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반과 김치를 사온 남자는 1미터 남짓밖에 안 되는 그녀의 짧은 씽크대 앞에 서서
붙박이 찬장의 위아래 문을 모두 열어보더니,
거의 아무것도 해먹지를 않는 부엌이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 아니 무슨 사람 사는 집에 프라이팬 하나가 없어? 진짜 없어?
(...) 남자는 프라이팬 대신 하나밖에 없는 라면용 편수냄비를 찾아내 가스버너 위에 올렸다.
기름 없어? 기름?
(...)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달군 냄비에 그대로 김치를 쏟아붓다가
손목에 살짝 스냅을 주어 김치봉지를 꺾었다.
내가 왜 김치를 다 안 넣는지 알아?
아뇨.
남자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 냄비에 햇반 두 그릇을 넣고 일회용 숟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이건 뭐 김치볶음밥이 아니라 김치찜밥이 되겠네, 라고 투덜거렸다.
떡처럼 켜를 이룬 밥 밑에서 김치가 지글거리며 타는 냄새를 풍겼다. 경이로운 냄새였다.

                                                               --  권여선 '가을이 오면' 22~ 25쪽에서 발췌.


어느 날인가 같은 과 남학생에게서 담배를 한 대 얻어 맛있게 피우는 모습이
어찌나 깊은 인상을 줬는지 글을 좀 쓸지도 모르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지도교수의 소개로  한달 반 동안 모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로라.
"주제 파악을 못한다"(어떤 글의 주제를 파악 못한다는 말인지,
인간이 변변찮다는 뜻인지 모르겠지만.....)는 이유로 그나마 짤리고
몇 푼 안되는 수고비를 확인하다가 충격으로 길거리에서 넘어지는데.

그녀는 외모든 성격이든 우아함이나 화사함이나 상냥함이라는 여성의 덕목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자신의 너무 예쁘고 튀는 이름이 항상 부끄러운,
늙다리 전문대 학생이다.

--그녀는 장 속에 박힌 장아찌처럼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죽은 듯 살아가기를,
아니 차라리 삭아가기를  원했다.(16쪽)

넘어져 크게 다친 자신을 부축하여 근처의 정형외과로 데려다준 모르는 남자가
말없이 사라지더니, 어느 여름날 혼자 사는 그녀의 옥탑방을 찾아온다.
그 날 길에서 주웠다면서 빈 지갑을 손에 들고.

밥을 한끼라도 사는 게 도리가 아니냐며.

근래에 읽은 그 어느 소설의 그 어느 장면보다 가슴 설레는 장면이었다.
로라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하고 못생기고 외로운 처녀다.
길에서 그렇게 우연히 만난 남자는 허우대는 멀쩡하고 얼굴은 멀끔하지만
그동안 세상에서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짐작이 될 정도로 얼굴이  두껍다.
그는 그 반반한 낯짝을 무기로 여자들을 등치며 간신히 살아가는 듯.
"장 속에 박힌 장아찌처럼 박혀 죽은 듯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원밖에 없는 로라는
그런 남자와 함께 일회용 숟가락으로 퍼먹는 햇반김치볶음밥도 황홀하다.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스물일곱 해 인생에 남자와 이토록 정답게
같이 앉아 있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한 대 피웁시다라든가,
통째로 놓고 다같이 먹는 거야라든가, 매우면 물 떠먹고 같은 경이로운 말들을 할까.
남자는 담배꽁초를 햇반 그릇에 눌러 끄며  지갑을 내밀 때처럼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쪽은 뭐 좋아해? 이름은 어떻게 되고?(26쪽)



-----------------------------
'가을이 오면'의 로라 비슷한 심정(?)으로 세상을 오래 떠돌았던 것 같은 나는
위와 같은 장면이 나오면 바로 내가 여주인공인 듯 빠져들어 읽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에서의 여관 풍경.
홍상수의 영화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술집이나 밥집 등에서의 뭐 그런
시금털털한 장면들과 속이 빤히 보이는 남녀의 수작들.

로라의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반건달 애인이 생긴 게 얼마나 좋은지,
겨드랑이에서 시큼한 땀냄새를 풍기며 모르는 여자의 부엌에서 프라이팬도 식용유도 없어
냄비에 김치를 붓고 밥과 함께 들들 덖는 그 유능한 사내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위의 장면에서 그 엉터리김치볶음밥 냄새는 또 얼마나 내 콧구멍을 간질였는지.

