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운동이랍시고 하루 한 번 동네 한 바퀴, 공원 한 바퀴 걷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어제는 낮에 일찌감치 과제를 마쳤건만, 부득부득 자전거를 타겠다는 아이와
일찍 퇴근한 남편과 함께 한 번 더 동네를 돌았다.
아파트 주위를 따라 두툼하게 깔아놓은 푹신푹신한 초록빛 길이 끝날 즈음에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불 위에 뭐 올려놓고 나왔어?"
전화를 받던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아, 먹다 남은 대구탕! 쉴까봐 끓여 놓는다는 것이 그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편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오는 딸아이는 본체만체 나도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다행히 우리 동 앞에는 치솟는 불길도, 검은 연기도, 구경하는 주민도,
소방차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관리실 직원 한 분과 경비 아저씨가
나를 보자마자 끌끌 혀를 찼다.
갈색 반투명 유리냄비는 내용물이 꺼멓게 눌러붙은 채 깨지지도 않고 멀쩡했다.

앞으로 제발 조심하라는 부탁을 남기고 아저씨들이 나가는데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냄새를 처음 맡고 관리실과 경비실에 신고했다는
3층의 여성과 바로 옆 106호 할머니가 현관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허리를 90도 각도로  접어 사죄하고 잠시 집 안으로 모셨다.
내 인상을 척 보아하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 같은지
3층 여인이 내게 전화번호를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전화번호 아니라 주민등록번호와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달래도 끽 소리 없이  술술
불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사실 어제 낮 나로서는 정신없는 일이 있었다.
멀리서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로 아침점심을 굶으며 엄마의 수술 소식을 기다렸다.
동네 공원의 돌탑에 돌멩이 하나를 더 얹기 위해 예쁜 돌을 찾아 눈에 불을 켰으며
모든 화분에 물을 듬뿍 주고 방범창 안쪽에 매달린 징그러운 벌레도 
고이고이 떼내어 날려 보냈다.
자기 전 딸아이와 함께 간절한 기도를 올린 건 물론이고
베개 속에 워리돌(과테말라의 걱정인형)을 넣으며 한참을 중얼거렸다.
그 며칠 전부터 기도와 함께 자기암시격인 행위들로  하루를 채우는 형국이었는데,
어제 오후 다행히 경과가 아주 좋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긴장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 머리가 나쁜 나는 그만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헤롱헤롱거렸던 것이다.
그러다 자칫 우리 아파트를 홀랑 태워먹을 뻔했다.

아들을 스물다섯에 낳았고 지금 아들이 스물몇 살이라는 3층의 여인에게 나는
늦게 결혼했고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넉살 좋게 대꾸하며
그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마음속으로 몰래 한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그만 열 손가락을 모두 동원하여
꼬부리고 있었으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냉장고에 있는 큼지막한 사과 두 알을 꺼내어 한 알씩 내밀며 "사과 드립니다!"하고
재치(?)까지 부리고 나니 내가 꽤나 유쾌한 사람인 것 같아서 잠시 의기양양했는데,
오늘 새벽 눈을 떴을 때 이부자리 속에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바로 그 민망한 장면이었다.
생각해 보니 사과는 빨간색 스티로폼 머리띠까지 두르고  때깔만 좋았지
추석 무렵에 들여온 것이라 속이 부석부석하지 않았을까?
문득 얼굴이 벌게졌다.

조만간 차라도 한잔 마시자며 그들에게 전화할 생각이다.
이유야 어쨌건 이웃의 전화번호를 두 개나 얻고 보니 
생각잖은 보너스라도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두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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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6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6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11-06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에요..냄비만 태워먹으셨다니..
그리고 더더군다나 어머님 경과가 좋다면 그깟 냄비 몇개쯤이 재로 변한들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나저나..사과...ㅋㅋㅋㅋ

로드무비 2007-11-06 14:59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 님, 님은 역시 저의 유머(!)를 알아주시는군요.=3=3=3
그러믄요, 그깟 냄비 태워먹은 게 대수겠습니까.
그나저나 머리띠 두른 사과가 몇 개 남았는데 자셔보실랍니까?ㅋㅋ

Mephistopheles 2007-11-06 15:26   좋아요 0 | URL
왠지 운동권 사과같다는 뉘앙스가 팍팍...^^

로드무비 2007-11-06 18:33   좋아요 0 | URL
운동권 사과면 그래도 싱싱함이 좀 남아 있겠네요.^^

조선인 2007-11-0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병이 홀랑 다 타서 나간다는 징조일 거에요. 쾌유를 빕니다.

로드무비 2007-11-06 15:00   좋아요 0 | URL
앗, 조선인 님, 고맙습니다.
그렇게 믿을랍니다.^^

Koni 2007-11-0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큰일날 뻔하셨네요. 그래도 냄비 하나 태우고 끝난 게 참 다행이에요. 이웃과의 연도 잘 이어가면 좋겠네요.

