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프로젝트 -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
오영진 지음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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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고 마른 오이 꽁다리같이 생긴 소설가 오공식이 남한의 작가 대표로 평양에 파견된다.
'북남교류협력단'의 총책임자로 오공식을 맞이하게 된 조동식과 노총각 김철수, 그리고
중학교 교원 리영희의 안내로 그는 평양에 머무르며 시민들의 생활상을 가까이서 취재하게 되는데.

자신의 희망사항을  만화로 설정한 오영진은 <평양 프로젝트>에서 생활 중심의
소소한 에피소드 별로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는데,
몇 년 전 경수로건설사업 건으로 북한에 파견되어 1년 넘게 신포에서 머무른 경험을 토대로 
더할 수 없이 사실적인 만화를 그렸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에 대표적인 부의 상징으로 '타워팰리스'라는 주거공간이 존재한다면,
평양에는 신흥부유층의 호화주거지로 '딸라 아빠트'가 있다.
오공식의 취재활동을 돕는 조동식은 퇴근 후 기세좋게 딸라아파트 앞에 내리는데,
바로 옆 장마당에 들러 아내의 부탁대로 콩나물, 둥근파 등의 남새(채소) 몇 가지를 산다.
저녁 반찬거리다.
장마당은 아파트 단지에 한 번씩 들어서는 알뜰시장 같은 것으로 짐작된다.
시장과 작은 교회가 있는 북한의 주택가 골목 풍경과 냄새를 상상해 본다.

북한에도 지역색이 존재하는데 함경도민은 좀 얄밉다고 하여 '정평 짜드라기' 또 잘 나선다고 하여
'찔락찔락'이라고도 하고, 평양 사람들은 타지역의 질시를 받는 편으로 깍쟁이라는 뜻의 '깜찍하다',
황해도는 성향이 좀 둔하고 게으르다 하여 '띵해도'라  한단다.
남한의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와 북한의 지역들을 의인화하여 나는 미팅 장소에 나온 처녀총각처럼
테이블에 마주보게 하고 사랑의 짝대기를 교차해 보았다.

북한에서 인기있는 신랑감 순서는 '군.당.대.기.실'이었는데, 여기서 '기'는 '5장 6기'라는 뜻으로
'5장'은 이불장, 양복장, 책장, 찬장, 신발장을 말하고 '6기'는 텔레비전 수상기 등 가전제품들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금은 '현.장.대.기.실'로 바뀌었다니,
1위 '현'은 현물(외국돈),  '장'은 장사능력이다.
통일 후를 막연하게 생각하면 북한의 타락상(?)이 되려 반가웠다고 할까.

<평양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 만화는 남한의 별볼일 없는 작가와
북한의 말단관리가 만나 간식으로 군고구마를 사다먹고 더러는 술잔을 기울이는 등의
소소한 풍경을 통해 북한을 보여준다.


"보라, 보라, 우리 영미 나왔다!"
"와 길케 느리배기를 부립네까! 날래 찍지 않구서리."(59쪽 '국제아동절')


남한으로 치면 어린이날 유치원의 재롱잔치에 참석한 북한 젊은 부부의 대화이다.
내가 정말 궁금하고 보고싶었던 건 우물쭈물하다가 딸아이의 멋진 포즈를 놓쳤다고 
아내에게 야단을 맞는 남편, 바로 그런 장면들이었다.
이 만화는 그런 장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못 그린 기린 그림 같은 오영진의 그림과 
평양 에세이가  아주 잘 어울린다.



('꾹돈'은 '뇌물'을 뜻하는 북한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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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1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래 플레져동무와 로드무비동무 때문에 이 책을 꼭 봐야 되겠시요..~!
동무들 뽐뿌질에 내래 못살겠시요~

반딧불,, 2007-01-1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래 보관함이 넘쳐서리 죽겠시요!
추천을 무슨 수로 피해가나요~

산사춘 2007-01-1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무들 뽐뿌질에 내래 못살겠시요~ ------> ㅎㅎㅎㅎㅎㅎㅎ (정색하고) 맞습네다!
찔락찔락, 꾹돈... 내용과 상관없이 넘 어감이 좋네요.

sandcat 2007-01-10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꾹 질러줘서, 양심이 꾹 찔려서 꾹돈일라나요.
궁금하군요, 이 책.

