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 용감하고 유쾌한 노부부가 세계여행을 통해 깨달은 삶의 기쁨
린 마틴 지음, 신승미 옮김 / 글담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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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린 마틴 / 글담출판사

낯선 곳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선택하다

 

 

 
 
 ​ After Reading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꿈꾸어보는 세계여행. 나의 경우, 그 유혹이 세차게 드는 때가 있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취직하기 전 여유가 생길 이십 대에, 그리고 자식들이 어느 정도 자립을 하고 난 뒤의 중년 혹은 노년의 삶을 살 때 일 것 같다. 막연히 "가고 싶다"를 넘어,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가야 한다", "이 때가 아니면 안 된다"가 되는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시기에서 떠나기를 망설이게 되는 일종의 장애물 중 가장 큰 것은 '용기'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장애물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젊을 때는 패기와 깡으로 덤빈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많은 선택에서 주저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TV 프로 「꽃보다 할배」를 보고 열광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물론 프로그램의 틀 안에서 스케줄에 맞춰 주어지는 여행일지라도, 그 여행 안에서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공부하는 배우 '이순재'를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단순한 여행 에세이로 보이는 표지 속에서 주목을 끄는 제목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는 마치 자기 계발서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지만, 책을 쓴 저자 - 이 책의 주인공 -을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70세의 나이로 집과 가족,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털어버리고 남편과 함께 세계여행을 떠난 것이다. 이 도전부터가 여느 자기계발서에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도 더 큰 '교훈'이 되는 듯 하다. 유럽과 남미, 북미를 넘나드는 세계 여행, 그들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살아보기 위해' 떠난다.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면서 시간에 쫓기는 것보다는, 며칠을 살기 때문에 적당히 쉬고 여유를 즐긴다. 일상생활에서 즐길 수 없던 조그만 사치를 느끼면서 둘이서 행복하게 여행한다.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안락함보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선택하다."책 속에 나온 구절처럼, 여행의 모든 순간이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모국에서 자유자재로 운전하며 다니던 길은 어떤 나라에서는 좌우가 바뀌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현지인들의 습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바쁜 보행자들에게 이리 치이고 밀쳐져 짜증이 나기도 하고, 적은 시간을 머무는 집인 탓에 안락한 가구 (특히 푹신한 의자)를 갖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유롭게, 때로는 한 발짝 물러서며 해결해나간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한 곳에서 정착하고 살았다면 참지 못 했을 짜증스러운 일들을 쉽게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마틴 부부는 여행을 통해 변해가면서, 시간을 통해 주어지는 연륜과 경험을 활용해간다. 그들은 다시 한번 떠나게 되더라도, 어려움 앞에서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의 좌우명인,"아무것도 미루지 말자." 이 말을 듣고 금방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Underline                                                                                                                                                 

 

 

  심지어 요즘에도 새로 만난 사람들 중에 우리의 생활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리의 선택이 그들의 선택을 위협하기라도 하는 양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음, 나는 내 가구와 개와 자동차를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라는 식으로 말한다. 가끔 이런 자유분방한 생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지는 않다는 점을 설명해야 할 때도 있다. 그저 이런 생활이 현재 우리의 인생에 잘 들어맞을 뿐이다.

  우리의 독특한 생활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삶을 대대적으로 바꾸라고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변화를 꾀하고 싶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시야를 넓힐 때 생기는 이익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시야를 넓히는 일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가까운 도시를 가본다거나, 새로운 동호회에 가입한다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니까. (36p)

  게리가 안부 인사 대신 해 달래요.

  '아무것도 미루지 말라.'는 말을요.

​  용감한 사람이 해준 심오한 충고였다.

