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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찾기 놀이, 마카오

▸여행기간: 2007년 1월 16일-19일(3박 4일)
▸항공사: 마카오항공
▸환율: 1달러 당 약 8 Pataca

2007년 1월 19일. 여행을 마감하는 인천공항. 집으로 향하는 길. 다녀온 나라에 따라 이 인천공항을 빠져나오는 감회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데......
“여행”이라는 단어보다 “출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마카오에서 돌아오는 날,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그랬다. 그것은 한편으로 짧은 3박 4일의 마카오 여행이 그래도 출장이 아닌 여행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해서 내심 몸과 마음이 느긋하게 풀어지면서 바로 몇 시간 전의 마카오로 다시 돌아가서 길을 헤매고 골목길을 빙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에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루 이틀 고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상황이 여럿 발생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중도 포기해도 여행만은 중도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이기심이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었다.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면 그건 불가항력이다. 집안이 두루 화평하고 평안하고 하는 일이 승승장구하는 태평세월을 기다리다간 평생 한 번도 집을 떠나보지 못하리. 문제는 언제나 있는 법. 내버려두는 수밖에. 이게 나의 이기심이다. 그래서 몇날 며칠 만의 고민과 타협 끝에 어렵게 얻어낸 마카오행이다. 그래봐야 고작 3박 4일이지만.

요즘 여행은 인터넷으로 시작해서 인터넷으로 끝난다. 손목만 좀 고생시키면 온갖 정보들이 넘쳐나지만, 마카오에 대한 정보나 기행문, 가이드북은 그리 많지 않다. 간혹 있다 해도 홍콩 가는 길에 잠시 다녀오는 정도가 대부분이서 가이드북에서도 마카오에 대한 것은 몹시 빈약하고 인색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두세 권 챙겨 다니느라 적잖이 피곤한데 이번 기회에 내가 한 번 가이드북을 써보는 거다. 질펀하게 길 찾기 놀이나 한바탕 해보자. 그러나 <마카오 정부 관광청>에 전화로 요청(두 번 걸었다)해서 얻은 여러 지도와 안내 책자가 여느 가이드북보다 훌륭했다는 사실은 밝혀두자.

새벽 4시 40분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 출국 수속. 수화물로 보낼 가방 한 개 11kg(세 식구의 가방). 3시간 40여분의 비행시간. 입국 수속. 환전. 버스 타고 물어물어 호텔 찾아가기.(처음에 시내에 들어설 때 택시를 타면 바가지 쓸 확률이 높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현지 적응도 빠르다는 생각이다) 호텔 체크인. 그러나 이런 일정 열거에 무슨 의미가 있으리.

