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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페이퍼를 읽기 전 먼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읽으시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부족하지만, 제 리뷰를 먼저 훑어 보시면 조금은 수월하게 페이퍼를 읽으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1248750


  다양한 대안들 중 오직 하나만 실재를 표상할 수 있으며,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과학자는 자신이 그 하나 또는 그것의 입수 가능한 근사치에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학자는 이렇게 하나의 특정한 대안을 신봉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즉 그는 실수를 했을 수 있다. 그의 이론과 양립 불가능한 단 하나의 관찰은 그가 줄곧 잘못된 이론을 사용해 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면 그의 개념 체계는 버려지고 교체되어야 한다. 이는 과학 혁명의 개략적인 논리적 구조다.(p139)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이번 페이퍼에서는 리뷰에 이어 토머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 ~ 1996)은 코페르니쿠스(Mikołaj Kopernik, 1473 ~ 1543)의 태양중심설이 과학 혁명의 조건을 충족하는가를 <코페르니쿠스 혁명 The Corpernican Revolution>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를 위해 당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기되기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위치를 차지한 이론은 무엇이었지부터 시작해 보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Almagest>는 고대 천문학의 위대한 성취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책으로, 모든 천체 운동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하고, 정량적인 설명을 제공한 최초의 체계적인 수학적 논문이었다. 그 결과는 아주 훌륭했고 그 방법은 아주 강력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의 계승자들은 행성 이론의 정확성 또는 단순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주전원에 주전원을 더하고 이심원에 이심원을 더하며, 근본적인 프톨레마이오스 기법의 엄청난 다양성 모두를 샅샅이 파헤쳤다.(p133)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코페르니쿠스 이전 정상과학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와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100 ? ~ 170 ?)의 이론이었다. 여기에 중세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 결합되면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는 이들 정상과학에 의해 굳건하게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의 패러다임은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새롭게 도전받는다. 


 발견으로든 이론으로든 간에,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우선 개인이나 소수의 마음에서 나타난다. 과학과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처음 익힌 것은 바로 그들이며, 전이를 일으키게 하는 그들의 능력은 전문 분야의 대다수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공유되지 않은 두 가지 상황에 의해서 성숙된다.(p253) <과학 혁명의 구조> 中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에 자전을 도입함으로써 항성 천구를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고, 이는 항성 천구에게서  물리적 기능을 빼앗았다. 그리고 지구에 공전을 도입함으로써 천구의 크기를 엄청나게 키울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행성 간 물질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그것의 본질적인 기능 대다수를 없애는 동시에 그것이 훨씬 더 많이 있어야 함을 요구했다... 지상계에서는 기압이 17세기 공기 역학 관념에서 진공을 대체했다.(p168)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宇宙論)은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옮기고, 지구에 자전과 공전을 도입하면서 '태양중심설'이라는 새로운 내용을 주장했다는 면에서 '전환된 패러다임(shift paradigm)'이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기존 정상과학의 언어인 주전원(epicycle)을 통해 설명했기에, 우리는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과거 용어의 차용'의 예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코페르니쿠스의 주전원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것과 달랐기에 전통적 사용과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확인사항에 포함된다.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옛 것들로부터 탄생된 것이므로, 그것들은 보통 전통적 패러다임이 이전에 사용해왔던 개념적이며 조작적인 용어와 장치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차용한 이 요소들을 전통적 방식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p260) <과학 혁명의 구조> 中


 <회전에 관하여>의 우주는 모든 면에서 전통적이었으며, 코페르니쿠스에게 그 우주는 지구의 운동과 양립 가능해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태양의 운동은 단순히 지구로 이전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여전히 유한하며, 여전히 모든 행성은 동심 천구들에 의해 돌려진다. 그러나 그 천구들은 더 이상 바깥 천구에 의해 돌려질 수 없는데, 바깥 천구는 이제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은 원들의 합성이어야 했으며, 지구를 움직였음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주전원을 버릴 수 없었다.(p304)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이처럼 과학 혁명의 여러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의 조건을 충족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과학혁명이 될 수 있었을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과학 가설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수용하려면 인간과 신의 관계 및 인간 도덕의 근거에 관한 견해를 변화시켜야 했다. 그러한 변화는 하룻밤에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증거가 <회전에 관하여>에서처럼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있는 동안에는 거의 시작도 되기 어려웠다.(p379)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16, 17세기의 위대한 새 과학 이론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 체계가 스콜라적 비판에 의해 찢어진 곳들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 과학자들이 중세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태도로,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의 이성의 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고인이 된 화이트헤드 교수가 지적했듯이, "현대 과학이론의 발전에 앞서 형성된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중세 신학의 무의식적 파생물이다."(p233)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은 혁신적인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충분한 여건의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브루노(Giordano Bruno, 1548 ~ 1600)을 화형시키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 ~ 1642)를 종교재판으로 넘기려고 했던 기독교의 신앙(信仰) 이 역설적으로 과학을 또다른 신앙으로 만드는 것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여건의 중요함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降, 1941 ~ )의 <16세기 문화혁명>, <과학의 탄생>이 충분한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과학 연구에 속어가 사용되기에 이른 것은 언어적 차원에서 본다면 단순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은 속어가 여러 분야의 전문용어나 라틴어 또는 외국어에서 어휘를 빌려 와 표현을 풍부하게 만들고, 학문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다듬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된 속어는 규범화와 표준화를 통해 국어로 승화되었다. 이는 유럽의 언어와 문화에서 나타난 근본적 변화였다. 이제 국어가 된 속어의 사용은 확실하게 널리 확대돼 갔다. 이와 함께 과학과 기술의 연구 기반을 닦은 사람들의 수도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16세기 문화혁명의 커다란 성과이자, 17세기 과학혁명의 전개와 확대를 밑에서부터 지탱해 주었던 것이다.(p684) <16세기 문화혁명> 中