2007-01-10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its 2007-01-1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일 되기 전까지 북한의 '정감'은 좀 남아있어줬음 싶어요.
로드무비님 따라다니다가는 보관함에 책 담다가 파산할 듯. ㅎㅎ

로드무비 2007-01-1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 님의 리뷰 보고 산 책이 몇 권이더라?ㅎㅎ
사기사와 메구무의 책은 주문 직후 절판이라고 뜨더군요.
그런데 결국 받지 못했으니, 아쉽습니다.
이 만화 별 기대없이 집어들었는데 재밌게 읽었어요.^^

브루크너 님, 아침에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장바구니 내용도 닮아가는군요. 흐뭇.
그 청년 라이터가 있냐고 묻다니, 무지 재밌습니다.
피씨방 가고 싶네요. 컵라면 먹으러.
빨리 정상화되기를.^^

샌드캣 님, 아무도 모르게 꾹 찔러줘서 꾹돈이겠지요.
북한 말 참 재밌어요.
이상한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겹죠.
맞선 보는 풍경 같은 것도 나오고 아조 재밌게 읽었습니다.^^


산사춘 님, 어감이 정답죠?
술집도 있고 시장도 있고 북한도 많이 달라진 듯해요.^^

반딧불 동무, 메피스토 동무, 내레 님들 땜에 웃습네다.^^

2007-01-14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4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7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6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모의 곡예사
R. O. 블레크먼 각색 및 그림, 박중서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한 엉뚱한 소녀의 '예쁜 어린이 대회' 참가기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건물 지하의 식품 매장에서
종무식을 마치고 한 시간쯤  일찍 퇴근한 남편을 만났는데
그의 손에 갓 나온 빵처럼 따끈따끈한 이 책이 들려 있었다.

새해를 코앞에 둬서 그런지 앞으로 사정없이 초라하게 늙는 일밖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아 서글펐는데
누군가로부터 몰래 쪽지를 전해 받은 그런 기분이었다.

-- 너만의 춤을 추어라. 아무것도 의식하지 말고......

그날 본 영화와 책의 한결같은 메시지!

거리 한 모퉁이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곡예를 펼치다가 늙고 지친 캉탈베르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자신의 곡예가 언젠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진작에 무너졌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는커녕 그는 일생동안 단 한 명의 관객도 확보하지 못했다.

수도원에서도 무능하고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과연 무엇으로 신께 영광을 돌려야 할까?

크리스마스를 맞아 수도원의 모든 형제들은 각자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성모 마리아께 바칠 선물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누구는 책을 쓰고 누구는 조각을 하고 누구는 요리를 하고 누구는 시를 짓고
누구는 작곡을 하고 누구는 그림을 그렸지만 캉탈베르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본문)

기도문도 외우지 못하고 찬양도 못하고 주방 보조 일도 제대로 수행 못하자
함께 생활하는 수도사들이 투덜대기 시작하는데.......

<성모의 수도사>는 중세 유럽에 전해지던 민간전설로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으로 유명하다.
1952년 책이 출간되었을 때,  <깊은 밤 부엌에서>의 작가 모리스 센닥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8번가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난 날의 기쁨(그의 해설이 뒤에 실려 있다)이나, 
역자 박중서 씨가 용산역 근처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만화의 원서를 발견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R. O. 블레크먼 특유의 꾸불텅한 선의 코믹한 그림과 군더더기 없는 짧은 글.
'일종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적절한 부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이 생이라는 무대,
변변한 대본도 없이 팔과 다리가 여전히 따로 노는 나의 막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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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7-01-09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지금 다진 마늘을 품은 제게 꼭 필요한 구절이네요 ㅎㅎ
춤은 잘 못추지만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숨은 끼가 나올지도 모르겠지요 ^^
리틀 미스 선샤인, 아우, 그거 꼭 보고 싶어요. 보고싶은데... 이놈의 게으름! ㅠㅠ