로드무비 2007-11-06 16:48   좋아요 0 | URL
냐오 님,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이웃과의 연'이라는 말 듣기 좋네요.

산사춘 2007-11-06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다행이어요. 조선인님 말씀대로 수술경과 좋으려구 그런 걸 거야요.

로드무비 2007-11-07 10:13   좋아요 0 | URL
산사춘 님,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그런 거지요, 뭐.^^
(믿셥니다.)

2007-11-0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청국장 쉬지말라고 끓여놓는다는것이 두시간뒤에 들어와 보니 까맣게 탔더군요. 근데 그 갈색 반투명 유리냄비 진짜 강한가보네요 우리집것도 깨지지않고 지금도 사용하고 잇답니다. 웃고 넘겨야지 어쩌겟어요.

로드무비 2007-11-07 10:12   좋아요 0 | URL
청국장 탄 냄새도 그렇게 지독하던가요?
현관문을 열면 지금도 그 냄새가 확 달려듭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모두 그 냄비로 개비할까봐요.
정 님 댁은 두 시간이나 타고도 멀쩡했다니!^^

니르바나 2007-11-0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이 참 명쾌한 해석을 남기셨군요.
어릴 적 친구분 책꽂이에 있던 책을 다 기억하시면서
머리 나쁘다는 말씀은 어찌 통하는 구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새 이웃과 친하게 지내라는 하늘의 뜻 아닐까요.^^

로드무비 2007-11-07 10:10   좋아요 0 | URL
언제 어떻게 해서 처음 인상 깊게 들었던 유행가와 책 제목은
잘 안 잊히더라고요.
다른 건 거의 백치 상태에 가깝습니다.
니르바나 님, 이웃과 친해지는 건 둘째고, 다시는 그런 실수 안하도록
마음 단속을 좀 해야할까봐요.^^

oldhand 2007-11-07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엔 문신(스티커)박은 사과들도 많았는데 말이죠. '부사'라고 처억 붙여 놓았던..
(3번째 추천은 제가 했어요. 속닥)

로드무비 2007-11-07 10:05   좋아요 0 | URL
요즘은 부사라고 뭐 특별히 쳐주지도 않잖아요.ㅎㅎ
제가 먹어본 것 중엔 '밀양 얼음골 사과'가 제일 맛있었습니다.
세 번째 추천에 대한 답례로 언젠가 그 사과를 몇 알 얻어 드리고 싶군요.^^

icaru 2007-11-07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액막이 뭐 이런 상징적인 해석이 일단 들었는데요.
로드무비 님 "사과 드립니다."에서 너무너무 귀여우신데요 ^^
만약 우리 옆지기 같았음 책장수 님처럼 신속하게 대처하지 않고, 일단 나를 닦달했을 듯 싶어요..ㅎㅎ

로드무비 2007-11-07 10:03   좋아요 0 | URL
icaru 님, 헤헤, 사람들 모두 나가고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책장수님 품으로 머리통을 들이밀었죠.(두 팔에 못 안깁니다.)
한마디 듣기 전에 꼼수를 썼다고 할까요?
"사과 드립니다"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합니다.=3=3=3



에로이카 2007-11-0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드라마 한 편 본 것 같습니다... ^^

로드무비 2007-11-07 12:30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 님, 그 중에서도 시트콤?^^

마노아 2007-11-07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놀랐지만 유쾌한 결말이에요. 사과드립니다~ 애교쟁이 로드무비님, 센스쟁이로 임명합니다! ^^

로드무비 2007-11-12 11:43   좋아요 0 | URL
얼마만에 받아보는 임명장이랍니까?
마노아 님, 고맙습니다.
님이야말로 센스쟁이!^^

딸기 2007-11-0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글 읽으면서 저도 깜딱 놀라고 걱정하다가... 웃었네요 ^^
근데 그 갈색 반투명 유리냄비.. 그거 눌어붙은 거, 지워지던가요?
그거 갖고싶은데... 거기다가 튀기면 기름이 안 튄다고 들었거든요.
(진지한 글에 냄비 얘기... 죄송, 제가 워낙 살림에 관심이 많다보니 -_-;;)

로드무비 2007-11-12 11:45   좋아요 0 | URL
딸기 님, 그 냄비 다시 사용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웠는데
숟가락으로 긁어내고 쇠수세미로 빡빡 씻었더니 말짱해졌습니다.
조금 더 짙은 갈색이 되었다고 할까요?
딸기 님이 살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진 않은데=3=3=3
성실하게 답변 드렸습니다.^^

딸기 2007-11-21 17:04   좋아요 0 | URL
살림에 관심... 많다고도 할 수 없고 많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어딜 도망가셔요!

roadmovie 2007-11-22 10:5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정확히 말하면 '살림'이 아니라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으신 것 아닌가요?
저처럼.=3=3=3
(메일의 답글 따라 들어왔더니...저도 이런 댓글 한 번 달고 싶었써요.)

