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꾼'의 일상이 얼핏 독서로 채워질 듯하지만 실상 더 많은 시간은 책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거나(그러다 하루에도 여러 번 주문을 넣기도 하고) 책상을 정리하는 데 소요된다. 이 경우에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이다. 강의자료를 정리하고 책상을 좀 치우다가, 지나간 교수신문에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4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올려놓은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마음산책, 2011)에 대한 역자의 소개이다. 덕분에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도 처음 알게(보게) 되었다. '아름다움과 민주주의'는 마지막 장의 부제이면서 '옮긴이의 말'의 제목이다...

  

교수신문(11. 03. 28)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를 옹호하는 이유  

오늘날 미술비평이 어떤 위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간주된다. 한국에서 미술비평이 주로 학계의 강단비평이나 미술가의 전시홍보용으로 유통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새삼스런 사실도 아닐 것이다. 이것이 물질세계에서 미술을 경험하는 우리 삶에 미술비평이 그렇게 불충분하고 무력한 이유이자, 미술이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비평과 무관한 불특정 다수에게도 항상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미국의 문화평론가 데이브 히키의 이 책은 아름다움과 민주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술의 효용을 논한 평론집이다. 초판은 1993년 진보와 보수진영이 격하게 대치했던 문화전쟁 시기에 나와 학계에 적잖은 물의를 일으켰고, 그로부터 16년 뒤인 2009년에 서문과 제5장 ‘아메리칸 뷰티’가 추가된 개정증보판이 시카고대학교출판부에서 나왔다. 이 책은 개정증보판을 완역한 것이다. 

히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이요, 미술품은 보는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술품의 가치를 판단할 때 그것의 외양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대중을 가르치고 이끌려는 기성 제도의 노예가 되고 만다. 즉 미술의 힘은 구경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일견 새로울 것이 없는 이 악의 없는 주장으로 히키는 미술품의 의미에 천착하는 학계로부터는 ‘이단아’로, 형식주의와 후기 구조주의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비평을 갈망하는 대중독자들로부터는 ‘자이언트’로 불리게 되었다. 이른바 문제적 평론집이 된 이 책에서 히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다음과 같다.

먼저 히키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아름다움 없이 대중의 주체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정의 내릴 수 없으며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구경꾼의 감탄을 자아내는 저녁노을에서 신인선수의 점프 슛, 광고와 패션, 그리고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은 지식의 세례를 받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 전체와 관계를 맺는 광범위한 가치이기에 지지집단에 의해 언제나 논의되고, 재발견되고, 다시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그리스 최고의 절색 헬레네, 베르니니가 조각한 테레사 수녀의 무아지경은 물론이고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워홀의 실크스크린까지 아름다움의 언어는 기독교 시대 이전 지중해 연안의 제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찬란한 다신교 유산의 일부임을 말한다. 


>헬무트와 브룩스, N.Y.C., 1978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목적(형식주의)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미술이 대표적이다. 이 책의 제2장에 나오는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불신」(1601)과 메이플소프의 「헬무트와 브룩스, N.Y.C.」「루, N.Y.C.」(1978)처럼 미술에는 엄숙한 종교 교리에서부터 파격적인 성행위까지 거의 무엇이든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다. 여기서 히키가 강조하는 바가 아름다움의 언어, 곧 민주주의다.

히키에 따르면 미술에서의 민주주의는 아름다움이냐 추함이냐, 즐거움이냐 고통이냐, 예술이냐 외설이냐 식의 양자택일의 자유와 혼동돼서는 안 된다. 또한 미술전문가가 논쟁적인 이미지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예술작품‘으로 몰아가는 행위와도 혼동돼서는 안 된다. 히키는 메이플소프의 포르노성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속세의 구경꾼들을 참여시켜 발언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을 에워싸고 있는 고급화와 신비화, 도덕적 고립의 분위기를 극복하고 ‘주변성’을 알린다는 점에서 열렬히 옹호한다. 동시에 그 사진을 외설로 규정하고 미국 국립예술기금의 예산을 대폭 삭감시킨 공화당 제시 헬름즈 상원의원의 행동 역시 칭찬한다. 메이플소프에게 포르노성 사진을 제작할 자유가 있듯이, 헬름스에게도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사진에 반대할 자유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술은 이러한 논쟁 속에서만이 기성 가치와 통념에 저항할 수 있고, 훌륭한 정치의 영역으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 있다. 미술의 힘이 이러할진대, 미술 감상이 유익하다는 이유로 보란 듯이 우리와 이미지 사이를 가로막고 계도하려는 미술관(비영리 대안공간도 포함된다)·대학교·재단·출판업체들을 뭉뚱그려 히키는 ‘치료기관’으로 부른다. 그가 보기에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와 나치 독일의 문화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치료기관의 대표적인 마취 전문가들이다.

