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창비시선 292
고은 지음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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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허공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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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그러운 미움 다하여 한자락 구름이다가 자취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 거기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번 거론되고 있는 고은 시인의 시집이지요. 저도, 많은 사람들처럼 평소 시집을 꺼내들기보다는 재미를 찾아서 소설책을 많이 꺼내들지만, 가끔은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역시 갈수록 인기를 덜해가는 '시집'을 읽어보겠다는 의지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요. 시를 읽고 있으면, 사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시는 그냥 느끼는 거라는데, '느껴지나' 하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아직 많이 못접해봐서 그런것 같아요) '그냥 이렇게 후루룩 읽어버려도 되나?' 아니면 허투로 읽는다는 걱정에서 입으로 읽어보기도 하고요. 아직도 '대단한 시'란 무엇인지 가늠이 가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 드는 시어가 있는 부분부분, 되새겨가면서, 좋다고 박수치고 한답니다.

 

  아무튼 그래서, 시를 읽고 쓰는 리뷰는 부담이 배로 듭니다. (물론 책 리뷰도 항상, 어렵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시인이 쓴 '시'를 읽고서 느낀 바를 말할 수 있는 제 표현력은 한계가 있어서 말이지요.. 특별한 주제로 묶은 시집이라면, 설명이라도 쓰지만 - 음, 어렵네요.

 

  고은 시인의 시 <허공>은 어느정도 낯이 익은 것 같습니다, 아마 어딘가에 여러번 수록되었거나 학교다닐때 보았던 것일까요. '허공' 이외의 시들에도, '허공'이라는 시어가 여럿 등장하는데, 고은이 바라보는 '허공'은 어떤 느낌일까요. 자유, 순수한, 초월적인, 한맺힌 울음을 받아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공간일까요? '허공'이라는 단어는, 왠지 슬프고 음울한 느낌인데 왠지 시 속에서는 오묘한 느낌이 듭니다. 긍정적이고도 부정적인 느낌이 혼재하는 단어랄까요, 지금으로선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 밖에 새로웠던 건 세계를 바라보는 고은의 시선이 담긴 소재들이 꽤 많다는 것이었어요. 한국의 사회 뿐만 아니라, 전쟁, 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들이요. 고은 시인은 끊임없이 섬세하고 생생한 '시'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듯 보이고, 지난 생의 추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시가 역시 많습니다. 반세기를 시인의 삶을 산 사람이 보아온 남다른 풍경들.. 또한, 아름다운 시어가 있는 반면, 거친 시어들도 많네요.

 

  어쨌든 세상에 나온 수많은 시집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언젠가 보이겠지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느낌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어요.

 

 

 

Underline

 

 

 

 

  - 저 봉천동 윗말 할머니 여생에는 / 식은 연탄재뿐인데 / 두만강 숫처녀가 갈보가 되는데 /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 허리에 폭탄 매고 달려가는데 / 서울역 지하도 노숙자가 / 신문지 덮고 뻐극뻐극 앓고 있는데 / 아 , 이 세상에 더이상 눈물이 없다 / 실컷 울고 난 / 푸른 하늘이 없다 / 그 많은 푸른 하늘의 신들 다 죽어버렸다 / 나에게 눈물이 없다 눈물의 피가 없다 / 이 캄캄 벼랑 어이 건너갈거나 (63p, 나에게 눈물이 없다)

 

 

  - 나의 치여 / 나의 타여 / 한마디 말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 한줄의 글 쪼아버리고 / 달걀 속 / 흰자위 노른자위의 첫날밤 / 그 순벙어리 / 그 고향 어디로 가버렸는가 / 왜 나는 지금 얼마짜리로 목을 매고 있는가 (96p, 울란바타르의 마음) * 몽골어로 '치'는 너, '타'는 당신을 뜻한다.