  "아무것도 미루지 말라."는 말은 내 데스크톱 컴퓨터 화면에 커다란 글자로 떠 있고, 우리 부부의 좌우명이 되었다. 우리는 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되거나 실행하기에 너무 힘들 것 같거나 "우린 너무 늙었어."라는 한탄에 빠져 그냥 미뤄 두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이 좌우명을 명심하려고 노력한다. 게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120p)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힘에 겨운 상황에 처하면 훨씬 벅차한다. 특히 자신은 어쩔 줄 몰라서 허둥대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무엇을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이미 노인 (나는 노인보다 어른이라는 말이 더 좋다)인 우리 부부는 항상 스스로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파리에서의 둘째 날에 우리는 처음으로 지하철 표를 사면서 끔찍하게 고생했다. 승차권 발매기가 우리의 신용카드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유로화를 집어 넣었지만 그 돈도 자꾸 반환됐다. 우리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특유의 프랑스 방식으로 짜증난다는 티를 냈다. 우리 뒤에 바짝 붙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발바닥을 탁탁 치는 방식으로 서두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결국 역무원이 부스로 우리를 불러서 직접 표를 팔았다. 우리는 또다시 창피를 당하느니 앞으로는 부스에서 표를 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역무원은 항상 자리에 있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한숨소리와 발바닥을 치는 소리를 감수한 채 창피를 꾹 참고 다시 도전해 봤다. 마침내 우리는 승차권 발매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됐으며, 스스로 알아서 자유자재로 승차권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160p)

  팀은 내가 서로 밀치며 급하게 걷는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느라고 짜증이 났음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 도시 사람들은 늘 서두르잖아. 그들은 우리와 달리 휴가 중이 아니고 먹고살기 바빠서 우리를 배려할 여력이 없지."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걸까요? 우리가 너그럽지 못한 사람들인 걸까요?"​

​  "아니야.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야. 오히려 다른 도시에서 접하는 실상이 예상과 다를 수도 있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아. 그저 우리는 강해지기만 하면 돼. 새로운 문화에서는 새로운 수준의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당신보다 더 못받아들이잖아." (165p)

    ​

 

​ P.S : 북 트레일러 영상                                                                                                                               

 

 

유투브로 연결 http://youtu.be/UIFzvCejV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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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향의 맛.멋
이재인 지음 / 멘토프레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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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향의 맛·멋> 이재인 / 멘토프레스

고향의 정취를 만끽하는 여행

 

 

 

 

 ​ After Reading                                                                                                                                     

 

 

 

   ​내가 노골적으로 많이 쓰고 싶은 단어, 어감이 좋은 단어 '멋'과 '맛'이다. 여행을 간다면 빼놓지 못할 단어, 그것도 '맛'과 '멋'이다. 평소에는 가지 못하는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새로운 맛을 찾아가는 즐거움은 '여행'에서만 유독 그 즐거움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어 '맛'과 '멋' 하나로도 책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정보로 만으로 보지 못 했던 새로운 것이 이 책에 담겨있었다.

  바로 내가 '맛'과 '멋'이라는 말에 취해 보지 못 했던 '고향'이란 것이었다. 작가는 지금도 우리나라 어딘가에 소박한 삶을 꾸려가며 살고 있는 고향의 여러 사람들을 소개하고자 하였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향의 아름다운 정취, 그리고 고향 사람이 직접 소개하는 '맛'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잠시, 잊었던 고향을 다시 떠올릴 것이고, 단 한 번도 고향 다운 고향을 가져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을 더러 꿈꿔보기도 할 것이다." 인터넷을 뒤지면 주르륵 나오는 엄청난 관광지들과 맛집이 아닌, 우리가 고향이라 부르는 정이 담긴 그곳, 그리고 이야기가 담긴 그곳을 소개한다.

  고향을 소개한 다음 고향의 인물을 이야기하고, 고향의 맛을 소개하는 매뉴얼대로 각각의 지역을 소개한다. 고향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니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빼놓지 않는다. 가장 좋았던 점은 고향에 대한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시인들의 시, 그리고 그 시인들이 정겹게 소개하는 '맛집'들이었다. 그리고 충청도의 멋과 맛, 그리고 가까운 서울과 수원에 대한 얘기까지 빼놓지 않은 고향 냄새가 물씬 나는 책, <다시, 고향의 맛·멋>을 읽으니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다.