히키가 아주 예리하게 본 것이 바로 치료기관의 정체를 벗겨 낸 부분이다. 미국 미술계는 전후 호황을 누리면서 뉴욕의 사설 갤러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네트워크에서 미술 관련 박사와 석사들로 구성된 거대한 행정기관으로 팽창했다. 그리고 공공자금으로 운용되는 탈근대주의적 대안공간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치료기관들이 획일적인 연동 후원 체제를 운영하면서 권력과 비과세 자금을 획득하기 위해 인정사정없는 경쟁을 벌여 왔음에도 미술평론가들은 ‘시장의 타락’에 불평하는 것으로 자족하는가 하면, 구경꾼의 시각적 즐거움과 상관없는 비영리 기관들이 내놓는 특정 작품들에 대해서는 문화적 자선의 한 형태라는 경솔한 판단을 내린다고 히키는 비판한다.

미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료기관의 이러한 모습은 최근 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미술전문가들은 여전히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미술의 논쟁적 힘을 마취하여 미술관용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성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름다운 미술품이 팔리면 곧바로 특권층의 우상숭배적인 상품이라며 낙인을 찍고, 잘 나가는 좌파 비평가들은 엘리트주의적 압제의 표상이라며 미술품의 외양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하찮게 취급한다. 이 모든 해석들이 미술을 경험하는 우리 삶에 아무런 떨림도, 쓸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해석의 자유를 빙자한 해석의 폭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히키의 생각이다.

이 책은 서양 미술에서 아름다움의 역사를 되풀이하거나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경쟁적인 이론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대신에 호메로스가 헬레네의 절색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이 시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묘사했듯이, 히키는 르네상스부터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이 대중에게, 미술가에게, 비평가에게, 정치권력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각도에서 접근해감으로써 그것이 입체적으로 조명되길 바란다. 아름다움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독보적으로 평가받는 히키의 비평은 유행의 최전선에 놓인 갖가지 이론과 담론이 난무하는 한국 미술비평의 양적 팽창과 질적 답보라는 위기의식에 유용한 키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박대정_프리랜서 큐레이터) 

11. 04. 03.  

P.S. 책 표지의 그림은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불신>이다. 색채를 입으니 훨씬 더 생생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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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1-04-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뉴스를 보니 로쟈님이 조국 교수님, 장하준 교수님과 함께 3대 저자-지식인으로 뽑혔군요..ㅋ 축하드립니다 ^^;

로쟈 2011-04-03 18:20   좋아요 0 | URL
그건 '뉴스'가 아니에요. 연말쯤엔가 나온 거니까.^^;

anathema 2011-04-04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책 주문을 자제합니다. 지금까지 구입한 책이 7,000만 원이 넘더군요. 한 권에 30만원인 책도 있어 권수로는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로쟈 2011-04-05 08:24   좋아요 0 | URL
상당한 애서가시네요. '1억클럽' 같은 갈 만들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책으로 1억을 날린 사람들의 모임...

anathema 2011-04-0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년 동안 7,000만 원을 쓴 것이니 그렇게 책을 많이 산 것은 아닙니다. 로쟈님은 1억 이상을 날렸을 것 같은데...

로쟈 2011-04-07 09:58   좋아요 0 | URL
요즘 돈으로 환상하면 그렇게 될 거 같은데, 사실 대학까지 들어가는 자녀 교육비가 2억이 넘는다고 하니, 1억 정도는 '애교'지요.^^;

우주 2011-04-06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담하게도 이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올리셨군요(^^). 이 포스트를 보신 분들이 꽤 있을 텐데, 사진을 보고도 댓글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놀랍습니다. 아무래도 사진을 실제로 보거나 해상도가 높은 파일로 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최소한 좋다, 나쁘다, 역겹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등등 어떤 반응이든 있어야 정상일 텐데요(?). 저자인 히키가 말하는 이 땅의 "치료기관"들이 "반민주적" 지상 과제를 수행하는 데 성공했나 봅니다.

로쟈 2011-04-07 12:59   좋아요 0 | URL
이미 '못볼 걸' 너무 많이 본 탓이 아닌가 싶은데요.^^;

우주 2011-04-07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볼 것'이라면 문외한이 아닌 저도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거든요. 흑백 사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장면, 그런 장면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에도 이 경우에 사진으로서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하는 구체적인 의문이 일기 전에 받은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어요. 저자인 히키는 이 사진과 관련해서

"메이플소프는 왜 그 실제적이며, 은밀하며, 향기로운 광경에 복종해야 했을까? 그리고 왜 그것을 사진에 담기로 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그 탄원자는 윤활제를 바른 다른 사람의 주먹이 자신의 항문에 처박히도록 엎드려 복종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사진에 찍히기로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에게 생각해보기를 촉구하며 그 나름 느낀 바를 쓰고 있기도 하죠. 이 이미지에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못 볼 걸' 너무 많이 봐서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주저되고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메이플소프의 X 포트폴리오가 물의를 일으킬 때 동시에 전시되던 '포르노 다운' 포르노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저자의 말을 감안하면 작금의 이 상황이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

aleph 2011-04-07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이플소프 사진은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보기 드문 파격이네요. 다소 충격적이었다는..^^ 메이플소프의 이미지가 구경꾼들이 한마디씩 하게끔 만든다는 데 절로 공감이 되고 포스팅해주신 책에도 흥미를 갖게 되네요.

