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 -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기 위하여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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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한 리듬으로 살다가 온몸으로 편안하게 늘어질 수 있는 시간이 오면 마침내 긴 호흡을 들이쉴 수 있다.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급함 없이 어딘가로 정처 없이 걸을 수 있는 건, 온종일 시간이 비워진 주말의 특권이다. 계산적으로 짧게 쪼개진 일상의 호흡이 조금 느려진다. 시야 또한 넓어져 미처 보지 못했던 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잿빛 안개가 씌워져 있던 산과 건물은 어제보다 오늘 더 또렷해졌다. 재빠르게 날지 않고 종종거리며 걷는 참새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천의 흐르는 물속에서 물고기를 낚아채는 새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2019년 1월, 시인의 타계 소식을 듣고 책장 속에 꽂혀 있던 두 권의 책을 다시금 꺼내 보았다. 국내에 출간된 책은 단 두 권 뿐이라 아쉬워하다가, 연말이 돼서야 출간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기 위하여’라는 담백한 부제는 작가의 이름에 퍽 잘 어울린다. 그러면서도 그가 말하는 ‘시’는 조금 다른 면모로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세상의 수많은 시인들에게 ‘삶=시’라는 명제는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메리 올리버의 삶엔 다른 하나가 더해진다. 삶과 시, 그리고 자연.

때로는 광각렌즈에 투영된 장면처럼 넓은 우주를 바라보면서도, 때로는 작고 작은, 좁디좁은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금 뚫어지게 바라보며 사랑을 느끼니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무한대로 넓어진다. 시인은 자연을 위대한 조언자로 칭하며 구름과 바다, 돌고래, 지렁이의 움직임, 나방의 날개와 같은 것들을 본다. 수많은 종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자연의 생물들이 사냥을 하고 굶주리고 잡아먹히는, 그렇게 만들어진 생태계를 관찰한다. 어쩌면 소박하지만 어쩌면 너무나도 위대한 것들을 보며 생각한다. “그리하여 처음에 세상이 온다. 그다음엔 문학, 다음으로 연필이 천 마일의 종이 위를 움직여 해낼 수 있는(어쩌면, 가끔) 것은 무엇인가.(52쪽)” 누군가에겐 외면을 당하고 짓밟히거나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시와 자연은 그에게 같은 의미인 것 같다.

“인간과 호랑이, 호랑이와 참나리가 다르면서도 얼마나 흡사한지 보라! 우리 모두 몇 번의 여름, 여기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가 끌어모을 수 있는 육체적, 지적 능란함으로 우리 상태를 개선시키고 그런 뒤에 조용히 풀밭으로, 죽음의 초록 구름으로 물러나지 않는가? 그 무엇이 솟아나면서, 사라져가면서 귀엽거나 매력적일 수 있는가? 삶은 나이아가라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자매가 될 것이다. 나는 풀 위로 머리를 내민 백합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내 심장의 줄기로부터 즐거운 인사를 보낸다. 우리는 한 나라, 한 가정에 살고 있으며 한 램프에서 불타오른다. 모두가 야성적이고, 용감하고, 경이롭다. 우리는 아무도 귀엽지 않다.” (118쪽)

귀엽다는 말은 오락거리로 대체되거나 위엄을 잃고 누군가에 의해 소유될 수 있다는 시인의 우려 섞인 말을 들으며,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짓밟힌 것들을 생각한다. 오랜 세월을 굳건히 지켜낸 강인한 모든 존재들을, 우리는 너무 손쉽게 망가뜨리고 있진 않은지.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금세 바쁜 일상 속에 흐려지곤 한다. 이렇듯 모순된 모습을 보이는 인간들 속에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는 시인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고 존재했다는 것은 또한 너무나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시인처럼 살지 못해서, 나는 가끔씩 그의 책을 넘기며 마음을 조금씩 가다듬는다. 작은 하나라도 지켜보자는 다짐으로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본다.

