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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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김용규>

 

 

 

 

 After Reading

 

 

 

 

   문학에 대해 항상 궁금했지만 감히 철학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꽤 오래 책장에 꽂혀 있었던 책이다. 사놓고선 계속 읽지 못했던 이유는 제법 굵직굵직한 고전들을 주로 다루고 있어서, 어느 정도 책에 대한 개념이 잡힌 후에 읽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표지에 있는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라는 문구처럼, 저자는 많은 고전들 중에서도 진지하고 심각한 질문을 하는 책을 다룬다.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책들이라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는지, '철학카페'라는 이름 하에 카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듣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투로 철학과 문학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말하는 문학 비평을 커피에 비유한다. 카페에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주문하는 커피, 부드럽거나 씁쓸한 다양한 맛들. 이 책 속에는 이렇듯 다양한 맛의 커피같은 정보들이 섞여 있다. 고전 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가볍게 워밍업처럼 시작되는 첫 이야기, 그리고 책에 대한 소개, 뒤에는 조금은 깊이있게 들어가는 철학적인 해석까지. 저자는 이러한 '커피'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골라 마셔도 된다고 말하지만, 특별 메뉴인 '철학적 해석'을 꼭 읽어보길 권하고 있다. '철학카페'라는 이름을 붙인 만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묵직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대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고전문학들은 인간의 존재, 실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다고 느낀다.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고민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 이 책도 <파우스트>, <데미안>, <구토> 같은 묵직한 문학들을 통해 그런 고민들을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도움을 준다. 고전의 중요성을 알지만 쉽사리 도전해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철학적 해석 부분은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참고 넘어간다면 고전을 읽을 때도 더욱 풍부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Underline

 

 

 

 

   - "하지만 네가 내 크기를 알기 전에는 난 내가 얼마나 큰지를 몰랐어. 네가 내 나이를 알기 전에는 난 내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몰랐지. 네가 내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기 전에는 난 내 모습이 어떤지도 몰랐어. 더구나 네가 내게 말을 걸기 전에는 난 말도 할 줄 몰랐단다. 그래서 만일 네가 없다면 난 다시 내 크기를 모르게 될 거야. 내 나이를 잊게 되겠지. 내 모습도 볼 수 없을 거야. 난 다시 벙어리가 된단다. 넌 내 거울이야.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지. 넌, 이 넓은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란 말이야." "아, 정말 아름다운 꿈이다." 꿈에서 태어난 소년은 감탄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되었지요.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73p)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로스의 이러한 본성을 '탐욕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로스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자, 결국에는 그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탐욕이라는 거지요. 곧 사랑으로는 상대에게 영원히 다가갈 수만 있을 뿐, 단 한순간도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로스로서의 사랑이 가진 존재론적 구조이자 한계인 거지요. 그래서 우리 사랑이란 깊어질수록 쓸쓸하고, 다가갈수록 허전해지게 마련인 겁니다. 알고 보면, 질투의 존재론적 자리도 바로 여기에 있는 거지요. 만일 사랑을 통해 완전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소유할 수 있다면, 그래서 결국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질투라는 말은 아예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에로스 안에는 이미 질투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겁니다. (111p)

 

 

  -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못생긴 데다,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마저 없다고 한다면, 그는 사회에서 인정 받거나 사랑 받기가 어렵지요. 따라서 그의 존재는 자신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지요. 가정이란 가족 중 그 누가 설령 못생겼다고 해도, 또는 성격이 사교적이지 못하다고 해도,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이 없다고 해도 그의 '있음' 그 자체가 인정받고 사랑받아 기쁨이 되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르셀이 행한 '가정에 대한 존재론적 새석'이라는 거지요. (118p)

 

 

  - 인간은 이러한 존재질문을 하는, 곧 세계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입니다. 풀도, 나무도, 소도, 양도, 그 어떤 존재자들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지요.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염려하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지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존재자'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렇게 간절하게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때 '알 수 없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지가 아니라 무의미라는 겁니다. 즉, 자신과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것 자체를 아예 발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190p)

 

 