프레이야 2007-11-07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다 보니 어머니 수술 이야기가 보이네요.
모쪼록 좋은 결과 있으시길 빌어요.
참, 그 사과는 아마도 아주 맛날 거에요^^

로드무비 2007-11-12 11:40   좋아요 0 | URL
혜경 님, 그 사과는 다행히 맛이 괜찮더군요.
님 덕분입니다.^^

2007-11-07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2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ndcat 2007-11-08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 마시게 되면 꼭 얘기 전해주세요.
어머님 경과가 좋다니 참말 다행.
:)

로드무비 2007-11-12 11:37   좋아요 0 | URL
샌드캣 님, 차보다 가까운 비오는 날 막걸리 두어 병 사놓고 부를까봐요.
메밀묵이랑 부침개 몇 장 부쳐서.^^
(전 요즘 뜨거운 국수처럼 만들어 먹는 메밀묵에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워낙 게을러서......^^
 

어제는 무량 스님의 <왜 사는가>라는 제목의 수행기를 읽었다.
부산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였다.
도로가 너무 꽉 막혀 동생네 책꽂이에서 이 책이라도 들고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감지덕지 읽어내려 갔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구절이 나온다.

--숭산 스님은 행동(수행)을 함께 하는 것을 두고 감자를 씻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감자를 씻을 때 한 번에 하나씩 씻지 않고 감자들을 전부 물이 가득 찬 통 속에 넣고 저으면
서로 부딪치면서 표면에 묻어 있던 흙이 씻겨진다는 것이다
.
(무량 스님 수행기 <왜 사는가> 1권 153쪽)

얼마 전 읽고 알라딘 서재 페이퍼에 인용했던  정호승 시인의 시구가 아닌가.
(이해를 돕기 위해 페이퍼 다시 긁어옴.)

며칠 전에 나온 정호승의 시집 <포옹>을 읽었다.
너무 유창하고 시 한 편 한 편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시인의 진정성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감자를 씻으며'라는 시는 이런 내용이다.

"감자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면서 흙이 씻겨 나간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도
흙 묻은 감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과 같다
"(부분 인용, 46쪽)

아직도 저런 시를 쓸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이 시를 발표하면서 숭산 스님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시로 썼다고 밝혔을까?
그게 만약 아니라면 시를 읽으면서 공허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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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10-2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런 걸 찾아내시는 로드무비님은 분명 신끼가 있는거에요.

로드무비 2007-10-29 18:45   좋아요 0 | URL
치니 님, '신끼'는 저랑 거리가 멀고.ㅎㅎ
조금은 신기하죠?
그런데 독서를 통하여 이상하게 여러 부분들이 섞여
실체를 드러내는 구석은 있어요.

비로그인 2007-10-2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누가 먼저일까라고 가리는 것이 참 힘들죠...
단순히 '출판일'을 가지고 가리자니, '출판은 늦게 했어도 생각은 먼저' 했을수도 있고,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자니 확인할 길이 없고..
게다가 말이죠, 60억 인구라는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보니, 이 세상에 -
적어도 같은 나라에 나와 비슷한 심지어 아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난 다음부터는 '누가 먼저일까'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의미 없다고
예전에 느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로드님이 의도하는 대로 '누군가 누군가의 글을 자기 것인양 쓴 것이라면'
응당 질책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말입니다. ^^
과연 어느쪽일까요.

로드무비 2007-10-29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SHIN 님, 아이고, 저도 그 생각은 했어요.
시인도 감자를 씻으며 그런 생각을 했을 수 있겠다.
그런데 페이퍼를 쓸 때는 사실 시인을 막 의심했거든요.ㅎㅎ
시시비비 같은 것 가릴 생각은 전 없고요.
그냥 얼마 전 읽은 시와 스님의 법문이 겹치니 신기해서 페이퍼 올렸다고
가볍게 생각해 주세요.(책 좀 읽은 것 자랑 겸해서.=3=3=3)



2007-10-30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30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瑚璉 2007-10-30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만화가인 시마모토 가즈히코 씨는 자신의 만화 호에로펜 4권에서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더군요.

"지상에는 우주에서부터 무수한 아이디어 파가 내려오고 있는데 예민하거나, 파장이 맞는 사람들이 이걸 캐치해서 작품으로 만든다."

웬지 설득력있는 설명이다 싶었습니다(^^).

