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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 - 서로 다른 너와 나를 위한 9가지 결혼 심리학
신동인(신디)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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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행복 또는 복잡한 감정


결혼을 하게 되면, 그리고 신혼을 보내고 있다 하면 거의 대부분 행복한 얼굴로 묻는다. "신혼이라 좋지?" 이 말에 항상 웃으면서 좋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저 '좋다'라고 말하기엔 신혼의 감정이란 꽤 복잡하다. 분명 행복하고 설레고 좋은데, 거쳐가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원가족에서의 독립과 분리, 처음 겪는 중대한 결정 (집, 식 관련 계약 등),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 몇십 년간 다르게 자라온 두 사람이 결합해가는 과정 등, 젋은 부부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시기가 바로 신혼이다.


실제로 나는 결혼 직전 메리지 블루를 심하게 겪었다. 메리지 블루는 결혼 전 남녀가 겪는 심리적인 불안, 우울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전 처음 겪는 오묘한 감정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만약 이전의 나였다면 이 감정을 끙끙 앓고 다른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환시켜 내보내거나 꽤 오랫동안 안고 있다가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약 1년가량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랫동안 신랑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나누고 표현하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도 한 결과, 지금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물론 티격태격하는 건 당연히 있지만 중요한 건 서로를 믿고 감정을 나눈다는 것이다.


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국내 최초 온라인 부부 멘탈 케어 플랫폼 '신디 Sindy'를 운영하면서 저자가 쓴 이 책의 초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저는 감히 우리가 결혼을 공부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나는 이 문장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무작정 참고 애써도 해결되지 않는 부부 관계도 분명 존재한다. 만나지 말아야 하는 배우자의 조건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오래 끝까지 행복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결혼을 공부함으로써 관계가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말로 공감한다.


첫 페이지 목차만 살펴봐도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 책 속에는 꽤 상세한 분류를 통해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 지식들이 담겨 있다. 결혼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결혼의 시작과 조건, 갈등과 정서를 다루는 법, 애착 유형, 서로의 상처를 다루는 소통법, 결혼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다룬다. 특히 내가 재밌게 읽은 부분은 우리가 믿는 결혼에 대한 신화 (=환상)와 오해를 다룬 부분, 애착 시스템, 부모와 현명하게 거리 두는 법, 부부가 각자 느끼는 사랑의 언어를 다룬 부분이었다.


중요한 건 '나'를 제대로 아는 것


내 친구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연애를 하면서 내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연애도 마찬가지지만 결혼은 조금 더 가까이 결속된 관계를 통해서 내가 스스로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면들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결국 결혼 과정에서도,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 생각된다. 나의 성장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성격과 사고 패턴, 애착 유형과 같은 것들이 '어려운 상황에 닥칠 때'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그리고 배우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고 다시 어떻게 되돌려 받는지. 「요즘 부부를 위한 신디의 관계 수업」을 통해서 다시금 떠올리고 점검하게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티격태격하면서도 설레는 신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정말로 추천하고 싶어서 진심으로 이 글을 썼다. 


"상처 없는 사람 없고 갈등 없는 부부 없습니다. 상처와 불화야말로 결혼의 필수품이죠. 혼수나 예단은 생략할 수 있지만 상처와 불화는 생략할 수 없어요.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부부가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크루즈 여행까진 아니더라도 편안하게 경치 정도는 구경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힘들게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 결혼은 그런 겁니다. (서문, 12쪽)"


상처도, 불화도 당연히 필수라고, 결혼은 그런 것이라고 솔직하게 전하는 작가의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부부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는 크고 작은 일이 언제든 다가올 것이다. 가끔가다 이 책의 내용들을 다시금 펼쳐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보다 성숙한 관계를 위하여 계속해서 노력해 보려 한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무찔러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함께 힘을 합쳐 불화라는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부가 한편이 되어 불화라는 공공의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불화를 겪는 부부들이 빠져들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잘못된 상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내 배우자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이라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 높았다면, 돈이 더 많았다면 나는 정말 더 행복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건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착각일 뿐이에요. - P108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이에 따른 정서 반응을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서 반응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강력한 신호거든요. 지속적으로 그런 정서와 느낌을 받는다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정서 반응에 짓눌려 살지 말고 이를 삶에 이용하는 겁니다. 좀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정서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삶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정서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때 부부 불화를 한결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 P127

