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지내기 힘든 성격들
Helen Mcgrath.Hazel Edwards 지음, 이지연.안지연 옮김 / 학지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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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지내기 힘든 성격들』 Dr. Helen Mcgrath / 학지사

양립할 수 없는 성격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방법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들끼리도 서로의 마음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어렵고,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격 차이'라는 명분으로 이혼을 한다. 소통이 없는 가족들이 늘어나고, 어떤 그룹 안에 은근한 '왕따'들도 간혹 존재하고 있다. 살면서 일어나는 무수한 상황들에서,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변덕이 죽 끓듯하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규정하기도 힘들고 분류하기도 힘든 것인가.

  ​그러나 『함께 지내기 힘든 성격들』에는 사람들이 무심결에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와 그 행동에 대한 성격들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 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심리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단지 통계와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트러블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은, 본능적으로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려 하는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공부가 아닐듯싶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성격에도 표준은 없다. "그들은 단지 다수에 속할 뿐"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의 성향이 너무 달라 양립할 수 없고, 이 책에서는 그 양립할 수 없는 성격들을 서로 조화롭게 맞추기 위한 비법들을 소개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많은 성격들이 책 속에서 등장한다. 일단은 MBTI , 사람의 성향을 구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소위 '함께 지내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성격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월주의에 빠져사는 사람들, 약자를 괴롭히거나 상대방의 결점을 귀신같이 잡아내는 사람들, 융통성이 없고 항상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특히나 재밌게 본 부분은 '우리 가운데 일상의 포식자' 주제 하에서 다뤄졌던 '소시오 패스'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부단히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상할 정도로 '공감'하지 못한다. 죄책감도 없고, 그래서 스트레스도 없고, 누구보다도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능숙할 수 있는 이들은 같은 직장 내에 존재할지도 모르고, 친구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은 "매우 좋은 동시에 매우 나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경계해야 될 사람들이다.

  ​이렇게 나열된 모든 성격들에 대하여 이 책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그들을 대하는 전략', '자신이 그 성격에 해당될 때 대처 전략'이 항상 붙어 있다. 전략들을 읽어보자면, (특히 긍정적인 자세와 같은 것들) 단순히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도 많지만, 꽤 상세하게 (사례까지 함께 해서) 설명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어쨌든 이 책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함께 지내기 힘든) 성격들을 서로 맞춰보고, 만약 자신이 그에 해당된다면 반성하고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해결할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모두가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그것들도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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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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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불안이 반영하는 두 가지 특성은 물리적으로 다치거나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공포 그리고 수치심과 같은 심리적 상처를 받는 것이다. 세상은 완전히 안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비판이나 실수를 완전히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때때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거절을 당하고, 실패를 하고, 실수를 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하고,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원해지는 것에 대해, 그리고 어른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감에 대한 압박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낼 때가 있다. 결국 합리적으로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수용하게 된다. 즉, 인간은 실수를 하고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인생에는 우리가 어쩔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을 대하면서 우리는 모두 불안감을 경험한다. 이는 정상적이고 유용한, 위험을 알리는 경보 시스템의 한 부분이다. (122p)

방어적 비관론자는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그에 맞추어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방어적 비관론자는 만약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만약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건 일어날 것이고 또 그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이들이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기분 좋은 '꿈'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면 기다리는 즐거움과 기분 좋게 '멋진' 면에 대해서 기대하면서 상상해 보는 일을 놓쳐버리게 된다. (203p)

다른 누군가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오직 자신 스스로의 행동만 그럴 수 있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바꾸면서 다른 사람에게 변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만약 당신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방식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성취는 더 쉬워진다. 가장 좋은 순서는 이것이다. 먼저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라. 그리고 나서 하는 행동을 바꾸라. (3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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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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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 사계절

 조금은 부끄럽고 씁쓸한 '세속의 리얼리티'

 

 

 

 

  "세상 물정 좀 아십니까?"

