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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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했던 여름이 지났다. 날짜로, 입추(立秋)를 보내고 나니 믿기지 않게도 시원한 바람이 줄곧 불어온다. 여름이 싫은 건 눅눅함에서 오는 짜증 때문. 언제 이것들이 사라질까 싶었더니 이제야 서서히 얌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사실 모든 일들이 그랬다. 울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분노했던, 참을 수 없이 싫었던, 얼굴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던, 시간 한 토막을 딱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슬펐던 모든 것들을 우리는 지나쳐간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른대도 멀뚱멀뚱 걷고는 있다.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 또한 그러한 지점들을 지나치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온 힘을 다하여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가파르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상실과 부재에 대해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잃고, 무언가를 잃고, 탄탄히 흘러가던 삶의 중간이 뚝 끊어지는 일들을.

 

"웃는 것, 또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것." ('침묵의 미래' 133쪽)

 

 왠지 모르게 눅눅함이 깃들어 있음에도 시원해 보이던 표지에 취해 읽은 단편들 속에서, 상실을 맞이하는 건 눅눅한 여름날에 읽기엔 꽤 힘든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오싹할 정도로 춥기까지 해서 낯설은 감정이었다. 소설은 첫 단편 <입동>부터 너무 가혹했다(다른 책에서 이미 읽은 것인데도). 아이의 죽음과 새롭게 얻은 집 사이에서 도저히 우뚝 설 수 없는 부부의 모습을 다뤘다. 그를 시작으로 죽음, 이별, 소멸, 실패, 온갖 어두운 것들이 밀려들었다. 너무 우울해서 책을 잠깐 덮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럴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뒤로 갈수록 어두운 것들보다는 적응과 이해, 용서와 같은 '다시' 걸어가기 위한 것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상실이란 배경 속에 사는 '그쯤의 어른'들의 모습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를테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바깥을 인식하고 이를 악무는 것 ('건너편'),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 속에 담긴 과거를 보는 것 ('풍경의 쓸모'), 슬픔 대신 무의미한 일상에 기대는 것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과 같은. 작가는 '그쯤의 어른'들이 위기와 상실을 겪고 마치 관성처럼 꿋꿋이 해내고 다시 돌아오는 모습들을 아주 적확하게 그려내고, 파장이 큰 이야기 속에서 또한 정말 그럴듯한 문장으로 중심을 잡는다. 이런 조화로움 때문일까. 참을 수 없이 우울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김애란의 소설을 찾는 건.

 

 작가의 전작인 <비행운>을 읽었을 때 서른을 상상했던 나는 이제 그쯤에 와있고, 또다시 언제 올까 싶은 김애란의 소설 주인공들은 이제, 아이에게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가리는 손') 어른이 되어 있다. 그의 다음 소설은 어떨까. 뭐가 됐든 작가는 우리에게 닥친 위기들을, 어디로 걸어갈지 고민하는 모습들을 묵묵히 그리고 있을 것만 같다.

 

 

20쪽, <입동>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99쪽, <건너편>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되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173쪽, <풍경의 쓸모>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럼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266쪽,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가.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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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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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두려워질 때가 있었다. 의식 있는 사람이고 싶어하지만 내 속에서 어떤 차별적인 시선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목격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내가 보였다. 여성으로서 여성을 보는 시선이 얼룩질 때도 있었고 누군가가 당하는 차별을 자연스레 방관하고 인정할 때도 있었다. 부끄러웠고 배우고 싶었다. 계속 그렇게 고개를 숙이다 보면, 나 또한 은연중에 당하고 있었던 차별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조용히 억울한 마음을 삭이기보다는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자그만 관심의 시작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때였다. 바짝 호기심이 일었던 때라 많은 책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정작 걸음마 단계인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멋지게 디자인된 표지와, '엠마 왓슨이 추천한'이라는 카피보다, '모두를 위한'이라는 제목의 수식어가 마음에 들었다. 페미니즘이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만의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은 그동안 페미니즘에 대해 의아했던 부분들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의 페미니즘 작가 '벨 훅스'는 어렵고 학문적인 페미니즘 이론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만한 간결하고 쉽게 읽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잘못된 정보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카더라와 오해들이 페미니즘의 발전을 저해한다 믿었다. 오랫동안 그러한 책을 찾던 작가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책을 직접 집필했다. "명료하고, 간결하고, 쉽게 읽히는" 페미니즘 입문서를 말이다.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책은 놀라울 정도로 재밌게 읽힌다.