  - 이어 "자유라는 것에 사랑이 깃들기는 어려워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가 함께 행해질 수도 있다."라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아니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구분조차 없는 곳에서만 '우리들의 천국'은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옳은 말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이청준의 정치철학 내지 유토피아공학은 한계를 드러내 보입니다. 그가 천국 건설의 해법으로 제시한 사랑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적 해법이지 사회공학적 해법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 우리가 오늘날 추진하고 있는 사회공학인 민주주의에는 비록 선거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통치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와 통치를 받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은 불가피합니다. 민주주의란 단지 통치가 통치 받는 자들의 '동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2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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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로 나온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도 읽어봐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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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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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생존자 - 테렌스 데 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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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우리들의 불꽃같은 눈동자들이었다."

 

  <생존자>는 역사상 인간 최대의 본성을 시험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기록과 발언을 토대로, 인간의 삶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문학 도서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생존자'라는 단어가 죽음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는 부분이 다소 있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소설'인줄 알았지만, 실제적인 기록과 체험을 직접 적어낸 책이다. 끔찍하고 무서운 상황을 그대로 전달해야되는 주제의 특성상, 저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 책 전체에서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적어내고 있다.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죽음의 위험이 하루하루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 안에서 '생존'이란 것은 보다 조직적인 관점이 중요해지며, 냉정한 결단력이 요구됨으로써 존재한다. 생존자들이 '생존'이후에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주어는 '나'에서, '우리'로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 자신만의 체험이 아닌 우리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가혹한 세계를 기억하고자 하는 몸부림 또한 많은 사람들이 소리없이 동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책 속에서 말하는 '생존자'는 '인간으로서의 행동 방식을 영위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은 채 공포와 절망을 견디어 낸 사람, 즉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인간으로서 견디지 못할 정도의 더러운 공간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든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암묵적으로 동의해 '증인'으로서 살아남은 사람, 현실보다 차라리 나은 매일 밤의 악몽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 수용소 조직을 형성하며 서로 도우며 살아남은 사람이다.

 

  "나는 17개월 동안을 레닌그라드의 감독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내가 작가였다는 것을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다.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입술이 시퍼렇게 얼은 여인이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글로 쓸 수 있나요?'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기도 힘든 그 여자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64p)

 

  인간의 모든 것, 정신마저 파괴시키려고 노력했던 그 죽음의 장소들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생존자'들의 내면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었는지 탐구해볼 수 있었던 인문학 책 <생존자>. 그들이 가장 원했던 일,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슬픔, 끝없이 따라다니는 고통이 완전히 망각의 세계 속에 사라져 가지 않게 하는' 최소한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이 실감나게 재현된 책이다. 극한의 세계를 '책'으로 체험하면서도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오싹할 수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어 증거와 기억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던 생존자들의 모습을 보면 숙연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Underline

 

 

 

  - 생존자에게 있어서는 내려가는 길이 다시 곧 올라가는 길이 된다. 다른 유형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자들도 바로 사선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을 넘어가 버리지 않고 그 선상에 '머문다'는 것이 구별되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특이한 자유가 정말 현실화되는 것은 존재와 사멸이 팽팽히 맞선 지점에서이다. 그들의 혜안은 마음속의 환상으로 흐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돌발적으로 닥친 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갑자기 발견하고 놀라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죽음이 곧 닥쳐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항상 죽음과 접하고 있으므로 생존자들은 죽음을 어느 정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한 결코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없다. 그리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생존자들은 우리들보다 더욱 절실하게 삶에 뿌리박게 된다. 그들의 살아남으려는 의지는 삶 자체로 추진되는 것이며, 강하게 튕겨 오르는 용수철처럼 완강한 힘을 가진다. (55p)

 

 

  - 정신적 파괴는 대량 학살의 요구와는 종류가 다른 것인데도,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된다. 즉 영혼을 죽이는 것이 목표다. 인간의 정신력을 말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공포나 극도의 궁핍보다도 우선 생존자의 순수성과 가치 의식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선행되었으며, 이것이 배설물에 의한 고문으로 나타난 것이다. (...) 왜 그토록 비참하게 수용자들을 학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왜 그런 동물 이하의 상태에까지 인간들을 몰아넣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정곡을 찌른 해답은 "SS 대원들의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희생자들이 도저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천하고 더러운 몰골을 하고 있을수록, 학살자들은 인간을 대량 살육한다는 공포감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이다. (119p)

