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지지 않는 기행문, 백두산(2007년 8월 11일 ~ 16일)


1. 세 끼니의 밥을 일말의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주는 대로 먹는 다는 것, 그것도 제대로 된 구색 맞춘 밥을, 그것도 여행지에서. 하루 밤 잠자리를 위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낯선 거리를 헤매며 싸구려 호텔을 찾아 가격을 흥정하여 겨우 방 하나 얻고는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쉬는 행위가 생략되어버린 여행. 터덜거리며 신발을 질질 끌며 생수 병을 손에 들고 휘저으며 여기저기 탐색의 눈길을 번들거릴 필요가 없는 단순 명쾌한 깔끔한 여행. 여행자의 전설과 신화가 안전하게 묻혀버리는 여행. 패키지 여행.


2. 최소한 한 달, 참고 서적을 훑어가며, 심지어 고등학교 교과서까지 참고하며, 지도를 그려가면서 준비하는 역사 기행. 동학혁명 역사 기행을 그렇게 해 보았다. 이십여 년 전에.(참, 그때는 환상적인 백수 시절이었다.) 얄팍한 지식과 준비 과정 없는 역사 기행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허탈감을 안겨준다. 흠, 이번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 답사가 그랬다. 주몽이 주름잡던 곳, 빈약한 내 상상력과 보잘 것 없는 지식이 마구마구 내 멱살을 휘어잡고 휘둘러댔다.


3. 전혜숙.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 또 있다. 김놈석.

돌아가신 아버지의 전처 딸과 전처. 아무도 이들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잊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이건만, 그런데도 잊혀지지 않는다. 작년에는 호적에 남아있는 김놈석이라는 이름 덕분에 한바탕 난리를 부렸었다. DNA 유전자 검사도 해보고 법정에 나가 재판이라는 과정에도 참석해보았다. 우리 가족이 그간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을 생각해보면 희극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해프닝 같은 재판이라니.

  가족사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극. 압록강 변을 따라 버스로 달리는 백두산행에는 여행 내내 비까지 내렸다. 화면에 비 내리는 무성 영화 한 편. 글 이전에 눈물이 앞선다.   

4. 판문점. 아마도 교사라는 신분이 있어서 가 볼 수 있었던 곳. 정장과 정장 구두차림으로 가야했고, 수술 전 서명을 받는 동의서와 비슷한 각서 한 통에 서명을 해야 하는 절차를 거쳐야했던 곳. 패키지로 온 듯한 외국인 단체 여행객들, 아 이들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관광지구나, 에 놀랐던 곳. 남과 북이 만나 회담을 하는 회의실, 한 가운데 선이 그어져 있었던가. 하여튼 북쪽 측 땅을 살포시 밟고는 얼마나 감격했던지...관광지로서는 최고의 긴장감과 동시에 황홀감을 맛보았던 곳.

  육로로 아버지의 고향인 경기도 개풍군과 어머니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를 거쳐 평양에서도 며칠 머물다가 내 두 발로 이 땅을 꼭 꼭 밟으며 백두산에 오른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진짜 그렇게 된다면, 그 땐 수십 장 수백 장에 달하는 기행문을 한 번 써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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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행기(2005년 8월 9일~8월 14일)


1.준비

이번엔 대만이다. 7월 16일에 시작되는 여름 방학은 너무나 길다. 47일간이다. 늘 35일 내외에서 머물던 여름 방학에 익숙했던 터라 갑자기 늘어난 열흘이란 시간이 나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를 저질러야할 것 같은 답답함에 몸서리치다가 계획에도 없던 대만 행을 감행한다. 이유는 단 하나. 항공권이 저렴하여 세 식구가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십이 년 전 처음 여행할 땐 여행지 먼저 돈은 나중이었는데 어디 인생이 늘 그렇게 황금빛인가, 이젠 경비 먼저 생각하고 여행지를 나중 선정하는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생활인이 될 수밖에. 지갑 속에 들어있는 액수 먼저 확인하고 점심 사 먹듯 이번 여행은 한마디로 한 끼 점심 같은 여행이었다. 가볍다. 위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먼 훗날 돌이켜보면 먹었던 메뉴도 생각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그런 점심일 수도 있겠다 싶어 이렇게 또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먼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던 중 <비취랑>이라는 Daum 카페를 발견한다. 회원 가입하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본다. 어라, 나 보다 앞지른 사람들이 많구먼. 늘 나 보다 못한 사람도 많고 반대로 나 보다 더 잘 난 사람도 무지 많다는 내 지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런데 원 세상에, 이렇게 자세할 수가 없다. “호텔을 나와 왼쪽으로 가면 웨딩숍이 나오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져 쭉 가면 민관서로 전철역이 나옵니다.”(포츄나 호텔로 3일간 머물렀음) “선도사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맥도날드를 마주보고 서 있는 기린 그림의 빌딩을 지나 갈색 건물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요렇게 생긴 간판이 걸린 호스텔이 나옵니다.”(타이페이 호스텔인데 2번 출구는 불편하므로 1번으로 나오면 훨씬 찾기 수월함. 여기서 이틀 묵음) 누군가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이다. 줄을 지어 등산할 때처럼, 눈길에 난 발자국처럼 그저 앞질러 걸어간 자들의 발자국만 따라가면 되는 여행이라니. 일단 참고하자. 뭐 대단한 탐험도 아닐 텐데.

가이드북으로는 세 권을 준비한다. 한글판, 영문판 Lonely Planet, 타이완관광진흥청에서 발간한 64쪽짜리 한글판(이 책은 6월초 코엑스에서 열렸던 여행박람회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얻어왔었음).

캐세이 퍼시픽 항공의 <비지트 타이페이>는 항공권+호텔1박을 기본으로 한 에어텔 상품이다. 호텔비가 제일 저렴한 포츄나 호텔로 2박 더 연장하여 예약한다(기본 314,000원+1박 추가당 34,000원, 아동 기본 225,000원+1박 추가당 15,000원, tax 1인당 61,900원) 4일 째 밤은 화련에 가 있을 테니 그건 그 때 직접 부딪히고 마지막 날은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다시 타이페이에 있는 저렴한 호스텔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 예약한다. 얼마 후 답변이 온다. OK. 준비 완료.

공항 데스크에서 직접 받은 전자항공권이 좀 낯설다, 쿠폰 형식의 빨간색, 파란색 줄이 있는 그런 모양새가 아니라 그냥 A4용지다. 간편하구먼. 세 식구용 배낭으로 손잡이 달린 끌랑 하나(35L)와 작은 배낭 2개가 전부라서 그냥 기내로 들어갈까 하다가 휴대용 칼 하나 때문에 이미 통과했던 출국 수속 대 첫 관문을 다시 빠져나온다. 세 식구 우루루. 그전엔 칼 하나 정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탑승수속 대에 올려놓은 우리 배낭은 8kg정도. 이렇게 가방이 가볍기로는 여행 중 처음이다. 홀가분하기 이를 데 없다. 어린 딸아이의 먹거리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옷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는데 아이가 자라니 너무 간편하다, 얘야,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이 에미 배낭 좀 네가 들어주렴.

2. 간략한 일정

<8월 9일 화요일>

호텔 투숙-대만의 호텔들은 신용 카드나 현금으로 보증금을 받는데 체크아웃시 되돌려준다. 여러 여행자들이 이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냥 카드를 주니까 영수증도 따로 내밀지 않는다. 사인도 하지 않으니까 거래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고 이를테면 예방차원인 것 같다.

고궁박물관- 75만 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대박물관으로 세계4대 박물관중의 하나라고 하나 실제 참관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다. 물론 전시되고 있는 보물들은 무척이나 귀하고 아름답고 세계의 다른 유수의 박물관처럼 남의 것을 벽 째 뜯어온 것 같은 무지막지함도 보이지 않고(이 부분은 잘 모름) 나름대로 알차고 훌륭하나 그 수가 너무나 적다. 그래서 구경도 하다가 만 것 같은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세계 4대 박물관이라기에 루브르나 대영 박물관 비슷한 것을 기대하고 지레 겁을 먹었는데 덕분에 힘은 부치지 않았다.

스산위안- “미술관 옆 동물원”은 아니고 박물관 옆 공원이다. 아담한 규모로 아기자기하다. 연못에서는 내 허벅지만한 잉어들이 서로 먹이를 먹겠다고 아우성이다. 한 젊은 엄마와 어린 남매가 열심히 먹이를 주고 있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 젊은 엄마가 우리 유진이에게 물고기 밥을 한 줌 나누어준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 눈빛이 참 선하고 적극적이다. 세상 엄마들의 눈빛이다.

타이페이역-흔히 말하길 인도의 여행은 기차에서 시작하여 기차에서 끝나는 것처럼 대만 여행은 타이페이역에서 시작하여 타이페이역에서 끝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화련행 열차표를 예약할 겸 찾아간 타이페이역은 마치 미로와 같다. 현기증마저 인다. 우여곡절 끝에 창구에서 표를 끊는 데 표가 없단다. 근처의 여행사에 가서 패키지를 알아보니 내겐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구한다. 다시 안내 창구로 가서 앳된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버스가 City Hall 근처에 있단다. 그래 내일을 기약하리.

<8월10일 수요일>

家樂福-화련(이렇게 “화련”이라고 말하면 절대 못 알아듣는다. 화리엔~비스므레 발음해야 되는데 ㅎ이 /p/도 /f/도 아닌 것 같다.)행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 City Hall까지 갔으나 정거장 팻말이 보이지 않는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는 데 결국에는 화련행 버스를 운행한다는 대유버스영업소까지 찾아간다. 그런데 운행하지 않는단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태풍으로 길이 끊어져 한시적으로 폐쇄된 상황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대만의 시외버스 정류장이 수시로 바뀐다고 하는데 이 점만 빼고는 대만의 대중교통은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어 여행하기에 편리한 편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웬 가락복?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어떤 현지인이 가르쳐준 대로 근처에 있는 무슨 기차역으로 가본다. 또 열심히 걸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따가운 햇볕 속을 생수 한 병으로 식혀가면서, 다리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유진이를 살살 달래 가면서, 열심히 길을 건너고 또 묻고 다시 걸어 찾아갔으나 역시 화련행 기차표는 없단다. 그러면 그렇지, 서울역에서 매진된 표가 노량진역에서 있을 리가 있겠어? 혹시나 했던 우리가 미련한 게지. 허탈한 심정으로 역사를 빠져나오니 반가운 기업 로고가 눈앞에 보인다. 바로 대형 할인점 까르프. 이미 다국적 기업의 판매 전략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눈에 익을 대로 익은 그 기업 로고가 마치 이국땅에서 만나는 친지와도 같아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몹시도 힘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간 가락복. 물건이 천정 높이 까지 그득 쌓여있는 모습이 우리네 진열 방식과 대비된다. 유진이가 갑자기 달려간다. 어느 판매대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타월 손수건이 그득하다. 한 장에 9원. 친구들에게 주고 싶다기에 열장을 산다. 남편도 작업화로 신을 운동화 한 켤레를 산다. 다양한 간식거리에 잠시 감탄한다. 그런데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향이 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나도 이곳 대만 음식에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점심-가락복을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아이 쇼핑은 잘 했지만 허망한 기분이 드는 건 또 왜일까? 점심부터 먹고 보자. 가만히 보니 근처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어딘가를 열심히 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이 저들만 따라가면 될 것 같다. 드디어 성공. 먹자골목에 당도한다. 동네 이름? 모른다. 음식점 이름? 굳이 따질 필요도 없다. 마치 사은품을 타려는 사람들처럼 줄을 선 사람들 뒤를 우리가 나란히 잇는다. 일회용 도시락에 밥을 담아주면 그걸 들고 뷔페식처럼 차려진 반찬을 기호대로 덜고 값을 내면 된다. 먹을 만하다. 아니 대만 여행 중 입맛에 제일 맞는 맛이었다. 상호라도 기억해둘걸. 동네라도...

101빌딩-타이페이에 새로 생긴 명물이라는 101빌딩. 5층 매표소에서 89층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7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단다. 전망대에선 커피가 제격. 한 잔 마시고 나니 비로소 여행 온 실감이 난다. 남편과 유진이는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도깨비 방망이같이 생긴 일회용 스푼이 버리기 아까워 가방 속에 챙긴다. 나는 이따금 이런 사소한 것에 매료된다.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눈을 혹사시킬 정도로 많이 봐두어야 포만감을 느끼는 법, 아니면 몸을 혹사시키든가. 하여튼 101빌딩을 보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우리나라의 63빌딩도 못 가봤다.

용산사- 조금 넉넉해진 마음으로 용산사에 간다. 무료로 나눠주는 향을 한 줌 받아 그네들처럼 향로에 넣고 흉내를 내 보지만 별로 기도할 게 생각나지 않는다. 뭘 기도한다는 게 결국은 뭘 좋게 어떻게 해달라는 것 일 테고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 혼잣말일게 분명할 테고, 내가 너무 세상을 재미없게 살고 있나? 닭 벼슬 같은 머리에 야하게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너무나 진지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무엇을 기도하고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주위의 수많은 인파는 차라리 그 청년을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처럼 희미하게 비쳐진다.

