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친구
앙꼬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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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 책을 순간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읽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온통 어두컴컴하고 썩 이쁘지 않은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일 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단순한 제목에 끌렸을 수도 있다. 뭐 이유는 언제나 그랬듯이 여러 가지다. 그러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아, 괜히 덤벼들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갑자기 푹 주저앉았다.

 상상치 못한 리얼함을 마주할 땐, 온몸에 주눅이 든다. 책 속 현실에 압도당한다. 상상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만화'는 정도가 더 심하다.

 

앙꼬 작가는 자신이 "사회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청소년기를 보내왔다고 전작에서 밝혀왔고, 그의 다른 책 『삼십 살』과 『열아홉』에서도 자전적 이야기를 솔직하고 위트있게 담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앙꼬의 열여섯'을 회상했으리라 짐작하는 『나쁜 친구』는 방금 언급한 두 권의 책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만화는 주인공 '진주'가 경험했던 청소년 시기의 비행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단순한 재미, 부모님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된 그의 일탈은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가출을 해서 단란주점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시도하기도 했다. '진주'는 뭐든지 능수능란한 친구 '정애'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게 신기하고, 스릴있고, 뭐든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가 어딘지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은 들었다. 친구 '정애'의 집에는 매일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문신을 하고, 술을 마시고 화장을 했다. 이혼한 아빠는 폭력이 일상이었다. '진주'는 "언제나 우리 가족의 화목함과 부유함이 부끄러웠다." 나의 행동에 죽일듯 달려드는 아빠가 있었지만, 기도하고 매달리며 기다리는 언니와 엄마가 있었다. 따뜻한 집이 있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그땐 부끄러웠는데, 한줄기 희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만화가가 되어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게 된 '진주'가 우연히 어른이 된 '정애'를 마주치고 난 뒤, 그는 이 모든 경험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잡아준 사람이 있어서 잔인한 세계를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그리고 실제로 상상을 하기도 한다. 단란주점의 언니가, 내가 아닌 '정애'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고.

 

 "난 더이상 그곳에 속해있지 않으니… 재미있던 일은 모두 이야깃거리로 남았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고 난 즐거웠다고,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라고 만족했다. 그래서 그날 내가 너를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코 만만찮은 스토리와 자전적 요소를 고려할 때, 작가는 이 만화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꽉꽉 녹여낸듯한 느낌이다. (어쩌면 자신이었을) 그들을 질책하거나 힐난하지 않고, 드러내놓고 반성하지 않고, 주저하며 핑계대지도 않으며, 그냥 그대로 조용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만화 한 컷에 담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와, 그가 '서른 살'이 되어 '앙꼬'라는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의 어려운 시간들을 담담하게 끌어나갔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좋아, 어두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집중하며 읽어내릴 수 있었다. 앙꼬 작가의 『열아홉』, ​『삼십 살』의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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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8.5 승효상 - 승효상 편 - 짓다
승효상.스리체어스 편집부 지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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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 이번호를 기점으로 개편되었다. 판형은 작아졌고 띠지에 있었던 인물의 얼굴은 작아진 표지로 옮겨갔다. 종이의 재질, 그에 담긴 내용과 구성도 조금씩 달라졌다. 여덟 권의 매거진을 출간한 뒤, 독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여러 불편한 점들을 개선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작아진 판형은 아쉽고 (매거진을 읽는 색다른 느낌이 사라졌다), 단출하나 깔끔한 표지는 마음에 들고, 어디있는지 찾을 수 없었던 이 책의 부제가 책 뒷면에 새겨진 것은 좋았다. 그런데 이번호는 주인공의 요구사항 때문에 구성과 내용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편집과 인터뷰어의 개입을 최대한 제한하였고, 디자인과 구성은 최소화했다. 출판사 측에서도 아쉬운 면이 많아 출간을 주저하다 8.5라는 숫자를 붙여 세상에 내보냈다고 한다.