 

 

  - 동정심이란 좀처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특히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절대로 금물이었다.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단력을 약하게 할 뿐 아니라, 지하조직의 모든 멤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집단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이 죽음의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상처를 지불하고라도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적인 큰 손상을 입더라도 삶은 그대로 지속되어야 했고, 전략적 타협과 도덕적 타락을 분별할 수 있는 명확한 시선도 그대로 유지해야 했다. 매번 어려운 선택이 강요되었지만, 어떤 임무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가 없었다. 가장 선량하고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도, 작전에 투입될만한 행동력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234p)

 

 

  -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빵을 훔칠 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재소자가 생겼다 하더라도, 그를 SS대원들에게는 물론 구역 감독에게도 보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처벌했던 것이다. 그가 죽을 만큼 매를 때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화장터에 보내지기 꼭 알맞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 빵의 법률을 인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법은 실제로 수용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도덕성을 유지시키고, 동시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모두들 깨달았기 때문이다. (255p, Weinstock)

 

 

  - 이곳에 온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예전의 바로 그 사람인가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인간의 존재는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엔 비참하고 가련한 동물만이 남아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벌거숭이의 동물, 심한 구역질을 참아가면서 타인의 땀으로 흠뻑 젖은 누더기를 가지고 열심히 자신의 알몸을 가리고 있는 동물. (315p, Szmaglewska)

 

 

  - 죽음에 대한 자각은 삶을 향한 강력한 관심을 일으키는 데 반하여, 죽음에 대한 부정은 격렬한 파괴 행위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와 극한 상황의 궁극적 차이, 즉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아마도 옥타비오 파스의 다음과 같은 짧고 신랄한 말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죽음에 맞설 때면 삶이 되고, 삶에 맞설 때는 죽음이 된다." (3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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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배설물의 공격' 편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더욱 참담한 모습에 할말이 없어지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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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인문 고전에서 배우는 사랑의 기술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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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에 대한 안목이다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 한귀은> 

 

 

 

 

 After Reading

 

 

 

  이론적으로 '사랑'을 익히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사람 사이의 가장 미세한 감정을 나누는 것이 사랑이니만큼, 가장 예민한 사이가 '사랑'이라는 관계고 의도치 않은 상황들도 자못 등장하기 때문이다. 누구나에게 평범할 수는 없으며 어디로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는 사랑은, 그 중 '가장 좋은 사랑'이라는 것마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워 변화할 수는 있다. 기쁨은 더욱 강력하게 누리며 아픔은 최소화할 수 있는 성숙한 마음가짐.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사랑 앞에서 비교적 단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역시 도움이 된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에서 '감성인문학'을 표방하며, 삶에서 만나는 사소한 순간에서의 인문학을 적용하게끔 도와주던 저자 '한귀은'. 그녀가 이번에는 인문고전들을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철학'을 나눠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사랑'에 대한 인문 고전, 하면 생각나는 것이 몇가지 있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격정적인 사랑을 보여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책으로 접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담긴 <제인에어>와 <상실의 시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위대한 개츠비>까지.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과는 겉으로 보기에 조금 다른 부분도 존재하지만, 배우고 싶은 면과 따라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뒤섞여 있는, 사랑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고전들이다. 저자가 그 고전들을 가지고 한 이야기들은 이미 읽어본 책들 중에서 '아,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구나' 또는 '이 부분을 나도 모르게 지나쳐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또한 읽어보지 못한 고전들은 '언젠가 꼭, 성숙해지기 위해 갖추어야할 책'이라고 생각하여, 담아두기로 했다.

