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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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내게도 희망은 있었다. 눈치챈다면 난 당장 죽을 목숨이지만. 그가 방수포를 헤치고 튀어나올까? 걱정스러웠다. 그 대답을 놓고 두려움과 이성이 다투었다. 두려움은 ‘그렇다’라고 말했다. 리처드 파커는 몸무게가 250킬로그램이나 되는 사나운 맹수였다. 발톱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성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방수포는 화선지가 아니라 튼튼한 캔버스천이라고. 내가 높은 곳에서 그 위로 뛰어내려도 끄떡없었다고.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175/498


 얀 마텔 (Yann Martel, 1963 ~ )의 <파이 이야기 Life of Pi>는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한 호랑이와 함께 보낸 소년의 이야기가 큰 틀이자 하나의 골격이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는 갇힌 공간에서 호랑이와 함께 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위협이며 공포로 소년에게 다가온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소년은 생명을 내려놓지 않는다.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의 응원을 덕택이기도 하다. 소설 속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그에게 공포와 평온함을 동시에 주는 존재다.


 내 얼굴에 단호하고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 순간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 나도 거기 속한다 -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29/498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48/498


 사실, 개인적으로 <파이 이야기> 전체 글 중에서 시선이 머무른 것은 생(生)에 대한 의지, 공포 등보다 아래의 문단이다. 좀처럼 넘어갈 수 없었던 이 구절은 소설의 구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구명보트라는 갇힌 공간. 소년과 호랑이의 일정한 거리.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수도, 넓혀질 수도 없는 반지름이다. 소년의 이름은 파이(Pi). 원주율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소수는 영원(永遠)에 대한 열망의 상징일까.


 원주율(圓周率), 파이(pi) =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원둘레)의 비율. 3.141592....


 조난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상큼한 하늘이 앞이 보이지 않는 흰색이 되었다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사실 원들이 겹쳐 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322/498


 원(圓, circle) =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다. 소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원과 호랑이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원. 이들은 서로 다른 중심점을 갖기에 일정 부분을 공유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개의 원에서 생겨나는 것이 갈등이며 공포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도형을 그려보자. 소년의 중심점과 호랑이의 중심점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도형을 그릴 수 있다. 타원이다. 이들은 각각의 원을 가지고 겹치는 공간으로 인해 갈등하지만, 각각의 중심점으로부터 다른 사건(배고픔, 갈증, 폭우 등등)을 바라볼 때는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가지며 이번에는 서로를 의존하게 된다. 


  타원(楕圓, ecllopse)= 두 초점 사이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렇게 본다면, 소년 파이 위의 두 원은 호랑이 원과 둘의 타원이 아닐까. 호랑이 원이 주는 공포와 위협과 소년-호랑이 타원이 주는 위로와 평안이 소년 파이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상반된 힘은 아니었을까를 도형의 정의를 통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반전은 언어와 비유를 통해 나중에 드러나는 호랑이의 정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소년과 호랑이의 거리는 추상과 현실을 매개하는 언어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 "현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원하나요?"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44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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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따 4 - 3장 숲: 버리지 못하고 떠나는 자들 마하바라따 4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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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인내와 힘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 것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물음에 사실대로 답해주십시오."(p132)... 쁘라흘라다가 말했다. '힘이 늘 우선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인내가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란다. 손자여, 이 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늘 참기만 한다면 좋지 않은 일을 무수히 당하게 될 게다(p133)... 언제나 힘을 과시하는 것도 피해야 하지만 항상 유순하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부드러울 때 부드럽고 거칠 때는 거칠게 행동하는 자만이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34