 

작가는 일단 페미니즘 정치의 역사와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한 후, 다양한 측면에서 발생한 페미니즘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구별한다. 그 과정에서 임신 선택권, 인종과 젠더, 페미니즘 남성성, 결혼과 육아, 페미니즘 성 정치 등의 쟁점과도 마주하는데, 현대에 와서 이러한 쟁점이 일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 페미니즘 신봉자들에게는 선택과 행동의 기회가 주어졌고, 기존의 잘못된 사회구조에 젖어 있던 사고와 행동을 유지한 채로는 아무리 페미니즘을 외친다 하더라도 성차별주의를 완전히 극복해낼 순 없었다. 지배와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 사고는 상호 관계와 상호의존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평등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고 동시에 지배를 종식할 방법을 제안한다 (262쪽)"고. 또한, 페미니즘은 백인 우월주의와 자본주의, 계급주의, 가부장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포함한, 우리를 괴롭혀온 모든 것들에 대항하는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사회운동(236쪽)"이라고.

 

페미니즘을 둘러싼 온갖 부정적인 소문들을 듣고 '설마'하면서도 믿어본 적이 있는가. 남성과 여성이 욕설을 하고 서로를 비아냥대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에 의하면, 페미니즘의 적은 단지 남성이 아니며 성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페미니즘을 읽어야 한다.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다.

 

 

16쪽,
이런 얘기를 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는다. 페미니즘에 관해 어떤 책이나 잡지를 읽어봤는가.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가. 페미니즘 활동가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나면, 그들이 아는 페미니즘은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것일 뿐이며 페미니즘 운동이 실제로 무엇인지 거기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98쪽,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신비』에서 여성이 전업주부로 가정에 속박되고 예속된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불만을 "이름 없는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이 문제를 여성 전체의 위기인 양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고학력자 백인들의 위기였을 뿐이다. 그들이 가정에 속박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대해 불평할 때, 이 나라의 수많은 여성들은 일터로 향했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중 다수에게 전업주부가 될 권리는 오히려 ‘해방‘처럼 보였을 것이다.

176쪽
남성중심주의만 강조하면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여자가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가부장적 사고에 익숙해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어떤 수단으로든 힘없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배의 윤리학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235쪽,
우리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비전의 맥박은 여전히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진실과 공명한다. 즉,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 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된다.

260쪽,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천차만별이므로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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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한국사 : 현대편 쟁점 한국사
박태균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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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가 역사를 등한시했던 지난날처럼, 내게도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라는 사전적인 의미에서만 머무르곤 했다. 학생 때는 연표를 작성해 외우는 역사가 너무도 재미가 없었고, 성인이 돼서도 가끔 흥미를 느끼는 주제가 생길 때만 종종 들춰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사건들이 일어나자, 그 의미는 보다 폭넓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조들의 빛나는 영광과 쓰디쓴 실패, 모두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E. H Carr)'라고 했다. 백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이다.

 

 "역사는 하나의 교과서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명의 역사가가 있다면 10개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7쪽, 기획의 말 - 한명기)