풍경 하나- 모든 길은 관문으로 통한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현지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 요금이 매우 저렴하다. 기본이 2.5원. (화폐 단위를 부르는 명칭이 제멋대로다. 마카오 화폐 “파타카”, 홍콩 화폐 “달러”, 중국본토의 “원”으로 부르는 데 다 단위가 같다.) 셋이 타도 7.5원. 우리 돈으로 치면 약 900원 정도여서 신나게 버스에 오르는데 때로 이 싼 값이 문제였다. 어림짐작으로 대강 방향을 잡은 뒤 해당 버스에 오르고 보면 어느 새 중국 본토의 주해시로 넘어가는 국경 관문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에는 일부러 목적지로 , 두 번째는 방향을 잘못 잡아서, 세 번째는 똑같은 실수도 모르는 체 셋이 모두 잠이 든 바람에 하루에 세 번 씩이나 관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내려서 버스에 승객이 우리만 남을 즈음 어김없이 도착하는 관문. “그래도 괜찮아, 거리도 짧고 버스요금도 싼데 뭐. 다시 시작하지 뭐.” 참 너그러워지는 남편과 나. 기왕 왔으니 한번쯤 관문을 넘어 주해시로 넘어가보면 좋겠지만 비자가 필요하다. 일방통행으로 되어있는 입구와 출구에서 쏟아져 들어가고 나오는 많은 현지인들 틈에서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는 수밖에. 헌데 주해에는 뭐가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헤매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법. 마카오의 크기에 대해서 어떤 이는 서울의 종로구만하다, 어떤 이는 영종도의 2분의 1이다, 혹은 동서로 2km, 남북으로 4km 정도라고 하지만 그건 수치상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마카오에서 버스를 타보면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실핏줄 같은 도로에 일방통행이기 일쑤며 차도와 인도가 밀착된 오밀조밀한 골목을 누비는 폼이 우리의 마을버스보다 훨씬 더하고 도로의 변화무쌍함이 성남시의 어느 경사진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경사가 그리 급한 건 아니지만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보니 롤러코스터에도 끄떡없는 나도 때로는 속이 울렁거리는 멀미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광청에서 준<마카오 도보여행>을 따라서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안내서에는 도보 코스가 깔끔하게 나와 있지만 엉뚱한 방향을 잡기 십상이다. 초행자에게는 좀 무리다 싶다.
45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는 마카오. 모든 길은 관문으로 통하고 있었고 포르투갈의 욕망도 중국 본토로 항상 열려있었을 터이다. 갑자기 포르투갈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한때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문어발처럼 뻗어갔던 포르투갈. 지금의 포르투갈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풍경 둘-내 머리를 맡기련다.
남편은 여행지에서 머리 손질하는 것을 좋아한다, 보다는 여행 무렵에는 머리를 손질할 때가 되어서 하다보니 여행지에서 이발소에 종종 가게 된다. 여행지에서의 이발은 맛있는 음식이나 멋진 구경거리 못지않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나보다. 해서 여행 전 이발을 미루고 은근한 기대로 마카오의 이발소를 기웃거리게 되었다는 말씀. 그런데 몇 집 걸러 하나씩 있는 우리와는 달리 이발소가 눈에 띄지 않는다. 관문까지 가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재래시장을 기웃거리다가 길가에 있는 작은 이발소 하나 발견. 중학생만한 여자 아이 하나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버지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하면서 "No time"이라한다. 간단한 영어나마 통하니 좀 낫다. 그냥 하릴없이 나온다. 여기서 포기하기엔 이르다싶어 다시 골목을 누비는데...... 마트에 가면 딸아이는 제가 사고 싶어 하는 것을 어찌 그리도 용케 찾아내는 지 감탄하게 하는 데 이번엔 남편이 나를 감탄케 한다. 골목 깊숙이 있는 작은 이발소를 드디어 찾아내는데 어느 유적지가 이렇게 반가울까 싶다.(渡船街에 있음)
드라마<전원일기>의 응삼이 박윤배를 닮은 이발사다. 서로 말은 통할 리 없는데 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이발사는 연신 뭐라고 의향을 물어온다. “머리를 어떻게 해 드릴까요?”의 뜻이겠지 아마. 내게도 묻는데 나라고 알아들을 리 있나. 이럴 땐 그냥 우리말로 대답한다. “알아서 해 주세요.” 한 시간 가까이 자르고 다듬고 면도에 머리 감겨주기까지 그 정성이 가히 눈물겨울 정도다. 헌신적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하리. 자르기 전과 자른 후를 비교하기위해, 그냥 앉아있기 무료하여 카메라에 모습을 담는데 처음에는 한사코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던 이발사가 이발이 끝나자 함께 포즈를 잡는다. 뿌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번 여행의 사진을 한 장 꼽으라면 나는 이 사진을 꼽고 싶다.
사실 여행지에서 짧은 기간동안 현지인과 어울릴 기회는 거의 없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끓는 관광지라면 더욱 그렇다. 이럴 때 골목의 허름한 작은 이발소 같은 곳은 여행의 색다른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름 없는 잡초들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 이발사는 마카오를 대표하는 이발사요,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손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간의 이발 요금을 공개한다. 2003년 호치민에서는 1달러. 2006년 중국의 운남성 따리에서는 10원이니까 1달러가 조금 넘는 셈. 그러면 마카오는? 면도와 머리감기 포함해서 50원. 이발소 순례는 앞으로도 계속 된다!

풍경 셋-길을 찾는 사나이, 프란시스 자비에르
프란시스 자비에르. 16세기 초 스페인 태생의 Jesuit 파 수행자. 아시아 지역 포교활동을 위해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 10여 년 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1552년 중국의 Sancian에서 사망. 그의 유골이 고아로 옮겨질 것에 대비하여 살을 빨리 썩게 하기위해 석회를 4포대나 뿌렸는데도 살이 썩지 않았다는 것. 2개월 후에 말라카에서도 그대로였고 1554년 고아로 이전되기 위해 무덤에서 나왔을 때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것. 1614년 선교의 목적으로 오른팔을 잘라 일본과 로마로 분배되었고 1636년에는 내장의 기관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졌단다. 이런 연유로 생전 보다 생후에 더 주목 받게 된 자비에르. 지금은 유리관에 시신을 보관하여 고아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있다. 나는 바로 그 유리관에 안치된 시신을 보았었다. 2005년 1월이었다.
마카오의 남단에 있는 콜로안 섬의 콜로안 마을에서 한가로이 동네를 둘러보다 마주친 예쁜 예배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너무나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고 그곳을 벗어나기도 못내 아쉬웠다. 이 마을은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지만 정작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예쁜 성당이 그 드라마에 나온 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여행 3일째라 긴장이 풀렸던지 그동안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자료들을 호텔에 두고나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나오는 바람에 그 이름을 보고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성당이 바로 <프란시스 자비에르 예배당>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둔함이란. 처음엔 동명이인쯤으로 여겼다. 고아의 자비에르가 이곳에서도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한참 추리 끝에 파악하였다. 1928년에 자비에르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이 예배당은 특히 일본의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자비에르가 일본에 처음으로 카톨릭을 전파해서일까.
보물찾기 같았던 프란시스 자비에르. 400여 년 전 태어나서 새 길을 개척하고자했던 사나이. 썩지 않는 시체 덕에 지금도 기억되고 추앙 받고 있는 사나이.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와 세월을 함께 달린 자비에르는 지금도 길을 개척하고 있는지,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엽기적이기까지 한 일들에 열광적일까?