우주 2011-04-07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는 미술, 아름다움,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 한국에서는 잠잠하니 히키가 일컫는 '치료기관'의 교육이 이 땅의 선남선녀에게 효과적으로 먹혔음을 증명해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욱이 식자들의 참여가 그 어느 블로그보다 활발한 것으로 아는 로쟈 님의 블로그에 대담하게 이 메이플소프의 사진이 올려졌는데 말입니다. 전국회의원인 변호사 최재천 씨가 주간경향에 서평을 올렸는데, 그분은 이 책을 읽고는

"책의 요지는 예술의 세상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미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그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다. 그런 아름다움의 언어가 곧 민주주의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103231453451&pt=nv

라고 쓰셨더군요. 많은 분들이 메이플소프의 이 이미지를 보고 무엇이든 느껴서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여 반응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이 (물론 이 이미지를 보고 '아름다움'을 떠올려야 한다는 건 아님) 이 땅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할 운명인가 하는 회의마저 드는데, 기우일까요?
 

건축전문잡지 '공간'(520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김동일의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갈무리, 2010)을 읽은 인상을 적었다. 모스크바에서 쓴 리뷰 중의 하나로 기억에 남는다. 책은 주로 딱딱한 논문들을 모은 것이어서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란 제목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걸 서두로 삼았다.    

 

공간(11년 3월호)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사회 속의 예술(art in society)’을 다루는 책의 제목으로는 특이하다. 김동일의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 주는 첫인상이다. 저자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가를 유혹하는 것은 이제 사회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예술가들이 창조해낸 예술보다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이다.”이라고 서두에서 미끼를 던지는데, 정작 그렇다면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인 사회가 예술보다도 더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맞을 것이다. 게다가 예술과 사회란 이분법을 지양하자는 것이 저자의 또 다른 제안이고 보면 제목만으론 초점이 모호하다.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란 부제도 마찬가지다.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저자가 동원하는 핵심적인 이론이긴 하지만 책의 구성은 광범위한 ‘문화읽기’보다는 ‘미술읽기’에 한정된다. 미술과 미술사, 미술관, 미술시장 등을 폭넓게 다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책은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의 결과이므로 자연스레 ‘예술사회학’으로 분류된다. 예술 속에 사회가 어떻게 반영돼 있는가를 묻기도 하고,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소통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다. 저자는 이 가운데 특별히 ‘스타일의 사회학’을 주창하며 강조한다. 왜 그런가. 스타일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토대이자 그 본질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곧 예술이라면, 예술사회학은 달리 스타일의 사회학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스타일을 ‘사회적 실천’과 그 ‘맥락’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며, 이를 설명하는 데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최적이라고 판단한다. 부르디외의 ‘장’이나 ‘아비튀스’ 개념을 적용하면 스타일이 갖는 실천의 논리와 맥락을 정교화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제안이다. 그래서 부르디외의 용어들을 ‘스타일장’과 ‘스타일 아비튀스’이란 말로 새롭게 개념화한다. ‘성향의 체계’를 뜻하는 아비튀스는 스타일 행위의 보편성과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사회적 공간으로서 ‘스타일장’의 지형과 역학은 개별 스타일행위자들에게 가능한 실천의 범위를 제공한다.   

이렇게 정립된 개념들을 예술에 적용하면, 스타일 실천자로서 예술가를 ‘주관적 천재’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공간의 ‘합리적 행위자’로 앉힐 수 있게 된다. 가령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백남준의 미학적 성취 역시 그것이 가능하게 한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발한 걸작을 생산한 광기 어린 전채가 아니라, 정확하게 예술장이라는 사회적 공간 속에서 미학적 실천의 방향성을 설정해 나간 사회적 행위자”라는 것이 백남준에 대한 그의 평가다.  

이러한 이론적 관점을 저자는 미술사, 구체적으론 전후 한국화단의 스타일장에도 적용한다. 그에 따르면 “전후 한국화단에서 벌어진 추상과 구상의 투쟁은 곧 사회공간의 정치적 영향을 스타일장 내의 특수한 내기물을 놓고 벌어진 인정투쟁으로 변환하는 과정인 동시에 결과”였다. 기존의 비평이나 미술사 기술에서는 스타일 투쟁을 소수 선구자의 미학적 성과 정도로 바라보는 데 반해서, 저자는 스타일장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이 투쟁이 포괄적 스타일 네트워크 사이의 투쟁이라는 걸 보여준다. 현대미술가협회 같은 단체가 사회 변동에 대응하여 스타일장에서 변환의 주체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군의 비평가들이 추상스타일에 미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옹호했다. 전후 스타일 전쟁이 구상에 대한 추상의 승리로 귀결됐다면, 그것은 “추상 네트워크 내에 수렵되는 자원의 범위와 강도, 효율성이 구상스타일의 그것을 압도했음을 의미”한다. 