로드무비 2007-10-30 10:11   좋아요 0 | URL
호련 님, '호에로펜'과 작가 이름 메모합니다.
저도 감자를 이때꺼정 대여섯 관은 족히 껍질을 벗겼을 텐데
맛있게 만들어 먹을 욕심만 앞섰을 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거든요.
설득력 있는 말이고요.
그런데, 호련 님도 그 예민하거나 파장이 맞는 사람들에 속하십니까?^^

瑚璉 2007-10-30 10:30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1) (예단은 위험하지만) 가즈히코 씨의 만화는 로드무비 님 취향과는 5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보여요. 허무개그에 가깝거든요(예: 사사건건 대립하는 기성 만화가 두 명이 만화신인왕 선발대회에서 대치하게 된다. 각자 대리인을 한 명씩 두고 지도해주던 수준에서 - 구체적 시나리오 지시 - 그림의 직접 수정 - 아예 대신 그려주기의 단계로 에스컬레이팅되다가 결국 한 명은 본인이 직접 신인인 양 응모하여 1등이 된다는... 쿨럭)

2) 아마 이 양반 만화은 거의 다 절판되었을 겁니다요(쿨럭).

로드무비 2007-10-30 10:35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알라딘은 품절이더라고요.;;
그림을 보고 제 취향은 아니다 싶었지만 인용해 주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아서.
저 그리고 삐리리 재규어 이런 만화도 좋아합니다.
허무개그도 잘만 해주면......
호련 님 잘 지내시죠?
두 번씩이나 와주시고, 반갑고 고맙습니다.^^

에로이카 2007-10-3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가다 이런 상황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표절이든 아님 우연의 일치든 일종의 희열 같은 것을 느끼는데요.. 어떨 때는 그게 내가 해야할 어떤 일에 대한 중복적 암시가 아닐까 하는 공상도 하고 그런답니다.

로드무비 2007-10-30 10:04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 님, 집구석에 처박혀 살아가는 저에게 주는 메시지일까요?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섞여 사랑하고 구체적인 일을 하며 살라는?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저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것도 이것과 뭔 연관이 있을랑가요?^^
('희열'이라는 단어와 '중복적 암시'라는 단어에 깔깔깔~~)

2007-10-30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4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11-0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자를 씻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참 많이 들던데... '니들 참 못생겼구나', '그래도 제각각이네', '미안하다 얘들아'...

로드무비 2007-11-04 12:20   좋아요 0 | URL
누에 님도 생각이 많으시군요.ㅋㅋ
전 이 감자가 타박타박한 감자일지, 물기가 많은 감자일지
맛있을지 맛없을지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답니다.^^

하늘바람 2007-11-02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자를 씻으며 저런 시를 생ㄱ가하시는 님이 더 대단해요

로드무비 2007-11-04 12:18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 님, 아기가 참 예쁘네요.
그런데 감자를 씻으며 저런 시를 생각한 건 아니고,
책 읽다가 문득 생각나서요.^^

2007-11-02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4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8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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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설마 우려하던 일은 기어이 현실로 닥치고, 기대하던 일은 좀체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비록 냉소주의의 팻말을 내걸고 있으나 나의 낙관주의는 품 속 깊이 감춘 암행어사의
마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써볼 요량으로 더듬어 봤더니 그 마패가 온데간데 없다.
그 사실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

맛있는 음식에 달려들 듯 게걸스럽게 9년 만에 나온 박완서의 소설집을 읽어치웠다.
내 안의 허위의식과 이중성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떠들라면
2박 3일로 밤을 새울 자신이 있다.
예전엔 내가 잘하고 남들이 내게 못한 것만 새록새록 생각나더니
지금은 밥솥의 밥을 퍼다가도, 슈퍼 진열대에서 두부 한 모를 집어올리다가도
얼굴이 뜨뜻해지는 순간이 자주 있다.
잊고 있던 나의 과오가 문득 떠올라서.

중풍으로 운신 못하는 시아버지의 팬티를 손으로 집지 못하고 집게로 집어설랑
오만상을 찡그리며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로 가다가 마침 잠기지 않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친구에게 딱 걸렸다.
친구는 독거노인 목욕 봉사단의 멤버고, 소설 '마흔아홉 살'의 주인공 카타리나(세례명)는
그 봉사단의 실질적인 리더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겉다르고 속 다를 수가 있는지, 완전히 딴사람이야."
"세상에, 세상에 ......그 점잖은 노인네가 아들네 집에서 그런 구박을 받다니.
나는 카타리나가 그런 독종인 줄은 꿈에도 몰랐네."(83쪽)

모임에 좀 늦게 도착한 날,  무의탁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목욕 봉사를 해보자고
힘을 모았을 당시의 주동자가 카타리나라고, 천사 같은 얼굴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의 뒷담화를 닫힌 문 앞에서 듣고 그녀는 뛰쳐나간다.
애초에 회장을 맡겠다고 한 것은 권력욕으로, 그동안 노인들을 위해 바리바리
남편 회사의 도움을  받은 것은 목적을 가진 사업상의 PR로 치부된다.