풍경 넷-내가 원조야, 세나도 광장
마카오를 상징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세나도 광장이다. 흰색과 검은 색의 조약돌로 만든 물결무늬의 광장은 사진으로 보나 실제로 보나 참 예쁘고 편안하다. 거의 모든 버스의 종점이 관문이라면 마카오를 찾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세나도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래서인지 버스에서 졸다보면 또 오게 되는 곳도 이곳이다. 물결무늬의 조약돌 광장, 크림색의 예쁜 성당 등 포르투갈 시대의 건물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풍광이다. 그렇다. 일 년 전에 갔었던 리장의 거리들. 닳고 닳은 까만 조약돌로 이루어진 길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그 모습이 스친다. 거기에 인도 고아에서 수없이 보았던 성당들. 그 두 곳을 합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중국 색채와 포르투갈 색채가 절묘하게 결합된 곳이다. 거기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육포나 생과자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들이 도열되어 있는데 이곳은 대만의 주펀을 연상시킨다. 주펀은 <비정성시>라는 영화(아직까지 보지 못했음)를 찍었던 곳으로 알려진 동네다. 물론 주펀이 훨씬 더 원조 같긴 하지만.
이곳에 유명한 포르투갈 레스토랑이 있다는 데 한 번쯤은 들러주는 센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배는 고픈데 Plato라는 식당 찾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다. 분명 가까운 골목 어딘가에 있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깃발 부대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조금쯤 부러워질 때가 바로 이때다. 언제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탐했더냐, 하며 포기할 즈음 짜~안 나타나는 Plato. 연어와 해물요리를 주문. 아, 이런 것이 바로 “요리”라는 거구나. 곁들인 포르투갈 맥주도 맛있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마셨던 밀 맥주 보다 약간 세련된 맛이다. 하여튼 이곳에서 먹은 요리는 우리가 마카오에서 먹은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 백화점 푸드코트 같은 데서 세 끼를 해결하고 현지 서민 식당에서 한두 끼 해결하면서 먹는 것이 마땅치 않았었다. 중국에서는 여~엉 음식에 적응이 안된다.

풍경 다섯-마카오는 □□□□□(이)다.
1.마카오는 <콩나물시루>다
세나도 광장이 아무리 이국적이고 마카오를 대표한다고 해도 진짜 명물은 따로 있다. 마카오에서 버스를 타보지 않은 자, 길을 잃어보지 않은 자들은 알 수 없는 명물이 있다. 바로 서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이다. 개그맨 전유성이 <남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럽의 하수구를 집중적으로 사진에 담은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나도 그처럼 이곳에서 한 가지 주제로 사진을 찍는다면 바로 아파트의 발코니를 택하고 싶을 정도이다. 진득하게 일상의 삶이 배어있어 내 이웃을 보는 듯 나를 보는 듯 가슴의 어떤 부분이 지르르 아파오기도 한다.
새로 지은 아파트에는 번듯한 발코니가 더러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낡은 아파트에는 우리 식의 발코니가 없다. 대신 창문에 창살을 덧대어 발코니처럼 사용하는 데 그 크기가 제각각이라 같은 아파트에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창살 발코니를 찾아보기 힘들다. 방범용 창살이라 하기에는 좀 큼직하여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 사람이 다닐까? 또 왜 하나같이 우중충하기 만할까? 사람이 서 있기에는 아슬아슬 위험해 보이는 데 단순 방범용이라면 저렇게 크게 할 필요가 있을까? 녹슬고 낡고 가는 창살들 틈으로 보이는 속옷 나부랭이 빨래들. 말라 비틀어져가는 화분들. 칙칙한 사람들. 보지 말아야 하는 치부처럼 자꾸 아파트 창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일조권 행사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동서남북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들은 일조권은커녕 사생활 보호나 제대로 될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학교에도 우리식의 운동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일반 시민들은 조깅이나 산책 같은 것을 어디에서 할까나? 실내체육관이 그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까? 관광 유적지로 이름을 올린 몇 개의 정원이나 공원 등은 대외 전시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인구 비례 그 숫자가 미미하다.
마카오는 이렇게 그 모양새가 꼭 콩나물시루 같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이 턱턱 막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공간이 넓은 곳에는 카지노와 테마파크, 각종 경기장(심지어 개 경주장까지)들이 진을 치고 있다.

2.그래도 마카오는 <역사의 중심>이다
세계문화유산 등록명이 “동서양 역사의 중심 마카오”라 한다. 그래서인지 유럽처럼 성당도 많고 갖가지 유적지도 많은데 여기에 한 단어를 삽입하면 더 적확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싶은데. 마카오는 과거의 <역사의 중심>이었다, 라고. 하기야 세계문화유산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 모두 과거의 찬란한 흔적을 보전하기위해 제정된 것이지만. 동서양이 아직도 살아있는 터키와 비교하며 생각해 보면 재밌겠다 싶다.

