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에 빠진 사람을 보면 연민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만, 한때 위안을 필요로 했던 사람, 남에게서 위안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특히 더 지녀야 할 덕목이지요.(p7/335) - P7

법률은 악의 원인이 된 자를 악을 행한 자와 똑같은 죄로 묻고자 합니다. (p272/335)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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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간단히 말하려고 그저 ‘죽음’이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들만큼 많은 죽음이 있다. 전속력으로 모든 방향에서 달려오는 죽음, 이런저런 사람을 향해 운명이 보낸 능동적인 죽음,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감각이 없다.(p7/339) - P7

알베르틴과의 삶은 내가 질투를 느끼지 않을 때는 권태로웠고, 질투를 느낄 때는 고통스러웠다.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해도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베크에서 캉브르메르 부인의 방문이 있은 후 그렇게도 행복했던 저녁에 내게 영감을 주었던 그런 현명한 정신에서, 나는 우리의 관계를 계속해 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와 헤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가 그녀에 대해 간직할 추억은, 피아노 페달에 의해 연장되는 일종의 진동과도 같은 이별의 순간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감미로운 이별의 순간을 택하고,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p253/339) - P253

사건이란 사건이 일어난 순간보다 훨씬 거대해서, 그 순간 속에 완전히 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사건은 물론 우리가 간직하는 기억을 통해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시간에도 그 자리를 요구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때 우리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겠지만, 추억 속에서도 사건은 변경되지 않던가?(p262/339)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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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8-06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7 - 내년 또는 내일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죠. 가능한 일인데 말이죠.

P253 -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하는 이별, 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P262 - 살면서 과거의 사건이 마음속에서 많이 변경되는 걸 경험하죠. 특히 제가 특별한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시각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옳았던 게 틀린 게 되고, 틀렸다고 여긴 게 옳았음을 경험하기도 하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다, 입니다.

문장을 잘 뽑으신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06 15:45   좋아요 0 | URL
모든 종교의 기원은 ‘죽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누군가 말했던 생각납니다. 죽음이 주는 불안과 공포가 결국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죽음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도 연관됨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 속의 사건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 문장이 독립적인 듯 유기적으로 잘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의 문장들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를 지니면서 전체적으로 얼마나 잘 조화되는지 책을 읽을 때마다 느낍니다. 페크님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08-06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겨울호랑이님!
자치통감도 매일 읽으시고 이 책도 매일 읽으시고...
어려운 책은 다 읽으시면서 다른 책도 만만치않고, 도대체 이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

겨울호랑이 2021-08-06 16:49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한 번에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조금씩 정리해 둔 것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긴 하지만 아직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아 채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
 

알베르틴은 내가 그녀를 안 날부터 그토록 나를 실망시켰던 갖가지 상이한 성격들을 하나씩 벗어 나갔다. 이제 그녀는 식물이나 나무의 무의식적인 삶, 내 것과는 아주 다른 낯선 삶, 그렇지만 내게 더 많이 속한 것처럼 보이는 삶으로 인해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자아는 둘이서 얘기할 때처럼, 내게 고백하지 않은 생각이나 시선이라는 통로를 통해 끊임없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불러들이고 피신시키고 가두고 요약했다. 내 시선 아래, 내 손안에 그녀를 붙잡으면서, 나는 그녀가 깨어 있을 때는 갖지 못했던, 그녀를 완전히 소유한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녀의 삶은 내게 순종했고, 나를 향해 가벼운 숨결을 내뿜었다.

단 하나의 알베르틴에게서 여러 명의 알베르틴을 알고 있던 나는, 더 많은 알베르틴이 내 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치 모양의 눈썹이, 전설 속의 바닷새가 짓는 아늑한 둥지처럼67) 눈꺼풀의 둥근 형체를 에워쌌다. 인종, 유전, 악덕이 그녀의 얼굴에서 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매번 내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새로운 여인이 창조되었다. 나는 단 한 명의 소녀가 아니라 무한한 소녀를 소유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한 존재와 관련된 고뇌의 시간으로부터, 그 존재를 붙잡는 일이 가능한지, 혹은 그 존재가 우리로부터 빠져나가지 않을지 하는 불확실성으로부터 사랑이 생기는 경우, 그 사랑은 그것을 초래한 커다란 변화의 흔적을 간직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동일한 존재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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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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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서의 나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태양 빛을 받으며 바다를 똑바로 걸어가는 모습이 아닌 전깃불 아래서 내 옆에 앉은 소녀를 바라보는 일이나, 알베르틴의 실제 풍요로움과 알베르틴의 독자적인 발전도, 내가 지금 알베르틴을 보는 태도와 처음 발베크에서 보던 태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주요 원인은 아니었다. 보다 많은 세월이 이 두 이미지를 갈라놓았다고 해도 이렇게 완벽한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변화, 갑작스럽고 본질적인 변화는 내 여자 친구가 뱅퇴유 양의 친구에 의해 거의 키워지다시피 했다는 말을 들은 후에 일어났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p88/257

알베르틴과 ‘나‘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진다. 화자는 이러한 원인을 ‘듣는 것‘에서 찾는다. 거짓을 말하는 알베르틴과 거짓을 들으며 거짓임을 알아가는 화자. 어쩌면 알베르틴은 스스로 기억의 방으로 유폐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실 화자가 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진실을 ‘들어서‘가 아니라 알베르틴과 앙드레의 왈츠를 ‘봤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시각‘적으로 생겨난 감정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청각‘적으로 들은 진실 때문으로 원인으로 돌리는 화자. 화자가 알베르틴의 거짓에 지쳐가듯 알베르틴 또한 화자에게 견딜 수 없는 압력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9권에서는 ‘시각‘과 ‘청각‘이라는 감각 그리고 ‘청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언어‘의 문제가 알베르틴과 화자의 관계 사이에 놓여 있음을 느낀다... 이들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진실은 하나의 이름과 과거의 뿌리를 갖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만, 즉흥적으로 꾸며 낸 거짓말은 쉽게 잊어버린다.(p173)... 그녀는 자신이 처음부터 얘기했던 온갖 사실이 일련의 거짓된 이야기임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진술한 단언 중의 하나가 그런 단언의 취소가 내 모든 체계를 무너뜨리는 거짓이라고 말하는 편을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p174)... 기억이란 우리 눈앞에 항상 현존하는, 삶에서 일어난 여러 다양한 사건들의 복사본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와의 유사성에 의거하여 죽은 추억을 꺼내고 되살리는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p17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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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에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발밑만 보고 걸어다니란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이곳엘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곳을 나갈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테니 말이야.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슈호프가 수용소에 들어온 죄목은 반역죄이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또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고, 포로가 된 다음 풀려난 것은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수행할 계획이었는지는 슈호프 자신도, 취조관도 꾸며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목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렸다.

작가는 작품 속에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가 수용되어 있는 강제노동수용소라는 장소는 아무런 범죄 행위를 한 적도 없고,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임무를 갖고 활동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는 특별한 정치사상을 가져 본 적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인물인 슈호프와 대비되어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 준다. 즉, 작가는 이 인물을 스탈린 공포시대의 상징이며 정치적 억압의 한 수단이었던 혹독한 강제노동수용소에 배치시킴으로써, 스탈린의 정치적 허울과 억울한 수많은 약자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비극으로 몰아넣은 전형적인 한 예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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