 

 

 

 

 ​ Underline                                                                                                                                                  

 

 

​  우리가 명장 서영기 교수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불교용어인 '할劼'이다. '할'이란 무언의 경책, 즉 가르침이다. 세속주의에 젖은 사람들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뛰어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서영기 도예가는 한 번도 교수를 꿈꾸거나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다만 자기가 할 일에 최선을 기울였고 선생님 가르침으로 110퍼센트 실천하다 보니 명장 도예가가 되었고, 나아가 어엿한 4년제 대학의 도예학과 교수직에 진출했다. 쉬운 말로 엉덩이에 뿔내지 말고 인간부터 되면 자연스럽게 최고경지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을 안내해준 것이 자신의 삶에서는 스승의 가르침 '할'이라고 했다. 그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진 찻그릇이나 도예품들은 모두가 명품名品이다. (49p)

  백제 / 천 오백 년, 별로 / 오랜 세월이 아니다 / 우리 할아버지가 /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 몇 번 안 가서 /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 있다.

  전봉준 이하의 동학 농민 운동가들의 해방정신은 과거 백제의 기상으로도 연결되어 시인에게 역사적 사명을 부여한다. 신동엽 시인은 전봉준 만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백제라는 더 먼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우리 미래를 설계해 나간다. 우리는 언제나 엊그제, 그끄제라는 과거 속에서 살아가기에 과거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94p)

  김경란 화가는 붓에 그리 강렬한 힘을 주지 않고 하얀 캔버스 위에 붓을 가벼이 놀리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다. 김경란 화가의 서로 부딪치면서 섞이는 색들의 동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선을 그으며 흐릿한 사물의 외양을 분명하게 잡아내면서도 자신의 내면색으로 재창조해낸다. 부서져내리는 해바라기들에 미소짓는 하얀 소녀는 그림자로 뒤에 남으면서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해바라기들은 온전하지 않기에 하얀 소녀를 둘러싸며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한다. 이런 분명함과 흐릿함의 교차지점에서 은연히 드러나는 자아의 경지가 바로 김경란 그림의 매력이다. (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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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계십니까 -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권중서 지음,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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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계십니까> 권중서 글,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당을 다녔고, 그리 독실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종교는 서서히 내 삶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만약 어릴 때 어떤 종교도 갖지 못했다면 한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이 불교였다. 이 둘에게는 고요하고 신성한 느낌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느낌만은 전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불교의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찰'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 그리고 얕은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곳곳의 산을 조금만 오르면 볼 수 있는 곳, 여행을 가서도 볼 수 있었던 곳, 갑자기 불쑥 찾아가도 낯설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줄 듯한, 조용히 종과 염불소리가 울려퍼지는 평화로운 곳.

 

 

 

  ​풍경을 오롯이 다 담아낸 사진도 아니고, 화려한 색깔을 머금은 수채화도 아닌, 간단한 펜터치로 그려진 일러스트는 생각보다 사찰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아낸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밤중의 사찰 위에 진하게 깔린 구름들, 눈감고 기도하고 있는 불상은 누군가 쓱쓱 한붓에 그려낸 것 같이 단순한 그림으로 볼 수 있겠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사찰을 방문할 때의 호젓하거나 평화로운 느낌을 가득 품고 있다.

  전국의 유명한, 혹은 숨겨져있는 멋진 사찰들을 그려낸 그림들과 함께, 작가는 글의 첫머리에, 자신이 보고 있는 사찰의 모습을, 기둥과 다리, 구석구석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사찰에 얽힌 이야기, 간혹가다 들려주는 사찰과 딱 맞아떨어지는 문인들의 시는 너무나도 잘어울린다. 꽤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사랑의 문화가 조각되어 있는 환성사의 수미단, 도시의 아등바등한 집착을 퍽 덜어줄 수 있을 듯한 (이름마저 좋은) 능가산 내소사, 최근 영화와 소설을 통해 더욱 감정이입한 인물인 정조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화산 용주사...... 25곳의 산사들은 꼭 한번쯤 가고 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지만 유독 마음에 든 곳들이다.