 역사라는 분야야말로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쓰인 것들을 두루 읽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에 너무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면에서 『쟁점 한국사』라는 책은 남다른 장점이 있는데, 한국사의 핵심 쟁점이라 할 주제들에 대한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글을 모았다는 점이다. 지은이의 이름에는 역사학자 각각의 이름이 있지만, 국정 교과서 논쟁으로 떠들썩할 당시 창비 학당에서 열린 강의를 통해 시민들과 토론했던 내용을 토대로 묶었기에 좋게 말해 시민들이 참여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가까운 역사인 '현대편'에는 관심 있는 시대였던 만큼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주제별로 깊이 공부해본 적이 없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부끄럽게 마주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희생자들 수가 엄청난 규모였다'는 점, '베트남 전쟁 이후, 수많은 외화에도 불구하고 부실기업이 늘어났다'는 점, '민주화 운동 속에서 도시 하층민들이 선두에 서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어린아이들도 참여해서 부모 형제들을 위해 운동을 했다는 점' 등,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마치 꼬인 실처럼 지금까지도 엮여있는, 결코 떼놓고 볼 수 없는 역사들도 있었다. 미국의 신탁통치,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유신, 민주화 운동 같은 주제들 속에는 현재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들이 가득했다. 국제적 관계 속에서 강자들은 약자를 늘 오랫동안 억압해왔고 약자는 항상 소극적인 면모로 일관했다. 약자는 때로 강자가 되기도 했고, 그런 과거는 기억 속에서 지워갔다. 국내적으로 강자들 또한 마찬가지 행동을 취했지만, 약자들은 피를 흘리고 싸워가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소리 내 외쳤다.

 

 우리는 역사적 순간을 걷고 있고, 아직은 출발점에 서 있다. 과거의 역사적 순간은 개개인의 관점을 정해주는 소중한 경험이 되고, 그런 소중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만약 그날 도청에 남았던 분들이 드라마 「시그널」처럼 지금 우리에게 무전을 걸어와 일제 35년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이고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 답해야 할까? 여전히 지금과 같은 현실이 계속되어 대통령은 유신잔당 정도가 아니라 유신공주가 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헬조선 흙수저에 신음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꿈은 정규직인 나라라면, 그때 그분들이 도청에 남는 게 맞았을까? 유신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광주도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씌어져야 한다. 1980년 광주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응답하라, 2017!" (178쪽, 유신, 두 번째 내란 - 한홍구)

 

 

53쪽, 해방과 분단의 현대사 다시 읽기 - 정병준
전후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역사 분쟁, 영토 분쟁을 벌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천황이나 일본국가 · 국민 전체가 아닌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 일본 군부와 정치 지도자 일부만이 그 책임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일본은 국가 전체가 전쟁 책임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성하고 확인할 수 있는 국제적 프로세스를 거치지 못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의 참화를 국제적 규범 속에서 직시하지 못하고, 단지 일본의 패전으로만 기억하는 역사적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다.

114쪽, 박정희와 미국, 이승만과 미국 - 홍석률
강자들은 약자를 항상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들로 묘사해왔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사람들이 식민지 사람들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항상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약자들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할 능력이 없기에, 강자에 의해 항상 주의 깊게 관리되어야 할 존재로 묘사된다. 그럼으로써 강자가 약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이들을 관리하는 것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162쪽, 유신, 두 번째 내란 - 한홍구
이 사건을 33년이 지난 후에 무죄라고 하니 어쩌면 좋을까. 솔직히 그때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국민은 극히 소수였다. 다들 빨갱이를 미리 적발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대공 요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우리가 하재완과 같은 골목에 살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모두 그의 아들을 묶었던 새끼줄 한 자락을 잡고 다닌 셈이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모두 화해 이야기를 한다. 화해,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말하기 전에 구경꾼들은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250쪽, 민주화의 숨은 주역을 찾아서 - 오제연
한국 민주화의 역사 속에는 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 외에도 많은 시민들의 피와 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기록을 남기고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학생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다.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도시 하층민 등 일반 시민의 역할이 축소 · 은폐되거나 주변화되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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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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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얼굴이 벌게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내 문장도 이렇게 보였을 것 같아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칭 독후감이라고 하는, 블로그에 쭉 나열된 리뷰에 나는 정성을 다해왔다. 비공개라면 모르지만, 불특정 다수에 공개되는 글이었다. 한 페이지의 글을 쓸 때, 적으면 몇 시간, 집중이 잘 안 될 때는 오늘은 날이 아니라며 접어두고 하루를 넘기기도 했다. 수정과 검토를 여러 번 했다. 하다가 더는 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싶지 않을 때 '확인'을 눌렀다.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데 글은 왜 이 모양이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누군가가 교정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쓰다 보면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더 잘 쓰고 싶은 욕심. 유려하고 멋진 문장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 그러다 보면 함정에 빠진다. 꾸미고 꾸미다가 기본을 잃는다.

