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kfast On Pluto (플루토에서 아침을) - O.S.T.
Various Artists 노래 / 워너뮤직(WEA)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극장 문을 나서서 서점에 들러 신간들을 구경하고 버스를 기다리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빼드는 순간에도 내 귀에는 음악이 흘렀다.
제목을 모르는 노래도 있었지만 대부분 귀에 익숙한 노래였다.
오랜만에 들은 모리스 앨버트의 'Feelings'는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귓속을 맴돌았다.
몇 주 동안 계속.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성당의 첨탑 위에서, 지붕 위에서, 창틀에서, 울새인지 박새인지 참새들이 아침을  연다.
자기들끼리 조잘조잘  간밤에  일어난 소식을 전한다.
어느 집 지붕 아래에서 일어났대도 별로 놀라울 것 없는 그렇고 그런 하찮은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은 그 지붕 아래에서 때 낀 창문의 커튼을 열고 닫으며
별볼일 없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플루토에서 아침을>은 서른몇 개의 제목 아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영화.
까맣게 잊고 있던 70년대의 올드팝들이 화면 속에 잘 버무려져 있다.
'Feelings'가 나오던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인 여장남자 키튼(킬리언 머피).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유령숙녀'라고 부르며 그녀를 찾아 런던에 오는데
만나는 인간마다, 내딛는 곳마다 지뢰밭이다.
그녀가 지닌 무기라야 겨우 하이힐의 뾰족한 뒷굽이나 향수 스프레이.

어느 날 밤 거리에서 쫓기다 간신히 지나가는 차를 세워 몸을 피하는데,
흑인 운전사가 웃으며 틀어주는  음악이 'Feelings'.
관객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손에 들고 있던 커피나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된다.
그때 흐르는 음악이 너무 감미로워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시도 마음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일까? 

<푸줏간 소년> 이후 두 번째로 극장에서 만나는 닐 조던 감독의 이 영화.
'Feelings' 외에도 The Rubets의 'Sugar Baby Love'   Boby Goldsboro의  'Honey' 
'The Windmills of Your Mind' 등 총 13곡의 사운드 트랙에
주연배우 킬리언 머피가 직접 부른 노래도 한 곡 포함되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음반이 나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일상은, 아이와 남편이 아침에 남긴, 식은밥을 합치는 작업과도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먹지 않고 버렸다.)

오늘 아침은  양은냄비에 그것들을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몇 숟가락의 밥과 고추장과 나물을 보태어 먹음직한 비빔밥을 만들었다.
맛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키튼 양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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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05-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무척 무서울 거 같은 느낌인데요...
근데 왜 이야기는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
좋은 한 주 되세요~~~

로드무비 2007-05-1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달래 님, 이 영화 달콤하고 화사한 구석도 있어요.
화면을 보면 아시겠지만.
님도 멋진 한 주 보내세요.^^*

Mephistopheles 2007-05-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꽤 좋다고 들었어요..
특히 킬리언 머피의 변신이 파격적(?)이라고 하던데..^^

2007-05-14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5-1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의 일상은 냉장고의 음식들을 계획적으로 비우는 건데.. ㅎㅎ 잘 봤습니다.

로드무비 2007-05-14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틸 라이프 님, 5월 3일 개봉인 줄 알고 달력에 대문짝만하게 표시했는데
6월로 미뤄졌더군요.
저도 무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흐뭇하군요.
왠지 제 영화 취향을 좋아해 주시는 것도 같고, 님과 비슷한 것 같아서.^^

메피스토 님, 킬리언 머피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아주 재밌게 본 영화입니다.
토요일에 님 덕분에 <칠판>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어요.^^
(댓글은 안 남겼지만 추천은 했시유.=3=3)

로드무비 2007-05-1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찌찌뽕~~
그 보람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ㅎㅎ
시든 미나리에서 괜찮은 잎과 가는 줄기를 몽땅 긁어모아서
초장 넣고 비빔밥 해먹었더니 맛나더군요.(이건 팁!)