스타일과 함께 저자의 예술사회학을 지탱하는 키워드는 ‘일상’이다. 그는 미술을 일상적 실천이자 일상적 놀이로 본다. 이 놀이의 공간은 미술관, 화랑, 작업실, 강의실 등이며, 작가, 큐레이터, 미대 교강사, 문화부 기자, 미술사가, 평론가, 미대재학생, 관객, 독자들이 그 놀이의 참여자들이다. 미술이 곧 일상적 실천이기에 일상과 미술의 구분은 환영이다. 그럼에도 이 환영과 일상/예술이라는 이분법이 유지되는 주된 근거로 저자는 미술관의 존재를 든다. 일상과 미술은 원래 한 몸이지만 미술관이 이 한 몸에 작위적인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육체와 두뇌(기획력)을 갖춘 ‘위험한 실천자’로서 미술관은 제도적 권위와 자본주의 논리의 작동을 대리하며 아주 특별한 어떤 것들만 예술로 규정한다. 다분히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일상과 미술 사이에 미술관이 쌓은 거북스런 경계를 낮추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술관의 존재 자체를 되묻게 하는 ‘게릴라적인 미술관’이 그의 대안인데, “이건 물론, 미술사와 미술이론에 정통하면서도, 일상에 투철한 게릴라들이 잔뜩 힘이 들어간 딱딱한 미술관 제도에 틈입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의문이 없는 건 아니다. 일상에 투철하면서도 미술사와 미술이론에 정통한 ‘일상인’은 가능할까, 라는 것이다. ‘사회학을 유혹하는 예술’에 사회이론으로 대응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독자를 유혹하는 사회학’이려면 일상과 딱딱한 논문 스타일의 경계를 좀 더 낮추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11.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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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307 2011-03-0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현우님이 로자였군요..기자님한테 연락받고 <공간>지를 구입해서 잘 보았습니다..보잘 것 없는 책을 자세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로자님에 관한 얘기는 여러사람한테서 듣고 있었습니다..제 책에 대한 몇가지 반응에 대한 반론은 따로 준비하고 있습니다..여기는 제목에 대한 로자님의 지적과 관련해서 몇가지 생각만 적어 볼려구요..



"저자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가를 유혹하는 것은 이제 사회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예술가들이 창조해낸 예술보다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이다.”이라고 서두에서 미끼를 던지는데, 정작 그렇다면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인 사회가 예술보다도 더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맞을 것이다. 게다가 예술과 사회란 이분법을 지양하자는 것이 저자의 또 다른 제안이고 보면 제목만으론 초점이 모호하다.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란 부제도 마찬가지다.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저자가 동원하는 핵심적인 이론이긴 하지만 책의 구성은 광범위한 ‘문화읽기’보다는 ‘미술읽기’에 한정된다. 미술과 미술사, 미술관, 미술시장 등을 폭넓게 다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첫째는 로자님이 지적하신 '사회' 개념에 관해서인데요..제가 이 책에서 말씀드리려는 '사회'란 두가지입니다..동시대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당대 한국의 사회공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만..제가 앞 부분 논고에서 강조한 사회는 사실 부르디외적 관점에서 촛점이 되고 있는 '장'입니다..장은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입니다..'예술장'..'스타일 장'..'장으로서의 예술계'가 그것들입니다..동시대 예술의 상황은 곧 장의 논리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그러려면..일단..이 개념부터 규정해야 한다는 판단입니다..물론..한국의 모순적 사회공간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데..이건 참 난해한 일입니다..로자님의 말처럼 사회공간에 작동에 관심을 둔다면..이 책은 그저 사회비평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구요..'사회'를 포괄적인 당대사회공간으로 규정하더라도 그것이 예술적 실천과 관련하기 위해서는 '장'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될 듯 합니다..



둘째는 '미술읽기'가 더 낫다는 지적과 관련한 것인데요..이 역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지만..제 입장은 '문화읽기'가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사실 '미술'이란 단어는 정체조차 의심스러운데요..영어로 번역하면 art, 혹은 fine art 일텐데..굳이 예술과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그렇다면..굳이 앞서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에 이미 반영된 단어를 중복해서 쓸 이유는 없을 듯 합니다..제가 '미술읽기'보다 '문화읽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첫째는 기존의 미술 개념에 제도는 포함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미술개념이란 좀 더 순수한 예술적 실천과 그 결과물에 한정되어 사용됩니다..대략 미술의 역사란 작품, 작가, 스타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제가 이 책에서 다루는 제도로서의 장의 요소들은 그저 '미술'개념에 한정되기 어렵다는 판단입니다..반면, 문화는 '이념'의 역사이면서 '제도'의 역사라는 점에서 좀더 포괄적인 설명범위를 가지고 있구요..둘째..제가 미술보다 '문화'를 선호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제가 설명하려는 내용들이 직접적으로 예술이라는 좁은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궁극적으로는 장-아비튀스에 대한 분석이 로자님이 전공하시는 문학이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문화사회학이라는 정체성 아래서 예술을 다루지만..예술이 문화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있지 않거든요..