 위야사의 <마하바라따 4 - 3장 숲 : 버리지 못하고 떠나는 자들>에서 제기되는 물음 중 하나. '인내와 힘 어느 것이 더 앞서는 것인가'라는 손자의 물음과 할아버지의 대답은 마치 <中庸> 10장의 강함에 대해 묻는 자로(子路問强)와 이에 대해 남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북방의 강함인가를 되물으며 진행되는 논의(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를 떠올리게 한다. <중용>에서 결론은 군자는 조화를 이루며 휩쓸리지 않아 매우 강하다(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는 것으로 진행되듯, <마하바라따>에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서로 다른 경우를 말하며 경우에 맞는 처신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마하바라따>에서 인내와 힘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브라만과 크샤뜨리야의 다르마(dharma) 문제로 한 단계 넘어가며 한층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인내를 강조하는 우디슈티라 왕에게 드라우빠디는 힘을 강조하며 그에게 맞선다. 개인 덕성으로 힘과 인내는 자신의 내부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힘쓰면 그만이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인 공동체에서 조화는 과연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는 개인철학의 문제가 정치철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드라우빠디여, 이런 식으로 분노는 모든 생명을 파멸로 이끌고 그들은 곧 사멸하고 말 것이오. 이 세상에 대지처럼 인내하는 자가 있기에 생명이 태어나고 존재하기를 거듭하는 것이오. 아름다운 이여, 그래서 사람은 어떤 고난에도 참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며, 바로 이 인내로 인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지요. 강한 사람에게서 수모를 당하거나 억압을 받거나 화를 당해도 성내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며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에게 세상의 이치가 보일 것이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39


 당신의 의식을 이토록 흐려놓으신 조물주와 창조주 두 분께 엎드려 절하옵니다.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가셨던 길을 따라가야 하거늘 당신의 뜻은 다른 곳에 있군요. 사람은 다르마와 자비로, 또는 인내나 곧은 마음만으로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관대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p141)... 바라따의 후손이시여, 신은 마치 드넓은 창공처럼 중생들의 마음을 차지하며 좋고 나쁜 것을 조절합니다. 우리는 끈에 묶인 새와 같아 주인의 손에 조종당할 뿐 우리 자신도 우리 주인이 아니랍니다(p143)... 이뤄놓은 결과만 보고 행위자를 보지 않는 것은 조물주의 잘못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저지른 일의 대가가 행위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힘만이 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힘없는 자들을 안타까이 여기는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44


 인내를 강조하는 우디슈티라는 브라만의 다르마를, 힘을 강조하는 드라우빠디는 크샤뜨리야의 다르마를 말한다. 우디슈티라는 보편진리로서 다르마를 강조하는 반면, 드라우빠디는 전사(戰士)의 다르마를 역설한다. 당신은 크샤뜨리야인데 왜 브라만의 다르마를 따르느냐고. 이는 드라우빠디의 말에 동의하는 비마세나의 주장에 잘 드러난다. 최고의 산물인 까마를 얻기 위해 다르마 뿐 아니라 물질을 모으는 아르타에도 충실하는 것. 이것을 못했기에 우디슈티라는 눈 뜬 채 나라를 빼앗겼다고 직접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쁘르타의 아들이여, 때가 되어도 자기 힘을 보여주지 않는 크샤뜨리야는 언제고 만물이 가벼이 여기는 법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적에게 인내하는 것을 보이지 마십시오. 의심의 여지없이 적은 힘으로 눌러야 합니다. 물론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는 크샤뜨리야도 사람들의 갈채를 받지는 못하지요. 만 생명이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겐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파멸만이 있을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32 


 왕이시여, 아르타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다르마를 필요로 합니다. 또 까마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막대한 아르타를 필요로 하지요. 그러나 까마로는 까마 이외의 다른 것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그 자체가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재는 나무에서 얻지만 재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p158)... 왕이시여, 물질을 모으는 것이 아르타라는 것을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다섯 감각 기관과 마음 그리고 가슴으로 얻어진 즐거움을 까마라고 하지요. 나는 그런 까마야말로 우리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 모두를 하나하나 곱씹어본다면 다르마에 지나치게 집중해서도 안 되고, 아르타에만 기운다거나 까마에만 빠져서도 안 되며, 이 모든 것을 다 적절히 따라야 함을 알 수 있지요.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59