여러분은 배우자와 서로 이런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있나요? 여러분은 배우자에게 이런 든든한 땅이 되어주고 있나요? "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 한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입니다. 이 대사에 애착이론을 적용해보면 큰 사랑은 서로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불안과 외로움은 바로 이 안전기지가 되어줄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 P145

강하게 결합된 커플일수록 서로 떨어져 있어도 괜찮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과 결혼이 나를 구속하고 내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건강하게 의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P171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언어로 상대에게 이야기하고 있나요? 부부가 가진 사랑의 언어가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와, 역시 맛있네! 당신 요리가 최고야."

남편의 칭찬에 아내는 이렇게 말하죠.

"맘에도 없는 립 서비스는 됐고, 고마우면 이따 빨래나 해."

‘인정하는 말‘이 사랑의 언어인 남편은 자기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봉사‘가 사랑의 언어인 아내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함으로써 남편의 접근을 차단하는 일이 반복되면 남편은 점점 사랑의 언어를 표현하기를 꺼리게 됩니다. 결국 서로 친밀감을 쌓는 길은 요원해지죠. 누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사랑의 언어가 다른 것뿐입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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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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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이 덮인 책은 또다시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이끈다. 매개체는 때로 작가의 이름, 출판사, 혹은 인용된 문장, 그림 등이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하나가 끝없는 독서를 만든다. 한 권의 책을 인상 깊게 끝맺은 사람은 또 다른 책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경우, 만약 꼼꼼히 읽게만 된다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몽테뉴’의 『수상록』 을 궁금해하며 기웃거리게 될 것이다.

『위로하는 정신』 은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자신이 흠모하는 작가인 ‘몽테뉴’의 생애에 대하여 정리한 책이다. “지금 몽테뉴를 큰 기쁨으로 자주 읽고 있거니와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껴요. 또 하나의 에라스무스. 진정 위로하는 정신.(편집 후기)” 츠바이크가 아내에게 써보냈다는 글에 이러한 문장이 있듯, 책 속에는 그가 전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온다. 단순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여 저자가 세심하게 살펴 서술한 기록이기에, 비록 어느 정도 주관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몽테뉴를 향한 그의 사심은 독자에게 깊이 전해져 오고, 독자 또한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인문주의에서 야만성으로의 추락을—우리가 오늘날 다시 겪고 있는 것 같은 인류의 광증의 폭발을—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 흔들림 없는 정신의 각성과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인해 영혼이 깊은 충격을 받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몽테뉴의 삶에서 근원적인 비극이었다. 그는 평화와 이성, 온화함, 관용 등 자신이 영혼을 다 바쳐 맹세한 고결한 정신적 힘들이 자기 세계, 자기 나라에서 효력을 내는 것을 평생 단 한순간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시대를 바라보았을 때나 마지막으로 시대를 바라보았을 때에도 그는 (오늘 우리가 그러하듯이) 두려움에 차서, 자신의 조국과 인류를 치욕스럽게 하는 증오의 생지옥에서 고개를 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광증의 시대를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던 츠바이크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이 『위로하는 정신』이라는 점은 단순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실제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는 종교 전쟁으로 너무도 복잡하고 잔혹했던 시기였다. 젊은 시절 공직, 궁정에 몸을 담았고 아버지의 요구를 통해 일하기도 했으나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힘이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격랑의 시대, 몽테뉴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에 집중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탑으로 향하며 세상과의 단절을 꾀했다.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밀한 ‘자아’를 지키길 원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위대한 작품은 그곳에서 나왔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 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체념과 물러섬으로 시대에 대항했던 몽테뉴. 그 시대 몽테뉴와 같은 삶이 유일한 해답이었다고 말할 순 없으나, 자신의 자유를 추구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유 또한 존중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내밀한 자아와의 싸움을 계속해갔던 몽테뉴의 삶은 오늘날에도 빛나는 교훈이 되지 않을까.