 17세기 과학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망원경, 현미경과 같은 관측기기를 개발하고 개량함으로써 경험의 세계를 일변시켰다. 진공펌프처럼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함으로써 실험 과학을 전혀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던 것이다.(p769) <16세기 문화혁명> 中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6세기 문화혁명>을 통해 당대의 언어로 과학이 보급되었기에, 대중적으로 과학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며, 대중적인 과학도구의 개발이 많은 데이터의 축적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 ~ 1630) 등에 의해 뒷받침되고 수정, 보완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론과 실험의 일치를 증진시키거나 또는 어찌하든 간에 그런 일치가 증명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는 일은 실험과학자와 관찰자의 숙련과 상상력에 끊임없는 도전을 제기한다. 연주시차(parallax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예측을 증명하기 위한 특수 망원경 등이 그 예인데, 이런 특수장치는 자연과 이론을 점점 더 가깝게 일치하도록 드는 데에 엄청난 노력과 발명의 재능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p95) <과학 혁명의 구조> 中


 일반적인 과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이 근대 천문학 나아가 근대 물리학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 과학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진정한 전환점은 오히려 케플러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정지한 상태의 태양계를 제창하긴 했지만, 천문학이 어떠한 과학인가 하는 점에서는 고대 이래의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케플러의 천문학은 단순히 태양을 중심에 놓고, 원궤도를 타원궤도로 바꾸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개혁의 본질적인 점은 행성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태양이 행성에 미치는 힘이라는 관념을 도입함으로써, 천문학을 궤도의 기하학에서 천체의 동역학으로, 천공의 지리학에서 천계의 물리학으로 변환시킨 데 있다. 그 근저에는 사고의 결정적인 전환이 있었다.(p636) <과학의 탄생> 中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당대의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되고, 이에 대한 주장이 널리퍼졌음에도 당대 천동설(天動說)의 주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는 <과학 혁명의 구조>의 내용을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개념이 향후의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 혁명의 전형적인 예(例)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p263) <과학 혁명의 구조> 中


 케플러의 타원과 갈릴레오의 망원경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반대를 곧바로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p439)... 1610년 갈릴레오가 관찰을 발표한 후,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유용하지만 물리적 의미는 없는 단지 수학적 도구일 뿐이라며 묵살할 수가 없었다.(p441)... 옛 개념 체계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러나 옛 개념 체계는 정말로 사라졌고, [당시에는]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웠겠지만 지구의 유일성과 안정성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사라진 것은 분명히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p443)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케플러의 법칙을 따르는 행성의 운동은 속도, 방향, 곡률이 케플러의 법칙을 따르는 행성의 운동은 속도, 방향, 곡률이 궤도의 매 지점에서 변한다. 지구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비대칭적인 운동은 끊임없이 밀고 당김의 결과로서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되었다. 달리 말해,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은 우선 행성 운동의 전통적인 설명을 파괴했고, 이제 케플러에 의해 수정되면서 천체 물리학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제안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자연스러운 원형의 천체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지구에 적용함으로써 통일성을 달성했다.(p476)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태양의 흑점과 신성만이 코페르니쿠스 직후의 서양 천문학계에서 파악한 천상계 변화의 유일한 사례들은 아니다. 실오라기같이 단순한 것을 비롯한 전통적인 천문기구를 사용하면서, 16세기 말의 천문학자들은 그 이전에는 불면의 행성과 항성에만 허용되던 공간에서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혜성들을 계속 발견했다. 옛 대상을 옛 기기로 관측하면서 천문학자들이 그토록 쉽고 빠르게 새로운 것들을 보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천문학자들이 전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을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그들의 연구는 마치 그런 것처럼 반응했다.(p217) <과학 혁명의 구조> 中


 페이퍼를 통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제시한 사상과 그 영향이 과학 혁명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과학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천재 한 명의 영감(靈感)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쿤이 비판한 칼 포퍼(Sir Karl Raimund Popper, 1902 ~ 1994)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학자와 과학적 시기의 유형론에 대한 쿤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그것은 제한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나의 주도적 이론(쿤의 용어법으로 한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되고 예외적인 혁명이 뒤따르는 '정상적' 시기들에 관한 그의 도식은 천문학에는 썩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예컨대 물질이론의 진화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또, 다윈과 파스퇴르(L. Pasteur) 이후 생물학의 진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p99)... 내가 비록 쿤이 그의 소위 '정상' 과학을 발견한 것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정상적으로' 각각의 과학 영역에는 하나의 지배적인 이론이 있다는 그의 주장을 과학의 역사가 지지한다거나, '비통상적' 과학의 혁명적 기간들, 즉 지배적 이론의 부재로 말미암아 과학자들간의 의사소통이 마치 단절된 것인 양 그가 기술한 시기가 중간중간에 끼여드는 일련의 지배적 이론들로 과학의 역사가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p100) <현대 과학철학 논쟁, 정상과학과 그 위험성> 中


 쿤의 주장처럼 과학의 발전이 단속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으면, 포퍼의 주장처럼 반증(反證)되면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개인적으로 과학계이라는 폐쇄계(closed sysem)에서 본다면, 쿤의 혁명적 발전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만, 사회 전체의 열린 사회에서는 포퍼의 주장에 더 귀가 열린다. 공정한 판단을 위해서는 포퍼의 다른 저작들 <추측과 논박>,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정리해야겠다. <추측과 논박>은 포퍼의 과학철학이 담겨 있기에<과학 혁명의 구조>에 대한 하나의 반증이 될 것이며,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사회에 대한 포퍼의 철학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방계(open system)에서의 철학을 정리하는 다른 계기가 될 것이다.