삶은 더 이상 기쁨과 용맹 속에서 발현되지 않고, 오직 세속적 재물 축적의 도구로만 이용된다. 시가 그런 사람들에게 의미를 지니려면, 그들이 먼저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물질에 구속된 사리추구적 삶에서 벗어나 나무들을 향해, 폭포들을 향해 걸어야 한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너무 적은 것은, 이 겁에 질리고 돈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시의 영향력이 너무도 미미한 것은, 시의 잘못이 아니다. 결국 시는 기적이 아니다. 개인적 순간들을 형식화(의식화)하여 그 순간들의 초월적 효과를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시는 우리 종의 노래다. "세상의 종말은 영원히 오고 있지 않는가?" - P42

첫 번째 축복인 자연계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자연은 아름다움과 흥미로움, 신비로 가득했고 행운과 불운을 있었지만 남용은 없었다. 두 번재 축복인 문학의 세계는 형식의 즐거움을 준 것 외에도 감정이입(키츠가 부정적 능력이라고 부른 것의 첫 단계)이라는 자양분을 제공했고, 나는 그걸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 안에서 휴식을 취했다. 기꺼이, 기쁘게 모든 것―다른 사람들, 나무들, 구름들―의 대역을 맡았다. 그로 인해 다름 속에 서게 되면서, 세상의 다름은 혼란의 해독제임을 깨달았다. 바깥의 들판이나 책 속 깊은 곳에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가, 최악의 아픔을 겪은 마음에 고귀함을 되찾아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 P45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을 그리는 것과도 같다. 어떤 별들이 누락되거나, 잘못된 자리에 놓이거나, 잘못 해석되거나,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 나는 밀레이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반 바구니쯤 되는 양일까? 누구든 타인의 삶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을가? 우리는 그러기를 희망해야 한다. 하지만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무서운 일이다. 밤이 어둡다. 나는 가공할 힘을 지닌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한밤중의 전화벨 소리, 이해되거나 오해될 열정적인 말들을 듣는다. 나는 심장이 몸의 문간에서 긴 돌계단을 내려가 홀로 이 세상에서 나가는 걸 느낀다. - P115

‘귀엽다’ ‘매력적이다’ ‘사랑스럽다’ 같은 말들은 잘못됐다. 그런 식으로 지각되는 것들은 위엄과 권위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귀여운 것은 오락거리로 대체 가능하다. 말들은 우리를 이끌고 우리는 따라간다. 귀여운 것은 조그마하고, 무력하고, 포획할 수 있고, 길들일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 그 모든 게 실수다. 우리 발치에는 양치식물들이 있다. 그것들은 인간 종족이 어디에도 없고 전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던 때에 최초의 이름 없는,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바다의 무시무시한 여울 속에서 거칠고 결연하게 자라났다. 우리는 그것들을 예쁘고, 섬세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우리의 정원으로 가져온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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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의 냄새
박윤선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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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이면 어릴 적 살던 동네가 보였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나치던 고가 밑 도로, 동생을 데리러 가던 어린이집, 초등학교로 가는 표지판들을 깊숙이 살펴보지 않고 늘 스쳐가곤 했다. 몇 미터만 가면 그때를 추억할 수 있는 풍경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애써 발길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히 느껴지는 노스탤지어와 웃음 지을 수 있는 추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 오랜 시간 동안 직접 가까이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내가 옛날 동네에 들어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어, 저기다. 한번 가볼까? 오랜 추억을 함께 갖고 있는 언니와 즉흥적으로 핸들을 돌렸던 것을 시작으로, 어린 시절에 걷던 골목을 자동차의 속도로 스쳐갔다. 너무나 많이 변했고, 너무나 그대로였다. 셀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을 정리하기엔 버거웠다. 감정뿐일까. 그곳의 냄새도 기억한다. 바람도, 공기도. 그러나 완전히 행복한 기억만 떠오르지 않는다. 좋고 나쁜 분위기가 언뜻언뜻 떠오른다.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머뭇거리게 되는 어린 시절의 냄새는 시원하면서도 비릿한 수영장의 냄새와 닮았다. 시퍼런 책표지에 마음이 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민선의 하루를 그린 만화. 책은 ‘수영장’의 차갑고 비릿한 냄새로부터 시작된다. 부모님의 맞벌이, 늘 자신보다 뛰어났던 친언니, 친구들의 은근한 놀림과 조소,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을 보내는 민선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불가능할 듯한 익사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39쪽)
“분명히 다들 나처럼 불편해하면서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127쪽)