풍경 여섯- 사랑스런 마카오
마카오는 확실히 독특한 곳이다. 대만이나 작년에 갔었던 운남성과는 확실히 다른 곳이다. 사람들이 우선 친절하다. 동서양이 만나는 곳이라 그런가, 터키처럼. 첫날 호텔을 찾아 어리바리한 얼굴로 버스를 탈 때 버스 안내는 물론 잔돈까지 뒷사람에게서 받아주었던 아주머니는 우리를 호텔 앞까지 데려다주는 바람에 잠시 의심까지 했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대체로 친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택시기사. 아무리 조심해도 택시 기사의 횡포에 막무가내 당하길 몇 번, 택시를 탈 때는 자동적으로 긴장을 하는데 여기 마카오에서는 좋은 기억만 남는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좀 엉뚱한 곳에서 내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사들이 정직하고 친절하다. 참고로 하나 더. 페리 터미널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타이파섬의 공항까지 택시로 가는 데 우정대교(Friendship Bridge)로 곧바로 가면 요금이 46원정도 나온다. 다음에 다시 마카오에 오게 되면 그땐 택시를 타고 시내에 진입해야겠다. 우정대교로 가달라고 해야지.
작년 운남성에서 사람을 질리게 하던 터무니없는 각종 입장료를 떠올리면 이곳 마카오의 입장료는 요즘 표현대로 “착하다.” 정말 합리적으로 착하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풍경 일곱- 질문 있습니까?
그렇지요. 마카오는 카지노로 유명하지요. 우리가 묵은 호텔도 카지노 호텔이어서 무척이나 좋았답니다. 처음 호텔을 찾아갔을 때 얼마나 화려하고 으리으리하던지 “내가 여행사 하나는 잘 골랐어” 라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카지노 입구더군요. 호텔은 입구가 다른 쪽에 있었지요. 하여튼 카지노 호텔에서 사흘이나 잤는데 카지노는 구경도 안했지요. 사실은 고스톱도 못하거든요.
여행 경비를 말씀드리지요. 3박 4일 마카오 여행상품 가격은 499,000원. 여기에 각종 Tax 가 78,000원. 여기에 인원수 곱하시면 되고요. 그 외의 비용은 쓰기 나름인데 돈 쓸 일이 많지 않더군요. 우리가 너무 얌전하게 다녔나 봐요. ㅋㅋㅋ language=java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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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 긴 추억, 윈난

· 여행기간: 2006년 1월 13일~1월 24일(10박 12일)
· 일정: 쿤밍(3박) - 따리(3박) - 리지앙(3박) - 이동(야간 침대버스) - 쿤밍(한나절)


1. 이번 여행은 십 년 이상을 기다리고 준비해 온 여행이다. 대한항공 스카이패스 제휴카드를 사용한 이후로 오로지 보너스 항공권을 얻어 무료 비행기를 탈 이 날 만을 기다리며 매진, 오직 한 신용 카드만을 고집하며 사용해왔다. 한 마디로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구차한 이야기는 생략하자. 세 식구 티켓이 나올 것, 가장 멀리 갈 것, 가능한 한 덜 추운 곳으로 갈 것 등을 고려해서 결정한 곳은 중국의 서남부 지역인 운남성. 여기에는 틈틈이 들어가 보곤 했던 <트래블 게릴라 www.travelg.co.kr>의 웹진이 한 몫 했음을 밝혀둔다.


+여행 전 경비 및 기타 +
-유류할증료 및 공항세: 230,800원(3인분)
-비자대금: 한중문화협회에 의뢰, 전화와 팩스로 간단히 처리됨
3인 이상 단체 비자 25,000×3명= 75,000원
-여행자보험: 27,030원(트래블 게릴라에 신청)
-가이드북:<알짜배기 세계여행-윈난/쓰촨/구이저우>


2. 일정이 무지 짧다. 마일리지 공제 규정상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되어있다. 비수기를 택하다보니 1월 11일 이후가 되고, 쿤밍행 항공 운항 요일을 고려하자니 출발일이 금요일이 되고, 여기다 월말에 낀 구정을 배려하자니 겨우 열흘 남짓. 행선지를 세 지역으로 압축, 쿤밍, 따리, 리지앙으로 결정한다. 한 곳에서 3일 씩 보내기로 한다. 바쁜 일정을 쫓던 여행 패턴에서 진화되었다고나 할까. 좀 귀찮기도 하고. 솔직히.

본격적인 정보 탐색에 들어간다. 숙소를 궁리하던 중 네이버에서 카페를 발견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예약해둔다. 새삼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한국인들의 부지런함이 감탄스럽다.

-쿤밍 http://cafe.naver.com/yntour

<G.H 76>

공항에서 가깝고 신축 아파트 11층에 위치하고 있어서 중국에 온 실감이 덜 난다. 정문 경비를 서는 경비병과 말이 통하면 좋을 텐데 그냥 우리말로 인사를 건넨다.

 

-따리 http://cafe.naver.com/dalilove.cafe

<코리아나 게스트하우스>와 <No.3 게스트하우스>로 제임스 사장님(이 분과는 특별한 인연이 되는 데 읽다보면 나올 것임)이 확고한 기반을 잡은 곳으로 보인다. “따리는 내가 접수한다”

 

-리지앙

따리의 제임스 사장님 소개로 <낭만일생>이라는 곳으로 찾아든다. (주인이 한국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만고루> 아래에 있어서 전망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 방 바로 앞에 전망대 겸 정자가 있어서 리지앙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일 뿐 아니가 해 뜨는 광경도 넋 놓고 파자마 바람으로 볼 수 있다. 옆 집 전망대에선 심심찮게 촬영도 나와 예쁜 리포터 구경도 할 수 있다. 구경꾼에게 2원씩을 받고 입장시키기도 한다.