 갈릴레오 사후 150년 동안 수용된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우주도 아니었다... 18, 19, 20세기가 물려받은 코페르니쿠스주의는 17세기 뉴턴주의적 세계 - 기계 관념에 맞추어 재건설된 코페르니쿠스주의다.(p444) <코페르니쿠스 혁명> 中


 이제 긴 페이퍼를 마무리하자.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분명 과학사의 전환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과학 혁명임에 불과하지만,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한 그 배경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여러 사람의 기여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과학 혁명은 갑작스럽지만, 예정된 수순이었음을 확인하며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PS. 불교(佛敎)에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역시 이와 관련하여 생각하게 된다. 포퍼와 쿤의 논쟁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들은 지식인 마을의 책을 추천한다...


 PS2. 우리는 15세기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주장대로 글(언어)의 보급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났다면, 당대 성리학자들의 한글 사용 반대는 추상학문인 성리학과 보편학문인 과학기술의 주도권 다툼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다툼이 조선 초기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본다. (물론, 충분히 논박당할 수 있다.) 조선 초기 과학 기술이 후기에 이어지지 못한 것에는 패러다임 다툼에서 기(氣)의 학문이 이(理)의 학문에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지프 니덤(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1900 ~ 1995)의 <조선의 서운관 The Hall of Heavenly Records: Korean Astronomical Instruments and Clocks, 1380-1780>에서 정리해야겠다... 참 읽을 책은 많고 읽은 책은 적다... 少年易老 學難成 一寸光陰 不可輕. 시간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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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주제는 놀이와 문화의 관계이므로, 놀이의 모든 형태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놀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체화하는지 그것을 주로 다루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p41)...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이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p42)...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특정한 한계 속에서 "놀아진다(played out)". 놀이는 그 나름의 방향과 의미를 갖고 있다.(p45) <호모 루덴스> 中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는 <호모 루덴스 Homo Ludens>에서 인류 문화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는다. 놀이가 단순한 심심풀이가 아니라 '문화 文化'  자체라는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의 특성을 위와 같이 자발성, 비일상성, 한계성으로 규정한다. 오랫만에 <호모 루덴스>를 꺼내든 것은 작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지난 한주 동안 외부 출장이 있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동안 아빠 얼굴을 못봐서였을까. 딸아이가 지난 주말 내내 함께 놀자고 졸랐다. 주말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출장 정리를 하려고 밤에 책상에 앉으니, 조용히 들어와 그림 한장을 내민다.


[그림] 아빠, 놀아주세요(by 연의)


 일요일 밤이라 할 일이 있어 내 마음도 울고 있었지만, 얼마나 함께 놀고 싶으면 이런 편지까지 쓸까 싶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 놀고 일을 마무리 한 후 아이와 놀이, 그리고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가족과 놀이. 프랑스 역사 학자 필리프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아동의 탄생 L'enfant et la vie familiale sous l'ancien regime> 에서 근대 유럽 교육제도의 발달이 가져온 가족 내 아이들과 어른들의 분화를 지적한다.

 

 가족과 학교는 함께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분리시켰다. 학교는 이제까지는 방만했던 아동기를 점점 더 엄격해진 규율 체제속에 가두었다. 이 규율 체제는 18~19세기에 아동기를 완전히 기숙사에 감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p648)... 근대의 가족은 공동체 생활로부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사를 박탈했다. 그것은 사생활과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감성, 습관, 그리고 생활양식에 의해 결합되었다.(p649)... 새로운 사회는 각자가 전용 공간 속에서 각자의 생활양식을 누리는 것을 보장했으며, 그 공간 속에서 주요한 특징들은 존중되어야 했다. 그리고 각자는 관습적인 모델, 이상적인 유형을 따라 했으며, 결코 축출이라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러한 모델에서 일탈하려 하지 않았다.(p651) <아동의 탄생> 中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표되는 근대세계는 개인에게 사생활(私生活)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족 내 구성원들을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가족 내 다른 사람들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진단이다. 전문화된 '학교(學校)'에서 또래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부모와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현실이라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도올 김용옥(檮杌 金容沃, 1948 ~) 의 <효경 孝經 한글역주>에서 찾아본다.