아..마지막으로..문체에 관련한 지적에 관해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이 책은 '논고', '에세이', '작가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로자님의 서평은 주로 '논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반면..에세이나 작가론은 조금 더 쉽게 읽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논고편은 말 그대로 논고로 읽혔으면..합니다..그저 막연한 흥미가 아니라..'스타일' '미술관' '한국현대미술사' '실천' 등 기존 예술학의 지평을 참조하면서 또 다른 설명을 요구하는 문제에 접근할 때 아무래도 논고의 형식이 더 낳지 싶습니다..물론..'논고' 뿐 아니라 '에세이'나 '작가론' 역시 그리 쉽게 읽히는 글쓰기는 아닙니다만..그런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미술시장의 활성화와 비평의 자율성'이란 에세이 항목에서 미약하지만..조금 피력해 두었습니다..



로자님의 서평을 받은 일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만..제가 이 책을 통해 평가받고 싶은 내용을 다소간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도 다소간 있습니다..특히 서평의 몸통에 해당하는 이 책의 내용에 관해서 정작 아무말씀도 않으셨더라구요..사실..저자로서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이었고..반응을 듣고 싶은 부분들이기도 합니다..혹여 일부러 지적 않하셨을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기회가 되면..그런 점들에 관해 로자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이거 서평을 서평한거 같아 죄송합니다만..저도 앞으로 로자님의 저작들에 관해 관심을 갖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로쟈 2011-03-09 07:39   좋아요 0 | URL
서평 때문에 책까지 구입하셨군요.^^; 제목과 관련해 말씀드렸던 건, '사회 속의 예술'로 충분한데, '예술을 유혹한 사회학'이란 건 좀 모호하다는 거였구요(사회학을 주제로 삼은 예술이란 뜻으로 들리니까요), '문화읽기'에 대한 지적은 부르디외의 방법론이 문학이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겠지만, 책에서는 미술에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포괄적인 부제다 싶었습니다(제목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염두에 둔다면요). 아, 문체에 대한 지적은 단순히 책의 주력이 논고(논문)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교양서라기보다는 학술서 범주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인상을 적은 것이구요, '몸통'에 대해 제가 다루지 못해 죄송합니다.^^; 12매란 분량은 한두 가지 관심사만 다루는 것 정도로도 다 차기 때문에요. 개인적으론 단토와 부르디외를 비교한 장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본격적인 서평은 미술전문잡지나 학술지 등에서 다뤄지길 기대해봅니다...

kdi307 2011-03-1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엥..'사회속의 예술'으로 충분하다뇨..이거 참..'책을 읽을 자유'의 저자가 그런 말씀을 하시다뇨..전 그냥 '로자의 책읽기'보다 낫던데요..제목에 관해서 더 부연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저도 몇군데..서평을 써야할 입장이어서 요즘 좋은 서평이 무엇인지 생각하고있습니다..로쟈님의 작업도 참조하고 있구요..그런데..정말 힘든 일이더군요..저자의 의도에 다가서면서도 어느지점에선가 독자의 입장에서..재구성하고 또다시 의문해야하고..짧은 글일수록 더 많이 고민해야 하고..

로쟈님께도 저자와 독자를 유혹하는 서평 기대해 봅니다..저자는 서평의 가장 중요한 독자 가운데 하나거든요..

좋은 의견 감사드리구요..기회가되면 인사드리고 '단토 대 부르디외'에 의견도 듣고 싶네요..

참..잘 알고 계시겠지만..<공간>은 단순한 건축잡지가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한국 문화예술 분야 최고권위의 전문지입니다..기회가 되시면 메타서평론..혹은 서평의 논리와 윤리에 관한 참조할 만한 전문서를 써 주시면 서평을 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많을 것 같아요..이 분야에는 아직 실천적인 전문서들이 많지 않은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1-03-11 11:23   좋아요 0 | URL
흠, '사회 속의 예술'은 책의 표지에 영어제목처럼 붙어 있는 'art in SOCIETY'를 옮긴 건데요. 부정확한(불충분한) 번역인가요?

