개선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방향 제시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증오, 수용, 욕망을 막무가내로 추구하는 이보다 신앙의 본질에 가까이가려고 노력하려는 다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권력과 검찰>, <권력과 언론>, <권력과 교회>의 권력 3부작은 한국사회의 권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덕적으로 교회에 의해 낙인 찍히고, 법적으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고,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의해 세상 끝까지 보도된다면 어느 누가 긴밀한 이들의 카르텔에 대항할 수 있을까. 책이 출판된 2017년에는 이들 기득권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으나, 5년이 지나 실패한 개혁에 대한 반동이 시작되는 시점에 다시 읽은 권력 3부작은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성과가 있다면, 이들의 실체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까.  이제는 더 어려워진 시점에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지 보다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잖아요. 대표적인 것이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기독교민주화 운동이죠. 또 노동운동 쪽에서도 상당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학생운동에서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보면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계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상당히 거세게 올라오고 있을 때 최태민을 내세워서 반공과 친유신적 힘을 끄집어낸 것이죠... 거기서 놀라운 부분은 최태민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을 텐데도 한국의 개신교가 그를 내세워 구국선교단이나 봉사단으로 세를 떨쳤다는 점이에요. 그 부분이 한국 개신교의 약함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31/196


 교회 바깥으로 분노의 정치를 실행할 투사를 키우고, 이들을 가짜 뉴스에 속아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명 한명의 신자가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예수가 말하는 '바실레이아(basileia), 즉 하나님의 나라이자 진정한 교회의 할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회는 영혼의 안식을 주는 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구체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p177)... 예수는 옆사람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에게 간장이 찢어지듯이 아픔을 느끼는 것, 그것이 이웃이라고 했어요.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시스템에 대해 말한 것 같아요. 저는 교회 자체의 구제와 기부를 완전히 시스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8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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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0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5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22-05-25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저도 봐야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교회 권력에 대한 비판서는 간간히 나왔는데, 정치학 쪽에서 나온 건 처음이네요.

겨울호랑이 2022-05-25 11:21   좋아요 0 | URL
yamoo님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셨지요? <권력과 교회>는 한국 교회가 갖는 여러 문제들을 다양한 그리고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어렵지 않게 문제점을 분석한 책으로 읽혔습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 ^^:)

커피소년 2022-05-25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 반공사상을 가진 분들 중에 개신교분들이 많았죠... 지금도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겨울호랑이 2022-05-25 19:40   좋아요 1 | URL
모든 개신교 신도들이 다 반공주의자라고 할 수 없겠지요. 모든 집단에 수많은 결들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다만, 해방 전후로 북에서 내려온 목회자들과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일부에서 과격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