 매거진을 다 읽을 때쯤 승효상 건축가의 저서인 『빈자의 미학』이 20주년 기념판으로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의 이름과 '빈자의 미학'은 동의어와 같다고 한다. 삶과 철학을 온전히 담은 저서가 재출간될 줄 알았다면, 매거진의 구성은 조금 달라졌을까? 조금 다른 각도로, 톡톡 튀는 형식으로 그의 삶을 바라보고 평할 수 있었다면 더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무시할 순 없었다. 한 인물의 삶과 메시지를 아주 충실하게 담아냈고, 조금 더 가벼워진 형식 속에서 한 인물의 역사를 꼼꼼히 다뤘다. 그의 저서 『지문』과 『빈자의 미학』 일부가 책에 실려있기도 했는데 이는 짧은 구절이지만 건축가가 지닌 고집과 철학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게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건축가의 욕망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걸을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고 그 속을 채울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저는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건축가는 사회의 물음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에요. 삶에 관한 사람들의 요구에 대응해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땅에 따라 건축이 바뀔 수밖에 없죠. 그 땅의 조건에 맞춰서 하는 게 건축이에요. (…) 공간을 설계하는 일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설계하는 일과 마찬가지예요. 건축가는 남의 집을 짓는 이들이니 타인의 삶을 그만큼 잘 알아야 하죠. 그래야 남의 삶을 조직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건축을 잘하려면 남이 어떻게 사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119-120쪽)

 

 

 

 

 건축가 승효상을 필두로 (이로재에서) 지어진 건축물들의 수는 상당했다. 이전에는 그의 이름조차 몰랐으니, 길을 걸으면서 스쳐간 건축물들도 여럿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건축 설계와 도시 계획은 다르지 않다는 일념 하에, 도시의 장소를 잇고 공간을 구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파주 출판단지도 그가 구성하고 만들었단다. 현재는 퇴임하였지만 서울 총괄 건축가로도 일했다. 그는 "좋은 도시는 도시의 어느 곳에 떨어져도 일부만으로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도시"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며 바른 건축과 바른 도시에 대해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서울의 건축적 지향점은 '메타시티'라 한다. "내적인 질의 함양을 위한 도시, 연대하는 도시, 공존하는 도시" (148쪽)를 추구한다.

 

 


​ 뒷페이지에 실려 있는 『빈자의 미학』을 읽으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빈곤하지만 아름다운 무대장치, 처절한 고독이 만들어낸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 가난하지만 삶을 나누고 공존하는 서울의 달동네와 같은 영감이 모여 확고한 철학을 만들어냈다. 『빈자의 미학』에선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건축과 삶, 승효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그의 책을 접하기 전 기본이 되는 지식들을 접할 수 있다.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매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늘 그랬듯이.

 


 "침묵의 벽. 비록 소박하고 하찮은 재료로 보잘 것 없이 서 있지만, 그 벽은 적어도, 본질의 문제를 안으며 중심을 상실하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건축가들이 쌓은 벽이며 결단코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191쪽, 『빈자의 미학』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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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8 안희정 - 안희정 편 - 다시 민주주의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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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출간일로부터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 20대 총선이 열렸다. 이번 호의 인물이 선거 후보는 아니었지만, 뚜렷한 정치 성향을 가진 현 정치인이었기에 읽고 쓰기에 약간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치는 어렵고, 정치 이야기는 난감하다. 내게는 특정한 날의 권리 행사, 또는 어떤 부조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반짝 관심을 두고 마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비판하고 똑 부러지게 구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정도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선거 이후로 독서를 미루고, 좀 더 여유가 있을 타이밍을 고르다가 (결국엔 잊어버렸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8호의 인물은 충남지사로 재직 중인 '안희정'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친노' 인사이며, 차기 대권주자로도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를 잘 알지는 못했기에 그동안의 책보다 더욱더 차근차근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샛노란 배경 속에서 '친노' 인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7주기란다. 길을 지나면서 플랜카드도 보였다.) 딴소리로 흘렀는데, 역시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인물을 소개하는데 짚어나가야 할 것들을 아주 확실히, 그리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혹자는 '안희정'이 '친노'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어서, '안희정'의 일생을 보다 깊이 파고들어 간다. 정치인으로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꿈꾸는 진보주의자로서 중심이 되는 소신을 갖게 된 과정이 그의 인생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다. 그는 운동권 학생에서부터 정치인이 되기까지, 어떤 위인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옥살이도 했다. 험난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러던 와중에도 옳은 것은 옳다고 굳건히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신념을 쌓아나갔다.