 

 어찌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만이 효가 될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예운> 편에서 말하는 십의(十義)는 어디까지나 쌍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효의 원초적 본질을 아래로부터 위에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다. 효의 가장 원초적인 사실은 자식에 대한 보호본능과 관련된 것이다. (p156)... 그러나 그 효가 도덕적 차원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그 핵심에 있는 것은 부모의 자애이지 자식의 효도가 아니다. 부모의 자애 때문에 자식의 효도는 마땅한 당위로 인식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리적 코딩(coding)을 넘어서는 도덕적 "베품"이기 때문이다. 이 "베품"의 전제가 없이 아랫사람의 복종이나 희생,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강탈이요, 복종주의적 강압이다.(p157) <효경역주> 中


 <효경한글역주>에서는 효(孝)의 본질이 내리사랑임을 밝힌다. 갓난 아이가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손을 내밀 때, 이에 대한 대답이 '효'라면, 딸아이가 부모에게 함께 해달라고 조를 때 함께 해주는 것. 이것 역시 효의 실천이 아닐까. 한편으로 노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바라본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지만, 하위징아의 놀이해석에 따르면 아이들과의 놀이가 어떤 교육보다도 중요한 의식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종합하면 자녀와의 놀이는 효의 표현이자,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 수단이다.


 긴장의 요소는 놀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한다. 문제를 파악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노력을 가져온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 이들은 뭔가 어려운 일을 착수하고 성공하여 긴장을 끝내기를 바란다... 놀이 그 자체는 선과 악을 초월하지만, 놀이에 내재된 긴장의 요소는 놀이하는 사람의 심성 즉 용기, 지구력, 총명함, 정신력, 공정함 등을 시험하는 수단이 되므로 특정한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p47) <호모 루덴스> 中


 늦은 밤, 뒤늦게 일을 마무리 하느라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놀이가 시간적/공간적 한계성을 가지는 것처럼, 효 역시 시간적/공간적 한계성이 있음도 생각해 본다. 나이들어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려고 하나 기다려주실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자녀들 역시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함께 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우리 품안에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작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나중의 그 어느 순간보다 필요하고 중요함을 깨닫는다. 비록,  그것이 유치하게 보이는 놀이일지라도.


 아이의 작은 그림 편지를 보면서, 가족과 효, 그리고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양육(養育)은 부모와 자녀를 함께 성장시키는 상호작용임을 다시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 한다. 

 

PS. 개인적으로 아이들과 놀이의 최고단계는 '역할놀이'라 생각한다. 아이의 생각과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5분을 넘기기 힘든 놀이가 역할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역할 놀이를 잘 해 주는 아빠들을 보면 마음 깊이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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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6: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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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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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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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0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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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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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5: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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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5: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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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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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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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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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의 탐구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은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의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 Analytische Psychologie)을 대중적으로 설명한 입문서(入門書)다.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3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한마디로 '무의식(無意識, unconsciousness)의 창조적 역할'이라 하겠다.  

 

 융의 무의식관은 무의식이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며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는 만큼, 진화의 흔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p33) <그림자> 中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는 무의식을 진화과정의 부산물로 인식한 반면, 융이 바라보는 무의식의 세계는 '창조의 원천이자 뿌리'다. 융은 무의식을 이처럼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했기에, 그의 이론에서 무의식의 영역은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등으로 구분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 즉 의식(consciousness)과 모르고 있는 마음, 즉 무의식(the unconscious)로 이루어지며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의식계에서는 '나'(Ich, ego)'를 볼 수 있고 무의식계에서는 '그림자' '아니마'(Anima) 또는 '아니무스'(Animus) '자기'(self)라 부르는 독특한 요소가 있다. 우리의 정신은 심리적 복합체, 콤플렉스로 이루어지며 이 가운데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콤플렉스는 다른 말로 원형(Archetype)이라 부른다.(p35) <그림자> 中 


 우리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한다면, 우리가 자아(自我 Ich ego)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의 주체(主體)인 반면, 무의식계의 양상은 조금 복잡하다. 무의식의 영역은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신분석학 3부작에서는 우리 삶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합해 '자기실현'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이들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는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이번 페이퍼에서는 <그림자>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내용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람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p41)... 우리의 무의식에는 의식과 무의식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원형이 있다. 이것을 자기원형(Archetypus des selbst)이라 하는데 이 또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원형적 그림자는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서의 '나'의 그림자에 비해 엄청나게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p42) <그림자> 中


 칼 융에 의하면 그림자는 무의식에서 열등한 인격에 해당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씨, 스타워즈 Star Wars에서 포스(Force)의 어두운 면, 절대선(絶對善)에 대응하는 절대악(絶對惡)이 그림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칼 융의 그림자는 단순하지 않다. 그림자는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의 그림자의 복층구조이며, 이 때문에 다소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진] Dark Force Darth Vader(출처 : https://artinsights.com/product/dark-force-darth-vader-star-wars-original-painting-by-william-silvers/)


 그림자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개인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에 억압된, 앞으로 의식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열등한 인격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가장 밑바닥 단계는 동물의 충동성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p85) <그림자> 中


 그림자의 의식화란 그림자의 표현으로서 완결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림자가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 나타날 경우에 한한다는 사실도 언급하였다. 집단적 무의식의 그림자상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다름 아닌 자기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 충격을 간직하는 것 이외의 일을 할 수 없고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파괴적인 충동에 휩쓸리지 않고 조심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p203) <그림자>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란 어떤 집단 성원의 무의식에 같은 성질의 그림자가 형성되어 다른 집단에 투사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그림자는 개인적인 특성을 가지기보다 집단적 특성을 지닌다. 그러한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그 집단성원이 하나의 페르조나, 즉 집단의식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p118) <그림자> 中


