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이면 혼자서 59분을 얘기합니다. 깨알지식을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 조언 듣지 않습니다. 원로들 말에도 '나를 가르치려 드냐'며 화부터 냅니다. 옛일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대변인을 역임한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10월 5일 페이스북에 올린 저격글. 5년 치하로 그친 항우의 초나라에 비유하며 "누군가의 얼굴이 바로 떠오른다"라고 말해. 주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다들 누구인지 아는 분위기. 함께 일했던 동료의 생생한 '피어 리뷰'. _ <시사 In VOL.787> p6


 <시사 인> '말말말' 코너에 실린 내용 하나에 시선이 머문다. 이미 2주 전 널리 알려진 뉴스이긴 하지만, 전(前) 대변인이 남긴 글을 직접 보니 새롭게 보인다. 5년만에 자신의 초(楚)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폐주(廢主) 항우(項羽, BCE 232~202). 밑바닥에서 일어나 한나라의 왕(王)이 되었다는 점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 BCE 145~86)도 인정하지만, 항우의 마지막에 대한 평가는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날카로운 평가 안에서 항우에 비유된 인물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태사공은 평한다... 항우는 자신이 세운 공을 자랑하면서[功致辭] 자신의 지혜만을 앞세운 채 옛일을 거울로 삼지 않았다. 패왕의 공업을 이야기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경영하고자 한 것이 그렇다.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패망케 만들고, 자신의 몸이 동성에서 찢겨 죽을 때까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끝내 호언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결코 내가 용병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어찌 황당한 일이 아닌가!_ 사마천 <사기본기> <항우본기> , p377


 항우패망 직전 부인에게 불러준 시詩는 끝까지 몰락의 원인을 몰랐던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는 듯하다. 스스로를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로 칭하며 끝까지 하늘을 원망하는 항우.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는 주유(周瑜, CE 175~210)가 하늘을 원망하며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제갈량을 또 낳았는가(旣生瑜 何生亮)"하는 원망이 실려있지만, 두 원망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전자의 원망에는 황당함을, 후자의 원망에는 영화 <아마데우스 Amadeus>에 드러나는 천재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를 바라보는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 대한 공감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두 인물의 인물됨과 행적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항우는 한밤중에 일어나 장중帳中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에게 우虞라는 미인이 있었다. 극히 총애해 늘 데리고 다녔다. 또 추騅라는 준마가 있었다. 그는 늘 이 말을 타고 다녔다. 항우가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 덮을 만해

時不利兮騅不逝 시운이 불리하니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다

騅不逝兮可奈何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좋은가

虞兮虞兮奈若何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하란 말인가


 항우가 여러 번 읊조리자 우미인이 화답했다. 항우의 뺨에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_ 사마천 <사기본기> <항우본기> , p369


 항우의 〈해하가 垓下歌〉를 읽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끝까지 질주한 한 인물과 주변의 비극을 생각하게 된다. 초패왕 항우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의제(楚 義帝)를 보필했다면,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런 가정 자체가 항우 그리고 '유사항우'에게는 무리겠지만. 전대변인의 글을 읽으며 떠오른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시를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우문술 등이) 압록강을 건너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피로케 하고자 싸움마다 문득 패하니, [우문]술 등은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다 이겻다. 이미 여러 번 이긴 것을 믿고 또 중의(衆議)에 몰려,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까지 30리 되는 지점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 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策究天文 신통스런 계책은 천문(天文)을 뚫었고, 

妙算窮地理 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했도다. 