 

 

 

 

자유롭고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사색은 우리 세대처럼 운명에 의해 폭포 같은 격동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전쟁, 폭력, 전제적 이데올로기가 목숨을 위협하고, 한 사람의 삶에서도 가장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뒤흔들린 영혼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야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함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가운데서 정신적·도덕적 독립을 흠 없이 지키는 일보다 세상에 더 어렵고도 심각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봐야 비로소,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이 온갖 위협과 위험에 맞서, 서로 다투는 당파들의 광기 어린 분노 한가운데서 어떻게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이런 야만성 한가운데서 어떻게 마음속 휴머니즘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의지에 반해 국가나 교회나 정치가 나를 몰아가는 전제적인 요구들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말할 때나 행동할 때에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도록 어떻게 나 자신을 지킬 수가 있는가? 나의 자아, 이 작은 구석에 우주 전체를 반영하는 유일무이한 나의 자아가 어떻게 하면, 외부에서 정해주는 척도를 따르는 태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타인의 광증이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할 위험에서 어떻게 나의 본래의 영혼과 오직 내게만 속한 물질인 내 몸, 내 건강, 내 신경, 내 생각, 내 느낌을 지킬 수 있을까?

글쓰기와 메모는 그냥 부산물이고 앙금일 뿐이다—오줌에 들어 있는 알갱이요, 조개 속에 들어 있는 진주라고 악의적으로 말하고 싶다. 진짜 생산물은 삶이고, 이런 메모들은 삶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며 쓰레기일 뿐이다. "나의 소명과 나의 예술은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술작품 대 사진의 관계,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문필가 몽테뉴는 인간 몽테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 몽테뉴를 보면서 그의 글쓰기 기술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삶의 기술이 얼마나 하찮은지 수없이 놀라게 된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 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내 영혼의 바탕까지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어떤 사람을 해칠 능력이 없다는 것, 복수나 질투를 하지 못하며 공공연히 분노를 야기할 줄 모른다는 것, 소문을 퍼뜨리거나 불안을 야기하지 못한다는 것, 내가 한 말을 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가 다른 모두에게 그랬듯이 내게도 그럴 기회를 주었지만, 나는 다른 프랑스 사람의 소유물이나 재산을 움켜쥠으로써 손을 더럽힌 적이 없고, 전쟁이 났을 때나 평화 시에 오직 내가 소유한 것만으로 살았다. 또한 누군가에게 적당한 보수를 주지 않은 채 나를 위해 일을 하도록 한 적이 없다. …… 나는 나를 심판할 나 자신의 재판소와 나의 법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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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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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특별법정 재판이 열렸다.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에 가담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잠적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었다. 악명 높은 전범의 재판 소식에 전 세계가 들썩였고, 독일의 철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한나 아렌트’ 또한 이 재판을 참관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재판에서, 무엇보다도 정의로워야 할 이 장소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만다.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전범의 모습은 너무나 평범했다. 전문가들이 판정한 기록에 따라서도 피고는 전혀 위험하거나 타락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죄의 ‘의도’에 관해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는 유대인에게 특별히 악감정이 있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에게 결함이 있었다면, 그가 체면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상투어’를 통해 스스로를 세뇌하는 데 매우 익숙했던 점이었다. 이러한 성격 결함은 그가 당시의 현실에 아주 잘 적응하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자연스럽게 자기기만을 반복했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유대인 강제 이주 및 학살의 중책을 맡았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의 학살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사들이 그를 향해 양심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일은 전혀 효과가 있지 않았다. 저자인 한나 아렌트는 의문을 가진다. 그는 아이히만의 재판에 내려진 반론 등을 통해서, 이러한 재판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이 재판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법한 대안을 제시한다. 예루살렘 재판은 분명 이점도 있었으며 크나큰 함정도 존재한 재판이었다. 아렌트는 전례 없는, 너무나도 예외적인 재판의 성격이 판사들을 혼란케 한 점은 인정하나, ‘차별과 추방, 대량학살’의 대상을 유대인으로 한정하며 처벌에 한계를 씌우지 않고, 온 인류를 향한 범죄로서 효과적인 국제 재판이 이루어졌다면 하는 아쉬움을 이 책에 남기고 있다. 어떤 한 인종을 ‘청소’하려 했던 나치의 어마어마한 악행은 오직 전범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으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에게 내려진 유죄 판결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데 이용되거나 잘못된 방향의 정당화, 어떤 특정한 인종의 복수가 아니라, 오직 인류가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의를 내세워야 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 - 판사의 입을 빌린 가상의 텍스트처럼, 아이히만의 재판이 우리가 진정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방식으로 전해졌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은 출판 전부터 논쟁의 중심에 섰다. 사람들은 저자가 전혀 생각조차 안한 주제들로 왈가왈부했다. ‘유대인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는가’라는 잔인한 질문이나, 유대인과 유대인 지도층을 동일시하는 문제, 독일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한 논쟁들이 벌어졌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복잡한 문제 속에서 뒤섞인 도덕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점으로 드러났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에 난색을 표하는 듯 보인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왜 그것이 독일인이었는가? 왜 그것이 유대인이었는가? 전체주의 통치의 본질은 무엇인가?(389쪽)”였던 것 같다. 그는 뒤이어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독일인 일반’-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 또는 근대사 전체, 또는 인간과 원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재판이 오직 ‘정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이루어졌어야 했다고 다시금 강조한다.

