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북부지역의 사파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의 휴양지였던 곳이라한다. 인도 북동부의 다르질링이나 남인도의 우띠가 영국 지배자들의 휴양지로 개발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식민지를 개발했던 이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여러가지로 착취의 손길을 뻗어갔다. 더울 땐 풍광 좋고 시원한 곳을 찾아 별장을 짓고 지배자로서의 호사를 마음 껏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다치고 이런 식민지 시절의 휴양지를 찾는 사람들은 또 뭔가. 이런 곳을 특히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것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사파로 향하는 미니버스 앞자리에는 프랑스일가족 5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과 전혀 관계없는 나 같은 부류는 또 뭔가. 미니버스에 구겨진 채로 가다보니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원주민은 흐몽족이라고 불리는 소수민족이다. 인디고 불루라고하는 검정에 가까운 청색의 아마포로 된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정강이에는 천을 감은 흐몽족 사람들의 특이한 점은 이런 소수민족 복장이 아니었다. 배낭처럼 어깨에 멘 원통형의 바구니도 아니었다. 까무잡잡하고 순박하게 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바로 작은 키였다. 

  성인 평균의 키가 150 cm가 될까? 남녀 모두 작으니 남녀 차이도 별 의미가 없을 것처럼 그들의 체구는 왜소하고 작다. 흡사 소인국에 온 것 같다. 라이스테라스라고 하는 계단식 논을 일구며 척박하게 살다보니 그런 것일까.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산악지역에서 살다보니 그런 조건에 적응하도록 진화가 된 것일까. 오래전 <조선일보>에 <이규태코너>라는 고정 칼럼에서 읽은 글이 기억난다. 미래에는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및 에너지 부족으로 인류의 키가 작아져야만이 인류가 공존할 수 있다며 그 적정 신장을 150 cm로 잡는다, 는 내용이었다. 이 작은 키의 인류를 "미래형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곳 흐몽족이 미래형 인간에 꼭맞는 사이즈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을 보면서. 

  내 여행 필수품 목록에는 여권, 돈 다음으로 찜질팩이 들어있다. 등허리 만한 크기에 전원을 넣으면 금방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되어 주는 믿을 만한 여행동무, 찜찔팩. 남편은 한술 더 뜬다. 그냥 여행 용품이 아니라 여행 의료 용품이라고. 추위는 물론 배가 아프거나 어깨가 결릴 때도 한 역할 톡톡히 하는 데 그뿐만이 아니다. 양말이나 속옷 따위를 말릴 때도 여간 요긴한 게 아니다. 4단계로 되어있는 온도를 최대한 올려서 양말이나 속옷을 올려놓고 큰 수건으로 지긋이 덮어 놓으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나면서 빨래가 솔솔 마르기 시작한다. 

  이곳 베트남에서야 뭐 쓸 일이 있을까 싶어 가져올까 말까 망설였는데, 웬 걸 가는 곳마다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중부 지방의 호이안이나 후에는 낮에는 더워도 밤에는 등허리가 서늘해서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정작 필요한 사파에서 그만 고장이 나버렸다. 과열이었다. 

  시종일관 추적추적 내리는 부슬비와 안개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깟깟 마을만 겨우 다녀올 수 있었다. 별달리 유흥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 산골 동네에서 동네 산책마저 막혀버리니 정말 할 일이 없다. 유명하다는 박하 일요시장은 아예 폐장이란다. 명절 때문이라나. 전기 히터를 켜놓아도 으슬으슬 추운데, 그동안 내 등과 가슴을 덥혀주던 찜찔팩은 저세상으로 떠났고, 안개 속에 푹 묻혀버린 동네는 갈 데가 없고, 기껏 마음 먹고 들어간 피자집은 불친절+최악의 맛+비싼 가격으로 이방인을 비웃고, 이런 걸 두고 설상가상이라고 해야하나. 

