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세를 바라보는 늙은 엄마와 20세를 갓 넘긴 청춘의 딸이 함께 여행할 때 여행의 초점을 누구에게 맞추어야 할까? 게다가 늙은 엄마는 이미 여행지를 두어 차례 다녀갔던 곳이라면? 누가 가이드 역할을 담당해야 할까? 직업상 가이드가 아니라면 이전과 같은 여행지에서 경험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새로움으로 설레야 할 여행이 기존의 경혐으로 퇴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행지가 새롭지 않다면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여행에서 매너리즘은 여행의 적이다.

 

그래서 딸에게 맡겼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두어 군데 - 큐 가든, 코톨드 미술관 등 - 를 빼곤 모두 딸 의향대로 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 방법이 달라져서 결국 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초중반에는 여행안내서라면 일본에서 나온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거의 전부였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약 한 달 간 영국을 일주했다. 지도가 틀려서 숙소를 찾는데 고생한 적도 있지만 대충 이 책 한 권으로도 여행이 가능했다. 길을 헤매다가 모르면 입을 열어 "Excuse me~~~" 하면서 길을 물으면 백이면 구십 구 정도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흠, 고리짝 얘기를 하고 있다.

 

지금은 가이북조차 필요없는 세대이다. 게다가 온갖 가이드북이 넘쳐난다. 가이드북을 두어 권 챙겨가지만 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무엇이 있나 알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리고 길을 찾기 위해 입을 열어 영어를 구사해볼 기회도 거의 없다. 스마트폰에 깔아놓은 지도앱이 깔끔하게 망설임없이 길을 안내해준다. 타고갈 대중교통 수단부터 몇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야 할지도 지시해준다. 얌전히 스마트폰만 따르면 된다. 영어?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듣기평가할 때마다 나오는 길 묻기 시험 문항은 그 존재여부를 이제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도대체 입을 열어 길을 물을 기회가 없다. 써먹지도 못할 영어회화 몇마디 배우는 것보다 차라리 고급문장을 읽어낼 수 있는 문해력을 더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체력이 왕성한 20대의 딸 뒷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신세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내게는 신선할 게 별로 없는 여행지를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딸의 시각에 기대어 짐짓 새로움을 탐할 수 있었으니까. 체력적으로 피곤하긴 했지만.

 

 

마담 투소 밀랍인형 박물관에서는 유명인과 나란히 포즈을 잡을 수 있다. 홍콩에도 이 박물관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저 코웃음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갈 곳도 많은데 굳이 그런 곳을...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상상 이상이었다. 아침 나절을 꼬박 이 박물관에서 보냈는데 유명인 밀랍 인형뿐만 아니라 4D로 상영되는 짤막한 스크린 애니메이션도 그럴 듯했다. 내게도 아직 동심이 남아있었다니... 여러모로 흥겨운 경험이었다.

 

 

 

딸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런 놀이기구를 타지 않았을 터이다. 입장료는 오죽이나 비싸던지. 이 런던아이와 마담 투소 입장권을 한꺼번에 묶어서 판매하는데 일인당 가격이 45파운드(약 7만 원)에 달한다. 그래도 일단 탑승해보니 세월이 저만치 뒤로 물러가버렸다. 딸은 10대로 나는 40대로. 그러면 됐지 뭐, 여행에서 뭘 더 큰 걸 바라나.

 

 

 

 

 

 

타워 브리지. 과거엔 저 다리를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런던여행이 풍요로웠었는데 이번엔 아예 두 발로 꼭꼭 밟아가며 샅샅이 훑어버렸다. 모두 딸 덕분이다.

 

 

살짝 가슴 떨리는 척. 

 

 

여행이 꼭 진지해질 필요 있나.

딸, 고마워.

잠시 나이의 무게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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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으로 유럽을 갔었고, 유럽에선 런던이 첫 행선지였으며, 런던의 그 많은 명소 중에서 하필이면 옥스포드에서 보낸 시간이 제일 길었다. 그래봐야 반나절에 불과했지만 그땐 수많은 명소를 순식간에 점찍고 오는 게 여행방식이었으니 그나마 반나절을 오롯이 보낸 곳이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난생 처음 찾아간 옥스포드는 길도 건물도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중세풍의 옛스러움, 가로등에 생화로 장식한 화분의 화려함, 아기자기한 서점 등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그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특히 옥스포드 대학에선 감탄에 더해 이루지 못한, 아니 이룰 수 없는 어떤 상실감 같은 비애감에 젖어 들었다. 이런 곳에서 공부 한번 못해보는구나, 하는 비애감이었다. 어렵사리 직장을 잡은 지 몇 년도 되지 않았기에 다른 어떤 걸 시도한다는 자체가 무모함일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혹여 기회가 되었다해도 자신감이 있었느냐 하면 그건 별개였지만.