  모르고 살면 물론 편할테지만, 자꾸만 물고 늘어지고 싶은 세속의 모든 것들. 가끔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문제가 눈깜짝할 사이에 다가올때,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모두에게 좋은 삶이란 없을 것이다. 세상물정에 정해진 답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저자는 좋은 삶을 이렇게 말한다. "좋은 삶은 한편으로 영리하되 영악하지 않은 지혜로움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선함이 지나쳐 주어진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무비판적 태도와 거리를 둘 때 가능하다."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 즉 '처세'는 우리에게 이미 안좋은 이미지로 박혀버렸다. 기본적인 뜻과 다르게, '권모술수'와 비슷한 말로 변해가고 있는 '처세'. 그 변화에는 처세를 위한 목표에 있다. 좋은 삶을 위한 공부였던 '처세'가, 물질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성공을 위한 '처세'로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타락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처지로 전락한 처세술이라는 단어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좋은 삶을 위한 '처세', 작가는 우리 삶을 지배하며 그 '처세'를 방해하고 있는 세속의 여러가지 키워드를 붙잡아 비판하고 있다. 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전해지는, 진짜 우리 사회의 '리얼리티'를 보면 한숨과 동시에 자책감이 밀려온다. 나도 이 사회에 포함되어 있으며, 언젠가는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거라는 자책감. 그리고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부담감.

  우리는 상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상식이며, 각자의 상식적인 판단이 모였을 때 무시무시한 몰상식이 생겨난다.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 또한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다.' 책에서 나온 사례를 잠깐 빌려오자면 "불우이웃이나 수재민을 사회복지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성금으로 도와야 한다는 건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상식에 바람직함이 더해지면 '양식'이 되는데, 진지하게 훈계하는 듯한 양식은 항상 상식에게 진다. 양식에의 허기짐은 우리를 책, 그리고 고전으로 이끈다. 아마도 얼마전부터 일어난 인문학 열풍이 이런 허기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  또하나의 한국 사회를 말하자면, '취향 전쟁의 시대'다. 취향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개인의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남들의 선택, 남들에 기호에 관하여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개성은 죽은듯이 사라진다. 취향전쟁은 "개인들의 기호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참여자들의 경제적 지위가 경쟁하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 더욱 커져, 취향 또한 구매하게 되버린 사회. 그 사회에서 위로 올라서는 자는 '가장 영악한 사람'이다.

  저자는 사회학자를 탐정에 비유한다. 사회학자는 고립된 사건을 일련의 사건으로 변형해서 보이지 않던 실마리를 찾아내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흔적에 주목한다.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들, 그리고 그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의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이 때문에 이런 책들을 읽고 우리는 약간은 부끄럽고 혹은 씁쓸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리얼리티를 발견한다. 그러나 무조건 아름답지만은 않을, 무조건 추악하지만은 않을 사회의 양면을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선택을 보다 똑 부러지고 강단있게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준다. 이것이 바로 상식이 아닌, 올바름을 더한 '양식'이 되지 않을까. 

*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함께, 생각의 정리에 도움이 될 책들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일석이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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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중산층이 이러한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한, 실제 럭셔리 상품의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 과시적 소비가 만들어 내는 유행이 우리들의 사유를 지배한다. 이 시대에 부자들은 정치인처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영리하게도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이 부러움에 근거해 우리의 뇌를 장악한다. (39p)

독주를 한잔 들이킬 때마다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때론 먹고 살기 위해 자존심도 포기해야 하는 평범한 호모 파베르가 명예를 선택해도 굶어 죽지 않는 사회가 그리워진다. 그 사회는 특정한 신분에 속한 사람만이 명예를 위한 놀이의 경쟁을 벌일 수 있었던 과거와 다르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무리 부유해도 돈의 위력으로 명예를 참칭할 수 없다면 더 바랄 바 없다. 누구에게나 명예를 둘러싼 경쟁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호모 파베르조차 호모 루덴스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소박한 기대마저 유토피아적 이미지로 다가오게 만든다. 돈벌이를 위해 명예를 내던질 필요가 없기에 청소부도 품위 있을 수 있고 농부도 고상할 수 있고 회사원도 우아할 수 있는 사회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꿈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는 선택이 아니라 원칙이라고. 먹고 사는 것과 명예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제하지 않는 그 사회는 원칙으로서의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 유토피아 속에선 누구나 호모 루덴스일 수 있다. (134p)