kdi307 2011-03-1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정확한 것은 아니지만..제 의도를 전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냥 카피 정도로 보아주셨으면 합니다..'사회 속의 예술'에는 SOCIETY를 대문자로 놓고..art를 소문자로 놓은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거든요..공식적인 제목에도 뺐구요..사회란 예술 밖에 있기도하지만(사회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예술 속에 있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예술장이란 의미에서) 사회학은 예술 안과 밖에서 작용하는 사회를 포착해야 한다는 생각이구요.."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은 생각보다 특이한 제목은 아닙니다..적절하게 괄호치기를 하면..결국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고 결국 "책은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의 결과이므로 자연스레 ‘예술사회학’으로 분류된다"는 로자님의 지적과 일치합니다..다만..그 제목이 기존의 예술학이나 사회학의 지평에서 그닥 설명되지 않았던 지점에 이 책을 두려는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뿐 이죠..유혹이라는 부분에서도 잠시 말씀을 드리자면..예술이 더이상 사회와 분리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예술학은 사회학적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고..그런 의미에서 예술학 종사자들에게 이 책의 내용이 도움(일종의 유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예컨대 '단토를 부르디외적으로 독해할 때 단토가 단토 자신보다 더 단토스럽게 된다'는 생각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단토에 관심을 갖는 예술학 전공자들에게 단토에 대한 부르디외적 독해는 일종의 유혹이거나 최소한 참조할만한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결국 제목에 대한 비판의 관건은 예술현상에 대한 저의 부르디외적인 독해가 과연 동시대 예술상황을 설명하는데 유익한 것인가의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고..자연스럽게 제목 자체 보다는 내용에 대한 논의와 검토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라진 모나리자와 그림 너머에 있는 것

<공간>(1월호)에 실은 북리뷰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택배 사고로 잡지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게 됐는데, 그냥 초고를 옮겨놓는 것이다(편집과정에서 약간 수정됐을 수 있다). 책은 지난해 '올해의 책'의 하나로 꼽기도 했을 만큼 흥미로웠다.   

 

 공간(11년 1월호) 모나리자 훔치기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책의 제목이 <‘모나리자’ 훔치기>인 것은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실마리로 삼고 있어서다. 실제로 1911년 8월 21일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걸려 있던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던 사건이다. 정기휴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나서야 그림이 사라진 사실이 알려졌고 대규모 수사팀이 차려졌다. 기자회견이 열리고 모든 신문의 1면이 이 ‘상상할 수 없는’ 사건으로 도배됐다. 사건이 연일 화제가 되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한 그림이 일약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재탄생하게 됐고, 사람들은 구름처럼 루브르로 몰려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군중들이 보고자 한 것은 <모나리자>가 아니라, 그것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이었다. 구경꾼의 대부분은 이전까지 <모나리자>를 본 적이 없을 뿐더러 아예 루브르에는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즉 그들은 예술작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기에 없기 때문에 보러갔다! 이것은 미술사의 해프닝일까? 혹은 새로운 대중문화 현상일까? 이 도난사건은 2년 뒤에 이탈리아 출신의 평범한 노동자 페루지아가 범인으로 체포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라캉주의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이 사건이 미술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그림을 보는 이유에 대해 뭔가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 희대의 사건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미술작품과 그것이 점하고 있던 텅 빈 공간 사이의 분열이 갖는 의미를 말해준다. 작품이 비어 있다고 그냥 텅 빈 공간이 아니다. “미술작품이 기거하는 곳은 특별하고, 신성한 공간, 즉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미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모나리자>가 사라진 공간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이 뭔가 ‘착각’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미술작품의 한 본질적 구성요소에 관심을 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결부돼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핵심적인 경험 중의 하나는 상실의 경험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금지에 의한 어머니의 상실, 교육의 규제에 의한 육체적 쾌락의 상실, 말과 언어 습득에 내재된 다양한 상실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은 자연스레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은 그 욕망 추구를 상징화하고 정교화할 수 있는 장소이며 예술가들은 그 욕망의 순수성을 끝까지 고집하는 자이다. 흔히 ‘승화’라고 불리는 그런 상징화·정교화의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 미술의 대상은 그것 자체로는 재현될 수 없으며 항상 그것 너머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재현 불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욕망하는 궁극적인 대상이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작품과 그것이 차지하는 장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존재한다. 새로운 작품이 항상 진품성에 대한 의심을 유발하는 이유다.  

하지만 예술적 승화의 ‘실패’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자면 우리는 ‘승화’가 아니라 ‘승화시키기’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중요한 것은 완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다. 이런 승화이론을 입증해주기라도 하듯이 미술사에는 “그림을 끝내지 않기 위해 바쁜 화가들”도 많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도 미완성이란 평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미술사가 바사리는 그가 “4년이나 그렸지만 여전히 끝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많은 작품을 시도했지만 완성시키지 못한 것이 부지기수였다. 아예 “레오나르도는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했지만 어떻게 그림에서 손을 떼어야 할지는 모르는 듯했다”고 평한 동시대인이 있을 정도다.   