"나이 드니까 맛없는 걸 먹고 나면 화가 나!"('분홍리본의 시절' ) 같은
하나도 안 웃기는 대사에  낄낄거리며 일곱 편의 단편을 게걸스럽게 단숨에 읽어치웠다.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또 온갖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까봐
제일 인상 깊었던 소설의 장면을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소설가 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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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14: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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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03-1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데, 느낌이 괜찮네요. 이 작가, 이 작품... ^^
엉터리 김치볶음밥...

로드무비 2007-03-1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 님,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첫 장편 <푸르른 틈새>를 재밌게 읽었거든요.
반지하나 옥탑방, 술자리, 그리고 진절머리나는 인간의
어떤 면모 등에 대한 묘사가 탁월해요.
윤대녕 소설과는 또 다르지요?^^
(님의 리뷰 기대해도 되죠?)

이렇게 은근히 님, 일부러(!) 야박하게 넣었습니다.
혹여라도 부담 느끼실까봐.
소설가 김지원에 대한 그의 글이 참 좋았어요.^^

2007-03-14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7-03-14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녀치마의 작가죠? 그때 차력당 선정도서로 읽고 나서 강하게 각인이 되어 있는데....신간이 나왔나? 얼른 담아야겠어요.^^

2007-03-1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분홍달 2007-03-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궁금하게 만드는 리뷰네요 함 읽어 봐야겠어요^^

얼음장수 2007-03-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콩이 끓는 동안을 쓴 그 권여선인가요? 읽으면서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로드무비님의 추천도 있고 하니 관심을 더 관심을 가져봐야겠어요~

2007-03-1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14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치를 왜 다 안 넣은 건지 님, 심오한 뜻이 있답니다.
밥과 김치가 익고 나서 나중에 남은 김치를 넣어주면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은 김치와 부드러운 김치가 섞여
볶음밥이 더 맛나다는 거죠.
저도 제 이름 끝글자의 모음 'ㅗ'가 'ㅜ'가 아닌 게
무지 아쉬웠습니다.^^
(이름을 제게 끝까지 안 가르쳐주셨던 것 같은데요. ㅎㅎ 그런 사연이...)

얼음장수 님, 네, 맞습니다.
'약콩이 끓는 동안'도 재밌게 읽었어요.
전 그의 모든 단편이 다 재밌었는데 그게 또
취향 혹은 연령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긴 해요.^^

부용 님, 제가 옮겨 적은 저 부분을 읽고 땡기신다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님, 잘 알겠습니다.
아픈 데는 ..가 최고, 간사한 인간의 마음을 그리도 잘 헤아리시니!
그런데 어제부로 깨깟이 다 나아서 양심상 그럴 수가 없네요.ㅋㅋ

진/우맘 님, 그때 님도 리뷰 쓰셨죠?
비발 님께 처녀치마를 선정도서로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그 책이 좋으셨다면 이 소설집도 확실합니다.^^


비로그인 2007-03-1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읽어보려고요. 기대가 큽니다^^

에로이카 2007-03-1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화가 나는 이유가 제가 이제 나이가 먹었기 때문이군요... 엉엉...

로드무비 2007-03-1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전 옛날부터 그랬는데.ㅋㅋ
나이 드니 더 심해지긴 했어요.
거의 울분을 느낄 정도.^^
(울지 마시라요.)

바람난책 님, 안녕하세요?
기대 너무 많이 하고 읽으면 실망하실까봐 약간 걱정.
아무튼 좋은 시간 되시길요.^^

2007-03-16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16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3-1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해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네요.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오던 작품이어서 작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새로 단편집이 나왔나 보네요. 저도 보관함에 담아 넣으렵니다.^^

로드무비 2007-03-1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토코이 님, '가을이 오면'이 황순원 문학상 후보작에 올랐군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수상은 못했나 봅니다?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왔다니 흥미롭습니다.^^

2007-03-16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16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1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고 남은 말들 님, 좋았어요. 고마웠고요.
한 번 독자는 영원한 독자, 아시죠?
그 역할을 계속 하게 해주세요.
아마도 '사리' 같은 무엇을 원하시는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담아요, 님, 가끔 독수리타법으로나마 한 자 한 자
옮겨 적어보고 싶은 글이 있어요.
26쪽의 장면이 바로 그랬답니다.^^

2007-03-22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3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쓸만한 한 줄이 나오지 않는 장사를 그만둘
힘조차 없어 본전을 헐어 밥을 사먹는
하루가 어떻게나 긴지 앞날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도 너만은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이쯤에서 숟가락을 놓으면
입 벌린 생선은 식어 비린내가 자자하리라

                        
--조정 詩 '불경기' 중에서



좀 이른 나이에 풍을 맞았는지 발 한 걸음 떼는 데 몇십 초가 걸리는 여인을 앞질러
조카가 내리기로 한 유치원 버스 약속장소에 서서 시집을 펼친다.
시 두 편을 읽고 고개를 들었더니 그 여인이 이제사 아파트 모퉁이를 돌고 있다.