체면치레가 유행에 따른 삶이 되고, 수치심이 소비주의에 의해 속류화되면 의인의 자리를 '셀레브리티'가 대신한다. 셀레브리티가 먹는 음식, 그들이 꾸민 집, 그들의 자녀 교육 방법, 그들의 노후 대책까지 흉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따라 하면 된다. 시대의 트렌드에 뒤쳐질까 봐,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시시콜콜 알려준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마치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배우기 위해 기숙형 예절학교에 입학한 학생과도 같다. (143p)

개인의 취향에 대한 세상의 참견은 끝을 모른다. 누군가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다고 하자. 차종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이다. 붉은색 자동차를 골랐다면, 그 사람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견과 관심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사회에선 타인이 선택한 자동차의 색조차 논쟁의 대상이 된다. 취향은 개인의 개성이 발휘되는 영역인 한 본래 수평적이다. 하지만 개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성의 영역인 취향에 대한 참견이 끊이지 않는 이중적인 사회는 수평적인 취향을 수직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기호의 문제인 취향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뀌어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취향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149p)

편안함은 때론 사유의 독이 되기도 한다. 익숙한 곳은 낯설게 보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습관적인 사유를 반복하게 만든다. 너무 익숙해졌기에 편안한 곳의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집도 그렇다. 집은 편안한 곳이지만 편안함의 대가로 우리의 사유는 타성에 젖는다. 자기의 집에선 좋고 나쁨이라는 범주가 갖는 힘이 약화된다. 호사스럽든 소박하든 아니면 초라하든 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집은 가장 친밀한 공간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을 성찰적으로 볼 수 없듯이, 편안함의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집에서 집에 대해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여행은 친밀한 공간인 집에 대해 생각하기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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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사회 - 현대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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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사회> 정지우 / 이경

 개인의 보편적 관념이 사라진 지금, 우리의 사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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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 한국 사회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지금의 한국은 정말 분노 덩어리다. 해결되지 못한 많은 병폐들이 교묘하게 덮어씌워져서, 혹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흩어져서 조용한 울음과 분노로 터져나오고 있다.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 속에서 우리의 슬픔은 끓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무리 빠른 성장과 역사적인 아픔이 있기로서니, 어느 하나 불안하지 않은 곳이 없어 개인의 무기력함과 우울은 더해진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을, 그리고 생각의 틀을 <분노사회>를 통해 잡을 수 있을 듯 싶었다. 작가가 말하는 분노 사회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한국의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책을 덮은 지금, 우리의 사회는 예상했다시피, 너무나 심각했다. 

  현대사회에서 감정은 의식, 즉 관념에 의해 드러나는데 그중 분노라는 감정은 유독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드러난다. 분노는 그 관념이 정당한 것인가 부당한 것인가에 따라, 혹은 올바른 것인가 그른 것인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며, 분노가 증오로 바뀌는 연결점이 바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분노는 정말로 많은 부분 왜곡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큰 굴곡이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성장과 병폐가 동시에 발생된 만큼, 집단주의 또한 너무나 팽배해졌는데, 뜨겁게 일어나는 집단주의가 있는 반면에 개인들은 자신의 보편적인 사회와 관념을 또렷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한다. 개인의 보편적인 관념이 만나서 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데, 그 보편적인 관념마저 형성되지 못한 채 그릇된 분노와 증오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한국 사회는 안타깝고도 허탈한 단어로 존재한다. '사회 없음' 어긋나버린 개인의 관념과 사회가 정상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운 사회. 증오와 분노, 상실이 넘쳐나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다.