戰勝功旣高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知足願云止 만족한 줄 알아 그만 두시지! _ 김부식 외, <삼국사기><열전 4 을지문덕> , p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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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8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8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체는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로서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의 분출하는 힘을 극한의 언어로 표현해냈다. 반면에 하이데거의 글에서는 아폴론적인 냉정함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디오니소스적인 파토스는 단단한 문장 아래서 소리 없이 끓어오른다. 니체의 문체가 '아폴론을 품은 디오니소스'라고 한다면, 하이데거의 문체는 '디오니소스를 품은 아폴론'이라고 할 수 있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4


 고명섭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하이데거를 통해 수많은 사상가들을 소환한다. 가깝게는 니체, 딜타이, 야스퍼스, 아렌트, 칸트, 헤겔로부터 멀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은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는 하이데거 사상의 넓이와 깊이를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주저들을 설명한다. 저자는 1편에서는 <존재와 시간>, 2편에서는 <니체 1> <니체2>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본다. 낯설게 느껴지는 하이데거의 용어들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존재'와 '현-존재', '존재자' 그리고 '현존'만 간단하게 살펴보자.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를 분석하는 하이데거의 여정은 '세계'와 '세인'을 거쳐 이제 '내 존재'에 이른다. 여기서 먼저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세계를 열어 밝히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현존재는 어떻게 세계를 열어 밝히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말 자체를 해부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현존재(Dasein)는 세계-내-존재 곧 인간을 지징하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현-존재'(Da-Sein)라고 분철해 쓰기도 하는데, 그때 이 말은 '존재의 현'(Das Da des Seins)을 뜻한다. 현존재란 단지 인간을 뜻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현'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현'이라고 번역된 다(Da)는 독일어로 '거기' 나 '여기', 곧 어떤 장소나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존재의 자리가 현-존재인 셈이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가 현-존재의 현이다. 그래서 현-존재(現-存在)다. 현-존재는 순우리말로 하면 '거기-있음'이 된다. '거기-있음'이란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 있음'을 뜻한다. 더 과감하게 말하면, 현-존재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6


 죽음과도 같은 극단적인 불안의 상황으로부터 '존재'를 인식하는 '현-존재'. 현-존재가 던지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동시에 자기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현-존재의 내부에 있으며 또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있기에, 존재는 현-존재의 내부와 외부의 다른 존재자들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지만, 존재는 개별 존재자들에게는 '상대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뉴턴의 절대공간과 아인슈타인의 상대공간이 함께 공존하는, 입자와 파동으로 공존하는 '빛'과 같은 것이 존재의 의미가 될까.


 하이데거가 현-존재가 존재자가 되는 계기를 '죽음'에서 찾는다면, 아렌트는 이를 '생명'에서 찾는다. 마치, 하이데거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자연법칙으로 선택했다면, 아렌트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을 실존의 계기로 삼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하이데거의 용어에서처럼 죽음 또한 그 이면에 상반된 이미지를 갖는다면 '죽음-생명, 그렇지만 죽음'을 선택한 하이데거는 '디오니소스-아폴론'적인 요소를 과연 '아폴론'의 측면에서 통합한 철학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존재가 드러나고 밝혀지는 자리로서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로서 주목하면, '현-존재'는 세계가 열리고 밝혀지는 장이 된다.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말하면,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현존재는 애초부터 세계를 개시하고 열어 밝혀지는 장이 된다. 우리의 마음을 떠나 존재가 따로 있지 않고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조응하여 세계로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으로서 현-존재는 세계가 드러나는 장, 세계가 열려 밝혀지는 장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 p367


 하이데거 철학에서 확정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진리가 비은폐성이며, 비은폐성의 본질은 비밀이라는, 현존은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현존에는 기재(旣在)와 미래(未來)가 포함되어 있다는 본문의 내용은 그의 사상 안에서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의 단편을 떠올리게 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와도 같이 현-존재는 각각의 상황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률적으로 선택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


