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붙박이장 손잡이에 매달아 놓은 몽이
(두 손바닥이 찍찍이로 되어 있음).
언제부턴가 자신의 자리를 자꾸 이탈한다.

열어놓은 창틀에 제법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때도 있고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고 얼굴만 내놓고 누워 있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줄무늬 니트를 벗고 빨간색 티셔츠로 갈아입고 있다.

청소나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주제에 내가 좋아하는 몇몇은
딱 제자리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몽이를 부리나케 일으켜세워 옷을 갈아입히고
다시  제자리에 매달아 놓는다.

"주하야, 몽이 자꾸 데려다 앉혀놓고 눕혀놓고 하는 게 너야?"

어느 날 문득 생각나서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딸.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매일 벌 서는 것처럼 매달려 있으면 팔 아프잖아.
엄마는 몽이 제일 좋아한다면서 그것도 모르고......"

--내가 모르는 게 그것뿐이면 말도 안한다, 주하야.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는 속으로 탄식한다.





 내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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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7-07-1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민함에 경배를......!ㅜ ㅜ

로드무비 2007-07-1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초의 시종 님, 아이고 반가워라.
사람들이 잠들고 나면 인형들이 모여서 뛰어놀고 회의도 한다고
아직 믿고 있는 주합니다.
(설마 믿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요? 문득 의심.^^)

로렌초의시종 2007-07-1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처럼 주하 이야기를 들으니 어찌나 반가운지요^-^ 믿어도, 믿는 척해도 둘 다 주하가 영민함을 보여주는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ㅎㅎㅎ

로드무비 2007-07-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가 다 커서 아기자기한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동주 구박하는 얘길 쓸 수도 없고.ㅋㅋ
이래도 저래도 영민한 거라니, 이렇게 기쁠 수가!
로렌초의 시종 님 말씀 굳게 믿을랍니다.^^



oldhand 2007-07-19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붙박이장 문짝이 저희집이랑 비슷해요. 오호호. (참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죠?)
그리고, 주하는 시인의 자질이 엿보이네요. 전 저나이때 이미 애늙은이였는데.

로드무비 2007-07-21 09:00   좋아요 0 | URL
붙박이장 문짝이 비슷하다니 우리가 보통 인연이 아닌개비여.=3=3
올드핸드 님, 주하는 시인의 자질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요,
노란 베개하고 햄스터, 예뻐하는 인형 몇 명에게만 다정하고 친절해요.^^

nada 2007-07-19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공중전화 너무 이뻐요. (어디서 사셨어요? 속닥)
그러고 보니 팔이 무지 아파 보여요. 악덕 주인을 만나 고생하는 몽이...=3=3

Mephistopheles 2007-07-19 23:26   좋아요 0 | URL
저 몽이...그 몽일지도 몰라요..

로드무비 2007-07-21 09:05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 님은 자나깨나 몽 생각.=3=3=3

꽃양배추 님, 아심시롱, 제가 가는 가게라야 딱 두 군데인데.^^
안 그래도 제가 너무했나 싶더라고요.( '')
모진 주인에 그래도 천사 같은 소녀를 만났으니 몽이로선 다행?=3=3=3

Mephistopheles 2007-07-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장난감 뒤에 토템이즘같은 수박머리인형의 정체는 뭔가요.?

로드무비 2007-07-21 09:03   좋아요 0 | URL
저 눈 시뻘겋고 입이 지퍼로 돼 있는 아자씨요?ㅎㅎ
고무로 된 인형인데 그 엽기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어 오래 전 산 거예요.
손에는 채찍 들고 있을 것 같지 않아요?=3=3=3


조선인 2007-07-19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난 주하가 좋아요.

로드무비 2007-07-21 08:42   좋아요 0 | URL
FTA 반대 조선인 님, 우와, 서재 사진만 봐도 배 부릅니다.
깜찍한 오누이.
주하 마음에 드신다니 당연한 말씸을.=3=3=3
(너스레인 것 아시죠?ㅋㅋ)

2007-07-20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21 15: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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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3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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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3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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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6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27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31 14: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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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9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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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3 17: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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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6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 한국 사람들은 집 없는 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또뚜야는 매우 이상했다. 집 없는 동물에게 먹을것을 좀 나눠주면 도둑질을 안 할 텐데,
이름까지 아예 '도둑'이라고 붙여버리면 어떡하나. 진짜 도둑밖에 더 될까.
또뚜야와 쪼쪼는 이 도둑고양이들에게 '바람'과 '별'이라는 뜻을 가진 미얀마 말을
이름으로 붙여주었다.
(<까이비간>'도망자' 17~18쪽)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엮은 강무지 글, 박영선 그림의 예쁜 동화집
<까이비간>을 읽었다.
'까이비간'은 필리핀 사람들이 사용하는 따갈로그어로 '친구'라는 뜻이란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주인공인 동화들이다.