기타, 실제 여행에 도움이 된 사이트 하나 더.

http://cafe.naver.com/chinahappy

 

3. 쿤밍에서는 꽉 찬 3일을 보냈는데, 대도시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 곳으로 여행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살다 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도시는 늘 그랬던 것 같다. 낯선 곳에서의 막막함에 처음에는 늘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특히 알게 모르게 겪게 되는 바가지요금에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늘 첫 행선지인 대도시에서는 과다한 수업료를 치르곤 하는데 여기 쿤밍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갖고 있는 코드를 읽을 줄 알아야한다. 시내버스 노선 파악, 환전할 은행의 위치, 시장 가는 방법, 쇼핑하기 등 여행이라기보다는 그냥 일상생활에 가깝다. 그런데 그게 3일 정도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능해진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무턱대고 택시를 타지도 않게 되고,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도 길을 건널 수 있고, 특히 쇼핑에는 현지인이 무색할 정도가 된다.

다시 여행자 신분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쿤밍에서 뭘 봐야 되나? 어떤 이는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운남민족촌과 스린을 꼽는다.

우선 운남민족촌. 26개의 소수민족이 몰려 있다는 운남성의 특성을 살피려면 이곳을 보라고하여 마지막 날, 여행도 정리할 겸 이곳을 찾았다. 날씨는 잔뜩 흐렸고 기온도 많이 내려간 덕분에 모처럼 호젓하고 한산하게 둘러 볼 수 있었는데 역시 중국의 관광지는 사람으로 들끓어야 제 격인 듯 영 쓸쓸하기 그지없다. 색채가 다양한 소수민족의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은 추위 때문에 모두가 똑같은 두툼한 점퍼를 걸치고 있어 그마저 눈요기가 되지 아니하고, 반듯하고 큼직하게 지어놓은 소수민족의 전통 가옥도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아니하고, 허구헌날 관광객을 상대로 공연을 해야 하는 젊디젊은 청년들의 하릴없음을 목격하는 것도 즐겁지 아니하고, 티베트족인 장족 코너에서는 눈동자 색깔이 묘한 하얀 피부의 아가씨가 관광객의 요청에 춤사위를 예쁘게 보여주는 데 그 역시 마음이 편치 아니하다. 중국의 티베트 정책이 요런 모양새겠지? 여행 내내 비싼 입장료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지라 이곳도 돈 맛들인 중국인들의 얄팍한 상술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차라리 리지앙의 사방가처럼 노인들이 추는 민속춤이 훨씬 더 흥겹다. 어딘가 둔하지만 인생의 연륜이 배어있어 넉넉하고, 억지웃음이 아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에 더불어 유쾌해지는 것이다. 춤을 추는 노인들의 얼굴에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에서 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리지앙이 고성으로서의 향기를 더 발휘하는 것도 이 노인들 덕분이 아닐까.

 

스린(石林)은 운남을 소개하는 포스터나 책자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암괴석 지대이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와 비교하면 훨씬 덜 흥미롭지만 나름대로 중국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비싼 입장료와 공원 내 차량이동시 과다한 요금이 문제인데 그들은 참 배짱도 두둑하다. 여기까지 와서 안볼 수도 없고, 소심하고 심약한 자들은 열심히 의미를 찾아가며 즐거움도 탐해 보지만 입안이 씁쓸하다. 인도의 아그라에선 타지마할 입장료가 터무니없이 올라 관광객이 줄어들자 아그라 상인들이 입장료를 내려달라고 시위를 벌였다는 데 중국에서는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일 것 같다. 이름 하여 대륙적인 기질이라고나 할까, 사회주의적인 체제에서 오는 경직성 때문일까?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건 내 선입견일까 편견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 큰 나라가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으로 움직이는 게 재미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3일을 쿤밍에서 보냈다면 나는 너무나도 슬펐을 것이다.

그래, 대도시에선 대학 구경을 빼면 서운하지. 운 좋게 대학에 딸린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학 주변에서 얼쩡거려보는 것도 기분을 충전시키는 데는 그만이다. 날이 저물 무렵 물어물어 시내버스 타고 찾아간 운남 대학은 이미 날이 어두워서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대학가 주변 골목에서 찾은 한국음식점은 여행 초반의 긴장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국적을 불문한 젊은 커플을 바라보는 것도 여기서는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쇼핑. 대형 할인점이라면 우리 가족은 한없이 나약해진다. 여행 초반을 쇼핑으로 가방 하나를 채웠으니 말 다했지.....

 

4. 따리 < 리지앙 < 쑤허 < 옥수채

*쑤허: 리지앙에서 가까운 곳으로 옛 마을과 새로 조성된 관광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옥수채: 리지앙을 둘러싼 옥룡설산(해발 5,596m 로 히말라야 산맥 중 끝에서 두 번 째라함) 가는 길에 있는 나시족 문화의 탄생지.