유치원 버스는 요즘 10분 늦기가 예사다.
동주는 유치원버스에서 내려 나와 함께 5분을 기다려 피아노학원 차를 탄다.
5분 일찍 나와 기다렸으니 시를 다섯 편쯤 읽었다.

바람이 차서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찬바람 부는 길에서 읽는 시.
집에서 음악 들으며 차 마시며 읽을 때보다
한결 맛나고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본전을 헐어 밥을 사먹는
(......)
이쯤에서 숟가락을 놓으면
입 벌린 생선은 식어 비린내가 자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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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8 14: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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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7-03-0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반갑습니다.
저도 어제오늘 바쁜 일로 제정신이 아닌데, 좀전 길에서 읽은
시가 주는 감흥이 워낙 낭창해서요.
언제나 딴전을 부리는 듯한 장난꾸러기 님에게서
"파종해야 할 씨앗을 씹어~'라는 절창을 듣게 되니
흐뭇하고 기쁘옵니다.^^

에로이카 2007-03-08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풍경이 그려집니다.. 멋지십니다.. ^^

비로그인 2007-03-0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앉던 책상이나 침대나 소파가 아닌, 눈부시지 않은 햇볕과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적당히 나는 적당한 바람이 있는 나무 밑에서 책을 읽는 것도 기분이 좋습니다.
언젠가, 어둡고 차분한 자리에 있고 싶어서 현관문과 거실문 사이의 좁은 곳에서
한참이나 쭈구리고 앉아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건우와 연우 2007-03-08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너만은 내편이 되어 주어야 하는것 아니냐/그 말을 하지 못한다.
상투적인듯, 숱하게 가슴속에 상처로 남아 있는 그 구절앞에서 한동안 눈을 뗄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참으로 추웠겠구나, 사는게 무서웠겠구나, 하면서요..

로드무비 2007-03-0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 님, 그러고보니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기만 했지
끝까지 믿고 지켜준 사람이 없네요.
서글픕니다.
나의 고독은 자업자득, 저의 18번이랍니다.

L-SHIN 님, 약간 어둑시구리한 구석자리가 좋아요.
책을 읽는 것도 잠시 조는 것도.
요즘은 햇볕 아래 대로에서 차 기다리면서도 책 읽어요.
독서가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그거라도 하고 있어야
마음의 안정이......
어린이용 텐트 같은 걸 하나 사서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책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는데.
L-SHIN 님의 그 자리도 괜찮네요.^^

에로이카 님, 멋지긴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비로그인 2007-03-09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둑시구리한".....가끔가다 '로드'님의 글속에서는...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당황스럽습니다. (웃음)
큰 박스 안에 들어가 있거나, 침대 밑에 들어가 있거나, 옷장 안에 들어가 있으면
상당히 마음이 안정되고... 포근합니다.
뭐랄까.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와 같은 편안함 이랄까.

로드무비 2007-03-0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그래서 빈 박스 큰 걸 보면 자기 집 한다고
그리도 탐을 내나봅니다.
하하, 그래도 옷장 안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요?
부서질까봐.^^


비로그인 2007-03-0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핫....;;; 저는 아직도 아이인가 봅니다.
아기 때부터 철이 들 때까지 저는...옷장 위에서 놀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내일 박스집을 만들어야지 하고..계획하고 있다는...(웃음)

로드무비 2007-03-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아기 때부터 철이 들 때까지 저는...옷장 위에서 놀았다고 합니다...
L-SHIN 님, 철이 들긴 들었어요?=3=3=3=3
전 아직 안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가끔 쓰는 이상한 단어는 그때그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건데, 사투리일 때가 많습니다.

비로그인 2007-03-09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아직 철 안들었습니다. (웃음)
'철이 들다' 라는 보편적인 단어를 빌려 7세까지의 연령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
새로운 단어를 어디서 배우고 와서 내 글에 쓸 때는 으쓱해진 기분을 느낍니다. (웃음)