 

 

  - 국가는 섬세할 수 없단다 국가는 그냥 왈패란다 / 그럴수록 문학은 섬세해야 한단다 / 자네 문학이 / 행여나 / 떠밀리고 떠밀려 / 변방 읍내 호프집에 처박히게 될지라도 / 낙담 말게 / 더더욱 외따로 고개 저어 섬세하고 섬세할 노릇일세 / 장차 그 섬세함의 장관이라니 (120p, 후배에게)

 

  - 문맹률 75퍼센트의 그 시절 / 나는 덩달아 시인이 되어버렸습니다 / 가슴에 거멀못 박혀 / 내가 태어난 것이 내 뜻이 아니었듯이 / 꼼짝달싹 못하게 / 내가 시인으로 태어난 것이 / 오래된 내 뜻인 듯 / 여기저기서 구호물자 주는 저녁 예배당 종소리와 / 도벌 남벌 민둥산의 굽은 나무가 / 이따금 한 편의 시를 주면 달게 받아먹었습니다 / 전쟁 / 평화라는 낱말 / 부패 / 기아 / 천년 이어온 초가지붕들 / 이승만 독재의 부정선거 피아노표 올빼미표 / 그런 날들을 지나오며 극단과 극단의 일상이었습니다 / 이슥한 달빛에도 숨을 칼날들이 엇갈려 있었습니다 /

 

   문맹률 0퍼센트의 시절 / 지난날의 폐허에서 시작한 내 시의 엉터리는 / 벌써 50년이 되어갑니다 / 내 또래들 남북의 절반이 죽고 / 나는 술집 탁자 위에서 자다가 떨어졌습니다 / 어느날 밤 내 또래의 귀신들 몇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 너 시인이냐? / 나는 비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부인하였습니다 / 아니라고 / 아니라고 / 내가 진짜 시인이라면 / 세상의 한 모서리가 왜 이 지경이겠느냐고 / 아니라고 / 아니라고 (145p, 어떤 신세타령)

 

 

  - 시들이 / 그 이상의 시를 막는다 / 시들이 / 그 이후의 시를 막는다 / 시야 시야 파랑시야 / 시의 연혁 / 시의 패션 / 시의 권위 백년 가까스로 벗어나 / 그대의 시 벌벌 떨며 막 태어나 혼자이거라 (212p, 한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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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에 '허공'이라고 쳤더니, '생명은 소중합니다! 지금, 희망을 클릭하세요.' 문구와 함께

자살예방 상담코너가 뜬다............... 아, 놀랬네. 아닙니다 그런거 ㅠㅠㅠㅠㅠ 전 행복합니다아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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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책이다 - 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 이동진과 함께 읽는 책들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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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생각의 통로가 넓어지는 시간 <밤은 책이다 - 이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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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장 내밀하게 이어지는 통로이겠지요.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책들을 보다가 멈추어 고개를 드는 순간 제게로 변형된 채 틈입해 들어오던 그 깊은 밤의 상념들을 이제 당신에게 보냅니다."

 

  캄캄한 방에 전등 하나를 켜놓고 책을 읽는 밤은 조용하지만 시끄럽기도 한 시간입니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글들이 더욱 세밀하게 들어오기도 하고, 내 마음 속 가장 은밀한 생각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죠. 생각들이 넘쳐서 아무리 해도 졸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야행성이어서, 낮보다는 밤에 잠이 많이 없는 저에게도 '밤은 책입니다.' 밤에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저에게는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능률을 발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각, 다른 사람에겐 보여주기 조금 어색하고 부끄러운 글들을 쓰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제가 최근에 읽은 책들의 제목 중 가장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동진 기자, 아니 평론가님, 라디오 DJ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한 이 분에 대해서는 처음엔 영화를 좋아하는 언니를 통해서 처음 알았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가까운, 블로그라는 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시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이 분이 쓴 리뷰는 짧지만, 그리고 심하게 화려한 수식어도 없지만 굉장히 정확한 글이여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위즈덤 하우스 활동을 통해서 빨간책방을 정기적으로 들으면서, 영화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가끔 읽고서도 이해가 안될정도로 모호한 책들이 있다면, 그것을 빨간책방에서 다루어줬을 때 얼마나 시원하고 다행인지 모릅니다. 책을 읽고, 빨책을 듣고, 이해하고, 내가 찾을 수 없었던 책 속의 무언가를 또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감사한 프로그램이죠.