 '있음'과 '없음'이 하나의 현존 속에서 존재한다면, 그 현존의 형식은 'y=(-x)^n'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n이 짝수이면 x는 언제나 양수의 형태로, n이 홀수이면 x는 음의 형태로도 표현되는 방정식처럼, 하나의 존재 안에 두 개의 상반된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런지... 어렴풋한 이미지를 느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안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이론(descriptive theory)를 떠올리게 된다. 주어에 대한 술어의 표현을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기본 구도로 이해한 러셀의 도식에서 존재를 술부에서 찾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과는 조금 다른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래 독일철학의 독특성이라 봐야할까. 마치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에서 독일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피러 슈라이어를 영입한 이후 한국차에 독일DNA에 이식된 것처럼, 독일 철학에 동양사상의 DNA를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본래적인 시간을 알려면 '현존'(An-wesen)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때 현존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현존이라는 말에는 현재라는 의미의 시간과 함께 현존이라는 의미의 존재도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이란 '존재가 우리 인간을 향해 다가오면서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존재가 다가와 머무르고 있음'이 바로 현존이다. 그런데 현존에는 눈앞에 실제로 있다는 의미의 '현재'(Gegenwart)만이 아니라 '부재'(Abwesenheit)도 포함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때 부재가 가리키는 것이 '더는 현존하지 않음'(Nicht-mehr-Anwesenheit, 더는 현재가 아님)과 '아직 현존하지 않음'(Noch-nich-Anwesenheit, 아직 현재가 아님), 다른 말로 하면 기재(Gewesenheit)와 미래(Zukunft)다. 우리에게 다가와 머무르는 현존에는 현재만이 아니라 지나간 것의 기재(지나옴)와 다가올 것의 미래(다가옴)도 포함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 현존이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07


 들어가는 페이퍼를 작성하다보니, 떠오르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나열되는 무의미한 글이 되버렸다. 이는 자신이 하이데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기회는 없었기에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하이데거를 주인공으로 서양철학사의 주요 인물들을  <하이데거 극장>에서 만나고 보니, 쉽게 손에서 떨쳐버리기도 어렵다. 그렇게 한 번 읽었으나, 리뷰로 다 정리하기에는 많이 부족함이 들기에 본문을 다시 리뷰로 정리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본다.


 진리란 하이데거의 용어로 하면 '비은폐성'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그런데 진리의 본질은 비밀이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되 그냥 감추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음이다. 우리가 비밀을 비밀로 알려면, 그 비밀이 비밀로서 알려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감추어진 것을 향해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바로 이렇게 감추어진 채 드러난 비밀이다. 친밀성이라는 것은 바로 진리의 본질이며 비밀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78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이중적이며 모호한 면이 드러난다. 나치당원이었지만,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14년 그의  노트에 드러난 반유대주의 성향. 그는 어쩌면 자신의 인생 속에 진리, 현존 등의 이중적인 면을 투영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어려운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를 그의 삶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글을 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이데거는 나치의 인종적/생물학적 반유대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조처를 혁명 과정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수적 사태로 이해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하이데거에게 인종적 반유대주의는 아니더라도 특정한 형태의 반유대주의적태도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 p45


 "x가 c라면 x는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이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존재가 없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그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사라진다. 기술이론에 따르면 '존재'는 기술 어구를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그 저자는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지만, "스콧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분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된, '실존 existence'를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 p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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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10-16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과연 하이데거 같은 나치 히틀러의 악행에 동조한 자의 철학을 공부해야 하나 회의감이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10-16 21:42   좋아요 1 | URL
김민우님 말씀 충분히 이해됩니다. 사상과 행적을 분리할 수 없기에, 인간 하이데거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발자취가 20세기 사상사에 너무도 뚜렷하기에 이를 쉽게 무시하기도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의 명암이 있듯이, 하이데거의 사상 또한 명암이 있음을 인지하고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
 

 사회적 가치는 단순히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권위자의 선포로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264)...  따라서 자유의 과정적 측면이나 기회적 측면 모두 '1인당 산출의 증대'라는 전통적인 발전관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자유를 활용으로서만 평가하느냐 그 이상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다. _ 아마티아 센, <자유로서의 발전> , p267/325


 자유(自由). 취임식과 UN 연설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부르짖던 사회적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인(公人)으로서 그의 말과 행동에 대해 사람들이 평가할 자유에 대해서는 참으로 인색하기 그지없다. 취임 후 그간 추진한 부자감세, 5세 조기 입학 등 정책의 일면으로 판단컨데, 그가 말하는 자유는 센이 지적한 바와 같이 '1인당 산출의 증대'라는 자유주의 발전관을 넘지 못하는 듯 하다. 자유의 개념을 남용하지 않고,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 여겨진다... 