인간의 이중성과 허위의식을 눙치고 까발리는 작가의 솜씨는 여전하다.
아니, 더욱 깊어지고 예리해졌다.
눈치를 채고 따라 나온 절친한 친구와 찻집에 마주앉아 카타리나는
김밥이며 순대를 아구아구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지독한 소리를 듣고도 모임을 깰 생각이 없는 그녀다.
목욕봉사를  헌신적으로 하는 것도 정의감의 찌꺼기일 뿐이고
그 날 그 친구에게 자신을 간파당했다고 카타리나는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 내 이중성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난 왜 이렇게 겉다르고 속 다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가짜인지 나도 모르겠는 거 있지."(105쪽)


집게로 집어들고 오만상을 찡그렸던  팬티 같은 것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는커녕 네 앞가림이나 잘해. 그게 세상을 도와주는 거거든.'
 내가 똑똑해서 일찌감치 그런 결론을 얻은 걸로 알았더니
이 책을 읽으며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어왔던 박완서 소설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2005년, 한 문예지에 발표했다는 '거저나 마찬가지'는 읽으며 배꼽을 잡았다.
어제 오전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구체적인 아주 묵직한 상심이 있었는데도
잠시 그 뻐근함을 잊을 정도였다.
'마흔아홉 살'과 '거저나 마찬가지' 이 두 편 외에는 김병익 씨의 표현처럼
(작자와 해설자의 나이를 합하면 147세라고 소개하고 있다) 노년문학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 최일남의 소설 외에는 노년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을
만나기 어려워 적잖이 아쉬웠는데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당신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책 앞장의 예쁜 메모지에 적힌 작가의 글과 단아한 친필사인을 들여다보는데
몇 번을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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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5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0-2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이제사 털어놓지만, 저를 [알라딘 마을]에 재미를 붙이고, 서재를 만들어 살게 만든
동기 부여가 제일 접한 로드님의 글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중간에 로드님의 컴퓨터 문제로 활동이 뜸해졌을 때 허전했었습니다.
'어어? 로드님이 혹시 서재문을 닫으면 어쩌지? 그럼 나의 안내판은 사라져?'
그런 느낌이었달까...음, 표현력이 부족해서 확실히 전달은 안되네요.(웃음)

뭐랄까, 어린애같은 거랄까요.
'나를 여기 있게 만들어 준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싫어. 그건 마치 입구가
사라지는 것 같잖아. 그럼 기분이 이상하지.' 라는 사념들 말에요.
물론, 제가 로드님의 글을 다 읽거나 혹은 댓글을 다 달거나 하진 않지만 -
존재 자체가 필요하거든요.

음, 어린애의 요상한 소리라고 생각해주세요.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요.(긁적)
그렇지만, 이렇게 가끔씩이라도 맛있는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구요.

그래요, 좋다구요.
냠냠.

잘 먹었습니다.

로드무비 2007-10-25 11:39   좋아요 0 | URL
L-SHIN 님, 아이고, 이렇게 귀엽고 다정한 댓글이라니!ㅎㅎ
님의 입에 정말 맛난 걸 가득 넣어드리고 싶잖아요.(부르르~)
컴이 고장나 서재에 잘 못 들어오는 게 안타까웠는데
그 상태도 꽤 쾌적하더라고요.
서재 개편 후에는 정말 소극적인 서재활동을 하게 돼요.
길을 못 찾는 아이처럼 새글들을 찾아 읽지 않게 되고요.
댓글 보고 간신히 찾아가 보는 정도.
생각난 김에 님 방에 가봐야겠어요. 슝=3


비로그인 2007-10-25 12:1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주 맛있는 글을 차려주세요~
후헤헤헤헤헷... ( >_>)

로드무비 2007-10-29 11:34   좋아요 0 | URL
우헷헷, 그러십시다요.
오늘 한 접시 올릴게요. 입에 맞으셔얄 텐데......^^

라주미힌 2007-10-2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는 항상 좋아요..