‘분명한 양심’이란 무엇인가? 히틀러에게 반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독일의 패망 (예를 들면 ‘승리의 가능성이 없는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명백한 범죄(171쪽)’라는 말과 관련한) 에 관련하여 근심에 쌓였던 것뿐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걱정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양심과, 타인의 고통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작용하는 양심은 그 성격이 명백하게 다른 것이 아닌가. 당시 국가의 범죄는 현실 정치의 긴박성에 따라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재판 당시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하는 가정을 스스로에게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꼬집는 아렌트의 말은 조금 섬뜩하게 들린다. 권력(또는 특정한 소수의)의 목소리가 세지면 그 앞에 선 인간은 너무도 나약해진다.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우리는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권력의 명령, 또는 예외적인 상황에 놓였던 우리의 병사들은 아이히만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 여긴다.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는 아렌트의 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신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끊임없이 연습하듯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만일 그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진다면, 이는 오늘의 독일을 위해서, 단지 독일의 해외에서의 위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혼란스러운 내면적 조건을 위해서도 실질적으로 아주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며 모든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324쪽)”

이 책의 목적과 결론을 모두 관통하는 문장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하는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때로 누군가가 쓸데없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거나 커다란 권력에 무모하게 몸을 부딪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다. 이전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포의 현실 앞에서 어떤 사람들(국민들)은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 나치에 저항했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325쪽)” 아렌트의 말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이유도 이 발췌와 연결된다. 기억하고, 기억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 우리 안의 악을 자라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것은 불성실의 교과서적인 예, 즉 터무니없는 어리석음과 허위의 자기기만이 결합한 전형적인 예인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의 예일 뿐인가? 그런 사람이란 자신의 범죄가 현실의 한 부분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대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는 평범한 범죄자의 경우와 다르다. 평범한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집단이라는 좁은 한게 내에서만 범죄 없는 현실로부터 효과적으로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 P109

문제는 양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게 되는 동물적인 동정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힘러가 사용한 책략은 아주 단순했고 또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러한 본능을 뒤집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P174

이 문제에 관한 슬픈, 그리고 아주 불편한 진리는,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종전 무렵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 것은 그의 광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마치 그 양심이 3년 전에는 그를 잠시 동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 것처럼 말이다. - P223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 P349