 다르마는 단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서로 다른 계급과 시대 속에서 다양한 덕목으로 나타나 전체로서 완성되는 것일까. <마하바라따 4>에서는 개인 덕목의 조화와 중용, 정치철학으로서 추구해야 하는 전체와 부분의 지향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형제여, 어디든 다르마가 함께하는 유가를 끄르따 유가라고 한다네. 최상의 유가인 그때는 할 일이 모두 마무리되어 있어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지. 그때는 다르마가 쇠하지도, 살아 있는 것들이 죽지도 않는다네. 그때는 다르마가 쇠하지도, 살아 있는 것들이 죽지도 않는다네. 그렇게 덕이 충만한 유가를 일러 끄르따라고 하지(p607)... 끄르따 유가에는 또 브라만과 크샤뜨리야, 와이야, 슈드라의 뚜렷한 특징들이 있으며 모든 계급은 자기 본분에 충실하지. 인생의 단계, 행동 규범, 지식, 지혜 그리고 힘도 모두 그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네. 모든 계급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며 다르마를 얻지. 그들은 하나의 베다를 따르고 하나의 진언을 따르고 모두 같은 의례를 따른다네. 일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따르는 베다는 같은 것이며 그래서 따르는 다르마도 하나지.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608



전장에서 몰이 막대 없이 코끼리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듯이 브라만이 없으면 크샤뜨리야는 힘이 줄어들지요. 비견할 데 없는 브라만의 시각과 크샤뜨리야의 견줄 데 없는 힘이 함께하면 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오. 큰불이 바람의 도움으로 숲을 태우듯 브라만의 도움으로 크샤뜨리야는 적을 태우지요. 갖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얻은 것은 더욱 늘리기 위해 현명한 사람은 브라만의 지혜로운 조언대로 행해야 한다오. - P127

덕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실을 브라만과 자기 아들, 동지 그리고 제자와 시종의 귀에 전해주어야 한다오. 이것은 범답고 성스러우며 희생제와 같고 순수하며 즐거운 것이오. 이것은 천상의 것과 같고 기쁨 넘치며 더없이 순결한 것이오. 이것은 대선인들의 신묘함이며 모든 악을 없애주는 것이라오. 이것을 브라만들 가운데서 들었다면 그는 흠 없는 경지를 이를 것이고, 영원한 성지의 성스러움에 대해서 들은 사람은 영원히 순결할 것이오. 그런 사람은 여러 생을 기억하고 천상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오. - P378

백발이라 해서 어른인 것은 아니지요. 신들은 나이는 어려도 "아는 자"를 나이 든 자라고 여긴다오. 살아온 햇수로도, 하얗게 센 머리로도, 많은 재물로도, 숱한 친지들로도, 선인들은 인간의 자질을 정하지 않았다오. "배움 있는 자가 우리에겐 위대한 자"라고 했지요. - P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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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0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0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3-07-21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참기만 한다면 좋지 않은 일을 무수히 당하게 될 게다(p133) : 인내심도 언제 멈춰야 하는지 그 적당한 지점을 모를 때가 많아요. 늘 참으면 무시당할 수 있으니 잘 처신하기란 늘 어려운 문제입니다.^^

겨울호랑이 2023-07-22 09:42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감정을 다스리기도 쉬운 문제가 아닌데, 이로부터 발생하는 외부 문제까지 고려한다는 것은 마치 외줄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도 살아있다는 반증이겠지만요... 페크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
 
마하바라따 3 - 2장 회당: 세상을 건 노름 : 명예와 혼을 팔아 천하를 얻은 자, 형제와 아내와 자신을 팔아 명예를 잃은 자 마하바라따 3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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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 모인 사람들을 아무리 어려도 어느 누구도 빼지 않고 다 생각해봤소. 그러나 덕에서 여러 나이 든 사람들을 끄르슈나가 능가했던 것이오. 그래서 끄르슈나가 가장 공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는 브라만의 무르익은 지식과 끄샤뜨리야의 뛰어난 용맹을 겸비했소. 이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은 끄르슈나뿐이었소... 보시, 재치, 학식, 용기, 겸양, 명예, 명료한 생각, 겸손함, 영예로움, 당당함, 자족함, 위풍당당함, 한결같은 마음, 그는 이 모든 자질을 갖춘 스승이며 어버이며 어른이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149