퇴근길에 산동네의 구멍가게에서 삼분카레를 하나 살까 계란 두 알을 살까
망설이는 버마 이주노동자 또뚜야.
매일같이 일터에서 죽으라고 일하는데 삼분카레 한 개와 계란 두 알도
한꺼번에 살 수 없는 건 왜일까?
천 원짜리 한 장과 동전 몇 개면 될 텐데.

집 없는 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이는 것이 우리들이다.
집 없는 고양이를 그렇게 사랑하고 거두는 황인숙 시인조차 그런 명칭에
의문을 품지 않았는데.
이주노동자 또뚜야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던 젊은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각 신문과 방송, 포털이 뽑은 제목 대부분이
'재연배우 xxx의 ...' '한 재연배우의......' 이런 식이었다.
배우면 그냥 배우, 탤런트면 탤런트지 왜 꼭 '재연'을 앞에 붙이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그리고 그가 얼마나 고독하고 불우했는지에만 초점을 맞췄다.
겉으론 안타까워하고 애도하는 척하면서 '재연배우'로 그를 끝까지 규정지었다.
재연배우는 배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집 없는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좀 나눠주면 도둑질을 안 할 텐데
왜 이름 앞에 '도둑'을 붙여버리는지 의아해하며 '바람'과 '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또뚜야와 그의 친구.
그의 친구 쪼쪼는 강제출국 당하고 또뚜야 혼자 남았다.






***책 사진은  rosa 님 서재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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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7-07-15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뚜야와 쪼쪼의 간명한 시선이 우리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네요.
사는게 부끄럽군요....

로드무비 2007-07-16 10:03   좋아요 0 | URL
아이들의 질문처럼 간명하죠?
건우와 연우 님, 저도 '도둑고양이'에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어서
저 구절 읽고 뜨끔했답니다.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이 수두룩하겠지요?

2007-07-16 0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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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6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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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7 04: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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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7 06: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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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 인터넷의 호주 유학 전문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는 학생들에게는
내년도 학비인상 계획보다 순창고추장과 팬틴샴푸의 가격이 더 궁금한 법이다.
우습게도 말이다.('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166쪽)

-- 호주 유학 다녀온 학생입니다. 정리해 드려야 할 듯해서요.
매운맛 너구리에는 다시마 조각이 한 개 들어 있구요,
순한맛 너구리에는 건더기 스프 안에 다시마가 잘게 잘려진 채로 들어 있답니다.
참고하세요.(168쪽)

호주의 한인 식료품점에서 파는 너구리우동.
매운맛 너구리에 다시마 조각이 한 개 들어 있다느니
순한맛 너구리에는 잘게 잘려진 채로 들어 있다느니
한 호주 유학 사이트가 시끌시끌하다.
그 반대면 어떻고 또 안 들어 있으면 어떨라구.
그런데 나도 그 다시마 조각 하나에 신경을 쓰느라
하루를 다 보낼 때가 있다.

오늘 아침 모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탤런트 전광렬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긴 생머리의 아내와 치아교정중인 듬직한 초등학생 아들과
프랑스를 여행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비 내리는 거리에서 우산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 올려다보면
예쁜 커튼을 친 창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더욱 아늑하게 보이는 법이다.
프로방스며 보르도며 노트르담 사원이며 어디에 있어도 그림 같은
가족의 뒤를 쫓으며 나는 흡사 비오는 거리에 우산도 없이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맛있는 냄새와 아늑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을 바라보며.

김서령의 소설 속에는 하염없이 길을 떠나고 낯선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 안을 훔쳐보지도 않는다.
우산 하나 장만할 생각도 없이 내리는 비를 쫄딱  맞고 있다.
비슷한 몰골로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주머니의 동전을 털어
커피나 술을 한잔 사서 나눈다.
표제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의 태원이 엄마처럼
손목을 와락 그러쥐고'집으로 끌고 가 국물이 진한 시래기국을 끓여
뜨거운 국밥을 퍼먹이기도 한다.