물론 그들은 만일 아이히만이 실제로 괴물이었더라면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재판은 중지되어버렸거나 또는 최소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을지라도, 실제로 아이히만이 괴물이라고 믿는 것은 많은 위로를 줄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물론 푸른 수염의 사나이를 무대에 올려놓음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또 전 세계로부터 편지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법률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잔혹한 일들을 모두 모아놓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 P37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집단적 죄나 집단적 무죄 같은 것은 없다는 점에, 그리고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어느 한 개인은 유죄이거나 무죄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집단의 개별 구성원이 한 일과는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는 정치적 책임과 같은 것이 있어서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될 수도 또 형사재판에 세울 수도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부는 그의 선임 정부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으며,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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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공부의 기초 -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간단한 틀
앨런 존슨 지음, 이솔 옮김 / 유유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을 인식하고부터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 또한 누군가를 습관적으로 차별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점검’이라고 하기엔 조금 가벼운 마음이지 않나 싶다. 엉겁결에 누군가에게 차별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나쁜 말을 내뱉고는 잠깐 주춤하는 식이다. 직접적으로 당사자에게 피해를 주진 않지만 나는 종종 부끄럽고 무서워진다. 아마도 이런 습관들이 다 없어지려면 스스로 지속적인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보다 성숙한 태도를 갖기 위해서 관련 책들을 많이 찾아보고 있다. <사회학 공부의 기초>는 그중 많은 도움을 받은 책이다. 제목과 부제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간단한 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각 개개인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으며 이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며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의미 있는 행동과 가치는 선과 악이 아니라 인간과 삶의 본질, 도덕에 따른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보다 커다란 것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생각은 종종 무시되고, 많은 사회적 현상들이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이 확고하게 유지된다. 두 시각이 충돌하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이 발생한다. 사회적 계급과 차별, 그로 인한 갈등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다. 책 속에선 다양한 상황에 대하여 설명한다. 왜 사회적 현상을 비난하면 누군가는 개인적 비난으로 받아들여 ‘버럭’ 하곤 하는지. 왜 사회적 약자 ― 여성, 흑인, 라틴아메리카인, 동성애자, 장애인, 노동자, 그 밖의 하층계급에 속한 이들이 지속적인 차별에 강하게 맞서지 못하는지. 왜 차별적 상황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동조하거나 침묵하는지.

모든 시스템에서 과반수의 사람들은 (종종 나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최소 저항’의 길을 택한다. 그것은 이 시스템을 의식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지금과 똑같은 사회적 삶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일이 아니기에, 일단은 나의 안위가 우선이기에, 때때로 역할 갈등이 일어나서 택하게 되는 최소 저항의 방법이다. 그러나 저자는 경고한다. “세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곳이 될 수 있는지 상상해 보라.”

그리고 덧붙인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특권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편히 살 수는 없다.” 백인, 미국인, 학자, 비장애인, 남성…… 살아가며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을 법한 저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인지한 채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조금 더 깊이 있고 너그러운 태도를 갖도록 독자를 인도한다. 자신의 자아와 몸과 지위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불완전한 세계를 상기하는 저자의 모습은 꽤 감동적이다.

우리는 늘 선택의 상황에 놓여 있다. 직접적으로 문제에 관련되어 있지 않는 한, 한 사람의 선택이 사회적 현상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누군가를 쉽게 파멸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선택이 ‘양식화된 관습과 제도 혹은 고정관념’을 파괴시키는 ‘시작’이 될 수는 있다. 모든 변화에 참여할 필요도 없고, 모든 시스템에서 최대의 저항을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작은 행위 (이를테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도 그저 독립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조금 나아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차이가 단지 다양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이는 누구는 포섭하면서 누구는 배제하기 위한, 누구에게는 더 주면서 누구에게는 덜 주기 위한, 누구는 존경하면서 누구는 인간이 아니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취급하기 위한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차이는 특권의 근거가 되고, 이 특권의 범위는 모두가 가져 마땅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에 관한 문제부터 생사의 결정이라는 극단적인 문제에까지 이른다.

내가 나보다 큰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사회학 실천을 통해 비난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든 것도 아니고,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내 탓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학은 세상에 어떤 식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선택이 왜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백인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특권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편히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길이 아니다. 길은 우리가 그 길에 대해 알고 있는지 혹은 그 길이 우리가 가장 가고 싶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지와 무관하게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 존재한다.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성적으로 괴롭히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보면 의미 없는 사실이다. 그 여성이 ‘성인 남성’을 보며 연상하는 힘과 위협의 이미지는 우리 둘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남성지배적이고 남성지향적이며 남성중심적인 세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남성이란 없다. 따라서 나의 위험성을 알려 주는 지표는 없지만 내가 위험하지 않은 사람임을 보장해 주는 지표도 전혀 없다.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입장에 있는 그 여성 역시 마찬가지다.