 

 

 

 

"우리 현대사 100년만 봐도 그래요. 식민지 시절에 독립운동 안 한 건 잘못됐다고 해야죠. 그런데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너희라고 다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국가와 독립을 위해 싸운 역사를 더 받들어 주는 게 상식이죠. 자기 집안의 명예나 위신에 해가 되더라도 상식으로 봤을 때 그게 옳다고 얘기해야 하는 거예요. 타인에게 봉사, 헌신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그 사회의 정의라고 말하는 흐름을 만들어 줘야 돼요. 이런 토대 위에서 시민과 정치인이 성장하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해요." (99쪽, "상식과 양심이 오염된 실례를 드신다면?" 인터뷰 中)

 

칼럼과 인터뷰가 유독 재미있었다. 칼럼에서는 '안희정' 지사가 표방하는 '더 좋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좋은 민주주의'는 물론 좋고, 긍정적이고, 평화로우나,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고민하고 희망을 갖는 부분들이 편집자의 서문에서 보았던 "독재의 부재가 민주주의는 아니다"라는 문장과 맞물려, 깊은 생각을 갖게 한다. 완벽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더 좋은 민주주의'의 선례가 있었으니, 우리나라는 조금씩 성숙해질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말이다.

 

인터뷰는 여느 때보다 더욱 스릴 있게 느껴졌다. 질문은 역시나 날카롭고 절묘했고, 정치를 넘어 사회적 현상, 개인의 삶, 철학까지 진지한 얘기들이 오갔다. 능수능란한 둘의 대화를 끼어들 틈 없이 숨죽이며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좌희정, 우광재'라 불렸던 평생 동지 '이광재' 전 도지사의 인터뷰와, '안희정'의 청춘을 위한 강의로 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언제나 여운을 남기는 명언들과 함께다. 진중한 이야기가 그득했던 터라 시원하게 소화하기 힘든 이번 호였지만, 평소 깊이 관심 두지 않은 부분에 대해 가까이할 수 있어 기쁘기도 했다. 앞으로 '안희정'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더욱 관심 있게 보게 될 것 같다. 좋은 정치인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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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그래프 Monograph No.3 손열음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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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리체어스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인물 평전의 두 가지 버전 중, 비교적 젊은 멘토를 선정하는 『모노그래프』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다. 표지에 적힌 '해시태그'부터 선정되는 인물까지 핫트렌드와 젊은 감각을 내세운 것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막 가볍지만은 않다. 누군가의 삶을 다뤄내는 손짓은 조심스럽고,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선정하기에 독자들에게 기본 지식 또한 전해주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모노그래프』 3호의 인물 특성상, 기본 지식은 그 인물을 이해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피아니스트를 알기 위하여 그들이 연주하는 곡의 작곡자들을 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에서는 초반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등 작곡자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즐겨 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소에 이런 내용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지만 한 페이지에 (그들의 인생에 비하면) 짤막하게 요약된 글들 속에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많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재미있는 코너는 '클래식 에티켓'이다. 클래식 콘서트에서의 아주 기본적인 매너들과 사소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보기 민망한 궁금증까지 다룬다. 책 속의 당연한 절차일지도 모를 클래식 에티켓을 모두 읽고 나면, 이제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악 속으로 깊이 들어갈 차례다.