 

그때 이후로 옥스포드는 내게 이루지 못한, 이룰 수 없는 머나먼 당신이었다. 그곳에서 공부는 못할지라도 다만 며칠만이라도 머물다오고 싶은 곳이었다. 살짝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당신이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이틀을 할애했다.

 

 

 

 

 

 

 

 

 

 

 

 

 

 

 

 

 

 

딱히 특정한 곳을 가지 않아도 거리거리가 모두 아름다워서 마냥 걸어도 피곤하거나 싫증나지 않았다. 물론 이곳에 왔으니 유명한 곳도 가긴 했다. 이를테면 해리포터에 나오는 식당 같은 곳.

 

 

 

 

 

 

 

 

 

 

 

그리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보들리언 도서관.

 

 

 

그러나 멋진 서가를 자랑하는 도서관 내부는 촬영할 수 없었다. 대신 엽서가 있으니...

 

 

 

 

이틀 동안 크지도 않은 동네를 구석구석 누비다보니 예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그때도 그랬을까?) 사람들이었다. 대학마다 거리마다 어린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밀어닥치며 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식으로 하면 진로체험에 해당하는 현장학습을 나온 듯했다. 유명 대학을 답사하며 공부의 의욕과 의지를 불태워보라는 저의는 여기도 마찬가지겠지 싶었다. 이들중 과연 몇 명이나 이곳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될 지... 단순히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식당을 구경하겠다고 단체로 밀어닥치지는 않을 터.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숙소. 저 작은 대문을 열고 건물 옆으로 들어가면 출입문이 나온다. 여느 가정집에 방 하나를 게스트룸으로 빌려주는 곳이다. 주인내외중 안주인은 다소 백인다운 무례함을 내비치지만 아침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깊은 얘기를 나누기에는 다소 내 영어의 유창성이 아쉬웠지만.

 

친구에게 내가 우리 가족 중의 누군가를 험담하는 건 내 입장에서는 하소연이니까 그럴 수 있으나, 그 친구가 면전에서 우리 가족 중의 누군가를 험담하는 건 듣기 싫은 법이다. 이 숙소의 안주인이 트럼프와 김정은을 두고 crazy, crazy 할 때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그랬다. 트럼프야 상관없었지만 김정은을 우리 앞에서 비난하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침 27일 남북정당회담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23, 24일을 이곳에서 잤다.) 그래서 김정은을 변호하고 싶었으나 영어로 긴 얘기를 하기에는 내 생각도 정리가 덜 된 상태여서 한계가 있었다.

 

'아침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고는 썼으나 사실은 이랬다. 첫날 아침, 치우지 않은 식탁에 앉으니 우리가 주문한 얼그레이차와 주인내외가 평소에 먹는 시리얼류, 먹던 잼, 먹던 버터,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자른 사과와 바나나가 아침 식사로 나왔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가족처럼 스스럼없는 대접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아, 내가 알고 있는 English Breakfast는 이게 아닌데.....그래도 기다리면 구운 토마토, 베이컨, 계란 프라이 정도는 나오겠지. 그러나 그후 주인아저씨가 구웠다는 토스트 한 조각이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은 그래도 좀 나았으니 식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던 각종 종이와 책자를 정리한 상태였다. 물론 음식은 똑같고.

 

이분들이 올 10월에 우리나라에 온다고 해서 내 연락처를 알려줬다. 이분들이 오면 한끼 정도 대접이야 뭐 어려울까. 함께 여행한 딸아이가 그런다. 이분들 우리나라에 오면 김밥천국으로 데려가라고.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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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9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온갖 연수를 받았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산림청에서 실시하는 연수였다. 비전문인을 상대로 한 기본과정이었지만 그런 분야를 처음 접한 나로서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세계를 접할 때의 흥분과 떨림이 전해졌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영어 단어 대신 나무 이름, 야생초 이름을 외웠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 비슷한 감정도 일어났다. 나무와 야생초의 이름을 잘 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 영어와 씨름해야 하는 고달픔은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남의 떡이 커보이는 심리 같은 것.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나는 식물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러 강좌 중에 어떤 강사가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 중에 영국 런던을 다녀오신 분 손들어보세요."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이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런던에 가셨을 때 큐 가든을 가보신 분 계신가요?"

아무도 없었다.

"런던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가야할 곳이 큐 가든입니다."

"???"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언젠가 런던을 가야하고, 런던에 간다면 반드시 큐 가든을 가야한다고 마음을 먹은 게.