2007-03-11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6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솔기를 털고 주름을 편
옷들이 씨앗봉지처럼 가지런하게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묵은 먼지가 빛을 피해 앉는다.
나도 겨우내 샛길을 따라왔다
되도록 따뜻하게 웃었지만
되도록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낮은 지붕들 사이에서 하늘이 내려다보았다
많은 옷이 나를 가리지 못했다
수의보다 따뜻한 옷을 찾아
헝클어진 서랍을 더 방바닥에 쏟는다
얘야, 너는 숨을 자리도 없이 사람을 몰아치는구나
아버지, 이제는 제가 저를 몰아요
생은 기름져서 심어도 싹트지 않는 죄는 없었다
다행히 흉터가 환하게 남아서 낡은 몸뚱이가 조금씩 겸손해진다
내 보풀들
내 늘어진 팔꿈치들
옷도 어둠 속에서 내가 그리울지 몰라
손을 한 번 쥐여준다
헐거운 나

                                         
 -- 조정, <이발소 그림처럼>, 2007년, 실천문학 刊



기다리던 시집을 전해 받자마자 평소의 버릇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시를 한 편 읽는다.

낯선 우리가 만났는데 그는 인사도 안한다
나는 만곡이 심한 강을 내려와
하류에 이르기 전 모서리를 잃었고
두루 닳았고
커피 두 잔을
좌우로 기립하여 흐르는 산더미처럼 손에 들었다
                                      (시 '비로자나와 티타임을' 중에서)

시를 한 편 읽고 나도 모르게 시집 앞표지를 뒤져 시인의 얼굴과 약력을 본다.
1956년생, 단발의 안존한 얼굴이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시 '이발소 그림처럼'  중에서)

저 멋진 시구처럼 낡은 몸뚱이가 조금씩 겸손해져야 하는데 
요즘은 숫제 땡깡이다.
그러니 내 스스로도 지겨워 미칠 지경인데......

베스트 음반 같은 시집을 만났다.
약력에 의하면 시인의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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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3-0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 음반 같은 시집... 보관함에 담습니다.^^

로드무비 2007-03-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 님, 장바구니엔 언제 옮기실 거예요? 히히~

2007-03-07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07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3-0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옷이 나를 가리지 못했다."

히피드림~ 2007-03-0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문학사에서 나왔군요.
시가 멋져요. 소개자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

에로이카 2007-03-08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헐거운 나"를 "날씬한 나"로 읽으면서, 부러워하는 저는 저질독자겠지요? ㅎㅎㅎ

로드무비 2007-03-0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마음은 헐겁고 몸은 뚱뚱하면요?( '')
님의 말씀에서 젊음의 여유가 느껴지는군요.^^

punk 님, 리뷰 쓰고 싶은 시집이었어요.
어제는 급한 일이 있어 가볍게 소개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답니다.
제겐 정말 '베스트 음반 같은 시집'입니다.^^

L-SHIN 님, 전 또 다른 이유로다가 옷이 저를 가리지 못하는데.
시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거두절미하고, 10만 원 때문에 친한 친구와 틀어진 적이 있다.

가설라무네, 그때 우리집 안방은 온 사방 벽이 검푸른 곰팡이 투성이였고
천장 벽지는 스카이라이프 접시처럼 오목하게 늘어져 빗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이도 어린데 이러다 날 추울 때 거리에 나앉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수소문,  제법 큰 일감을 하나 물어왔는데
마음이 복잡하고 정신이 산란하여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어느 날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일감을 붙잡고 씨름하던 중,
늘어진 벽지가 찢어지면서 천장 위에 고여 있던 물이 정통으로 쏟아져
책상 대용으로 쓰고 있던 밥상과 침대 위를 덮쳤다.
쓰나미처럼.
내가 메모한 빨간색 플러스펜 교정지 뭉치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고,
그것은 겨우 한 권 분량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 작업 전체를 깨끗이 포기했다.
붙들고 씨름을 하곤 있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네다섯 살 무렵이다.
살고 있던 연립의 주인이 도망 가고, 온 집안에 핀  곰팡이 때문인지
주하는  코감기와 기침을 달고 살았고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비염 증상도 그때가 원인이지 싶다.)

그런 집구석으로 직접 찾아와 한숨을 내쉬며 작은 일감을 던져준 친구가 고마웠으나 
속으로는 어떠했을망정  겉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거나 쩔쩔맬 내가  아니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통장에 들어온 교정료를 확인하던 날,
약속된 금액에서 10만 원이 모자라길래 어찌된 일이냐고 전화를 걸었다.
돈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보니 좀 머쓱해서 도리어 당당하고 큰 목소리가 나왔다.

친구는 깜짝 놀라며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긴가민가 하고 물러섰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몇월 며칠 그가 일을 맡긴 날 수첩의 메모를 전화로 확인시켜 줬더니
그런가? 마지못해 중얼거리며 차액을 당장 송금하겠다고 했다.