  최근까지 엄청난 논쟁에 휩싸인 '일베(일간 베스트)'는 증오의 아이콘이다. "증오는 자기가 믿는 세계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수록, 그럼에도 더욱 자기의 세계를 맹신하고 싶을 때" 불어나는 감정인데, 그들의 증오는 너무나도 뒤틀리고 끔찍한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 자신들이 믿는 세계에 도취되어 있는 그들, '일베'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우리는 또한 분노를 일으킨다. 책에 발췌된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존재를 형성하는 임을 외부에서 찾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좌절한 사람들이기에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라는 것이다. (에릭 호퍼 『맹신자들』) 그것은 극우를 비롯하여 극좌에도 포함된다. "열등감, 시기심, 수치심에서 비롯된 좌절과 분노는 사회가 정당하게 바로 서는 데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

  작가에 의하면 "나 하나만 잘하면 돼"하는 상상은 절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변화되는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내면만을 향하는 것은 결국 막다른 길에 머물 것이며, 자신의 존재가 반드시 세계 전체와 연계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올바른 관념을 형성하고, 그 관념과 일치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믿음과 (그러나 사회가 당연히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따른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며 책임을 감수하는 개인들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타자를 고려하고, 삶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관철이 좋은 사회를 건설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정당한 분노가 행해질 수 있을 것이며, 현재의 '사회 없음'으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가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답이 나온다. 우리는 개인의 올바른 의식(관념)을 정립할 의무를 지녀야 하고, 분노하고 실천할 권리를 지녀야 한다. 나에 대한 중심을 잃지 않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 쉽진 않을 것이고 꽤 오래 걸릴 것이지만, 일단은 책을 통해 희망을 얻었다.

 

 

 

  

 Underline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의 관념들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더불어 현재 사회의 관념이 정확히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관념들은 하나같이 분노를 양산해내고 있는데, 그만큼 우리 사회의 모든 관념들이 거의 다 어긋나 있고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에게 '하나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남아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 없는 상태에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회 없음, 그것이야 말로 지금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일지도 모른다. (60p)

​  우리는 사회 없는 사회, 세계 없는 세계 속에서 분노를 느끼고, 누군가를 증오하며, 속물성에 충실히 살아간다.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낸 게 우리와는 관련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어왔던 자본주의, 세계화, 국제관계, 금융, 역사, 권력, 전쟁 등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서 우리로부터 세계를 앗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참여해서 그 논리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순간 우리 역시 공범이 되었다는 사실을 면죄해주지 않는다. (85p)

  어떻게 살 것인가? 나에게 달려있는, 오직 나만의 문제인 것 같은, 내게만 가장 절실해 보이는 바로 그 질문에 내 삶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존망 역시 달려 있다. 중요한 건 내부와 외부, 주관과 객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을 뛰어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초월 속에서 진정한 삶이 실현된다. 그 삶은 사익을 줄이고 공익을 택하거나, 주관적 삶보다 객관적 사회를 우위에 놓거나, 내 삶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식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가장 이득이 되는 삶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에도 가장 이득이 되는, 내가 가장 좋다고 확신할 수 있는,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좋은 삶' 이다. 그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고 좋은 삶에 동참할 때,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가 성립한다. 그 삶에 참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결국 우리가 믿는 사회도 바꾸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삶 속에 사회가 있다. 내가 내 삶을 저버릴 때, 사회 역시 저버리게 된다. (122p)

  사회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를 규정하며 사는 삶이 될 때, 다시 말해, 사회라는 너트에 나라는 볼트를 끼워 맞추는 삶이 아니라 사회와 내가 삼투 관계를 이루며 융화될 때, 나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가 되고 사회의 문제는 나의 문제가 된다.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표백된, 순일하고 순수한 상태의 존재가 아니다. 나는 세계의 무한 관계망으로 얽혀 있는 존재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반드시 이 사회에 의해 혜택을 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 사회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사회에 보탬을 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회에 해를 끼치고 있다. 그러한 관계를 벗어나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부채의 삶이면서 기부의 삶이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 인간은 누군가에 의한 피해자이면서 누군가에 대한 가해자이며, 채무자이자 채권자이다. 그러한 관계를 마음 안에서 의도적으로 끊을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삶은 항상 타자와 연계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지식인이 자본주의의 수혜자이고, 속세를 부정하며 떠도는 출가승이 세속인의 보시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듯이, 모든 관계로부터의 '완전하고 순수한 자유'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131p)

  가장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면 알수록, 주인은 그 삶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에게는 반드시 앎과 실천이 동반된다. 실천은 앎에 의해 추동되고, 앎은 실천에 의해 더 확실하게 자리잡는다. 가장 좋은 가치, 가장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이는 그 가장 좋은 삶에 대한 관념마저도 잃게 된다. 결국 그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합리화만 하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진정한 앎 앞에서 복종하고 실천하는 자는 그 앎을 더욱 강화시키면서 진정한 주인으로 끊임없이 상승해간다. (178p)

 

 

 

  P.S                                                                                                                                                            

 

 

 

하나하나 포스트잇이 붙여질수록 감동이 일었던 책.