시먼띵-우리나라의 명동 같은 곳. 젊은이 거리다. 여기저기 기웃거려보지만 딱히 할 만 한 게 없고 수많은 인파에 치여 몸만 피곤하다. 어느 의류 상가 빌딩으로 들어가니 카페 하나가 한 구석에 조용히 숨어있다. 역시나 옷은 그림의 떡이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일단 목부터 축인다. 베트남에서 말로만 듣던 얼음 넣은 맥주를 마셔본다. 맛이 괜찮다. 한 나라의 문화나 풍습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바퀴 벌레를 먹는 다는 어떤 나라도 개고기를 먹는 우리네와 다를 바 없다.

스린야시장-대만에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얘기하는 야시장. 정말 그럴 만했다. 동네 사람들 다 나와 있고 세상에 있는 생물/무생물은 물론 온갖 도박기구(소박하지만)까지 다 나와 있는 것 같다. 밤이라서 그런가, 더 풍성하고 더 그럴 듯하게 보인다. 좌판의 음식도 푸짐해 보인다. 유명하다는 어와젠(굴달걀부침)도 먹어본다. 동물 가게가 늘어선 모퉁이에선 유진이가 눈과 발을 떼지 못한다. 웬만한 애완견 이름은 꿰고 있지만 가까이 가지는 못하는 유진이를 위해 잠시 더 구경한다. 어라, 카멜레온까지 있네. 진짜 눈이 360도 회전일세. 대만의 야시장이 눈을 360도 돌아가게 만든다. 나도 카멜레온? 정말 재밌다.

<8월 11일 목요일>

양명산- 타이페이역에서 조금 헤맨 끝에 양명산행 버스에 오른다. 하나라도 더 봐야지 하고 열심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가 낯익은 곳이다. 벌써 현지인이 되었나 했더니 바로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앞을 지나고 있다. 저런, 이걸 몰랐네. 좀 더 눈여겨 봐두었으면 타이페이역에서 버스 정류장 찾느라고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변명이라면 더운 날씨 탓이다. 꿀컥 꿀컥 생수 들이키다 보면 평소의 한가한 기분을 전혀 되찾을 수가 없게 된다.

서울의 남산 쯤 생각했던 양명산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 가이드북을 열심히 읽어 보지만 어떻게 답사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땐 먹고 생각하자. 리어카 위에 바나나 잎으로 싼 주먹밥이 눈에 들어와 간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한다. 퉁퉁한 우리네 시장 골목 아줌마 같은 주인아줌마가 중국어로 무어라 인사를 하는 데 우리가 외국인으로 보이지 않는가보다. 하기야 도착 첫날 전철역에서 겨우 교통카드를 물어가며 끊고 났는데 우리에게 길을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생긴 게 아무리 비슷해도 다른 점이 분명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가 너무 현지 적응을 잘해서?

처음 가는 곳은 일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살필 것, 역시나 버스 팻말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두어 명 있다. 108번 순환버스가 있다. 무한승차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중간에 여러 번 내려 구경하고 다시 탈 수 있는가 보다. 일단 타고 보는 데 중간 중간에 사람들이 두엇 내리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도저히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다. 꾸벅 꾸벅 조는 잠이 무척이나 달콤하다. 그러다보니 다시 버스가 원점에 와 있다. 이럴 땐 쉬자. 근처의 스타벅스에 들어가 시원한 바람 쏘이고 커피 한 잔 마시니 다시 원기가 회복된다. 다시 밖으로 나가기가 두렵다. 그늘도 없다.

단수이- 양명산에서 내려오는 길(올라갔던 길이 아님)에 베이터우 온천박물관에 잠시 들려본다. 잠시 옛 건물이 간직한 나름의 분위기에서 땀을 식히고 단수이로 향한다. 인천의 월미도 같은 곳으로 해안선을 따라 상가가 쭉 늘어서 있는데 원주민 기념품 가게, 옷가게, 가방 가게 등 볼거리가 제법 있다. 여기서 다시 배를 타고 어인마두라고하는 유원지에 다녀온다. 역시나 덥기만 하고 이렇다 할 볼거리는 별로 없는 것이 연인끼리 온다면 그럭저럭 분위기가 나련만 더위에 지쳐 대낮부터 시원한 생맥주를 찾는 중년의 우리에겐 몸에 맞지 않는 곳이다. 다시 단수이로 향한다. 시원한 맥주와 오렌지 주스를 시키는 데 이 오렌지 주스 장난이 아니다. 캔에 들어있는 데 족히 1리터는 넘지 않을까 싶다. 유진이가 마시다 남은 것을 빈 생수 병에 담아 와서 나중에 먹었으니까.

빈속이나 다름없는 위장에 맥주가 들어가니 잠시 기분이 들뜬다. 역시 술은 낮 술이 제격이라니까.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제방에 앉아 카메라로 장난을 하고 있자니 어떤 예쁘장한 아가씨가 다가와서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단다. 그러고 보니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먼저 말을 건네준 이 아가씨가 고마운데 게다가 잠시 후 조화 두 송이를 가져다준다. 속에는 장미 대신 초콜릿이 쏙 박혀있다. 오늘이 Lover's Day라고 한다. 상점마다 즐비하던 인형 송이(꽃이 들어갈 자리에 대신 각종 동물 인형이 들어가 있음)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오늘이 바로 우리로 치면 칠월칠석인데 그네들은 이렇게 연인의 날로 즐기고 있었다. 하여튼 술기운에 이 아가씨가 천사처럼 보이는 거다. 이 은혜를 어찌할꼬. 그런데 순간 수년간 입고 다니던 내 바지의 왼쪽 안쪽 허벅지 부분이 10cm 가량 솔기가 뜯어져 나가 허연 살이 훤히 보이는 거다. 엉덩이 부분 짜깁기 수술 두 차례, 오른쪽 바깥 쪽 허벅지 부분 박음질 수술 한 차례, 인도 산 엉터리 박음질 옷도 아닌 값비싼 백화점 바지인데 두 해 여름 내내 이 바지만 입다보니 헤질 대로 헤져있었다. 마침 이 아가씨가 좌판에 옷을 열장 정도 펼쳐놓고 팔고 있다. 한창 직장에 다닐 번듯한 아가씨인데 꾸미지도 않은 가게 한 모퉁이에서 좌판을 벌인 모습이 좀 애처롭다. 과거의 내 백수 시절이 떠오른다. 치마를 한 장 팔아준다. 집에 가서 입지도 않을 옷이 분명하지만.

<8월 12일 금요일>

예류-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이날은 화련에 있어야한다. 명성이 자자한 타이루꺼 협곡을 내 보리라 작정했던 곳이다. 그런데 갈 방법이 없다. 물론 뒷감당 생각 안한다면 방법은 있겠지만 그건 아니고.

“바람 부는 제주에는 ~” 어쩌구 하는 혜은이의 <감수광>노래가 생각나는 곳. 바람이 세다. 몹시 세다. 걸음이 걸어지지 않는다. 정신 차리기 힘든 이 세찬 바람 덕분에 딸아이와 제 아빠 사이가 가까워진다. 평소 겁이 많은 유진이, 제 아빠 곁에 꼭 달라붙어있다. 바람아 더 불어라.

기암괴석이라.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집트의 여왕이라고 붙인 어떤 바위는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우리도 간단히 카메라에 담고 이내 이곳을 떠난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눈을 버린 우리 눈에는 별 감흥이 없다. 항생제에 길들여진 상태에서는 더 강력한 항생제가 필요하듯이.

디화지에- 타이완관광진흥청에서 발행한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곳은 꼭 가봐야 할 곳처럼 소개되어있다.“이곳은 타이완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재래시장이다. 거리 양편에는 타이완 전역에서 올라온 여러 가지 물건들과 약재로 가득하며, 모은 상품을 신선함과 고품질로 승부한다. 이곳은 평소에도 많은 인파로 유명한 곳이지만, 특히 매년 구정 때가 되면 물건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거리에 늘어선 상점들 중에는 100년 이전에 건축된 건물들도 있어 전통재래시장의 풍미를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한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사람이 없다. 오래된 가게들에선 말 그대로 재래시장의 풍미가 느껴지는 데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인가?

두 집 건너 하나라고 해도 될 만큼 수없이 깔린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먹는데 주인 남자가 반갑게 이야기를 걸어준다. 가족끼리 왔다니 무척 반색한다. Welcome이라 던져주는 말 한 마디에 심심했던 마음이 다시 밝아진다. 이방인에게 던져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눈물겨울 때가 있는 법이다. 이곳 스러져가는 분위기의 재래시장에선.

타이페이 아이(Taipei Eye)- “이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무성 영화에 나오는 변사의 말투가 어울리는 곳인 이곳은 중국식 오페라 하우스이다. 인형극, 원주민 민속 공연 등과 함께 경극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여행가면 전통공연 보기를 다이아몬드처럼 생각하는 지라 밥 한 끼 굶는 한이 있어도 볼 것은 꼭 보리라 생각하는 내게 제일 설득하기 힘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다. 입장료가 일인당 880원. 어린이 할인도 없단다. 도합 2,640원(약9만원). 공교롭게도 우리는 이날 <타이페이 아이> 길 건너에 있는 <포츄나호텔>에서 나와 하루 숙박비가 700원인 저렴한 <타이페이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룻밤 편히 잘 수 있는 비용을 탐탁지 않은 경극 관람에 소비를 하게 된 셈이다. 게다가 밤늦게 공연이 끝나 어제까지 머물던 호텔 앞을 지나 전철을 타고 모기가 들 끊는 호스텔로 터벅터벅 가야하니 순간 마누라의 허영심이 밉기도 하겠지만, 다 유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요. 고맙게도 여행 후에 재차 확인해본 결과 유진이가 꼽은 베스트 1위가 경극 관람이었다. 물론 만화 캐릭터 같은 손오공과 저팔계가 한 몫 했지만.

원주민의 민속 공연에 대한 생각 하나. 무대에 올리는 원주민 민속 공연은 쓸쓸하고도 안쓰럽다. 분명 성인 남자가 맡았을 역을 10대의 어린 청년들이 제 딴에는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지만 본래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인 남자들로 이루어진 공연이 박력이 있고 또 제 맛이 나느냐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 분명 연륜이 느껴지고 남성다움이 넘치는 공연이긴 한 데 또 제 맛을 느낄 수 없는 걸 보면 제한된 무대공연이라는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삶의 현장에서 분리되지 않은 제대로 된 원형의 민속춤을 한 번 접해 보고 싶다. 욕심이겠지만.

<8월 13일 토요일>

주펀- 잠시 우리 가족의 취향을 밝혀본다.
내가 뽑은 베스트 여행지 1위-주펀, 2위-스린야시장, 3위-단수이
남편이 뽑은 베스트 여행지 1위-단수이, 2위-주펀, 3위-스린야시장
유진이가 뽑은 베스트 여행지 1위-타이페이 아이, 2위-예류, 3위-까르프

주펀은 한 마디로 참 사랑스러운 곳이다.
원래는 탄광도시로 번성하다가 채광 산업이 시들해지면서 관광도시로 탈바꿈했다한다.

온고이지신이라고나 할까. 옛것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으로 생각되는 이 곳은 멋진 세밀화로 짜여진 한 폭의 시원한 풍경화이다. 골목에 들어찬 상점에선 색색갈의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고풍스러운 찻집은 작은 간판 하나부터 집기까지 눈을 끌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인데 주변 풍경 또한 한 폭의 그림 그 자체다. 우리는 어느 옛 찻집에서 동방미인차를 마시며 해발 588m의 지롱산을 우러르며 그 배경을 이룬 푸른 바다를 마음껏 담아왔다.

이곳은 특히 영화<비정성시>의 배경이 되어서 유명해졌다고 하는 데 꼭 한 번 봐야지.

지엔구어 휴일 옥시장, 꽃시장- 휴일에만 열리는 옥시장, 꽃시장. 이것까지 볼 수 있으니 우리는 운이 좋은 셈이다. 비록 시간이 늦어 꽃시장은 문을 닫았지만. 규모로 승부를 거는 중국인답게 <옥>이라는 주제 하나로 이렇게 큰 시장을 열 수 있다는 게 참 중국인답다.

옥과 관련된 제품이 많기도 하다. 딸아이에게 분홍색 옥팔찌를 하나 사준다. 반투명으로 예쁘긴 한 데 얼마 후 실밥 한 오라기가 풀려 느슨해져 버렸다. 옥에 티라고 해야 하나 뭐라 해야 되나.

중정기념당- 대만이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이곳은 장개석 기념관으로 엄청난 크기의 건물이 압도적이고 인상적이나, 일정 중 맨 나중으로 미루다가 볼 기회를 놓친다 해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곳.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이나 현충사가 과연 외국인에게도 그 의미가 있을까.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고층 아파트 한 동 크기 만 한 교회를 만나는 기분이다. 건물의 크기와 그 큰 건물에 들어갔을 엄청난 비용만을 따져보게 될 뿐 내 상상력은 빈약해질 대로 빈약해져 버린다.

화시제야시장- 타이페이 시내에 있는 많은 야시장 중의 하나. 이미 스린 야시장에 매료당한 지라 감흥이 덜하다. 팥을 재료로 만든 젼주나이차를 마셔본다. 콩을 주 재료로 한 빙수도 먹어본다. 채워지지 않는 빈속을 역시나 세븐일레븐 편의점의 도시락으로 때운다. 세 권이나 들고 다니는 멀쩡한 가이드북은 이런 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이드북에 소개되어있는 식당을 찾아가는 일에 별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8월 14일 일요일>

마지막 날.

