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상당수는 이 두 진영의 바깥에 있으며 빈곤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최근에 독립하여 비동맹 노선을 추구하던 제3세계에서 일어났다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다. 바로 문화다. 민족과 국민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지금까지 그런 질문 앞에서 내놓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문화의 스펙트럼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적으로 동과 서를 양극화하는 것은 유럽 문명을 서구 문명이라고 부르는 불행한 관습의 또 다른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이라고 부르지 말고 ‘서양과 나머지’라고 부르는 것이 수많은 비서구 사회의 존재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적절하다.

세계를 7개나 8개의 문명으로 이해하면 이런 난점의 상당수를 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일 세계나 양분 세계의 패러다임처럼 경제성을 위해 현실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그렇다고 국가 패러다임이나 혼돈 패러다임처럼 현실성을 위해 경제성을 희생시키는 방식도 아니다.

국가 패러다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가능성을 강조하는 반면 문명 패러다임은 그런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분리 가능성을 점치며, 문화적 요인을 감안할 때 그 갈등 양상은 체코슬로바키아보다는 심각하겠지만 유고슬라비아처럼 유혈 분쟁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런 상이한 전망은 다시 상이한 정책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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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야마의 단극 체제론이 빈약한 실증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일세(라기보다는 일시一時)를 풍미한 것은 당시 유일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세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는 강력한 담론으로 나온 것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질서의 구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성장이다. 1996년의 중국은 아직 WTO(세계무역기구)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스스로 ‘개발도상국’ 위상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1998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둘러싼 논란에서 당시 중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이 방문에 반대한 것이다.

‘문명의 충돌’에 기반을 둔 다극 체제론에는 세계질서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경제적 가치의 독점 지배가 풀려 다양한 경제외적 가치가 되살아날 가능성을 짚은 것은 헌팅턴의 뛰어난 통찰이다.

아리기의 흥미로운 논점 하나가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다. 스기하라 가오루가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에 빗대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데 쓴 이 말은 서양식 자본집약적 근대화와 다른 노동집약적 근대화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오면서 깃발을 비롯한 십자가, 초승달 같은 문화 정체성의 상징물이 중요해졌다. 문화가 중요해졌고, 문화 정체성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정체성을 발견하여,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깃발 아래 행진을 벌이다가, 새롭지만 대개는 해묵은 적수와 전쟁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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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을,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두려워했던 코로나바이러스 2차 대유행이 미국과 유럽을 강타했다. 중국과 동아시아 이웃 국가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와 강도 높은 공중보건 조치를 통해 심각한 코로나 사태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유럽, 라틴아메리카, 미국, 서아시아 전역 어느 곳에서도 코로나를 억누르지 못했다. 겨울이 되자 봄 동안 성공적으로 코로나에 대처해온 스웨덴과 동유럽 국가들, 독일이 모두 곤경에 처했다.

2020년, 기적의 무기에 기댄 것은 미국이었다. 공중보건 정책이 실패한 탓이었다. 국가가 지원하는 기술 개발 프로젝트에 희망을 걸어야만 하는 현실은 당혹스러웠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경우가 달랐다. 우리에겐 백신이 필요했다. 백신이 필요한 주된 이유는 장기 성장률을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범유행의 불확실성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수조 달러의 경제 활동 재개와 수억 개의 일자리가 백신에 달려 있었다. 문제는 누가, 어떤 조건으로 백신을 제공하느냐는 것이었다.

백신 개발은 학문적·인도주의적 포부뿐만 아니라 권력과 이윤 추구에 의해 추진된 경쟁이었다. 인류가 집단으로서 얼마나 시급하게 백신이 필요한지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남부끄러운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공중보건과 현대 제약 산업은 과학계와 의학계의 관심사와 기업과 국가의 관심사가 교차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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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광범위한 프로젝트는 정치적 직접 통제를 넘어 중국의 맹렬한 성장을 길들이려는 노력으로 확대되었다. 핵심은 과도한 신용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금융 규제와 통화 정책이었다.

달리오는 미국이 "엄청난 양의 부채를 만들고 돈을 대량으로 찍어내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준비 통화에 위협이 되었다"라고 경고했다. "펀더멘털
(기초적 사항들)
이 미국 달러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출된 결론은 피할 수 없었다. 미래는 중국의 것이었다.