로드무비 2007-01-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 님, 카메라 혹은 무대 체질이라면서요.ㅎㅎ
바쁜 일 마무리 잘하고 보러 가시기 바랍니다.
전 숨은 끼도 없어요. 흑=3

waits 2007-01-1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느끼는 신산함은, 항상 아련하고 그리운 느낌이예요.
쓸쓸하고 무력한 당사자가 되는 일에도 좀 용감해져야 하는데...
마음놀이는 열심히 하면서도, 현실이 될까 싶으면 무서워지더라고요. ^^

로드무비 2007-01-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 님, 저란 인간이 워낙 신산스럽습니다.ㅎㅎ
저도 마음놀이로만 끝내고 싶어요.
이 이상 쓸쓸하고 무능해지면 곤란할 듯.^^
 




1. 걱정인형

걱정이 있는 날, 베개 속에 넣고 자면 그 걱정이 해결된다는
손가락만한 과테말라의 걱정인형.
앤터니 브라운의 그림동화 <겁쟁이 빌리>에도 나오더니
이은의 만화 <분녀네 선물가게>를 읽는데 나온다.
걱정인형만 있으면 걱정 끝이라니,  자투리 천 가지고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이 슬며시.
예쁘고 반듯한 인형이 아니니 얼렁뚱땅 어떻게 가능할 것도 같은데.......


 

2. 위시 윙 베어

어제 오후 야단 칠 일이 있어 딸아이를 혼내키는데
야단 맞을 짓을 한 주제에 서럽다는 듯이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최근 선물 받아 애지중지하는 대형 곰인형을 가리키며,

"나는 울고 있는데 쟤는 웃고 있어!"

그 말과 표정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꼬옥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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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1-0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울고 있는데 쟤는 웃고있다니.... 정말 귀여워 죽겠어요. 이러면 나무라지도 못하 것 같은데요. ^^

물만두 2007-01-0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인형이라는 인형도 있군요. 흠...

mong 2007-01-0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인형에 부쩍 관심이 가요 ^^

hnine 2007-01-0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렇게 두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쓰시니 좋습니다~ 저 인형이 '대형'인형이군요. 보기에는 한 손에 쏙 들어올것 같이 생겼는데 말이지요.

이매지 2007-01-0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인형 저번에 이우일씨의 책에서 본 듯한 기억도. 그 때 갖고 싶다는 생각 했었거든요^^ (붕어 기억력이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요^^;;)

Mephistopheles 2007-01-0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 Win...!!

2007-01-08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7-01-0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걱정인형 갖고 싶어요..^^

마냐 2007-01-0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동구매 들어가시는 검까? ^^

로드무비 2007-01-0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 님, 제가 직접 제작하겠다니까요.=3=3=3

날개 님, 걱정인형 한 개당 한 개의 걱정이라니,
전 열댓 개가 필요합니다요.^^

'가만 있어도 웃고 있는 것 같은 낙타' 님, 말만 들어도 웃음이 나오네요.
제 목각 낙타 언젠가 페이퍼로 올렸는데 보셨어요?
빨간색 보따리를 등에 진.
저 말을 하는 순간 딸아이의 모습에 자지러졌답니다.
아시죠? 그런 순간?^^

메피스토 님, 글고보니 그때 조금 간교한 표정이
딸아이의 얼굴에 떠올랐던 것도 같고요.ㅎㅎ

새벽별 님,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히히~

이매지 님, 이우일 씨 책을 뒤벼봐야겠군요.
(저도 그런 기억이 희미하게.....)

hnine 님, 세로 60센티 정도인데
안으면 제법 푸근합니다.
인형 이야기로 페이퍼를 하나 써봤어요. 헤헤~

mong님, 저도요.^^

물만두 님, 신기하죠?^^

FTA반대바람돌이 님, 해아 자매가 저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서럽게 울면서.^^









2007-01-09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우와 연우 2007-01-09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우는데 쟤가 웃으면 안된다구요.^^
주하는 여전히 깜찍하고 기발하네요.^^

sandcat 2007-01-09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형 별로 이름만 정해주면 끝인가요? 걱정인형이 갖줘야 할 요건이 있나요?
머릿속을 들키지 않게 두건을 감싸야 한다든가..베개 속에 넣고 지내기엔 너무 아깝네요. 주하도 깜찍하지만 나뭇잎 날개를 단 곰도 이뻐요.