 

  <밤은 책이다> 속의 글은, 책 하나하나로 따져보면 짧은 글들이지만, 대신 굉장히 많은 책들에 대한 저자의 내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항상 낭랑하다고 느꼈던 라디오 속 저자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듯 하기도 하고요. (알고보니 라디오에서 방송된 것들을 보완한 글이라고 하네요.) 스스로 책 쇼핑중독이라 부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책 보유량 중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책들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해결해주기도 합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직접 찍은 사진들도 좋네요.

 

  작가가 말하는 것들에 공감하고 행복해하면서, 오늘도 좋은 책들을 알아가며 위시리스트를 한가득 채웠답니다.

 

 

 

Underline

 

 

  - 제게 좋은 책이란 너무나 흥미로워 한번 손에 들면 단숨에 끝까지 독파해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일보다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여백을 발견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읽고 있는 순간들의 총합이 아닌 셈입니다. 독서는 바깥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책 속에 구현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시작되지만, 책 속의 세계에서 언뜻 일렁이는 어떤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금 이 세상에 되비쳐 볼 때 비로소 완성되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결국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진 뻘밭 같은 세월 속을 헤쳐 나가는 우리의 서툰 포복술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8p)

 

 

  - 행복이 지고지선의 가치로 알게 모르게 강요될 때, 행복 권하는 사회에서 종종 사람들은 자연스레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니라 행복이라는 표준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아직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불행해하지요. (...) 어쩌면 행복은 확고한 의지로 추구해서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실하게 시간 속을 걸어가는 자에게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일상의 보너스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을 앞에 두고서 일직선으로 내내 좇아 치달리다 보면, 어느새 행복이라는 관념 자체에 쫓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할까요.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그게 강박이 되는 순간, 그건 그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81p)

 

 

  -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는 과거로 통하는 비밀스러운 문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건 점심 때 입에 넣은 음식 한 조각일 수도 있고, 오랜만에 지나가게 된 어느 골목길일 수도 있으며, 버스에서 내릴 때 훅 끼쳐왔던 어떤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추억을 잡아당기는 기억의 문고리들은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틈입합니다. 오래 함께한 연인들이 헤어지기 어려운 이유는 두 사람이 긴 시간 속을 통과하면서 만들어놓은 문고리나 매듭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기되기 마련인 기억의 존재 형식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일 겁니다. 그렇게 기억은 무시로 우리를 급습하고, 일상의 사소한 접점에서 예기치 않게 격발당한 우리는 추억 속으로 침잠됩니다. 그렇기에 추억은 두렵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죠. (120p)

 

 

  - 책은 그 자신만의 우주를 펼쳐내며 독자를 끌어들이지만, 읽는 사람도 책에 구현된 세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만은 않습니다. 독자 역시 책의 세계를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감싸 안는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독자는 자신만의 분위기와 자신만의 리듬으로 책의 세계에 눈을 반짝이며 닻을 내리는 것이지요. 게다가 책을 읽을 때 인간은 오롯이 혼자이지만, 그 순간 그를 사로잡는 것은 누군가와의 교감입니다. 책이란 결국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장 내밀하게 이어지는 통로니까요. (152p)

 

  - 무엇보다 밤은 말합니다. 한낮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우리가 우리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밤입니다. 낮에는 수다스럽던 당신도 밤에는 기꺼이 듣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소리에는 밤의 거울에 문득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여는 당신 내면의 또다른 목소리도 있겠지요. (2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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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팬심이 들어갔나요

사실, 팬까지는 아니지만 존경하는 분이긴 합니다.

그게 그건가요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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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헤세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켈스 엮음, 박민수 옮김 / 이레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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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붓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포도주와 같습니다 <화가 헤세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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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과 붓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런 일에 취하면 삶이 아주 멋지고 푸근해져서 삶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열두살때부터 생각했던 시인의 꿈을 이룬 헤세의 또다른 바람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광기에 회의를 느낀 헤세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또다른 꿈이었던 그림을 독학으로 익혀서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불안정한 내적 세계를 자전적 소설로서 표현해내고 그것으로부터 안정을 찾았던 것처럼 보이는 헤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림'으로부터 삶의 위안을 얻었다. (헤세의 그림에 대한 이상은 '로즈할데'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라는 작품에도 표현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이 헤세의 인생 속 내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전쟁 중 수작업으로 자신의 그림과 시를 직접 써서 판매하기도 했으며 생계 유지에도 도움을 주었다.