환경을 ‘지키려’ 할 때마저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오만한 종’의 유혹에 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현상은 나를 포함한 아주 많은 인류가 근심하고 있는 환경 ‘훼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이런 종류의 오만함 때문에 인간에게는 편의대로 지구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게 되고, 이상적인 자연 상태로 보존되어야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의할 자격 또한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각각의 경우에 인간은 인간적인 가치를 비인간적인 세계에 끼워 맞추면서도 그 오류를 눈치채지 못한다.

한 유명인의 성폭력, 한 정치인의 비상식적인 언행과 같은 일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양식화된 관습과 제도가 이러한 행동을 승인하고 지속시킨다. 많은 이들은 방관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권력 집단에 편입되거나, 최소한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많은 것들이 점차 악화되며,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진다. 이를테면 성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듣고 벌떡 일어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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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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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라는 단어를 보면 흔히 타인의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정신학적 용어에 따른 애도의 의미는 ‘모든 의미 있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뜻한다고 한다. 애도의 대상과 방향은 고정되지 않고, 오로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회복하는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임종 3일 전까지 꼬박꼬박 써 내려갔던 일기를 모은 이 책이 단순히 ‘투병일기’가 아니라 ‘애도일기’인 것은 그가 병상에 누워 애도하며, 삶을 긍정하고 투쟁한 기록이 꼼꼼히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이 애도일기라는 부제에는 다른 암시도 있다. 그가 번역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이가 김진영 철학자였다. 그 아름다운 글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침의 피아노> 속에서 그는 번역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현재의 감회를 전한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과 괴로움이다.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표현했던 당시 화자에 비해, 자신의 고통을 걱정하는 이기심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현존하는 자신은 지극히 행복하고,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병환과 죽음 앞에서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순간 눈물이 솟구칠 때도 있으나 저자는 매일 아침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오랜 시간 타자들 앞에 서 있었던 자신의 존재, 말, 시간, 사랑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어느 하나 무의미한 순간들은 없었다.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투쟁했던 한 철학자의 삶이 이 책에 모두 들어 있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텍스트를 둘러싼 여백에 포함된 한숨과 긴장, 슬픔과 고독의 시간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다면.

처음에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애도일기’라는 부제와 ‘아침의 피아노’라는 제목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내 좁은 식견으로는 아침보다 ‘저녁’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예상이 틀렸다. 이 책은 정말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아침이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말하고,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힘차게 걸어나갔던, 한 철학자의 내밀한 기록이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나 또한 나의 하류에 도착했다. 급류를 만난 듯 너무 갑작이어서 놀랍지만 생각하면 어차피 도달할 곳이다. 적어도 지금가지 나의 하류는 밤비 지나간 아침처럼 고요하고 무사하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공부하고 돌아오는 나에게 큰 서재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셨다. 여기가 그 서재가 아닐까. 나는 여기서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나와 나의 다정한 사람들,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깊이 사랑했던 세상에 대해서 나만이 쓸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내가 하류의 서재에 도착한 이유가 아닐까.

방금 아이가 묻던 말이 생각난다. 신기해 빗방울은 왜 동그랄까. 나는 대답했었다. 바보야 물이 무거우니까 떨어지면서 아래로 맺히는 거지. 그것도 몰라? 누가 그걸 몰라. 그래도 물방울이 신기해. 너무 예쁘잖아…… 문득 차라투스트라의 한 문장 :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 온 세상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무르익은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었다. 니체는 그 순간을 ‘조용한 시간 Der stille Stunde’이라고 불렀다. 조용한 시간 - 그건 또한 거대한 고독의 순간이다. 사람은 이 난숙한 무화과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가.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군포 병원으로 면역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 길. 꽉 막힌 고속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강렬한 그리움, 아니 그리움이 아니다. 살아서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욕망의 충동.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고 싶은, 아니 품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그렇게 어머니의 몸속을, 그 몸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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