 

웬 부등식? 여기서 문제 하나 - 이들의 공통점 알아맞히기.

 

힌트1. 어린 시절, 한여름에 비가 오면 허름한 뒤란에 겨우 땅에 붙어 자라고 있는 잡풀 사이로 맑은 빗물이 졸졸졸 흐르곤 하여 이상야릇하고 행복한 꿈에 젖어들곤 했다. 한참 동안을 마냥 넋을 잃곤 바라보곤 했었다.

 

힌트2. 유난히 등하교길이 험난했던 중학교 시절, 두 어 고개 넘으며 밭길 산길로 40여 분을 걸어 다녀야 했는데,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면 산 언덕길이 그대로 물길이 되곤 했었다. 발목 너머까지 자란 잡풀사이로 빗물이 시냇물처럼 흘러 운동화가 그대로 물에 잠겨버리곤 했다. 어쩌다 겪게 되는 그 물난리(?)가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힌트3. 김천의 직지사. 사찰 앞마당에 내 손목만한 너비의 수로가 길게 파여 있어 물이 고이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는데, 15년 전의 이 기억이 맞을까?

 

힌트4. 아산의 외암리 마을, 인위적인 한옥 마을을 조성한다고 하여 구경삼아 갔었다. 어느 집 앞에 수로가 있어 담 옆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길을 건너야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이한 구조가 참 인상에 깊게 남아있다.

 

힌트5.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 농가를 개조한 살림집을 찍은 화보를 잡지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글쎄 실내에 작은 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도 사는구나! 놀라움 내지는 부러움.

 

정답은? 물.

 

그러면 부등식은?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생각이니 양해하시길... 따리에서 처음에 인상적인 것은 마을을 따라 이어지는 수로였다. 물이 맑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하게 물길을 내고 있었고 어느 길모퉁이엔 앙증맞은 돌우물도 있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물 속은 제법 깊어 보였다. 그러나 이곳의 매력은 이런 인위적인 수로가 아니라 얼하이 호수인 듯싶다.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톤레삽호수에 그 크기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크기나 아름다움 면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다만 나의 몸으로 그 세밀한 부분까지 경험을 못했기에 여기서는 그저 이름만을 거론할 수밖에 없다는 게 좀 안타깝다. 내 언젠가 이 호숫가를 미친 듯이 걸어보리.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소. 호수에 외롭게 떠있는 <남조풍정도>라는 섬은 어느 안목이 뛰어난 자의 노력으로 가히 얼하이의 진주로 여행객을 매료시키는 곳이다. 잘 꾸며진 리조트를 연상시킨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사진발로 남 염장지르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리지앙. 이곳은 “동양의 베니스”라는 곳. 따리의 수로보다 훨씬 넓고 깨끗하고 물살도 세고 역시 듣던 대로 물의 도시였다. 참 아기자기하다. 수로에 띄우는 예쁜 꽃모양의 촛불도 하나쯤 사서 띄어보고는 잊어버린 소원도 떠올려본다. 수많은 인파로 반들반들해진 돌바닥을 주인공으로 사진도 몇 장 찍어본다. 골목마다 예쁘게 흘러가는 수로를 따라 마냥 걸어도 절대로 지칠 것 같지 않다. 아무거나 아무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럴 듯하게 찍힐 것 같다. 실제로 돌아와서 인화를 해보니 모두 엽서 같은 사진이 나왔다. 야경 또한 기막힌 풍광을 이룬다. 고성 전체에 불이 붙은 것 같다. 사람 사는 동네가 이렇게 그림 같아도 되는 거야? 그런 거야?

 

쑤허. 리지앙의 그 무지막지한 인파가 지겨워질 무렵 쑤허를 찾아가 본다. 어김없는 입장료가 좀 얄밉다. 신시가지라고 할까. 새로 구성된 동네가 너무 인위적이라서 실망감을 금치 못한다.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하여 훠이훠이 걷다보면 차마고도 박물관이 나와 과거 한 시절의 번성과 영광의 흔적을 보여주는 데 조금씩 이 쑤허라는 곳에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한다.

 

고색이 완연한 한 다리에 이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다. 솜방망이 마이크로 보아 무슨 촬영을 나왔나보다. 동네 한 바퀴 도는 데 10원인 조랑말에 딸아이(초등3)의 시선이 가 있다. 간절한 눈빛이다. 남편은 캠코더를 들고 앞서 뛰어가고 나는 터벅터벅 말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댄다. 순간 공주마마를 모신 하인과 하녀가 된다. 자식을 위해 무엇인들 못하리. 그렇게 허겁지겁 뒤따르다보니 어느 순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작고 예쁜 수로였다. 이 수로를 따라 이어진 카페는 채 10곳이 못되지만 하나같이 예쁘고 정겹다. 너무 예뻐서 간지러울 정도다. 흐르는 물은 리지앙 보다 훨씬 맑고 깨끗하다. 창 밑으로 흐르는 수로를 곁에 둔 카페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린다. 내 무엇을 더 바랄까.