 여기에서 우리는 연극 탈을 의미하는 페르조나라는 개념을 만난다. 집단사회의 규범과 관습은 개인에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식'을 강요하고, 그 결과 개인의 무의식에는 집단의식의 그림자도 함께 자리하게 된다. 일본인의 심리를 설명할 때 흔히들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를 통해 설명한다. 친절한 겉모습과는 또다른 속마음을 가진 이들 용어를 통해 집단적 무의식과 그 그림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태어난 이후 개인이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무의식의 층을 융은 개인적 무의식(the personal unconscious)이라 하였다. 프로이트 초기학설의 무의식은 여기에 포함된다... 융은 더 나아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생활사에서 나온 무의식의 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인간 고유의 원초적인,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무의식의 심층으로 이것을 융은 집단적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 이름하였다.(p33) <그림자> 中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조나(Persona)'라 부른다. 그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행이다.(p36) <그림자> 中


 그렇다면, 이처럼 열등한 그림자가 창조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그림자>를 통해 우리가 그림자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으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림자>의 나머지 내용은 이러한 양상이 전래 동화와 종교(宗敎)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음 속의 열등한 것, 미숙한 것은 통제와 억제, 혹은 승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살림'으로써, 즉 움직이게 함으로써 발전/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의 그림자의 의식화는 바로 무의식의 열등기능인 그림자를 의식이 받아들이고 의식에 동화시켜 나감으로써 그 바라던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p277) <그림자> 中


 그림자의 문제, 그림자와의 대면과 갈등은 결국 대극의 합일과 완성의 상징 - 결혼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필수적인 고통의 과정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도 많은 동물들이 콩쥐를 돕는다. 본능의 중요성은 여기서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p242)... 친어머니는 이야기의 무대 뒤에서 초능력을 발휘하여 콩쥐를 돕는다. 다시 말해 그녀는 무의식의 지혜와 가까이 있고 의붓어머니와 그 딸은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한 개인을 놓고 볼 때 사람은 때로 이 두 갈등 사이에서 방황한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찾을 수 있다.(p243) <그림자> 中


 그리고, 의식과 열등한 인격의 통합이후 우리는 새로운 통합대상을 만나게 된다.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가 그들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모두 혼(魂)에 속하는 개념인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남성의 무의식(아니마)은 여성적 특성을, 여성의 무의식(아니무스)는 남성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라 하겠다. 융에 따르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전체적 관점에서는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적 특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빛과 어둠의 서로 떨어져 있던 두 측면은 아니마를 통해서 만나게 된다. 자아의식이 무의식을 소홀히 하면 그림자가 아니마를 감싸버려서 아니마를 인식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 그림자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자에 오염되어 분간하기 어려웠던 아니마가 드러나서 인식하기 쉬워진다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p255) <그림자> 中


 아니마는 독일어의 제엘레(Seele, 심령)에서, 아니무스는 가이스트(Geist, 심혼)에서 빌려온 라틴어 용어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의 혼과 같은 것이다. 혼이나 넋, 또는 심령이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의 표현이며 '나'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남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남성적 속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p43) <그림자> 中


 무의식의 측면에서 여성과 남성이 다른 면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아니마는 기분(Launen, mood)을, 아니무스는 의견(Meinungen, opinion)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p63)... 우리는 남성의 무의식의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의 아니무스의 특성이 단지 남녀의 의식에서 배제된 내용만으로 일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 깊은 원형적 토대, 즉 '선험적 전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64) <아니마와 아니무스> 中


 저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해 자신 안에 내재한 다른 성(異性)의 요소와의 통합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진정한 남성상을 '51%의 남성과 49%의 여성'으로 말할 수 있다라면, 진정한 여성상은 여기에 대칭(對稱)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융은 여기에 머물지 말고 통합적 자기로 나갈 것을 강조한다.


 융의 아니마/아니무스론은 인간이 남성과 여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남성은 여성적 요소를, 여성은 남성적 요소를 살려서 의식에 통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전체정신의 중심에 거의 접근하게 된다.(p36) <아니마와 아니무스> 中


 '자기(Self, Selbst)'란 자기실현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다. 자기란 전체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인 '나(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체정신 그 자체, 혹은 그 전체정신의 중심이며 핵이다... 융은 인간무의식 속에서 하느님과 같은 신상(神像)을 발견한 것이다.(p45) <그림자> 中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몇 가지 지점이 있다. 첫째는 우리 모두는 페르조나 동일시를 통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회적으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할 바를 부여받고, 그 역할에 따라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부모로서, 좋은 자식으로서 우리 모두는 각자 부여받은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우리 역시 그 역할에 동화(同化)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갈등은 특히 부모와 자식간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가족간의 상처 문제는 상당부문 페르조나의 문제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페르조나 문제는 자신 내면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가 성별 특성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뒤바뀜을 확인하면서, 성(性) 역할이나 특성에 대한 편견을 깨닫게 된다. 마치 <거울 나라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처럼 우리는 현실과 다른 거울 너머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거울 속의 집에 대해서 상상한 것들을 모두 말해 줄게. 저긴 물건들이 반대로 있는 것만 빼면 우리 집 거실하고 아주 똑같단다. 의자 위에 올라서면 저 안을 볼 수가 있어. 벽난로 뒤만 빼고 말이야. 아아! 벽난로 뒤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p206)... 우리 거실 문을 활짝 열어두면 거울 속 집의 복도가 살짝 보인단다. 우리 복도랑 무척 비슷하지. 하지만 저 너머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어.(p207) <거울 나라의 앨리스> 中