너무나 냉철해서 부끄러웠고, 무언가 울컥했던 책.

 

정지우 작가의 책은 지금까지 세권 읽었고, 세권 다 베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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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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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어떤 사건의 결과에 의해서나, 어떤 목적에 의해서 상당 부분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말'과 '기록'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역사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논의점인데,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꼭 읽어야 할 도서로 지목되고 있는 '성경'의 경우도 일종의 오류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부분은 '예수'에 대한 것이다. 종교를 접하다 보면 너무나 모호하게 생각되는 '예수의 정체', 신인지 인간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예수의 정체를 파헤치고 있다. 일단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건'이란 첫째로 예수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중 운동을 일으킨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과연 사실일까? 신앙의 대상이자 부활의 기적을 알려준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대항해 민중 운동을 일으켰던 나사렛의 예수 중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건 '그리스도의 예수'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원자였던 예수 말이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에 관련된 부분들은 성서나 여러 복음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수정되었다. 교회의 주요 전도 대상이 로마인으로 된 현실 속에서, 팔레스타인과 하느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예수의 혁명적인 수고를 드러낸다면 로마인의 화풀이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던 것에 이유가 있었다.

 이 책에 의하면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된 위대한 인물이며 영향력 있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정의를 위해 싸웠고 피 흘리며 죽어간 영웅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책의 제목인 '젤롯'이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의 '열심'이라는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 힘쓰고, 극단적으로 폭력까지 빌리려는 사람들이었다. 일종의 혁명가이며, 로마인과 아첨꾼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했다. 그들의 언어에서 '열심'을 의미하는 '젤롯'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후에 '젤롯당'과 '시카리'라는, 하느님의 원수를 처치하는 활동단으로도 발전했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을 행사하는 혁명가도 아니었고 젤롯당도 아니었다. 단지, 하느님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정적인 신념을 끝까지 놓지 않았으며 종교적 경건의 모범(젤롯)을 보인 선구자였던 것이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책이다. 어릴 때부터 의무감으로 성당을 다녀왔지만, 자연스럽게 '냉담자'가 돼버린 나에게도 살짝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지금은 성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잊고 살고 있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예수'의 존재는 단연 '신'과 같은 존재였고, 인간으로서 투쟁하던 예수의 모습은 상상 밖이었달까. 그러나 '혁명가'라는 해석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신앙이 얕게 남아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신적인 존재든 단순히 인간이었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열정적인 신념을 가진, '존경할 인물'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끝에는 쓰는 자에 의하여, 목적에 의하여 바뀌게 된 각 복음서의 차이도 비교한다. 또한 주석은 100페이지, 어마어마하다. 신앙이 깊은 종교인들에게도 어렵지만,
종교에 관련된 단어들과 성경의 역사를 포함한 이 책이 단연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던 시기, 수많은 인물들과 예수와 관련된 복음서들의 해석까지, 최근에 봤던 책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방대한 책이다. 다소 읽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종교의 지도자와 종교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인간 예수'로서의 삶을 파고들어 연구해낸 것은 엄청난 일이며, 연구서로서의 가치는 훌륭한 책이다. 물론 종교인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Underline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미가 5:2)라는 예언자 미가의 말씀 때문에, 누가 기자에게 예수는 새로운 다윗이며 유대인들의 왕이다. 하느님의 왕좌에 앉아 약속의 땅을 통치할 인물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도된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또 그렇게 읽히도록 기록된 것 역시 아니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예수의 지위를 확인시키는 신학적 진술이다. 예수는 다윗 왕의 자손, 즉 약속된 메시아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창조의 근원인 영원한 로고스로서의 예수라든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베들레헴의 더러운 말구유에서 포대기에 싸인 채 태어났다. 곁에는 목자들과 선물을 들고 온 동방박사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러나 진짜 예수는 기원전 4년과 기원후 6년 사이에 피폐한 갈릴리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농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나사렛의 어느 작은 마을, 벽돌을 엉기성기 쌓아 진흙을 발라 만든, 흙이 풀풀 날리는 초라한 집이었다. (75p)