공적 논쟁과 토론이 우리의 사회적 가치의 형성과 사용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을 전제하면(서로 다른 원칙과 기준의 경쟁하는 주장들을 다루는 것),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는 사회적 가치의 출현에서 필수불가결하다. 사실 중요한 평가와 가치 형성의 과정에 참여할 자유는 사회적 존재에게 가장 핵심적인 자유 중 일부다. _ 아마티아 센, <자유로서의 발전> , p264/325


PS. 때마침 읽고 있는 <파리의 풍경 3>에는 자신의 비속어 발언에 대한 비판을 논란으로 만들어 내고, 보도언론을 탄압하는 한심한 현 정부와 여당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21세기 한국에서 18세기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는 글을 쓸 때 반드시 어떤 단체에 상처를 입히게 마련이다. 어떤 폐단을 파헤쳐 보면 수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권리를 불법으로 휘두르고 오래전부터 거듭해서 저지른 실수를 계속 저지른다. 더욱이 사기꾼도 득실거리는데,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사기꾼을 칭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들을 자신의 잔인한 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박해하려 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당신을 평생 미워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작가는 공평하고 냉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 영혼을 자유롭게 순환시킬 수 있을 터! 그는 확고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가 만일 어떤 사람들의 주장, 자만심, 심지어 변덕에 맞설 만한 말을 한다면, 그들이 자기를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진리의 적들이 작가의 권리를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행위에 저항하여 온갖 종류의 앙갚음을 한다는 사실에 확실히 대비해야 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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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언론을 장악하지 말아야 하고, 그 욕구를 버려야 해요. '나를 비판하는 언론의 존재가 국정운영에 도움이 된다'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을 못하는 정부는 민주정부가 아니라고 봐요. 연합뉴스든 공영방송이든 그걸 장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독립성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취재해서 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요. _ 박성제, <권력과 언론> , p215/321


 대통령의 품위없는 언행으로 성과없는 외교뿐 아니라, 일주일째 '발언을 했다', '했지만 **는 안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등으로 속보를 쏟아내다가 결국 MBC 사장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기소권+인사권을 장악한 검찰공화국의 언론 길들이기인지, <권력 3부작> 중 두 주체인 검찰과 언론권력의 충돌인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기본적으로 검찰 권한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정권이 검찰을 이용하려고 했던 거죠. 막강한 권한을 분산시키면 정권 입장에서는 검찰을 이용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축소되니까 이점이 없어지게 되죠. 독재정권이 검찰을 정권유지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권한을 점점 더 많이 부여하고 대신 인사권은 대통령이 쥐고 있었던 겁니다. 검찰의 권한은 그대로 둔 상태로 중립성을 강화하겠다면서 인사권 등을 독립시켜주면 검찰 자체가 권력기관화되어서 통제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_ 최강욱, <권력과 검찰> , p182/246


 분명한 것은 지금 듣기평가 문제를 풀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환율과 금리는 고공행진을 하면서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오지만, 수사밖에 하지 못한는 정권은 자신이 잘하는 전공만 내세우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수험생도 시험과목에서 시간과 노력을 안배해서 배분하는데, 일국의 장관과 대통령이라는 자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참 암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능력도 없이 큰 자리를 겁도 없이 맡겠다고 나선 이들도 답답함과 후회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들이 상식적이라는 전제하에. 윤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시간들은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에게도, 일반 국민들에게도 참 불행한 경험일 것이다. 대통령의 불행으로부터 얻어지는 부정적인 감정(-1)이라 하고,  국민들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100 이라고 가정하면,( 너무 적긴 하지만), 단순히 열받는 것을로 끝낸다면 전체 감정은 -100에 그칠 것이다.