 벽난로를 대칭점(symmetric point, 對稱點)으로 거울 나라와 앨리스가 속한 세계(世界)는 분리되어 있지만, 이들 모두가 세상(世上)을 만드는 것처럼,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내면의 소리에, 사회적으로는 약자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이는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한다면, 무의식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개발에 초점을 두어야 하겠지만, 장기적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 개발보다 보존 또한 중요한 문제임을 생각하게 된다. 무의식의 의식화와 경제개발은 이러한 부문에서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문은 교육(敎育)문제에 있어서, 아이들 잠재력 개발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조기 교육을 통한 아이들 잠재력 개발이 좋은 문제인가 역시 이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접근법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은 칼 융의 사상을 쉽게 정리한 입문서다. 그래서, 칼 융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설명하되 일반인들이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도록 잘 정리한 책이라 생각된다.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을 읽은 후 칼 융의 사상에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먼저 프로이트 사상을 접한 후 칼 융 저작을 접하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이상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무의식은 궁극적으로 무의식적이다. 자아가 전일(全一)의 경지인 자기의 경지에 근접할 수는 있으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언제나 자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곳에는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vollkommener Mensch)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vollstandiger Mensch)이 되는 것이다.(p47) <그림자> 中


PS. 아니마와 아니무스 통합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마징가 Z>의 아수라 남작의 사례를 통해서 반증되는 것은 아닌지 짧게 생각해 본다.


[그림] 아수라 남작(출처: https://anidb.net/character/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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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1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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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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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From Ideologies to Public Philosophies>에서 폴 슈메이커 (Paul Schumaker)는 다양한 정치사상을 12가지로 구분하여 존재론, 인간론, 사회론, 인식론 등의 철학적 가정과 정치 공동체, 시민권, 사회구조, 권력의 보유자, 정부의 권위, 정의, 변화 등 정치적 원리에 대해 살펴본다. 4가지 철학적 가정과 7가지의 정치적 원리를 더해 11가지 주제에 대해 12개 사상의 입장을 제시되기에 도합 132개의 항목으로 구분된다. 때문에, 페이지 수는 많지만 내용의 깊이는 깊지 않아 이 책은 방대한 양의 입문서(入門書)라 볼 수 있다. 단적으로 '정치사상의 애니어그램(Enneagram)'이라고 느껴지는 책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 책은 19세기의 주요 정치 이념인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아나키즘, 마르크스 주의가 제시되는데, 이들은 20세기 이후 다른 사상들의 원류(原流)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고전적 자유주의와 전통적 보수주의는 우리에게 프랑스 혁명을 둘러싼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과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의 논쟁으로 특히 주목을 받는다. 이들의 논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페인의 <인권 Rights of Man>과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의 리뷰에서 살펴볼 예정이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들의 논쟁과 관련하여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폴 슈메이커에 의하면 전통적 보수주의는 종교(宗敎 religion)에 기원을 둔다. 특히 기독교 신(神)의 절대성에 의존한 사상으로, 절대선이며 완전한 신의 질서가 사회에서 구현되는 것을 우선에 두는 사상이다. 때문에, 전통적 보수주의에서는 강력한 종교(교회)제도와 정치제도의 권위, 사회 안정 추구를 강조한다.


 전통적 보수주의자 Conservatism들은 이성과 과학만으로는 신, 영혼, 도덕의식, 정치 공동체의 여러 미묘한 측면과 같은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궁극적 실재(존재)나 인간 본성 그리고 사회 등의 문제에 대해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한 이른바 과학적 구성 방식보다 전통적 이해 방식이 나라를 다스리는 좀 더 훌륭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보수주의자들은 사회를 공익을 위한 방향으로 인도하려면 강력한 정치/종교적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가장 일반론적으로 말해, 전통과 사회 관습을 존중하는 풍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p104)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中


 이에 반해, 고전적 자유주의는 이성(理性 reason)에 기반한 정치사상으로 권위보다는 민주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 전통적인 교회 등의 전통적 권위보다 추상적인 개념인 자유, 평등, 형제애 등의 이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classical Liberalism는 '정치의 과학'을 개척하려 했던 계몽주의의 산물이었다. 당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전통이나 종교적 신앙에 기댄 채 정치사상을 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p97)...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신이 존재한다거나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신이 이 세상을 완전히 좌지우지한다고는 보지 않았다.(p97)... 자유주의 사상은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그 당시 유럽이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특히 사업가와 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의 옹호자, 계몽주의 지성인들이 진보적이고 과학적이며 산업화된 유럽 사회를 지향했다.(p97)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中


 페인과 버크의 논쟁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1790년 버크의 비판 이후 1791년과 1792년 페인의 두 차례 반박으로 진행되었다. 보수주의자인 버크는 신의 뜻에 따라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잘 작동하는데 반해, 프랑스 혁명과 이들이 추구하는 (국민회의의) 민주정이 잘못된 정체임을 비판한다. 이에 반해, 페인은 세습군주제야 말로 자연의 법칙에 들어맞지 않은 제도이며, 프랑스 혁명은 공화정을 추구하는 자연법칙에 맞는 사건임을 말하며 버크의 주장에 반박한다. 이들의 대립의 단면을 살펴보자.