  요한의 세례가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이라든지 예수의 선교에 끼친 영향력은 복음서 기자들에게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요한은 매우 인기가 좋고 존경도 받았다. 또 널리 인정받는 제사장이자 예언자였다. 그의 명성은 너무나도 자자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절대 숨길 수 없을 만큼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탈이 생기지 않도록 이야기를 각색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어야만 했던 것이다. 예수가 우월하고 요한은 열등해야 했다. 그래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네 복음서에서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축소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는 위대한 예언자이자 예수의 스승으로 묘사하는데 반해, 마지막에 기록된 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 그의 역할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하는 정도로 제한된다. (140p)

  도시며 마을이며, 예수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들었다. 예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은 것, 즉 예수가 일으킨다는 기적을 보고 싶어 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를 하느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다윗의 왕국을 이을 후계자로 인정했다. 반면 로마는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라고 여겼다. 또 율법학자와 성전 제사장은 그를 신성을 모독하는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다. 유대교에 대한 지배력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 사는 대부분의 유대인들 (예수는 자기가 이들을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에게 예수는 메시아도 아니고 왕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갈릴리 지역을 떠돌며 재주나 부리는 전문 축귀자일 뿐이었다. (162p)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채찍질당해 멍든 몸으로 필라투스 앞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예수가 받은 질문이 단 하나였다는 점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와 폭도를 다스리는 표준적인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앞에 끌려와 대답해야 했던 유일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193p)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복음서 기자들은 어느 정도 창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삶에서 혁명적 열정의 흔적을 모두 제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인들의 책임을 완전히 씻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메시아를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로마인들은 뜻하지 않게 대제사장 카야파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대제사장이 예수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는 합법적으로 예수를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속여 이 비극적인 오판을 하게 했던 것이다. 가엾은 필라투스는 예수를 살리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끝까지 예수의 피를 요구했고, 결국 필라투스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준 것이다. 실제로, 더 늦게 저술된 복음서일수록 (해당 복음서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파괴 사건과 시기적으로 멀수록),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필라투스의 역할은 감소한다. (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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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인문학 - 우리 시대 청춘을 위한 진실한 대답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현실과 꿈 사이에서, 삶의 지도를 찾아라 <청춘인문학 - 정지우>

 

 

After Reading

 

 

 

 

   청춘을 말하는 책, 수도 없이 만나보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들 중에서 가장 솔직하고 확실한 해답을 준다. 어렵고 난해한 말로 지식을 주려고도 하지 않고, 되려 감성적인 위로를 주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청춘에 대한 책들을 보면서, 현실적인 책과 이상적인 책 딱 그 중간의 책을 바라왔다면 바로 이 책이 제격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

 