2007-01-09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1-0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낙타 좋아해요.
그 등의 혹과 짐, 사막......
아이맥스 영화를 한 편도 못 봤어요.
63빌딩 하루 날 잡아 놀러가고 싶은디.
식당도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샌드캣 님, 걱정인형이 밤새 활약, 걱정거리를 멀리 내다버리고 온다네요.
님이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금방 만드시겠어요.
전 바늘을 손에 드는 데 1년 6개월은 걸릴 것 같아요.
언제 만드시면 제게도 한 개쯤. 헤헤.^^
(나뭇잎 날개의 곰은 님도 알고 있는 제 친구의 선물이랍니다. 찡긋.)

건우와 연우 님, 내 아이가 너무 순진한 것 같다는 생각은
모든 엄마들의 착각일까요?^^*




낯선바람 2007-01-0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오랫만에 서재 들렸는데 여전히 유쾌한 서재네요^^ 북적북적대는 것도 좋구요. 나는 울고 있는데 쟤는 웃고 있어! 나도 그렇게 단순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로드무비 2007-01-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수자리님, 반갑습니다.
저도 그렇게 순진하고 단순했으면 좋겠어요.^^

하루(春) 2007-01-10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인형 전부터 되게 갖고 싶었는데 어디서 파는지 아세요?

로드무비 2007-01-1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님, 샅샅이 뒤벼봤는데 없더군요.
과테말라에 갈 계획은 없으신가요?ㅎㅎ
 

좀전 어느 분과 댓글로 이야길 나누다가 '봉지쌀과 자존심'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간에 대필이든 윤문이든 그날그날의 봉지쌀에 목을 매다보면
아무런 감각이 없어지는 때가 있다고 썼다.
살다보니 어이하여 일생을 두고 이루어야 할 큰 꿈도 희미해지고(아예 없는 이도 있고!)
봉지쌀을 팔아 그날그날 연명하는 사람이  한둘일까?
봉지쌀 하니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다.

몇 년 전 다섯 권짜리 xxx영웅전 전집(역서)의 윤문을 맡은 적이 있다.
역자는 베테랑이라고 알려진 중년의 여성.
내는 책마다 공전의 히트를 치는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는 내일모레 결혼을 앞둔 총각이었다.
꽤 큰 프로젝트의 일이라 담당 편집자가 집으로 와 정식으로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서너 달 걸려 세 권을 마치고 제4권의 작업을 시작했는데,
뒤늦게 참고로 하라며 담당자가 오래 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동명의 전집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며칠 뒤 참고할 것이 있어 그 전집을 펼쳤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문장의 순서가 교묘하게 바뀌고 조사만 좀 달라졌을 뿐, 그 전집과 현재의 번역이 똑같은 게 아닌가!
아무리 내가 윤문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분 뜯어고치고 손을 대긴 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놀라서 확인해 봤더니 나머지 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번역자는 끝까지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내가 일일이 대조한 원문과 그녀의 번역문을 정리하여  넘겨주니 그제서야 입을 다물더라고 했다.
옛날 옛날에 나온 책이고 번역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감쪽같이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때까지 내가 작업한 분량만큼의 수고비를 받고, 그 작업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아마 그 번역자는 소문이 나서 다시는 일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일감도 끊겼다.
담당편집자는 사전관리를 철저히 하지 못한 책임을 진 것인지 몰라도
한 달 뒤 직장을 그만두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가슴 뜨끔했다.
내가 만약 모른척 그냥 지나갔더라면......
(그때 나는 한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물론 명백한 잘못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다른 이의 작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한마디 하는 건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의 봉지쌀을 빼앗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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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01-0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식의 탄로를 무릅쓰고 궁금해서 결국 여쭈옵니다.
윤문 작업이라는게 어떤 것인지요?