 

클래식에 관심이 없다 보니 '손열음'이라는 이름도 어깨너머로 들어봤을 뿐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나의 무심함이 살짝 미워졌다. 검색 한번, 유투브의 동영상 한번 클릭하면 수두룩하게 쏟아지는 그의 영상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영상 하나를 눌러보았다. 지휘자가 손열음의 힘 있는 연주에 맞춰 따라가는 듯한 모습이 신기했다. 덧글 창에는 칭찬 일색이었다. 감동에 감동이라고.

 

『모노그래프』가 끌어내고 있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음악 천재로 주목받았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준우승을 차지한 차이콥스키 콩쿠르까지의 오랜 과정이 담겨 있다. 절대음감, 초등학교 때 나갔던 국제 콩쿠르, 그리고 수상, 결코 잊을 수 없는 스승들의 이름까지. 전혀 다른 세상이라 여겼던 클래식 연주자의 삶에 신기한 감동을 할 무렵, 어떤 구절이 마음을 끈다.

 

"손열음은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직업을 물으면 '콘서트 피아니스트'라고 답한다.
'음악가'라고 하면 추가 질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클래식 연주자를 딴 세상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똑같이 땀 흘리며 살아가는 직업인이다. (61p)"

 

 

인터뷰에서는 그 사람의 성격과 인성이 짧은 한마디에도 전해져오는데, 손열음의 인터뷰 또한 그렇다. 의외의 성격이 눈길을 잡는다. "야심도 없고, 고집도 없고, 경쟁심도 없는데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었을까." 에디터님의 말처럼 의아했지만, 솔직하면서도 무던한 말투가 읽기에도 받아들이기에도 편안하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가들, 연주할 때의 감각 등 음악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도 함께하지만, 좋아하는 술이나 요리, 휴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도 있다. 클래식 연주자를 향한 원인 모를 경외심도 느껴지고 친근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재미있고 좋다, 라는 생각이 든 건 이 부분. "제2의 손열음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이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더 큰 사람을 보고 꿈을 꾸세요. 하하" 왠지 호탕한 (또 다른 천재) 김연아 선수가 생각난다.



'음악'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책에서 만나기에 낯설고 당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을 바에야, 읽고 난 뒤 '음악'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역할은 다 한 것 같기도 하다. 손열음의 음반, 손열음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유투브 스타의 영상 등 다양한 '들을 거리'들도 가득 채우고 나면, 그것들을 직접 듣고 싶어질 것이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도 음악을 틀었다. 손열음의 연주 중 건반과 혼연일체가 된 장면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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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7 엄홍길 - 엄홍길 편 -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Biograghy Magazine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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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은이) | 스리체어스 | 2015-12-22

 

 

 남겨진 생각들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엔 제각기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속된 말로 '무언가에 미쳐 사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다. 그 무언가를 개인적인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음'과 '이해할 수 없음'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면, 산악인의 경우 '등산'은 전자에 '고산 등정(登頂)'은 후자에 해당한다. 산, 그 자체에 매료되어 취미로 산행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정상을 오르는 짜릿함을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혹은 경험하기도 싫은 '고산 등정(登頂)'은 내 기준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산들보다 몇 배는 더 높은, 세계의 고산들을 온갖 고통과 재해에 맞서 오르는 것은 분명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산을 맨 걸음으로 올라본 적도 없고, 그저 케이블카에 타서 정상으로 곧장 올라가 사진만 찍을 줄 아는 나이니 뭘 알겠는가. '산'이라는 것은 내 일상에서 동떨어진, 가까이할 수 없고 그저 경치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산악인들에 대해서도 평소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고, 어떤 프로그램에 누군가가 등장하면 반짝 관심을 보이다가 금세 사그라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7호, 엄홍길 편을 읽고 나선 꽤 길게 여운이 남아 있다.