오후 5시 10분 비행기인데 마음이 급하다. 시간을 알뜰하게 쓰면 두 어 군데 섭렵할 수도 있는 시간인 데 마음이 무겁다. 그냥 남편이 가자는 대로 따라간다. 내가 시작한 여행이라 여행 중에는 될 수 있는 한 남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준다. 먼저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어쨌든 겸손이 미덕이다. 그래서 간 곳이 민속공예관. 제대로 된 곳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래 오늘은 쇼핑이다. 기념품 좀 사고 이번엔 택시를 타고 “양장점”으로 향한다. 개량 중국옷을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이 택시 기사, 느낌이 좀 이상하다. 미터기를 꺾지 않아 지적을 해주었더니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인상에서 불량기가 느껴진다. 순간 우리 가족 사이에 말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이번엔 지도를 펼치고 갈 방향을 가리켜도 또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긴장감으로 터질 지경이 된다. 어라, 요것 봐라.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미 비싼 수업료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치욕의 이스탄불 택시 기사. 손놀림으로 만 원 짜리를 천 원짜리로 바꿔치기하여 어이없는 바가지를 씌우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파리 몽마르뜨의 엉터리 화가. 중국인도 자기네 동족으로 착각하는 내 얼굴을 영화 속 서양 여인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가 정한 액수를 주지 않는 다고 험악한 인상을 지었었다. 마드리드의 에이즈 캠페인을 가장한 거리의 사기꾼. 서명 란에 쓴 Nationality: South Korea 때문에 나라 욕 먹히지 않기 위해 기부 아닌 기부를 했었다. 그런 남편과 나다. 우리도 지금까지 당할 만큼 당했다. 그런 우리를 몰라보다니. 남편이 단호한 목소리로 택시를 세운다. 순간 기세에 눌린 택시 기사, 기본요금만 받는다. 미터기만 사용했다면 분명 그 이상으로 요금이 나왔을 터인데. 자승자박이다.

허접한 택시 기사 때문에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하여튼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두 양장점으로 갔다. 간판도 확인했으나 셔터가 내려져있다.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이거나 일요일이어서 휴업인가보다. 이래저래 오늘은 무거운 날이다.

3.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나는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를 잘 못한다. 말이 서툴고 두서도 없을 뿐더러 간단한 인사치레조차 힘들어한다. 지금이 또 그렇다. 글을 마치려고 하니 그 착잡하고 무겁던 여행 마지막 날의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런 기분을 가볍게 날려 버리는 방법은 단 하나. 다시 여행을 떠나는 거다. (2005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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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 여행기


(1)여행기간: 2005년 1월 5일-1월 22일(18일간)

(2)여행일정: 뭄바이(2일)-기차(25시간)-벵갈로르(1일)-이동(3시간)-스라바나벨라골라(2일)-이동(2시간30분)-마이소르(2일)-이동(4시간)-우티(1일)-이동(9시간)-코친(3일)-기차(16시간)-고아(2일)-기차(12시간)-뭄바이(한나절)

(3)환율: 1루피=25원



20일도 아닌 18일간의 여행기간이라. 다 이유가 있다.

원래는 한 여행사를 통해서 단체배낭 형식의 여행을 계획했는데 그 상품이 18일간이었던 것이다. 아니 다시, 원래는 출발 인원이 셋이었다. 나, 딸아이(유진), 그리고 큰오빠의 아들인 조카(유석), 이렇게 셋이었다.

유진이는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유석이는 대학 1년 생. 둘 다 책임져야 할 상황이었으므로 계획 초반부터 나는 심히 떨고 있었다고나 해야겠다. 이미 인도는 94년 초(28일간)와 2001년 초(16일간)에 다녀와서 웬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전 여행들이 모두 단체배낭으로 다녀와서 몸에 익숙해져있었고 동행자들이 어리고 그리고 인도는 왠지 배낭여행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몇 번의 배낭여행 경험이 있지만 여행은 떠날 때마다 처음인양 긴장이 되곤 한다. 특히 인도는 더욱 그랬다. 결국 고민과 결단을 거듭한 끝에 여행사를 찾게 되었는데, 주위에 있는 동료 교사들의 호응도 있어서 전체 인원8명이 되었다. 이 인원이면 비인기 여행상품이 구성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여행사에 타진해 보았는데 그 후 우리가 신청한 남인도 상품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되자 신청자가 몰려 22명이 되었다. 9월부터 시작된 작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어 비자 신청 들어가고 출발 날짜(2005.1.5)만을 기다리며 배낭이다 침낭이다 망원렌즈 등을 하나하나 혼수 준비하듯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월 26일 일요일, 지구 대참사라는 남아시아 지진 해일 사건이 일어나 그야말로 지구촌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 여파는 또 다른 지진, 또 다른 해일이 되어 여행 자체를 무산시켜 버렸다. 전염병의 창궐, 여진의 우려 등 언론의 과장보도에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여행자들이 하나 둘 혹은 뭉텅이로 썰물처럼 빠져나가 급기야 우리의 여행상품 자체가 취소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를 탓하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 마당에 여행이라니.(1월 25일 현재 사망자수는 23만 명)

다시 원점이 되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침을 뱉으며 이미 취소 상태가 되어버린 싱가폴 항공의 뭄바이 인, 첸나이 아웃을 다시 개인 발권을 신청하며 뭄바이 인, 뭄바이 아웃으로 부탁했다. (차마 피해 지역인 첸나이는 안되겠다 싶었다. 나 혼자면 몰라도.) 유감스럽고 원망스럽고 무엇보다 불안했지만 처절하고 비장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나왔다.(여행중독증에 걸려본 사람이라면 이해하리.)

그래 셋이다. 어떻게 되겠지 뭐, 하고 있는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정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함께 떠나시겠단다. 그렇다면 충~분해!



1. 뭄바이는 항구다

Nishant. 그는 내가 뭄바이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다. 지난 번 인도여행 때 현지 인솔자였던 그와는 여행 내내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따로 한국인 인솔자가 없었던 관계로 어쩌다 그 역할을 했던 나는 이런저런 일을 맡다보니 여행 인솔을 처음 한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21살의 풋풋함이 몹시 부러웠던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그때 이미 내 나이는 마흔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건 그저 수치상일 뿐 새 친구를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보름간의 일정을 마치고 헤어질 때는 몹시 섭섭하여 3년 후엔 다시 돌아와 남인도를 여행할 테니 그때 만나자고 하자 그땐 자신도 내 여행을 기꺼이 돕겠노라고, 자기 집에서 있으라고도 했다.

3년이 아닌 4년 후가 되었지만 나는 늘 그 약속을 마음속에 품고 남인도 여행을 꿈꾸며 지냈다. 물론 단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루어진 여행은 아닐지언정 그와의 만남은 나의 여행을 좀 더 풍부하고 알차게 해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이메일도 주고받았다. 2002년 월드컵 땐 안정환 선수가 훌륭하다며 우리 축구팀을 응원하는 메일도 보내왔고 이런저런 사소한 사정도 전하며 얼마간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언젠가는 한국에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물가수준은 어떤지 횡설수설 묻기도 하여 나를 당황하게도 했고 얼마 전에는 내가 우리학교의 원어민 교사의 전교조 가입 소식도 전해주는 둥 우리는 그렇게 지난 4년 동안 나름대로 착실히 우정을 다져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와 만나는 것은 그러므로 내게는 최우선의 일정인 셈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번 여행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전해준 현지 소식은 계획을 실행하는 데 결정적인 용기를 주기도 했다. 일정 상 첸나이를 제외하고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메일을 지령삼아 주위의 걱정과 만류를 무릅쓰고 떠나올 수 있었다.

1월 6일 새벽 1시경.

꼴라바 거리에 있는 걸프 호텔에 미리 예약이 되어있던 우리의 방은 호텔 측의 신뢰성 없는 처사로 이미 다른 여행자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였다. 그러고도 그들은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11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훅 불어오던 공기 중의 이상한 향내와 일일이 걸어주던 하얀 꽃목걸이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새삼 가슴이 설레기도 했건만 이런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당장 방을 구해야 했다. 유진이는 이미 내 가슴에 기대어 잠들고 있었고 갑자기 바뀐 기온과 모기떼의 극성은 우리를 더욱 더 피로하게 만들었다.

정말 힘들게 밤인지 새벽인지를 한참 헤맨 끝에 연회장으로 쓰이는 아주 커다란 방을 2개 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인천공항부터 함께 한 <인도소풍>의 빠니님의 역할이 매우 컸다.) 셋이 누워도 남는 운동장만한 침대를 중심으로 양편에는 몇 명이 누워 잘 수 있는 긴 소파가 쭉 늘어서 있으며 한쪽엔 주방 시설에 컵이랑 집기들도 두루 갖추고 있어 이 방이 파티용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방 하나에 1,600루피. 그 후로도 그렇게 비싼 방은 구경도 못해보았지만 하여튼 첫날은 그렇게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아니라 Nishant과의 약속이었다. 걸프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의 어긋남이라든가 필요 이상의 긴장 따위의 여러 정황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여튼 이날 밤 9시 30분에 Nishant과 만났으니까.

푸네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그가 뭄바이에 오려면 3시간이 걸린단다. 3시간은 인도인에게는 아주 가까운 거리를 의미한다지만 작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잖은가. 고맙고 반가웠다. 4년 만에 만난 그는 탈모 증세가 심해 아예 삭발을 했다더니 그 누군가를 닮고 있었다. 바로 간디. 아마도 간디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저랬으리라. 그런데 손님 맞는 우리 방이 너무나 비좁고 초라하다. 그래도 1,150루피나 하는데. 넷이 잘 요량으로 얻은 트리플룸엔 의자 하나 없어서 도저히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이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보낼 수가 없었다. 멋진 해후에 걸맞게 우리 다섯은 근처에 있는 유명한 타지마할 호텔 커피숍으로 갔다.

그런데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은 후 더 이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척이나 어색하다. 분위기가 풀리지 않는다. 무겁기까지 하다. 아,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얼마 후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데 Nishant도 따라서 우리 방으로 들어와 정선생님의 침대에 걸터앉는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방갈로르행 기차를 타야할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는 이미 전철이 끊겨 2시간이 걸리는 그의 친척집에 가기 힘든 상황을 말하고 있다.(나를 만나러 뭄바이 근교의 친척집에 어제 왔었다한다) 그러면서 여분의 방을 얻어줄 수 있는 지를 물어온다. 그게 안되면 대강 한쪽에서 있다가 새벽 5시쯤 가겠다고 한다. 난감하다. 이럴 땐 정말 어쩌나.

유석이와 함께 엘리베이터까지 전송하는 데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초췌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세상을 버린 남자의 모습이 저럴까. Good night!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눌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뭄바이는 항구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떠난다. 기약도 없이.



2. 내가 인도에서 살고 싶은 곳은?

이번 여행지 중 내가 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한 1년 정도.

나는 우띠(Ooty)를 꼽겠다. 타밀나두 북쪽에 위치, 해발 2240m의 산악 도시로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우리가 처음 계획한 일정에는 들어있지 않았는데 마이소르에서 어쩌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하여 숙소 옆에 있는 여행사에 신청했다가 갑작스레 생각이 바뀌어 하루 머물게 된 곳으로 우리가 잘한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바뀐 일정 때문에 코친까지 예약한 버스요금 환불로 인한 손해(75% 환불해줌)와 우띠까지 왕복을 조건으로 한 투어비 250루피(1인당) 중 50루피 밖에 환불이 안 돼 이중으로 손해를 보는 멍청한 짓을 좀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 하루라도 머물길 잘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곳은 어떻게 보면 인도 같지 않은 곳일 수도 있다. 우리가 머문 리플렉션 게스트 하우스를 예로 들어보면, 한마디로 영국 풍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호숫가 언덕 위에 자리 잡아 전망이 뛰어나며 식당 겸 로비로 사용되는 거실의 실내장식은 물론 아기자기 꾸민 정원과 화분들이 영국의 민박집 B&B를 그대로 연상시킨다. 19세기 영국인 존 설리반이 이곳에 매료되어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더니 그 흔적이 고스란히 곳곳에 남아 있나보다. 그는 이곳의 원주민인 토다족에게서 1 에이커당 1루피를 주고 이곳 Nilgiris를 포함한 꼬임바토르 일대를 사들여 지금은 미술대학이 된 건물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짓고 물 공급을 위해 인공호수를 만드는 등 도시 개발을 주도했다한다. 또한 현금 작물인 차 재배를 도입하였다고도 하는 데 거의 이 지역 일대가차 밭으로 뒤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나라의 차밭으로 유명한 보성 차밭의 수십 배 정도라고나 할까.

내가 이곳에 살고 싶은 이유는 영국과 호주의 분위기를 결합시켰다는 이국 취향의 아련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고,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피서지로서도 아니고, 시원하게 자리 잡은 호수와 놀이 공원 혹은 진기한 식물을 볼 수 있는 식물원 혹은 여름 별장의 별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여러 휴양 시설 때문만은 더욱 더 아니다. 바로 겹겹으로 되어 있는 시장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시장을 둘러봤지만 이곳 우띠 만한 시장은 처음인 것 같다. 골목에 골목을 덧 댄 꼴로 크기도 크기지만 산더미 만하게 쌓아놓은 물건들과 어두워져도 줄지 않는 대단한 인파로 인해 이곳이 산악 도시의 시장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싱싱한 사탕수수대의 달콤한 유혹, 현란한 색깔의 갖가지 과일과 싱싱한 채소들. 배가 고팠던지라 주로 먹는 거만 눈에 들어왔지만 이곳은 또한 보석 판매로도 유명하다한다.