책 뒤에 실린 방민호의 '점점이 빛나는 모나드적 개체들'이라는 해설도 재미있었다.
신파와 함께 더할 수 없는 냉철함을 갖춘 이 작가라, 그 적확한 표현이라니.
얼마 전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 씨'에 대한 해설을 읽고 눈이 크게 떠졌는데
아무래도 그의 모든 글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
리뷰를 쓰다가 문득 정확한 뜻이 궁금해 창을 하나 더 열고 '모나드'를 검색하니
밑도 끝도 없이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

그 개체들은 초라하지만 점점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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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07-1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에 대한 애정이 실린 해설은 더 재미나고 뭔가 다른 거 같아요. 저도 찾아 읽어 보려고 메모했어요.^^

로드무비 2007-07-12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소설 '친절한 복희 씨'에 대한 그의 해설 제목이 '육체문학의 힘'이었거든요. 제목만큼이나 해설도 샤프하고 멋졌어요. 이 소설집 재밌게 읽었어요. 꽃양배추 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비로그인 2007-07-1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정작 순한맛 너구리의 다시마 조각은 모르고 있었다는...너구리입니다. 안녕하세요. 님의 글은 일전에도 계속 읽었는데 오늘 댓글로 인사드리는군요.

로드무비 2007-07-13 12:51   좋아요 0 | URL
앗, 새초롬너구리 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제가 인용한 저 구절에 낚이신 건가요?^^

비로그인 2007-07-12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체문학이라...뭔가 갸우뚱거리게 되는 군요

로드무비 2007-07-13 12:53   좋아요 0 | URL
'육체문학'이란 생소한 용어가 마음에 들어요. 정직한, 잔꾀 부리지 않는, 멋부리지 않는, 뭐 그런 의미도 포함하는 것 같고.^^

2007-07-12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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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3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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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7-07-1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여기저기서 많이 마주치네요, 기대돼요.
마침 지난 주에 저희 도서관에도 들어왔길래 눈 여겨 봐뒀는데...^^
언젠가부터 해설은 잘 안 읽게 됐는데, 이 책은 꼭 찾아봐야겠어요.

로드무비 2007-07-13 12:57   좋아요 0 | URL
중간에 두 편은 조금 지루했는데 전체적인 색깔이 좋았어요.
나어릴때 님은 어떤 작품을 제일 재밌게 읽으실라나? 아마도 '역전다방'?^^

건우와 연우 2007-07-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오지 않아도 어두워지는 골목에 서면 남의집 처마의 불빛을 흘끔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찾아주기를 기대하면서...
담아갑니다.^^

로드무비 2007-07-13 13:01   좋아요 0 | URL
어둑한 골목에 서서 남의 집 들창으로 흘러나오는 불빛과 도마질 소리, 생선 굽는 냄새 등을 맡고 있으면 아득해지지요. 남부럽지 않게 부엌을 하나 차지하고 지지고볶으며 사는데도 이상하게 골목에 혼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2007-07-14 1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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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9 0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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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9 08: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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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9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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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1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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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1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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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1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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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읽은 이청해의 어느 소설 대목은 잊을 만하면 가끔 나타나 나를 실소케 한다.
무더운 여름날 무위의 고독과 우울에 몸을 맡기고 혼자 산길을 걷는 여성이 있다.
심각한 얼굴의 장병들을 잔뜩 태운 탱크와 군용트럭이 지나간다.

이 더위에 중요한 작전수행중인가?
좋겠다, 저들은 함께라서.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트럭이 일으키고 간 흙먼지를 피해 그녀는 비칠비칠 산길을 걷는다.

얼마 후 그녀가 목도한 것은 계곡에서 등목을 하고 물장구를 치는 장병들의 모습.
중요한 작전수행중인 줄 알았더니 물장구......
"혹시, 사람들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닌가."
그녀는 화들짝 놀란다. 인생의 베일을 한 꺼풀 벗긴 느낌.

이사 간 집에 찾아갔더니 김치도 없이 카레라이스만 달랑 내놓았던 친구가 있었다.
희한한 것이 그런 행동조차 주변 사람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독특한 미모와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정사각형의 톱밥상자를 스무 개쯤 쌓아놓고 책들을 쑤셔넣은 것이 서가였는데
한쪽 구석에 숨어 있는 멋진 은제 보석함이 눈에 띄었다.