그날 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며,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며 전화가 왔다.
단돈 10만 원에 내가 자신을 심하게 다그쳤다고.
단돈 1만 원이 아쉬운 상황이다 보니 놀라서 바로 전화를 걸었던 건데
난 내심 그가 서운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명백한 자신의 착오에 의해 비롯된 일을 섭섭하다고......

겉으로는 웃으며 잘 정리가 되는 듯했지만
아무래도 그 일이 부담스러웠나 보다.
그가 내게 연락을 취해 가까스로 유지되던 관계인데 그 뒤 우리는 다시 서로를 찾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친하게 지냈던 소설가 선생님이 
2년 전인가 3년 전, 신년 정초에 전화를 걸어와
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을 건넨 후 내게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그 무렵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으며 생리가 몇 달째 딱 끊어져 걱정이 많았다고.
너무 이른 폐경.
그 말을 듣자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또 내가 모르는 무슨 마음의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때로 우리는 각자의 사정과 근심  속에서 친구를 오해하고 속단한다.
"상대의 입장과 바꿔 생각해 보라"라는 근사한 경구도 아무 소용 없을 때가 있다.
어긋나 버린 인연에 대해 다시 돌아보지 않는 걸 스스로 쿨하다고 위무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매정한 것을 성숙한 것이라고 자신을 속인다.

오늘 낮 모처럼 긴 편지를 한 장 쓰고 났더니 필을 받은 것일까,
극단적으로 구질한 글이 하나 쓰고 싶었다.
10만 원 때문에 친구와 멀어진 일보다 세상에 구질한 일이 또 있을까.
모처럼 단숨에 써내려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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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7-03-0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 뒤통수를 쎄게 한 대 때리는 글이었습니다...

2007-03-06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0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한 손가락과 입술 님, 저 혼자서 증식하는 근심과 오해라니,
맞아요. 괴물 같은 그것.
그 책을 읽으며 저를 떠올렸다니 그 오해가 기분 좋습니다.^^

에로이카 님, 뒤통수를 쎄게 한 대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라.
제가 친 건 제 뺨인데......

얼음장수 2007-03-06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한 달 월급인데요. ㅋㅋ. 저도 단숨에 느낌 팍팍 오늘 글 한 번 써보고 싶네요.
감기조심하세요^^

2007-03-06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피드림~ 2007-03-0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그중엔 다시 연락하고 싶은 친구들도 있고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진게 다행이다 싶은 친구도 있어요(-_-)
필 받아서 단숨에 쓰신 글은 읽기에도 편한데가 있는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7-03-06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살 때, 20만원으로 좋은 친구와 우정을 하나 보내고...
친한 사람한테는 '빌려주고, 못 받아서 우정이 깨지는 것'보다는 '그냥 주고 잊자' 하고
살게 되었습니다만, 고작 20만원때문에 친구의 자존심과 우정에 상처를 줬을 그 일이
기억나니 '로드무비'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너무나 와닿습니다.

국경을넘어 2007-03-0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유소 미터기의 숫자처럼 사람들의 얼굴이 드르륵 돌아가네요.

10만원...
대학 시절 군대가기 전 받는 신검을 받는데, 몸에 이상이 있는것 같다며 재검이 나왔습니다. 디스크일 것 같다고. 신검장에서는 씨티촬영해서 필름을 가져오라 하데요. 그때 15만원이었던 것 같은데 도저히 돈을 만들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한 교수로부터 10만원 별로 친하지 않은 교수(?)로부터 5만원 꿔서 씨티 촬영했죠. 그리고 면제 받았습니다. 바로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했는데 이제 시간이 너무 지나서 어찌해야 할지. 안 친한 교수는 서울의 유명하다는 K대학으로 전근을 가서 그럴려니 하는데 친한 교수는 제 석사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는데...

Mephistopheles 2007-03-0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그럴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10만원 적은 돈 아니잖아요..^^

로드무비 2007-03-0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그러문요, 어떤 날은 1000원도 아쉬운데......^^
(상황이였다고 --상황이었다고)=3=3=3

폐인촌 님, 그러고 보니 그때 받은 교정료 중 50만 원을
친한 언니에게 빌려주었다가 못 받았네요.
다 이해한다고 음성을 남겼건만 여태까지 연락이 없고요.
본의 아니게 떼어먹기도 하고 떼이기도 하고 그런 게 인생인가 봅니다.
신검 받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든다는 게 부당하게 느껴지지만 우짜겠습니까.
받을 돈은 잊지 마시고, 못 갚은 돈은 깨끗이 잊으세요.^^
(지금은 건강하시죠?)