 

  언젠가 연인과 헤어지고 난 후, 많은 친구들 앞에서 펑펑 울며 고개를 들지 못했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때, 나는 사랑에 대해 낯설었고 익숙하지 않았고, 조금은 냉정했기에 깊은 마음으로 위로해주지 못했다. 이 친구의 모습처럼,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너무나 아파하고, 참지 못한다. (물론 아파하는 모습 뒤에 너무나 행복한 모습이 있지만) 그리고 사랑에 대해 무조건적인 판단을 거듭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왜 아픈지 모르고 아파했고, 진통제를 무조건 삼키듯 아픔을 내버리기 위해 분주하다. 자신이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대중매체에서 학습한 사랑을 반복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설레고 떨리는 감정 앞에서 저질러버리는 실수다.

 

  지나간 사랑의 아픔을 빠르고 냉정하게는 아닐지라도 서서히, 추억으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나도 모르는 사랑 앞에서의 '민낯'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도록, 더이상 겁먹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설레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감성 인문학'. 사랑 앞에서 조금 더 크고 성숙해지고 싶다면, 이 책을 읽고 사랑에 대한 안목을 키워갈 수 있을지 모른다.

 

 

 

Underline  

 

 

  - 니체는 사랑이란 정과 망치를 들고 하는 것이라 했다. 망치를 들고 돌 속에 잠들어 있던 형상을 드러내는 게 사랑이라고 했다. 니체는 삶 자체가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연인의 삶, 연인의 자아조차 사랑을 통해 아름답게 드러내는 것, 그것은 니체는 사랑의 가장 최고치로 보았다. 상대에게 정과 망치로 쪼이고 깎이는 데 안 아플 수 있겠는가. 공고했던 편견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무조건 아픔을 수반한다. 하물며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조차 마음 한쪽이 슬쩍 무너지는 것 같은데, 내가 사랑하는 연인과 마주보고 앉아서 내 세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어찌 안 아플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말했듯이, 그 아픔은 쾌락과 함께 오고, 그래서 차라리 짜릿한 아픔이다. 무엇보다 그 편견의 세계가 깨어지고 진정한 '나'가 그 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8p)

 

 

  - 사랑하는 연인은 나에게 결코 평범할 수 없다. 평범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을 리 없다. 사랑으로 인해 나는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를 사랑하는, 진실로 비범한 존재가 된다. 사랑이 자긍심을 불러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평범하지만 사랑한다고 여긴다면, 그 평범함조차 사실은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너무나 특별한 평범함' 이 아니던가. 그런데 사랑이 끝났을 때, 그 사람이 여전히 특별한 존재던가? 아닐 것이다. 그/그녀는 그저 수많은 남녀 중 한 명일뿐이다. 실로 우리의 연애사는 사랑이라는 환상으로 시작돼 이별이라는 환멸로 끝나는 것 같다. (78p)

 

 

  - 일종의 '퇴행'이다. 성인이 유아기 때로 돌아가는 증상 말이다. 하지만 사랑을 하면 이렇게 퇴행하게 되어 있다. 사랑은 전 존재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 생애가 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지금의 나'만 사랑하는 게 아니다. '미래의 나'도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과거의 나'도 그 사람을 소급해서 사랑하게 된다. 너무 늦게 만나서 억울하다는 듯이 어린 시절의 '나'까지도 호출하여 사랑에 참여시킨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직 자라지 못한 내 마음 속 '어린 나'도 사랑해줘요"라는 식의 소급적 구애 말이다. (138p)

 

 

  - 살면서 이런 일이 어디 흔한가. 우리가 어디서 이토록 많은 칭송을 받았던가. 능력, 외모, 취향, 성격은 물론, 연인들은 상대방의 냄새조차 칭찬한다. 보들레르는 연인의 머리 냄새조차 묘사해냈다. "그대 머리 타래의 솜털 난 기슭에서 나는 타는 듯이 취한다."라고.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태어나 최초로 미적인 대상이 된다.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이다. 우리는 자기 연인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찬미하며,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자신을 찬미한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면 그토록 괴로운 것이다. 그 칭송의 제단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환상이라고 정의 내려지고 곧바로 환멸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아, 다 거짓이었구나!' 하면서 치를 떨게 되는 것이다. (142p)