  그마나 깟깟마을은 아기자기하게 산골의 맛을 느끼기에 좋았고 오가는 길도 흥겨워서 이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하자며 위안을 삼았다. 쓸쓸한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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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아침은 하노이역에서 시작되었다. 전날 오후 8시 15분에 라오까이역을 출발한 열차는 다음날인 26일 새벽 5시도 안되어서 하노이역에 도착했다. 일단 택시를 타고 간 곳은 하노이 도착 첫날인 18일에 묵었던 Holiday Hotel 이라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셔터를 두어 번 두드리니 안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셔터가 올라갔다. 잠겨있지않은 출입문으로 들어서니 소파에서 자고 있던 종업원이 눈을 비비며 입을 연다. "Happy New Year!" 맙소사! 단잠을 깨운 이방인에게 건네는 새해 첫인사에 진한 감동을 받는다.  

  밤 늦게 자서 잠을 더 자야겠다며 안쪽 식당에 있는 컴퓨터와 노트북의 전원을 켜주며 다시 잠자리에 드는 종업원. 우리는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네이버에 겨우 접속해서 <생활의 참견>이라는 인터넷만화를 숨죽이며 키득거리고 보았다.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여행은 평소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한다.  

  체크인은 9시여서 어서 예약한 방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종업원이 일어나 셔터를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7시 넘어 밖으로 나갔다. 설날 아침 7시. 갈 곳도 없고 지리도 모른다. 거리 모퉁이를 돌아가니 목욕탕 의자 서너 개 놓고 차와 삶은 달걀을 팔고 있다.  뜨거운 녹차와 삶은 달걀 하나씩을 먹으니 행복감이 밀려온다. 몸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가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아도 견딜만하다.  

  지리를 익히기 위해서 하노이 구시가지의 중심 역할을 하는 호안끼엠 호수를 물어보며 이거리 저거리를 헤매다보니 저쪽 길건너 국수집에 사람들이 떼거지로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역시 목욕탕 의자에 자리를 잡고 국수를 시키고 살펴보니 VTV 라는 베트남 방송국 사람들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국수 말아주는 모습을 찍는 것외에는 딱히 달리 하는 일도 없어보인다. 인터뷰를 요청하면 얼른 응해줄 수도 있는데..... 

  숙소 근처에 고딕 양식의 성당이 있는데 때마침 아침 미사가 있는지 사람들이 들어가기에 따라가본다. 미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어서 텅 빈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본다. 한때는 독실한 카톨릭 신앙이 있었지, 내게도.  

  하루가 참 심심하게 흘러간다. 거리를 쏘다니는 일 밖에 할 일이 없는 날인데 베트남 최대 명절이라서 문을 연 상점도 드물어 눈요기 할 곳도 거의 없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카페나 식당에는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로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설날을 맞다보니 잠시 한국이 그리워지기도하였으나 이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같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멀리 떠나와보니 과거의 관습이나 편견들이 떠오르면서 다시는 그런 상황에 빠져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시도 주방에서 떠나지 못하고 이눈치 저눈치 살피면서 무슨 죄인처럼 명절을 보내야하는 한국의 어머니와 며느리들. 누군가의 말처럼 반노예 처지나 다름없이 나를 버려야하는 날이 명절 아니던가. 남자들이라고 편하겠는가.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들과는 돈독한 형제애만 오고가던가. 이런 전통이나 문화는 바뀌어야만 한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낯선 이방의 거리를 쏘다니다보니 하루가 저물어간다. 어떤 집에서는 좁은 공간안에서 열 댓명의 식구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고 있다. 저들도 주방 한쪽에서는 숨죽이며 눈치보며 말없이 시중들고 있는 세상의 딸들이 있겠지. 그들도 변화를 꿈꾸고 있을까. 