2007-05-14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4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깔~~
'칠판'을 '책상'이라 하다니!
좀 전에 보니 'Feeling'을 엉뚱하게도 'Flling'으로 계속 썼더구만요.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2007-05-14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4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월 15일 님, 정확한 날짜는 모르고 있었어요.
오래 전 <소무>를 보고 단번에 이 감독의 팬이 돼버렸답니다.
<세계>를 보고 '보온병'에 대해 말씀하셨죠?
갑자기 그게 생각나네요.^^

waits 2007-05-15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닐 조던의 '두번째 이별'을 보고 참 좋아했었어요, 알지도 못하는 아일랜드에 어줍잖은 동경을 보태가면서... 그의 영화 한참 못봤는데, 어떨까 궁금하네요.
전 오늘 맘 먹고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보러가려고 해요^^, '아들' 보고 놀란 가슴 박광정 아저씨가 달래주시길...ㅎㅎ

로드무비 2007-05-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 님, 아일랜드, 더블린, 이상하게 끌려요.
이 영화에서 닐 조던은 정치적인 발언은 슬쩍 비껴갑니다.
<아들> 보셨군요.
이상했나봐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개봉일에 보러 갔었어요.
영화 <라이방>의 분위기도 있고. 인간들도 허름하고.
전 참 재밌게 봤어요.
님은 어떻게 보실지 궁금.^^

검둥개 2007-05-16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어트 중엔 역시 절대로 로드무비님의 서재에 얼씬거려서는 안 되는 것을.
고봉밥에 열무김치를 버무려서 한 양푼 먹었어요.
지뢰밭도 부른 배로 거니는 것이 한결 나으려니 싶어서. ^^ =3=3=3

로드무비 2007-05-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 님, 고봉밥에 열무김치라니 거기 거시기 맞아요?
'밥'이라는 글자만 봐도 식욕을 느끼는 건
알라딘에서 우리 둘뿐이려나요?^^
(모쪼록 다이어트 성공하기 바랍니다.=3=3)

다락방 2007-05-1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보고 싶은 영화예요. 그런데 OST 도 좋은가 보군요. 잘 읽고 갑니다. :)

로드무비 2007-05-16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영화가 좋으니 음악도 덩달아.
아직 상영중인 것 같던데요.^^

다락방 2007-05-1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드무비님. 아직 상영중인데 아마 오늘까지인듯 하더라구요. 평일엔 못보고, 주말에 씨네큐브는 다른 영화를 상영해요. 흐음..

로드무비 2007-05-17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디비디로 봐도 좋죠, 뭐.
놓친 영화는 아깝지만 또 다른 멋진 영화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퇴근 후 극장에 달려가는 직장여성, 뭔지 부럽고 그립네요.^^)

icaru 2007-05-1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주룩주룩ㅠ.ㅜ) 저만의방으로 업어감을 허락하소서..

2007-05-21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2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스틸 라이프 님, 아직 상영하는 것 같던데요?
씨네큐브에서.
한번 체크해 보셔용.
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 영화.^^

이카루 님, 영광이옵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 보내준 <꿈 그리고 악몽>을 읽었다.
이주노동자들 중에서도 네팔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을
직접 발로 뛰어 기록한 소책자.

현재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는데
그 중 절반이 비자 없이 체류하는 미등록노동자(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이란다.
2007년, 악명높은 산업연수제도가 고용허가제로 바뀌어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호한다고는 하나 미등록노동자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법적인 보장도 받기가 어렵다.

국내에서 일하는 네팔 노동자 수가 500여 명이라는데
오래 전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옴니버스 인권영화에서 박찬욱 감독은
지갑이 없어 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 값을 내지 못한 죄로 고발당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끌려가 6년 넘게 갇혀 지낸 네팔 여성 노동자 찬드라 구룽의
실화를 다뤘다.
그 단편의 제목이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정말 기가 막힌 스토리고, 잘 뽑은 영화 제목이었다.
그 사람이 백인이었다면 식당 주인은 그를 경찰에 고발했을까?

<꿈 그리고 악몽>에 실린 열두 명의 네팔 노동자들은 20대, 30대의 젊은 나이에
많은 수가  혼자 자취방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인을 모르는 돌연사도  있다.
아이들 겨울 외투를 사서 보내겠다는 전화를 받은 지 며칠 안 된 네팔의 부인에게
"당신의 남편이 자살했다"는 일방적인 통보만 하고
그 목격자를 끝까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수상한 회사가 없나.