브라만의 지식과 끄샤뜨리야의 용맹을 모두 갖춘 끄르슈나. 세상의 기원이자 끝인 끄르슈나에 대한 찬미가 <마하바라따 3 : 회당>에 나온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골육상쟁의 비극에 괴로워하는 아르주나에게 격려를 하는 비슈누의 화신 끄르슈나. 그는 모든 것을 생성하는 창조신이자 절대신이다.

끄르슈나는 세상의 근원이며 끝이오. 세상 만물이 끄르슈나로 인해 생겨난 것이오. 그는 드러나지 않은 근원이며, 창조주이며 영원한 분이오. 그는 만 생명 너머에 존재하는 가장 큰 어른이시오. 명료한 생각, 마음, 세상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즉, 바람, 빛, 물, 땅 그리고 공간이 그분 안에서 생성되고 존재하며 네 가지 생명도 모두 끄루슈나에게서 삶을 찾는다오. 해와 달과 별과 행성들, 사방과 팔방도 모두 끄르슈나 속에 있지요.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150

끄르슈나를 찬미하는 이들도, 그에 적대하는 이들도 모두 끄르슈나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찰나의 모습으로만 인식한다. 브라만의 지식을 통해 끄르슈나가 만들어낸 세상을 차츰 알아갈 수도, 끄샤뜨리야의 용맹을 통해 그의 덕에 조금은 다가설 수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공간 상에서 다르마(dharma)를 깨닫고 여기에 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넘어설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속절없이 깨지고, 이러한 깨어짐을 통해 운명(運命)을 절감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서는 그런 영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를 도와줄 동지도 찾지 못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입니다. 꾼띠의 아들에게 굴러 온 막대한 재물을 보니 운명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습니다. 수발라의 아들이여, 옛날에 나는 그를 없애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연꽃이 물속에서 자라나듯 그의 세력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합니다. 이 때문에 운명이 인간의 힘을 압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180

아르주나여, 사람에게는 자손과 행위와 배움, 이 세 가지 별이 있다고 데왈라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이것들로 인해 인간이 태어나기 때문이지. 생명을 떠난 텅 빈 몸뚱이는 불결하여 친지들도 이를 외면하지만 이 셋은 몸뚱이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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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따 2 - 1장 태동: 신들은 영생을 위해 불사주를 구하고, 인간들은 사랑과 명예를 위해 삶을 버린다 마하바라따 2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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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도 언제나 다르마를 향해 있고, 다르마와 베다를 알고 있으며, 열망에 넘치고 덕을 구족한 브라만을 사제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쁘르타의 아들이여, 세상을 정복하고자 하는 크샤뜨리야는 누구든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사제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을 정복하려는 왕은 브라만을 자기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하니, 덕 높은 브라만을 당신들의 사제가 되게 하십시오.(p697)... 크샤뜨리야의 빛은 힘이며 브라만의 빛은 인내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700


  위야사의 <마하바라따 2 : 태동>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번 리뷰에서는 통치권을 가진 크샤뜨리야보다 브라만의 힘이 왜 더 강한가를, 그래서 인도 전통의 계급 구조에서 최상위에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한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계급인 크샤뜨리아가 속(俗)의 권력이라면, 브라만의 권위는 성(聖)으로부터 나온다. 힘으로 남을 복속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기에, 크샤뜨리야의 지배를 위해서는 브라만의 힘이 필요하다. 단지 이것만으로는 브라만이 크샤뜨리야 위에 있다는 설명에는 부족하기에, 우리는' 브라만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봐야 한다. 다르마를 깊이 알고 있는 이에 따르면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삼계와 신들의 제왕이 되는 것, 혹 그보다 더한 것도 다 버릴 수 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진실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이 향기를 버린다 해도, 물이 제 맛을 포기한다 해도, 빛이 비추는 일을 그만두어도, 바람이 접촉하는 성질을 잃는다 해도, 태양이 빛을 버린다 해도, 불이 뜨겁지 않게 된다 해도, 창공이 소리를 버린다 해도, 달이 차가운 빛을 뿜지 않는다 해도, 인드라가 위용을 버린다 해도, 다르마의 왕이 다르마를 저버린다 해도 제가 진리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482


