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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평점 :
외자로 된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왠지 좀 다부진 느낌이다.
외자로 된 우리말의 단어들의 다양한 용례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풍요다.
이런 책을 가만히 읽는 일은 심신에게 축복이다.
그의 전작, 마음 사전이 처음이어서 마음 두근대게 했다면,
이번 자매편은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마음 사전이, 정말 오래오래
궁글리고 곱씹어 첩첩 쌓아간 작품이라면,
한 글자 사전은, 조금 허술해 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그 내공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덜- 가장 좋은 상태
무언가 '덜' 된 것의 설명이다. 더 말이 필요 없기도 하다. 절묘하다.
때 - 이것을 만나는 것을 행운이라고 하고 이것을 맞추는 걸 능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용례에 따라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다.
행운은 외부적 요인이 크고 능력은 내부적 요인이 큰데,
조금은 다른 뉘앙스가 인간의 심사를 비춰주어 재미를 준다.
씨 -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알아내는 것
이 문구가 책 앞부분에도 있는데 좋았다.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통행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소통하는 심사숙고가 비춰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에서, 사람 만나는 직업에서 유념할 생각이다.
황금알을 낳으라고 배를 가르면 거위는 죽는다.
아이들 역시 씨앗이다.
삯 - 값과 비슷하지만 쓰임이 다르다.
버스삯은 버스를 타는 데 드는 비용이고,
버스값은 버스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다.
사람은 그러므로 값으로 매길 수 없고 삯으로는 매길 수 있다.
일을 시키면 품삯을 준다. 사람의 값은 매길 수 없다. 귀한 말이다.
설 - 설늙은이가 왼갖 풍설로 잔소리를 늘어놓고
설마했던 지난 가족사를 섣불리 발설하며
설익은 며느리는 등을 돌려 설거지를 하는
설레며 찾아온 고향이 설어서
설움이 설핏하기도 하는 새해 첫 하루
곧 설이다. 서러운 역사가 담긴 시다.
시 -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 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시를 정의할 수 없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배반하고 달아나는 말을 구태여 잡으려는 애씀의 흔적.
얼 - 얼이 모자라면 얼간이, 얼이 설렁설렁하면 얼치기, 얼이 물렁물렁하면 얼뜨기,
얼간이는 얼굴에 쓰여있고, 얼치기는 얼굴에 철판을 깔며, 얼뜨기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한다.
얼간이는 일을 얼버무리고, 얼치기는 일을 얼렁뚱땅 하며, 얼뜨기는 일에 얼쩡얼쩡 한다.
그리하여 얼간이는 일을 얼크러뜨리고, 얼치기는 결과에 얼토당토 않게 굴고, 얼뜨기는 상황 파악은 못하지만 잘못됐다는 결과만 알아채므로 얼얼해진다.
언어 유희도 이만 하면 멋있다.
왜 - 왜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라는 질문에는 왜 학교를 다니나요? 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고,
왜 결혼을 안 했어요? 라는 질문에는 왜 결혼을 했어요? 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며,
왜 아이를안 낳았어요? 라는 질문에는 왜 아이를 낳았어요? 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별 생각 없이 얼떨결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한 행동에 대해서 강한 이유를 가진 듯 행동한다.
그 이유를 물으면,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런 게 인생이고, 그런 게 사람이다.
운 - 편파적이어서 배가 아프곤 하지만
이것은 거품이지 거름이 아니다. 지속성이 없다.
운이 좋은 사람에겐 샘이 난다.
운은 지속성이 없으니 거품같은 거라 여기면 된단 생각이다.
짝 - 짝이 있는 물건은 짝이 사라지면 짝짝이가 되어버린다.
양말, 신발, 장갑, 그러나 짝이 있는 신체는 자세히 보면 모두 다 짝짝이다.
눈, 귀, 손...
그러게나. 있던 것이 사라지면 '짝'에서 '짝짝'으로 늘어나는 재미라니...
세상에 짝짝이 아닌 것은 없다.
티 - 가난함은 티가 나고 부유함은 티를 낸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감출 수 없는 가난함과
뻐기고 싶은 부유함의 대조를 '티'에서 맞대니, 절묘하다.
폐 - 폐가 될까 걱정하는 것이 사람다움이다. 폐가 폐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폐가 된다.
폐끼치지 않기는 참 어렵다.
머리도 좀 받쳐줘야 하고, 마음도 여유로워야 하고, 인정도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인종이 '적폐'다.
혼 - 충격을 받으면 혼이 나가고
사랑에 빠지면 혼을 뺏긴다.
억울하게 죽으면 혼이 떠돌고,
뚜렷한 입장을 끝까지 관철하면 혼이 담긴다.
적어두고 싶은 구절은 참 많지만,
꽤 괜찮은 울림을 주는 구절들만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기록한다.
마음산책에 맞춤한 책이다.
표지에 <한 글자도 가능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생의 감촉>이란 소개글을 작게 붙였는데,
저렇게 느낌표 붙이지 않아도, 김소연이란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소개가 된다.
앞표지에 <2018년 앞겨울>이란 구절과 저자 사인이 들어있다.
앞겨울이란 말이 참 맘에 든다.
한 해에 겨울은 두번이니 말이다.
올해 앞겨울은 참 추웠다.
뒷겨울까지 또 한해를 벅차게 살아내야 하겠지만,
속상한 날도 있을 게다.
봄여름 가을겨울로만 살지 말고,
앞겨울 뒷겨울 나누면서 좀더 여유롭게 사는 재미도 가르쳐 주었다.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