 

런던이 세 번째 여행인 나는 다른 덴 가도 되고 안 가도 되지만 큐 가든 만큼은 꼭 가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그 다짐을 지켰다.

 

여행 안내서 <시크릿 런던>에 나오는 큐 가든 소개 글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왕립 식물원

런던에서 온전하게 하루의 여유가 주어진다면 권하고 싶은 식물원이다. 1759년 문을 연 이래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녹지 안에 다양한 꽃과 식물, 여러 스타일의 정원을 선보이며 런너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았다. 리치몬드 공원 근교에 자리해 도심과 다소 거리가 멀지만 푸른 하늘과 초록빛 평원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 자체로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 시킨다. 지구 곳곳에서 가져온 다양한 식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데 온실 속에서 이국적인 열대 식물을 보존 중인 '글래스하우스'가 대표적이다.

 

'다소 거리가 멀지만'이라고 했지만 이건 다른 곳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런던은 생각보다 넓지 않아서 웬만한 볼거리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인천에서 서울 도심에 가는 것보다 이동 시간이 길지 않다. 런던은 도대체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 없는 곳이다. 거리도 짧고 대중교통망이 치밀하게 조직되어있기 때문이다.

 

 

 

 

 

 

 

 

 

 

 

 

 

 

 

 

 

 

 

 

 

 

 

 

 

 

 

 

 

아이스 크림을 닮았다고 해서 '아이스 크림 튤립'이라고 불린다나.

 

 

 

 

역사가 오래된 식물원답게 품이 넉넉하고 덜 인공적이고, 게다가 범접할 수 없는 품격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 이 큐 가든이다.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러나 지상의 천국같은 이곳에도 단점이 하나 있다. 바로 비행기. 위 사진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있노라면 거의 10초~20초에 한 대 꼴로 바로 머리 위에서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그곳이 비행기가 다니는 길인지 낮게 뜬 대형 비행기들이 쉴 새 없이 상공을 지나간다. 흡사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투에 나선 전투기 처럼 쉴 새 없이 상공을 가로지른다. 그 수많은 비행기들의 도착지가 궁금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대형 비행기들이 하도 낮게 날아다녀서 비행기 밑바닥면을 카메라로 찍어보려고 했으나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내 손보다 비행기가 빨랐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 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역시 비행기는 빠르다.

 

 

당분간 런던보다 이 큐 가든이 그리워서 몸살을 앓을 것 같다.

 

이곳에서 먹은 점심 메뉴.

 

 

21가지 재료가 들어갔다는 수제햄버거. 차라리 두세 가지 재료라면 맛을 음미할 수 있을 텐데....

 

 

리조토. 음식 위에 장식된 저 매콤한 하얀꽃과 누룽지 같은 하얀조각이 제일 맛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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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4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4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8-05-04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큐 가든 다녀오셨군요.
제가 영국 가서 제일 먼저 간곳이 큐 가든이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나무, 꽃에 관심이 더 없을때인데, 제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았고, 더구나 차도 없이 기차로 다녀야하는 형편에 큐 가든이라는 기차역이 있기에 혼자 가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답던지,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올리신 사진보다 훨씬 더 많은 사진을 찍어오셨겠죠?

nama 2018-05-04 12:01   좋아요 0 | URL
아, 가보셨군요.
사진은 주로 인물사진을 많이 찍었구요. 그중 제가 들어간 사진이 제일 잘 나왔는데(죄송!) 안타깝게도 올릴 수가 없군요.^^

서니데이 2018-05-0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진짜 예쁘게 찍으셨네요. 바로 옆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한 느낌이예요.
정원에 연못도 공작새도 있고, 그리고 유리온실 안에 있는 연꽃도 예뻐요.

요즘 며칠째 바람이 많이 불어요.
매일 매일의 일교차도 크고요.
nama님,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nama 2018-05-04 21:0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실제는 더 멋지고 근사해요.^^

서니데이 님도 즐겨운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현재 시각 오후 11시 20분. 잠드는 시간이 늦어도 오후10시를 넘기지 않는 나로서는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게 몹시 낯설다. 이때쯤이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눈도 침침해야 하는데, 정신도 또렷하고 눈도 잘 보인다.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온다. 물론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언제부턴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었다. 늙은 어린이.

 

우리나라보다 8시간 느린 런던에 도착한 날 저녁은 다음 날을 위해 수면제를 먹고 잤다. 수면제 덕분에 잘 자고 일어나 오전에 ★코번트 가든부터 시작해서 ★영국박물관, ★리버티 백화점, ★뮤지컬 관람까지 꽉 찬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밤이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날밤을 보냈다. 하룻밤 숙박에 13만 원 하는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쪽방에 가까워 화장실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밤에 잠을 설쳐본 사람은 알겠지만 잠을 안 자면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되잖은가.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날락하는 덕에 좁은 복도와 ㄷ자로 꺾인 묘한 구조의 호텔 분위기에 뭐 금방 적응이 되긴 했다.