 누구나 진리를 추구하지만, 아무나 진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누구도 모르는 상황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은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엄격하게 제약된다. 각자 저마다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왕이 아닌 자가 왕의 친구가 될 수 없듯, 오직 진리의 가치를 이해하는 자만이 그것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브라만이고,  브라만의 진리 추구는 금욕(禁慾)으로 행해진다.


 학식 없는 자는 학식 있는 자의 벗이 되지 못하며, 마차 없는 자는 마차 가진 자의 벗이 되지 못한다. 왕이 아닌 자는 왕의 벗이 될 수 없다. 옛날의 벗이며, 무엇을 바라는가?(p666)....  

 

 인간이 아무리 다르마와 아르타와 까마를 추구해도 그것들은 인간을 빠져나간다. 그것들과 멀어지니 모진 고통만 따르는구나. 어떤 이는 해탈을 최상이라 말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듯하다. 재산을 아무리 모은다 해도 지옥이 기다릴 뿐이다. 재산을 바라는 그 자체가 크나큰 고통이 따른다. 가진 것을 사랑하는 자가 그것을 잃으면 더 큰 고통이 뒤따른다. 나는 이 재난을 헤쳐 나갈 어떤 방법도 아직 찾지 못했구나.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643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깨달음을 위한 정진. 브라만의 금욕 수행은 아킬레우스와 같은 전사의 분노를 세상의 법칙 안으로 던져 넣었을 때 완성된다. 아서 왕(King Arthur)이 죽음 직전 엑스칼리버를 호수에 던져 버리고 아발론(Avalon)으로 떠났듯, 브라만의 힘은 크샤뜨리아의 힘을 버린 후에야 얻을 수 있음을 <마하바라따 2>는 알려준다. 불과 같은 분노를 버리고 물과 같은 평정심을 얻었을 때 브라만은 진리를 깨닫고, 세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브라만이 크샤뜨리아보다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난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 결심했소. 묶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앙이기 때문이오. 난 아버지의 멸하지 않을 선행을 본받아 반드시 필사적인 고행에 나를 묶을 것이오. 탁발로 연명할 것이며 머리를 삭발하고 성자들처럼 이 세상을 유랑하겠소. 내 몸이 먼지에 파묻히도록 내버려둔 채 빈집이나 나무둥치 아래 의지해 살겠소. 좋고 나쁜 것을 모두 떠나고, 어떤 일에도 슬퍼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비난이나 칭찬을 똑같이 여길 것이오. 누구의 축복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겠소. 양극의 상반되는 모든 개념을 버리고 철저히 무소유가 될 것이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521


  <마하바라따>의 저자는 한 손에 불을, 다른 손에 물을 들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을 넘어선 물은 깨달음을 위한 단순한 단계에 대한 설명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저자가 성(聖)과 속(俗)이 함께 할 수 없음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하바라따>를 통해 후대에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모두 가지려는 이들이나, 두 권력의 결탁이 후대에 계속되어 나타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들게 된다....


 분노에서 일어난 불, 세상을 삼키려 하는 그 불을 물속에 던지거라. 그리고 축복 있거라. 세상은 물 위에 서 있는 것이란다. 모든 것의 진수는 물로 이루어진 것이며, 실로 온 세상은 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훌륭한 브라만이여, 그러니 불 같은 네 화를 물에 던지거라. 브라만이여, 네가 하고 싶다면 성냄에서 비롯된 네 불을 바닷속에 있게 하거라. 물을 태우거라.  _ 위야사, <마하바라따 2>, p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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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따 1 - 1장 태동: 신과 아수라와 인간과 영물들의 탄생 마하바라따 1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저 옛날 천상 선인들이

네 베다를 저을 한쪽에 올리고

다른 한쪽엔 바라따를 올린 뒤 무게를 가늠했다네.