 

 

  - 추억 속의 사람이 남다른 이유는 자신이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알지 못하는 그 '빈 곳'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그 사람 전체가 신비롭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이를 '자이가르니크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이 증후군은 심리학자 자이가르니크가 명명한 것으로, 완성한 일보다는 완성하지 못하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일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게 남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그녀와 '끝까지' 갔다면 추억은 오히려 별로 남지 않는다. 미완성의 사랑이야말로 추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억 속 그 사람은 언제나 미결수다. 나의 기억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결코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채로 남아 있는 매력적인 미결수 말이다. 그리고 그 미결수는 여지없이 '나'에게 상처를 낸다. 추억이 된 사랑이 아픈 이유다. (2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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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쉬웠던 점은 '인문학적 용어'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주석'이 있었으면 했다는 것입니다 :)

찾아보면서 읽었네요. 그래도 인문학 도서들에 비해서 가볍게 익힐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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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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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으로 전하는 인문 테라피 <모든 순간의 인문학 - 한귀은> 

 

 

 

 

 

After Reading

 

 

 

   스무 살이 되면 어찌됐든 마음도 넉넉해지고 생각도 커질줄만 알았는데, 자꾸만 내 마음이 좁아짐을 느낀다. 감정을 조일 수 있는 힘이 느슨해진 것 같다고 느낀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를 때가 행복하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다. 하나하나 알아갈 수록 하나하나 허무해지기도 한다. 아마도 나이를 더 먹고 먹어도 비슷해질까? 이런 생각이 들때마다 소설보다는 자근자근 읽을 수 있는 에세이가 땡긴다. 생각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에세이라면 더더욱 좋을 터.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집어들었다. 작가의 이름은 낯설지만 표지의 카피부터 포근한, 에세이.

 

  제목부터 '인문학'이라는 따분해보이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만 내가 이 책을 에세이라고 칭한 것은, 역시 에세이를 읽는 만큼이나 산뜻한 기분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문학이 빛을 발하는 아주 사적인 순간들'을 통해 마음을 다독여줄 감성 인문학을 말한다. 한마디로 인문 테라피다. 이 책은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옆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인문학을 좀 더 일상적인 측면에서, 좀 더 감성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해나간다. 감성 인문학은 어떤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 말하던 '학이 아니라 악~'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공부하고 연구해 나가는 전문적인 인문학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즐기는 인문학도 필요하다. 역시 새롭기도 하고.

 

  작가는 역시 우리 곁에서 항상 맴돌고 있는 책,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을 통해서 인문학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한다. 사람 사는 데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관계, 고독과 불안 등과 관계한 인문학적 감성을 우리에게 전한다. 생각보다 인문학은 우리 주위 많은 풍경들에 존재한다. '어, 이게 무슨 인문학이야'하고 생각할 만한 것들에도 존재한다. 그 풍경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가 자신에게 칭하는 인문학 딜레당트라는 호칭이 당신에게도 붙여질 것이다.

 

  모든 순간을 인문학적 감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성숙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Underline

 

 

 

  - 숨쉬는 것 자체, 공부하는 것 자체, 산책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 행위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건강을 위해, 진학하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살을 빼기 위해 우리는 이런 행위를 수단으로 한다. 만약 숨쉬기, 공부하기, 산책하기 등을 그 자체로만 즐긴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그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새삼스럽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들, 목표로 하는 것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다. 내가 가두고 있던 '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자아와 자기의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38p)

 

 

  - 때때로 우리는 어떤 문제를 정확히 보기를 꺼린다. 정확히 보고 나면 그 문제를 정확히 해결해야만 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을 경우 우리는 차라리 문제 자체를 바꿈으로써 문제에 대한 제 깜냥만큼 대처하려고 한다. 자신이 그나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렇게 해서 문제의 근원을 '나'로 돌려버리고 어떻게든 자신을 해코지함으로써 그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믿고 싶어한다. (101p)

 

 