  가장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청춘에 대한 이미지 정의다. '청춘'은 언젠가부터 너무나 힘들고 고달픈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것'들에 시간을 많이 소비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정말 고달프고 아픈 청춘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버리고 있는 시간 또한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드라마, 영화나 게임, sns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청춘들, 깊이없는 시간때우기로 보내고 난 뒤에 오는 공허감과 갑작스러운 걱정들, 그 걱정들에 순식간에 사로잡히는 청춘은 자신의 과거는 뒤로 한 채, '아픈 청춘'이라고만 느낀다. 또한 타인들로 인해 점점 획일화되어가는 현대인들의 '자기'는 더이상 순수한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사회가 바라는 것, 남들이 바라는 것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가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청춘, 현대인들이 '삶의 우위'를 가지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보이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진정한 나 자신의 바람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현실 속의 장애물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한계점을 만들어 포기하는 적이 많다. 삶의 극적인 변화를 바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바람을 접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 현실을 무조건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리잡힌 '의식'이라는 것이다. 조금씩 자신의 관심을 넓혀나가는 것, '허세'로만 치부되는 삶에 대한 고민을 조금씩 해보는 것, 기존의 삶을 조금씩 거부해가면서 여러 관계와 장소에서 배워가는 것.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실행할 때, 우리의 삶의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책 속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삶을 자기 안에서 지켜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결정할 때, 타자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데,  취업, 학교, 결혼, 패션, 많은 것에 있어서 그렇다. 물론 사회 속에서 '타자'와의 공존은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우선이지, '타자' 쪽으로 더 기울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재 나 또한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를 걸어가고 있고,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쯤 이 책을 읽었다. 좋아할지도 모르는 것과 확실히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했고, 조금 느릴지 몰라도 후자를 선택했다. 현실에 어느정도 맞추었고, 조금은 힘들지만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꿈을 찾아나가고 있는 현재. 이 책을 보고 '나'의 진정한 바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고 보다 더욱더 자율적으로 많은 것을 시도해봐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가끔은 위로가 되는 에세이도 좋지만, 냉철하게 진지하게 삶을 고민할 수 있게 만드는 이런 책도 나와 같은 청춘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Underline

 

 

 

 

   - 우리가 어디에 정말 '만족'할 수 잇고,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탐색하는 일이 반드시 직업적 목표를 찾는 일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자기의 '행복'이나 '만족'에 대해 아는 일은 자기 삶에서 단순히 지루함과 쾌락의 반복이 아닌, 어떻게 자기가 자신만의 주체적인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오히려 '진정한 취미'의 문제에 가깝다. (35p)

 

 

  - 그 가운데 대학 역시 돛대 잃은 배처럼 이 사회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대학은 더 이상 저항의 상징, 모든 게 비록 상업화되고 속물화되어도 끝까지 '지성을 중심'에 두고,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버티고 서서 시대의 정신을 이끌어가는 상징성을 잃어버렸다. 대학 스스로도 앞서서 경영화, 상업화, 업적화에 동참하고 있다. 이는 청춘이 학생일 수밖에 없고 학교 안에 있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과거처럼 학교와 일체된 청춘을 누리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모순을 보여준다. (72p)

 

 

  - 현실이 사라진 세상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요구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 때만 누릴 뿐 다음 순간이면 사라지는 '가상의 현실감'만이 남은 시대의 인간이 현대인이다. 경제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몰락과 성장을 반복하며, 아무리 투표를 열심히 해서 정권을 바꾸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점점 정치와 경제, 사회라는 보다 큰 세계로부터 멀어지고, 대신 방 안에서 컴퓨터를 통해 접하는 가상의 네트워크 세계만을 접하게 된다. 현실에 대한 요구는 때때로 월드컵 응원이나 촛불 시위 같은 형태로 터져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근본적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109p)

 

 

  - '삶'은 수치화하고 가시화할 수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구축해가는 것이고, 보거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만의 삶의 견지에서 인생을 산 사람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여행 그 자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자체에 자아 정체성을 모두 투여해서 여행하는 삶을 산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현실의 논리에 따라 가이드 일을 하거나, 그 때 그 때 나라에서 요리사로 일하거나, 책을 쓰고 번역을 하는 식으로 필요한 일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현실적 일은 정확히 '삶'과 연관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이것은 삶이 현실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는 경우로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인생을 살아야 하거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삶이 중시되어 삶의 견지에서 직업까지 선택하고 온전히 살아낸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164p)

 

 

  - 현재는 더 이상 다만 지나가는 시간이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현실적인 요건들에 붙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의식만큼은 현재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깨어있음'의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끊임없이 현재에 깨어있으려는 시도는 미래의 환영을 벗겨내고, 점차로 우리가 되찾아야할 시간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만든다. 계속해서 꿈꾸고, 계속해서 깨어있는 일은 점점 우리가 속해있는 현실과는 별개로 우리가 진정 살아야 할 삶을 무엇인지 느끼도록 종용한다. (1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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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크기도 비교적 크고, 책도 너무 두껍지 않고,

딱딱 정리된 내용에 확실한 해답을 찾기 위한 마음가짐을 주는.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왠지 찾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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