 이들의 대립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버크는 헌법(constitution)이 종교의 기반 위에 만들어진 것이며, 종교는 신의 권위를 대변하는 것이니만큼 이 권위를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왕/귀족/성직자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는 프랑스 혁명은 말 그대로 하늘의 뜻(天命)에 거역하는 사건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 불가. 버크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해본다.


  우리 헌법 전체가 종교와 신앙심의 후원 아래 만들어졌으며, 그 재가를 얻어 확실해졌다. 그 전체가 우리 국민성의 단순성에서 연유했으며, 우리의 분별력에서 보이는 일종의 태생적인 담백함과 솔직함에서 연유했다. 오랫동안 그러한 성격이 우리 사이에서 연속해서 권위를 얻은 인물들의 특성이 되어왔다. 우리는 종교가 문명 사회 civil society의 기반이며 모든 선과 모든 안락의 근원임을 알고 있다.(p162)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中


 이에 반해, 페인의 입장은 다르다. 과거 사건의 결과 만들어진 제도와 정체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다른 시대에 맞는 제도를 선책할 권리가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페인은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을 극복한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승리로 추앙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페인은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후손을 영원히 구속하고 제약할 수 있거나, 세계를 누가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를 영원히 주관할 수 있는 권리와 권력을 갖는 의회나 인간이나 세대는 지금껏 어느 나라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p94)... 세상의 상황은 계속해서 변하고, 인간의 생각도 변한다. 그리고 국가는 산 자를 위한 것이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오직 산 자 만이 그 안에서 권리를 가진다.(p99) <인권> 中


 이들의 의견은 이외에도 곳곳에서 부딪히지만, 최근(2019년) 우리의 경우, 사법부와 관련된 내용이 정치현안으로 뜨겁기에 이에 해당하는 내용을 추려본다. 먼저 보수주의자 버크의 사법부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자. 버크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행정권인 왕권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함을 말한다. 이를 위해 비록 사법부의 세습제가 일정 부분 부작용이 있을지라도 전통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고등법원의 구조는 하나의 근본적인 탁월성을 지녔는데, 독립성이 그것이다. 그 기관에서 가장 불신되는 사안인 관직매매도 독립성에 기여했는데, 그 직책은 종신제였다. 실상 세습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국왕이 임명하지만, 거의 국왕 권한 밖에 있다고 여겨졌다. 고등법원들은 자의적 변혁에 저항하는 구조를 지녀 항구적 정치조직을 구성했다... 국가에서 최고권력은 사법권을 가능한 한 그 권력에 의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느 형태든 그와 균형을 이루도록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최고 권력은 사법부에 대해, 자신의 권력에 의해서 침해되지 않을 보증을 제공해야 한다. 사법부를 마치 국가 외부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p323)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中


 그렇지만, 페인의 입장은 명확하다. 세습제는 자연 법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습제가 전통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할 것인가? 세습제는 인민을 개, 돼지와 같이 재산으로 간주하는 개념이기에 철폐해야 할 것으로 페인은 해석한다.


 모든 세습적 국가는 그 본질이 전제에 있다. 세습 왕관, 세습 왕위, 또는 그 밖의 어떤 허황된 이름으로 불려지든, 인류를 세습할 수 있는 재산으로 간주한다는 것 외의 다른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국가를 세습한다는 것은 마치 가축을 세습하는 것처럼 인민을 세습하는 것이다.(p250)... 만일 미덕과 지혜가 변함없이 세습적 계승의 특성이 되는 것이 자연법칙이 되고 하늘의 명령으로 등록되어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세습제에 대한 반대도 없어지리라. 그러나 자연은 세습제를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우롱하는 듯 작용한다.(p251) <상식, 인권> 中


 이외에도 많으 논의가 두 권의 책에서 이루어지지만, 페이퍼에 옮기기에는 한계가 있어 여기에서 그친다. 조금 들어간 내용은 각각의 리뷰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리나라 사법기관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늘날 사법개혁이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이 역시 세습제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대표적 사법기관인 사법부와 검찰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임에도 견제없이 자신들의 권한을 행사해오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보이지 않는 권력을 유지하고, 교체없이 그 권력을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물려준다는 점에서 세습권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습권력의 문제점은 오늘날 사법부의 문제로 고스란히 나타나 사법개혁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현실문제를 우리는 각자의 정치사상의 기반 위에서 바라본다. 사회가 과거보다 복잡해지면서 보다 다양한 사상 기반이 등장했고, 이 사안을 보는 우리의 입장도 단순하지는 않지만, 사법개혁과 관련하여 큰 틀에서는 페인과 버크의 입장 중 어느 한 편에 속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페인과 버크의 논쟁을 지금 다시 살펴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이들의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의 재생산 문제에서, 즉 사회통합과 체계통합 사이의 협정 문제에서, 다른 모든 사회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회에 해당하는 이 근본문제를 논리적으로 서로 배제하는 두 가지 해결방식을 동시에 취하는 식으로, 즉 생산의 분화 내지 사유화를 통하여 그리고 동시에 생산의 사회화 내지 정치화를 통하여 처리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두 전략은 서로를 방해하고 마비시킨다... 노동, 생산, 분배 영역의 정치적 중립화는 강화되면서 동시에 철회된다... 두 명령은 특히 정치적 공론장에서 서로 충돌한다.(p533) <의사소통행위이론 2> 中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 )는 <의사소통행위이론 Theories des kommunikativen Handelns>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해소될 수 없는 긴장관계가 공론장(public sphere)에서 충돌함을 말하고 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공론장에서 사회적 합의(social consensus)를 도출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만약, 자신이 보수주의자라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자유주의자라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토론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슈마커가 말한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을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도달해야하는 사법 개혁 뿐 아니라 정치를 바라보는 공동체 의식이라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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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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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6: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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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8 1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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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8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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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께