 

 <화가 헤세>는 77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으로, 몇천점에 달하는 헤세의 그림을 골라 그가 쓴 산문, 시와 엮은 것이다. 산문 하나하나 옆에 붙은 그림들은 산문의 느낌과 아주 잘 어우러져 마치 헤세가 그 그림을 그리는 상황이 연상되는 듯 하다. (헤세의 시와 산문은 행복감이 넘쳐흐르는 것들이 많아서, 평소에도 굉장히 좋아한다. 그 중 구름에 대한 헤세의 묘사는 정말 일품이다! 이건 나중에 따로 발췌해 올릴 예정.)

 

 

 

 

  헤세의 작품들 중 좋았던 그림들을 연도순으로 나열해보았다.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지만 그림들을 보면 느낌이 굉장히 다양하게 다가온다. 헤세가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습작으로 성장하면서 그림체 또한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첫번째 그림은 20년대 초, 단순한 선으로 윤곽을 잡고 칠한 느낌이고 헤세의 많은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간 바랜 느낌이 든다. 두번째 그림은 색채가 굉장히 다양하고 단순한 스케치에 색을 칠한 첫번째 그림보다 구조가 세밀해진 느낌이다. 세번째 그림은 26년도의 그림인데, 약간 추상적인 느낌이 듦과 동시에 동양적인 분위기까지 나는 듯 하다. 헤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그림으로도 표현되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그림은 58년도, 생을 마감하기 4년 전의 그림이다. 평화롭고 은은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헤세의 초기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가 나지만 이 작품도 굉장히 와닿는다.

 

  그의 넘치는 예술성은 문학으로, 미술로, 음악으로도 표현되었다. 그 중 글과 그림은 헤세 자신을 온전히 집중하고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세밀하고 아름답게, 자신을 담아 표현한 글과 그림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림이 없었다면 시인 헤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그의 '그림에 대한 사랑'은, 헤세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남다른 그의 예술성과 또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문학과 그림작품들을 지금 보는 우리는, 그가 그림에 몰두한 시간동안 문학과의 거리가 멀어졌을지라도 그 속은 결코 좁지 않았음을, 헤세의 문학에 그림또한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Underline

 

 

 

  - 여기 앉은 내가 우리 마을에서 보는 것, 그것을 이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저 아래 바래고 갈라진 석회 벽이 하늘의 파란색을 끌어당겨 땅 위까지 물결치게 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녹색 미모사 사이에서 박공벽의 빛바랜 분홍색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하게 미소 짓는지 보는 사람은 없으며, 아다미니 집의 어두운 황갈색이 짙푸른 산을 배경으로 얼마나 풍성한 느낌을 주는지 (...) 보는 사람도 없다. 바로 이런 순간에 색채들의 조화가 가장 순수하고 멋진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 이 작은 세계에서 나타나는 색조들의 조화와 명암의 단계와 그림자들의 싸움은 단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저 아래 푸르스름한 조개껍질 같은 골짜기에서 저녁의 황금빛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저편의 산들이 공간 뒤로 더 멀찍이 물러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집을 짓고 허물며 숲의 나무를 심고 베어내고 창문틀을 칠하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보는 사람, 이 모든 행위와 일들의 관찰자인 사람, 이 담장들과 지붕들을 눈과 가슴에 담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림으로 그리려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16p)

 

 

  - 전쟁은 나로 하여금 내면의 병을 앓게 하는, 혹은 나 자신과 논쟁할 수밖에 없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내면의 병 내지 불가피한 논쟁은 그 나름의 진행방향이 있으며, 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요즘 내가 일을 하는 사이사이에 뭔가 아름다운 것을 누리고 싶고 잠시 급박한 일에서 벗어나 의심의 여지없이 가치있는 무언가에 침잠하고자 할 때면, 나는 시를 짓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림 그리기는 내게 있어 시 쓰기와 거의 똑같은 일이며 종종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추구할 만하다고 여기는 유일한 영혼의 상태는 사욕이라곤 없는 내적 공감과 몰두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야말로 진정 예술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그런 일, 즉 그림 그리기를 할 때면 여러 시간동안 그 상태에 도달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신의 왕국이 시작되며 '모든 것은 그분의 것'입니다. (140p)