 

모던아트의 가장 유명한 미완성 <큰 유리>를 만든 마르셀 뒤샹도 ‘악명 높은’ 사례다. 최소 8년 동안 작업을 했지만 뒤샹은 거의 고의적으로 이 작품의 완성을 미루었으며, 작품은 죽기 몇 해 전에 전시되었을 때도 여전히 미완성 상태였다. 심지어 그는 <큰 유리>의 유리판이 운반 도중 파손됐을 때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자기 작품이나 모던아트 일반에 대해 조롱하면서 자신에 대한 모든 규정에서도 벗어나려고 했던 뒤샹의 관심사는 오히려 “예술작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였다. 그는 자신과 작품 사이의 연루까지도 거부하고자 처음 만든 레디메이드들에 ‘마르셀 뒤샹 작(by Marcel Duchamp)’이 아니라 ‘마르셀 뒤샹으로부터(from Marcel Duchamp)’라고 서명했다. 그에게 ‘작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조과정’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렇게 미술계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고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뒤샹은 마치 살아있는 텅 빈 공간과도 같았다.”  

한때 미술이론 분야에서 열렬히 수용되었다가 지금은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지만 미술과 시각에 관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은 저자의 주장대로 여전히 많은 것을 제공해주며 깨닫게 해준다. 승화의 의미와 미완성의 의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미술은 결국 의사소통에 관한 일이 아니라 만들기에 관한 일”이라는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게 해주는 것은 그 중 하나다.  

11. 02. 03.  

P.S. 지난 12월에 서평을 쓰면서 구해놓은 책은 베르나르 마르카데의 평전 <마르셀 뒤샹>(을유문화사, 2010)이다. 오래 전에 뒤샹에 관한 자료를 좀 뒤적인 기억이 있는데, 다시금 관심을 갖게 돼서다. 이번엔 레디메이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업방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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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책과 서가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해온 임수식 작가의 전시회 '책가도'가 11월 3일(수)-11월 14일(일)까지 종로의 갤러리진선에서 열린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들어가 있는 사진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어서 개인적인 인연도 없지 않다. 내주 오후엔 오랜만에 잠시 전시회 구경을 가보려 한다. 간단한 단신을 스크랩해놓는다. 

아시아투데이(10. 10. 28) [투데이갤러리]임수식의 '책가도060' 

임수식 작가의 작품에는 색깔과 크기가 다른 책들이 다양한 형태로 책장에 꽂혀져 있다. 그가 꼼꼼하게 그려낸 '책가도' 한 개인이 산발적으로 읽은 책들이 결국 현재 그의 모습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책에 대한 의인화를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책장에 가로놓인 책들은 장기간 누워서 잠에 빠져있기도 하고, 고단하다는 듯 기대어 서서 피곤함을 내비치기도 한다. 어떤 책들은 숨 막힐 듯 꽉꽉 붙어사는 한편, 호화롭게 한적함을 만끽하는 책들도 있다. '책가도'의 책들은 인간 생애의 다양한 단면을 선보인다. 갤러리진선(02-723-3340)  

10.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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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2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2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0-11-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알겠습니다...그렇군요...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귀가길에 들른 서점에서 '테이크아웃 클래식' 시리즈로 다시 나온 고골의 <외투>(생각의나무, 2010)와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생각의나무, 2010), 그리고 조정래 장편소설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 2010)과 윤대녕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푸르메, 2010) 등과 함께 손에 든 책은 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새물결, 2010)이다(당초엔 <인권의 철학>(새물결, 2010)까지 얹으려 했으나 책값이 너무 비쌌다. 대신에 지만지 고전선집 두 권을 추가했다). 다리언 리더는 몇달 전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가 '대리언 리더'란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는 바로 그 저자다. 영국의 라캉주의 정신분석가. 책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번역된다는 소식도 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출간은 뜻밖이다. 책은 목차도 보지 않고 계산을 치렀는데, 마침 리뷰기사가 올라와 있기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0. 10. 09) 그림의 ‘표면’이 아니라 그림의 ‘이면’을 봐라    

우리가 미술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을 더듬어보자. 미술이란? 아름다운 것, 새로운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것, 현실을 재현하는 것(구상), 작가의 자유연상을 옮겨놓는 것(추상), 그럼으로써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 그래도 뭔가 조금 부족하다. 고대 동굴벽화로부터 피카소의 큐비즘까지 미술사를 관통한 근본적인 원리는 무엇일까? 이 책의 해답은 유아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언어와 법이 지배하는 상징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그 뒤에 남겨진 욕망, 무의식, 공허의 자리에 들어선 대체물이라는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듯이 이 책은 정신분석이론의 관점에서 미술을 정의하려 시도한다. 그런데 저자가 미술사가가 아닌 정신분석가임을 감안하면 미술사를 설명하기보다는 난해한 정신분석이론을 미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본래 의도일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다리안 리더는 라캉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슬라보예 지젝과 더불어 라캉 이론을 대중문화와 고전의 사례에 적용하는 재기발랄한 글쓰기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도난사건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사건의 전말부터 살펴보자. 1911년 8월21일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걸려있던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날은 미술관의 정기휴일이기도 해서 그림이 사라진 사실은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알려졌다. 루브르에는 즉각 60명이 넘는 경찰수사본부가 차려졌고 언론은 희대의 미술품 도난사건을 1면에 도배했다. 이전까지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이 그림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심지어 많은 관람객이 한때 그림이 걸렸던 빈벽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유명해진 그림은 초콜릿상자와 우편엽서, 간판에 등장하면서 불멸의 작품이 됐다. 