  가장 최근에 간 사찰은 부산의 태종사였다. 2년전엔가, 친구와 여행을 할 때였다. 그때는 그 곳에 잔뜩 피어있는 수국꽃에 마음이 홀려 사찰을 주의깊게 바라보지 못했다. 조만간 산 속 깊이 있는 산사를 방문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템플 스테이 생각이 갑자기 간절해진다.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고 표현한 작가의 마음을 보고 "절은 북적이는 곳이 아닌데, 사람을 보러가?"했던 의문이 사라지고, 산사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그곳에서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환성사를 찾아가는 계절은 역시, 봄이 좋다. 깊은 골짜기로 빨려 들어가듯 벚꽃과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이런 날은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찾아가도 좋겠다. 조용하고 호젓한 산사는 꽃들의 잔치로 무릉도원을 이룬다. 잠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도원을 거닐면 마음이 통하여 우리가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연리지처럼. 환성사는 팔공산 주변의 산이 고리를 이루어 성처럼 둘러싸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생과 부처가 함께 손잡고 둥근 마음의 고리를 만든다면 내가 바로 너이며 네가 바로 나인, 부처와 중생 그리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깨달음의 일원상이 될 것이다. (37p)

미인은 반 측면에서 보라 하였던가? 옆으로 살짝 드러난 무량수전과 공중에 떠 있는 안양루의 팔작지붕이 '극락세계의 궁전은 이렇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신기루처럼 떠있는 안양루에 옛 시인들은 바람난간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늘 위에 나타난 천상의 누각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일직선이 아닌 45도 각도로 틀어진 길이다. 우리 조상들은 획일성을 싫어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길 보다는 구불구불 틀어진 길에서 세상 사는 재미와 인생의 여유를 느꼈으리라. 다가갈수록 다르게 보이는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기 위하여 일부러 길을 돌렸다. 우리들은 그저 그 길을 따라가며 아름다움에 취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의도적 공간 연출은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서양의 사상과는 달리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불교의 사상을 마음껏 발휘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이다. (53p)​

​제주도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어머니 같은 섬이다. 해녀들이 자맥질해 들어가는 넓고 깊은 바닷속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된 자궁 같다. 휘-잇, 휘-잇, 길게 내뿜는 아가의 첫 울음과 같은 숨소리는 살아 있음을 알리는 희망의 신호가 되어 제주의 봄을 재촉한다. (86p)

구층암에는 천불보전 법당과 좌우로 승당인 두 요사채가 있는데, 바깥뜰에는 부서진 탑이 겨우 몇 자 높이로 서 잇다. 절 앞에는 대숲이 있으며, 절 우측에는 푸른 빛이 도는 맑은 개울이 흐른다. 절에서는 달이 돋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구름이라도 살짝 내려앉으면 주변의 뭇 산봉우리들이 촘촘히 늘어서 모두 부처를 향한 채 둘러싸고 있는 풍광이 펼쳐진다. 별빛과 달빛이 허공에 가득하며, 대나무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적막을 깨는 풍경소리의 울림에 오만가지 생각이 일시에 텅 비니, 이것은 화엄의 진수인가, 구층암의 빼어난 흥치인가?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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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 남자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당신에게, 개정판
남인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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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남인숙 / 위즈덤하우스

남자들이 알면 불편해하지만 여자들은 꼭 알아야 할 것들

 

 

 

 

   ​어떤 사람들은 불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수긍이 가는 제목의 책.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사실 살아가는데 나만 괜찮다면 무조건 남자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주의여서 (그렇다고 독신 주의자는 아니다) 제목을 보곤 살짝 흠칫했지만, 일반적인 연애지침서와 비교해서 가볍지 않은 느낌이어서 쭉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랑(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하고 주장할 수 있는 류의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연애보다는 '남자'라는 종족에 대한 심리 관련서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남자를 유혹하는 '여우'를 만드는 책이라기보다는, 나와는 다른 남자를 포용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뜻이다. 연인들 사이에서만 활용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직장과 가정, 모든 사회에 적용될 수 있겠다.

 

  꽤 따끈따끈한 책이라고 느껴질 만큼 발매일이 현재와 가깝지만 이 책은 몇 년 전에 절판 후 재출간된 책이다. 절판이 되기 전 여자들이 알지 못하는 '남자' 모습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많은 표본과 설문조사로 얻어진 확실한 해답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던 모양인데,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남자들의 감정,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벌어지는 싸움과 오해를 막기 위한 이야기가 꽤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이유 중에 하나라고 짐작되는 부분은 줄글로 쭉 늘여놓은 지침이 아니라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과도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의 고전 소설 <금병매>이 줄거리와 캐릭터의 이름까지 (역시 읽다 보니 이름이 특이하더라니.) 차용해서 남자와 여자 생각의 차이를 소설처럼 보여주는 동시에 그 행동의 분석을 덧붙이고 있다. 소설의 줄거리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주인공들의 '썸' 그리고 만남부터 결혼까지, 그리고 자식을 얻게 되고 남자가 가장의 노릇을 하기까지의 내용으로 물 흐르듯 흘러가기 때문에 살면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남자와의 문제'는 이 책에 나와있지 않을까.