새벽에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더니 아무 말이 없어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었는데
알고보니  한국에서 일하던 시동생이  자취방에서 혼자 숨지기 직전의 시간이었던 것.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었을까.
마누라도 도망가고 없는 집에 전화를 걸어......

그런데 신기한 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남편이 그렇게 고생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면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텐데, 알선업체의 선처(?)로 남편의 뒤를 이어 한국에 오는 것을
강력하게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겠지.

'선처'라고 하니 또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다.
지난달 서울 신도림동 아파트 신축공사 화재현장에서, 발각될 경우 강제출국의
위험을 무릅쓰고 인부들의 탈출을 도운 몽골인 노동자 네 명이
당국의 선처(기가 막혀서!)로 불법체류자의 멍에를 벗었다.
'선행'이라는, 불법체류자의 멍에를 단번에 벗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생긴 셈이다.
뉴스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 이놈의 나라 어디까지 뻔뻔해지는지 두고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 출입국관리소 외국인노동자 보호소 화재현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상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는지 문득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달랑 천만 원씩 지급된다는 소식이다. 

<꿈 그리고 악몽>을 읽고 오래 전 우리 사회를 잠시 떠들썩하게 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떠올렸다.
그때와 달라진 건 허울좋은 제도의 명칭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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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5-1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이었나 EBS였나, 하여간 찬드라를 봤더랬어요. 정말 끔찍하더군요. ㅠ.ㅠ

에로이카 2007-05-1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섯개의 시선" 마지막 편이었던 박찬욱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너무 기가 막혀 지금도 기억합니다. 신도림동 공사현장 얘기는 처음 듣네요. 오랜만에 로드무비님 글 읽으니, 너무 좋네요. 잠수로 몸값 높이기 작전이신가요?? ^^

Mephistopheles 2007-05-1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에 비자받기 굉장히 까다로운 나라라고 하더군요...^^

로드무비 2007-05-1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에'라는 말이 절로 나와요. 그죠? 메피스토 님.^^

에로이카 님, 더 올라갈 몸값이 있어야 말이지요.
어제 올린 리뷰와 페이퍼는 안 좋았어요?=3=3=3
찬드라는 책까지 나왔답니다.^^

FTA반대 조선인 님, 전 그 식당 주인을 고발하고 싶었어요. 부르르~


진달래 2007-05-1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가 막히고... 또 부끄럽습니다........................ 이런 현실이...

로드무비 2007-05-1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달래 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훌쩍.

2007-05-11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7-05-1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ever
Ending
Peace
And
Love에서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찬드라 꾸마리 구릉

저도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믿거나 말거나...'가 들어 있는 <여섯 개의 시선>이 모두 재미있었죠.

2007-05-12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은 ~님처럼 성실하게 잘 쓰고 싶은데
일종의 사회적인 발언엔 어색해서 말입니다.
보여줄만한 글은 아닌 것 같은데...아무튼.
(다짜고짜) 충성!!^^

하루 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박광수 감독 게 제일 빠졌죠.
'얼굴값'이었나?
정재은 감독 것도 기대에 못 미쳤고.
찬드라가 최고로 강렬했어요.
임순례 감독도 거기선 위밍업만 한 것 같더군요.
('시선'이 1, 2편 나왔죠? 에피소드들이 막 헷갈립니다.;;)
잘 지내시지요? 반가워서, 실실.^^

우리부터가 인간답게 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런 페이퍼 쓸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미국의 어느 사막 도시 가운데 닭공장이 있는데
불법체류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기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언제 한 시사 프로에서 봤는데.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엄청난 노동강도와 모멸감.
그걸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으니.;;

아키타이프 2007-05-1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핍박을 하기 보다 당하기를 더 했을 우리나라.
그렇기에 더 부끄럽습니다.
저역시 백인과 비백인으로 나누는 차별된 시선으로 그들은 평가하고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군요.

로드무비 2007-05-13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헐리우드 영화, 그 화면 속의 개성 넘치는
선남선녀 주인공들을 곧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모르는 새
선망 내지 호감을 품었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백인과 동남아 이주 노동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자각을 했으니 앞으로는 달라지겠지요.^^

 

살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기도 한다.  어느 날 영문을 모르는 가운데 도로 빼앗겨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기도 하지만......