L-SHIN 님, 19세 때 친구 빌려줄 20만 원이 있었다니......ㅎㅎ
마음으로 다짐하는 거랑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건 다른 것 같아요.
저도 그때 잘한 것 없어요.
무지 잘난 척했거든요.
이 정도 어려움이야, 하면서. 오기로......

punk 님, 강금실 씨가 그렇게 저렇게 멀어진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쓴 글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럴 수도 있지 뭐, 깨끗이 잊어!"였거든요.^^

코드가 맞는 친구였다면 님, '코드'라는 게 또 모래성 같아요.
코드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감성의 코드라는 건
생각보다 별게 아닐 수도 있더라고요.
되려 그런 것 하나도 안 맞는 남자랑 만나서 그럭저럭 살고 있는 걸 보면
저의 인격이 너무 훈늉하달까.(삼천포)
말은 이렇게 하지만, 님의 말씀 듣고 크게 고개 끄덕였습니다.^^

얼음장수 님, 단숨에 느낌 팍팍 오는 건 좋은데
다른 종류의 글이길요.
(한달 월급이 10만 원이라고요? 지금 저랑 비슷하시네용.=3=3=3)








바람돌이 2007-03-0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라는 것의 무게감은 단순히 숫자상의 액수에만 있는건 아니잖아요. 어떨땐 100만원도 그냥 주는거야 잊자 할때도 있고 단돈 만원도 못받으면 정말 맘상할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전 그렇던데요. 님이 일하고 받기로 한 댓가는 10만원이 아니라 만원이 비었다 하더라도 받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다만 두분이 너무 힘들던 시절이라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줄 여유가 없었을 뿐이지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그럴때 있잖아요.

2007-03-07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oldhand 2007-03-07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문장을 단숨에 써내려가셨다니, 한마디로 '일필휘지'로구만요.
10만원, 참 어중간하면서도 무시못할 돈이지요. 제게도 10만원을 빌려갔다가 그 길로 영영 소식을 끊어버린 지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딱 그럴만한 인연이었던 게지요.

비로그인 2007-03-0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왜 이렇게 제 자신이 부끄러운지 모르겠어요... ㅜㅜ

건우와 연우 2007-03-0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숨겨놓은 과거를 들킨 기분이네요...

로드무비 2007-03-0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 님, 님도 저처럼 한번 주머니를 털어보세요.^^

체셔고양2 님, 솔직한 모습이 좋기만 하던데요.^^

올드핸드 님, 단숨에 쓴 건 맞는데 나중에 손은 쬐매 봤습니다.ㅎㅎ
"돈 잃고 사람 잃고" 그런 말은 나에게는 예외인 줄 알았는데. 그죠?
앙금은 안 남았는데 번거로워서 연락을 않는 게 더 문제인 것 같아요.

비슷한 소재 때문에 님, 이문세의 '옛사랑"을 들려드립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저 노래 잘하죠?=3=3=3

FTA반대 바람돌이 님, "누구나 그럴 때 있잖아요"라는 말이
저를 위로해 주는군요.
1만 원 아니라 1천 원 때문에도 틀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
그만큼 지키는 게 어렵다는 얘기겠죠,
쉬워 보이는데.





마냐 2007-03-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사소한 일에도 오래된 인연이 절딴나기도 합디다. 10만원이면....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았죠. 그리고, 사람들 일이란...내게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마치 라쇼몽 같은 대목이 있죠.

로드무비 2007-03-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노우에 야스시의 '엽총'처럼 모두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죠.
한데 모아놓으니 가관.
그 섬뜩함이 재밌기도 해요. 마냐 님.^^

니르바나 2007-03-0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소통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러니 모두모두 이해됩니다.
생활고나 죽음연습같은 우울증 앞에선
더더욱 모두모두 이해됩니다.
인연의 끈이 끊어진 지 오래 되었어도
전화는 한 번 주시지 그러셨어요. 로드무비님^^

2007-03-07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3-08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름이 아니구요.. 그냥 쓰신 글 읽고, 저도 그렇게 내 아쉬움만 생각하고, 친구들 아쉬움은 눈감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드무비 2007-03-0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전 또 제 매정함에 놀랐다는 건 줄 알고.
찔리는 게 많은 인간이랍니다.^*^

선뜻 수화기를 님, 속상한 것도 속상하지 않다고 위장을 하고 넘어가서요.
그게 나중에 되려 상처가 되더라고요.
여차하면 머리채를 잡으며 구체적으로 지지고볶으며 살고 싶은데
대부분 저는 방관자의 자세입니다.
하도 따뜻한 말씀을 남겨주셔서 저도 솔직한 심정을
밝히는 거랍니다.
고맙습니다.^^