 

옥수채(玉水寨). 한국 남학생과 중국 여학생 커플. 우리는 그들을 한중 커플이라 불렀다. 따리의 남조풍정도에서부터 일행이 된 이 한중 커플과 옥룡설산을 함께 돌아보았다. 중국어 한 마디 모르고도 잘 다니는 우리지만 이 중국어가 완벽한 한 쌍을 대동하고 다녀보니 원더풀, 머치 모어 원더풀(much more wonderful)이다. 다만 감기에 걸려 몹시 힘들어하는 이들이 좀 안쓰럽다. 그런데도 하나라도 놓칠세라 정말 열심히 다닌다. 부럽다.

 

그래도 히말라야에 붙은 산이라고 해발 고도가 제법 높다. 까이꺼 스위스의 융프라우도 끄덕 없었는 데 이 정도야, 했더니 남편이 그건 벌써 10년 전이란다. 에고 힘 들어라, 절로 탄식이 새어나온다. 내 심장이 견딜라나 은근히 걱정이 된다. (여행에서 돌아와 병원에 가니 혈압이 좀 떨어졌단다. 즉 몸이 건강해졌단다. 역시 여행이 보약이여)

 

고산증세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확인한 모우평. 즈려밟는 걸음걸음 힘이 빠져 괴로우나 소수민족 흉내 내어 야크 고기 먹어 보고 딸아이에 전통 의상 입혀보니 이곳이 속세인가 내세인가 신선놀음 따로 없네.

 

터키의 파묵칼레를 떠올리는 백수하. 인공감미료에 질리면서도 끊기 어렵듯 이곳도 인위적인 멋이 팍팍 나지만 그런대로 멋지게 꾸미려고 애 쓴 점은 인정하자.

이쯤에서 이 날의 일정이 끝났으면 싶었다. 그만 봐도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몸이 힘들었다. 평소 출퇴근 시 하루에 합쳐서 1 시간 20분 이상 걷곤 하여 내심 걷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 고산지대에서는 평지의 운동이 별 효과가 없는 듯싶다.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감기와 설사로 괴로워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이 한중커플의 열성 때문에 차마 말은 못하고 꾸역꾸역 따라다닌다. 본전 생각도 나고. 웬 입장료가 비싼지.(성인120원, 학생80원 *리지앙에선 욕실 딸린 2인실이 하루에 60원 하는 데서 잤음.)

 

별 기대감 없이 옥수채란 곳에 들어간다. 에구 또 입장료 타령. 나시족 문화의 탄생지라나 뭐라나. 뭐 민속촌 같은 거겠지. 뭘 그렇게 상징하는 것이 많나. 보아하니 이곳도 인공 감미료로 도배한 곳이군. 그러면 그렇지, 하던 순간 꼭대기에 있는 한 고목에 이른다. 그 밑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이 물은 다시 부챗살 모양의 호수가 되었다가 아래로 긴 물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 이것은 자연산인 것 같은데? 그러면 이 물이 흘러서 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그 물길의 근원 내지는 시원? 나는 드디어 흐르는 물의 근원과 만난 것이다. 나시족은 바로 이 물의 근원지를 신성시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가 없다니. 아니 건전지가 죽어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구하기도 어려운 놈, 하필이면 요때....이 정경을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담느라고 보고 또 본다. 또 하필이면 이런 때, 저 언덕 위에 있는 저 노란 큰 꽃나무, 흐느적흐느적 바람에 흔들리는 폼이 예사 나무가 아닐 세. 저 나무엔 필시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게 틀림없어. 카메라가 없는 덕분에 나는 더 진하게 눈이 시리도록 마음에 담아올 수 있었다.

 

따리.

리지앙.

쑤허.

그리고 옥수채.

이 아름다운 곳들은 이렇게 내 기억 속에 있는 물에 대한 추억의 갈피갈피 사이를 흐르게 되었다.

 

5. 소수민족으로 유명한 동네에 왔으니 한 번은 경험을 해 봐야지, 실행에 옮긴다.

 

따리 1.중국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시 용감하게 나서는 데, 궁하면 통하는 법,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귀인을 만난다. 조우청이라는 백족 마을에 갈 생각이라는 강선생님. 흔쾌히 합류한다. 이 분은 준비된 분이었다. 지난 번 중국여행 때 언어 때문에 고생을 해서 중국어를 배웠단다. 나도 인도 간다고 힌디어도 건드려 보고, 장기적인 계획의 일환으로 스페인어도 건드려 보았지만 모두 작심삼일이어서 그 이후로는 “영어라도 잘하자”하는 심정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경험이 있기에 이 분의 중국어 한마디 한마디에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어가 쉬운가? 여행 오기 전 한달 간 배웠다는 데 한달 배운 솜씨가 아닌 걸. 나는 영어 때문에 평생 고생하며 사는 데...쩝쩝...