작년 여름까지 잘 사용하다가 고장난 디지털 카메라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만화가......)
3년 전, 핸드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는데 무엇엔가 당첨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세금을 얼마간 내고 상품을 수령하라는 것이다.
세금이라야 카메라 값에 비하면 껌값.

알라딘에 방을 만들기 전 내가 잠시 죽쳤던 곳이 모 경품 사이트였다.
그곳을 알고 나서 하루 두서너 시간씩 컴 앞에 붙어앉아 있었는데
경품 이벤트에 응모하려고 즉석에서 회원으로 가입한 데가 도합 20여 곳이었다.
(짐작건대 그 20여 곳 중의 한 군데서 내게 카메라를 보낸 게 아닐까.)

일주일인가 열흘쯤 혼을 빼놓고 닥치는 대로 가입하고 응모란 걸 하다가 싫증이 나서
다음 놀이터로 기어든 곳이 알라딘.
수첩에 하는 몇 줄 메모가 전부이다가, 페이퍼며 리뷰며 댓글이며 끄적이다 보니 신이 났다. 
공짜로 굴러들어온 디지털카메라도 그 쾌락에 단단히 한몫했다.
1, 2년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놀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울 속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10년 결혼생활 동안 딱 두 번 해보고 실패한 후 김치라는 걸 얻어 먹고만 살다가
컴이 고장나 서재활동과 인터넷 쇼핑을 중단하게 되자 갑자기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한달 전쯤 열무를 한 단 사다가 겉절이를 해보았더니 맛이 괜찮았다.
신이 나서 다시 열무를 사러 갔는데 마침  크게 세일중인 배추가 눈에 들어왔다.
배추 두 포기를 사와 한 포기는 통으로, 한 포기는 잘라서 맛김치로 나눠 했는데 성공이었다.

갑자기 사는 일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남편이 한 번씩 돌려주면 감지덕지할 뿐
귀찮아서 통 사용하지 않던 청소기를 직접 돌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결과는, 고양이 낯짝 세수 같던 걸레질 대충의 청소와는 격이 달랐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청소기를 직접 돌린다.
직접 담가먹는 김치에 청소에, 어느 알뜰주부 부럽지 않다.

사흘 전, 마츠모토 타이요의 <철근 콘크리트>(표지 제목은 떠억하니 '철콘 근크리트'로
장난스럽게 표기되어 있다)를 재밌게 읽고
뒤에 붙은 해설을 마저 읽다가 이 작가와 같은 계보의 만화가들과 작품들을 소개받았다.
청춘만화의 최고봉이라는 찬사가 자자한 <물장구 치는 금붕어>가 나왔다.

그날따라 몹시 땡기길래 혹시나 하여 검색창에 제목을 쳐봤더니,
어느 사이트에서 딱 한 질을 팔고 있었다.
<물장구 치는 금붕어>와 함께 N-A-S-A 등 우라사와 나오키의 절판된 단편 세 권이 눈에 띄었다.
열무 옆의 배추처럼.

오늘 그 열무와 배추 보따리가 도착했다.
혹여라도 그사이 판매자의 마음이 변할까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무사히 보따리를 받고 즐거운 나머지, 기록 삼아 페이퍼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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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5-1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김치 간을 참 잘 봅니다..
왠지 로드무비님표 "생활의 발견" 같군요..^^

로드무비 2007-05-10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올 겨울엔 님을 초빙하여 김장도 직접 할까요?
돼지 앞다리뒷다리도 삶지요, 뭐. 막걸리 한 말이랑.(호기롭게)^^

물만두 2007-05-10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럴때 기분은 빼앗기면 안되죠. 와서 손에 쥐어야 안심이 되구요^^

sudan 2007-05-1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청소기 돌리는 건 대충하는 청소고, 걸레질이야 말로 집안에 광을 내는 청소인 줄 알았는데요. 긁적.