이런 시장을 곁에 끼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가까운 시장 하나 없어서 매번 차를 타고 대형 할인 매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곳에 사는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더 중요한 이유. 온 도시(작은 산간 마을이 아님-인구 약 8만 9천명, 2001년 론니 플래닛)가 곳곳에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보니 산책하기 딱 좋은 언덕들로 거미줄처럼 둘러 싸여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한 골목만 답사를 해도 족히 몇 개월은 걸리리라. 매일 신선한 공기 마시며 발이 부르트도록 실컷 걸어보고 싶다. 그러면 건강 걱정은 사라질 텐데. 그리고 지천으로 보이는 차밭들. 이곳 현실은 어떨지 모르지만 일거리는 많을 것 같다. 거지가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거리도 많을 테니 생계는 유지할 수 있겠지.



3. 인도 여행의 시작과 끝-기차 타기

인도는 세 번째라지만 내 손으로 기차예약하고 기차 타기는 처음이라서 여행 내내 제일 힘든 부분이었다. 12시간이상의 장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3-tier 라는 에어컨이 있는 3인용 침대칸을 세 번 이용했다. 예약은 필수인데 한 도시에 도착하면 먼저 다음 행선지 기차 예매부터 해야 된다. 그렇게 서둘러 해도 웨이팅 리스트에 걸리기 일쑤여서 그때그때 상황 파악해서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인도 여행이 끝난다. 내 경우가 그랬다.

처음 일정은 뭄바이에서 고아로 갈 예정이었다. 한 장의 예약표에 탑승자의 이름이랑 나이, 주소, 행선지를 써서 외국인 전용 창구까지는 잘 갔다. 그런데 고아 가는 표는 나흘 후에나 있단다.(책을 보니 고아에 무슨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다. 나흘 동안 뭄바이에 있는 것은 물가와의 싸움인데, 안되지. 방향을 틀어 아래에서 거슬러 올라오자. 그래서 벵갈로르를 2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기차는 생각보다 안전하고 안락했다. 모든 끼니를 기차에서 해결할 수 있고 출출할 때쯤 되면 때맞춰 짜이 장수들이 와 주었고 일정하게 흔들리는 것이 밤에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번엔 코친에서 고아까지다. 유적지가 많은 포트 코친에서 기차역이 있는 에르나쿨람까지는 적지 않은 릭샤 비용이 들어간다. 한 번 해봤다고 이번엔 좀 여유까지 생겼다. 그런데 돌발 상황 발생. 표 하나에 나란히 이름과 나이와 좌석 번호가 올라가야 하는 데 W.L이라며 우리들 이름조차 없다. 대기번호 6,7,8,9 이란다. 이게 뭐여? 이곳은 외국인 전용 창구가 없어서 뒤에는 인도인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담? Enquiry 창구로 가서 물어보면 알겠지. 긴장된 얼굴로 물어보니 뭐라 하는 데 귀에 안 들어온다. 종이에 써 준 걸 보니 Area Manager Office로 가라고 하는 것 같다. 그건 또 뭐시여? 키 큰 유석이가 먼저 발견하고는 옆 건물을 가리켜 들어가 보니 창고 같은 사무실에 어떤 남자가 앉아있다. 이 사람이 그 매니저? 기차표를 내미니 Emergency Quota라고 적힌 종이를 주며 작성하란다. 이 기차를 꼭 타야하는 이유를 적는 난도 있어 간절하게 적어본다. ‘한국에 돌아가려면 이 열차를 타야한다’라고.(아직 돌아갈 때는 아니지만) 그러나 읽지도 않는 걸 보니 요식 사항인가 보다. 이 열차를 탈 수 있느냐고 재차 물어보니 No problem! 이라며 당일 날 출발 전에 와서 다시 문의를 하란다. 아마도 비상으로 남겨둔 좌석인 모양이라고 우리는 서로를 안심시킨다.

마지막 한 번 남았다. 고아(기차역이 여러 개 있다)에서 뭄바이까지로 이번 열차를 놓치면 악명 높은 버스를 타야한다. 그리고 시간을 잘 조정해야지 잘못하면 돌아갈 비행기도 놓칠 수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아 우리 모두 총력을 기울인다. 지난 번 코친에서는 도착한 다음 날 기차표를 예매하는 바람에 애를 먹어서 이번엔 일찌감치 원칙을 지켜보기로 한다. 바로 도착한 즉시 다음 행선지 예매를 하는 것 말이다. 시간을 확인한다. 한쪽 벽면에 열차 시간표를 아예 페인트로 써 놓은 이네들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여기도 외국인을 봐주지 않는 곳이라 걱정이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또 대기번호 W.L 26, 27, 28, 29이다. 표를 끊어주기 전에 이 표를 사겠느냐고 물어온다. 지난번처럼 뭔가 할당제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yes"했더니 우리보고 good chance라고 한다. 대기 번호 26번이 good chance? 뭔 얘기여? 어떻게든 기차를 타게 되었으니 good chance란 말이여? 지난 번 경험을 살려 매니저를 찾아보자. 뭔가 있을 거야. 매니저 오피스를 물으니 이상한 표정들을 짓는다. 그렇다면 역장실로 가보자. 가이드북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찾아갔더니 한 사무실로 데려간다. 다시 이층의 창구로 가란다. Enquiry 창구로 가서 물어보니 내일 오란다. 출발은 모레인데 내일은 또 뭐여? 그런데 돈이 더 필요하다고? 급행요금인가? 때 마침 옆에 한국 여행자가 한마디 정보를 준다. 자기는 다른 역에서 예매했노라고. 역시 동족끼리 돕고 살아야지. 좋은 정보가 되겠다싶어 다음 날 숙소에서 좀 더 가까운 역으로 가서 우리 표를 알아보니 별 방법이 없다한다. 그래 그냥 타봐. 이러는 와중에 대기 번호가 22번부터 시작하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다음 날 비장한 각오로 기차역에 당도하여 Enquiry 창구로 가서 물어보니 좌석번호를 매겨주는 데 한 좌석에 두 사람씩 앉게 되어있다. 이건 또 뭐여? 결국 침대칸이 아니란 얘긴데 나머지는 왜 환불해주지 않는 거야? 일반 좌석표와 침대표는 가격차가 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시 가서 물어보니 뭔가 큰 소리를 친다. 잠시 후 우리가 탈 열차의 예약자와 좌석이 적힌 리스트를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역시 우리는 열외였다. 모든 가능성을 점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야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을 접고 그저 제 시간에 뭄바이에 도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이눔의 인도 기차는 길기가 엄청나다. 말 그대로 “길면 기차”다. 비록 우리처럼 빠르진 않지만. 물어물어 우리가 타야할 칸을 찾아가는 데 워낙 길다보니 도중에 서너 번을 물어보게 된다. 아니 그런데, 우리가 원하던 3-tier A/C class였다. 같은 가격에 누구는 폼 나게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고 우리는 쪽방 신세처럼 한 침대에 둘이 앉아가야 할 판이니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데 옆에서 널찍하게 자리를 잡은 인도 남자들이 자꾸 신경 쓰이게 하고 있다. 에고 처량해라. 앉아서 갈 수 있는 것만도 어디냐 싶었던 조금 전의 비운 마음도 내공이 덜 쌓여서인지 온데간데없다. 심란하게 앉아있는 데 자칭 의사라는 내 나이 또래의 인도남자가 유진이 자리에 와서 껴 앉는다. 보아하니 우리와 같은 대기자 신세인가 본 데 왜 자기 자리 두고 애들 좌석을 넘보고 있는가? 무례하게 굴기도 뭣해 몇 마디 나누었더니 잠시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얼마 후 열차내의 차장이 다가와서 표를 달란다. 분명 표 검사는 마쳤는데 이번엔 또 뭐여? 표에 무엇인가 적어주는 차장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빛난다. 순간 영화배우 브루스 윌리스의 미소를 보았다. 아, 우리의 침대 번호였다. 예약만 하고 승차하지 않는 자리를 재배치하면서 대기 번호에 걸린 사람들을 마법으로 풀어준 것이다. Good chance!



4. 벼르고 별러서 가볼만한 곳은?

우띠가 한 1년 정도 살고 싶은 곳이라면, 인도에 가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은 스라바나벨라골라이다. 벵갈로르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야 한다. 겹겹으로 둘러싼 모양새가 삼겹살을 연상시키는 버스 정류장은 수많은 버스가 드나드는 데 도대체 매표소와 승강장을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길게 생각하기도 전에 제복 입은 사람들이 보이는 한 사무실로 들어가 알아보기로 한다. 말끔하게 제복 입은 사람이 안내해주는 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한참 물어본 끝에 우리가 타야할 버스의 승강장과 시간을 확인해준다. 기차 예약은 이에 비하면 또 아무것도 아니구먼.(이 경찰관아저씨는 나중에 우리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과잉 친절을 베풀어 우리를 애먹이기도 했다. 과유불급이라던가.....)

3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가면서 운전기사와 주위 사람들에게 스라바나벨라골라에 도착하면 알려달라고 부탁해놓기도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이곳이구나 하는 강한 확신이 들 정도로 독특한 모양새를 이룬 돌산이 우뚝 양편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에 진입하다보면 왼쪽에 보이는 큰 산이 주인공이고 오른쪽으로 난 약간 작은 산이 조연쯤으로 보이는데 각기 돌계단이 있고 그곳으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첫 인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이후에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선 물가가 저렴하다. 우리 식 백반이라 할 수 있는 meals(탈리를 일컫는 남인도식 명칭)가 20루피 정도로 어른 셋이서 이것저것 시켜서 배불리 한 끼를 먹어도 100루피 내외고 숙박비도 다람살라 순례자 숙소에서 머물렀는데 더불룸이 하루에 160루피다.(뭄바이의 1600루피 방을 떠올리시라) 우리는 이곳에서 이틀을 묵었다.

물가와 사람들의 순박함은 비례하는 것일까?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환한 미소로 웃어주거나 가벼운 인사말을 건넨다. 마치 이웃 동네에서 놀러온 사람을 대하는 듯하여 인정이 참 따뜻하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무관심도 부러움도 탐색의 눈길도 아니다. 그냥 평온하고 순박하고 편안하다. 골동품 가게의 아저씨와 인도의 옛 동전을 파는 아저씨와도 악착스레 흥정하지 않아도 된다.(물론 내 경우일 수도 있다. 유석이는 바가지를 썼으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이곳은 자이나교의 성지 중의 성지로 아주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자이나교하면 무저항, 비폭력의 간디가 떠오른다. 그의 종교가 자이나교였기에 자연스럽게 그 가르침이 몸에 배었으리라. 공기 중의 날벌레가 입 속으로 들어가 죽을까 두려워 마스크를 한다거나,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를 밟아 죽일까 두려워 빗자루로 길을 쓸며 다닌다는 그들의 생명존중 사상과 고행을 중히 여기는 사상이 자이나교의 핵심을 이룬다고 하는 데, 그래서일까? 이곳 사람들이 평온한 것은?

산을 깎아 만든 500여 개의 돌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 정상에 이르면 17m의 거대한 나신상이 떡 버티고 서 있는데, 하나의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라 한다. 고마테슈바라라고 이름 붙여진 이 거대한 석상은 자이나교의 성인이라는 데 한 때 자이나교의 세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지금도 12년마다 이 나신상을 우유, 요구르트, 기름, 사프론, 백단향 등으로 목욕을 시키는 축제를 열고 있다한다. (올해 그 행사가 열린다고 하는 데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보다.) 밤에는 이 계단을 따라 드문드문 가로등이 정상까지 이어지는 데 또 다른 묘한 감동을 준다.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이랄까. 문득 오르고 싶어진다. 그에 비해 조연급의 맞은 편 돌산에 있는 옛 사원들은 쇠락하여 과거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을 뿐 살아있는 성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저 조용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 곳이다.

하여튼 그 이름도 외우는 데 2박 3일이나 걸린 이곳 스라바나벨라골라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만큼이나 거대한 감동과 인상을 남기는 곳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10살짜리, 21살짜리, 그리고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머지 두 사람. 이 모두를 만장일치로 대 만족시키는 곳이었다. 벼르고 골라 골라서 한 번 가 볼만한 곳이다. 강추!



5.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스라바나벨라골라의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었다. 40~50명쯤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저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체로 온 학생들이었는데 우리와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 광경에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팬들에 둘러싸인 인기 연예인의 기분이 이럴까? 간절한 눈빛 세례를 받으며 서로의 카메라로 돌아가며 몇 장 찍고 나자 인솔교사로 보이는 한 남자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인도에선 늘 그렇듯 어디서 왔느냐, 이곳에 며칠이나 있을 예정이냐 등을 묻다가 갑자기 한국과 인도의 환율을 물어온다. 무엇이 궁금한 것일까? 깊은 우물 같은 큰 눈망울의 10대 학생들 틈에서 이 기습적인 질문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예전 같으면 나이가 몇이냐, 직업은 무엇이냐 등을 물어왔을 텐데. 이 질문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이와 똑같은 질문을 두 번 더 받게 되는데, 한 번은 Goa 로 가는 밤 열차의 50대 여인한테서, 또 한 번은 뭄바이로 돌아가는 밤 열차의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내 또래의 의사한테서였다. 월급이 우리 돈으로 50만원이라는 이 내과의사는 진료비부터 수술비, 승용차 구입비, 한 끼 식사비까지 질문 내용이 무척이나 구체적이었다.