 

차에서 내리자 동네 아줌마 둘이 따라 붙는다. 날염으로 유명한 동네이니 만큼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지 이미 눈치 채인 상태라 그냥 따라가 본다. 동네 어귀로 가는 도중 결혼식 행렬을 목격,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진짜 구경거리 제대로 걸렸네. 잔뜩 치장한 신부의 새촘한 표정으로 보아 뭔가 못마땅한 데 짓궂은 친구들에 둘러싸인 신랑은 연신 싱글벙글하다. 결혼식 전 함 받는 우리네 풍속과 많이 닮아있다. 각종 패물을 접시에 담아 진지하게 받쳐 들고 가는 들러리, 장정 여럿이서 나란히 들고 가는 세 개의 궤와 그 위에 얹힌 화려한 이부자리, 신부의 목에 걸린 분홍색 플라스틱 손거울.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날염 공장에 도착. 본격적인 흥정에 들어가는데 굉장히 유쾌하다. 깎는 쪽이나 부르는 쪽이나 반 쯤 흥에 겨워있다. 내 이런 흥정은 또 처음일세. 크기별로 날염 천 네 개를 산다.

 

동네를 기웃거리다가 대문이 열려 있는 어떤 집에 조심스레 들어가 구경해도 좋은 지 물어보니 기꺼이 허락한다. 한가운데 마당을 두고 사방에 2층 구조로 된 여러 개의 집이 붙어있다. 우리식으로 하면 다가구 주택 쯤 되나? 양지 바른 곳에서는 모녀가 손톱을 깎고 있는데 경계의 빛이 완연하다. 입성으로 보아 형편이 어려워 보인다. 한편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아낙네가 웃음으로 우리를 환영하며 방 구경을 허락한다. 겉으로 보기보다 내부는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커다란 결혼식 사진이 벽에 걸려있고 다른 방엔 작은 신전과 소원을 담은 족자들이 벽에 나란히 걸려있다. 그 중의 하나에는 커다란 글씨체로 “財”라고 적혀있다. 좀 징그럽다. 우리 네 명 손에 각각 하나씩 들려있는 카메라도 징그럽긴 매한가지겠지만. 한바탕 사진 찍는다고 법석부리고 주소 적느냐고 법석부리고 있는 데 아까의 그 모녀는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왠지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따리2.

여행 준비 차 여기저기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가 우연히 코리아나 게스트 사장님이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 <따리사랑>의 100번째 가입히트 이벤트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따리에서는 큰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내 생전 그런 행운은 처음인지라 고맙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몹시 어색하기도 했다. 대접 받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기도 했다. 환영의 꽃바구니를 시작으로 잠자리와 먹는 것, 각종 입장료와 차량지원을 받았고 따리의 특산물도 기념 선물로 받았으니 가히 초호화 여행을 한 셈이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틀 째 되는 날 밤에는 현지인인 백족의 저녁식사 초대에 우리를 불러주어 재미있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전속 마부로 일하는 백족 아저씨(38살)가 둘 째 딸의 생일이라고 돼지를 잡았다는 데 마치 동네잔치 같다. 좁은 방안에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부 부부, 마부 남동생, 마부의 큰 딸, 제임스 사장님, 우리 세 식구 이렇게 둘러 앉아 그네들의 전통 음식을 맛보고 전통주도 마셨다. 음식은 한 상 그득했는데 그 중 고수(향채)를 듬뿍 넣은 야채가 특히 내 입에 맞았고 우리의 김치처럼 먹는다는 이름모를 전통 요리도 길들이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53도의 전통 술. 쿤밍에서 첫 날 수면제로 마셨던 양주 한 모금에 무지 고생했던 나는 한 잔으로 만족해야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도전해보리.

 

갑자기 화장실을 찾는 딸아이를 안내한 곳은 마구간 앞. 말이 지켜보는 가운데 땅바닥에 오줌을 누는 딸아이는 마냥 즐거워한다. 평소 간이 화장실보다 밭두둑에 땅을 파고 일을 보는 걸 더 즐겨하는 아이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 거리가 되겠지.

 

그런데 빈손으로 온 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가방을 열어도 기념품으로 줄 만한 게 없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말을 태우기 위해 우리를 데리러 온 마부의 아내에게 지난여름 공항에서 샀던 썬로션과 담배 두 갑을 건네었다. 우리의 고마움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덕분에 이후 리지앙의 옥룡설산에서 자외선 세례를 맨 얼굴로 받아야 했지만.

 

6. 리지앙을 떠나기 전 날. 그동안 며칠을 함께 했던 한중 커플이 쿤밍으로 돌아간다기에 배웅할 겸 버스표도 미리 예매할 겸 따라 나선다. 그동안 정이 들었나보다. 헤어져 돌아오는 데 마음 한 구석이 짠하다. 중국 여학생에게 한국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보면 볼수록 귀여운 아가씨다. 다시 만나면 무지 반가울 것 같다.

 

이제는 쿤밍으로 돌아가 다시 인천으로 가야한다. 여행의 종반부다. 마지막을 야간 침대 버스로 장식하기 위해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버스에 오른다.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의 백미는 야간이동 특히 버스이동으로, 나는 첫 인도 여행 이후 야간버스이동을 무지 좋아하게 되었다. 비록 담배 연기가 시도 때도 없이 코를 자극하고 과일 껍질과 쓰레기로 바닥이 지저분해도 일단 침대에 누워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면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그것도 깊은 잠이다.

 

열흘 남짓 여행. 윈난은 완료형의 여행지가 아니라 두고두고 와야 할 곳으로 미련이 남는 곳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서서히 윈난의 또 하나의 소수민족인 여행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2006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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