2007-05-10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7-05-10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귀한 책들 건지셨네요..^^

waits 2007-05-1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 읽은 몇 권의 책 덕분에 마음이 활짝 움직였는데, 어제 오늘 좀 시달렸더니 누렇게 시들기 시작하는 느낌이예요. 마른 시래기라도 구해야할까 싶네요.
로드무비님의 열무와 배추, 멋집니다. ㅎㅎ

진달래 2007-05-1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뜰주부.............................로 잘 가시다가
결국은
서재로 돌아오셨네요. ^^;;

로드무비 2007-05-1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달래 님, 다시 갈까요?=3=3=3

나어릴때 님, 제목을 일부러 허름하게 잡았어요.
저 잘했죠?^^*

날개 님,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검색창에 써넣는 순간, 바로 짜안~~
(저 그날 오랜만의 걸음이라 님의 룸에도 잠시 들렀는데, 헤헤.)

알뜰주부 대열 님, 하하, 며칠을 가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건 10킬로그램씩 주문해 먹는 것보다
재료비가 훨씬 많이 들어간다는 것.(계산해 봤더니.)
그래서 관둘라고요.=-3=3=3

수단 님, 걸레도 조그만 걸레여야 해요.
걸레가 크면 손에 잡기도 싫더라고요.
전 지독한 기계치라, 그게 뭐든 플러그 꽂는 건 무서워합니다.^^

새벽별님, 아아이잉, 반가워서.
반겨주시니 헤벌쭉.^^

물만두 님, <영원의 아이>도 꼭 구하고 싶은데.
님은 제 맘 알아주시는군요.^^
 
나의 소소한 일상 -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몇 주 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러 갔을 때
꼴에 소설가라는 마츠코의 기둥서방 방에서 대문짝만한 다자이 오사무의 얼굴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함부로 쌓인 책들과,
햇빛을 차단하는 싸구려 커튼 한 장이 전부인 그 골방, 벽에 붙은 흠모하는 소설가의 대형사진.
1948년, 다자이 오사무의 무덤 가에서 할복자살한 문학청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바로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지난주에는  <소라>라는, 스튜어디스가 주인공인 만화를 읽는데
'쓰가루(津輕)'가 나왔다.
다자이 오사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60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 작가의 살아생전 흔적을 혼자 좇는
초췌한 몰골의 청년들. <쓰가루> 한 권을 품에 안고......
(바닷가 그 스산한 언덕도 좋았지만 언젠가 나도 그 해저터널의 투명창 위에서
물결이 합류하고 부서지는 장면이 보고 싶다.)

소설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문학강연회에 참석한 지 20일 뒤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소년 다자이 오사무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오래 전 나는 김승옥과 이제하, 최인호의 글에서 공통된 어떤 수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알고봤더니 다자이 오사무의 감수성이라는 향수였다.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이 황홀해 하며 언급했던 <사양(斜陽)>의 그 유명한 장면은
<크레이브의 부인>(처음 본 제목!) 같은  책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그 시절의 귀부인은 궁전의 정원이나 복도 계단 밑의 어두운 곳에서
태연하게 소변을 봤다'(<나의 소소한 일상> 126쪽)고 하는데,
정원 덤불 속의 방뇨 장면으로 그렇게 멋지게 처리하다니!

<나의 소소한 일상>을 읽고 나서 나는 책꽂이를 뒤져  '쓰가루'와 '쓰가루 통신'을 묶은
<다자이 오사무의 귀향>(1993년 진화 刊)을 꺼내어 다시 읽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나면  하염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녹작지근해지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조그만 것이라도 행동하게 된다.
툭 튀어나와 내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못을 망치로 박아 넣는다든지,
엉망인 책꽂이를 뒤진다든지, 하다못해 슬리퍼를 끌고 동네 가게에 맥주라도 사러.......