  - 나는 상실감조차도 어떤 의미로 재해석해야지만 인생의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경제관념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던 교원 임용고시 준비생이었던 나는 상실의 의미를 찾기 위해 각종 수험서들을 물리고 도서관 서가를 서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비책을 찾기라도 할 듯 책들을 뒤졌다. 당시의 독서는 당연히 정독이 아니었다. 아니, 글자를 읽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의 행간에 멍한 눈길만 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드문드문 어떤 단어가 들어왔을 것이고 나는 파편적으로 주워 모은 그 단어들을 내 맘대로 배치하여 또 다른 책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쓰지 않은 책, 내가 읽지도 않은 책, 그것으로 혼자서 낸 상처는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147p)

 

 

 - <쇼핑의 유혹>의 저자 토머스 하인은 구매자의 양면성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자못 진지한가 하면 경박하고, 민감한가 하면 탐욕적이고, 절약하는가 하면 양면성을 보인다"고. 그런데 이 양면성 때문에 쇼핑은 더욱 자극받게 된다. 뭔가를 살까 말까 망설일 때 우리는 스스로를 '진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박하게' 사버린다. 자신을 '민감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탐욕'이 보이지 않게 된다. 늘 '절약해왔다'고 합리화하기 때문에 확 '질러버리는' 대범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180p)

 

 

 -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 그 이데아는 요샛말로 꼰대의 단어 같지만, 우리는 그동안 우아한 멘토의 아리송한 아포리즘에만 열광했기에 오히려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데아를 추구하며 남과 '비교하지 말자'라고 하면 너무 비현실적인 처방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 스스로 내린 처방이 있다. 나는 남과 비교가 되어 슬슬 우울해지기 시작할 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애써 의식한다. 나의 부모님, 나의 아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나를 '인정'한다. 능력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자체를. 나는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물어본다. 당연히 아니다. (2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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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딱히 독자의 성별을 가리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여성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라서 그런지

여성의 관심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뭐, 표지를 보면 남자들이 이 책을 고르진 않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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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과 유토피아 - 니체의 철학으로 비춰본 한국인, 한국 사회
장석주 지음 / 푸르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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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크로스 인문학 <동물원과 유토피아 - 장석주>

 

 

 

 

 

 

 

After Reading

 

 

 

  작가 장석주는 독서광이라 불릴만한 풍부한 지식과 시인이라 불릴만한 멋진 문장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마흔의 서재>를 통해 그의 몇십년 묵은 책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역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글들을 보고 감탄했다. 그렇다면 니체는, 수없이 많이 불리우는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이며 역시 수없이 많이 인용되고 재탄생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장석주 작가는 40여년동안 되풀이하며 읽어온 니체의 책들 속에서 그의 사유를 발견하고, 비록 같은 시대가 아닐지라도 현재에도 통용되는 그의 철학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이면들을 관찰해보고자 했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차라투스트라..>를 읽어보지 못하였으나 이 책에는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낙타, 사자, 원숭이, 뱀, 독파리, 거머리 등의 동물들.. 그 동물들은 우리가 흔히 오락적으로 보는 동물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은 마치 인간의 부조리하고 부끄러운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하고도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장석주는 한국 사회가 동물원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내부에 위험과 불안이 비등점을 향해 치솟고, 도덕과 정의, 원칙과 규범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힘이 으르렁거리며 맞서는 정글'과도 같은 사회가 바로 그가 말하는 동물원 사회다. (장석주 작가 이외에도 인간의 동물에의 비유는 니체와 라작에 의해서도 이야기되어 왔다.)

 

  작가는 책 속에서 니체에 의한 동물의 상징성에 대응되는 우리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파악해나간다. 이를테면 반값등록금은 학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약해진 아버지의 권위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없이 자란 아이들이 남성성에서 부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중간쯤에 나오는 '이타주의'에 관한 단상은 우리가 동물보다 더 발달된 본성을 확인시켜줌으로서 보다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 힌트를 주기도 한다.