로드무비 2007-10-25 11:32   좋아요 0 | URL
앗, 라주미힌 님이닷!
라주미힌 님 댓글 항상 반가워요.^^

프레이야 2007-10-2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늘상 맛깔나는 리뷰 잘 읽고 당장 담아갑니다.
노년문학, 단아한 친필사인.. 다 기대되어요^^

로드무비 2007-10-25 11:31   좋아요 0 | URL
혜경 님의 열광적인 반응의 리뷰 기대할게요.^^

치니 2007-10-24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박완서의 오랜만에 나온 소설집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듯이, 여기 우리들도 그래요. ^-^

로드무비 2007-10-25 11:30   좋아요 0 | URL
'여기 우리들도'라니 누구누구요?( '')
헤헤, 치니 님이 참 기분 좋은 댓글을 써주셨군요.^^

마노아 2007-10-24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맛나게 먹었어요. 이 책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로드무비님은 알라딘의 기업 활성화에 언제나 기여하시는 듯합니다^^

로드무비 2007-10-25 11:44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커트 보네거트 책으로 땡스투를 엄청 받았어요.ㅎㅎ
그런 부수입을 또 기대해도 될라나요?
기업 활성화라니, 알라딘에서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어요.=3=3=3

니르바나 2007-10-25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맛 까다로운 로드무비님을 오랜 세월 붙잡는데 성공하셨으니까
작가 박완서씨는 그 많은 훈장같은 문학賞을 떠나서도 훌륭한 소설가라 생각됩니다.^^
그럴 줄 알고 저도 그 사인 받아놓았습니다. ㅎㅎ

로드무비 2007-10-25 11:26   좋아요 0 | URL
니르바나 님, 저 입맛 안 까다로워요.=3=3=3
없어서 못 먹는 인간입니다요.
그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썼지만 사실은 지대했다는 걸 인정해요.
사인 잘 받아놓으셨습니다.^^

rainer 2007-10-2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저나 마찬가지, 가끔 그 말을 쓰다가 박완서의 소설이 떠올라 씨익 웃곤하지요.
그리고는 거저나 마찬가지는 사실 거저가 아닌거야, 이러고 한 번 더 쓰게 웃어요.
리뷰 좋아요. 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얼른 주문해야겠어요. ^^

로드무비 2007-10-25 11:23   좋아요 0 | URL
먹던 밥상 위에 숟가락만 하나 더......
그 말에 몇 개월 간 밥상을 차려야 했던 기억이 제게도 있거든요.
'거저나 마찬가지'는 제목조차 웃겨요.
신경 쓰지 않고 막 붙인 제목 같은데 생각해 보면 그게 딱이죠.^^

icaru 2007-10-2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는 항상 좋아요 2
이 책 나온 건 알았는데, 사고 싶기까지는 아녔구요. 님이 별 다섯을 주시면, 맘이 많이 동요되곤 하죠.

로드무비 2007-10-25 11:19   좋아요 0 | URL
icaru 님, 책 읽으며 흥이 올라 다 읽고 바로 달려와 쓰는 리뷰는
님들도 더 좋아해 주시더군요. 헤헤~
부쩍 노년에 관심이 많아져서인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참 좋았어요.
님은 10년쯤 뒤에 읽으셔도 괜찮겠죠, 뭐.^^

에로이카 2007-10-2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앞가림도 하면서 세상도 챙기면서 살기는 참 힘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또 둘 다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사는 것 속에 그 둘을 나름대로 녹일 수 있는 지혜가 제겐 참 절실한데... 로드무비님 서재가 오랜만에 찾아온 단골집 같아 좋습니다. ^^

로드무비 2007-10-25 11:15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 님, 내 앞가림도 하면서 세상도 제대로 챙기는 건
저도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오랜만에 오신 단골손님에게 맛있는 걸 좀 내놔야 하는데......^^

2007-10-25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10-2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소설과 리뷰 ^^

로드무비 2007-10-29 10:47   좋아요 0 | URL
누에 님, 앗, 깜찍한 이미지.
푸른색인가요? 눌러봐야겠어요.^^

얼음장수 2007-10-2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광고를 볼 때는 "나왔구나..." 싶었는데
리뷰를 보니 "읽어야겠구나..." 하게 되네요.

로드무비 2007-10-29 10:46   좋아요 0 | URL
얼음장수 님, 안 읽으면 손해예요. 하하~

릴케 현상 2007-10-26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어요. 리뷰 읽은 걸로 만족할지도 모르지만^^

로드무비 2007-10-29 11:35   좋아요 0 | URL
산책 님, 역시 박완서!
발표 당시 두어 편 읽은 것 다시 읽어도 여전히 재미나더군요.^^

2007-10-27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9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7-10-2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만큼 무비님이 좋아요. 헤~

로드무비 2007-10-29 11:00   좋아요 0 | URL
산사춘 님, 와락!
아시죠? 이 음향.^^

2007-10-29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30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30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8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2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11-09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이주의 마이리뷰 당첨이에요. 추카추카예요(>_<)

로드무비 2007-11-12 11:32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님 덕분에 이 사실을 알았지 뭐예요. 캄사캄사합니다.^^