니르바나 님, 어느 해 연말, 전원일기에서 응삼이가 주인공일 때
통화가 되어 달려가 응삼이의 남동생을 욕하며 술을 마셨던 친구예요.
페이퍼가 기억나시는지?
아무런 감정은 없는데 연락하기가 어색해서요.
저도 어느 날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에 의하면 제가 생활고의 주인공 맞지요? 흐뭇.^^


뷰리풀말미잘 2007-03-0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친구에게 낙태비용으로 30만원을 빌려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나 그 때나 열렬한 낙태 반대주의자이기 때문에 친구도 잃고, 돈도 잃고, 후회만 남기게 될 줄 알고 있었죠. 뭐.. 그렇게 됐어요. 간간히 그 아기가 꿈에 나와서 잠을 설치고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안 하던 얘긴데 술김에, 님의 글에 왠지 모르게 감동해서, 익명성을 담보삼아 찌끄리고 갑니다. 후후..

로드무비 2007-03-09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뷰리풀말미잘 님, 술김에 찌끄리는 댓글을 사랑합니다.
전 딱 두 번인가 그래봤네요.
낙태비용 30만 원, 빌려준 돈보다 비용의 내용이 좀 무겁네요.
안 빌려줬으면 또 다른 가책이 남았겠지요.
이제 모두 잊고 편안한 잠 주무시길.
 
서른의 당신에게 - 흔들리는 청춘에게 보내는 강금실의 인생성찰
강금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흔들리는 청춘에게 보내는 강금실의 인생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른의 당신에게>를 읽었다.
제목에 '서른'이라고 콕 집어놓아서 책을 주문할 때 찔려서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꼭 서른인 거지?

아마도 요즘 젊은 여성들에게 충분히 어필되는 지성과 미모와
사회적인 신분과 인간적인 호감까지 모두 획득한 그를 전면에 내세워
구체적인 타깃을 정해놓고 책을 좀 팔아보겠다는 심산이리라.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엔 참으로 옹색하고 촌스러운
마케팅 전략(전략이라는 이름이 아까운)이다.
그의 글은 그런 궁색한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

1994년인가 한겨레에서 <허스토리>라는 여성지를 창간했을 때
나는 강금실 법무장관의 글이 실려 있다는 소문만 듣고도 책을 샀다.
그 글은 이 책에도 실려 있고 아마도 편집회의에서 제목을 뽑을 때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나는 그가 어떤 일들을 겪으며 살아왔는지 하는 구체적인 스토리보다
그의 마음자리가 궁금했다.
오래 전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고종석과 시인 황인숙과 함께 노래방에 갔을 때,
그 때만 해도 아직 그리 친숙한 상태가 아니었나 본데 
고종석이 마이크를 잡은 채 혼자 소리로  "마음의 감옥"이라고 중얼거리는 데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지나고 보니 무슨 구체적인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고.
글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시선은 깊고도 명료하다.

종로 2가 뒷골목 어느 허름한 주점에서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앞에 앉은 남자가 무슨 말 끝에 "마인드가 비슷한 사람끼리"라고 하는데
전후 아무 맥락 없이 그 '마인드'라는 단어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술자리에서조차 너무 심각하게 인생에 대해 떠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 '마인드'라는 말은 비스킷도 아니고 크래커처럼 가볍고 부서지기 쉬운
그 무엇으로 여겼건만, '마인드'라는 별 대수로울 것 없는 단어를 발설한 남자랑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인생은 그날의 사정에 따라 이렇게 사소한 일로 엮이고 결판이 나기도 한다.

얼마 전 황인숙의 산문집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스페인 여행기를 읽을 때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동행 친구 둘이 짐작되더니, 짐작은 사실로 맞아떨어지고,
이 정도면 돗자리를 펴야 하는 걸까.

--어쩌다 운이 좋아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텃세로 평생을 먹고 사는 듯하여
요즘도 문득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내 장례식에 틀고 싶은 음악' 중, 94쪽)

간단히 소개하면 그의 마음자리, 베이스 캠프는 이것.
겸손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안주도 술도 음악도 은은한 조명도  다 마음에 드는데
흠모하던 주인이 스페셜 안주 접시를 들고 합석한 술자리 같았다고 할까.
너무 경박한 소감인지는 모르지만,  인생에서 그런 자리를 경험하기는 흔치 않다.