  목차에 나열된 소제목들을 보자면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칸트주의자인 여자, 벤담 주의자인 남자', '왜 모든 여자의 로망은 게이 남자 친구인가', '남자답지 못하느니 나쁜 남자가 되는 게 낫다.', '왜 남자들은 철이 들지 않을까' 등....... 물론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이 책에 나와있는 행동 분석대로 움직일지는 만무하지만, 작가의 설명과 조언들은 꽤 쓸모가 있어 보이고 설득력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래도 남자는 귀엽다"로 귀결되는 이 책은 중요한 한 가지를 주지시킨다. "우리가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에 그토록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구 상의 그 누구보다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의 많은 내용을, 여자들이 키득거리며 읽고 배운다는 것을 안다면 남자들이 불편해하겠지만, 어쨌거나 남자들과 공존하기 위해,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니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읽으면서 <어쨌거나 여자는 필요하다> 편으로 여자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책이 나오면 책은 꽤- 아주 꽤 복잡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속닥속닥 ㅋㅋㅋㅋ)

  

어떤 여자들은 남자들이 양육받은 것과 정반대의 성향인 다정함을 요구하면서도 그들의 편향적 취향을 무조건 비난한다. 자신의 취향을 없애고 스스로를 남자들의 판타지에 끼워 맞출 필요는 없지만, 이제까지 그들을 형성한 생물학적, 문화인류학적 배경을 무시하고 전체를 '마초'로 몰아세우는 것은 그들로서도 억울한 일이다. 모든 미디어에서 긴 머리에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자를 진실된 여자로 그리는 마당에 드라마의 악녀들이 주로 입는 세련된 차림으로 나타나 편견을 가지지 말라고 하니 그들도 헛갈린다. 외모만 밝히는 단세포라고 취급받는 그들은 여자들과는 사물을 다르게 보는, 보이지 않는 안경을 하나 덧쓰고 있는 셈이다. 그 안경이 사물을 어떻게 비추는지 여자들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초점을 달리해 정확히 볼 수 있도록 남자들을 유도할 수도 있다. (35p)

여자들은 그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과거에 구체성이라는 살과 뼈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요즘 괜찮은 남자들치고 연인에게 과거를 미주알고주알 캐묻는 사람은 없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과거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럴 때에는 구체성을 띠지 않고 희미하게 답을 하는 게 최선이다.

​ "너 만나기 전에 한두 명 더 있었어." 이 정도가 좋다. 그를 만나기 전에 마흔네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면 '그냥 좀 있었어' 정도로 애매하게 말하는 것이 연약한 남자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한 배려이자 예의이다. 또한 아무리 상대방이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거의 연인과 스킨십이나 육체관계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니, 과거와 관계된 말은 그게 무엇이든 아끼면 아낄수록 좋다. 어떤 말이든 하면 할수록 구체화된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숫자나 상황, 사물, 이미지 등이 좋지 않은 최악의 이유는 그것이 상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110p)

여자들이 남자와 다툴 때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 유리 큐브 때문이다. 이 큐브는 여자를 화나게 한 행동에 대한 정당한 해명을 구차한 변명으로 여기게 하기도 하고, 대화를 요구하는 여자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기 싫다, 그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망치를 들고 큐브를 깨서 그에게 다가가려 들면 그는 여자를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남자들의 유리 큐브는 아주 어려서부터 만들어졌으며 거의 일생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와 함께하며 점점 견고해졌다. 그것은 남자들을 가두어 두는 몹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보호하는 갑옷이기도 하다.