 

머리에 기운이 많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발에 피를 모으는 동작을 열심히 해보았으나 그도 소용 없었다. 낯선 곳에서 잠은 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다보니 사람이 좀 겸손해진다고 할까, 그간 나의 어리석음과 미련함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사람들이 하나씩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주교 미사 중에 자기 가슴을 치며 참회하는 "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진심으로 읊조렸다. 내 가족들의 아픔이 모두 내 탓인양 가슴이 저려왔다. 어렸을 때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듣거나 꾸중을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조용히 엎드리기만 해도 잠이 스르르 왔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혼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차례 나를 혼낸 후 이번엔 진심과 기원이 담긴 기도를 올렸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염원했다. " 우리 00에게 축복을 기원합니다." 이 문장을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한사람당 삼십 번씩 읊조렸다. 처음엔 가족과 일가친척, 나중엔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을 생각나는대로 한 사람씩 떠올리며 축복을 기원했다. 축복을 기원했다기 보다는 나중엔 내가 축복을 내리는 기분이 절로 들어 그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가 배어나왔다.

 

그래서 잠이 들었는가. 한순간도 잠이 들지 않은 맑디 맑은 밤을 보냈다는 얘기. 다행히 그 다음 날 밤은 죽은 듯 잠에 빠져서 시차를 극복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건 지난 일요일인데 벌써 며칠 째 이렇게 날밤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남들이 일어나 출근할 시간이 되면 그때부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벌써부터 흐트러지면 안되는데.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멀쩡한 대낮에 일을 하고 싶다고.

 

 

코번트 가든: 상설 시장과 풍물 시장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너무 일찍 간 탓에 아직 장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꽃집은 일찍 문을 열었다. 요즘 런던에서는 이 장미꽃이 유행인 듯 다른 곳에서도 이 꽃을 손에 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이 색깔은 뭐라고 부르는지....

 

 

무료로 입장하는 영국박물관.

 

 

박물관내에 있는 서점.

 

 

150여 년 된 리버티 백화점. 간판부터 영국스럽다.

 

 

나무로 된 엘리베이터

 

 

가구 매장?

 

 

리버티 백화점은 그 자체가 문화유산이다.

 

 

뮤지컬 맘마미아. 미리 영화를 보고 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용파악도 못할 뻔 했다. 야한 장면이 나오면 껄껄껄 큰 소리로 웃으며 흥겨워하던, 앞좌석에 있는 저 하얀민소매의 영국 아줌마,

 

 

제지를 당하며 찍은 사진. 본공연이 끝나고도 한참을 저렇게 놀아주었다. 주인공은 물론 조연이나 기타 등장인물도 완벽한 연기와 춤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다.

 

* 사진은 카메라와 새로 구입한 스마트폰으로 찍었는데 스마트폰이 손에 익지 않아서 어색한 사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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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5-03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 꿇고 있는 남자를 발로 누르고 창으로 찔러 죽이려고 하는군요.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닌데 생각이 안나요.
영국의 4월은 아직 춥지 않던가요? 런던 외에 다른 곳도 다녀오셨는지, 앞으로 들려주실거죠? ^^ 서점 유리에 비친 사진 보며, 혼자 가신건 아닌가보다 짐작 ^^


nama 2018-05-03 08:29   좋아요 0 | URL
생각나는대로 조금씩 올려볼게요.^^
얼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도 벌써 잊어버렸답니다. ㅠㅠ

hnine 2018-05-0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iglath-pileser III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Kalhu 궁 벽에 장식되어 있던 부조라네요. 엎드려 무릎 꿇고 항복하고 있는 사람이 Hanunu of Gaza (Gaza 지역의 군주), 창을 들고 발로 누르고 있는 사람이 아씨리아 제국의 왕인 Tiglath-pileser 3세 인것 같아요.

nama 2018-05-04 08:10   좋아요 0 | URL
대단하세요! 저도 책에서 읽은 줄 알고 찾아보았는데....없더군요. 그저 비슷한 것만 나오네요. 박물관에 가면 귀찮아하며 대강 발길을 돌리는 제 버릇이 여기서 드러났네요.^^
 

 

 

몽골 편지

                               안 상 학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몽골 편지'를 '치앙마이 편지'로 바꾸고 싶다.

 

 

 

 

 

 

 

 

 

 

 

 

 

 

 

 

 

 

 

치앙라이

 

 

치앙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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