 

 

  - 현실은, 이 초라한 현실은 언제나 실망스럽고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거부하는 길밖에, 우리가 현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내 문학을 읽는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통상의 존중심이 내게 결여되어 있음을 흔히 아쉬워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 나무들이 얼굴을 갖고 집들이 큰 소리로 웃거나 춤을 추며 때로는 울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나무가 자작나무인지 밤나무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비난을 나는 받아들인다. 굳이 고백하자면, 내게는 나 자신의 삶도 동화처럼 여겨질 때가 아주 많다. 종종 나는 바깥의 세계가 나의 내면과 조화로운 관계에 있음을 보고 느낀다. 그런 조화로운 관계를 나는 마술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151p)

 

 

  - 내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이 몇 년 동안 나는 문학에 대해서 점차 거리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 거리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그런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그림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거의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산업 세계와 달리 예술에서는 시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끝에 이르렀을 때 내가 시도한 것이 일정한 집중성과 완전성에 도달해 있기만 하다면 상실된 시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시인으로서의 나도 그리 성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52p)

 

 

  - 이 말을 들으면 독자들은 웃음을 터뜨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멋지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일엽편주에 이야기 한 편을 싣고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혹은 우주 속에서 홀로 비행하는 것에 비견된다.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아내고 가능한 말 세 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짓고 있는 문장 전체를 감정과 귀에서 잃지 않는 것, 문장을 다듬고 자신이 선택한 구성 방식을 실현하고 구조물의 나사를 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 전체 혹은 책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비밀스런 방식으로 부단히 감정 속에 현전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활동이다. 내 경험상 이와 유사한 긴장감과 집중은 오로지 그림을 그릴 때만 느낄 수 있다. 그림 그리기에서도 똑같다. 개개의 색깔을 이웃한 색깔과 적절하고 세심하게 조화시키는 것은 멋지고 쉬운 일이다.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금방이라도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아직 그리지 않아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그림의 전체 부분들을 정말로 눈앞에 불러내보는 것, 변화무쌍한 온갖 요소들의 아주 촘촘한 그물망을 지각하는 것은 놀랍도록 어려운 일이고, 성공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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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라인에 발췌한 글들을 읽으면

그가 글쓰기와 함께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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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일기 - 나를 치유하는 14일의 여행
데즈카 치사코 지음, 다카하시 미키 그림, 이소담 옮김 / 길벗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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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14일의 여행 <칭찬일기 - 데즈카 치사코> 

 

 

 

 After Reading

 

 

 

  나를 치유하는 14일의 여행 '칭찬일기'

 

  처음에 칭찬일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흔히 요즘 블로그에 많이 쓰는 '감사일기'와 비슷한 형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블로그에 한번 써볼까,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왠지 공개적으로 올리기에는 부끄러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나혼자 간직할 일기여야 된다는 생각이다.

 

  남에게 칭찬을 들으면 엔돌핀이 생성되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항상 내가 원할때, 칭찬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방법은 '내 스스로 칭찬'하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칭찬하는 것이 처음에는 굉장히 부끄럽고 민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긍정 에너지로 가득찬 칭찬일기를 쓰고 있으면 좋은 기억은 더 좋아지고,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스스로 위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부족한 점이나 아쉬운 점 그리고 실패한 일들을 후회하는 말들을 하게 되면 우리의 기분은 더욱 마이너스 된다. 대신 칭찬을 해주면 그 실패한 일의 10%정도라도 희망을 담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엄마도 요즘 자신의 능력을 적극 발휘해가면서 남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에 더불어서 자신에게 '잘한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는 옆에서 우습다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요즘들어 엄마의 기분과 기력이 예전보다 훨씬 상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칭찬일기 5일째에 접어들고 있다. <칭찬일기> 책 속에 있는 실천 가이드를 보고, 하나하나 주제를 삼아 칭찬일기를 실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은 '일상 속에 보이지 않는 칭찬할 것들'이라던지, 아니면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것'을 칭찬하는 등, 칭찬거리들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주제를 제공한다. 그리고 나는 '해냈다', '잘했다', '참 멋지구나' 하는 단어들을 사용하며 칭찬일기를 쓰고 있다. 책 속에는 <실천일기> 베타 테스터로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제 칭찬일기의 모습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효과가 굉장히 좋은 모양이다. 나는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감사일기를 쓰는 것과 병행하고 있다. 아직까지 크나큰 변화가 있지는 않지만, 우울하거나 사소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 칭찬일기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이기도 한다. 2주, 그리고 계속해서 꾸준히 쓴다면 지금보다 더욱더 긍정적인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Underline