-- 창작에서 가장 당연히 힘써야 하는 것은 정확을 기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풍차가 악마로 보이거든 주저말고 악마로 묘사해야 합니다.
또 풍차가 역시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런 자는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하지 못합니다.(<나의 소소한 일상> 242~ 243쪽)

"예술적 도취라는 웃기는 짓은 집어치우라"는 다자이 오사무.
그러면서 그 자신은 독한 체취 혹은 감수성이라는 향수로, 수많은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할 기미가 없는 나이지만, 그를 만나는 일은 아직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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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
그나저나 전 명성만 들었지 다자이 오사무를 읽진 않았거든요.
마츠코 영화 보면서도 한번 읽어볼까 생각하다가 잊고 있었네요.
이 책이라면 쉬엄쉬엄 시작할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

Mephistopheles 2007-05-1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동은 통속적일진 몰라도 글로 표현하면 근사해진다는 말씀이신가요..?? ^^

로드무비 2007-05-1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통속이 뭐고 근사가 뭔지......??
죄송하게도 질문의 뜻을 잘 모르겠어라.
행동은 멋진데 글로 표현하면 조잡해지는 경우는 더러 봤습니다만.=3=3

체셔고양2 님, 마츠코가 뭐가 혐오스럽다는 말이냐,라고 하셨죠?
그 페이퍼 참 멋졌어요.
저도 영화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다자이 오사무의 글은 통쾌하고 좋아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 때 읽으세요.^^

Mephistopheles 2007-05-1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원 덤불 속의 방뇨 장면은 상상하면 젼혀 아름답거나 멋지지 않는데..
표현은 멋지다면서요.?? =3=3=3=3=3

로드무비 2007-05-1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표현도 간명하고 좋았지만('태연한 얼굴'이나 '알궁둥이' 같은 표현)
그 장면을 상상하면 뭔가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 묘한 기분을.
나의 경우 어릴 때도 그 '귀족'이라는 표현은 거시기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 대목에 특히 우리 작가들이 열광했는지 궁금해요.^^


perky 2007-05-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김승옥씨 작품에 풍기던 우수, 쓸쓸한 분위기가 참 좋았더랬는데 다자이오사무의 감수성이었군요. 둘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에요..

로드무비 2007-05-1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우차우 님, 그랬군요.
이제하 선생은 몇 년 전 어느 글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극복했다'고
쓰셨던 것 같은데.ㅎㅎ
소설가 김승옥의 신앙수필집도 곧 읽어보려고 합니다.^^


2007-05-10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05-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도 읽기전에 이름만 보고 보관함에 넣게 하는 오사무의 저력.
^-^ 넣고 나서 찬찬히 읽은 리뷰의 저력도 역시 ... 오랜만이에요, 로드무비님.

로드무비 2007-05-1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 반가워유.
영화며 만화며 도처에 다자이 오사무더군요.
오늘은 또 '갓파'를 뒤집어쓰고 나온 만화 여주인공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책을 자꾸 들이미네요.^-^

김채원의 글 님, 전 김채원 씨보다 언니 김지원 씨의 글들이
더 좋아요. 아스라한 것이......
왜 아니겠습니까.
저도 예전에 그런 충동을 느꼈는데 충동으로 그냥 끝났어요.
이 게으름은 아마 영원히 우리를 질질.......
('우리'라고 물귀신작전을 씁니다. 헤헤~ 그 얼굴 참 멋져요.^^)


진달래 2007-05-1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모르는 작가인데 글을 읽으니 무척 감상적이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드네요.
"태연하게"라는 표현이 유독 맘에 들어요. 음... 관심 가는 책입니다. ^^*

네꼬 2007-05-1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흔들릴까봐, 이달엔 더이상 책을 사지 않겠노라고 공표하였는데.. 너무나 간단하게 흔들립니다. ㅠ_ㅠ

로드무비 2007-05-1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 님, 이 책만 주문하세요.
괜시리 5마넌어치 장바구니에 채우지 마시고. 헤헤~

카페인 님, 그의 감상과 통찰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태연하게'가 관건이거든요.^^

sudan 2007-05-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있어요. ^^ 사양의 유명한 장면이 뭔데요? 분명 읽은 소설인데, 왜 저는 기억이 안 나는걸까요.

waits 2007-05-1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드무비님 반가워요. 히히~
여전히 보고 읽고 '포착'하고 계시는군요. ^^