덧붙이자면 영화 <라디오 스타>에 대한 그의 감상은 읽어본 평 중 최고였다.
그 여관, 그 이부자리, 그 짜장면, 그 순대국에 대한 표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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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0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 대충 훑어보고 내려놓았는데 알라딘으로 사서 봐야겠네요. ^^

로드무비 2007-03-03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 님, 전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그에 대해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겐 추천할만합니다.
옮기고 싶은 글이 꽤 많아 도리어 안 옮겼습니다.
막무가내 리뷰.ㅎㅎ

비로그인 2007-03-04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자리"................마음의 자리. 마음의 자리. 마음의...자리.
어떻게 그런 멋진 단어를 끄집어 낼 수 있는거지...라고 감동할 수 밖에 없는 나는
정말 머리만 달려 있는 생물인가.

2007-03-04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3-04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금실, 참 멋있는 사람 같아요.. 앞으로 망가지거나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쫌 있어요..

로드무비 2007-03-04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설마 그런 일이!ㅎㅎ
아주 야무진 사람이던데요?. 그러면서도 인간적이고.
중간에 한 장씩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모습까지 사진들이 실려 있어서
더 좋았답니다.

막무가내 리뷰에 한 표 님, 이 리뷰 급히 써서 올리고
밖에 나가 저녁을 먹고 왔는데요. 식당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답니다.
제목도 너무 이상하게 잡은 것 같고 씰데없는 소릴 너무 많이 지껄인 것 같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 앞에 달려들어 제목을 고치고 어떤 부분을 삭제했답니다.
갈수록 주책이 되어가는 것 같아 서재활동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런 쪼가리 글에도 전전긍긍할 때가 있는데
님은 오죽하시겄습니까.
열렬한 응원을 보냅니다.^^

L- SHIN 님, '마음자리'가 그렇게 멋진 말인가요?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겠습니다. 헤헤~




얼음장수 2007-03-0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그런 책이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님의 리뷰를 보니 고민되네요.
딴 거 다 떠나서 저도 앞으론 술자리에서 '마인드'를 열심히 떠들어야 겠어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드무비 2007-03-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장수 님, 그냥 그런 책일 수도 있어요.
전 워낙 풍덩 빠질 준비를 하고 읽었거든요.
하긴 어느 님은 30대가 아니면 읽을 필요가 없다고까지 하셨더군요.
'마인드'라.ㅎㅎ
별로 좋아하는 단어도 아닌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몰라요.( '')


에로이카 2007-03-04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딴 마음이 있었던 게지요.. ㅋㅋㅋㅋ

2007-03-04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04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피드림~ 2007-03-0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첨 보는 순간 확 땡기긴 했는데,,, 사진 않았거든요.
로드무비님 서평 읽으니까 관심이 다시 생기네요.
님 글 읽으니까 정말 알라딘 다시 시작한 실감이 나는데요? ㅎㅎ

로드무비 2007-03-0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 님, 하하, 모두 제목에 걸려서.
제목 때문에 책 안 샀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안 그래도 언제부턴가 모습이 안 보여서 궁금했답니다.
punk님, <헌티드 하우스> 지금도 잘 있어요.^^

콧방귀 감 님, ㅎㅎ, 긍게요.
생각해 보세요. '마인드'는 그렇다 치고 누가 노래방에서 혼자 인상 쓰며
마음의 감옥이 어쩌고 중얼거렸다면 얼마나 재수 없을지.
어느 날 괜시리 어떤 단어가 마음에 와 박힐 때가 있지요.
부러운 커플이라니, 좋아서 코가 벌렁벌렁하네요.^^

술이 땡기잖아요 님, 아이고 그래 엊저녁 한잔하셨습니까?
어제 같은 날은 대보름날 귀밝이술 핑계대고 퍼마셔도 좋은데.
저도 새벽 한 시에 한잔 생각이 나더라고요.
잠깐 기다리세요. 님 방에 갈게요.^^

에로이카 님, 딴 마음이요?
저야 항시 딴마음으로 사는 인간인디.
마인드가 먼저인가 블루스가 먼저인가 리와인드 해보고 있습니다.
아무렴 어때요, 잘살면 되얐지.ㅋㅋ


얼음장수 2007-03-05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소설을 읽으면서, 김훈은 내가 인생을 좀 더 겪고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산문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더군요. 여튼 고민되는군요.ㅎㅎ

2007-03-05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0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장수 님, 윤대녕의 책을 읽으며 확인했지만 김훈이든 누구든
책도 작가도 다 만나지는 때가 따로 있더라고요.
그게 꼭 지성이나 연륜에 의한 결과는 아닌 것 같고요.ㅎㅎ
깅금실 씨의 이 책은 평소 그에게 호감이 있고 신뢰가 가면 읽으시고
아니면 뭐 굳이......
전 좋았어요.^^

2007-03-06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06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06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4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7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03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08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