 저는 지금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했지만 시험을 치를 때까지 더욱 열심히 할 거에요. 그리고 시험이 끝나도 라틴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을 거에요... 시험이 끝나면 제대로 된 편지를 쓰겠습니다. 저는 오늘밤 라틴어 공부와 긴박한 싸움을 벌여야 하거든요.  몹시 서두르고 있는 주디 애벗 올림(p64) <키다리 아저씨> 中



 아내의 서재에서 진 웹스터(Alice Jane Chandler Webster, 1876 ~ 1916)의 <키다리 아저씨 Daddy-Long-Legs>를 발견하고 오랫만에 펼쳐들었다. 어린 시절 세계문학전집에서 처음 접했던 <키다리 아저씨>는 <소공녀 A Little Princess>와 함께 인상깊었던 소설로 기억된다. 다만, 두 작품에 차이가 있다면 <키다리 아저씨>가 고아에서 부자의 후원을 받아 신분상승한 구조라면, <소공녀>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신분이 수직 하락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다시 극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희망을 작품 속에서 발견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이제,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읽은 <키다리 아저씨>는 예전과는 달리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었다. 어빙 고프먼 (Erving Goffman, 1922 ~ 1982)의 <상호작용 의례 Interaction Ritual: Essays in Face-to-Face Behavior>은 사회구성원간 상호작용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그 중에서 '존대'에 대한 항목을 찾아보자.


 존대의례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존중의 감정은 일종의 호감과 소속감이다... 대체로  존대는 정중한 태도로 경의를 표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존대를 하는 사람은 실제 마음보다 더 상대를 높이 평가하는 양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가 유리하게 받아들일 여지를 주고 격식을 차려 자신이 상대를 낮춰보는 내심을 감추기도 한다.(p69)... 존대 행동은 존중하는 마음과 더불어 일종의 약속을 포함한다. 곧 이어질 활동에서 상대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겠다는 고백이나 서약을 압축한 표현이다.(p70) <상호작용의례> 中


 <키다리 아저씨>에서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쓴 초창기에는 후원을 받아 열심히 공부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려는 마음이 잘 나타난다. 비록 밝고 명랑한 주디지만, 낯선 아저씨의 존재는 고맙지만 어려운 상대였으리라. 그렇지만, 작품 후반으로 가면서 아저씨와의 관계는 점차 친밀하게 바뀌면서, 개인적인 고민까지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고프먼이 말한 '친숙한 관계'로의 발전일 것이다.


 아저씨께 

 저한테 어려운 문제가 생겼어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아저씨의 충고가 필요해요. 아저씨를 찾아뵈면 안 될까요? 편지를 쓰는 것보다는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훨썬 나을 것 같아요. 아저씨의 비서가 편지를 뜯어볼지도 모르니까요. 주디 올림(p254) <키다리 아저씨> 中


 행위자가 상대의 일상 영역에 예사롭게 드나들고 상대의 사생활을 침범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이라면 친숙한 관계라고 말한다. 행위자가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면 어색한 관계 또는 정중한 관계라고 말한다. 두 개인 사이의 품행을 규정하는 규칙은 친숙한 관계인지 정중한 관계인지에 따라 대칭적일 수도 있고 비대칭적일 수도 있다... 신분이 대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칭적이고 친밀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리라 예상할 수 있다.(p73) <상호작용의례> 中


 그리고, 친밀감의 표현은 작품에서 마지막 편지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스포일러라고 하면 스포일러겠지만, '고마운 후원자'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이 마지막 편지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극(劇)적이자, 절정인 장편으로  다시 읽어도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사랑하는 저비, 당신이 너무 그리워요. 

 하지만 이것은 행복한 그리움이에요. 곧 함께 지내게 될 테니까요.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의 것이에요. 제가 드디어 누군가의 사람이 되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정말로 행복해요.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에요. 언제까지나 당신의 주디(p268) <키다리 아저씨> 中


 오랫만에 다시 읽은 <키다리 아저씨>. 이제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같은 낭만적인 서사에서 주는 감동은 예전만 못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미묘한 표현을 통해 어린 시절의 감동이 깨어남을 볼 때, 고전은 고전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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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0-14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프먼의 상호작용의례 관점에서 사회생활과 의사소통을 지켜보면 재미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걸 키다리 아저씨의 서신교환에도 적용해보시다니, 재미있습니다. 어릴 때 정말 좋아하던 책.

겨울호랑이 2019-10-14 10:32   좋아요 2 | URL
반유행열반인님 말씀처럼 고프먼은 구성원간 상호작용을 의미있게 분석했음을 느낍니다. 주로, 미국사회 중심의 분석이라 모든 부분이 우리 사회와 맞지는 않지만, 사람 사는 곳이 크게 다르지 않은 만큼 많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반유행열반인님 부족한 제 글을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2019-10-14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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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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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8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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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9 0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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