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엘레지 읻다 시인선 2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지음, 최승자 옮김 / 읻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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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로 쓰인 ‘시’를 번역한다는 건 어떤 문학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시를 잘 몰라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과, 초점이 맞춰진 순간과, 행간의 리듬을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 이 책이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었으며, 작가와 텍스트와 번역가로 이어지는 흐름을 오랜만에 깊이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낯선 시인의 시를 익숙한 시인이 이어준다. 게다가 둘의 ‘케미’가 너무 좋다는 게 느껴진다. 조금 든든한 기분이 든다.

빈센트 밀레이라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알고 보니 다른 시 모음집에서 그의 시 한편을 마주친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일부 암송되는 시가 있었다. 한국의 여성 시인이 자신의 책에서 시를 거론한 적도 있었다. 이리도 낯설고도 가까웠던 빈센트 밀레이는 20세기 미국의 대표 시인이자 여성 최초의 시 부문 퓰리처상 수상자였으며, 생전엔 자유를 갈망하는 페미니스트와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페미니즘 색채를 띤 것은 아닌데, 오히려 시에서 계속 반복되는 언어들은 슬픔과 죽음에 가까우며 전체적인 이미지는 고요하고 웅장하다.

인생은 그 자체가

빈 술잔, 주단 깔리지 않은 층계.
해마다, 이 언덕 아래로,
사월이 재잘거리며,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18쪽, <봄>


죽음과 허무, 슬픔의 언어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시는 죽음의 고통이나 어두운 부분에 대해 깊게 집중하는 것 보다도, 언젠가 찾아오게 될 죽음을 통해 삶을 각성시키는 듯한 몸짓으로 느껴진다.
“삶은 계속되어야 해. 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 <비가>라는 시 속의 문장으로 이 몸짓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실과 고독과 슬픔을 부르짖으면서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어디론가 나아가야 하는 시인이다. 이유 모를, 삶에 대한 의지는 계속된다. 거의 안간힘에 가까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어느 순간 많은 의미를 품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삶의 모호함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아름답고 사소한 것들이 서서히 쌓이고 쌓인다. 의지는 아마도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의 경우엔 사소한 무언가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이 계절에 읽기 좋은 시집이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함께 느껴지니 신기하고 몽롱한 기분. 그래서 이상하게 반복해서 읽게 된다. 곱씹을 수록 더욱 차갑고 뜨거워진다.

 


 

● 12쪽, <슬픔>
사람들은 옷을 차려입고 시내로 간다.
나는 내 의자에 앉는다.
나의 모든 생각들은 느리고 갈색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아무래도 좋다. 어떤 가운을 걸치든
혹은 어떤 구두를 신든.

● 89쪽, <죽음>
아늑하고 고요하게 누운 채로,
만일 내가
그 속에 앉아서
주의 깊게 듣고 엿보는
감각할 수 있는 나를 가진
감각할 수 없는 물질일 수 있다면,
나는 죽는다는 것과
흥정을 시작할 수도 있으리라.

● 104쪽, <눈 속의 수사슴>
눈 속의 수사슴을 무릎 꿇게 하고 가지 쳐진 그의 뿔을 꿇게 하는
죽음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이냐.
지금쯤엔 아마도 일 마일 떨어진 곳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의 깃털을 떨어뜨려 제 무게를 조금씩 없애는 묵직한 독미나리 숲 아래서,
그 암사슴의 눈으로 주의 깊게 본다면,
얼마나 이상한 것이냐, 삶이란.

● 126쪽, <당티브 곶>
나는 뭍보다는 바다 편인지라, 밤에 폭풍우에 세차게 채찍질당했던 나의 부루퉁한 마음은 그렇게 빨리는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들 속으로, 둔중한 울림과 함께
바다는 철썩철썩 밀려왓다
물러간다.
잔잔한 낮에 내 곁에 있을 때조차도 심란해진 지중해는 묵직한 큰 파도와 함께,
새들이 재잘대는 해변으로 기울어져 부딪친다.