위대함과 무거움, 둘 다 바라따 쪽으로 기울었다네.


그때부터 바라따는 마하바라따로 불렸다네.

이렇게 위대함과 무거움 때문에 

마하바라따로 부른다는 어원만 알아도

죄에서 해방된다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67


 위야사의 <마하바라따 1 : 태동>는 <베다 Veda>를 능가하는 <마하바라따 Mahabharata>의 시작이다. 어둠에서 생겨난 빛, 브라흐마(Brahma)로부터 생겨간 세상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소멸로 이어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브라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마하바라따 1>에서 가장 인상깊게 가슴으로 들어온 주제다.


 천지에 빛이라고는 없이 온 사방이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을 때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멸하지 않는 생명의 씨였다. 사람들은 이를 세상이 시작되는 신비로운 근원이라 일컬었다.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은 참다운 빛이요 영원불변의 브라흐마라 했다. 있기 힘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라 했으며, 거동은 한 점 흠결 없이 조화롭다 했다. 현재하고 은재하며, 드러나 보이지 않는 미묘한 근원이라고도 했다. 거기에서 생명의 어버이, 이 세상의 하나뿐인 주인이자 조상인 브라흐마가 나셨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41


 움직이거나 아니 움직이는 것이나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유가(yuga)의 끝이 오면 온 천지에서 다시 모조리 소멸하게 된다. 철이 바뀌면 그에 따른 온갖 징후들이 나타나듯 유가의 처음이 오면 이런 존재들 또한 그런 징후를 보이게 된다. 존재의 바퀴는 이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생성과 소멸의 근원이 되어 시작함도 다함도 없는 이 세상을 굴리는 것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44


 존재하거나 아니 존재하는 것, 행과 불행 이 모든 것은 시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시간은 만물을 익게 하고, 생명을 거두어들입니다. 다시 시간은 생명을 태워 없앴던 저 시간마저 궤멸시키지요. 시간은 좋고 나쁜 것 가리지 않고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 변화시키며, 만 생명을 줄이고 다시 늘입니다. 시간은 만 생명 안에서 공평히 움직이고, 온 생명을 평등하게 놓아줍니다. 과거의 존재도 미래의 존재도 또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도 모두 시간의 창조물임을 알아 분별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63


 선(善)하게 태어난 자신을 삼가고, 주위를 해치지 않으며 화합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생성과 소멸의 반복 속에서 브라만이 지켜야 할 영원의 덕목임이 <마하바라따 1>에서 여러 화자의 입을 통해 반복되어 말해진다. <마하바라따>에서는 이처럼 도덕과 윤리가 강조된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 <일리아스>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BCE 8세기라는 거의 같은 시기에 문명과 야만을 상징하는 두 작품이 아닐까.


 브라만이 선하게 태어났다는 것은 베다의 진리요 또한 베다나 베당가의 가르침을 아는 자은 모든 생명에게 두려움을 주지도 말아야 하오.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과 진실을 말하는 것, 그리고 용서하는 것은 브라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이이서, 베다에 통달하는 것보다 우선하여 이루어야 할 일이오. 크샤뜨리야의 율법은 당신이 따라야 할 덕목이 아니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140


 뭇 생명을 다정히 대하고, 베풀며, 부드러운 말을 쓰는 것, 이 세 가지보다 더 나은 일은 삼계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을 하고 거친 말을 삼가고, 공경해야 할 사람을 공경하고, 늘 베풀고, 구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399


 <마하바라따>는 CE 4세기 경 처음으로 텍스트로 기록되었지만, 최초 이야기의 시작은 BCE 8~9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의 같은 시기 호메로스(Homeros, BCE 8세기 ?)가 <일리아스 Ilias>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부터 신과 인간의 전쟁이야기를 펼쳐나간다면, <마하바라따>는 분노를 넘어선 절제를 노래한다.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에게 최상의 목적은 아가멤논에게 빼앗긴 브리세이스를 돌려받는 것과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지만, <마하바라따>에서는 용서와 절제를 통한 영겁의 생성과 소멸의 윤회를 넘어선 목샤[해탈]에 이르는 길이 제시된다. 