 

  다소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 끝에 '한국인의 정서(진정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국인의 '한'과 고통, 가난, 전쟁, 빠른 성장과 같은 역경 속에서 견뎌낼 수 있었던 우리 고유의 힘은 문학 속에서, 노래 속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월드컵의 붉은 함성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삭막한 사회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한국인에게 내재되있다. 그 힘이 과잉되어 부정적으로 작용하느냐, 긍정적으로 작용하느냐의 길은 똑똑한 사유와 깨끗한 얼굴을 가진 미래의 우리 모습에 달려있다. 많은 것에 대한 불안과 부조리함, 시시각각 행해지는 부도덕적인 일들. 이런 동물원 사회에서 벗어나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로 나아가기 위해서.

 

 

Underline

 

 

 

  - 사람은 모든 동물들을 다 합해놓은 것보다 더 동물적이다. 아울러 그 동물성을 도약대 삼아 더 높은 존재의 위상을 획득하는 게 사람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떤 다른 동물보다 더 병들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틀림없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합쳐진 것보다 더 대담하고, 더 새로운 것들을 행하고, 더 과감하고, 더 운명에 도전해왔다. 그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실험기구인 인간은 최후의 지배권을 위해서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하는 자, 불만을 터뜨리는 자,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자이다.(니체, 선악의 저편)" 자기 자신을 실험 기구로 쓴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람은 예속이 아니라 자유를,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주인의 도덕을,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 대한 최후의 지배권을 찾기 위해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한다. 그 투쟁의 동력은 기꺼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제 운명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40p)

 

 

  - 왜 우리가 불안한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파도들은 더욱 난폭해지고 그에 따라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타이타닉'호에 함께 타고 있다. 자크 아탈리는 '타이타닉'이 '우리 사회'라고 말한다. 그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예측되지만, 예측의 수단만큼은 예측되지 않는 사회"다. 한국인들이 승선한 '한국호'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한다. 미래는 불확실한데, 그것은 우리 삶이 예측불가능한 위험들 속에 있다는 반증이다. 그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이 우리의 삶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 마음에 불안을 키운다. (124p)

 

 

  - 목구멍을 물어뜯는 무거운 뱀을 물리친 젊은 양치기도 웃고, 차라투스트라도 웃는다. 웃는 자가 되려면 먼저 마음에 있는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려야 한다. 젊은 양치기는 그의 목구멍을 물고 몸에 매달렸던 묵직한 뱀의 대가리를 끊고 멀리 내던졌다. 그리고 웃었다. 웃음은 하나의 출구다. 웃는 자는 억압과 불행에서 단숨에 벗어난다. 무거운 것 모두가 가볍게 되고, 신체 모두가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게 알파이자 오메가라면. 진정,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알파이자 오메가렷다! (니체, 일곱개의 봉인) 웃는 자는 더 바라지 않는다. 웃음이 바로 궁극의 그것이기에. (137p)

 

 

  - 말 속에도 침묵이 깃든다. 말들은 그 내부에 긴 침묵과 짧은 침묵을 갖고 있다.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은 소리만 듣지만, 깊이 경청하는 사람들은 말 속에 숨은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책은 타인의 말과 세계를, 저 멀리서부터 오는 의미들을 겸허하게 경청하려는 자의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집중하면 할수록 주변 소음을 잠재우는 힘은 강력해진다. 소음이 잦아들고 침묵의 오의에 더 가깝게 다가간다. "생략법의 글쓰기, 불명확한 재현, 단속적인 대화체,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말없음표(마르크 드 세메트, 침묵예찬)"등은 가장 흔한 침묵의 양태들이다. 말줄임표는 통사적 망설임, 판단유보의 기화다.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는 그 침묵들은 독자를 책 속으로 끌어들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읽히는 침묵. 그것은 음향적 현실에 겹쳐지는 하나의 부주제, 자아에 대한 성찰과 세계 인식의 장소다." (250p)

 

 

Add...

차라투스트라 책은 당분간 읽어볼 엄두가 안난다. 아마 뭔 소린지 이해하지 못할듯.

그러고 보면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끌어주고, 또 그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끌어주는 게, 참 독서의 묘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참 어려웠어 니체철학 ㅠㅠㅠㅠㅠㅠ 나중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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