● 130쪽, <유년은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죽은 살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다.
그들은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차를 마시지도 않는다.
생전에는 차가 낙이라고 말했으면서도.
(…)
너의 차는 이젠 차갑게 식었다.
너는 그것을 선 채로 마시고
그리고 집에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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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크러시 1 - 삶을 개척해나간 여자들 걸크러시 1
페넬로프 바지외 지음, 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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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역사는 강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쓰여진다. 중요한 사람, 정말로 역사에 길이 남아 두고두고 이름이 불려야 할 사람……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닦아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를 기록하는 후세들을 통해 분류된다. 누구나 어릴 때 위인전 한 권씩은 읽었을 것이다. 한국을 벗어나 세계의 많은 위인들을 만나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이상한 점이 있다. 여성 위인들의 이름은 다 어디로 갔던 걸까. 인생의 모토로 삼는 여성 위인을 찾고 싶지만, 워낙 손에 꼽을 만큼 한정되어 있어서 남성 위인을 고르거나 겹치는 인물들을 고르기 일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로 외우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사에는 여자의 이름이 단 네 명뿐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아, 그때는 진짜 모르고 즐겁게도 불렀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물론 있었겠으나, 여성이 뭔가 해보려고 하면 행동 제약을 걸어버리는 시대상황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걸크러시>는 프랑스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웹툰이다. 남성 우선적인 사회에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사회에 반항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여자들의 삶을 짤막한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뤘다. 1권과 2권을 합하여 총 30명의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국적도, 직업도, 나이도 다른 여자들의 공통점은 세상의 편견에 맞서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갔다는 점이다. 왕, 전사와 탐험가, 부인과 의사, 독재정권에 맞선 운동가, 화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 자신의 위치에서 다양한 일을 했던 여자들이 있었다. 꿈을 이루기 전부터 걸림돌로 작용하는 많은 사회적 제약뿐만 아니라 끔찍한 폭력과 억압 또한 존재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떠올려보자면 여성 수영복을 최초로 만들어낸 '애넷 캘러먼'이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주의는 호주에도 영향을 끼쳤고, 여자들은 대낮에 수영도 하지 못할뿐더러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불편한 옷을 입고 물속에서 헤엄을 쳐야 했다. 애넷은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수영복을 만들었고, 뒤이어 올 누드 수중 연기로 영화계에 위대한 도전을, 여성들의 몸과 건강을 위해 끊임없이 권유하고 노력했다. 또한 강력한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끌었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리마 보위',  아테네 여성들이 의술을 배울 수 있는 첫걸음을 뗀 부인과 의사 '아그노디스'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을 한 여자들도, 뚜렷한 정점을 찍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길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걸었던 여자들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책에서 주목할 점은 아마도 업적의 중요도보다는 자신의 일과 소신을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갔던 그들의 삶의 양식일 것이다. 어려운 사회적 상황에 대항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 책 속의 여자들의 행동과 언어들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용기까지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단 한 가지로 규정될 수 없는 '페미니즘'의 다양한 모습들을 여자들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 덧, 한국이란 작은 땅에서 여성으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들도 더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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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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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먹은 보랏빛의 표지 그림을 보자마자 어떤 정보도 없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흔하디흔한 첫사랑의 추억을 다룬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따로 책 소개를 찾아보지 않은 채 책을 펼쳐 보았다. 의외로 분량은 적었다. 아이들의 그림책이 생각날 정도로 글밥도 많지 않았다. 여백이 많다는 건 무수한 설명과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고, 열려 있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독자라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책의 분량만큼이나 짧은 시간 동안 마지막까지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정말 묘- 했다. 어, 도대체 이게 뭘까. 신기하고 이상하다.

 

다양한 행동과 사건에 ‘첫’이 붙으면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설렘과 두려움, 황홀함, 두근거리는 다양한 감정이 함께 들러붙어서 느낌은 오묘해진다. 책 속에는 두 명의 소녀가 등장하고, 사춘기 소녀들이 으레 주고받을만한 얘깃거리로 대뜸 첫 장면이 시작된다. 다소 충동적이거나 불안하고, 신중하고 세심한 소녀들의 마음이 한 장의 그림들로 표현된다. 둘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도, 어떤 큰 사건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대신에 아주 일상적인 대화와 장면들만 뜨문뜨문 등장한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확실치 않은 그들의 마음들과 걱정과 두려움, 감정들을 조각조각 하나씩 보여줄 뿐이다.