이런 남자들의 유일한 산소통은 여자다. 남자들이 달팽이집처럼 지고 다니는 그 유리 큐브의 열쇠는 남자가 아닌 그의 파트너인 여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여자가 밖에서 문을 열어 주어야만 잠시나마 자신의 약한 자아를 대면하고 용서할 수 있다. (144p)

남자들이 '버럭'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밖으로 배출해야 살아갈 수가 있는데 남자들은 슬픔, 외로움, 두려움 등의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쉽사리 표현할 수 없다. 남자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그나마 분노가 유일하다. 화를 낸다는 것, 헐크처럼 감정을 폭발시킨다는 것, 활화산처럼 감정을 일순간에 뿜어낸다는 것...... 말만 들어도 어딘가 남성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엉뚱하게 분노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슬퍼도 화를 내고, 무서워도 화를 내고, 절망해도 화를 내며, 외로워도 화를 낸다는 뜻이다. (229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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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  After Reading                                                                                                                                              
  
 
  ​인간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사례는 현대인 지금도 간혹 일어나고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끔찍하고 추악한 억압 중 하나는 '노예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는 일본의 위안부와 나치의 학살 등을 떠올린다.) '인간'이라는 이름 하에 왜 등급이 나눠져야 하는 것이며, "우리는 당신들보다 우월하다."라는 말도 안 되는 무식한 배짱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최근에 읽은 '만델라 평전'에서도 '노예제도'는 끔찍한 모습으로 설명된다. 1800년대, 미국에서 '노예 해방령'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남부의 농장 쪽에서는 오랫동안 극심한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때 아마도, '솔로몬 노섭'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북부에 살고 있던, '자유인' 증명서를 받은 흑인이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길에서 납치되어 자유를 짓밟히고 노예로 팔리게 된다.
  ​그 12년 동안의 일기가 바로 <노예 12년>이다. 그러니까, 이건 저자의 실제 경험이 담긴 에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봐왔던 노예 소설들과는  - 어릴 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등 - 다른 무언가를 전달한다. 여러 주인들을 거치면서 힘든 노동을 겪고, 거의 동물 취급을 당하는 다른 노예들을 목격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장 특별한 점은 화자의 특수성에서 나온 것인데, 태어날 때부터 고된 노동과 핍박을 받아온 여타 많은 노예들과는 달리 노섭은 자유인이었고 (흑인이었지만 법적 제도를 통해 인권을 보장받았다 ) 결혼을 해서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운하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고, 똑똑하고 바이올린마저 멋지게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도 "자유에 대한, 백인과의 똑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과거가 있었다.' 그래서 노섭은 어떤 권력에의 음모로 노예가 되고,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릴 수 있는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해낸 이 책을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런 정신력은 자유를 되찾기 위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다.
  ​'노예 제도'라고 하면 생각나는 장면들, 흉악한 주인이 온갖 이유를 만들어 노예들을 억압하는 장면들은 이 책 속에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등장하지만, 예외적인 장면들도 등장한다. 저자 솔로몬 노섭이 만난 주인들 (그를 산)의 경우, 포악하고 인간이길 포기한 주인들이 있는 반면에 몇 년 동안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었던 주인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예들의 재주를 인정하고, 적당한 노동과 휴식을 주고 인간으로서 보살핀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끔찍한 장면들을 보고 굳어진 마음을 조금 풀어내릴 수는 있었지만, 여기에도 역시 의문은 남는다. 그들에게 적당한 대우를 해주더라도, 그들을 '소유하는 것' 그 자체에 인권 유린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면 많은 말들이 필요하겠지만, 그 제도를 행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인간적인 행동이든, 비인간적인 행동이든 '노예 제도'는 그 자체로서 야만적이고 상상하지 못할 끔찍한 제도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노예로서의 삶. 솔로몬 노섭이 경험하고 목격한 그들의 삶은 글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과 행실 모두에서 바람직한 여성 노예 '패치'가 인간으로서 가장 모욕적인 처벌을 받았을 때, 노섭과 동료들은 천국 - 노예도 없고 고통도 없는, 그들에게는 지상낙원인 - 으로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고통이 아니며, 오히려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시련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예 12년> 속의 '노섭'은 비로소 자유를 찾은 모습으로 결말을 맞이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유를 완벽하게 되찾지 못했다. 책이 많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어떤 강연장에서는 야유마저 받았다고 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노섭의, 책에 나온 이후의 삶을 부정적으로 추측한다. 다시 납치되어 노예로 되돌아갔거나, 가난으로 인해 죽었거나, 살해되었거나,라는 것이다. 물론 낙관적인 견해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이런 추측들이 난무한다. 그에게도 '자유'는 죽음으로서만 넘어설 수 있는, 높고 높은 언덕이었던 것일까.
 