2020년 봄, 서구에서 있었던 대규모 중앙은행 개입은 의심할 여지없이 시장 안정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수익률이 무너졌다. 미·중 냉전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2020년에 자본가에게 가장 돈이 되는 안전자산은 바로 중국 국채였다

중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초창기에는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의 승리로 환영받았다. 2020년, 양적 성장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세계 여론조사는 중국이 점점 더 세계를 주도하는 경제국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은 시진핑의 통치하에서 확고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2013년에 던진 첫 번째 수는 아시아 지역의 운송망을 개선하고 지역 간 경제를 연결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AIIB)
이라는 아이디어를 출범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주, 한국, 심지어 영국마저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AIIB는 계속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인도가 최근 급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국방 예산 규모는 인도의 거의 4배였고 경제는 거의 6배였다. 중국의 경제적·재정적 영향력은 커도 너무 컸고, 인도는 바로 옆에서 그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느껴야만 했다.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모두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고객이었다. 물론 일대일로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프로젝트는 인도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작아 보이게 했다.

미국은 중국 산업의 급소를 공격했다. 반도체는 전자제품뿐만 아니라 자동차에서 항공우주, 가전제품, 첨단 에너지 전송 장치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들어가는 부품이다. 중국의 산업에 대한 공세 정책에는 상당한 대가가 따랐다. 미국 반도체 산업 매출의 4분의 1은 대중국 판매에서 나왔다. 그러나 상업은 더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미국 기업들은 중국 시장에서 손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 핵심 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진보를 막는 것이었다.

2020년 5월, ‘두 회의’에서 제시한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은 "이중순환 dual circulation" 모델이었다. 순환 가운데 하나는 국제무역 경제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경제 발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중순환 모델의 핵심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재조정하고 후자를 전자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선거에서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백인 노동자 계층이었다. 만약 교육을 사회 계층의 대리 변수로 본다면, 트럼프에게 투표할지 예측하는 가장 좋은 변수는, 인종을 제외하면, 대학 학위의 부재였다. 그 결과 공화당은 문화적 동일성과 모순된 정책이라는 테마로 점철된 정당이 되었다.

문제는 록다운이 아니라 바이러스였다. 바이러스가 통제되고 자신감이 회복될 때까지, 직장 생활과 학교 교육, 쇼핑과 사교, 보육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바이든이 대통령 선거에서 거둔 확실한 승리는 의회에서 민주당의 완승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상원을 장악하는 것은 민주당일 수도 공화당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2021년 1월 5일 조지아에서 열릴 두 번의 결선투표 결과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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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는 보조금과 복지 지출에 대한 도덕적 해이 논쟁을 잠재웠다. 코로나바이러스 범유행을 자초했다는 비난은 그 어떤 기업이나 정부에도 던질 수 없는 비합리적인 비난이었다.

전쟁은 매력적인 비유이긴 했지만, 2020년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군대를 동원하느냐가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경제를 해산하고 사람들을 집에 있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의료 시스템 안에서도 비응급 진료와 시술이 보류됐다. 2020년에 필요했던 것은 경기 부양책이나 전시 동원이 아니라, 바로 생명 유지 장치였다.

미국에서는 저소득층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올 힘든 시기에 대비하여 CARES 보조금을 저축하고 채무를 갚았다. 고소득층 가구는 보조금을 휴가나 외식에 흥청망청 쓸 수 없어서, 그냥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경기 부양 제도가 시행되었는데도 외식을 하거나 미용실, 세탁소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4월, 미국의 저축률은 2019년 평균 8%에서 32.2%로 치솟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독일과 덴마크에서 처음 개발된 단기 근로 모델은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 실행 가능한 모델임이 증명되었다. 이 모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고용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비록 불완전하고 매우 불평등한 고용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 고용 유지라는 특권을 "비전형적인" 직장으로 확대하는 것은 복지 시스템을 크게 확대하는 일이었다

복지는 보수적인 기능 역시 할 수 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볼 때, 1880년대 비스마르크 시대 독일에서 등장했던 복지국가의 목표는 질병, 노령, 나아가 실업이라는 우여곡절 앞에서 사회 계급 체계를 지킨다는 보수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2020년 지출의 주된 논리였다.

대체 어떻게 기록적인 재정 적자가 금리를 올리지 않고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가장 간결한 대답은, 정부 기관의 하나인 중앙은행이 또 다른 정부 기관인 재무부에서 발행한 채권을 매입했다는 것이다.

낮은 이자율과 높은 재정 적자, 중앙은행의 채권 매입이 결합한 별자리가 처음 등장한 곳은 1990년대 일본이었다. 이는 물가 상승률 하락 추세와 맞물려 결국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평가절하가 모멘텀을 얻게 될 경우, 평가절하가 지나치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국가 당국에는 금리 인상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며, 이는 고통을 가중하게 된다. 이러한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한 보장 장치는 특정한 고정 환율을 완강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환율이 움직이는 속도를 완화하기 위한 개입이었다. 이를 위해 당국은 외환을 충분히 보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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