 

순서도 없고,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 뜨문뜨문한 이야기가 꽤 어색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나에게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무수한 '처음'들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감정적으로 깊게 빠져들었던 상황을, 때로는 아무 의미 없이 던졌던 말들을, 때로는 그냥 같이 앉아 있던 일들을 무심코 떠올리듯이. 정말 내가 언젠가 겪었던 일들을 추억하고 연상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 짧은 책이 불러오는 긴 여운과 남다른 분위기는, 단순히 ‘첫’이라는 단어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건 아마도, 흐르지 않는데 책 속에서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음악'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내 감정 그대로를 담은 듯한 음악 한 곡을 감상하는 것 같다. 그림과 음악과 대사, 그리고 따뜻하고 서툴고 공감되는 감정들. 어쩔 수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조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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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노트 쏜살 문고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정지영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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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가출, 비밀, 우정, 격동의 파리…… 책을 읽기 전 간단하게 정리한 키워드는 흥미로웠다. 예민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의 두 소년이 품고 있는 비밀과, 그로 인해 서로 간에 쌓게 될 우정은 여태껏 감동으로 읽어온 청춘 성장 소설을 상상하게 했다. 이를테면 헤세의 작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속 주인공들의 우정과 『책도둑』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부딪쳐볼 수 없는 과거의 파릇파릇했던 마음들을 기억하게 할 잔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책을 열고나니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된 고전이었구나.

 

 1922년에 집필이 시작된 이 작품은 대하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 중 첫 권이다. 작가가 총 여덟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된 대하소설 속 7권 <1914년 여름>을 집필할 때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내로라하는 프랑스 대표 작가들에게도 많은 극찬을 받았다. 당시 문학의 흐름과 가치가 어땠을지는 모르겠으나, 오랜 사랑을 받은 작품이니 만큼 읽어볼 가치가 있었다. 단, 소설의 특성상 도입부가 되는 <회색 노트> 또한 마지막은 미완결이거나 열린 결말의 느낌, 아니면 이어지는 느낌으로 뭉뚱그려 그려질 수 있겠다고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책 속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두 소년의 가출 사건이다.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자크’와 ‘다니엘’은 회색 노트에 진지한 삶의 성찰과 이상을 풀어놓는다. 열정적으로 쓴 노트의 글 속에는 그들이 나눈 문학적 교류와 깊은 우정이 있다. 진심 어린 말들이 가득했지만, 실수로 회색 노트를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고 난 후에는 엄청난 논란이 인다. 때묻지 않은 우정의 글들은 어른들의 편견 어린 시선 속에서 문란한 것으로 둔갑된다. 충격을 받은 두 소년은 함께 가출하기에 이른다. 성향만큼이나 살아가는 환경까지도 달랐던 그들로 인해, 당시 엄격한 가톨릭 부르주아 집안과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대립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고전 특유의 문체 때문일까. 영 따라가기 힘든 흐름과, 시대에 따른 주인공의 행동들이 때로는 불쾌감을 불러냈다. 청춘이기에 서슴없이 고민하고 갈망할 수 있는 회색 노트 속 ‘자크’와 ‘다니엘’의 편지는 아름다웠지만, 편지글을 벗어난 이야기 속에서는 뚜렷한 감정선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아, 어쩌면 내가 『티보 가의 사람들』이 아닌 두 소년의 우정 어린 <회색 노트>만 기대하며 읽어서일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 81쪽,
아,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말고 천성을 그대로 따를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창조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자각할 때는 자기가 가장 중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명을 띠고 있으며 완성해야 할 중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 그렇다! 성실할 것! 모든 일에, 그리고 항상 성실할 것! 아, 이런 생각이 얼마나 가혹하게 나를 쫓아다니는지! 천만 번이나 나는 나 자신 속에 모파상이 『물 위』에서 말하고 있는 가짜 예술가, 가짜 천재의 거짓을 발견하는 듯했어. 그러면 나는 구역질이 나는 걸 느끼곤 했지.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너를 나에게 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천분에 환상을 품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영원토록 얼마나 서로 필요한지.