 가라, 가서 열매만 먹으며 자중하고, 차분히 있거라. 분노를 버리고 다르마가 아닌 것을 멀리 하거라. 수행자의 분노는 그동안 애써 모든 다르마를 점점 멀리 달아나게 한단다. 그러다 보면 다르마는 사라지고 우리가 바라는 최상의 목적을 이를 수 없게 된다.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려는 수행자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야만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란다. 이 세상은 용서하는 자의 것이며 저 세상도 용서하는 자의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용서할 것이며, 감각을 절제하거라. 용서함으로써 넌 브라흐마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을 얻을 것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215


 거의 같은 시기에 씌여진 두 작품에서 이토록 사상적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마하바라따>의 많은 부분은 텍스트로 정착되는 과정엣 첨가된 것이고, BCE 8세기 경의 내용은 BCE 14~10세기 경 빤다와들과 까우라와들 사이의 전쟁에 바탕을 둔 피와 살이 튀는 전투 장면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마하바라따>의 시작은 오늘날의 <일리아스>와 크게 다를 것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수많은 이름 모를 시인, 지식인들의 역량이 집결되어 전쟁 서사시를 넘어 인도 문명의 집결체가 된 것은 현세 시간을 살아간 집단지성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집단지성의 참여가 호메로스라는 1명의 천재에 의해 완성된 작품과는 다른 차원의 깊이를 선사했음을 <마하바라따 1>을 읽으며 깊이 느낀다...


친애하는 이여, 무엇을 해야 죽음 있는 인간이

최상의 세계를 얻을 수 있습니까? 지식입니까, 고행입니까?

나의 물음에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어찌해야 순결한 세계에 제때 이를 수 있습니까?


고행과 보시, 고요함과 절제

겸양과 절개, 만물에 대한 자비심이랍니다. 

반면 어둠에 휩싸인 자는 자만으로 인해

파멸하게 된다고 선자들은 말한답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1>, p414

왕이시여, 운명이 만든 일은 운명이 알아서 할 일이며, 운면에 몸을 맡기는 것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오. 뛰어난 뱀들이여, 우리의 이 모든 두려움은 운명에서 비롯되었으며 운명만이 우리 피난처가 될 수 있을 것이오. - P204

죄를 범하고도 "아무도 모르리라"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이 알고, 자기 내부의 존재가 안답니다. 해와 달, 바람과 불, 하늘과 땅과 물이, 당신 가슴과 죽음의 신 야마가, 낮과 밤과 여명과 노을과 다르마가 인간들의 행위를 알고 있습니다. 위와스완의 아들 야마는 행위를 지켜보는 내부의 존재가 가슴속에 살아 있을 때는 그를 어여삐 여기고 그의 죄를 가져갑니다. 그러나 내부의 존재가 사악한 자를 싫어하면 야마는 악행을 저지른 그 사람을 데려간답니다. 스스로를 격하시키고 자신을 멸시한다면 신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영혼을 그에게 득이 되지 않는답니다. - P339

늙으면 수염과 머리털은 하얗게 세고 초라하기 그지없으며 기력은 쇠해지고 온몸엔 잔주름투성이여서 흉측하며 몸메 힘이 빠져 비쩍 마르고 맙니다. 늙은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젊은이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이지요. 또한 늙으면 종들마저 업신여기니 난 아버지의 늙음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p389)...넌 늙음의 나쁜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너 또한 그렇게 되리라.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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