내 얼굴에서 돈 냄새가 나는 걸까? 아니면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고 우리의 경제력이 궁금해진 것일까? 나도 한때는 어린 자녀와 함께 여행하는 외국인들을 보고 그 여유가 부러웠었다.

환율에 대한 의문. 이것은 그들의 경제가 빠르게 변하고 있고 경제력도 좋아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러고 보니 그 흔하고 흔하던 사이클 릭샤 한 대 보이지 않는다. 비쩍 마른 노인이 이끄는 릭샤를 도저히 가만히 타고 갈 수 없어 서로 바꿔 탔다는 어느 여행자의 여행담을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나보다. 등 뒤의 손님에게 걸핏하면 쇼핑안내를 하겠다하여 끝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 잠시 숨죽이고 있다 얼마 안가 다시 쇼핑 얘기를 꺼내던 그 끈덕진 사이클 릭샤를 이젠 볼 수 없다보다. 온통 오토릭샤 뿐이다. 이들은 예전처럼 쇼핑을 강요하지도 행선지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서도 무조건 손님부터 태우던 그 전의 사이클 릭샤 하고도 다르다. 이는 남인도의 경제력이 델리를 중심으로 한 북인도와 다르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이번 여행은 북인도를 가지 않으니 확인해 볼 수 없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

뭄바이 센트럴역에 열차가 도착한 것은 새벽 6시.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약 20여 시간이 남았다. 마지막 하루를 아라비아해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석양이 장관인 아라비아해. 그러나 우리를 위해 해가 서쪽에서 떠오를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사람 물결. 인도의 배 나온 아저씨들이 모두 나왔다. 사리를 곱게 입은 아가씨들도 어딘 가로 바삐 가고 있었다. 뿐 만이랴. 마치 개가 주인이고 사람이 하인인 것처럼 보이는 볼품없는 아저씨, 반바지 차림의 날씬한 청년, 퉁퉁한 중년 부부. 모두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중에는 양복 차림의 말끔한 신사도 있었다. 무언가 명함 같은 것을 나누어준다. 다 이어트 광고였다. 우리에게도 친절하게 한 장 건넨다. 먹을 것 먹고 운동하지 않고 쉽게 살 빼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데 한 번 관심을 보여 봐?

오차에서였던가? (4년 전) 조용한 시골 마을에 인파의 물결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지류가 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지류를 이루며 일제히 큰 강으로 합류하는 인파의 물결은 대단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무슨 축제여서 강으로 목욕하러 가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의 신앙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현재의 뭄바이. 살아가는 모습이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 똑같아 괜히 심심해진다.



6. 나는 때로 가수 이문세가 그립다.

이문세의 노래를 들으면 나는 인도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은 11년 전의 첫 번째 인도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여행 내내 한 대의 버스로 이동하였는데 길게는 30시간을 달리는 경우도 이따금 있어 이 때는 추위와 배고픔, 외로움이 짙어지면서 왠지 처량해지곤 했다. 이럴 때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적당히 우울해지고 적당히 감상에 젖고 적당히 위안이 되고 적당히 심신이 편안해지곤 했다. 평소에는 그 전이나 그 후에도 그때만큼 그의 노래를 듣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이따금씩 그의 노래를 듣게 되면 순간 인도가 떠오르고 인도가 몹시 그리워진다. 하여튼 그 때는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광화문 연가>등이 들어있는 2집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 버리고 말았었다.

그러면 지금은?

나는 여행할 때 이제 더 이상 휴대용 카세트나 MP3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결혼을 하면서부터다. 남편이나 딸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고 귀를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족은 나를 외롭게 두지 않는다. 나의 고독을 원치 않는다.

혼자만의 외로운 여행을 원하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문세의 노래가 주는 아련한 우울함과 감상 등이 여행이 주는 선물 중의 하나임을 알기 때문에 때로 그것이 그리울 뿐이다.



7. 이런 곳도 갔었다.

<마이소르> 릭샤를 한 대 대절하여 몇 군데를 허위허위 다녔는데 그중 국립 호수 공원은 너무나 깨끗하여 마치 뉴질랜드의 어느 공원을 연상시켰다. 보트도 있었다. 사람이 노를 젓는 보트보다 페달보트 대여비가 더 비쌌다. 아니 사람이 기계보다 못해? 그런데 오리보트가 아니네. 백조 모양일세. 자, 승선. 근데 페달이 너무 멀다. 거의 눕다시피 해야 겨우 발끝이 닿는다. 그래도 열심히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태양은 뜨겁고 온 몸에 땀이 나는 데 경치하나 끝내준다. 호수 가운데 서있는 나무 위에서 멋진 새들이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고 물 위에서도 퍼드득 퍼드득, 그림 같은 광경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이다. 그때 관리소 직원들이 소리치며 우리를 부른다. 빨리 나오라고 재촉한다. 벌써 시간이 되었나? 시간 명시가 되어 있었던가? 기다리쇼. 우리도 힘들어 더 이상 페달을 밟을 기운도 없소. 보트에서 채 내리기도 전에 100루피의 벌금을 내란다.(대여비가 100루피였음) 호수 중앙으로 갈 수 없는 규정을 우리가 어겼다나. 우리도 그 규정 지키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러느냐고 따졌더니 계속 벌금 얘기만 한다. 그것도 서 너 명이. 땀과 더위로 얼굴이 벌개진 우리도 질세라 벌개진 얼굴을 더 붉힌다. 여기서 지면 안되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직원들, 갑자기 그냥 가란다. 진작 그럴 것이지.

<코친> 수로유람을 신청해 놓고 덜컹 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해일 피해 지역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 데. 나도 정신이 나갔나보다. 밤에는 해변에서 생선까지 구워 먹다가 모기에도 엄청 물렸다. 나야 괜찮은 데 어린 유진이와 유석이가 걱정이다. 말라리아. 콜레라. 전염병의 창궐. 어쩐다. 에이, 운명에 맡기노라.

다음 날 아침. 이번 여행 중엔 아침을 끓인 누룽지로 해결했는데 오늘 따라 그럴 기분이 아니다. 어제 사 놓았던 빵과 커피로 때우자. 유진이는 대신 콜라를 마신다. 평소 먹이지 않는 음료수라서 그런지 아침에도 콜라를 맛있게 마신다. 그래, 아무 거라도 잘 먹어야지.

보트를 타는 곳까지 승용차로 1시간을 달린다. 인도에서 타 본 차 중 제일 좋은 차다. 앞좌석에 앉은 서양 남녀 5명이 저희들끼리만 통성명을 주고받는 게 얄밉다고 생각하는 순간 유진이의 입에서 시커먼 물이 마구 나온다. 아침에 먹은 콜라와 빵이다. 어쩐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애는 안 간다 하고. 그래도 가야지. 모진 에미가 될 수 밖에 .

온통 야자수만 보인다. 깨끗하고 조용하다. 바람도 없다. 해일 우려는커녕 심심하기 이를 데 없다. 저만치서 염소가 울어대니 유진이가 맞받아 염소 우는 소리를 낸다. 녀석들이 또 운다. 유진이가 또 흉내를 낸다. 염소보다 더 염소 우는 소리를 잘 내는 유진이를 보고 보트에 탄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유석이는 옆에서 조는 척 자고 있다. 바나나 잎에 얹어주는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시 유람을 시작하는 데 역시 심심하다. 밤 새 뜬눈으로 새웠더니 솔솔 졸음이 온다. 무료하다. 언제 끝나나. 돌아오니 오후 4시 30분. 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지나간 것 같은 데 몸은 피곤하다. 너무 긴장한 탓 일게다.

<고아>안주나 비치엘 갔다. 서양인 천지다. 벼룩시장도 장사꾼과 서양인 천지다. 좁은 시골길에 오토바이 천지다. 걷기에 더 좋은 길인데 아쉽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어떤 서양 남자,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데 길을 비키지 않는다고 뒤돌아보며 인상 쓰며 소리 지른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고아가 아니다. 여기 오려고 얼마나 빙 돌아서 왔는데, 속은 기분이다.

코친처럼 이곳에서도 교회(성당)를 실컷 본다. 인도에 가서 교회만 실컷 보고 왔다면 사람들이 믿을라나.



8. 진짜 궁금해 할 내용-여행 경비

(1)항공료 97만원× 2명=194만원
아동(75%) 74만원
------------------------------
268만원

(2)비자비용 65,000 × 3 = 195,000원
(2)보험료 22,430 × 3 = 67,290원
(3)현지 경비 33,390 Rs × 25원 = 834,750원

✈ 기차요금이 액수가 큰 데 비해 일반 대중버스요금은 아주 저렴함.
✈ 옷도 한 벌씩 사 입었음(1,194루피). 골동품 구입(약700루피).
은반지(3개 660루피). 기타 기념품 약간(약 1,000루피)
✈ 600루피가 넘은 경우(숙박비 제외): 코친에서의 수로유람(1,000루피)
타지마할호텔에서의 음료수, 피자(도미노피자, 피자헛)
✈<피자헛>에서는 international과 Indian 피자 등 메뉴가 다양한 데
Indian 식 피자에 고춧가루 뿌려먹는 맛이 일품이었음.
✈ 인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탈리(meals)를 20루피 내외로 먹을 수 있음-양도 엄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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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간: 2003. 1. 8 ∼ 1. 20

여행은 갈증이다. 채워질 듯 말 듯, 그러나 결코 채워지지 않는 청량음료 같은 갈증이다. 톡 쏘는 맛은 늘 새롭고,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 코끝까지 전해지는 전율에 한순간 몸서리를 치게 하고, 그 전율에 못 이겨 질끈 감는 눈. 그러나 눈을 뜨면 어느 새 목이 타오른다. 갈증은 청량음료로는 해갈되지 않는 것이다.

또 떠난다. 갈등이 없을 소냐. 왜 떠나는가, 화두처럼 붙들고 늘어진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결론은 이미 내린 상태다. 가보고 싶으니까. 단순하다. 배고프니까 밥 먹는다, 와 다름이 없다. 단순해지지 않고는, 가벼워지지 않고는 떠날 수 없는 게 여행이란 걸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단순하다고, 가볍다고?

세 식구가 함께 하는 여행은 이미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단순하고 가볍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나에게 거는 일종의 주문이다. 단순함을 가장한 무거움. 그 무게를 덜기 위한 교묘한 마음 속임이다. 떠나는 것도 공을 들여야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의 공을 들여야 한 번 떠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내게는.
그렇다면 물질적인 노력은?

<방콕>
이번엔 말로만 듣던 방콕엘 간다. 내 여행엔 도무지 두서가 없는 것 같다. 쉽게들 드나드는 방콕은 여행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도록 한번도 갈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교육 탓이다. 나에게 방콕보다 런던이나 로마 혹은 파리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순전히 교육 탓이다. 고등학교 한 시절을 화실에서 보낸 것, 대학에서의 몇 계절을 무수한 영미 작가에게 바친 것, 그리고 직업으로서 아이들에게 영어 몇 마디 건네는 것, 이 모두가 나를 동양보다는 서양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방콕에서의 일정은 이틀이 채 되지 않는다. 밤에 도착, 다음다음 날 새벽 앙코르를 향해 출발이니 주어진 시간은 만 하루. 하루종일 유명 유적지만 본다?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얘기라도 하려면 그래, 한군데 정도는 가 줘야지. 왕궁엘 가본다. 초입에서부터 우루루 단체 관광객들 입장이다. 단체 사진 찍는 그들을 배경으로 한 장 찍는다. 아예 가이드북을 들고 태국이라고 쓰여진 부분을 찍히게 한다. 이번엔 서양 여행객 몇을 전경에 놓고 찍는다. "태국 벌은 참 작네!" 놀라는 남편 말에 자극을 받아 화분 속 연꽃 언저리에서 윙윙대는 작은 벌 두 마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표준렌즈 밖에 없는 내 카메라로는 찍어봐야 잘 찍히지도 않을텐데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며 찍고 싶은 곳도 특별히 없다.

그런 내 기억 속에 더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화려한 그 왕궁이 아니라 왕궁으로 가는 길에 겪은 작은 해프닝이다. 상상외로 깨끗한 전철에서 내려 배를 타러 갈 때였다. 갑자기 딸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한다. 딸아이의 배변은 늘 갑작스러워서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은 변기에 앉혀야 한다. 하여튼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 거리길 10여분, 시간은 흐르고 영어는 통하지 않고, 화장실이 있을 법한 곳을 가보면 역시 아니다.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사원 같은 건물이 있었다. 개인 법당쯤으로 보이는 데 노인 한 분이 마당에 앉아있어 화장실을 묻는데 안쪽에 대고 사람을 부른다. 밝은 미소를 띄며 또 한 노인이 나와서는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얼른 한국인이라 대답하고 화장실을 묻는 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남편이 오줌 누는 몸짓을 보여주자 뒤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와중에 노인이 화장실이란 단어를 태국어로 가르쳐준다. 고마운 마음에 약간의 돈을 시주함에 넣고 나온다. 지금도 그 법당의 노인의 미소를 떠올리면 마음이 밝아지곤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화려한 왕궁보다 이름 모를 사원의 노인의 미소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카오산 거리에 드디어 입성. 얼마나 많이 듣던 거리이름인가. 방콕하면 떠올리게되는 여행자 거리. 내가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이런 거리였는데......