 

 그러다가 책을 중간쯤 읽을 때쯤, 문장에 기본(혹은 정석)이 있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정확한 문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규정한 것인가. 누군가의 문장에는 누군가의 생각을 넘어서 삶이 반영되어 있기에, 그것을 수정한다면 '그것을 쓴 누군가'의 힘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특히 문학에서는. 그러면 문장의 교정은 어디까지여야 할까.

 

 교정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정확한 문장'을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의 구성 때문이다.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이라는 부제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제목의 내용은 책 속에서 번갈아 배치된다. 20년 동안 교정 일을 하며 경력을 쌓아온 저자는 교정 일을 하면서 조금 특이한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며 문장을 다듬는 기준을 묻는 편지였고, 회신과 회신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저자에게는 자신의 직업을 되돌아볼 특별한 사건이 된 듯하다. 이 편지 '에피소드'와 '문장 교정법'의 내용이 각각 진행되면서, 저자는 '정확한 문장'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상한 문장'과 '정확한 문장'의 경계에 관해 고민한다.

 

 "문장의 시선은 결국 거리를 좁히려는 나의 의지와 당겨지지 않으려는 풍경 사이의 긴장감이 만드는 것 아닐까요. (146쪽)"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소감은 '결국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교정일을 봐온, 일명 전문가인 저자는 그 긴장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글을 읽을 사람의 시선을 좋은 간격으로 맞춰주는 것. 그래서 교정은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는 표현'이란 책 속의 말에, 그동안 썼던 나의 글들이 스르르 스쳐 가며 나를 겁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쓸 때마다 이 책의 내용을 떠올려 스스로 괴롭힌다면 좋은 영향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적당히, 가끔 들춰보며 되새기면 충분할 것 같다. 어쨌든 정답이란 없으니까.

 

 

 

36쪽,
꿈은 말하고 있었다. 네 삶은 비단 길이었다가 자갈밭이었다가 다시 비단 길이었다가 자갈밭일 것이다. 아니, 꿈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 아닐까.
삶은 엉덩이다, 알겠느냐?



64쪽,
말하자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것인데, 이거야말로 반복해 쓰면서 중독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대하다`의 활용형인 `대해(서)`나 `대한`만큼 문장 안에 자주 등장하는 낱말도 드물다. 문제는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까지 무슨 장식처럼 덧붙인다는 데 있다.