  자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으로서만 되찾을 수 있는 그들의 자유는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 것인가. "잃어버리기는 너무도 쉽고 되찾기는 너무도 어려운" '자유'.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자유를 부르짖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왜 세상은 이토록 부조리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공평할 순 없는 것일까.
 
 
 
​  Underline                                                                                                                                                     
 
 
 
  ​그들은 거의 하나같이, 자유에 대한 비밀스러운 욕구를 간직하고 있었다. 더러 몇몇은 도주하겠다는 아주 뜨거운 열망을 표현했고, 그걸 실현할 최선의 방법에 대해 나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붙잡혀서 돌아가게 될 때의 처벌을 그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으며, 어떤 경우가 됐뜬 분명히, 처벌의 두려움이 그들의 시도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북부의 자유로운 공기를 숨 쉬며 살아왔던 터라, 내 가슴에도 백인들의 가슴에 있는 것과 똑같은 감정과 정서가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나아가 나보다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 적어도 그중 일부와는 지능도 다를 게 없다는 걸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비참하게 노예로 살아간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무지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독립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노예제의 원칙을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법률 혹은 그런 종교의 정당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자랑스레 말할 수 있지만, 나를 찾아온 어느 누구에게도 기회를 엿보라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33p)
 
  불행한 삶을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지상의 슬픔이 끝나려 할 때 죽음에 대한 명상 - 지치고 힘든 몸을 위한 안식처로서의 무덤에 대한 명상 - 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자꾸 거기에 빠지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그런 명상은 위기의 순간에는 사라진다. 죽을 힘을 다하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죽음의 대왕> 앞에서 두려움 없이 버틸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생명은 소중하다. 땅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도 생명을 위해 싸운다. 그 순간 나에게, 노예가 되어 학대받는 나에게 생명은 소중했다. (136p)
  ​나는 그날 하루 온종일 내가 겪은 다양한 두려움과 감정에 관해 캐물었고, 언제든 기도하고 싶은 때가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온 세상에서 버림받은 느낌이었으며, 내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고 대답했다. 그럴 때면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창조주를 향하기 마련이지, 라고 그는 말했다. 잘나가고, 다치거나 두려울 일이 없을 때면 사람은 신을 기억하지 않으며, 신을 부정하게 되지만, 그러나 사람을 위험의 한가운데 놓고 도움의 손길을 막아 버리고, 그 앞에 무덤을 열어 놓으면 - 그제야, 고난의 시간이 닥쳐서야, 비웃으며 믿지 않던 그 사람은 신의 품 외에는 다른 희망이나 피난처, 안전한 곳이 없다고 느끼며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150p)
  비인간적인 주인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인간적인 주인들도 있을 것이다. - 헐벗고 반쯤 굶주린 비참한 노예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잘 입고 잘 먹고 행복한 노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목격한 그런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용인하는 제도는 잔인하고 불공평하고 야만적인 제도이다. 비천한 삶을 있는 그대로, 또는 그렇지 않게 묘사하는 소설을 쓸 수는 있다. - 어쩌면 진지한 척 엄숙한 태도로, 무지라는 축복을 자세하게 열거할 수도 있다 - 노예 생활의 즐거움에 관해 안락의자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어 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밭에서 노예와 함께 일하도록 해보라 - 노예들과 오두막에서 같이 자고 - 곡물 껍질을 같이 먹도록 해보라. 노예처럼 채찍질을 당하고, 사냥을 당하고, 짓밟히도록 해보라. 그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갖고 돌아올 것이다. 그들에게 가련한 노예의 마음을 알도록 해보라 - 노예의 비밀스러운 생각들 - 백인이 듣는 곳에선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생각을 알아보도록 해보라. 밤에 깨어있는 노예 옆에 조용히 앉아 있도록 해보라 -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관해 노예와 진심 어린 믿음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해보라. 그러면 노예들 100명 가운데 99명은 충분히 똑똑해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사람들 자신과 똑같이 열정적으로, 자유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2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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