 

 

   - 남에게 칭찬받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몸과 마음에 활기가 넘칩니다.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요? 최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칭찬언어'를 들으면 '식욕'이나 '성욕'을 만족시켰을 때와 마찬가지고 기쁨을 느끼는 뇌영역이 자극된다고 합니다. 뇌가 '칭찬언어'를 자극으로 받아들이면서 호르몬 (세로토닌이나 도파민)분비가 증가하고 기분이 안정되는 한편 활기가 샘솟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16p)

 

 

  - 언어를 바꿨다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궁금하지요? 언어에는 입 밖으로 꺼낸 것을 현실로 이루어주는 '언령'이라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 에너지는 사고방식을 통째로 바꿀 정도로 힘이 굉장히 세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무의식중에 이미지로 전환되기 때문에 언어를 바꾸면 이미지도 바뀌죠. 요컨대 항상 밝고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이루어줄 언어를 많이 사용하면 됩니다. (24p)

 

 

  - 혹시 자기를 탓하는 언어나 공격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별로 깊은 뜻이 없더라도 마이너스적인 언어를 입에 담고 있지 않나요? 언어에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실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나를 부정하는 언어를 계속 사용하면 결국 부정적인 자기상이 실현됩니다. 평소 무심코 사용하는 마이너스 언어, 예를 들어 "아, 귀찮아" 혹은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같은 말은 자기 탓을 하거나 부정하겠다는 의도가 없을지라도 그러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서 의욕을 감소시키고 기분을 저하시킵니다.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인 나를 만드는 것이지요 (102p)

 

 

  - 칭찬일기를 쓰면 장점이 더욱 부각되어서 정신적인 성장이 촉진되고 자신감도 생깁니다. 감정에 여유가 생겨서 단점을 고치기도 쉬워지고요. 어중간한 사람이 되기는커녕, 뇌의 전두전야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물론이고 집중력에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까지 좋아집니다. 게다가 강한 마음과 용기까지 새록새록 솟아나니, 하고 싶다고 마음 먹은 일을 척척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지요 (1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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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이런 자극도 필요하다. 긍정에너지 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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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그의 세설을 통해 문장을 만끽하다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After Reading

 

 

 

 

   옛날부터 눈에 담아두고 있던 이 책은 이상하게도 내게 빨리 들어오지 않았다.

 

  몇년 전 이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에는 '나중에 사야지' 미루고 있다가 '사야겠다'하고 마음먹은 날에는 절판 상태가 되어버려서 중고책방을 뒤졌더니 가격이 거의 두배가까이 올라있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나중을 기약했고, 이 책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사히 내 책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어쨌든 이런 수고를 통해서, 읽고 싶은 책은 빨리 거둬들이라는 교훈을 나에게 안겨준 책이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라는 문구가 낯익다. 이 책은 원래 이런 제목으로 나왔었다. 김훈 작가가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아 묶어낸 책인데, 1990년대 - 2000년대 사이의 사회 이슈들을 보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을 즐길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칼의 노래>를 읽고 작가의 문체에 홀딱 반해버린 나는 이 세설을 통해서 빛나는 문장을 발견하리라는 바람을 갖고 읽었다. <칼의 노래>때 느꼈던 담담한듯 휘몰아치는 유려한 문장들을 기대했다. (김훈 작가의 글은 내게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왠지 우아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책의 앞부분에서 나는, 건조하고도 날이 선 또다른 그의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쪽으로 갈수록 에세이 느낌이 강해져서 내가 바라던 그 모습들을 쉴새없이 발견할 수 있었지만, 어찌됐든 그 앞의 논평느낌이 나는 글들도 꽤 매력있다. 두 부분의 공통점은 사회의 불완전한 세태에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는 작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는 것.