노천 카페, 기념품 가게, 게스트 하우스, 티셔츠 가게, 신발 가게,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쏘다니는 거리. 그런데 너무나 낯이 익다. 기지촌을 고향으로 둔 내게 이런 거리는 아늑한 고향으로 다가온다. 카페에 앉아 점심과 함께 맥주를 마신다. 맥주에 쉽게 취하는 나는 기분 좋은 취기를 느낀다. 아, 이대로 여기서 맥주만 마셔도 방콕 접수는 일단 성공이다.
백화점 쇼핑은 내게 피할 수 없는 여행지의 명소 탐방. 이름도 멋진 ZEN 백화점에서 가벼운 기념품을 두 어 개 산 후 밖으로 나오니 달리 가보고 싶은 곳이 없다.
백화점 앞 광장에는 테이블로 가득하다. 맥주 로고가 크게 있는 것으로 보아 노천 호프점인가 보다. 맥주보다는 새끼돼지 바베큐가 군침을 당긴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무대에서 밴드가 시작되고 하반신을 오묘하게 흔드는 여자 가수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방콕의 유쾌한 밤 풍경 속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 가수를 오래 기억하리라.
방콕에서의 하루가 아쉽듯이 여기서 끝나는 방콕 이야기가 서운해 하나 더.
유럽 배낭 여행이었다면 쓸 수 없는 이야기, 바로 먹는 얘기다. 가격이 저렴해서 잘 먹을 수 있다는 것말고, 열대 과일을 골라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24시 편의점에서 종류별로 조금씩 사본다. 대여섯 가지를 조금씩 맛볼 만큼만 사니 값도 얼마 되지 않는다. 호텔에 돌아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한 가지 한 가지 정복해 나간다. 우와, 기가 막힌 맛이다. 무척 달콤하다. 방콕에서의 하루가 더불어 달콤해진다.


<앙코르>

세계적인 유적지인 앙코르가 있는 씨엠립. 누군가는 그랬다. 앙코르 여행의 백미는 육로 이동에 있다고. 험하디 험한 비포장 도로를 먼지를 날리며, 혹은 웅덩이에 빠져가며 몇 시간씩 이동하는 데 나중에는 엉덩이가 짓무를 정도라고. 그래 기대가 컸다. 94년 초 인도 여행 때의 육로 이동의 매력이 그리웠던 터라 내심 엉덩이가 짓무를 각오를 하고 무너진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스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런 탈 없이 예정시간 보다 일찍 도착하는 게 아닌가. 바람맞은 기분이 이럴까.
글로벌 게스트 하우스. 정문이 바로 마주 보이는 2층 한가운데의 방이 우리 방이다. 준비해간 전기 코펠에 누룽지를 끓여 저녁을 해결한다. 지난 가을, 하루에 한 번 레귤러 피자 만한 누룽지를 만드시느라 친정 어머니는 땀 깨나 흘리셨을 것이다. 철없는 딸 내외와 외손녀의 여행을 위해서.
할 일 없이 발코니에 앉아 있자니 깜깜한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일제히 하늘로 올라간다. 하, 이곳은 별들이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는구나. 처음 맛본 열대과일 마냥 신기해했더니 이곳 특유의 불꽃놀이란다. 아마도 어느 사원에서 열리는 기도의식이리라. 앞으로 3일 동안 보게 될 앙코르가 서서히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앙코르 제 2 일.

숙소에서 나오는 바게뜨와 커피, 바나나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간단한 준비를 하고 간밤에 예약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캄보디아 남자가 자신을 우리 운전기사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이미 예약했다고 하니 잠시 주춤거린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우리 기사가 맞는다하기에 멋쩍게 인사를 나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주는 청년이다. 그 인상대로 그는 아주 성실하게 3일 동안 우리를 최고의 손님인양 최대의 예의와 성의로써 우리의 길동무 겸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어딘가 우수 어린 듯한 검은 눈빛은 언제나 우리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순하디 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사를 포함한 렌터카 비용이 하루에 20불. 2만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온갖 호사를 부리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무겁다.

오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저녁도 먹을 겸 올드 마켓에 간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지 동네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다. 캄보디아에서 치안이 가장 잘 보장된 곳이라고 하니 별 일이야 없겠지. 가이드북에서 본 식당을 찾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길 수 차례, 드디어 가긴 갔는데 책에 소개되어 있는 곳 치고는 좀 그렇다. 아니어도 할 수 없다. 배고 너무 고파 가릴 처지도 못되었으니까. 출입문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광고 전단 마냥 매달아 놓은 맥주병들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다. 주문한 샌드위치와 볶음밥 1인분이 먼저 나와 딸아이와 남편 앞으로 돌려놓는다. 나머지 1일분이 영 나오지 않는다. 먹어보란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조용히 먹고 있는 남편이 순간 미워진다. 빈말이라도 좀 해주면 안되나. 딸아이가 먹지 않고 접시 한 쪽으로 골라놓은 샌드위치의 야채를 주어먹고 있자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참지 못해 한마디 던지니 남편이 먹다말고 밥을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배고픔에 한 숟가락씩 세면서 먹자니-남편 몫이니까- 이번에는 식당 종업원에게 자꾸 눈이 간다. 아니 우리보다 늦게 온 옆 테이블엔 벌써 음식이 나오고 있잖아. 다시 재촉을 해서야 겨우 밥을 더 먹을 수 있었는데, 이 일 이후로 나는 남편에게 무서운 여자로 다시 한번 각인시키게 되었다.

숙소로 돌아올 때는 재미 삼아 시클로를 탔다. 1달러 부르는 것을 겨우 3000리엘(1달러=4000리엘)로 흥정을 하고 숙소 근처에서 내려 차비를 주려고 하니 돈이 모자란다. 1달러 짜리 주어도 되는데 거스름돈 몇 푼(300원) 아끼겠다고 순간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지갑 한쪽에 남아있던 태국 지폐 100바트(1바트=30원) 짜리 두 장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 다시 태국에 가랴. 어차피 쓰지 못할 남의 나라 돈. 주저 없이 두 장 모두 꺼내 시클로 기사에게 건네며 태국 돈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아니 겨우 600원인데 뭘 그리 좋아하나 하며 우리도(남편, 나) 껄껄 웃으며 돌아왔고, 여기에서 생각이 멈추었으면 그것으로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이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돈을 잘못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600원이 아니라 6000원 이었던 것이다. 6000 - 900 = 5100원을 팁으로 주게 된 것이다. 좋은 일 했다고 돌려 생각한다. 한 가정의 가장일 그가 오늘은 기분에 고기라도 한 근 사 가지고 가면 그래 그것으로 족하지. 나도 이런 횡재를 바라노라!

앙코르 제 3 일.

새벽 5시에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단잠에 빠진 딸아이를 깨운다. 안쓰러운 생각에 "대체 여행이 뭐기에" 잠시 자책에 빠지는 순간 우리의 착실한 기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차 문을 열어준다. 깔끔한 어제와는 달리 낡은 티셔츠 차림으로 보아 정문 옆에 있는 간이 숙소에서 이곳 종업원들 틈에서 잠을 잔 모양이다. 집은 어디일까.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로 보아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 있는가 보다. 새벽 추위를 피해 딸아이와 나는 택시 안에서 잠시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각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왜 일출과 일몰 장면을 좋아하는 걸까.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안개 속을 오토릭샤로 달리던 일, 네팔 포카라의 히말라야 일출을 보기 위해 보이지도 않는 새벽길을 앞다투어 걷던 일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장엄한 앙코르와트사원 위로 솟는 태양은 결코 장엄하지도 화려하지도 설레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히말라야의 일출은 장엄하고, 바라나시의 일출은 나름대로 새벽 질주의 수고로움에 답하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는데 말이다. 차라리 내가 살고 있는 소래 포구의 해뜨는 광경보다 못하다. 야트막한 산세에 이리저리 가려 시원한 지평선은 아닐지라도 소래 포구의 일출은 주위에 있는 산, 들판, 포구, 도로를 모두 감싸안으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하게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앙코르와트 때문일까. 태양의 화려함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는 것일까.

저녁에 압살라 공연을 보러간다. Koulen Ⅱ 레스토랑이라는 곳인데 엄청 사람이 많다. 앞 뒤 옆이 거의 한국사람들이다. 공연은? 소박하다고 할까, 상품화가 덜 되었다고 할까. 네팔에서 본 민속춤도 그렇듯 대부분이 갑돌이, 갑순이 내용이다. 압살라춤은 앙코르 사원에 조각된 압살라의 여러 동작을 재현한 것이라는 데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인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무래도 인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다. 또 대책 없이 인도가 그리워진다. 재미있는 것은 압살라 춤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무희와 기타 다른 무희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인데 복장의 화려함말고 몸의 특정 부분의 과장이 심하다는 점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슴과 엉덩이를 최대한 앞뒤로 빼는 데 내가 직접 해보니 전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갑돌이, 갑순이가 더 정감이 가고 흥겹다.


앙코르 제4일

마지막 날이니 뭐 특별한 일을 저질러야하는데.
내리 사흘이나 앙코르 유적을 보려니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한다. 많이 보고 생각도 많이 키워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좀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질질 끌며 숙제를 못 마친 기분이라고나 할까. 왜 이렇게 볼 게 많은지.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경영한다는 <평양랭면>으로 점심 먹으러 가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들뜬다. 함께 온 일행에게서 들은 것도 있겠다, 기대감과 호기심을 채우러 간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북한 아가씨의 서빙을 받으며, 직접 북한에서 공수해와서 만든 냉면을 먹는 맛은 내가 그동안 먹어 본 것 중 으뜸이다. 부모님의 고향인 개풍과 해주를 말하니 고개를 갸우뚱, 바뀐 지명 탓이겠지만 왠지 서운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마음은 설레는 데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어색하고 쑥스럽다. "바늘로 콕 찌르면 하얀 우유가 나오겠습니다." 피부가 하얀 딸아이를 보고 던지는 말이다. 그들 특유의 억양과 예기치 못한 표현에 반쯤 넋이 나갈 정도가 된다. 하하하.

삼일 동안 함께 한 택시 기사에게 북한과의 관계를 대강 설명해주며 냉면을 대접한다. 냉면 한 그릇에 담긴 우리의 흥분과 남북한의 뜨거운 동포애를 그가 알까마는 말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그가 애처로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차라리 악착같은 그래서 은근히 수고료를 바라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애처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물 같은 깊은 눈망울에서 대접받는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그간의 경비를 계산하며 이름과 주소를 묻는다. 어색하게 적어주는 그의 이름은 Mr. No. 이제야 이름을 물어 보다니, 우리도 참 무심한 사람들이구나.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늘 그를 찾으면 옆에 있어주었으니까. 주소는 쓰지 못한다. 어쩌면 주소가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를 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보내주고 싶었는데. 약간의 수고료를 주며 좋은 아내 얻고 부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해준다. 그간 정이 들었나보다. 그를 보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오늘따라 우리 방 앞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이 텅 비어 있다.


<앙코르와 영화>

여행 전에 이곳에 관한 영화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앙코르를 짚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한달 남짓 되는 기간 동안 세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비로소 앙코르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세 편의 영화에선 공통적으로 앙코르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그런 만큼 화면에 비치는 앙코르는 대단히 짤막하고 압축적이어서 앙코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에선 거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쯤에 앙코르가 나오고 자야바르만 7세의 두상도 빠르게 지나간다. 앙코르의 모습도 정글 속에 묻힌 상태여서 복원되기 전의 앙코르가 저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울창하다 못해 공포감마저 어린 앙코르를 배경으로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과 광기? 전쟁과 공포? 무의미한 전쟁?

「툼 레이더(Tomb Raider)」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답게 우선 재미있다. 마치 끈끈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 이곳 저곳 사원을 감싸고 있는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따 프롬>에서 촬영한 부분은 매우 적절하고도 감동적이다. 그곳은 확실히 지상보다는 지하의 세계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홍콩 영화「화양연화」가 있다. 주인공들은 각기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남편과 아내를 두고 있다. 그들 역시 서로를 위로하며 가까운 사이가 되어간다. 그들에겐 '바람 피운다'는 속된 표현 이상의 진지함과 긴장감이 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놓고 떠나는 이별 연습은 애처로움마저 짙게 배어있어 가슴 아리게 한다. 재회의 가능성은 우연을 허락하지 않고 세월은 어느 덧 3년이 흘러 서로를 그리워만 할 뿐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다. 왜 남자 주인공은 앙코르로 갔을까. 폐허 같은 사원에서 그는 벽돌 틈으로 무엇인가를 찾는 듯 깊이 들여다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이 된다. 실망도 절망도 아닌 체념 같은 것. 과거는 돌아올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것. 돌 벽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야생화 혹은 야생초 같은 것. 그리움과 슬픔 속에서 한 송이 꽃을 피워낸다. 외롭게. 조용하게.

이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채워나가야 할 분야이다. 할리우드가 90년대의 티베트에서 이곳 캄보디아로 관심을 바꾸고 있다 하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질 지는 모를 일이다. 앙코르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무궁무진할 터이니 말이다.