"반지도 하나 없는 사람이, 나처럼 플라스틱 쪼가리들을 보석이라고 넣어놓았남?"

웃으며 뚜껑을 열었더니 이상한 잔해가......
언제적 것인지 모르는 그녀의 발 뒤꿈치 굳은살들은 투명함을 잃어버리고
말라 비틀어졌다.

"어쩐지 버리기가 싫더라고요."

민망하고 어색한 웃음.
그런 표정은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조금 더 가깝게 여겨졌다.

내가 오기 며칠 전 시인과 소설가, 화가인 친구들이 놀러왔단다.
한 시인과 나이를 떠나 친구가 되면서, 그녀는 예술가 친구들을 무더기로 얻게 되었다.
눈빛이 좀 무서운 소설가 김 모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문짝과 서랍을
열어보았단다.
심지어는 안방 장롱의 속옷서랍까지.
"미친 것 아닌가 싶어 섬뜩하더라고요. 두꺼비집까지 열어봤다면 말 다했죠."

몇 년 뒤, 나는 그가 그동안 양해도 구하지 않고 함부로 열어제꼈던
수많은 서랍들 속을 한 권의 책을 통하여 구경할 수 있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프리즘을 통하여 그 모든 다양한 빛깔들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발가벗겨졌다.
이해가 안 되는 건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

얼마 전 친한 사람이 함께 일해 보라며 누군가를 전화로 연결시켜 주었다.
카페에서 얼굴 마주보고 인사 나누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장면이 어색해서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어느 대낮에 병에 든 오렌지주스 세트를 덜렁거리며 집으로 왔다.

알고봤더니 부동산으로 돈을 좀 벌어 재테크 관련 책을 내보겠다고
출판사를 차린 케이스.
알고봤더니 그가 바라는 건 최소한의 경비로 교정을 딱 한 번만 보고
일정에 맞춰 후닥닥 책을 내는 것.
그동안 나온 두 권의 책을 훑어봤더니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이었다.
신생출판사와 손잡고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나마라도 안하는 것보단 낫지 않아?  당분간 책값은 되잖아."
그를 보내고 돌아와서 나는 종이박스에서 주스를 꺼내고
냉장고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당분간 책값'이라고 시건방을 떨었지만, 그때 내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두꺼운 병 속의 오렌지주스 색이 그렇게나 선명하고 예쁜 것이
조금 위로가 되었던가 말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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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7-07-1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서재에 맨 처음 들어왔을때, 전세보증금 얘기가 있었어요.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한 이야기'라는 카테고리 제목이 딱이다 싶었는데, 오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로드무비 2007-07-12 14:59   좋아요 0 | URL
수단 님, 김서령 소설 읽고 너구리 속의 다시마 조각 하나에 줄줄이 생각나더군요.
이청해의 소설부터 오렌지주스까지.ㅎㅎ
이 카테고리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제 방 가끔 들른다고 하셨죠?
다행 + 흐뭇.^^

nada 2007-07-1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은살 상자는 조금 무서워요. >.<

로드무비 2007-07-12 14:51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 님, 사람들의 서랍 속엔 별 게 다 들어 있죠.
굳은살 정도가 대수예요?=3=3=3

2007-07-12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3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2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3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7-1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전 이 페이퍼 읽을 때마다 섬뜩,해요.
가볍게 처리하시는 삶의 무게에.. 오늘, 제 서랍들을 하나씩 열어 살펴보고
싶어져요. 정리 안 하고 사는데... 제맘의 서랍들도 열어봐야겠어요.
이 페이퍼를 좋아하는 한 사람.^^

로드무비 2007-07-13 12:44   좋아요 0 | URL
혜경 님, 전 하도 엉망진창이어서 처박아 두고 자꾸 새 서랍만 삽니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젊은 영혼들의 기록
황광우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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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마지막 주, 광주항쟁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 씨의 부음을 접하고
10여 년 전에 나온 그의 저서 <운동화와 똥가방>을 검색했더니 절판이다.
마침 한 서점에 재고가 있다는 기록.
부랴부랴, 황광우의 신간과 함께 주문했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윤동주의 시 '사랑스런 추억'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원고를 넘기자마자 쓰러져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큰형 혜당 스님(황승우)과 세째형 황지우 시인과의
재미있고 소소한 일화들을 기대했다.
소년기와 청년기의 황씨네 형제들은 어땠을까?
(김훈은 오래 전 황광우의 결혼식장에서 그들 형제를 보고
"가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로군"이라고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아무튼 이 책은 그 소박한 기대를 보기좋게 배반했으니,
80년 5월과 87년 6월을 그럴 수 없이 담담한 어조로,
사실에 의거하여 기록하고 있다.