99쪽,
정답 같은 건 없습니다. 그건 심지어 맞춤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맞춤법이란 그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규칙일 뿐이죠. 게다가 지금처럼 국가기관이 맞춤법을 통제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맞춤법에 그렇게 목을 맬 이유도 없지 싶습니다. 다만 책을 사서 읽는 독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제가 하는 일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게이트키퍼라고 하나요. 문지기. 맞습니다.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뿐이죠. 가끔 그런 꿈도 꿉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들이 저마다의 표현법이나 문장 규칙에 따라 쓰인 걸 구경하는 꿈. 멋지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112쪽,
나는 생각했다. 저 문장은 얼마나 이상한 문장일까.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 얼마나 이상한 삶들이 얼마나 이상한 내용을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한 문장일까. 그리고 만일 저 길고 긴 문장을 손본다면 어떤 표기가 맞고 어떤 표기가 그렇지 않은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표현이 어색하고 어떤 표현이 그렇지 않은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들어내거나 고치거나 다듬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미처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는 쓰레기들일까. 아니면 빨랫줄에서 떨어져 흙이 묻은 빨래들일까. 그것도 아니면 제 어미를 쫓아가지 못하고 뒤처져 울고 있는 고양이 새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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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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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제목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의 의미를 스스로도 제한해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는, 이를테면 학력을 쌓아올리는 행위 같은 것들이요. 그다음은 저자의 이름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에 새겨져 있는 폭넓은 정의를 떠올렸죠. 비록 우리에겐 '공부'의 의미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퍽 제한적인 의미의 것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의 삶을 개척"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공부'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정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지긋지긋한 그 이미지를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 책의 느낌은, 그동안 정여울 작가의 다른 책에서 본 느낌과 비슷했어요. 책과 인문학이 적절하게 조합된, 독서 에세이 같은 느낌이랄까요. 사실은 최근 독서 에세이를 멀리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느낌만 계속 읽으면 뭐 해? 내가 읽지! 하는 마음으로요) 처음에는 살짝 투덜투덜 대기는 했지만, 참 어이없게도 빠른 시간 안에 작가의 글에 설득당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공부'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인 것들을 적절하고 시원시원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솜씨, 고작 한 페이지와 한 문장에 거론된 책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그 책에 매료되어 한 번이라도 검색해보고 읽어볼 수 있게 만드는 설득력. 그런 점에서 정여울 작가의 연륜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작가의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제가 가장 잊지 못할 부분이자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 '동경(Sehnsucht)'은 작가에 의해 이렇게 표현되었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고(故) 박완서 선생님을 향한 오랜 동경을 해소하였고,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 가슴 쿵쾅거리며 좋아했던 책의 작가들을 (지금도) 사랑하지만 동경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그 뜨거웠던 가슴이 식었다 끓었다 하는 루틴이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것에 서운해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온도가 조금 낮아졌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죠.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진짜 배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여울 작가는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과 작은 경험들을 통해, 이 힘든 세상에서 '공부할 권리'를 되찾으라고 전언하고 있어요. 서울대학교,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등의 내용들로 채워지는 그의 프로필이지만, 작가 자신이 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이겨내게 만든 것은 '문제 풀이의 기술'이 아닌 '진짜 공부'였음을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죠.


'진짜 공부'란 무엇일까요. 어감은 좀 이상하지만, 내가 정말로 즐겁게 몰입할 수 있고 신명 나게 빠져들 수 있는 위로의 것이 '진짜 공부'가 아닐까요. 물론 '문제풀이의 기술'도 이 개떡같은 세상에 필요하지만, 작가는 인생을 공부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삶의 숭고한 가치를 배울 수 있는 시간, 나약함과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용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성숙한 마음가짐을 말이죠.

 

45쪽,
『일리아드』를 읽으며 의아하면서도 더욱 감동적이던 대목은 작가 호메로스의 태도입니다. 호메로스의 조국은 그리스였지만 그는 자기 나라 편에 서서 전쟁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가 아킬레우스의 최후나 파리스의 최후가 아닌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이 거대한 이야기를 끝맺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은 후 남기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헥토르를 잃고 목놓아 우는 트로이 사람들의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닮았습니다.

69쪽,
정의가 실현되기 이전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은 바로 `불의(不義)`의 사건입니다.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기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은 참을 수 없는 불의인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우스가 고의로 불을 숨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우스가 불을 숨겼다"는 단순한 문장 속에는 엄청난 폭력과 압제, 불의와 억압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지요.

187쪽,
끝나지 않은 이 공포와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우리의 관심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말했지요.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짜증 나는 아우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의 오싹한 침묵 때문에 일어난다고. 우리는 끊임없이 분노하고 고발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한국 정부가 두 손 두 발 다 들 때까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 정의와 자유의 깃발이 바로 서는 날까지.

343쪽,
프로필은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를 최대한 가리기 위한 `분장술`인 것 같습니다. 제 프로필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낀 절망감,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좌절감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지만, 겉으로는 `문학평론가`라는 정체성을 고수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했지요. 늘 일은 했지만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으니, 저는 항상 허공에 매달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쓸쓸함의 밑바닥에는 `공부로는 취직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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