나비80 2007-05-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로드무비 2007-05-1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 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어릴때 님, 포착은요.
손가락 사이로 술술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수단 님, 산책 중에 갑자기 요의를 느끼고 정원 덤불 속에 쪼그리고 앉잖아요.
그것이 하나도 불결하게 느껴지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다며
진정한 귀족이란 저런 모습인가, 감탄하던 장면.
우리도 뭘 하든 태연하기로 해요. 하하.^^


kleinsusun 2007-05-1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에 소설가라는..."
로드무비님의 리뷰는 시작부터 화끈하다니까요! 호홋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읽고 나면 뭔가 작은 행동이라도 하게 된다.......
오.... 저도 읽으면 이런 반응을 할까요?ㅋㅋ 궁금해서 읽어봐야 겠어요.^^

로드무비 2007-05-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 님, 님은 저랑 달리 스케일이 큰 행동을 하실지도 모르죠.
'꼴에'라는 말 무지 좋아합니다.
'꼴에 주부라고'는 저를 놀려먹는 말.^^

로드무비 2007-06-11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內外 님, 대수로운 걸 포착한 건 아니고요.
아무튼 기미 정도.
(반갑습니다.^^)
 
관계의 가면
러셀 윌링엄 지음, 원혜영 옮김 / IVP / 200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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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구절에 공감하면서, 또 반발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내가 제일 많이 밑줄을 친 곳은 '회피자'와 '비껴가는 자'  유형의 페이지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알라딘 페이퍼에는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인생의 모든 문제를 가볍디가볍게 처리하려고 하는 나의 의지(!)를 담은 제목이다.
그런 자신이 나이에 비해 많이  미숙하다고 생각하지만,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읽는 내내 내게 종주먹을 들이대었다.
그게 과연 수많은 고민과 모색 끝에 나온 결론이냐?
'수많은 고민과 모색'이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건 아마 살면서 내가 여러 번 구르고 깨어지면서
본능적으로 선택한 포지셔닝이었을 것이다.
포지셔닝을 가면이라고 야단을 쳐도 할 말은 없다만, 크게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다.
오죽하면 그랬을라구.

이 책은 세상을 살다가 자기도 모르게 뒤집어쓰고 잘 때도 벗지 않는 당신의 가면을
피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종용하고 있다.
러셀 윌링엄은 그것을 여섯 개의 가면으로 분류하여 잘 진열해 놓았다.

회피자 가면 / 비껴가는 자 가면 / 자기 비난자 가면,
구세주 가면 / 공격자 가면 / 영적인 해석자 가면.

사실을 말하면 이 여섯 개의 가면은 나도 모르게 바꿔가면서 잠깐씩 모두 써보았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다. 지나놓고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그건 한 자루에 달린 여섯 색 볼펜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여섯 색 볼펜 중에  좋아하는(혹은 필요한) 특정 색만 사용하다가 그 색이 나오지 않으면
그 볼펜은 수명을 다하는 게 된다.
그처럼 어떤 가면은 너무 편해서 벗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뒤집어쓰고 있는 그 두꺼운 가면(거짓)을 벗으라고.
상처와 두려움을 직시하라고.
자신의 신神 앞에서도 꽁꽁 싸매고 있는 그 보따리를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개별적인 상처와 고독, 공포라는 코드에만 끼워맞추는 건 재미없지만
자신의  보따리를 한 번은 꼭 햇볕 아래 풀어헤쳐 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러는 데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당도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회피자'의 자세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좋아하는 배우 미셀 파이퍼는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꽤나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죠. 자신의 마지막 카드는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그 마지막 카드가 무엇일까 가끔 생각하는데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남의 패는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정도의 원칙만 서 있을 뿐.

이 책은 인간들이 쥐고 있는 그 마지막 카드조차 가면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사실이지만 결혼 전의 몇 해 나는 '유쾌한 사람'을 연기했다.
어디까지나 선선하고 유쾌한 태도의 견지.
그랬더니 어느 때보다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고, 나 스스로 그런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연기이고 가면을 쓴 거란다.
'포지셔닝'을 '가면'이라고 끝까지 우기니 조금 마음 상하지만.

책을 읽으며 모처럼 자신을  들여다보니 가슴 뜨끔하면서도 좋았는데,
바라노니, 내 서랍만 정리하고 남의 서랍은 함부로 헝클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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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4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4-24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이야기'를 읽고 가볍게 생각안하는
메피스도 댓글 남기고 갑니다..^^
(리뷰의 내용을 보고 중국영화 "변검"이 생각났습니다.)