1979년 8월 나는 광주의 현대문화연구소에 출입하였다.
윤한봉 형은 감옥에 간 후배들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책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나도 내 징역살이에서 본 책을 다 내놓았다.
윤한봉은 수도사였다. 지산동 어느 켠에 골방 하나를 쓰고 있었다.
가서 보니 빈방이었다.
'나의 재산목록'이라고 쓰인 편지지가 있었다.
팬티, 양말, 칫솔, 이쑤시개, 손톱깎이 등
50여 종이 그의 총재산이었다.(67쪽)

광주의 윤한봉, 윤상원, 박관현, 들불야학, 전남여고 앞에서 책과 튀김을
함께 팔았다는  카프카서점 주인 김남주, 용접기술사 2급 자격증을 따고
독산동 귀뚜라미보일러에서 일한 노회찬, 박병태, 거름출판사, 권인숙, 박종철......
한마디로 이 땅의 민주화에 바친 눈부신 젊음의 기록.

위장취업 여대생 박상옥(고대 83학번)의 일화가 특히 인상 깊었다.
온 집안의 희망이었던 명문대생 동생이 어느 날 자신처럼 공원이 되었다.
"상옥아,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엄마아빠 걱정하시니 가끔 집에나 들러라."(127쪽)
동생을 말리기는커녕 그로부터 20년간 생활비를 보내주었다는 언니.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잘 안다는 말이 가슴을 친다.
그나마 세상이 요만큼이라도 바뀐 건 그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살아 있는 에피소드들을 읽고 있자니 안재성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읽을 때 
느꼈던 감동과 흥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경성 트로이카의 주역 중 한 명인 '걸어다니는 자본론' 이재유 이야기도 나온다.)

황광우는 이 책에서 윤한봉의 자필 재산목록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그의 재산 목록 1, 2호는 손목시계와 만년필이었다.(<운동화와 똥가방>)
10년 전에 윤한봉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며
일체의 감상을 배제한 이런 기록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는데
엊그제 황광우의 글을 읽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5월광주와 6월항쟁은 사실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아, 오오 하는 감
탄이나 기교, 과장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문지에 둘둘 만 시루떡 같은 글의 구수함과 찰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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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9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0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7-14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사른 청춘은 재가 되었나 님, 황씨네 형제에 관심이 있어 오래 전
혜당 스님의 책도 사보고 했습니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전혀 멋을 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객관적인 진술. 달리 보면 그게 좀 오만한 태돈가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촉촉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드라이한 진술로 일관한 게 전 좋았어요.
저 혼자 먼저 도취한 태도를 무지 싫어하다 보니 그 반동으로.^^
그래봤자 윤한봉 님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이긴 하더군요.
그건 그렇고 곧 개봉되는 영화 '화려한 휴가'가 어떤 기폭제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은밀한 마음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 카프카서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한쪽 옆에서 튀김을 만드는 시인을 보고 싶어요.^^

조용히 님, 아이고 고맙습니다.(_ _)

2007-07-13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7-14 05:01   좋아요 0 | URL
씽긋 님, 아이고, 그 사실을 깜빡했어요.
자는데 이상하게 뒤통수가 간지러워 일어났더니......는 괜히 하는 말이고,
일 때문에 일어나 컴 앞에 앉았는데 메일을 확인하고 싶더라고요.ㅎㅎ
혜당스님 책에도 버젓이 나와 있고 시인의 글을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그리고 그분의 삶을 멋지다 생각해 놓고 이럴 수가.....
책이나 좋아하는 작가에 관한 한 꽤 쓸만한 기억력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제겐 없군요. 엉엉.

혜당 스님 책을 찾아 읽고 리뷰와 댓글 틀린 부분 고쳤습니다.
고맙습니다.^^


2007-07-10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