루브르 미술관에 있던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그림이 있던 텅 빈 자리를 보려고 몰려든 군중들.

이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 너머의 빈벽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라진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효과와 관련이 있다. 평소 거들떠보지 않던 물건이 잃어버린 이후에야 아쉬워진다. 부모나 연인의 진가를 알아차리는 것도 그들과 이별한 다음이다.

좀더 정신분석적인 용어로 설명해보자. 프로이트는 문명 안에 들어가려면, 즉 인간이 되려면 신체의 일부(성기)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눈썹, 손가락, 귀 등 신체의 세부를 추가하면 할수록 칭찬을 받지만 그 그림에 성기를 그려넣는 순간, 어른들의 반응이 썰렁해지는 예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억압되는 것은 쾌락의 욕망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잔여물을 성적 본능이라고 보았지만, 라캉은 ‘물(物)’이라고 부르는 텅빈 장소로 가정했다.

그렇다면 문명의 세계(상징계)에 진입하는 것과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양육자(엄마)와의 시선 교환이 중요하다. 아기는 스스로 보기 전에 누군가에게 먼저 보여진다. 엄마의 시선을 느끼고 반응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형성한다. 타인의 시선이 내 시선 안에 들어와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라기보다 타자가 보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여기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기 위해 일종의 스크린을 친다. 슈퍼맨이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클라크 켄트라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 필요한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를 연기하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의 일상은 스크린 앞에서 그럭저럭 영위되지만 이 스크린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저자는 사라진 ‘모나리자’ 뒤로 나타난 빈벽을 라캉이 말했던 ‘물’에 비유하면서 스크린으로서 회화의 성격을 화가 라우리나 피카소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라우리는 공장지대를 그린 무난하고 유쾌한 그림으로 알려졌으나 사후 끔찍한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10대 소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숨겨진 작품 속에서 소녀들은 도끼로 목이 잘리거나 칼로 난자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대해서도 색다른 설명이 주어진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을 보면서 공포심을 느꼈고 그것을 가리는 방패로써 복수의 시점을 가진 큐비즘의 대표작이 나왔다는 것이다.

회화는 라우리나 피카소의 경우처럼 상징계 뒤안의 ‘물’과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것인 동시에, 관객에게는 ‘물’의 존재를 일깨운다. 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이야기는 그림의 본질을 알려준다. 제욱시스가 포도를 너무나 진짜처럼 그려서 새들이 몰려들게 하자 파라시오스는 그를 불러 자신의 걸작을 가린 베일을 걷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제욱시스는 베일 자체가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제욱시스의 승리는 베일이 미술의 본질임을 말한다. 베일 뒤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사람들은 사용가치에 비해 턱없이 비싼 그림을 마구 사들인다.

다시 ‘모나리자’ 도난사건으로 돌아가보자. 2년 뒤에 잡힌 범인은 이탈리아 출신의 노동자 빈첸조 페루지아였다. 루브르 미술관에 페인트칠을 하러 왔던 그는 그림을 액자에서 떼어내 외투 밑에 감추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벽장에 숨겨놓았다가 팔기 위해 내놓는 순간, 한 화상의 신고로 붙잡혔다. 그러나 그의 부적절한 행동은 ‘모나리자’의 진가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림이 갖는 스크린으로서의 기능을 알려주는 적절한 사례를 제공했다.(한윤정기자) 

10. 10. 08. 

 

P.S. 다리안 리더의 다른 책으론 심신문제와 우울증을 다룬 것이 눈에 띈다. 우울증에 관한 책으론 조지 보나노의 <슬픔 뒤에 오는 것들>(초록물고기,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 '상실과 트라우마 그리고 슬픔의 심리학'이 부제로 돼 있다. 어제 주문해놓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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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2-03 14:00 
    <공간>(1월호)에 실은 북리뷰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택배 사고로 잡지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게 됐는데, 그냥 초고를 옮겨놓는 것이다(편집과정에서 약간 수정됐을 수 있다). 책은 지난해 '올해의 책'의 하나로 꼽기도 했을 만큼 흥미로웠다. 공간(11년 1월호) 모나리자 훔치기“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책의 제목이 <‘모나리자’ 훔치기>인 것은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실마리로 삼고
 
 
헌내 2010-10-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리안 리더라..
브루스 핑크, 지젝하고 3대 라캉 연구자로 꼽히는 사람으로 알고있는데...

라캉 만화책도 썼더군요..^^;

로쟈 2010-10-09 08:05   좋아요 0 | URL
'대중성'이 강점이죠...

카스피 2010-10-0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흔히 모나리자하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 작품만을 생각하는데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거외에도 몇 작품이 더 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10-10-10 09:26   좋아요 0 | URL
패러디도 무척 많더군요.^^