<프놈펜>

새벽 6시. 프놈펜을 향해 출발. 며칠 동안 먹은 바게뜨와 맛없는 커피도 언젠가는 문득 그리워지겠구먼. 똑 똑 흐르던 화장실 수도꼭지와 내 손만 대었다하면 하루 한차례씩 고장났던 세면대와 열심히 고쳐댔던 솜씨 좋은 남편, 모처럼 맡긴 세탁에 속옷이 벌겋게 물들어 황당했던 일, 숙소 종업원들이 여가에 즐기는 그네들식 제기차기를 일없이 멍청이 바라보던 일, 종업원들에게 군림하는 한국인 주인과 야무진 그의 부인(태국인 인지, 캄보디아인 인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했던 기대를 무참히도 무너뜨린 된장찌개. 그래도 이곳 글로벌 게스트 하우스를 떠나려니 서운하고 아쉽다.

버스를 타고 얼마나 갔을까. 적당히 흔들리는 비포장도로가 편안해질 무렵 동이 터 오르는 모습이 자못 감동적으로 다가오지만 카메라는 꺼내지 않는다. 누군가 그런다. 연하장에 나오는 그림 같다고. 렌즈 쓸만한 것 하나 장만하지 못해 매 번 벼르기만 하더니. 렌즈 보다 여행비 마련에 늘 급급했으니 어쩔 수 없지. 모두 기억 속에 담아가야지.

배로 갈아탄다. 갑판 위의 벤치에 겨우 자리를 잡고 좋아했더니 아래층 통로 간이의자에 앉아 가는 것만도 못하게 될 줄이야. 서 너 시간 내내 세찬 바람을 막느라 겨울옷과 담요를 모두 꺼내 입고 뒤집어써야했으니. 그래도 우리가 떠있는 똔레삽 호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이국적이어서 그 추위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우기 때를 대비해 긴 막대기들 위에 지은 원두막 같은 집들,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과부도에서 보던 그 수상가옥이다. 우리야 한갓 관광객일 수밖에 없음을 그네들의 보금자리를 스치듯 지나면서 깨닫는다. 우리에게야 한 폭의 낭만적인 풍경화지만 저네들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할까. 그래도 여전히 이국적으로 다가오는 호숫가 집들을 몇 장 카메라에 담으며 어린 시절 동네를 찾은 한 미군병사의 카메라를 떠올린다. 우리의 과거 모습도 그들에겐 이국적이었을까?

드디어 프놈펜. 육로 이동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구먼.
걸리버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점심을 먹는다. 김밥이다. 모처럼 맛있게 먹는 딸아이를 보니 흐뭇하다. 몇 군데 볼만한 곳을 찾아보지만 못 찾아도 그만, 하는 심정으로 시내를 서성거린다. 인솔자의 사전 주의도 있어 될 수 있는 한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밤에 으슥한 곳을 다닌다거나 마약을 팔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란다. 치안이 아직 불안하다고는 하지만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저녁을 먹기 위해 유명하다는 식당엘 간다. 낮에 시클로를 타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찾게 된 곳이다. 역시 눈이 보물이라니까. 전망이 좋은 2층은 손님들로 혼잡하고 몹시 시끄럽다. 주로 외국인이다.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네. 사진첩으로 된 메뉴는 영어로도 씌어 있어 보기는 쉬운 데 종류가 100여 종이 넘는다. 코끼리 고기, 비둘기 요리도 있다. 야, 굉장하다. 맛이 어떨까, 궁금해진다. 주문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일단 주문이 끝나면 종업원들이 많아 신속하게 식탁이 차려진다. 음식은, 흠잡을 데가 없다. 캄보디아에서 먹은 음식 중 제일이다. 가격도 적당하다. 맛있는 음식 덕분에 프놈펜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다음 날.
인솔자의 주선으로 버스를 한 대 빌렸다. 일인당 2달러. 다름 아닌 킬링필드의 현장을 답사하러 가는 것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는 역사의 현장. 희생자의 두개골을 모아 탑을 쌓고 수십 명이 죽임을 당한 구덩이들을 보존하고 있다. 당시 감옥과 고문실로 쓰였던 박물관도 갔다. 이젠 아우성도 분노도 절규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저 마음 속으로 조용히 묵념을 올린다.

뭐라 해도, 누가 뭐래도 구경 중의 구경은 역시 시장이다. 프놈펜에선 어느 곳보다도 중앙시장이 우리 가족의 주무대였다. 유진이의 1달러 짜리 선글라스, 남편과 나의 새 신발(샌달), 4달러 짜리 DVD 대 여섯 장, 티셔츠 두 어 장, 그리고 시장 한구석에서 먹는 현지 음식. 몇 푼 깎기 위한 치열함이 살아 있는 곳. 어느 새 나는 흥정을 즐기고 있었다.

프놈펜의 마지막 밤이다. 먹는 게 남는 것? 불타는 밤? 더도 말고 딱 커피 한 잔만 마셨으면. 자판기 커피라면 더 좋을 텐데. 간절한 커피 생각을 접어두고 저녁을 먹으러간다. 남편은 알고 있으리. 마누라 제 때에 밥 먹지 않으면 사나워진다는 것을. 어제 갔던 그 식당엘 다시 간다. 오늘은 메뉴 선택에 고민이 없다. 이미 랍스터로 결정하고 들어왔으니까. 값은 또 얼마나 저렴한가. 지난 번 한국에서 먹던 10만원 짜리는 맛이 형편없었다. 그것도 벼르고 별러 몇 년 만에 먹었는데. 그런데 이곳은 너무나 저렴한 것이다. 12달러.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 맛있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밥을 비벼서 다 먹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한 모양의 랍스터는 아니어서 크기가 작고 모양도 길쭉했지만. 돌아가면 한 번 확인해봐야지.

커피를 드디어 마시긴 마셨다. 숙소 앞 Rose Bar에서. Bar가 본래 의미하는 것을 잠시 망각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옷을 야하게 차려입은 호스티스에게 커피만 주문하다니 왠지 쑥스러워 얼른 커피만 마시고 나와 버렸다.


<호치민(사이공)>

내가 북인도와 네팔을 좋아하는 것은 유채 꽃을 질리게 보면서 길을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스페인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가을 코스모스 마냥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선인장이라는, 우리에겐 화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야생초일 수 도 있다는 색다름 때문이다. 내가 한겨울의 영국을 좋아하는 것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원 없이 양떼를 보며 양을 셀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기록을 추가한다.

내가 캄보디아를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자비한 비포장도로 옆에 피어난 그 수많은 연꽃 때문이리라.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는 꽃, 연꽃. 길가에 잠깐 잠깐 나타나는 작은 연못에는 가녀린 연꽃이 하나 둘 씩 다소곳하게 피어있었다. 내 눈은 언젠가부터 연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꽃, 연꽃. 작은 연못이건, 큰 연못이건 으레 물이 있는 곳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물 속에서 피어난 꽃. 비포장도로 위,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 바람이 뽀얗게 일어났지만 연꽃은 그 고상한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고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베트남 국경을 겨우 통과하니 베트남 인부 두 명이 우리의 배낭을 하나씩 들고 간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써 저 만큼 앞서가고 있다. 뜨거운 뙤약볕에 모처럼 빈 몸으로 걸어가는 남편을 보니 덩달아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런데 이런 일에는 늘 대가가 있는 법, 2달러를 요구한다. 마침 국경 사무실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베트남화폐단위)을 꺼내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더니 50,000동 짜리를 가리킨다. 2달러면 30,000동(1달러=15,000동)인데, 이 사람들이 우리를 뭘로 보고......어쩐다. 분명 우리가 바가지를 쓰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이 난감한 상황을 피할 도리가 없다. 베트남은 처음이고, 일행들은 저만치 뒤에서 올 생각도 않고 있고, 주위엔 온통 베트남 사람들이고, 할 수 없이 1달러 짜리 두 장을 주고 만다. 그래도 잠시나마 짐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나중에 베트남 물가가 엄청 싸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긴 했지만.
공항에서 호치민 시내까지의 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다. 말 그대로 발전도상에 오른 듯한 활기찬 분위기다. 어둑해질 무렵 우리의 목적지이며 여행자거리로 알려진 팜 응우 라오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동안 조용히 있던 딸아이가 반색을 하며 떠들기 시작한다. '실내포장마차'라는 한글 간판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한글을 더 많이 찾아내나, 게임을 딸아이와 하고 있자니 차창 밖으로 밀려오는 오토바이 물결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도도한 물결이란 표현이 이런 경우에도 어울릴까? 지금까지는 인도 자이푸르와 바라나시의 오토바이 행렬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기록 갱신이다. 기록 갱신에 더해 그림 한 폭 두뇌에 각인시킨다. 새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밀짚모자에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마스크를 한(매연이 심해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많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베트남 아가씨들이 당당하고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 그네들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우리가 부럽겠지만 나는 오토바이를 맘껏 탈 수 있는 그네들이 참 부러웠다. 그건 딸아이도 그랬다. 프놈펜에서 오토바이를 딱 한 번 탈 기회가 있었는데 난생 처음 타보는 딸아이가 너무나 좋아하는 거였다. 제 아버지한테 한국에 돌아가면 오토바이 한 대 사서 학교 갈 때 태워달라고 할 정도였다.

사이공(공식명칭은 호치민)에서 삼일을 잤는데 역시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먹는 게 단연 압도적이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잘 먹는 편이어서 어딜 여행해도 음식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에 따른 적응과 호기심 때문이지 그 자체가 늘 즐겁고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 사이공은 그렇지 않다. 먹어 본 모든 음식이 맛있다. 7년 전 유럽 여행 때는 주로 빵 종류로 끼니를 해결했는 데 그중 만만한 것이 바게뜨 인지라 물릴 정도로 많이 먹어서 나중에는 바게뜨의 '바'자만 들어도 인상을 그을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했는데 이곳의 바게뜨(베트남어로 반미라고 부른다)가 그 원한을 해독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 음식 중 제일 맛있게 먹은 것은 퍼(Pho)라고 불리는 쌀국수로 특히 함께 넣어 먹는 향미 채소가 좋았다. 인도의 맛살라와도 또 다른 맛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왔다 갔는지 그 사진이 붙어있는 유명한 식당(「Pho 2000」)의 쌀국수는 정말 맛있어서 그릇을 입에 대고 국물까지 후루루 마셨더니 종업원이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먹는 것이 식사 예절에 어긋난다는 것을 돌아와서야 알았다. 이런 사소한 깨달음도 여행이 주는 매력이겠지?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맥주에도 얼음을 넣어 마신다는 것이다. 우리 맥주의 톡 쏘는 맛도 없는 밋밋한 맛에 얼음까지 넣다니, 이곳에 일년쯤 살아본다면 이해가 가려나? 하여튼 그런 대로 이곳에서도 맥주는 여행의 멋을 더해주는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방콕 카오산 거리의 오픈 카페에서 한낮에 마시는 맥주는 그 맛보다 한낮에 알콜을 입에 댈 수 있다는 일탈이 해방감을 주는데, 이곳 사이공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냥 별 의미 없이 한가하게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안주를 따로 팔지 않는 맥주는 아무리 마셔도 몇 푼 되지도 않는다(우리나라에 비해).
별 의미 없이 한가하게? 마약을 하는 영화 속의 남자주인공(마이클 케인)이 그렇게 보였다. 영화 The Quiet American에서였다. 사이공에서의 마지막 날, 일찌감치 호텔 체크아웃을 한 우리 가족은 비행기 탑승 시간인 자정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말이 밤 12시지 정말 긴 하루였다. 시장 쇼핑(아오자이를 사달라는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일찌감치 가야했음),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통일궁 관람 등 시내 순례를 마친 우리는 더위를 피해 다이아몬드 백화점으로 갔다. 갑자기 쐬는 에어콘 바람 때문에 화장실을 두 세 번 다녀오니 아이쇼핑할 기운도 없다. 물어물어 영화관을 찾아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프로를 고르다가 보게 된 것이 바로 The Quiet American이였다.

주인공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69세)이 지난 2000년에 영국에서 엘리자베스2세로부터 지사작위를 받은 사실이나 얼마 전 영국에서 The Actor of the Year로 선정된 사실은 여행 후 돌아와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고, 이 보다 내가 이 영화를 진지하게 보게 된 이유는 이 작품이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의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학 시절 영미소설 시간에 읽은 <사건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의 영향력은 큰 것이어서 그 후 종교에 대해서 혹은 자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싹튼 종교에 대한 고민들은 인도 여행을 통해 한층 가열되어 어느 덧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긴 했지만. 그뿐인가. 벽 위로 기어다니는 도롱뇽에 대한 아주 사소한 묘사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여행 중 도롱뇽을 보게 되면 나는 자연스레 그린의 <사건의 핵심>을 떠올리고 주인공 스코비가 되어 그의 고민을 다시 생각해 보곤 한다. 하여튼 20대 초반의 나는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행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추억처럼 그를 떠올리곤 하는 데, 이 영화가 바로 그의 영화라니. 예기치 않은 해후에 가슴 설레며 영화에 빠져드는 데, 옆에 있는 유진이는 팝콘과 음료수를 모두 해치우고는 단잠에 빠져들었고 그 옆에 앉은 남편도 별 기척이 없다.