조금 불쾌한 일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듯하지만 주인공 민선이 툭 던지는 말속에는 뼈가 숨어 있다. 어린이였다면 알지 못했을 뼈의 존재도, 어른이 된 내겐 분명하게 보인다.


민선의 하루는 책의 마지막, 세월을 건너뛴다. 동네의 작은 수영장은 어느새 큰 공간으로 확대된다. ‘가능한 손끝으로 입수하고, 가능한 오래, 물 안에서 머무른다.’ 차가운 물은 금세 적응된다. 물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그 차가움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 차가워지고 식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수많은 민선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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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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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스스로의 일에 변덕을 부리는 순간들을 생각한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것, 눈물 나게 힘들다가도 이 정도론 더 버틸 수 있다고 위안하는 것, 혼자가 좋다고 하지만 정말 혼자라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 누군가를 싫어했다가도 못이긴 척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 금세 미소를 띠고 살아가는 것. 이랬다저랬다 수많은 일들을 변덕스럽게 뒤집는 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삶을 버텨나가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꼭 붙잡고 삶의 흐름과 관성을 유지해나가는 것과 같이.

박소란의 몇몇 시를 읽고 감동한 적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시였고, 하나의 시를 읽는 것과 시인의 궤적을 품고 있는 한 권의 시집을 통째로 읽는 것은 당연히 결이 다른 얘기였기에 나는 또 경험해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 초반부터 조금은 두근대는 마음이었다가, 점점 조금씩 벅차올랐다. ‘괜찮다’는 말 가운데서 머뭇거리고 변덕을 부리던 일들이 떠올랐고,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시인의 말에 살짝 울컥하기도.

심야 식당의 우동이나 퇴근길에 산 상추 한 봉지, 방바닥에 깐 전기장판과 같이 정감 가는 소재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끔은 작은 공간에서 혼자 무언가에 감탄하거나 위안을 받고, 가끔은 주저앉아 맥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가끔은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이 속에 나는 있다 / 지금은 안심할 수 있다 (108쪽, <천변 풍경>)고 말하는 시인의 일상은 익숙한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가. 어쩌면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견딜 수 있다거나 잊으면 그만이라고 다독이거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살아있다고 매번 다짐하는 시인의 말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곤 하는 것.

“벽돌에게도 밤은 있고 / 또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아픈 기도의 문장을 읊조리기도 할테지만 / 그것은 단지 벽돌의 일 / 당신과는 무관한 일” (114쪽, <이 단단한>)

시집을 읽으면서 자꾸 이 시를 보내주고 싶은 사람들 생각이 났다. 책을 자주 읽지 않아도, 시를 어색하거나 낯설어하든 간에 찬찬히 읽어내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것 같아서. '한 사람이 돌진하여 슬픔을 쏟아내고,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그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는 (65쪽, <감상>)' 일을, 나도 조심스럽게 따라 해보고 싶다고 나지막이 다짐해보는 밤이다.

 

 

 

 

 

 


● 18쪽, <비닐봉지>

퇴근길에 김밥 한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의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 20쪽, <심야 식당>

모르겠어요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 86쪽, <벽>

언제부터

벽은 거기에 있었나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벽의 아름다운 탄생에 대해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 93쪽, <모르는 사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 100쪽,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잃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

갖지 않고도 산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나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핀이 아니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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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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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간다. 세월의 흔적이 약간은 느껴지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돌벽과 촌스럽고 정겨운 초록색의 바닥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은 옥상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수많은 불빛이 뒤섞여 새로운 색을 만든다. 떠들썩한 소리 속에 고요한 옥상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분명 거리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이런 옥상의 풍경을, 귀엽고 키치한 그림 속에 그대로 담은 이 책의 표지가 퍽 마음에 든다. 딱 정세랑의 작품 이미지 그대로였으니까. 광각으로 담은 듯한 세상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결코 무거워지지 않는 재기발랄한 정세랑의 세계같다.