 양수는 당연히 무의 상태보다 많은 것을 의미하고 음수는 무의 상태보다 적은 것을 의미한다. 0에다 1을 더하면, 즉 무에다 1을 더하면 양수가 되고 그 값에 계속해서 1을 더한다면 연속해서 양수의 값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자연수 natural numbers라고 하는 일련의 수들의 기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연속해서 덧셈을 게속하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1을 뺀다면 다음과 같은 음수들이 나열될 것이다. 이렇게 무한으로 지속 가능하다._ 레온하르트 오일러,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대수학 원론> , p18


그렇지만, 이러한 불행한 경험으로부터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면 지금의 불행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부정적인 감정의 합(合)이 아닌 방향성을 의미하는 곱셈으로 생각한다면, 대통령의 부정적인 행보 (-1)를 반대방향으로 -100만큼 가져갈 수 있다면, 우리는 100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1) * (-100)= +100



 이제 (-)에 (-)를 곱하는 경우만 남았다. 예를 들어 -a 에 -b를 곱한다고 하자. 두 문자들을 곱한 값이 ab가 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수의 앞에 (+) 부호를 붙여야 하는지 (-) 부호를 붙여야 하는지가 고민될 것이다. 당연히 두 부호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 부호는 붙일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증명한 바와 같이 -a에 +b를 곱한 것이 -ab였으므로, 이와 다른 -a와 -b의 곱은 당연히 이와 반대의 값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답은 +ab다. _ 레온하르트 오일러,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대수학 원론> , p22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1707~1783)는 <대수학원론>에서 음수와 음수의 곱을 위와 같이 설명한다. 본문에서 음수와 양수의 곱이 음수이니, 음수와 음수의 곱은 음수가 될 수 없다는 설명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지만, 이를 설명한 다른 수학 모델 - 우체부 모델, 수직선 모델 - 등에서는 하나의 실체와 방향성으로 설명하면서, 오일러 설명의 부족함을 메꾼다. 무능한 정권의 어설픈 모습으로부터 우리가 자극을 받아 달라질 수 있다면, 아픈 경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이와 함께 지금 언론의 모습이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이익집단의 모습이 아니라, 권력견제기관으로의 근원적인 회귀노력이 되기를 기원한다...


 지금 언론이 기레기라는 오명을 씻으려면 팩트를 제대로 보도해야 하고, 권력과 자본의 압력에서도 벗어나야 하고, 또 공정하게 보도해야 해요. 가짜 뉴스가 떴을 때는 팩트체크도 해주어야 하고요. 기레기라는 말을 듣지 않는 길이 쉽지는 않아요. 그건 인정해야 합니다. 그만큼 언론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부작용이 있으니까 기자들이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하는데 아직은 잘 안 되고 있어요. _ 박성제, <권력과 언론> , p52/321


 사실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성역 없이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비판할 자유인 것은 맞지만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독자나 시청자들로부터의 빞판에 어색한 반응을 보였던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언론의 자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그 시국을 거치면서  굉장히 선명하게 느꼈어요. _ 박성제, <권력과 언론> , p29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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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0-01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일러의 대수학 원론...음수와 음수의 곱은 음수가 될 수 없다는 근거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ㅎㅎ

겨울호랑이 2022-10-01 11:58   좋아요 1 | URL
오일러는 음수와 양수의 곱이 음수로 나왔으므로, 음수와 음수의 곱은 다시 양수가 되어야 한다고 논증합니다만, 조금 설명이 빈약해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보입니다. 수직선에서 음수 방향으로 -a 만큼 이동한 후, 이와 반대방향으로 b배(-b) 이동한 것으로 설명했다면 조금은 깔끔해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구약 성경의 지혜서 중 하나인 코헬렛서는 목적이 없어 방향 감각을 상실하거나 계속되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리는 코헬렛서를 통해 인생이 각자가 경험하는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삶의 순간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이해하고, 놓치기 전에 누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7/152 


 올해 첫영성체 교리를 듣고 있는 연의. 외워야 할 기도문도 많고, 성경 필사도 해야 하고, 평일미사도 가야하기에 예전보다 교리 이수 조건이 까다로워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부모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 교육도 별도로 진행되고 독후감도 제출해야하는 등 부모 역시 신경쓸 부분이 없지 않다. 그리고, 오늘 페이퍼는 제출할 과제 도서에 대한 내용이다.