 


2007-04-24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4-24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만난 로드님의 글, 역시 좋군요.
'神 앞에서도 꽁꽁 싸매고 있는 그 보따리'

건우와 연우 2007-04-2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 쓰고 있어서 어디까지가 가면인지 알 수 없으면요?

진달래 2007-04-24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주먹을 들이대셨다는 게 전 왜 이렇게 속이 다 시원한지요... ^^;;
마지막 구절도 정말 멋져요...

rainy 2007-04-2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 치고 보관함 생각이 안나는 리뷰는 얼마만인지 헤헤..
요즘엔 이런 책 안 읽고 싶어요.
나름 있는 용 없는 용 다 써가면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참이거든요.
'가면'이든 '포지셔닝'이든 그 것밖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할 때는
하는 수 없다고 뒤집어 써야 한다고 ..
제가 너무 까칠한가요? 로드무비님 글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데 ^^

에로이카 2007-04-25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면을 포지셔닝과 대비시키는 게 참 맞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가급적 일상을 단순하게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쓰고 다니는 가면이 여섯개 씩이나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전 그런 것 같아요... 가면 하나 벗었다고 그것이 맨 얼굴이란 보장도 없지 않을까요? ... 오랜만입니다.. ^^

로드무비 2007-04-25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반갑습니다.
가면과 포지셔닝은 사실 다르지만
그렇게 가볍게 처리하고 싶었어요.ㅎㅎ
하마터면 음산하고 칙칙한 리뷰가 나올 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구체적인 사례와 인물들이 떠오르는지.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의 가면이 하나라야 말이지요.
양파껍질처럼 켜켜이 쌓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rainy 님, 보관함 생각이 안 난다니 다행입니다.( '')
언젠가 '용을 쓰던' 페이퍼를 몇 편 계속 올렸던 생각이 나는군요.
맞아요, 아무리 용을 써봐도 다른 방법이 없을 땐
그 중 마음이 움직이는 쪽으로 해야지요.
하나도 안 까칠하고 봄비처럼 촉촉한 님입니다요.^^

카페인 님, 카테고리를 저는 평소에도 '서랍'으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왠지 제가 쓰기엔 너무 화려한 단어 같아서요.
확신 하에 남의 서랍 마음대로 헝클어뜨리는 사람들
정말 싫어요.
님도 그러시군요.^^

건우와 연우 님, 긍게요.
그 가면에 자신마저 깜짝 속아넘어간다니까요.
맨얼굴에 자신없으면 옅은 화장이라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가 가면인지, 생각하면 골치 아파서 이만.=3=3=3

L-SHIN 님, 神 앞에서도......
저도 아직 냄새나는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안 풀었어요.

메피스토 님, 저도 그 영화 재밌게 봤는데.
'의도적으로 가볍게~'는 킬킬거리며 읽어주세요.
그나마 요즘은 하고 싶은 말도 없네요.^^

연두색 커튼 님, 요즘 같은 날은 그림 액자가 따로 필요없어요.^^




아키타이프 2007-04-2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모두들 가면을 내던지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순수만이 남을까? 아니면 벌거벗은 본능만이 남을까?
왜 가면을 쓰기 시작했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거의 모두가....
놓여나지 못하는건지 놓치고 싶지 않는건지.
전 벗고 싶은 마음 보다는 그저 좀더 착한 가면을 쓰고 싶은 바람입니다.

로드무비 2007-04-2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오, 노!
절대 그런 상황 원하지 않습니다.ㅎㅎ
모두 가면을 내던진다면 그런 아수라장이 없을 거예요.
물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훨씬 괜찮은 세상이 될랑가는 몰라도.


로드무비 2007-04-2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뜻 손이 님, 전 몇 달 전 알라딘에서 이 책 제목을 발견하고
망설임없이 바로 질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하고 잘 지내고 싶어서요.^^*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멋지기만 한 님입니다만......)

2007-04-30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05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0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 적금 님, 무슨 일일까나.
그 작은 우환이 별것 아니기를......
<물장구 치는 금붕어>를 우연찮게 입수했어요.
혹 안 보셨으면 빌려드릴게요.
가지고 계실 듯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