초반에 나왔던 <웨딩드레스 44>는 표현력이 재미있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지만 묘하게 장면을 읽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의 축소판 같기도 했다. 단 하나의 웨딩드레스가 수명을 다하기까지 거쳐갔던 44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은 작품의 주인공이라 하기엔 너무나 많은 인원을 내세웠지만 뒤죽박죽 어지럽지 않았다. 이유도 상황도 제각각인 그들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하고, 그 시선 속에는 각자 나름의 행복과 불행이 모두 들어 있었으니까.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을 가늠케 하는 단편들도 이어졌다. 오컬트와 뱀파이어, 판타지와 SF……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독특한 장면들 속에서,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와 상징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격한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특별한 연대를 그린 <옥상에서 만나요>, 뱀파이어가 된 여자의 이야기 <영원히 77 사이즈>, 쿠키 귀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 <해피 쿠키 이어> 같은 단편들은 정세랑 작가여서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작가로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풀어낸 느낌이랄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작가의 역량인데 이 자유로움이 어색하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단편을 꼽자면, 돌연사한 사람들의 데이터를 모아 네트워크를 만드는 <보늬>와, 이혼을 앞두고 집안의 살림들을 친구들에게 되파는 <이혼 세일>이 기억에 남는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선호하는 성향상, 이런 단편들이 조금 더 깊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매력적인 소설들이 가득했다.


표면적으론 독특한 배경과 장르로 작가만의 개성을 보여주던 단편들이었으나, 파고들어가면 사람 하나하나의 관계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시선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작품들 속 한 인물, 한 인물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입해보고 있었다. 과거에 만났던 이들, 지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들, 미래에, 내 눈 속에 담게 된 이들, 혹은 나의 모습들. 그리고 다정하게 불리는 이름들.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상쾌한 소설들이어서 불행을 이야기해도 전혀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 33쪽, <웨딩드레스 44>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안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평안하게 끝까지 잘 사는 사람들도 아주 없진 않잖아?"

"그런 경우라 해도 평균수명을 생각해서 일곱살쯤 어린 남자를 사랑할걸."

여자는 푸념했고,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간 어두운 생각 좀 하지 마."

남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워. 사랑은 어두워. 가족이 된다는 건 어두워. 어두운 면은 항상 있어. 아이를 낳으면 설마 그 아이의 죽음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누운 채로 늘어날 두려움을 헤아려보았다.

● 43쪽, <효진>

적의에 대해 생각해. 적의에 오래 노출되고도 괜찮은 사람은 여기든 거기든 없을 거야. 그 나쁜 입자들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 비슷한 게 있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간편한 에어샤워 같은 것.

울면서 만든 베리타르트의 맛을 두고 컴플레인이 걸려오진 않았어.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 133쪽, <보늬>

유전자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의 심장이 너무 지쳐버렸나. 셋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혼자서 고민하기도 하다가 어떤 날은 아예 고민하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일정 퍼센트의 어린 개구리들도 그냥 죽는지 모른다. 일정 퍼센트의 낙타들도, 박쥐들도, 악어들도, 문어들도. 우리가 인간이라서 자연스러운 도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불며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 있었다.

언니는 도태된 것일까. 종이 가만히 버리고 가는 일부였을까. 달팽이 진액처럼 뒤에 남았나.