2007-11-13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 2007-11-2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박완서님은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위트와 재치로 풍자하는 재주가 있으신가봐요. 작가의 글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로드무비 2007-11-22 11:58   좋아요 0 | URL
Hani 님의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오늘의 책~' 연극 소식도 덕분에 알았고요.
무거운 주제를 요런조런 쌈으로 가볍게 싸주시는 작가의 재주.
저도 그 쌈밥 오래오래 받아먹고 싶답니다.^^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악함인가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나는 천수경을 외었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첫머리)


네게 불성이 있다니,
그럼 나는 불성을 포기하리라

마음 내킬 때마다의 선행으로 구원되리라 믿진 않는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2' 중에서)


밤새 밥통의 밥이 말라 있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것은 없다
졸작을 남기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4' 중에서)


오늘은 하도 아파, 이틀치 반야심경을 한꺼번에 복용했다

내겐 멀리서 찾아올 친구가 없다, 슬픔도 없다
공자에게도 신통력이 있었다면
아버지, 저는 차력사의 아들입니다
칼날 위를 거닐어야 밥이 나온답니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7' 중에서)



----------------------

-- 가을입니다요.
요즘 같으면 돌덩어리라도 씹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쁜 일감 있으면 좀 보내주시라요.


지난주 아는 사람에게 일을 좀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아무리 능청을 떨더라도 부탁은 부탁이다.
시큰둥한 짧은 답장을 다음날 오후에야 받고 조금 무안했다.

살다보면 없는 용기를 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시인의 말대로 칼날 위를 거닐어야 밥이 나온다.

간신히 인간의 흉내나 내며 사는 삶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
어쩐 일인지 삶이 또 아주 쾌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고맙습니다!" 절을 하고 싶은 것도
요즘 같은 가을에나 가능한 일.

어제는 진이정 시인의 시집을 꺼내어 읽었다.
열 편의 연작시('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읽으며 밑줄을 긋다가
그 밑줄들만 한 군데  옮겨 적어 보았다.
그의 시들은 이상하게 막 섞어 놓아도 또 한 편의 시가 된다.(고 우긴다.)

10년이 넘도록 몇 번을 읽어도 눈에 띄지 않았던 시 한 편이
어제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시 읽는 맛 중의 하나다.)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詩 '어느 해거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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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10-16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학의 풀밭,이라는 시가 생각나네요~ 나는,/마음만 먹으면/일곱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로드무비 2007-10-16 12:24   좋아요 0 | URL
자명한 산책 님, 전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갈 것도 없이 지금 마음 상태가 바로 일곱 살.=3=3=3

조선인 2007-10-1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내킬 때마다의 선행으로 구원되리라 믿진 않는다... 정말 자명한 진리네요.

로드무비 2007-10-16 16:0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변덕에 놀아나는 선행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생각해서
아무런 선행도 하지 않는 저의 태도는 옳은 걸까요?^^

2007-10-16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6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6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6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6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7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코죠 2007-10-17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 이 시집을 사러 갔더니 품절이에요... 안타까워서... 안타까워서...

로드무비 2007-10-17 11:00   좋아요 0 | URL
오즈마 님, 오래도록 절판 상태였다가 다시 나온 시집이니
구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알아볼게요.^^

2007-10-17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9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9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0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우와 연우 2007-10-21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날위를 거닐어야 밥이 나온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을 몇몇이 부러워 미치겠습니다.

2007-10-29 0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래 전,  대기업 비서실에 소속되어 5, 6년간 근무했던 적이 있다.
문학과 관련하여 큐레이터 비슷한 일들을 하는 문화재단으로 알았는데, 
알고봤더니 재벌 총수 어머니의 문화활동을 위한 사조직에 불과했다.

60대 중반이던 사모님은 시조 창작에 열을 올리셨는데
당대의 유명 소설가, 무용가, 대학교수, 시인 들을 한 명씩 자신의 방에 불러들여
단독으로 강의를 들었다.
강의 후에는 상기된 얼굴로 사모님께 하사받은 넥타이니 스카프 선물을 들고
호텔 식당에 예약된 점심을 먹으러 따라 가는 그 유명인들이
내 눈에는 참 한심해 보였다.
한심해 보였다, 고 썼지만 월급을 받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나는 더욱 한심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아침부터 출근하여  행운의 편지를 몇 통씩 썼던 날.
대문 우편함에 꽂혀 있는 행운의 편지를 어느 고지식한 이가 읽고
사모님께 전해준 모양이었다.
손자 앞으로 왔으니 몰랐으면 모를까 찜찜해서 안 되겠다며
우리들에게 몇 통씩 할당하여 베껴 쓰게 한 것.
그때 나는 알았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 직원들이 가정부나 운전기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걸.
(하나마나한 일을 했던 우리에 비하면 그들이 사실은 더 전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지금에야 말이지만......)