 과제 도서인 조앤 치티스터 (Joan D. Chittister, 1936 ~ )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구약성경><코헬렛 Ecclesiastes>서의 내용을 현대인의 시각에서 재음미하는 영성서적이다. 태어날 때, 잃을 때, 사랑할 때, 웃을 때, 전쟁의 때 등등. 우리의 삶 전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과 사건 안에서 저자는 그 의미를 발견하고 독자들과 나눈다. 저자가 발견하는 '때'의 의미는 또한 <코헬렛> 저자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_ <구약성경> <코헬렛> 3:1~9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적극적으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을 의식하고, 거기에 몰두하며,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 삶을 알차게 사는 비결이고 배워야 할 교훈이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지금 현재를 어떠한 요령 없이 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중요한 방식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이 문제는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끊임없이 말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5/152 


 <코헬렛>의 저자로 알려진 솔로몬은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에서는 삶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 나눔한다. 삶의 매 순간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의 본문 내용은 하나의 지혜 문학으로서 우리에게 잠언(箴言)으로 다가온다. 잔잔하게 영혼을 적시는 책의 내용은 편안하게 다가오지만, 페이퍼에서는 경구보다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인용한 <코헬렛> 3장 9절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이 한 문장으로 <코헬렛>의 '때'에 대한 코헬렛의 이야기는 반전으로 다가온다. '지혜의 왕'이라 불리던 솔로몬은 모든 것에 대한 때를 말한다. 현명한 그는 때의 의미를 깨닫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와 영광을 부렸던 그가 말하는 '허무'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람의 의미를 묻는 그의 물음과 이로부터 느껴지는 허무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코헬렛> 1장의 첫 구절로 이끈다. 때에 맞춰 인간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았건만, 그로부터 남겨진 것이 허무라면, 솔로몬의 마지막 깨달음은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인간의 무기력과 상대적으로 유한한 인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 곳으로 서둘러 간다. _ <구약성경> <코헬렛> 1:1~5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CE 354 ~ 430)는 <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에서 <코헬렛>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신의 섭리에 의해 주재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상대적으로 유한하고 한계가 많지만, '헛됨'을 벗어날 수 있다면 유한함에서 벗어나 절대성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교부의 해설 속에서 신의 절대성과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허무를 극복할 하나의 방편을 발견하게 된다. 초월(超越. transcendence).


죄와 그 벌에서 유래하는, 영혼의 이 도착倒錯으로 말미암아, 육체를 지닌 모든 사물이, 솔로몬의 말대로, 헛된 인간들의 헛됨이여. 세상 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여기서 '헛된 인간들'이라는 말이 괜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다. 헛되게 만드는 인간들이 제거된다면, 즉 맨 마지막 것들을 맨 처음 것처럼 추구하는 인간들이 없다면, 육체를 지닌 사물이 곧 헛됨 그 자체가 되지는 않으며, 비록 미약하더라도 아무런 결함이 없는 자기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_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21.41


 사람에게 위험한 바로 그 섬광들을 경험한 다윗은 자신의 모든 희망을 하느님의 이름에 두는 이가 행복하다고 옳게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헛된 것과 어리석은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를 향해 노력하며 늘 자신의 내적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코헬렛의 말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초월하십시오. 먼저 여기에서 달아나지 않으면, 지금도 존재하고 늘 존재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암브로시우스, <세상도피> 1,4) _ <교부들의 성경주해 9 - 잠언, 코헬렛, 아가>, p295 