● 91쪽,
습관과 규율의 영향 아래에서 개성을 잃은 대부분의 학생들 틈에서, 또 나이를 먹고 하루하루 판에 박힌 생활 탁에 정력이 다 소모되어 버린 선생들 곁에서, 이 볼품없는 얼굴의 게으름뱅이는 항상 솔직하고 강한 자기 의사를 폭발시키면서, 자기만을 위해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고, 위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며 모든 엉뚱한 모험에 서슴없이 뛰어들곤 했기 때문에 이 작은 괴물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인 존경심마저 자아내게 했다. 다니엘은 자기보다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개성이 풍부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놀라게 하고 가르침을 주는 이 소년의 매력을 제일 먼저 느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그 자신 역시 무엇인가 격정적인 면이 있었고, 자유와 반항을 열망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121쪽,
"있잖아." 그가 입을 열었다. 변성기에 있는 그의 목소리가 엄숙하고 나직이 울렸다 "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우린 헤어지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말이야, 난 전부터 네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어떤 보증이라고 할까, 우정의 영원한 표지 같은 걸 말야. 너의 첫 시집을 내게 바치겠다는 약속을 해 줘……. 아, 이름을 쓸 건 없어. 그저 나의 친구에게라고만 써 줘. 어때?"



● 157쪽,
자크는 목구멍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얼굴 근육 하나에라도 그 표정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턱을 가슴께로 바싹 끌어당겼다. 용서를 빌지 못한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으며, 자기도 다니엘처럼만 맞아 주었더라면 얼마나 따뜻한 눈물을 흘렸겠는가를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렇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심정, 원한이 섞인 이 동물적인 애정,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돈 뒤로 오히려 더 복받치기까지 하는 이 동물적인 애정을 결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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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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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쓰기 위해서, 내가 들었던 말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걱정과 빈말로 포장한 모욕적인 말들을 다시 되짚으면 기분만 나빠진다. 자존감을 건드릴 정도의 큰 타격을 받은 적도 있고, 여자라면 한번씩 들었을 사소한 말들을 나도 꾸준히 듣고 자랐다. 가까운 사람에서부터 '아는' 사람 불문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분 나쁜 말들은 보통 여성성과 외모와 옷차림과 태도에 관한 과한 참견과 관심의 말들이다. 너나 잘해, 하고 싸가지 없이 욕 한번 시원하게 해버리고 싶지만 관계를 망치거나 시끄러워질까봐 '허허허' 웃거나 '네네' (알았으니 얼른 가세요) 속말은 삼키고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기 일쑤였다. 이건 착한 사람 콤플렉스나 각자의 성향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위치 때문에 속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다.

<썅년의 미학>은 저스툰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웹툰을 재구성해 출간된 책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페미니즘과 관련된 만화지만 딱히 '페미니즘 만화'라고 이름 붙이진 않았다. 그저 여자들이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한 컷, 한 컷에 간략하게 담고 나서 상상력을 가미했다. 여자들이 별별 행동과 말들로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입을 때 당당하고 거침없이 거절하는 모습을 담았다. 각 장의 만화 뒷편에는 저자의 짧은 단상이나 실제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기억에 남는 저자의 경험담은 지하철 쩍벌남에 일침을 가했다는 이야기다. “지가 다리 벌려 놓고서는 왜 나한테 X랄이야?” 라는 말에 놀라 일어선 남자가 다시 통화를 하는 척 욕설을 내뱉자, “지금 나한테 미친년 이라고 한 거야?”라고 크게 웃으며 모든 승객들의 시선을 주목시킨 일이다.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저자 또한 친구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저자의 경험담이 섞인 만화를 보다보면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말하라고 알려주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게 거절하고 받아치지 못하는 여자들이 바보 같거나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잘못은 먼저 폭력적인 언행을 한 그 남자에게 있다.