로드무비 2007-01-0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제가 아는 윤문은 문장을 고치고 때로는 부족한 원고를 보강하는 일입니다.
무식의 탄로라니요, 별 말씀을.^^

sudan 2007-01-03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치니님. 저도 사실 그걸 확실히 알고 싶었어요.) 로드무비님. 제게도 같이 알려주셔요.

sudan 2007-01-03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아깐 답변이 없었는데.

로드무비 2007-01-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 님, 윤문을 뭐라고 설명할까 끙끙대는 사이에 오셨나 봐요. 히히~

2007-01-03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7-01-0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직', '양심' 같은 말이 흔하지만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요. 다른 것보다 자신을 지키고 높이는 일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로드무비 2007-01-0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 님, 가끔 남의 봉지쌀을 업수이 여기는 인간들이 있지요.
자존심을 팔고 강탈하다시피 남의 것을 빼앗은 주제에.
정직이나 양심이 그들 때문에 고루한 것이 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하면 눈을 찡끗찡끗하며
넘어가는 분위기.
왜 아니겠습니까.
저도 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물만두 2007-01-03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Mephistopheles 2007-01-0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끝까지 우기는 상황은 또 뭘까요..쩝..
(H씨 말하는 겁니다..^^)

클리오 2007-01-0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번역자야 자신이 잘못한 댓가니까 할말없겠지만 , 그 편집자나 로드무비님은 뭔 잘못이랍니까... 휴..

2007-01-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7-01-03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그걸 일일이 대조해서 진실을 밝히시는 로드무비님... 만셉니다...^^

조선인 2007-01-03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봉지쌀을 뺏지 않았죠. 오히려 스스로 봉지쌀을 포기하신 거잖아요.

밥헬퍼 2007-01-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봉지쌀'하여, 곽재구의 시를 찾게 되었습니다. "길고 끈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그대와 겨울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봉지쌀', 절박한 하루한끼, 일용할 양식의 대명사이겠죠. 그래서 저 자신도 그 자존심때문에 '봉지쌀' 을 너무 세게 움켜쥘 때가 있더군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진정한 자존심은 가끔 봉지쌀 마저도 과감히 놔버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중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도... 헌데, 역설적이게도 시대는 그 놈의 자존심마서 봉지쌀로 꺽어버리려는 일들이 많군요. 조심해야겠습니다.

나비80 2007-01-0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깊게 읽고 갑니다.

2007-01-04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우와 연우 2007-01-0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이라는게 종종 사람을 난처하게도 하더군요...
사는게 참 조심스러워요. 별일 없으시지요?
올 한해 건강하시길...

릴케 현상 2007-01-05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니 인사를 드려야겠지요^^

2007-01-08 0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1-08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팡씨의 이모 님,
'흐린 가로등 달린 골목길의 작은 슈퍼 옆을 수채냄새를 맡으면서
지나가는 제가 불현듯 보이는 듯 했어요.'라는 님의 말이
멋진 시구를 방불케 합니다.
가끔 알은체 좀 해주시고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자명한산책님, 반갑습니다.^^

건우와 연우 님, 사는 게 조심스러워요.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님도, 올 한 해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소이부답 님, 반갑습니다.^^






로드무비 2007-01-0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헬퍼 님, 사평역에서의 곽재구.
봉지쌀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시인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가난은 옛날보다 더 참혹한 것 같아요.
모두가 고만고만하게 살던 시대의 가난엔 서정이라도 있었는데.
봉지쌀 움켜쥐려니 거시기하고 놓으려고 해도 거시기합니다.
적정선이란 걸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FTA반대 조선인 님, 그 정도의 봉지쌀을 포기하는 일도
쉽진 않더군요.^^;

날개 님, 그렇게 교묘하게 문장을 바꿀 시간에 직접 번역이나 하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중견보다 초보 님, 그런 면이 좀 있지요?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영화에서처럼 가려진 커튼이 벗져지는 순간이
인생에 있을까요?^^

클리오 님, 그 담당자나 저도 실수한 부분이 있지요.
작업에 임하는 자세가 좀더 철저했더라면 빨리 발견했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지 뭡니까.^^

메피스토 님, 그 정도의 자기확신은 어디서 오는 건지
좀 배우고 싶당게요.