 이러한 연결점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의 본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 순간에 머물면서 우리는 새로워지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도 피해가지 못했던 허무함에 빠지지 않을 좋은 조언이 된다. <대학 大學>의 '苟日新(구일신) 日日新(일일신) 又日新(우일신)'과도 통하는 본문의 내용 속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지만, 절대성에 수렴해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이 즉시 일어나는 것을 막는 자연의 방법이다." 이 말은 영혼을 잠시 진정시키고 잠깐 멈추게 하는, 영적 성숙의 시간적 단계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시간은 차례차례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 순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가 그 시간 안에서 모든 상황을 겪게 한다. 그러나 인생한 할당된 일수를 채웠는지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는지로 평가된다.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48/152 


 <코헬렛>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에서는 흐르는 시간 안에서 인간의 유한성이 드러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현재로서 절대적인 시간의 미분(微分)이라면, 과거-현재-미래의 절대적인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적분(積分)이라 할 수 있겠다. 미분의 차원(次元)과 적분의 차원이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시간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현재'로 존재하는 '때'에만 관여할 수 있다. 여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담으려 노력하는 자세에 대해 옛 지혜문헌들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접점을 갖는다.  


 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11권 20,26)...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기대에 해당하는 영역은 짦아지고 기억에 해당하는 영역은 길게 연장된다. _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권 28.38, p456


 기나긴 시간이란 동시에 펼쳐질 수 없는 수많은 순간瞬間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아듣게 하겠습니까? 영원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고 전체全體로서 현전現前합니다. 어느 시간도 전체로서 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과거는 미래에 의해서 밀려나고 모든 미래는 과거에 의해서 뒤쫓기며, 모든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하는 것에 의해서 조성되고 전개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보게 하겠습니까? 누가 인간의 마음을 붙들어 세워 멈춰 서서 바라보게 만들고, 영원이 어떻게 정지한 채로 미래 시간과 과거 시간을 결정하는지, 그러면서도 영원 자체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님을 바라보게 만들겠습니까? _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권 11.13, p431


 제자가 스승인 랍비에게 물었다. "저처럼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모세처럼 살 수 있습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죽을 때,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네. '너는 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을 걸세." 그렇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때가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때가 왔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때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52/152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가 유한한 시간에서 담아야 할 절대적 가치를 말한다면, 시간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이번에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에서 출발해보자. 객관성과 주관성, 영원과 찰나의 대조로 상징되는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우주(宇宙)에 대한 해석방향이 달라지고,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됨을 보여준다는 내용은 리 스몰린(Lee Smolin, 1955 ~ )의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에 담겨있다.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 _ 김승중,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p37 


 절대적인 시간의 세계가 수리(數理)적 질서로 마치 정밀한 시계와 같은 구조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면,  리 스몰린은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에 대해 말한다. 이는 시간 안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관계주의적 관점과 시간 밖에서 시간을 관조(觀照)하는 절대주의적 관점은 시간을 하나의 변수(變數)로 보는가, 주어진 조건으로 보는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시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이야기의 방향은 다르지만, 책의 내용  중 수학을 통해 시간(時間)을 또 다른 공간(空間)으로 이해하는 뉴턴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 안에서 우리는 <고백록>, <코헬렛>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 첫 영세 교리 과제로 주어진 도서에 대한 내용이 어느새 산으로 와버렸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쓴 듯하다. 이 페이퍼 중 아우구스티누스 선에서 적당히 재편집을 해서 제출해야겠다...


 시간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 시간 밖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인간 사고와 행위의 여러 측면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기술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접근법이 절대적이고 이미 존재하는 범주들의 집합으로서 결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시간 밖에서 생각하는 것이다(p12)... 시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관계주의 relationship다. 관계주의는 어떤 것에 대한 가장 참된 기술은 그것이 속한 계의 다른 부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다. _ 리 스몰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 p13/302


 세계를 동역학적 부분과 배경(동역학적 부분을 둘러싸고 있고 우리가 이것을 기술하는 용어들을 정의하는)으로 나누는 것은 분명 뉴턴적 패러다임의 천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이 패러다임을 전체 우주에 적용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게 만든다. 과학을 우주 전체의 이론으로 확장할 때 우리가 마주치는 도전은 정적인 부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며, 우주 밖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_ 리 스몰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 p116/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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