  그래서였을까. 오후 8시. 호안끼엠 호수 옆 광장에 꾸며진 무대에서는 무료 서커스 공연이 펼쳐졌는데, 아슬아슬하고 자학적이기까지한 곡예를 지켜보면서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고 슬퍼졌다. 서커스가 슬픔을 자아내는데 눈을 돌리고 안볼 수가 없었다. 그때 바로 앞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남자가 나를 구원해주었다. 그 남자 욕을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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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롱베이 1박 2일 투어는 현지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관광 프로그램이다. 대부분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팀이 조성된다. 우리팀은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우리, 중국인, 독일 사람들로 이루어진 13명이었다. 베트남 여자를 대동한 바람기 있어보이는 이탈리아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같은 국적의 두세 명이 함께 신청했다. 우리 가족은 세 명, 중국인 가족도 세 명. 부부 내외와 딸로 구성된 것까지는 같은데 우리 딸아이는 10대, 그집 딸은 30대이고 그들 부부는 우리보다 딸들의 나이차 만큼이나  나이가 많아 보였다. 2인 1실의 선상 숙박이라 어떻게 하다보니 중국인 아저씨와 남편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기에 아무련 미련없이 그들에게 두 개의 방을 다 쓰라고 양보를 했더니 너무 너무 미안해하며 고마워한다. 조용하고 점잖은 중국인 일가족이다.  

  여행하기에 딱 좋은 신체조건은 무엇인지 아시는지...특히 동남아나 인도 여행시 비행기나 버스의 좁은 좌석에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싱글 침대를 어린 자녀와 함께 써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이상적인(?) 체구는 바로 나와 같은 평균 이하의 신장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 여행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이라고나 할까나. 비웃거나 말거나.

  프로그램 중에는 카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 같은 한 폭 동양화 속에서 노니는 카약이라...두 명이 한 조가 되어 노를 젓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카약 비슷한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은 물론 기본적인 수영에도 젬병이었다. 대학 신입생일 때 체육 시간에 겨우 벽 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까지 배우고 막 호흡을 배울 무렵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 휴교 조치로 들어가는 바람에 나의 수영 경험은 딱 거기에서 멈춰버렸다. 그러고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난 도대체 뭘하느라 수영 하나 제대로 못배웠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중국인 아저씨와 한 카약을 타게 되었다. 다정한 중국인 모녀의 카약과  우리 남편과 딸아이의 사랑스러운 부녀의 카약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카약에 올랐다. 남들은 쉽게도 앞으로 나아간건만 내가 탄 카약은 방향을 잃고는 섬 가장자리에 곤두박칠 치기가 일쑤, 겨우 타는 방법을 익혀 앞으로 앞으로 노를 저어가니 그럭저럭 탈 만했다. 와중에 중국인 아저씨(내가 보기에 아저씨지 실제로는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연세)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알고보니 이 아저씨는 대학에서 영어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셨다. 어쩐지 연세에 비해 영어를 좀 하신다했더니.. 

  그림 같은 1박 2일의 하롱베이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점심을 이 중국인 가족과 한 식탁에서 하게 되었다. 그사이 정이 든 이 한중 가족은 아쉬움으로 전화번호와 이메일주소를 나누어 갖으며 한국에 오게 되면, 반대로 상해(이 중국부부의 딸이 상해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단다)에 오게 되면 서로 연락하자며 헤어졌다. 글쎄 또 만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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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a Dao. D자는 왼쪽 직선 가운데에 - 선을 그어주고 o 자는 위에 -선을 눈썹 긋듯이 그어 넣어야 베트남 사람들이 쓰는 글자가 되는데 도저히 그렇게 쓸 재간이 없어 말로 풀어 쓰는 수 밖에 없다.  매화를 가리키는 베트남 단어다. "화 다오" 비슷하게 읽는단다.

  사군자. 매난국죽. 이 중에서 매화를 노래한 시 한 편 딱 떠올라줘야 글에 폼이 날텐데 시험지 앞에두고 머리가 창백해지는 학생 꼴이 되어버린다. 봄에 흔하게 보는 개나리나 진달래보다 더 접하기가 힘든 tv 화면에서나 보는 먼 동네의  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운이 좋거나 아니면 평소에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는 이 매화를 이번 베트남 여행에서 원없이 보았다. 집집마다 상점마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마냥 화분에 심거나 화병에 담아서 눈에 잘띄는 곳에 모셔놓고 있었다. 우리가 머문 호텔이나 우연히 들어간 식당, 기차역 대합실...매화가 없던 곳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내기 힘들 정도다.  