● 216쪽, <이혼 세일>

들을 때는 별 도움 안되는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그후 지원은 이상하게 이재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고정되지 않았어, 고정되지 않았어, 하고 주문처럼 되풀이했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 양육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에는 ‘보기 드물게‘ 쪽에 방점을 두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어떤 날에는 ‘일관적인 양육자‘ 쪽에 방점을 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랬기에 지원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맡기고 이재의 이혼 세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서 무언가 근사한 말을 돌려줘야 했다. 주문 같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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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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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과 친하진 않지만 매번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독특한 소재를 참 다양하게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조금 더 열려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인지 더욱 자유로운 느낌. 이 소설도 상당히 특이합니다. 보통 ‘사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죽음의 의미 때문인지 어둡고 음산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요. 책 속에서 그런 이미지는 완전히 반전됩니다. ‘사신’에 ‘아르바이트’라는 말을 붙여서 귀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사신 아르바이트라니, 상상을 해봐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요.

소설 속 내용에 따르면 ‘사신’은 ‘미련이 남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사자’를 저세상으로 보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사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벽하게 후련한 죽음보다는 미련이 남는 죽음이 세상엔 더 많을 테니까요. 미련을 품고 죽은 사람들 중 드물게 누군가가 사자로 탄생하게 되면 세상은 ‘추가시간’이란 이름의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합니다. 이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은 오직 사신만 기억할 수 있고, 곧 다시 찾아올 죽음 앞에서 미련을 떨치고 떠나기 위해 사자는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소설은 막대한 빚을 얻고 꿈을 잃은 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친구가 다가와 사신 아르바이트를 제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쥐꼬리만한 급여에도 불구하고 이 사신 아르바이트를 수락한 건 근무기간을 채우면 소망 하나를 들어준다는 특별한 보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강조한 친구의 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생각지 못한 작은 보상들을 층층이 쌓아 갑니다.

행복은 뭘까. 먼 기억 속 누군가가 물었다.

이제는 안다. 지금이 행복함을 아는 게 행복임을.

잃기 전에 깨닫는 것.

잃었더라도 행복했음을 기억하는 것.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기억해낼 수 있는 것. (335쪽)

목적이 분명한 소설입니다. ‘사신’의 일이 오로지 사람들의 행복만을 빌어주기 위해 생겼듯, 이 책 또한 사람들의 행복과 희망, 감동을 위해 쓰인 듯 보입니다. 주인공을 포함한 소설 속 인물들이 비밀을 풀어나가고 성장해나가는 모습과, 중간중간 행복에 관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힐링 소설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건 특별한 소재에 비해 분량을 채우는 대화들이 조금 빈약하게 느껴졌다는 점이지요. 꽉 채워지지 않고 분위기를 타고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삶을 사랑하는 작가의 메시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잃었더라도 행복했음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계속해서 오물오물 반복할 것 같습니다.

 

● 55쪽,

"어, 그래."

오늘 밤은 여느 때의 ‘또 보자’가 아니었다. 왜일까.

혼자 걷는 밤길은 무더웠다. 구름에 가렸는지 방금 전까지 빛나던 달이 보이지 않았다.

- 오늘 밤을 소중하게 간직해.

어째서인지 하나모리가 남긴 말이 문득 떠올랐다.

● 87쪽,

구슬 일곱 개를 모으면 나타나는 용신처럼, 뭐든 말하라고 해놓고 ‘그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애당초 희망을 신청한다는 표현도 걸린다. 하나모리에게도 확인했지만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과도한 기대는 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준다면.

● 157쪽,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돌이켜보기 싫기 때문일까.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사자’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분명 히로오카도 그렇겠지. 후회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미련에 관해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실은 남에게 들통나서 편해지고 싶다. 그런 딜레마를 안고 지내온 것이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추가시간을.



● 294쪽,

"추억을 만들자."

"응?"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희망을 끌어낸다.

"결국 잃는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웃으며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분명 아주 의미 있는 일이겠지. 슬픔을 없앨 수는 없어. 하지만 슬픔을 능가할 행복을 찾아낸다면 분명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거야. 아사쓰키한테 배웠는데, 과거에 괴로워하기보다 내일에 희망을 품어야 행복해질 수 있나 보더라고. 우리도 마지막으로 그런 기적 같은 시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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