 평생을 옭아매는 성 고정관념, 갑갑한 브래지어와 생리대의 괴로움, 성폭행과 성희롱, 범행의 표적이 된다는 불안, 데이트 폭력과 안전 이별, 나이에 따른 결혼의 압박과, 임신과 육아, 일터에서의 차별적인 대우. 사회가 오랜 세월 동안 방관해왔던 여자가 당하는 거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 하나 짚어주는 느낌의 만화다. 얼마 전 읽었던 <악어 프로젝트>가 길거리에서 여자들이 당하는 폭력에 대해 집중한다면, 이 책은 더 범위를 넓혀서 조금 더 가볍고 알기 쉽게 전해주는 느낌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항하는 방식이나 전략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코르셋의 범주에 관해서도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성 개인에게 가해지는 압박도 제각각이고, 그 때문에 그걸 벗기 위한 노력의 정도나 한계도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적은 모두 같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찾는 것이다.” (234쪽)

책의 마지막 문장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처럼 생겼다”는 말에 마음이 갔다. 만화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탈코르셋을 하지 않고, 내 취향이 어디서 왔는지를 연구하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대로 살아가자는 주의다. 발췌한 글이,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 저자의 합리화로 볼 수도 있겠으나,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외모를 나누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고 정답은 없다”는 저자의 말에 어느 부분 동의를 하고 있다. 나는 아직 페미니즘 입문서를 고작 몇개 읽은, 지금 뜨겁게 일어나는 페미니즘 운동에 발도 채 담그지 못한 애송이라서 뭐가 맞는지 틀린지 확신할 순 없다. 그래서 이런 저런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성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공부해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심해보는 중이다.

73쪽,
"야한 걸 좋아하지만 너랑은 안 해."
이걸 말하기까지, 내가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뭐 어쩌라고.
결국, 지금에서야 페미니즘을 접한 우리들의 인생이란, 자신의 지난날을 끊임없이 후회하며 이불을 차다 "아니야, 역시 그 새끼들이 개XX다." 하고 잠드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오늘 밤만이라도, 온전히 그 개-새끼들을 탓하며 잠들 수 있기를. 모두 굿 나잇.

93쪽,
그들은 여성의 가장 사적인 순간, 즉, 여성이 배설하는 장면을 보거나 여성의 생식기를 보는 행위를 통해 비틀린 지배욕을 맛본다고 한다.제 아무리 잘난 여자라도 이런 곳에서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놓고 ‘몰카‘나 찍힌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낌다는 것이다. 여성의 수치심이 곧 자신의 흥분제가 된다는 것. 아아, 도대체 어떤 지질한 인생을 살기에 겨우 그런 거로 흥분하는 걸까? (아, 물론 너희 인생 따위 전혀 안 궁금하다.) 근데 있지, 우리 하나도 안 창피해. 우리는 인간이라서 생식기도 달려 있고 오줌도 싸고 똥도 싼단다. 그래서 그게 하~나도 안 창피해. 창피해야 하는 건 너희들이야. 겨우 그런 걸로 비정상적인 쾌감이나 느끼고 딸딸이나 치는 이 범죄자 X끼들아, 너희들은 우리를 한 번도 지배한 적 없었고, 앞으로 지배할 일도 평생 없을 거야.

103쪽,
남성이 피해자인 불법 촬영물이 유출되면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지만, 여성이 피해자인 불법 촬영물이 유출되면 음란 사이트 검색어 1위가 된다. 이 비뚤어진 운동장을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들 "여자가(는)"라는 말은 행동을 제한할 때 쓰이고, "남자가(는)"라는 말은 행동을 합리화할 때 쓰인다고 한다. (…) 아마 여기서부터 바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 남자도 "감히"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공평하게, 서로 "그러지 말자"고.

223쪽,
우리에게, 페미니즘에, 여성에게 공감은 필요 없다. 어차피 사람은 타인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몰라도 괜찮다. 손잡아주지 않아도 되고, 눈물을 닦아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 정말 정말, 그래도 돕고 싶다면, 좀 닥치고 있기를 바란다. 여성의 입을 막지 말고, 여성의 앞길을 막지 말고, 여성의 인생을 막지 마라. 돕겠답시고 나대지 마라.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아군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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