 

  아들들에게 거침없이 평발을 내밀지 마라고 외치는 김훈도, '두보'의 시를 읊으며 자신의 감성을 술술 풀어내리는 김훈도 나는 참 좋다.

 

 

 

 

Underline 

 

 

 

 

  - 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쓸쓸했지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세계는 무수한 측면을 갖는다. 그 측면마다 하나의 독립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 삶 속에서 그 유효성을 검증할 수 없었던 거대하고 모호한 의미의 단어들을 만지기가 겁이 난다. 결국 끌어다 쓰지 못한다. 사전에 나와 있는 말들 중에서 끌어다 부릴 수 있는 말들은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듯이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고작 한 옴큼이다. 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 가난이 오히려 편안하고 가지런하다. (58p, 말하기의 어려움)

 

 

 -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옛 미국인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운운한 말이 2백년 후의 한반도 남쪽에서 요란한 각광을 받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 가파르고 다급한 말은 무의미한 수사에 불과하다.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뜻은 알겠으나, 정부와 신문 양자간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수사는 근본적으로 공허하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이 양자택일을 인간의 현실에 적용시켜서 이쪽이다 저쪽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별로 쓰잘데없는 말 쪼가리를 이미 권력으로 쪼개져버린 현실에 대입시켜 가면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우습고 꼴같지 않아서 대답하지 못한다.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지성이다. 제발 이러지들 말라. (78p, 개수작을 그만두라)

 

 

  - 설이 지나서 나는 쉰네 살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죽음을 내 불가피한 귀결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도 덜 살아서 그런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일회성을 감당해 낼 만한 마음의 힘이 없다. 인연이나 업장의 소멸이 무섭고,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도 무섭지만 그 무서움을 인식하는 나 자신이 이미 증발해 버려서, 무서움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 대책 없는 적막은 더욱 무섭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인식이란, 삶은 살아 있는 동안의 느낌의 총화일 뿐이라는 정도다. 비천한 생사관일 테지만, 그 너머를 말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몸의 실존을 배반하는 거짓말일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의 슬픔이나 기쁨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적막에 비하면 그래도 내용이 있지 싶다. (121p, 대문 밖의 황천)

 

 

  - 글을 쓰면서, 연필을 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슴 아프다. 글을 쓸 때, 손은 말을 만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지지도 못한다. 손은 다만 연필을 쥘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가엾은 손은 만질 수 없는 말들을 불러내서 만질 수 없는 세상을 만지려 한다.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은 무참하다. (155p, 인간의 몸과 손)

 

 

  - 아이놈들이 옆집 마당의 꽃핀 매화나무를 매우 부러워해서 우리도 마당에 매화나무를 사다가 심자고 조른다. 꽃은 주인이 따로 없고 눈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 주인인 것이어서, "옆집에 매화가 있으므로 구태여 돈 주고 나무를 사다가 심을 필요가 전혀 없으며, 옆집 마당의 매화는 돈도 안들고 키우는 수고도 안들면서 오히려 눈부시니 얼마나 더 기특한 나무냐"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어도 다 큰 녀석들이 이 쉬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놈들은 나무를 뽑아서 제 집 울타리 안, 제 방 창문 앞에 옮겨 심어 놓기 전에는 꽃핀 매화나무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평안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 아이일 수밖에 없다. 봄날의 이 비린 시간들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다 제쳐놓고서 천지간의 꽃잎을 모조리 휘몰아 사라지는 것이며 모든 꽃은 마침내 인간의 몫이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반찬투정을 하듯이 꽃투정을 하는 이 어린 것들은 수많은 봄을 겪어야 하리라. (212p, 꽃 몸살 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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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가 진정한 아름다움, 여성들의 화장, 그리고 과일을 얼마나 색다르게 표현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책 속에서 나오는 여름 꽃들에 대한 단상은 특히나 너무 표현이 아름다워서,

수국 꽃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미친듯이 써서 날려줬다는. 쓰느라 힘들었지만.

 

(이번 리뷰는 팬심이 가득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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