 

 

 

 그동안 정치, 문화, 과학 등 다방면의 인물들을 조명했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 이번 호에서는 산악인 '엄홍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영화 『히말라야』의 개봉으로 산악인들의 관심이 살짝 힘을 얻고 있는 찰나였다. 히말라야 14좌를 세계 8번째로 등정한 우리나라 산악인 '엄홍길'을 대표하여, 산악인들의 인생과 다양한 것들을 담았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히말라야 14좌, 그리고 위성봉이라 불리는 2좌를 설명하기도 하고, 고산 등반의 상세한 방법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모르는 부분이 많았던 일인만큼,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다. 산을 오르는 것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 등정주의와 등로주의로 나뉜다는 것, 비용도 만만찮게 들어간다는 것, 업체로부터 후원을 받는다는 것. 그저 개인적인 도전이라고만 여겼던 등정이 이렇듯 많은 요건을 끼고 있을 줄은 상상을 못 했다.

 

 

 생각했던 것만큼 고난이 가득했던 그의 완등 기록을 살펴보며 상상 속에서 오들오들 떨리는 발을 부여잡고 쉽지 않은 독서를 계속해야 했다. 죽음과 고독, 공포, 그리고 환희, 글로 보는 것보다 더 혹독하고 광포한 산에 '미쳐 사는'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알면 알수록 더욱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역시 특유의 서술과 구성으로, '엄홍길'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독자에게 넘기고 있다.

 내가 느낀 그는, 정신력이 무척 강한 사람인 것 같다. 실제로는 순하디순한 사람이지만, 산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는 동료의 인터뷰를 보고는 그의 성격이 또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산에 올라가면, 오로지 신성한 산만 보고 거침없이 오르는 저돌적이고 냉정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목표에 대한 의지가 무척이나 강한 사람 같기도 하다. 그와 함께한 동료와 셰르파들의 죽음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에 관하여 사람들은 그의 저돌적인 스타일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고산의 상황이란 개인의 안위를 살피기에도 어려운 것이니 절대 다른 이들의 죽음에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영화 <히말라야>의 소재로도 쓰였던 故 박무택 대원의 시신 수습 과정도 상세하게 나와 있다. 개인의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눈 덮인 고산에서 누군가의 시신을 수습해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라는데, 그는 해냈다. 대단한 사람이다. 산에서의 그의 모습이 어떠했든, 진심이 담긴 이 숭고한 등반에 고개가 숙여진다.

 

 

​ 이 책을 읽다 보니 뜬금없이 '셰르파'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마음이 갔다. 기록은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고,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무거운 짐을 인 채, 길잡이 역할을 하는 그들. 이름을 남길 수 없는 그들의 족적이 궁금해진다. 셰르파를 소재로 한 책이 어디 없을까, 찾아봐야겠다.

​ 끝으로, 등반을 인생에 비유한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의 서문을 발췌한다. 책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이 책의 서문은 언제나 가슴을 울린다.

​입학과 졸업, 취업과 승진, 결혼과 출산,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는 크고 작은 목표를 세운다. 대체로 일의 형편이나 과정보다는 출발점을 겨냥한다. 우리는 기껏해야 출발하는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애면글면한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면 만사를 작파한다. 언젠가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정상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폭양이 내리쬐고, 바람이 휘몰아치고, 몇 사람이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비좁다. 대저 정상은 머물기 위한 곳이 아니라 거쳐 가는 곳이며,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입생과 신입사원과 배우자와 부모가 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정작 어려운 건 성실한 학생과 뛰어난 사원과 훌륭한 배우자와 인자한 부모가 되는 일이다. 다시 산에 빗대자면 정상에서 자격을 득하고 하산길에서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정상 정복이 아니라 오르고 내려가는 과정이 인생길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 Word by Lee Yeondae, Publisher.

 

 

Written By.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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