한번은 유명한 원로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차량까지 보내어 모셔왔다.
시조잡지를 만들자는 둥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둥 흰소리를 하며 극진히 모시다가
몇 번 만나지 않아 시들해진건지 그분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사모님의 변심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존경하는 시인의 전화를 받는 건
행운의 편지를 쓰는 것보다 더 고역이었다.

하루는 분기탱천하여 택시를 직접 잡아타고 사무실에 온 노시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부들부들 떠셨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라고......
왜 아니겠는가.
누구보다 청렴했고, 시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서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관계였을 텐데 그 사모님은 가장 악랄하게 시인을 모욕했던 것이다.
다음해 그 시인이 돌아가셨을 때 사모님은 화환을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손에 쥐가 나도록 쓴 그 행운의 편지가 오래되어 효험이 떨어졌던 것일까,
그 사모님은 얼마 전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일생의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돈이 좀 많다는 이유로 예술과 사람을 가지고 놀았던 그 여인.
그 꼴을 옆에서 구경만 했던 우리들.

참, 나로선 작은 반항을 꾀한 적이 있다.
회사에서 신문을 인수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직원들에게
구독하는 신문을 바꾸는 건 물론 구독자를 모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어느 날, 숙제검사를 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한 사람씩 불러세우더니
몇 부를 확장했는지 묻는 게 아닌가.
10년째 읽고 있는 ㅎ신문을 바꿀 생각도 없었던 나.

" 한 부도 못했는데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그 말을 발설하던 순간의 쾌감을 잊을 수 없다.
그래봤자, 그 사모님은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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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5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5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10-0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의 표정과 제스추어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
"한 부도 못했는데요."

로드무비 2007-10-05 15:18   좋아요 0 | URL
누에 님, 지금은 후회하고 있습니다.=3=3=3
(제가 잘린 게 그 이유도 한몫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비로그인 2007-10-0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L모 증권에 있었는데 L모 텔레콤으로 전화를 바꿔라 확보해라 어쩌라 할때 그냥 누적포인트 때문에 안되요. 그랬어요 (으쓱)

로드무비 2007-10-05 15:17   좋아요 0 | URL
새초롬너구리 님, 그럼요, 누적 포인트, 그것 절대 무시 못하지요. 그런데 포인트와 마일리지가 같은 건가요? 헤헤.^^

마노아 2007-10-05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제가 다 통쾌해집니다.(책임은 로드무비님이 지셨지만요^^;;

로드무비 2007-10-06 10:36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헤헤, 그래도 꽤 오래 버텼답니다.
저까짓것도 반항 축에 끼는지 몰라도 통쾌하긴 하더군요.^^

치니 2007-10-0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모님이 누군가 상상 중.

로드무비 2007-10-06 10:21   좋아요 0 | URL
그 사모님이 누군지 알 수 있게 썼다가 몇 줄 뺐어요.
무서운 일가라.^^

건우와 연우 2007-10-0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것과 아래사람의 심리적 거리가 궁금해지는 가을이랍니다...^^

로드무비 2007-10-06 10:20   좋아요 0 | URL
윗것이었던 적이 없어서.ㅎㅎ
그 심리적 거리는 아마 측량이 안 될걸요?

날개 2007-10-05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저도 무지하게 뜸했지만, 님도 뜸하게 오시는 바람에 마주치질 못했네요..^^
에.. 그리고 여전한 글솜씨....!

로드무비 2007-10-06 10:19   좋아요 0 | URL
날개 님, 아이고 반가워라. 요즘 통 서재에 못 들어왔어요.
님도 뜸하셨나 봐요. 잘 지내셨죠?
이럴 게 아니라 님 방에 가볼랍니다.=3

oldhand 2007-10-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주옥같은 로드무비님의 뻬빠를 보고 나니 저절로 추천버튼에 손이 가누만요. ^^

로드무비 2007-10-06 10:16   좋아요 0 | URL
그 손에 축복 있기를.=3=3=3

비로그인 2007-10-0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드무비님 글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꿀걱)

로드무비 2007-10-06 10:15   좋아요 0 | URL
한 접시 더 올릴까요?^^

비로그인 2007-10-07 02:21   좋아요 0 | URL
오, 좋죠.^^

로드무비 2007-10-08 18:28   좋아요 0 | URL
꽝꽝 언 고기 해동시키고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7-10-0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몇 년 전에 읽은 글에서 좀 진도가 나갔네요^^ 한 10년에 걸쳐서 더 들어야겠네요

로드무비 2007-10-08 18:27   좋아요 0 | URL
진도 팍팍 뺄까요?^^
(흥, 짓궂으시긴.=3=3=3)

2007-10-12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3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3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8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9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