물만두 님, 언제 옥상에 올라갈까요?=3=3=3











인터라겐 2007-01-09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드무비님.. 맨날 와야지 하면서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 제목만 보고 자랑하려 페이퍼를 열었다가 역시 로드무비님 하면서 느낌표를 마구 마구 찍어 내고 있답니다.


로드무비 2007-01-1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 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혼이 꿈이었던 호주의 노처녀 뮤리엘(토니 콜레트)이 올리브의 엄마로 돌아왔다.
<뮤리엘의 웨딩>은 정작 내게 주인공 뮤리엘보다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아바의 음악과
그녀의 친구 론다(레이첼 그리피스)가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배가 많이 나오고 동글납작한 얼굴의 소녀 올리브(애비게일 브레슬린)는
가당찮게도 미인대회 출전의 꿈을 품고 있다.
만류는커녕 그 꿈에 불을 지피는 사람은 마약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인생 좌우명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많이 하라!", 무엇을?

'입술에 붉은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사랑하고,
시들기 전에 한 송이의 장미를 더 따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와 일맥상통한다.

열다섯 살 난 올리브의 오빠 드웨인은 니체 신봉자로 비행기 조종사가 꿈인데
9개월째 묵언 수행 중이다.
니체의 초대형 얼굴이 벽면 한쪽에 붙어 펄럭이는 방에 어느 날 불청객이 찾아든다.
혼자 놔두면 또 자살을 시도할지 모르니 잘 감시하라는 병원의 당부에
할수없이 자신의 오빠를 집으로 데리고 온 쉐릴(옛 뮤리엘).
그녀는 아들의 침대 옆에 오빠의 침대를 들여놓는다.






니체에 열광하는 소년 드웨인은 필담으로 자칭 "프로스트 연구의 1인자"라는 외삼촌과
이 우라질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뮤리엘의 남편 리차드는 인생을 '성공'과 '실패'의 두 부류로 파악하고
"절대무패 9단계 이론"을 연구하여 책으로 묶어내려는 야심가.
프랭크의 퇴원으로 더더욱이나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이 가족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저녁식탁 자리에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이틀 후 멀고 먼 캘리포니아에서 꽤나 유명한 어린이 미인 선발대회가 열린다는......
기쁜 소식에 입에 물고 있던 닭다리를 내팽개치고 당장 짐을 싸러 들어가는 올리브.



















문짝이 떨어져 나가질 않나, 고물 봉고와 함께 한 이 괴상한 가족 구성의 1박 2일 여정.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에 참석하는데,
어른을 그대로 축소한 화장과 의상과 미소와 장기를 보여주는 열한 명의 꼬마 참가자들.

다른 아이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장기를 보이려고 무대에 오르는
배불뚝이 소녀 올리브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속에서 둥둥 큰북이 울렸다.

눈물을 흘리며 동시에 낄낄 웃으며 본 올리브의 공연 장면이
이 영화의 라스트씬.
그 장면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인생이라는 이 초라한 무대의 초라한 꽃다발이 그렇게 아름답고 정겨울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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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6-12-30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저 노란 수첩의 정체가...

가족의 탄생, 재구성에 대한 영화는 언제나 매력 있어요. 그만큼 우리가 가진 가족 제도가 허술해서 그런 거겠죠... 가슴 속의 큰북 소리.. 왜 공감이 가죠. ㅋ

2006-12-30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짱꿀라 2006-12-3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2006-12-31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01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1-0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모닝 나잇 님, 오늘 영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살짝 한맺힌, 이라는 표현에 깔깔거렸고요.
저도 뭐 별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 아니어서,.
(오늘, 컴이 자꾸 꺼져서 댓글 쓰기도 힘들어요.)
그 대사는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건데
멋을 부리지 않은 말이 더 어필되는 케이스일까요?^^

못된 마녀처럼 님, 네, 제 생각에도 사진이 좀 마음에 안 들어
아까 페이퍼로 함께 옮겨오지 않았던 거예요.
그나마도 다행이다 싶군요.
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2007-01-02 0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