  사파의 Mountain View Hotel 에 머물며 영어가 시원찮은 종업원에게 겨우 물어서 꽃이름까지는 알 수 있었으나 이 꽃이 왜 베트남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의사소통 영역 밖의 일이었다.  

  긴 가지에 어쩌다 한두 송이 피어있는 매화를 보면 어렸을 적-아마 7~8살 무렵- 산너머 공동묘지로 가는 한겨울 눈덮인 오솔길을 보며 가슴이 아려왔던 기억이 더듬어지기도 하고, 지금은 연락없는 옛 친구와 함께 한 어느해 5월의 덕유산 등산 길에 발 밑으로 흩날리던 꽃잎이 새삼 생각이 나기도 한다. 음, 그 꽃은 산벗꽃이었지, 아마.  

  한겨울 나목의 긴 가지에 듬성듬성 피어있는 이 매화를 사랑하는 베트남 사람들. 집집마다 모시며 기복을 기원하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그네들의 신과 더불어 그네들의 마음에 피어오르는 매화 한송이는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가슴 속에 핀 매화를 더듬어보게한다. 참 아련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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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009년 1월 18일 ~ 1월 29일   

일정 1월   18일 밤 하노이 도착(아시아나항공)
               19일 하노이출발(국내항공편)-다낭 도착해서 호이안으로 이동
               20일 호이안
               21일 후에로 이동
               22일 후에. 오픈버스로 하노이로 이동(야간)
               23일 오후 사파행(라오까이) 열차 탑승
               24일 사파
               25일 오후 하노이행 열차 탑승
               26일 하노이
               27일 하롱베이 1박 2일 투어
               28일 하롱베이, 하노이
               29일 하노이. 야간에 인천행
               30일 오전5:35 인천도착 

환율: 미화 1$ = 1,372원, 1$=약 17,000 VTD(동), 10,000VTD= 약 800원, 예를 들어 거리의 쌀국수 한그릇에 15,000동이라면 15,000 * 8=120,000 인데 뒷자리 영 두 개를 지우고 원으로 생각하면 1,200원이 됨. 여행 내내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팠음.
 

  꼬박 만 3년만에 이룬 또 하나의 쾌거. 이번엔 아시아나 보너스항공권을 얻었다. 3식구 총 108,000 마일(한사람 혹은 가족합산 마일리지로 2인 이상 신청할 경우 10%의 할인 혜택이 있음)을 필요로 하는 동남아행 보너스 항공권을 얻어보려고 참 열심히 신용카드를 긁었다. 마일리지 적립을 제일 많이 해주는 카드사 선정은 말할 것도 없다. 불안정한 기름값으로 작년말까지도 80만원 이상(3인기준)이었던 유류할증료 및 세금이 올 1월 1일부터는 30여만 원으로 떨어져 제대로 된 공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여행의 들뜸, 설레임은 별로 없었다. 해야 할 일상의 일들이 힘겨웠고 만성위염의 재발로 심할 때는 수업에도 지장을 주는 경우가 생겼고, 무엇보다도 여행지로 잡은 베트남은 그리 새로운 곳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6년 전 앙코르와트를 보는 길에 잠시 들렀던 호치민에서의 며칠을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보다는 내 깊은 곳에자리잡은 인도가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리라. 이번 베트남 여행중에도 시시때때로 내 입에서 나온 말도 그랬다. " 역시 인도만한 나라가 없구먼." 

  그렇다고 베트남 여행이 만만한 것은 절대 아니리라. 해서 좀 지름길을 택해 보았다. 하노이에 있는 한인 운영 여행사에 성가신 몇가지를 의뢰했다. 도착시 공항 픽업, 첫날 호텔 예약, 라오까이 왕복 열차 예매, 하롱베이 1박 2일 투어. 몸소 겪어야 할 고생, 일부러 시간들여 젊었을 때(?)하는 고생을 수수료 몇푼에 간단하게 처리했다. 이렇게 쉽게 하려면 여행은 왜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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