점심을 먹으러 어제 갔던 식당에 다시 간다. 두 번 째. 익숙하다. 설렘은 줄었지만 여전히 쌀국수는 맛이 좋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그것이 대부분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에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이상하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다시 시간이 흘러 여행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질 무렵, 가장 오랫동안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막힌 풍광, 화려한 유적지, 유쾌하게 보낸 시간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순간들이 아닐까. 딱히 말하기는 힘든 그러나 기억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굳이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언제나 반추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작년 터키 여행 때, 다른 여행자들은 가이드를 동반하여 바쁘고 알차게 시내 투어를 하는데 우리는 미처 그 방법을 몰라 한나절 동안 배만 왕복으로 타고 있었다. 할 일도 없어 2층 식당에 앉아서 한가하게 물고기를 고르고 있는 그곳 주민들과 그 옆을 얼씬거리고 있는 고양이 몇 마리를 우리 역시 아주 한가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경험보다 선명하게 남아있다. 반면 한때 감탄과 기쁨, 놀람을 자아냈던 것은 사진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어느 새 사르르 잊혀져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길지 않았던 이번 여행을 사진처럼 이렇게 기록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하지 못하는 무위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여행하고 있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200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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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기

여행기간 : 2002년 1월 7일 ~1월 21일


훌쩍 떠난다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마음가는 대로 가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그런 여행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듯이 비행기 한 번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년 이상 땀을 흘려 악착같이 모아야한다. 여행 경비를, 여행 정보를, 그리고 튼튼한 다리의 힘을.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연이다. 오랜 기다림이다.

터키. 일년 내내 남인도만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에 인도에서 만났던 인도인 친구와 이메일도 꾸준히 주고받으며 마음은 벌써 인도의 남부를 헤매고 있었는데 미국 대참사 사건 여파로 인도도 평화스러운 땅이 이미 아니었다. 그러다 얼떨결에 생각한 곳이 터키였다.
얼떨결? 아니다. 10여 년 전 교무실 내 옆자리에는 박식한 선배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분은 틈만 나면 지리부도를 펴놓고 상상 속으로 세계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 분은 여러 나라 중에 터키를 제 1의 여행지로 꼽았는데 그 이유는 동양과 서양이 그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라 했다. 그때만 해도 터키는 저 멀리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다 7년 전 런던의 어느 대형 서점에서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어 책을 한 권 산 적이 있다. 구부정한 허리에 우수에 젖은 눈빛을 한 평범한 터키인 사진이었다. 물론 한동안 그 책을 읽지도 못한 채 책장 한구석에 놓고 사진만 이따금씩 감상하곤했는데 바로 그 책이 터키에 관한 책으로는 꽤 유명하다는 것을 실제 이스탄불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터키는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 속에도 터키에 대한 설렘과 긴 기다림이 있었다. 내 자신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터키를 향한 마음이 이번에 터키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터키는 우선 어지러움으로 다가왔다.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모두 역사의 흔적이라 그 갈피를 헤아리기가 무척이나 힘겹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했듯이 이 땅은 메소포타미아와 오리엔트 문명이 잉태된 곳이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을 비롯한 수많은 문명들이 거쳐간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숨가쁘다. 난관에 처한 심정이다. 15일의 일정으로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주먹을 불끈 쥔다. “가자! 가자!”

유명한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가 보았다. 엄청난 크기에 압도당한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둥근 천장의 아라베스크 무늬는 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떻게 그렸을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엄격한 전통에 따라 꽃과 나무 따위를 그려 넣는데 천장마다 같은 그림이 없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런 위압적인 건축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답다, 멋지다, 근사하다, 대단하다, 고 놀래줄지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 마음 속 울림을 자극하지 못한다. 로마 교황청의 그 엄청난 크기에선 신을 빙자한 인간의 헛된 욕망이, 인도 타지마할의 눈부신 하얀 대리석 앞에선 22년 간 그것을 짓기 위해 동원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크기라면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을 북경의 자금성에선 권력의 무상함이 그저 감지될 뿐이다.
이런 유적지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는 6살짜리 딸아이가 순간 환호성을 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블루모스크 광장 한 모퉁이에 유치원 같은 건물이 한 채 소박하게 서 있는데 제 딴에는 창문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들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아이에게는 블루모스크 보다 유치원이 더 눈길을 끄는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은 여행에서만큼은 진리인 것 같다. 그렇다면 딸아이처럼 내가 환호성을 지른 곳은?
물론 있다. 사프란볼루라는 중세 도시에서였다. 크리스마스 카드에나 나옴직한 눈덮인 고요한 중세 마을에서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있었다. 200년은 족히 된 옛 건물이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연못이 앞을 막는다. 성큼 성큼 걸어가며 길이를 재어보니 일곱 이라는 숫자가 재어진다. 정사각형에 깊이는 1m 정도로 맑은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그득하다. 별다른 장식이 없다. 연못을 둘러싼 테이블은 식당치고는 그 수가 참으로 적다. 열 개나 될까.
이슬람식 정원에는 대개 사각형의 연못이 있는 데 그것은 사막에서의 오아시스를 상징한다고 한다. 오아시스란 낙원이다. 따라서 연못을 통해 그들은 낙원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식당의 실내 연못은?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은 정말 멋진 곳이다. 정원수를 잘 가꾼 정원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정원 중에서 제일 인상깊은 곳인데, 하지만 그곳의 연못은 이 실내 연못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인도 타지마할의 정원도 잔잔하고 아름답긴 한데 이 실내 연못만큼 몽환적이지 않다. 도대체 이 연못을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이런 연못을 만든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 스타 워즈 에피소드Ⅰ의 촬영지가 있는 카파도키아의 한 동굴 호텔에서였다. 도시 전체가 기괴한 돌로 이루어졌는데 지구를 벗어나서 우주를 헤매다 어느 혹성에 떨어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그 기묘한 도시에는 바위를 파서 호텔을 만든 곳이 있는데 이 호텔에서 하루를 묵는 기분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내가 묵은 호텔의 주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뿐이라 비워두었던 방엔 냉기가 심했는데 방이 가열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를 안채로 부르기에 음식 대접도 받으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헤밍웨이같이 생긴 이 주인은 45살로 부인은 벨기에 사람인데 7살 먹은 아들과 함께 벨기에서 살고 있다한다.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 생각이 났던지 방 한쪽에 장식품으로 올려놓았던 그곳 전통 인형을 하나 집어 선물이라며 선뜻 우리 딸에게 준다. 시장했던지라 저녁을 사먹을 생각으로 식당을 물어보았더니 또 선뜻 물고기 저녁식사로 우리의 허기를 해결해준다. 국물용 멸치 만한 물고기를 간을 해서 조리한 것인데 삶은 것인지 튀긴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지만 담백한 게 맛이 그만이다. 후식으로 나온 작은 사과 알갱이는 보기보다 맛이 훨씬 좋다. 잠시 밖에 나갔다오느라 모포를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헤밍웨이였다. 객실에 있는 소품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것들이다. 잡지 한 권, 비누 한 조각에도 상당한 안목이 배어있다. 멋진 주인이다. 실내에 연못을 만들어 낙원을 꿈꾸었던 조상의 후예답게 동굴을 파서 만든 호텔을 낙원으로 삼고 있는 그가 순간 부럽다.

Imagine! 성서에도 나오는 에페소스에서였다. 가이드로 나온 Mehmet라는 이름의 터키 청년은 다 허물어져가는 유적지에서 우리를 안내했다. Imagine! 이 단어로 시작하는 그의 설명은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내가 아마 수업 시간에 저렇게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존경받는 교사가 되었으리라. 찌를 듯한 눈빛에 숨도 쉬지 않는 그의 설명도 인상적이지만 상상력을 일깨우려는 Imagine 이라는 단어는 그의 열정적인 설명에 타임머신 같은 날개를 달아 고대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게 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야외극장은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이는 데 세계적인 팝 가수인 엘튼 존도 여기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한다. 터키 출신의 유명한 가수인 탈칸도 여기에서 공연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니 그런 적이 없다한다. Big Big Girl이라는 팝송을 흥얼거리기에 함께 흥얼거렸더니 노래를 바꾼다. 터키 노래다. 가사는 모르지만, 그 역시 훌륭한 가수는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부르는 노래는 감동을 준다. 이럴 때 한 곡 정도 화답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내겐 감동을 줄만한 솜씨가 없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에 갔다. 그리스 시대의 가장 큰 신전이며 대리석으로 만든 최초의 신전으로 높이 18미터의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길이 120미터, 폭 60미터의 대형 건축물이다. 지금도 위압감을 주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높이 10미터의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했다는 데 18미터의 기둥이 127개라니! 그런데 시야에 보이는 것은 달랑 기둥 하나뿐이다. 그 많은 기둥이 다 어디로 갔을까. 역시 Imagine!

메블라나 춤으로 유명한 콘야에 갔다. 흡사 가수 송창식이 노래 부를 때 두 팔을 옆으로 벌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땅을 향한 채 빙빙 도는 게 전부인데 이게 또 볼만하단다. 무용수들의 의상은 흰색으로 둥근 모자는 비석을, 상의는 무덤을, 치마는 장례식에 사용되는 흰 천을 의미하며 춤이 절정에 올랐을 때 무용수들은 그들의 상의를 벗어 던지는 데 이는 지상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무덤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종의 종교의식인 셈이다.
그런데 공연이 없단다. 다음날이나 단체 여행객들을 위한 공연이 있다하기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니 특별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250달러(325,000 원정도)를 내면 우리 세 식구만을 위해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 나는 풀장 같은 실내 연못을 만들거나 동굴 호텔을 운영하며 헤밍웨이 같이 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누구는 오로지 메블라나 춤을 보러 일부러 비행기 타고 온다는데. 바로 다음날 기회가 있는데도 이미 예약해놓은 나머지 일정 때문에 발을 돌려야만 했다. 몇 걸음만 걸어도 뼛속까지 한기가 차 올랐던 이곳 콘야, 아쉬움 때문에 더더욱 춥기만 했다.

그래도 5만원의 택시요금을 물어가며 기분 낸 곳이 있으니, 이스탄불의 피에르 로티 카페였다. 프랑스 해군인 피에르 로티가 유부녀였던 아지야데와 밀회를 즐겼다는 언덕 위 무덤 가에 있는 조그마한 찻집이다. 1876년부터 시작되는 얘기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찻집에서 자주 만났다. 어느 날 피에르 로티의 근무가 끝나 프랑스로 돌아가자 아지야데는 죽었다는데 정확한 사인은 모른단다. 그후 로티는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가 되어 돌아오는데 그는 이곳에서 아지야데의 무덤을 찾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한다.
정말 궁금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 여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구상하며 그 책을 썼던 곳이라기에 더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스탄불에서 다른 것은 놓치더라도 이것만은 꼭 봐야겠노라고 가기 전부터 작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십 몇 년만에 왔다는 폭설로 인해 사방이 눈이었다. 날도 잔뜩 흐려있었고 카페 옆 무덤 가에선 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 아래로는 멀리 동․서양을 가르고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더불어 이스탄불 시내가 펼쳐져 있었다.
말 그대로 조그마한 찻집에는 한 떼의 유럽인들로 빈자리가 없어 전망이 전혀 없는 뒷방으로 가서 잠시 몸을 녹이고는 이내 나왔다. 유명하긴 유명한가보군, 하며 자리를 털며 나오는 데 우리를 태우고 왔던 택시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주차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얼마 후 다 왔다해서 미터기를 보니 22,850,000리라였다. 1천만 리라 두 장과 나머지 돈을 조수석에 앉은 남편에게 분명 주었는데 1천만 리라 짜리 한 장을 덜 받았다며 자꾸 우기는 택시 기사. 미터기 조작에 당하고 바꿔치기 손놀림에 당하고, 그래서 왕복 5만 여 원을 들여가며 그 유명하다는 피에르 로티 카페에 다녀왔다. ( 터키 리라 1,000,000은 우리 돈 약 1,000원에 해당)

여행에서 돌아온 지 20여 일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초라하다. 난 이런 것을 보았노라, 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7배라는 땅 넓이 때문에 이동시간이 길고, 십 몇 년 만이라는 폭설로 가는 곳마다 눈이었고, 짧은 세계사 상식으로 히타이트 시대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역사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15일 정도의 일정이 빠듯했다.
그러나 나는 친절한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리라. 사프란볼루의 작은 박물관에서 만났던 한 무리 청년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과 단체 촬영, 에페소스에서 길을 어슬렁거리던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승용차가 대우의 세피아인데 아주 좋은 차라고 자랑을 하던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선생은 선생을 알아본다), 콘야에서 길을 가던 아가씨 둘이 우리 딸아이가 신기했던지 사진을 함께 찍어도 되냐고 물어왔던 일, 환전을 하지 못해 토큰을 사지 못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정기권을 빌려주려던 청년과 무임 승차를 허락해 주었던 역무원 아저씨, 무엇보다도 이방인 어린이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준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고두고 고맙다. %3(터키인들은 3%를 이렇게 표기한다)은 유럽에, 나머지 %97은 아시아에 적을 두고 있지만 유럽이기를 고집한다는 그들, 그러나 짧은 내 경험으로 본 그들은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더 가깝다. 왜냐,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내려 둘러봤던 암스테르담에선 아무도 정말 아무도 동양인인 우리 딸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기 때문이다.(인도에선 이방인을 향한 관심이 대단하다) 터키인들은 어딘가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그게 무엇일까. 숙제를 한아름 안고 돌아온 기분 마저 든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지금 쓰여져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어딘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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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2023-09-01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딸이 참 귀엽네요

nama 2023-09-01 09:35   좋아요 0 | URL
지금도 귀엽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